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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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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윤치오는 1869년 충청남도 아산에서 태어난 개화기 인물로, 윤영렬의 아들이자 윤치호의 사촌 형이며 윤보선의 큰아버지이다. 그는 일본 유학 후 관료, 교육 활동을 했으며, 대한제국 말기 국문 연구소 위원장, 흥사단 간부 등을 역임했다. 한일 병합 이후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찬의를 지냈으나, 빚 문제로 사퇴한 후 사회 활동에 참여했다. 그는 여성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으며, 서예, 골동품 수집을 했다. 윤치오는 1950년 사망했으며, 가족 관계로는 한국 최초의 병리학자인 윤일선, 제4대 대통령 윤보선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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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치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윤치오
이름윤치오
한글윤치오
한자尹致旿
로마자 표기Yun Chio
문화어 표기륜치오
아호동암(東庵)
자정(子正), 자형(子亨)
창씨명이토 지오(伊東 致旿)
출생
출생일1869년 9월 10일
출생지충청도 아산군 둔포면 신항리
사망
사망일1950년 12월 22일
사망지경상남도 부산시 초량동
국적
직업
종교
가족
아버지윤영렬
어머니한진숙
배우자이숙경, 윤고려, 현송자
자녀슬하 7남 4녀
친척윤치호 (사촌형)
윤치소 (동생)
윤보선 (조카)
윤치영 (동생)
한진창 (외삼촌)
경력
직책중추원 부찬의
소속 국가대한제국

2. 생애

윤치오는 1869년 9월 10일 충청남도 아산에서 아버지 윤영렬과 어머니 청주 한씨 한진숙 사이에서 9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사촌 형은 개화파 정치인 윤치호였고,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을 지낸 윤보선은 그의 조카였다.[3] 5세 때부터 한학을 공부해 신동으로 불렸으며, 할아버지 윤취동에게 사서삼경을 배웠다.[3]

1894년 갑신정변 당시 백부 윤웅렬과 사촌 형 윤치호가 개화당에 협력한 일로 윤치오도 개화파로 지목되자, 배편으로 일본에 망명했다. 일본에서 후쿠자와 유키치의 문하생으로 수학하다가 게이오의숙에 입학했다.[3] 1895년 9월 6일 중추원 참사관 겸 일본특파대사에 임명되었고, 10월 의화군 이강의 특파대사 수행원으로 일본 도쿄에 체류했다. 1896년 12월 동생 윤치성과 함께 게이오 의숙을 졸업하고, 동경외국어학교에서 조선어 교사로 일했다.[4]

1897년 귀국하여 대한제국에서 문관전고소 위원[5], 학부 학무국장, 일본 유학생 감독 등을 역임했다. 1907년 8월 국문 연구소 위원장에 취임했다. 1908년 기호흥학회 평의원, 서북학회 회원으로 활동했고, 관립·사립학교연합운동회 대회장에 선출되었다. 군인구락부에 무도기계체육부를 설립하여 활쏘기, 승마, 유도, 격검 등을 보급했다. 공업전습소 학생들의 공업연구회 창립에 참여하고 기관지 《공업계》의 필진으로 활동했다. 1909년 교육계몽단체인 강구회 간사, 이토 히로부미 관민추도회 포진담임위원을 맡았다. 1910년 중앙학교 제4대 교장을 지냈다.[7]

1905년 을사조약 체결 이후 교육과 계몽을 통한 실력 양성을 강조했다. 1906년 대한자강회에 가입했고, 정재홍의 장례식을 지석영 등과 주관하고 그를 기리는 취지서를 지었다.[5] 1907년 유길준흥사단에 가입했고[7][8], 여자보학원유지회 재단 설립에 기여하고 임시 이사장을 맡았다. 1908년 5월 25일 발간된 여자보학원의 학교 학보인 《녀자지남》의 편집, 발간에 참여하였다. 같은 해 4월 여성에게도 중등 교육을 장려하기 위해 고등 여학교령 제정을 건의, 공포하게 했다. 윤고려와 재혼 후, 윤고려는 여성 교육 운동을 전개했지만,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6]

1910년 8월 대한제국 중추원 부찬의가 되었고[11], 가선대부로 승진했다. 1909년 한미흥업회사를 창립하여 발기인 겸 주주로 참여했다. 1910년 10월 한일 합방 조약 이후,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찬의에 임명되었다. 1911년부터 1915년 3월까지 중추원 찬의를 지냈다.[4][11] 조양구락부의 후원 단체인 정악유지회 재단 이사[12], 이문회 간사 등으로 활동했다. 1914년 매일신보 주최 조선진신시찰단의 일원으로 일본을 시찰했다. 1915년 3월 빚 보증 문제로 중추원 찬의직을 사직하고, 이후 공직 요청을 거절했다.

