윤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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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윤고려는 1891년 김윤정의 딸로 태어나 미국과 일본에서 유학한 후 교육 사업에 헌신한 인물이다. 윤치오의 공개 구혼에 응해 결혼한 후 양원여학교 영어 교사 및 유지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양심여학교 창립에 기여했다. 양심여학교와 양원여학교 교장을 지내다 1913년 사망했으며, 1915년 두 학교는 동덕여학교에 흡수되었다. 그녀는 여성 교육에 헌신한 인물로 평가받으며, 1899년 귀국 후 양장을 착용하여 여성 양장 착용의 효시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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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도 김씨 - 김정호
김정호는 조선 후기의 지리학자이자 지도 제작자로, 대동여지도를 비롯한 여러 지도와 지리지를 제작하여 조선 시대 지리학 발전에 기여했으며, 그의 업적을 기려 소행성 95016 김정호가 명명되었다. - 청도 김씨 - 김윤정 (1869년)
김윤정은 대한제국 시기 외교관으로 활동하며 주미공사관에서 요직을 지냈으나 이승만과의 갈등 이후 귀국하여 군수와 부윤을 역임했고, 한일 병합 후에는 조선총독부 참여관과 도지사를 지내며 친일 관료로 활동한 인물로, 친일파 명단에 포함되었다. - 일제강점기의 교사 - 윤봉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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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훈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교육자, 기업인으로, 오산학교를 설립하여 인재 양성에 힘썼으며, 신민회 활동, 3·1 운동 참여 등 독립운동에 헌신한 인물이다.
윤고려 |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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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 파평 윤씨(坡平 尹氏) |
호 | 탄옹(炭翁) |
자 | 자강(子剛) |
생애 | |
출생 | 1296년 |
사망 | 1388년 |
묘소 |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 눌노리 |
가족 관계 | |
아버지 | 윤척(尹陟) |
어머니 | 밀직부사(密直副使) 한강(韓康)의 딸 |
부인 | 정부인(貞夫人) 이씨 |
아들 | 윤곤(尹坤) |
손자 | 윤희(尹禧) |
증손 | 윤번(尹璠), 윤향(尹向) |
관력 | |
주요 경력 | 문과 급제 전법판서 (典法判書) 밀직사사 (密直司事) 첨서밀직사사 (簽書密直司事) 정당문학 (政堂文學) 문하시중 (門下侍中) 벽상호군 (壁上護軍) |
최종 관직 | 문하시중 (門下侍中) |
2. 생애
1891년 김윤정의 딸로 태어난 윤고려는, 일찍이 아버지를 따라 미국으로 건너가 워싱턴의 여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하였다. 이후 일본으로 유학, 도쿄 여자학원을 졸업하고 귀국하여[7] 교육사업에 전념하였다. 1909년 노병희의 《여자수신교과서》 교열에 프라이 교수, 이화학당 출신 예몌례 황[8] 등과 함께 참여하였다.
윤고려는 양원여학교 영어교사이자 후원회인 양원여학교유지회 회장이었다.[6] 남편 윤치오는 재혼한 아내 윤고려가 양원여학교 영어 교사로 일하는 것을 적극 지지하였다.[6] 1908년 11월 초 윤고려는 창산군 부인 이씨와 함께 양심여학교 발기회를 조직, 양심여학교 창립에 기여했다.[6] 11월 11일 양심여학교 개교에 윤치오는 자금을 지원했고[6], 재단 고문으로 위촉되었다.[6] 이후 윤고려는 양심여학교와 양원여학교 교장을 역임하였다.[6]
한일합방 후에도 양원, 양심여학교 교장과 영어교사 직을 맡았으나, 1913년 12월 28일 병으로 사망하였다.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으며, 사후 양심, 양원여학교는 1915년 3월 동덕여학교(동덕여대의 전신)에 흡수되었다.
2. 1. 초기 활동
1891년(고종 28년) 김윤정의 딸로 태어났다.일찍이 친정아버지 김윤정을 따라 미국으로 이주, 미국 서울 워싱턴의 여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하였다. 그 뒤 일본으로 유학하여 도쿄 여자학원에 입학하고 졸업한 뒤 귀국[7], 교육사업에 전념하였다.
1909년(융희 3년) 노병희의 《여자수신교과서》를 교열할 때, 프라이 교수 및 이화학당 출신인 예몌례 황[8] 등과 함께 교과서 교열에 참여하였다.
2. 2. 교육 활동
그는 양원여학교의 영어교사로 초빙되었고, 후원회인 양원여학교유지회의 회장을 맡기도 했다.[6] 남편 윤치오는 공개 구혼으로 재혼한 후처 윤고려가 양원여학교의 영어 교사로 교단에 서는 것을 후원했다. 당시 주변의 편견과 맏며느리라는 위치를 들어 윤고려를 중상비방하는 이들이 있었으나 윤치오는 오히려 아내 윤고려를 신뢰하고 적극 지지하였다.[6] 이후 윤고려는 유지와 정관계 인사들의 부인들을 설득하여 1908년 11월 초에 창산군 부인 이씨와 함께 양심여학교 발기회를 조직하고, 양심여학교를 창립하는데 기여했다.[6] 창산군의 어머니이자 경원군 이하전의 처 서대혜는 이들의 뜻을 이해하여 양심여학교의 재정을 지원하였다.[6]11월 11일 양심여학교가 개교되자 윤치오는 양심여학교의 개교, 자금을 후원하였다.[6] 11월 11일 윤치오, 유길준, 윤치호 등을 양심여학교 재단 고문으로 위촉되었다.[6] 이후 양심여학교 교장, 양원여학교의 교장을 역임하였다.[6]
2. 3. 사망
한일합방 이후에도 양원여학교의 교장과 영어교사, 양심여학교 교장 직을 맡았다. 그러나 1913년 12월 28일 병으로 사망하였다. 사망 당시 슬하에 2남 1녀가 있었다.그가 사망하고 양심여학교와 양원여학교는 1915년 3월 동덕여학교(동덕여대의 전신)에 흡수되었다.
3. 사후
4. 평가
김고라는 '외교관이었던 아버지 덕에 일본ㆍ미국에서 여학교를 마친 보기 드문 여성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6] 국민보는 김고라의 서거 기사에서, 여성 교육 활동에 열심이었고 경성에 있는 양심·양원 두 여학교 교장으로 재직 중 불행히 요절하였다며 아쉬워했다.[7]
5. 기타
1899년 외국 생활에서 돌아온 후 양장을 착용했는데, 이는 한국 여성 양장 착용의 효시로 여겨진다.
6. 가족 관계
참조
[1]
뉴스
http://newslibrary.n[...]
1983-11-17
[2]
문서
1908년 이재극이 설립하였다.
[3]
웹인용
이경찬의 국사교실
https://web.archive.[...]
2010-10-22
[4]
문서
다른 이름으로 윤고라(尹高羅), 김고라(金高羅)라는 이름도 있다.
[5]
뉴스
20세기 한국의 풍물 풍속사⑫ 옷 - '미니스커트 단속' 그 때를 아시나요
http://www.donga.com[...]
《뉴스플러스》
1999-04-01
[6]
웹사이트
근대여성
http://newwoman.cult[...]
[7]
간행물
국민보 제41호
1914-01-07
[8]
서적
이화100년사, 1권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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