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윤치호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윤치호는 조선 말기와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인물로, 개화파의 일원, 독립협회 회장, YMCA 지도자, 교육자, 언론인, 그리고 친일 행위자 등 다양한 면모를 보였다. 1865년에 태어나 한학을 수학하고, 일본 유학을 통해 서구 문물을 접하며 개화 사상을 수용했다. 귀국 후에는 미국 공사관 통역관으로 활동하며 개화파 정권에서 외교 및 개혁 정책을 추진했으나, 갑신정변 실패 후 미국으로 망명, 유학하며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독립협회 활동을 통해 민권 운동을 이끌었지만, 독립협회 해산 이후에는 민중의 무지함을 비판하며 계몽 운동에 힘썼다. 을사조약 체결 이후에는 교육과 YMCA 활동에 전념했지만, 일제강점기 후반에는 친일 행위를 보이며 비판을 받았다. 1945년 광복 후에는 친일파로 비판받으며 뇌일혈로 사망했다. 그의 사상은 사회 진화론과 기독교에 기반했으며, 조선의 근대화와 민족 개조를 추구했지만, 민중의 무지와 부패를 비판하며 엘리트 중심의 계몽을 강조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한국의 일기 작가 - 이순신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을 지휘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운 이순신은 뛰어난 무예와 지휘능력으로 수많은 해전에서 승리하며 조선을 지켰고,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국민적 영웅으로 추앙받는 조선 중기의 무장이다.
  • 한국의 일기 작가 - 최부
    최부는 조선 초기의 문신이자 학자로 김종직의 문인이며, 《표해록》을 저술하여 15세기 중국의 사회와 문화를 기록했지만, 사화에 연루되어 유배 및 사형을 당한 후 복권되었다.
  • 한국의 기독교계 인사 - 류영모
    류영모는 일제강점기 한국의 종교 사상가이자 교육자로, 유불도 기독교 사상을 융합한 '얼나' 사상으로 알려져 있으며, 오산학교 교장을 지내고 은퇴 후 농사를 지으며 제자들을 가르치고 《노자》를 번역하기도 했다.
  • 한국의 기독교계 인사 - 김교신
    김교신은 일제강점기 교육자이자 무교회주의 기독교 사상가로서, 우치무라 간조의 영향을 받아 조선성서연구회를 조직하고 《성서조선》을 창간하여 조선적 기독교를 주창했으며 민족정신 고취에 힘썼으나, 성서조선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고 광복을 앞두고 발진티푸스로 사망했다.
  • 조선귀족 거부자 - 윤보선
    윤보선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이자 독립운동가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참여, 한국민주당 창당, 서울특별시장 및 상공부 장관 역임, 제2공화국 대통령 역임, 그리고 민주화 운동 참여 등의 활동을 했다.
  • 조선귀족 거부자 - 유길준
    유길준은 조선 후기 개화 사상가이자 정치가, 언론인으로, 서구 문물을 접한 후 갑신정변 연루, 갑오개혁 참여, 아관파천 이후 망명, 애국계몽운동 전개 등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으나, 근대화에 기여했음에도 친일 행적에 대한 비판도 있는 인물이다.
윤치호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윤치호 가족 사진 (1910년경). 윤치호는 뒤에 서 있고, 그의 아버지 [[윤웅렬]]은 [[대한제국]] 군복을 입고 앉아 있다.
윤치호 가족 사진 (1910년경). 윤치호는 뒤에 서 있고, 그의 아버지 윤웅렬대한제국 군복을 입고 앉아 있다.
기본 정보
이름윤치호
한글윤치호
한자尹致昊
로마자 표기Yun Chiho
문화어 표기Yun Ch'iho
좌옹 (佐翁, Jwaong)
성흠 (聖欽, Seongheum), 성흠 (成欽, Seongheum)
일본어 이름이토 지코 (伊東致昊, Itō Chikō)
출생일1865년 1월 23일
출생지조선 충청도 아산시 둔포면 신항리 신촌
사망일1945년 12월 6일
사망지미군정 경기도 개성시 송도면 고려정 (뇌일혈, 중풍, 일설에는 자살)
학력
출신 학교게이오 의숙
중서 서원
밴더빌트 대학교
에모리 대학교 신학 학사
가족 관계
친척윤영렬(숙부)
윤치왕(이복 동생)
윤치창(이복 동생)
윤치소(종제)
윤치오(종제)
윤치영(종제)
윤보선(종질)
윤원선(종질녀)
윤연선(배다른 조카)
윤영구(손자)
배우자진주 강씨, 마애방, 백매려, 첩 2명
자녀아들: 윤영선, 윤광선, 윤장선, 윤기선, 윤정선
딸: 윤봉희, 윤용희, 윤문희, 윤무희, 윤은희, 윤명희, 윤보희, 윤영희
부모아버지: 윤웅렬
어머니: 전주 이씨 이정무(李貞武)
적모: 전의 이씨 부인
계모: 김정순(金貞淳)
서모: 다옥(茶玉)
형제이복 누나: 윤경희
친 누이동생: 해평 윤씨 (화현매)
이복 동생: 윤치왕, 윤치창
경력
주요 경력계몽가
교육자
번역가
대한체육회 회장
관직조선국 외아문 참의
대한제국 한성부 판윤
정치 활동
소속 정당무소속
의정 활동귀족원 의원 (조선/대만 칙선 의원)
임기1945년 2월 ~ 1946년 7월 4일
기타 정보
종교유교(성리학) → 개신교(감리교)
창씨개명이토 지코 (伊東致昊)
영어 이름Baron Yun (배론 윤) 또는 Tchi Ho Yun
웹사이트해평 윤씨 홈페이지