1937년 8월 조선총독부 주최 시국간담회에 참석했고,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총독부 경무국의 감시를 받았다. 1939년 11월 조선유도연합회 평의원에 선출되었고, 1941년 11월 수양동우회 사건 관련자 전원 무죄 석방으로 감시가 풀렸다. 조선총독부의 중추원 참여 권고는 사양했다. 1942년 미나미 지로 총독 송별시, 1943년 야마모토 이소로쿠 추도시를 지어 학생들과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았다.

1918년 매일신보사 주최 규슈시찰단의 일원으로 일본을 방문했다. 중앙중학교 교장을 지냈다. 1919년 3·1 만세 운동에 참여했다가 체포를 모면하고, 이후 칩거하며 흥사단 활동 외에는 은인자중하였다. 1925년 조선전기공업주식회사 감사로 선출되었다.

사후 시신은 경기도 양주군 진건면 배양리(현, 남양주시 진건읍 배양리)에 부인들과 합장되었다가, 2000년대 이후 충청남도 아산시 음봉면 원남리, 장남 윤일선 묘소 근처로 이장되었다. 동생 윤치명은 교육자로 대한제국 말기 학부 주사를 지냈다. 아들 윤일선은 의학자, 윤명선은 만주 간도성 차장, 윤왕선미국 유학 중 사망, 윤승선해군 시설감과 해병대 공병감, 윤영선미국에서 정신과 전문의로 활동했다. 둘째 동생 윤치소의 장남 윤보선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을 지냈다.

2. 1. 생애 초기

윤치오는 1869년 9월 10일 충청남도 아산에서 윤영렬과 청주 한씨 한진숙 사이의 9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사촌 형은 구한국의 개화파 정치인 윤치호였으며, 대통령을 지낸 윤보선은 그의 조카였다. 아버지 윤영렬은 지중추부사 윤취동의 차남이었고, 어머니 한진숙은 청주 한씨로, 대한 제국 때 전라도 관찰사와 경상도 관찰사, 육군 참장을 지낸 한진창의 누이였다.[3]

윤치오는 유년기에 고향 아산에서 한학을 수학하였다. 5세 때부터 한학을 공부하여 실력이 뛰어나 신동이라는 별명을 들었으며, 사서삼경을 통달하였다. 어려서는 할아버지 윤취동에게 사서삼경과 한학을 배웠다.[3]

1894년 갑신정변 당시 백부 윤웅렬, 사촌 형 윤치호가 개화당에 협력한 일로 윤치오도 개화파로 지목되자, 배편으로 일본에 망명했다. 일본 도쿄에서 후쿠자와 유키치의 문하생으로 수학하다가 1년 뒤 게이오의숙에 입학하였다.[3] 1895년 9월 6일 중추원 참사관에 임명되고, 겸직 일본특파대사에 임명되었다. 1895년 10월 의화군 이강이 특파대사가 되자 특파대사 수행원 자격으로 일본 도쿄에 체류하였다. 1896년 12월 동생 윤치성과 함께 게이오 의숙을 졸업하고, 동경외국어학교에서 조선어 교사 생활을 하였다.[4]

2. 1. 1. 출생과 가계

윤치오는 1869년 9월 10일 충청남도 아산에서 윤영렬과 청주 한씨 한진숙 사이의 9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사촌 형은 구한국의 개화파 정치인 윤치호였으며, 대통령을 지낸 윤보선은 그의 조카였다. 윤치오의 아버지 윤영렬은 지중추부사 윤취동의 차남으로, 천안의 도적을 토벌한 뒤 동학군과 안성의 도적을 토벌하고 육군 정령과 참장을 지냈다. 어머니 한진숙(韓鎭淑)은 청주 한씨로, 대한 제국 때 전라도 관찰사와 경상도 관찰사, 육군 참장을 지낸 한진창(韓鎭昌)의 누이였다.[3]

윤치오는 유년기에 고향 아산에서 한학을 수학하였다. 5세 때부터 한학을 공부하여 실력이 뛰어나 신동이라는 별명을 들었으며, 사서삼경을 통달하였다. 어려서는 할아버지 윤취동에게 사서삼경과 한학을 배웠다.[3]

2. 1. 2. 일본 유학과 개화파 활동

1894년 갑신정변 당시 백부 윤웅렬, 사촌 형 윤치호가 개화당에 협력한 일로 윤치오도 개화파로 지목되자, 배편으로 일본에 망명했다. 일본에 건너간 후 도쿄에 체류하며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의 문하생으로 수학하다가 1년 뒤 게이오의숙에 입학하였다.[3] 1895년 게이오의숙 재학 중 그해 9월 6일 중추원 참사관에 임명되고, 겸직 일본특파대사에 임명되었다. 그해 10월 의화군 이강이 특파대사가 되자 특파대사 수행원 자격으로 일본 도쿄에 체류하였다. 1896년 12월 동생 윤치성과 함께 게이오 의숙을 졸업하였다.

게이오 의숙에서 학업을 마치고 한때 동경외국어학교에서 조선어 교사 생활을 하였다.[4]

2. 2. 관료·교육 활동

1905년 을사조약 체결 이후 윤치오는 교육과 계몽을 통한 실력 양성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1906년 대한자강회에 가입했고, 같은 해 10월 일본 유학생 감독으로 도쿄에 갔다가 1907년 3월 귀국했다. 1907년 2월 동지친목회 발기인으로 추대되었고, 4월 19일 학부 학무국장이 되었다. 5월 21일 문관전고소 위원, 6월 3일 국문연구소 위원장을 겸임했다. 7월에는 문관전고소 위원과 국문연구소 소장을 겸직했고, 7월 30일 책례도감 봉금보관으로 참여하여 정3품 통정대부로 승진했다.

학부 학무국장 재직 중 1907년 11월 유길준이 창설한 흥사단에 가입했다.[7][8] 그는 부인 윤고려가 양원여학교 영어 교사로 일하는 것을 지원했다. 1908년 11월 11일 양심여학교 개교 당시 자금을 지원했고, 유길준, 윤치호와 함께 양심여학교 재단 고문으로 위촉되었다.[9] 천도교 중앙 강당 건립에 자신의 땅 1,500평을 기부하기도 했다.[10]

2. 2. 1. 관료 활동

1897년 귀국하여 대한제국 말기 문관전고소(文官銓考所) 위원[5]을 지냈다. 이후 학부 학무국장과 일본 유학생 감독을 지냈고, 1907년 8월 국문 연구소가 설치되자 국문 연구소 위원장에 취임했다.

1908년(융희 2년) 기호흥학회 평의원이 되고 서북학회에 가입하여 회원이 되었다. 5월 21일 비원에서 개최된 관립·사립학교연합운동회의 대회장에 피선되었다. 1908년 9월 무관학교 교장 이희두(李熙斗) 등과 함께 일반 국민의 체육 발전을 위하여 군인구락부에 무도기계체육부(武徒器械體育部)를 설립하는데 참여하였으며, 여기에서 활쏘기·승마·유도·격검(擊劍) 등을 가르치게 하여 이들 체육 종목의 보급과 발전을 추진하였다. 1908년 6월에는 양원여학교가 설립되자 학교에 기부금을 기탁하였다. 같은 해 9월 27일 대한제국 순종이 일본, 독일식 관료 채용 시험을 도입할 때, 학부 편집국장 어윤적(魚允迪), 학부 서기관 민건식(閔健植), 학부 비서관 이만규(李晩奎) 등 6명과 함께 문관시험보통전형위원의 한 사람으로 임명되었다.

1908년 9월 7일 공업전습소 학생들이 공업연구회를 창립, 발기할 때 참여하고 공업연구회 회원이자, 1909년 1월 28일에 창간된 공업연구회 기관지 《공업계 (工業界)》의 필진으로 참여하였다. 1909년 교육계몽단체인 강구회(講舊會) 간사로 활동했다. 1909년 11월 이토 히로부미의 죽음을 추도하는 관민추도회에 정부 측 대표로 파견되어 포진담임위원이 되었다.

1910년 중앙학교의 제4대 교장[7]을 지냈다. 7월 23일 종2품으로 승진하였다.