2. 생애

1864년 음력 12월 26일(1865년 1월 23일) 충청남도 아산시 둔포면에서 윤웅렬의 아들로 태어났다. 양반 가문 출신이었던 아버지 윤웅렬은 아들 윤치호가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지원했다.[5] 윤치호는 어려서부터 지역 서당에서 유교 경전을 공부하며 뛰어난 재능을 보였고, 12세에는 과거 시험에 응시하려 했다.

1879년, 14세에 한성부 정동 출신의 진주 강씨 부인과 결혼하였으나 7년만인 1886년에 사별하였다.

개화파 아버지 등의 영향으로, 1881년 17세의 나이로 신사유람단(조사시찰단)이었던 어윤중의 수행원으로 일본에 건너가, 한국 최초의 일본 유학생 중 한 명으로서 개화 사상을 흡수했다.[8] 외무대신 이노우에 가오루와 알현하고, 이노우에의 주선으로 동인사에 입학했다.

1882년 5월 조미 수호 통상 조약 체결 당시 귀국하여 미국 초대 주조선 공사 루시우스 푸트의 통역관이 되어, 조선인 최초의 영어 통역자가 되었다.[5] 이후 푸트의 통역관을 겸하며 푸트와 고종, 개화파 사이를 오갔다. 1883년 1월~4월 일본 요코하마 주재 네덜란드 영사관 서기관 레온 폴데르에게 영어를 배웠다.[55] 같은 해 5월 한미수호조약 체결 당시 초대 주한 미국 공사 루시우스 푸트의 통역관으로 귀국, 주한미국공사관 통역관으로 활동했다. 1883년 5월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주사에 임명된 후, 푸트의 통역관을 겸하며 고종과 개화파 사이의 다리 역할을 했다.

푸트 공사 일행. 오른쪽 세 번째 관복 차림이 윤치호


1884년 5월 루시우스 푸트 미국 공사에게 쓴 친필 편지


1884년 근대화론자로서 갑신정변을 지지했지만 급진성에는 반대했다. 정변 실패 후 상하이로 망명, 1885년 중국 상하이 앵글로-차이니즈 칼리지(Anglo-Chinese College)에서 영어수학 등을 공부했다.[9] 기독교로 개종, 이는 이후 그의 삶에 큰 영향을 주었다.[9]

1888년부터 미국으로 건너가 밴더빌트 대학교에모리 대학교에서 공부했다.[9]

에모리 대학교 학생 시절(1892년)


미국 문화의 여러 측면을 존경했으나, 남부 생활 중 겪은 인종 차별에 좌절했다.[10]

2. 1. 생애 초기

1864년 음력 12월 26일(1865년 1월 23일) 충청남도 아산시 둔포면에서 윤웅렬의 아들로 태어났다. 양반 가문 출신이었던 아버지 윤웅렬은 아들 윤치호가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지원했다.[5] 윤치호는 어려서부터 지역 서당에서 유교 경전을 공부하며 뛰어난 재능을 보였고, 12세에는 과거 시험에 응시하려 했다.

윤치호의 집안은 조선 왕조의 명문가 중 하나였다. 9대조 할아버지 윤두수는 선조 때 영의정을 지냈다. 그러나 아버지 윤웅렬은 할아버지 윤취동의 서자였다.

1871년부터 1878년까지 윤치호는 창 씨가 운영하는 사립 서당에서 유교를 공부했다.

2. 1. 1. 출생과 가계

尹致昊중국어1865년 1월 23일(1864년 음력 12월 26일) 충청남도 아산 둔포면 신항리 신촌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서얼 출신 무관 윤웅렬이고, 어머니는 전주이씨 이정무이다. 조선 선조영의정을 지낸 윤두수의 후손으로, 그의 집안은 몰락한 향반(鄕班)이었다.

어릴 적 이름이자 자(字)는 성흠(聖欽)이었고, 나중에 치호로 이름을 고쳤다. 성인이 된 뒤에도 성흠(聖欽)이라는 이름은 자, 필명, 가명 등으로 사용하였다.