2. 2. 2. 교육·계몽 활동

1905년 을사조약 체결 이후 교육, 계몽을 통해 실력 양성이 필요함을 역설하였다. 1906년 대한자강회에 가입, 참여하였다. 그해 7월 1일 대한자강회 인천지회장 정재홍(鄭在洪)이 당시 이완용 내각의 궁내부대신 박영효를 육혈포로 저격, 중상을 입히고 자결하였다. 7월 6일 윤치오는 지석영 등과 정재홍의 장례식을 주관하고, 그를 기리는 취지서를 지었다.[5]

학부 학무국장으로 재직 중에도 사회단체에 관여, 1907년 11월 유길준흥사단을 창설하자 가입하여 회원이 되었다. 그 뒤 흥사단 간부[7]를 지내기도 했다.[8] 1907년 여성 학교인 여자교육회가 3천 원의 빚으로 부속학교인 여자보학원(女子普學院)이 운영난에 처하자, 윤치오는 11명의 유지들을 설득, 여자보학원의 운영비를 충당하고 자신도 일부 기부금을 내어 1907년 9월 여자보학원유지회(女子普學院維持會) 재단을 설립하였다. 그는 창립 초기 여자보학원유지회 재단의 임시 이사장직을 잠시 맡았다. 1908년 5월 25일에 발간된 여자보학원의 학교 학보인 《녀자지남》의 편집, 발간에 참여하였다. 그는 여자보학원이 1909년 2월에 여자 보명학교(輔明學校)와 통합할 때까지 보학원의 재정 후원을 맡았다. 1908년 9월 육군연성학교 교장 이희두가 기계체조 훈련기관인 무도기계체육부를 조직하는 데 동참하고, 기계체조 보급 사업의 후견인이 되었다.

그는 대한제국 최초로 여성 교육의 필요성을 주장하였다. 1908년 4월 여자에게도 남자와 같이 중등 교육을 장려하기 위하여 고등 여학교령을 진언, 제정하여 이를 공포하게 하였다. 당시까지만 해도 대한제국에서는 여성에게는 학문이 필요 없다고 인식되던 시기였다.

이후 그는 윤고려와 재혼하였다. 초창기의 자유 결혼론은 연애와 무관했다. 대신 합리성과 투명성이 최고 원칙으로서 강조되었다. 신문에 구혼 광고를 낸 후 후보자의 사진 및 제반 조건을 보고 결혼 상대를 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졌다. 청년 문관 윤치오는 이 주장에 따라 결혼 상대를 공모했고, 몇 명을 두고 저울질하다 김윤정의 딸 윤고려를 선택했다.[6]

신문에 윤치오의 배우자 물색 소식이 실린 후 윤고려 외에도 몇 명의 ‘신여성’이 후보에 지원했으며, 결국 윤고려가 최종 낙점되었다는 것이다. 윤고려외교관이었던 아버지 덕에 일본·미국에서 여학교를 마친 보기 드문 여성이었다.[6] 결혼 후 윤고려는 남편을 따라 성을 바꿔 ‘윤고라’로 불렸고, 여성 교육 운동을 전개하는 등 활발한 사회 활동을 했지만, 20대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6]

2. 3. 한일 병합과 사회 활동

1910년 8월 대한제국 중추원 부찬의가 되었고[11], 8월 27일 가선대부로 승진했다. 1910년 8월부터 9월 10일까지 경성부 북부 대안동의 사립 기호학교(私立畿湖學校) 교장을 지냈다.

1909년 6월 미국 시애틀 박람회에 자극받아 한미흥업회사(韓美興業會社)를 창립, 발기인 겸 주주로 참여했다. 그러나 1910년 10월 한미흥업회사는 문을 닫았고, 1913년 이정희 등과 함께 한미흥업회사를 다시 설립하여 판매 수익금으로 독립단체 자금을 후원하였다. 1912년 한일합방 관련자가 아닌데도 한국병합기념장을 특별히 받았으나, 1915년 빚을 갚지 못해 체포될 때 서훈을 박탈당했다. 1916년 6월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이듬해 풀려났다.

교육 및 계몽활동과 교육기관 후원이 조선총독부 학무국의 인허가 불허로 좌절되자, 서예와 골동품, 고미술품 수집으로 소일하였다. 그가 수집하여 집고당에 소장하던 미술품과 그림들은 태평양 전쟁 때와 8.15 해방 직후 상당 부분 약탈당했고, 6.25 전쟁으로 화재에 소실되었다.

1940년 해평윤씨 문중 문장(종친회장) 선출 때 유력인사였으나, 동생 윤치소에게 문장 자리를 양보했다.

2. 3. 1. 한일 병합 직후

1911년 일제의 압력으로 흥사단이 해산되었으나, 윤치오는 탈퇴하지 않았다. 이후 안창호에 의해 흥사단이 다시 부활되자, 그는 흥사단 간부를 역임하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 동안 윤치오는 교육과 계몽, 사회 사업에는 참여하였으나, 정치적인 발언은 자제하였다. 1918년 매일신보가 후원하는 규슈 시찰단의 일원으로 일본에 다녀왔다. 1919년 경성에서 3·1 만세 운동에 참여했다가 체포를 모면하였다. 이후 칩거하며 흥사단 활동 외에는 은인자중하였다. 1925년 조선전기공업주식회사 감사로 선출되었다.

2. 3. 2. 사회 활동

1910년 10월 한일 합방 조약 이후,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찬의에 임명되었다. 1911년부터 1915년 3월까지 4년 6개월간 중추원 찬의를 지냈다.[4][11] 1911년 6월 16일 조양구락부(調陽俱樂部)의 후원 단체로 조직된 정악유지회(正樂維持會)의 재단 이사가 되었다.[12] 1912년 1월 조선총독부에서 친일 유림들의 친목단체인 이문회(以文會)를 조직할 때 가입하고, 간사로 피선되었다.

그는 10년 이상 나이 차이가 나는 김윤식과도 친구로 지냈다. 그는 당시 골동품을 수집했는데, 김윤식에 의하면 '옛 집안 후예 가운데 영락하여 궁핍한 이가 많아 대대로 소장하던 보물을 꺼내 싼값에 시장에 팔아서 이리저리 옮겨지다가 해외로 흩어져 버린 것이 이루 다 헤아리지 못한다. 동암이 이것을 애석하게 여겨 큰돈을 아끼지 않고 사들였다.' 한다. 그는 골동품, 고서화, 고미술품을 수집하던 창고를 집고루(集古樓)라 하였다.

1914년 4월 매일신보가 주최하는 일본 시찰단인 조선진신시찰단(朝鮮縉紳視察團)의 일원으로 선발되어 일본을 시찰하고 귀국하였다. 그러나 지인의 빚 보증을 서주었다가 1915년 3월 사기 혐의로 체포되자 중추원 찬의직을 사직했다. 이후 일체의 공직 요청을 거절했다.

1937년 8월 조선총독부에서 주최하는 시국간담회에 참석하였고, 수양동우회 사건이 발생하자 총독부 경무국 당국으로부터 불령선인으로 의심받았다. 1939년 11월 조선유도연합회 평의원에 선출되었다. 1941년 11월에야 수양동우회 사건 관련자 전원이 무죄 석방되면서 조선총독부 경무국의 감시가 풀리게 되었다. 이후 조선총독부에서 중추원 참여 권고가 들어왔지만 모두 사양했다.

그는 시를 짓는데 재주가 뛰어났는데,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와 정무총감 오노에게 시를 지어 헌정했다. 그런데 1942년 조선총독부 총독 미나미 지로가 임기를 마치고 본국으로 소환될 때 송별시를 지었고, 1943년 11월에는 일본연합군함대 사령관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사망하자 그를 추도하는 추도시를 지었다가 학생들과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기도 했다.

2. 4. 생애 후반

1918년 매일신보사가 주최하는 규슈시찰단의 한 사람으로 참가하여 일본을 방문하고 귀국했다. 그 외에 중앙중학교 교장을 지냈다. 윤치오는 초기 조선인 일본 유학생 중 한 사람이기도 했다.

1911년 일제의 압력으로 흥사단이 해산되었으나 그는 탈퇴하지 않았고, 후에 안창호에 의해 흥사단이 다시 부활되었다. 이후 그는 흥사단의 간부를 역임하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 동안 교육과 계몽, 사회 사업에는 참여하였으나 정치적인 발언은 자제하였다. 1919년 경성에서 3·1 만세 운동에 참여했다가 체포를 모면하였다. 이후 칩거하며 흥사단 활동 이외에는 은인자중하였다. 1925년 조선전기공업주식회사 감사로 선출되었다.