윤치호의 집안은 18세기 중엽까지 명문 양반가문이었으나, 그 뒤 고조할아버지 윤발은 관직을 얻지 못했고, 증조부 윤득실통덕랑을 지냈으나 일찍 사망하였다. 증조부 대에 경기도 수원부에서 거주했으나 수원 화성을 건축하기 위해 천안 모산면으로 이주하면서 가세가 기울어 향반(鄕班)으로 몰락하였다.

할아버지 윤취동은 어려서 고아가 되었으나 아산 둔포면으로 분가, 자수성가하여 대지주가 되었다. 이후 할아버지 윤취동이 지중추부사가 되고 아버지 윤웅렬, 숙부 윤영렬무관으로 출세하여 중앙으로 진출하면서 다시 가세를 일으켰다.

유년기에 그는 한학을 수학하였고, 충남 아산 둔포면 고향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그는 둔포면 신항리에서 태어난 후 어릴 때 한학을 공부하기 위하여 친누이 윤경희와 함께 서울로 왔다. 윤치호는 어려서부터 기억력이 비상하였고, 3세가 되기 전에 글을 읽었으며 한번 본 것은 잊어버리지 않았다. 아버지 윤웅렬은 글재주와 암기력이 좋은 장남 치호에게 많은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아버지 윤웅렬은 자신이 서자 출신[54]이었다는 점을 우려하였다. 만 5살 무렵 아산에서 장 선생이라는 성리학자를 초빙해 학문을 배웠다.

1879년, 14세에 한성부 정동 출신의 진주 강씨 부인과 결혼하였으나 7년만인 1886년에 사별하였다.

1907년 3월 4일, 아버지 윤웅렬은 본부인 전의이씨가 죽자 첩이었던 전주이씨 이정무를 정실 부인으로 올려주고 윤치호를 적자(嫡子)로 인정하였다.

해방 후 대한민국의 군의관 윤치왕, 사업가 겸 외교관 윤치창의 이복 형이며, 윤치소, 윤치오, 윤치영의 사촌이며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이자 정치인인 윤보선의 5촌 당숙이었다.

2. 1. 2. 유년기

1865년 1월 23일 충청남도 아산에서 아버지 윤웅렬의 3남 2녀 중 큰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윤웅렬은 병조판서를 지냈으며, 어머니는 전주 이씨 이정무였다.[202] 누이 윤경희와 그는 전주이씨 소생이고, 이복동생 윤치왕윤치창은 서모 김정순에게서 태어났다. 그 밖에 일찍이 김씨에게 시집간 이복 누나가 한 명 더 있었다.[202] 선조 시대 영의정 윤두수의 차남 윤훤의 8대손이다.

어린 시절 윤치호는 장 선생과 김정언 선생에게서 유교를 배웠다. 그러나 아버지 윤웅렬이 서자였기 때문에 과거를 볼 수 없었다. 1879년 15세에 한성부 정동 출신의 진주 강씨 부인과 결혼했다.

9세에 한성으로 유학하여 한학을 배웠다. 박규수의 문하에 출입하면서 실학과 외부 신문물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중국 밖에도 세계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동시에 서구의 선진 문명을 접하게 되면서 사회에 대한 비판적인 태도를 지니게 되었고, 이어 신분제 철폐, 서구 문물 개방 및 수용, 민중들의 권리 향상, 민중의 참정권 획득 등 사회 개혁에 대한 의지로 승화시키게 된다. 또한 여성을 인격체로 생각하지 않는 유교적 가치관 역시 그릇된 사고방식으로 철폐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스승 어윤중의 편지.


아버지 윤웅렬은 무관이나 서얼출신으로 제2차 수신사 일행을 따라가 메이지 일본의 새로운 문물을 시찰하고 돌아와 개화파 인사로 활약하였으며 교련병대 창설을 주관하기도 했다. 그러나 학문적 수준은 높았지만 몰락한 향반가에다가 서얼이었던 신분 탓에 아들 치호가 문과 과거에 응시, 급제할 길이 막혀있는 현실에서 아들의 장래를 염려하였다. 아버지 윤웅렬김옥균민영익과 접촉, 그들에게 부탁하여 아들의 일본 유학을 주선하였다. 1881년 1월 어윤중(魚允中)의 문하생이 되어 수학했다. 어윤중성리학자였지만 박규수와 유대치의 문하에 출입하며 개화 사상에 눈떴기에 그에게도 기회가 닿는다면 일본, 청국 등을 다니면서 새로운 것을 많이 보고 접하라는 말을 하였다. 아버지 윤웅렬은 개화승 이동인과도 교류하며 아들의 유학을 주선하였고, 그의 스승 어윤중 역시 그의 도일을 적극 추천, 지원하였다.

2. 1. 3. 수학과 소년기

1879년 15세에 한성부 정동 출신의 진주 강씨 부인과 결혼했다.