3. 가족 관계

관계이름출생사망비고
증조부윤득실(尹得實)1768년1823년
증조모남양 홍씨(南陽 洪氏)1765년1816년 5월 7일
종조부윤교동(尹敎東)1786년1829년 5월 8일
종조모나주 임씨(羅州 林氏)
종조부윤우동(尹祐東)
할아버지윤취동(尹取東)1798년1863년 12월 21일
할머니고령 신씨(高靈 申氏)
할머니안동 김씨(安東 金氏)윤영렬, 윤웅렬 형제의 생모
아버지윤영렬(尹英烈)1854년 4월 15일1939년 11월 4일
어머니한진숙(韓鎭淑)1851년 3월 29일1938년 2월 18일한진창(韓鎭昌)의 누이
서모이름 미상아버지 윤영렬의 첩[14]
서모장복첨(張福瞻)1902년 1월 22일1950년 8월 3일
부인이숙경(李淑卿)1869년 8월 14일1909년 1월 25일연안 이씨, 이면익(李冕益)의 딸
부인윤고려(尹高麗)1891년 4월 14일1913년 12월 28일김윤정(金潤晶)의 딸[16]
부인현송자(玄松子)1899년 5월 16일1978년현영운배정자의 딸
백부윤웅렬(尹雄烈)1840년 5월 18일1911년 9월 22일
백모전주 이씨(全州李氏)1844년 9월 27일1936년 2월 12일이름은 이정무
백모김정순(金貞淳)1879년 3월 15일1959년 11월 16일
둘째 동생윤치소(尹致昭)1871년 8월 25일1944년 2월 20일
셋째 동생윤치성(尹致晟)1875년 4월 7일1936년 8월 11일
넷째 동생윤치병(尹致昞)1880년 7월 10일1940년 1월 24일
다섯째 동생윤치명(尹致明)1885년 음력 9월1944년 4월 21일[2][13]
여섯째 동생윤치영(尹致暎)1898년 2월 10일1996년 2월 9일
제수이병영(李丙暎)1900년1926년 2월 7일우봉 이씨, 이병도의 여동생, 며느리 이을남의 6촌 언니
이복 동생윤치정(尹致晶)1921년 11월 25일?
이복 동생윤치일(尹致日)1935년 2월 10일1985년 4월 8일
이복 제수김정숙(金貞淑)1938년 3월 10일김해 김씨, 김계준(金溪俊)의 딸
첫째 누이윤활란(尹活蘭)4남 3녀
둘째 누이윤노덕(尹老德)1889년 6월 14일1979년 11월 24일윤정숙(尹貞淑), 정동교회 최초의 여성 장로
둘째 매제이병림(李丙琳)이병도의 6촌 형, 1남 4녀
이복 여동생윤씨이름 미상
이복 여동생윤길희(尹吉喜)1924년 6월 16일1973년 6월 28일
이복 여동생윤인희(尹麟喜)1927년 1월 17일?
고모해평 윤씨(海平 尹氏)1835년1920년
고모부이원시(李源始)용인 이씨, 2남 2녀
사촌 형윤치호(尹致昊)1865년1945년 12월 9일
사촌 동생윤치왕(尹致旺)1895년 2월 17일1982년 12월 21일[20]
사촌 동생윤치창(尹致昌)1899년 3월 5일1973년 10월 1일
사촌 누나윤경희(尹慶姬)1862년1931년
첫째 아들윤일선(尹日善)1896년 10월 5일1987년 6월 22일
첫째 며느리조마구례(趙瑪玖禮)1901년 12월 14일2003년 8월 9일조영숙(趙榮淑) 또는 Margaret Young Sook Cho
둘째 아들윤명선(尹明善)1900년 9월 1일1946년 2월 11일
둘째 며느리김정자(金貞子)??[15]
셋째 아들윤왕선(尹旺善)1902년 1월1926년 8월 20일
넷째 아들윤승선(尹昇善)1904년 8월 7일1966년 7월 20일
넷째 며느리이을남(李乙南)1911년 8월 3일?이병도의 6촌 여동생
다섯째 아들윤욱선
여섯째 아들윤창선[19]
일곱째 아들윤영선(尹暎善)1922년 11월 11일의학박사, 중령
일곱째 며느리이봉규(李鳳圭)
여덟째 아들윤대선(尹日+大善)1929년 2월 23일1939년 11월 30일
첫째 딸윤시선(尹時善)1898년 5월 30일?화가, 1950년 8월 30일 납북
맏사위민원식(閔瑗植)1898년?독립운동가, 민영환의 6촌인 민영철의 셋째 아들, 1950년 8월 30일 납북
둘째 딸윤환선(尹晥善)
셋째 딸윤정선(尹晶善)1908년 7월 8일?
셋째 사위김종훈(金鐘勳)김해 김씨
넷째 딸윤융희[19]
다섯째 딸윤효선(尹曉善)1925년 4월 7일
다섯째 사위이성수(李聖洙)전주 이씨
외증조부한익상(韓益相)1767년1846년병조참판 역임
외조부한치원(韓致元)1821년1881년호는 동랑(冬郎), 부호군 역임
외삼촌한진창(韓鎭昌)1858년 1월 26일1935년 2월 2일
장인김윤정(金潤晶)1869년1949년두 번째 부인 윤고려의 친정아버지
사돈남궁억(南宮檍)1863년 12월 27일1939년 4월 5일5촌 조카 윤광선의 장인
사돈민영철(閔泳喆)1864년1912년윤시선의 시아버지이자 동생 윤치소의 아들 윤보선의 장인, 민영환의 6촌 동생
사돈현진건(玄鎭健)1900년 8월 9일1943년 4월 25일7촌 조카사위 현정건의 동생이며, 후처 현송자의 6촌 동생
사돈손정도(孫貞道)1872년 7월 26일1931년 2월 19일사촌동생 윤치창의 장인
사돈손원일(孫元一)1909년 5월 5일1980년 2월 15일사촌동생 윤치창의 처남