개화파 아버지 등의 영향으로, 1881년 17세의 나이로 신사유람단(조사시찰단)이었던 어윤중의 수행원으로 일본에 건너가, 한국 최초의 일본 유학생 중 한 명으로서 개화 사상을 흡수했다.[8] 외무대신 이노우에 가오루와 알현하고, 이노우에의 주선으로 동인사에 입학했다. 당시 윤치호는 16세에 불과했지만, 이 경험은 그의 근대화에 대한 생각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쇄국 정책으로 고립되었던 조선 밖의 세상을 깨닫게 해주었다.[9] 그는 조선의 발전 부진을 일본의 급속한 근대화와 자주 비교하며, 일기에서 한국이 일본과 같은 선진적이고 현대적인 국가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적었다.

독학으로 일본어 공부를 한 뒤, 1882년 도쿄 제국대학 철학 교수의 부인 밀레트와 영어 강사 간다 노부에게서 영어를 배웠다. 1883년 1월부터는 요코하마에 있는 네덜란드 영사관 서기관 레온 포르델에게 영어를 배웠다. 김옥균의 권고로 영어를 배웠는데, 일본어를 다시 영어로 해석하는 것이라 시간이 오래 걸렸으나 당시 조선인 중 간단한 회화라도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

유학 생활 중 김옥균, 서광범, 박영효, 유길준 등의 개화파 인물과 후쿠자와 유키치, 나카무라 마사나오 등의 문명 개화론자들과 교류했다. 처음에는 동인사에서 배우고, 게이오기주쿠에서 어학 학습을 했으며, 후쿠자와 유키치 저택에서 독립협회를 조직한 인물들과 교류를 깊게 했다.[24] 신분, 적자, 남녀 차별이 더 적은 일본 사회와 서양의 문물에 접하며, 이후 한국의 문명 개화의 필요성을 신념으로 삼게 되었다.

2. 2. 청년기

1882년 5월 조미 수호 통상 조약 체결 당시 귀국하여 미국 초대 주조선 공사 루시우스 푸트의 통역관이 되어, 조선인 최초의 영어 통역자가 되었다.[5] 이후 푸트의 통역관을 겸하며 푸트와 고종, 개화파 사이를 오갔다.

1883년 1월~4월 일본 요코하마 주재 네덜란드 영사관 서기관 레온 폴데르에게 영어를 배웠다.[55] 같은 해 5월 한미수호조약 체결 당시 초대 주한 미국 공사 루시우스 푸트의 통역관으로 귀국, 주한미국공사관 통역관으로 활동했다. 원어민이 아닌 네덜란드인에게 배운 영어였지만, 당시 조선에는 영어 통역관이 없어 그의 통역에 의존해야 했다. 외무아문 주사로 활동하면서도 틈틈이 미국인들을 찾아가 영어를 배우며 철자와 어투를 교정, 1884년에는 한글에 없던 단어까지 명확히 파악할 정도로 실력이 향상되었다.

윤치호가 기록한 고종과 미국 푸트 공사의 대담 내용


2003년 노르웨이 오슬로 대학 교수 박노자경희대학교 교수 허동현에게 보낸 편지에서, 1883년~1884년 윤치호의 영문 문서를 보면 "요즘 웬만한 대학생의 영어 작문보다 훨씬 고급"이라고 평가했다.[55] 1883년 미국에 건너간 민영익[57]의 신임장[58]을 영역했는데, “비준”(批准:ratification)처럼 당시 한글로는 잘 알려지지 않았던 근대적 한자어의 영문 번역어까지 보였다. 웬만한 조선 선비는 한자로 써도 몰랐을 단어의 정확한 의미를 윤치호가 이미 영어로 파악했다는 것이다.[55]

1883년 5월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주사에 임명된 후, 푸트의 통역관을 겸하며 고종과 개화파 사이의 다리 역할을 했다. 청나라조선 내정간섭을 막고, 미국, 유럽과의 외교 및 유대 강화, 정치기구 개편, 민중의 정치참여 및 참정권 부여를 주장했다. 서구 문물 수용과 문호 개방도 요구했다. 같은 해 아버지 윤웅렬이 향헌비 비문 제거와 별기군 유임 문제로 탄핵받자 무고함을 변호하는 상소를 올렸다.

1884년 근대화론자로서 갑신정변을 지지했지만 급진성에는 반대했다. 정변 실패 후 상하이로 망명, 1885년 중국 상하이 앵글로-차이니즈 칼리지(Anglo-Chinese College)에서 영어수학 등을 공부했다.[9] 기독교로 개종, 이는 이후 그의 삶에 큰 영향을 주었다.[9] 기독교조선일본과 서양을 따라잡는 데 도움이 될 진보적 철학으로 보았다.[9]

1885년 1월, 갑신정변 실패 후 고종 윤허로 청나라 상하이로 건너가 미국 감리교 선교사 A.J. 앨런이 세운 중서서원(the Anglo-Chinese College)에 입학, 3년간 영어를 배웠다.

1888년부터 미국으로 건너가 밴더빌트 대학교에모리 대학교에서 공부했다.[9]

미국 문화의 여러 측면을 존경했으나, 남부 생활 중 겪은 인종 차별에 좌절했다.[10] 유학 기간 동안 서구의 민권 사상과 합리주의를 받아들여, 참정권과 개혁 필요성을 확신하게 되었다.

2. 2. 1. 조선인 영어 통역사

1882년 5월 조미 수호 통상 조약 체결 당시 귀국하여 미국 초대 주조선 공사 루시우스 푸트의 통역관이 되어, 조선인 최초의 영어 통역자가 되었다.[5] 이후 푸트의 통역관을 겸하며 푸트와 고종 그리고 개화파 사이를 오갔다.

1883년 1월4월일본 요코하마에 있는 주일본 네덜란드 영사관의 서기관 레온 폴데르에게 영어를 배웠다.[55] 1883년 5월 한미수호조약(韓美修好條約)이 체결될 때 초대 주한 미국 공사 루시우스 푸트의 통역관으로 귀국, 주한미국공사관 통역관으로 활동했다. 원어민이 아닌 네덜란드인에게 배운 어설픈 영어 실력이었지만 당시 영어 통역관이 없는 조선에서는 그의 통역에 의존해야 했다. 그러나 통역관과 외무아문 주사로 활동하는 중에도 틈틈이 미국인들을 찾아가 영어를 배우며 철자와 어투를 고치며 영어 실력을 가다듬었다. 미국인과 대화하면서 자신의 어법과 어투를 고쳐나갔는데, 1884년에 이르면 당시 한글에 없던 단어까지도 명확하게 파악할 정도의 영어 구사 실력을 갖추게 된다.

2003년, 그의 서한을 검토했던 노르웨이 오슬로 대학 교수 박노자경희대학교 교수 허동현에게 보낸 편지에서 '1883년~1884년에 그가 작성한 영문 문서를 보면 요즘 웬만한 대학생의 영어 작문보다 훨씬 고급으로 보인다.'[55]고 평하였다. 그가 영문으로 번역한, 조선의 첫 공식적 도미(渡美)사절로 1883년 미국에 건너간 민영익[57]의 신임장[58]을 보면 “비준”(批准:ratification)처럼 그 당시에 한글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았던 근대적 한자어의 영문 번역어까지 다 보인다. 웬만한 조선 선비 같았으면 한자로 써도 정확하게 무슨 소리인지 모를 그 단어들의 정확한 의미를, 윤치호가 이미 영어로 파악했다는 것이다.[55]

2. 2. 2. 귀국과 갑신정변 전후

1883년 5월, 윤치호는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의 주사로 임명되었다. 이후 푸트의 통역관을 겸하며 푸트와 고종, 개화파 사이를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했다. 그는 청나라조선 내정간섭을 막고, 미국, 유럽 국가들과의 외교와 유대를 강화하며, 각종 정치기구 개편과 민중들의 정치참여와 참정권 부여를 주장했다. 동시에 문호를 개방하고 서구의 민권사상과 문물을 받아들일 것을 요구했다. 그해 아버지 윤웅렬이 향헌비(鄕憲碑)의 비문을 깎아내린 것과, 별기군을 유임시킨 일로 탄핵을 받자 아버지 윤웅렬의 무고함을 변호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이 상소를 보고 일각에서는 그를 방자하다고 비판했지만 고종이 이를 무마시켰다. 그 해 5월, 의정부 주사가 되었다. 그러나 아버지 윤웅렬을 변호하는 상소를 올렸다 하여 5월 10일, 부사과(副司果) 김명기(金命基)의 규탄 상소와 6월 9일, 함경도(咸鏡道) 유생(儒生) 전승준(全昇濬)의 상소가 이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모두 고종이 무마시켰다. 6월 10일, 다시 통리기무아문의 주사로 발령되었다.

1882년 김옥균의 권고로 영어를 배웠다. 일본어를 다시 영어로 해석하는 것이라 시간이 오래 걸렸으나 당시 조선인 중 간단한 회화라도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

1883년 푸트 초대 주한공사의 통역관으로 귀국, 바로 외무아문 주사에 임명, 겸임했다. 이때 윤치호는 고종과 푸트의 통역을 담당했고 그때 통역하던 내용 일부가 보존되다가 아들 윤영선, 정선에게 전해졌다. 1884년 5월 루시우스 푸트 미국 공사에게 쓴 친필 편지는 와 같다.

1884년 당시 근대화론자로 갑신정변을 지지했으나 급진성에는 반대했다. 그러나 정변 실패 후 상하이로 망명했다.