  • '''이병도 가문과의 관계'''


윤치오는 이병도와 사돈 관계였다. 아들 윤승선이병도의 6촌 여동생 이을남과 결혼했다. 또한 이병도 가문과는 이중으로 겹사돈 관계를 형성했는데, 이병도는 며느리 이을남의 6촌 오빠이자 동생 윤치영의 처남인 동시에 동생 윤치소와도 사돈이었다.

동생 윤치소의 넷째 딸 윤계경(尹桂卿)은 이병도의 형 이병묵(李炳默)의 아들 이재녕(李宰寧)과 결혼했다.[21] 이재녕과 윤계경은 수군절도사 이봉구(李鳳九)의 손자, 손녀였다. 동생 윤치영은 이병영(李丙暎)과 결혼했는데, 이병영은 수군절도사 이봉구(李鳳九)의 딸이자 이병도, 이병묵의 여동생이었다.

이병도, 이병묵은 윤치오의 며느리의 6촌 오빠이면서 동생 윤치영의 처남인 동시에 동생 윤치소의 사돈이었다. 동시에 이병도, 이병묵의 6촌 형 이병림은 윤치오, 윤치소, 윤치영의 매제, 매형이 된다. 윤치오, 윤치소의 여동생이자 윤치영의 둘째 누나인 윤정숙(尹貞淑)은 이병도, 이병묵의 6촌 형 이병림(李丙琳)과 결혼했다.

  • '''민영휘 가문과의 관계'''


대한민국 최초로 올림픽 승마 종목에 출전한 민병선(閔丙瑄)과 사돈이 되었다. 민병선(閔丙瑄)은 민영휘의 손자로, 그의 딸 중 한 명이 윤치오의 손자 중 한 명과 결혼했다.

4. 평가

친구 김윤식은 윤치오가 다방면에 지식이 있었고, 옛 도를 좋아했다고 평가했다. 김윤식은 "내 친구 윤동암(尹東庵)은 박학하고 옛 도를 좋아하는 선비이다. 평소에 좋아하는 것이 없지만 유독 서화와 골동품을 목숨처럼 좋아한다."고 말했다. 한편 사촌 형 윤치호는 윤치오의 허영심을 비판했다. 윤치오는 유교, 불교, 기독교 모두 좋아한다 했는데, 막대한 빚을 떠맡게 되자 윤치호는 이 무엇도 그를 구제해주지 못한다고 지적했다.[1]

5. 기타

1937년 8월 조선총독부에서 주최하는 시국간담회에 참석하였고,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총독부 경무국 당국으로부터 불령선인으로 의심받았다.[9] 1939년 11월 조선유도연합회 평의원에 선출되었다.[9] 1940년 해평윤씨 문중 문장(종친회장) 선출 때 유력인사였으나 동생 윤치소에게 양보했다.[9] 1941년 11월 수양동우회 사건 관련자 전원이 무죄 석방되면서 조선총독부 경무국의 감시가 풀렸다.[9] 이후 조선총독부의 중추원 참여 권고를 사양했다.[9]

시를 짓는데 재주가 뛰어났던 그는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와 정무총감 오노에게 시를 지어 헌정했다.[9] 1942년 조선총독부 총독 미나미 지로의 송별시, 1943년 11월 일본연합군함대 사령관 야마모토 이소로쿠 추도시를 지었다가 학생들과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았다.[9] 광복 이후 친일 행적이 없었으므로 친일파로 몰리지 않았고, 반민특위에 회부되지도 않았다.[9] 1950년 12월 22일 사망하였다.