2. 2. 3. 유학과 서구 문물 수용

1884년 갑신정변 실패 후, 윤치호는 1885년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앵글로-차이니즈 칼리지(Anglo-Chinese College)에서 영어수학 등을 공부했다.[9] 상하이에서 그는 기독교로 개종했는데, 이는 그의 남은 생애 동안 중요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9] 윤치호는 기독교를 조선일본과 서양의 발전을 따라잡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강력한 진보적 철학으로 보았다.[9]

상하이에서 3년간 유학한 후, 1888년부터 미국으로 건너가 밴더빌트 대학교에모리 대학교에서 공부했다.[9]

그는 미국 문화의 여러 측면을 존경했지만, 남부에서 생활하며 겪은 인종 차별에 좌절하기도 했다.[10] 특히, 그는 기독교의 보편주의, 즉 누구든 경건하면 존경과 평등을 얻을 수 있다는 믿음과, 그가 일상적으로 목격하고 경험한 백인 우월주의의 자의적인 발현 사이의 긴장과 모순을 지적했다.[10]

에모리 대학교의 명예직인 퓨 소사이어티 회장으로 한 달 동안 선출되었을 때, 일부 급우들이 백인 우월주의적 신념 때문에 그의 선출에 불만을 품자, 윤치호는 이 직책 수락을 거부하려 했다.[11][12] 미국에서 그는 영어, 신학, 연설을 공부했으며, 영어 실력이 상당히 향상되어 일기 대부분을 영어로 썼다.[9]

유학 기간 동안 서구의 민권 사상과 합리주의를 받아들였고, 참정권과 개혁의 필요성을 확신하게 되었다.

2. 2. 4. 청나라 체류, 중서서원 교사 생활

1885년 1월, 갑신정변이 실패로 돌아가자 고종의 윤허를 받아 청나라 상하이로 건너갔다. 상하이에서 미국 감리교 선교사 A.J. 앨런이 세운 중서서원(the Anglo-Chinese College)에 입학하여 3년간 영어를 배웠다.

중서서원에서 프로테스탄트 선교사들의 영향을 받아 서양 문물에 접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중국을 세계의 중심으로 여겼던 조선인들의 중화사상에서 벗어나, 뒤처진 조선과 청에 대한 강한 비판 의식을 갖게 되었다. 또한, 뒤처진 조선 사회의 현실에 절망하여 조선의 근대화에 대한 비판적, 부정적인 인식을 갖게 되었다. 상하이에서 3년 반을 보낸 후, 청나라 사회에 대한 감상은 "더러운 물로 가득 찬 연못"이었다고 한다.

3. 개화파, 계몽 활동

윤치호는 미국 유학 시절 인종차별을 경험하면서 백인들의 오만함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갖게 되었다.[55] 특히 흑인 차별을 목격하며 백인 인종주의에 상처받기도 했다.[88] 미국민주주의자유주의는 높이 평가했지만, 백인종을 혐오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에 민주주의자유주의, 기독교의 도입이 시급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평소 조선인들의 불결한 위생, 겉치레, 감정적 대응 등을 경멸했으며, 서구의 기독교 사상과 합리주의를 통해 이를 개선하려 했다.

1911년에는 일본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 암살 시도에 연루되어 재판을 받았으나, 6년 수감 생활 후 사면받았다.[7]

3. 1. 귀국과 초기 개화파 시절

1895년 귀국, 김홍집 내각에서 외무부협판과 학부협판 등을 역임하며 개혁 정책 추진에 참여했다.[55] 독립협회독립신문 활동을 통해 민권 운동과 참정·개혁 운동을 주도했다.[6]

1894년 3월 27일 오후, 윤치호는 김옥균홍종우 등 일행을 맞아들였다. 김옥균은 윤치호에게 '리훙장의 양아들 리징황의 초청으로 오게되었다.[90][91] 경비는 홍종우라는 자가 대고 있다."고 말하자, 윤치호는 의아스러운 눈빛으로 "홍종우는 (조선에서 보낸) 스파이 같으니 조심하라"고 경고했다고 한다. 그러자, 김옥균은 "그가 스파이일리가 없다."고 답했다 한다.[90][91]

3월 27일, 김옥균은 인편으로 윤치호에게 오후 1시 반에 자신이 숙박하고 있는 동화양행(일본 호텔)로 와서 함께 갈 곳이 있다는 내용의 편지를 급히 보냈다. 그러나 윤치호는 학교 일이 바쁘다는 이유로 김옥균의 제안을 사양한다. 다음날 3월 28일, 김옥균은 홍종우에 의해 저격, 암살당했다.[90][91] 미행의 그림자를 예상한 그는 김옥균의 암살 소식을 접하고 수시로 거처를 이동하였다.

1893년 11월, 배를 타고 청나라의 상하이에 도착했다. 상하이로 건너간 윤치호는 1893년 11월에 모교인 중서서원의 교사가 되었고, 그가 조선으로 귀국할때까지 중서서원에서 영어, 영문학교사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이때에 이르러 그는 유창하지는 않았지만, 조선인이나 청나라인, 일본인들을 상대로 영어를 가르칠 만큼의 영어 회화 실력을 갖추었다.

1896년 조선인 축하사절단 대표 민영환의 수행원으로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 대관식에 참석, 러시아로 가던 중 선상에서 중추원 1등의관 칙임관 3등에 특별 임명되었다. 1896년 귀국하는 길에 베트남을 경유하여 귀국, 이때 베트남에 들어온 프랑스의 문물과 청결성을 보고 감탄하며 충격을 받았다.