사후 시신은 양주군 진건면 배양리(현, 남양주시 진건면 배양리) 산 75-5번지에 전부인 연안이씨 이숙경(李淑卿), 후부인 청도김씨 김고려(金高麗)와 함께 합장되었다.[9] 2000년대 이후 충청남도 아산시 음봉면 원남리 180-2번지, 장남 윤일선 묘소 근처로 이장되었다.[9]

동생 윤치명대한제국 말기 학부 주사를 지낸 교육자였다.[9] 아들 윤일선은 의학자, 윤명선은 만주 간도성 차장을 지냈으며 김갑순의 사위였다.[9] 윤왕선미국 유학 중 사망했다. 윤승선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해군 시설감, 해병대 공병감 등을 역임했다.[9] 윤영선(尹暎善)은 충무무공훈장을 받았으며, 미국에서 정신과 전문의로 활동했다.[9] 둘째 동생 윤치소의 장남 윤보선1960년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을 지냈다.

5. 1. 여성 교육

그는 한국 최초로 여성 교육의 필요성을 주장하였다. 1908년 4월 여자에게도 남자와 같이 중등 교육을 장려하기 위하여 고등여학교령을 건의, 제정하여 이를 공포하게 하였다. 당시까지만 해도 한국에서는 여성에게는 학문이 필요없다고 인식되던 시기였다.

그는 공개 구혼으로 재혼한 후처 윤고려가 양원여학교의 영어교사로 교단에 서는 것을 후원하였다. 당시 주변의 편견과 맏며느리라는 위치를 들어 윤고려를 중상 비방하는 이들이 있었으나 윤치오는 오히려 아내 윤고려를 적극 지지하였다. 1908년 11월 초부터 부인 윤고려가 양심여학교 발기회를 조직하고, 11월 11일 양심여학교가 개교되자 윤치오는 양심여학교의 개교, 자금을 후원하였다. 11월 11일 윤치오와 유길준, 윤치호양심여학교 재단 고문으로 위촉되었다.[9] 1908년 6월에는 양원여학교가 설립되자 학교에 기부금을 기탁하였다.

5. 2. 이병도 가문과의 관계

윤치오는 이병도 가문과 겹사돈 관계를 맺었다. 윤치오의 넷째 아들 윤승선이병도의 6촌 여동생인 이을남과 결혼했다. 또한 이병도는 윤치오의 동생 윤치영의 처남이자, 또 다른 동생 윤치소와도 사돈 관계를 맺어 이중으로 겹사돈 관계를 형성했다.

윤치소의 넷째 딸 윤계경은 이병도의 형 이병묵의 아들 이재녕과 결혼했다. 윤치영이병도의 여동생 이병영과 결혼했다. 이병도와 이병묵은 윤치오의 며느리 이을남의 6촌 오빠이자, 윤치영의 처남이며, 윤치소의 사돈이었다.

동시에 이병도, 이병묵의 6촌 형 이병림은 윤치오, 윤치소, 윤치영의 매형이 된다. 윤치오, 윤치소의 여동생이자 윤치영의 둘째 누나인 윤정숙(윤노덕)은 이병도, 이병묵의 6촌 형 이병림과 결혼했다.

참조

[1] 문서 his young half brother
[2] 서적 윤치영의 20세기:동산회고록 삼성출판사 1991
[3] 뉴스 사회면 기사 매일경제 1987-02-23
[4] 서적 친일파 99인 1 돌베개 1993-02-01
[5] 웹사이트 대한제국 직원록 1908년 (02. 내각 > 문관전고소) https://web.archive.[...] 2008-11-17
[6] 웹사이트 근대여성 http://newwoman.cult[...]
[7] 뉴스 동아일보 1980-02-18
[8] 문서 조카 윤보선의 회고
[9] 문서 윤치오의 후처 윤고려가 운영하는 양심여학교와 양원여학교에 대한 설명
[10] 웹사이트 천도교 중앙대교당 https://web.archive.[...] 2011-03-30
[11] 웹사이트 일제 친일반민족행위자 708명 명단 : 정치 : 인터넷한겨레 The Hankyoreh http://www.hani.co.k[...] 2010-06-18
[12] 서적 증보한국음악통사 민속원 2007
[13] 문서 윤치영의 회고록 내용
[14] 서적 윤치호 일기 (1916-1943) 역사비평사 2001
[15] 문서 공주갑부 김갑순의 딸
[16] 웹사이트 이경찬의 국사교실 https://web.archive.[...] 2010-02-25
[17] 문서 윤고라라는 다른 이름
[18] 뉴스 20세기 한국의 풍물 풍속사⑫ 옷 - '미니스커트 단속' 그 때를 아시나요 http://www.donga.com[...] 뉴스플러스 1999-04-01
[19] 뉴스 국민보 1914-01-07
[20] 문서 윤치호의 생년에 대한 여러 기록
[21] 서적 윤치호 일기 역사비평사 2002-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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