1897년 독립협회에 참가, 서재필, 이상재, 유길준 등과 독립협회 운동을 이끌고 만민공동회를 주최했다.

1898년 제2대 독립협회 회장, 만민공동회 회장, 헌의 6조를 국정에 반영시켰다. 독립신문 2대 사장을 지냈다.

3. 2. 을미사변 전후

1895년 을미사변 이후 윤치호는 명성황후 암살에 조선인 협력자가 있었다고 주장했으나, 이는 무시당했다.[55] 그는 유길준을 명성황후 암살의 조선인 협력자 중 한 사람으로 지목했다.[55]

3. 3. 독립협회 활동과 사회 활동

1895년 2월, 윤치호는 조선으로 귀국하여 김홍집 내각에서 의정부 참의외무부협판을 역임했다.[93] 그러나 박영효 내각의 감시를 받게 되자, 김홍집 등에게 신변 보호를 요청하여 경호원을 대동해야 했다.

귀국 직후 윤치호는 자신의 노비들을 석방하고, 가족들을 전도하여 종문서를 불태웠다.[92] 이는 한국에서 종문서를 최초로 불태운 사례로 기록되었다.[92]

1895년 5월, 학부협판으로 임명되었으나, 춘생문 사건으로 투옥되기도 했다. 이후 외무부협판과 내각 비서관을 거쳐 다시 학부협판으로 재임명되었다. 같은 해 7월, 외부협판으로 전임되어 이탈리아 국왕의 조카 아부리 공작을 영접했다.

윤치호는 이상재, 서재필 등과 함께 독립협회를 조직하여 활동했다.[94] 독립신문의 주필과 발행인으로 활동하며 칼럼과 논설을 작성하고 신문 발행 전반에 참여했다. 또한 황국협회와 척족 정권에 맞서 자신의 재산을 투자하여 신문과 독립협회의 자금으로 활용했다. 정동구락부에도 가입하여 활동했다.[95]

윤치호는 미국 유학 시절 인종차별을 경험하며 백인들의 오만함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갖게 되었다.[55] 미국민주주의자유주의는 높이 평가했지만, 백인종을 혐오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갖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에 민주주의자유주의, 기독교의 도입이 시급하다고 생각했다.

윤치호 주요 활동 연표
연도주요 활동
1895년조선 귀국, 외무부협판, 학부협판 역임
1896년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 대관식 참석
1897년독립협회 참가
1898년제2대 독립협회 회장, 만민공동회 회장, 독립신문 주필


3. 3. 1. 독립협회 해산 이후

1898년독립협회 회장, 《독립신문주필만민공동회 최고 지도자로서 민권 운동과 참정·개혁 운동을 정력적으로 지도했고, 실력 양성 운동에 진력하였다.[94]

1898년부터 1899년까지 조선 조정의 추밀원 부의장을 역임했으나, 정적들의 압력으로 1899년 유배되었다. 원산시에서 군수를 지냈으며, 1903년 외무 차관으로 임명되었다.[5]

윤치호는 민중의 무관심과 무지를 비판하며, 민족 개조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평소 조선인들의 불결한 위생과 겉치레, 감정적 대응 등을 내심 경멸해왔으며, 서구의 기독교 사상과 청교도 정신, 합리주의의 수용을 통해 이를 개선하려 했다.

3. 3. 2. 을사조약 체결과 체념

1904년 8월 일한협약에 외무대신 대리로 서명했다.[15] 윤치호는 한국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만든 을사조약 체결에 반대했다. 그는 당시 한국에 있던 더럼 스티븐스에게 조약에 서명하는 사람들은 베네딕트 아놀드처럼 한국인들에게 배신자로 증오받을 것이라고 말했다.[16] 그러나 조약이 실제로 체결되었을 때 윤치호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를 더욱 당황하게 한 것은 박제순이 조약에 서명했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끝까지 조약 체결에 반대했던 유일한 인물인 한규설을 칭찬했다.[17] 민영환이 자결했을 때, 윤치호는 그의 용기에 경의를 표했다.[18]

3. 3. 3. 국권회복 운동

1895년 귀국 후, 윤치호는 김홍집 내각에서 외무부협판을 지냈다.[93] 이상재, 서재필 등과 독립협회를 조직하고, 《독립신문》 주필로 활동하며 민권 운동과 실력 양성 운동에 힘썼다.[94]

1906년 대한자강회를 조직하여 회장으로 선출되어, 교육 확대와 산업 개발을 통한 자강 독립을 추구했다.[6] 1907년 안창호 등과 신민회를 조직하여 회장으로 활동하며, 평양에 대성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에 취임했다. 1908년에는 개성에 한영서원을 설립하여 실업 교육에 힘썼다.

4. 일제 강점기 활동

1910년 한일병합 직후, 윤치호는 정2품이었으므로 남작 작위를 받았으나 거절했다.[34] 조선 왕족과 고관들이 일본에 협력하는 모습에 실망하여 조선총독부의 협력 요청을 거절하고 개성부로 은퇴했다. 이토 히로부미 암살이 한일 병합을 재촉했다는 결론을 내렸다.[34]

1911년 아버지 윤웅렬 사망 후 남작 작위를 물려받았으나 사양했다. 같은 해 105인 사건으로 체포되어 3년간 투옥되었다. 1912년 2월 5일 징역 10년 형을 선고받았고, 1913년 10월 9일 남작 작위와[35] 훈2등을 박탈당했다.[36] 1915년 2월 13일 출옥 후 매일신보 기자에게 친일 전향 의사를 밝혔다.

1910년대 후반부터 영국미국에 실망감을 갖게 되었다. 1919년 3·1 운동 직후 미국에 외교적 지원을 요청한 이상재, 이승만, 서재필 등의 권고를 거절했고, 1921년 미국 방문 및 외교 활동 권고도 거절했다.[120] 1930년 조선체육회 회장에 피선되고, 흥업구락부를 조직하고 회장에 취임하였다.

1937년 11월 수양동우회 사건 관련자들의 신원 보증 및 석방을 탄원했으나 안창호 석방은 거부당했다. 1938년 1월 안창호의 병보석을 탄원했다.[222] 같은 해 흥업구락부 사건 책임자로 일제로부터 취조를 당하였다.

1939년 야마가타 테이사부로 등 일본인 지인들로부터 조선총독부의 내사, 감시 소식을 들었다. 조선총독부 주최 행사 및 일본 천황 관련 행사에 불참했다. 1940년 5월 창씨개명에 부정적이라는 이유로 연행되었다가 곧 미나미 지로 총독에게 창씨개명 연기를 촉구하여 성사시켰다.

1941년 12월 조선임전보국단 고문에 선임되었으나, 관련 행사에는 번번히 불참했다. 같은 해 5월 12일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었다.[20] 태평양 전쟁 개전 후, 한국 젊은이들에게 일본 전쟁 협력을 권유하며 일본 승리를 돕도록 했다.[20] 그는 일본이 서구 열강을 아시아에서 몰아내는 것을 환영했다.[20] 한국 민중의 대일본제국 참여가 이전에는 경험하지 못한 기회와 교육 및 자원 접근성을 제공한다고 보았다.[9]

1941년 8월 24일 조선호텔에서 흥아보국단을 결성하고, 김동환 등이 이끄는 임전대책협의회와 통합하여 9월 조선임전보국단 창설을 이끌었다. "극동의 결전과 아인의 각오"라는 시국 강연을 하고, 10월 22일 조선임전보국단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1943년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으로 임명되었다. 1945년 4월 3일 제국 의회 귀족원 조선 칙선 의원에 선임되어[39], 내부 대신 및 경찰부원을 역임했다.

1945년 2월 일본 제국 제국의회 귀족원 의원에 선임되고,[187] 박춘금이 결성한 대화동맹 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같은 해 4월 대화동맹 이사장으로 물러났다. 2월 13일 송도고등보통학교가 재단법인 송도중학교로 바뀌자 재단 이사가 되었다.

같은 해 4월 3일 일본 제국 제국의회 칙선 귀족원 의원에 재선임되었다.[187] 4월 '조선내 7인의 일본 귀족원 의원' 중 한 명으로 선출된 후 박중양과 함께 일본의 '망극한 처우개선'에 감사하고자 조직된 처우감사 사절단 대표사절로 일본을 방문, 조선신궁 봉고제 후 총독과 군사령관에게 감사를 표하고 귀국하였다.[187]

1945년 6월 조선언론보국회 고문으로 재추대되었다. 8월 10일 광복 직전 개성 광문암동 근처에 있었다.

4. 1. 한일 병합 직후

1910년 10월 한일병합 직후, 윤치호는 정2품이었으므로 남작 작위를 받았으나 거절했다.[34] 조선의 왕족과 고관들이 일본에 협력하여 귀족이 되는 것을 보고 실망하여, 이후 조선총독부의 협력 요청을 거절하고 개성부로 은퇴했다. 또한 이토 히로부미 암살이 한일 병합을 재촉했다는 결론을 내렸다.[34]

1911년 아버지 윤웅렬이 사망하자 남작 작위를 물려받았으나 사양하였다. 같은 해, 105인 사건으로 체포되어 재판에서 주모자로 지목되어 3년간 투옥되었다. 1912년 2월 5일 징역 10년 형을 선고받았고, 1913년 10월 9일 남작 작위를 박탈당하고[35], 훈2등을 박탈당했다.[36] 1915년 2월 13일 출옥하여 매일신보 기자에게 친일로 전향할 것을 밝혔다.

4. 2. 일제 강점기 중반

1905년(광무 8년) 9월, 윤치호는 일본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할 것을 예상하고 일본에 의한 압제를 우려했다. 그는 '한국인들은 동족 지배자에 의한 폭정이 이민족 지배자에 의한 폭정의 디딤돌이 되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120]'라고 말했다. 또, '부패한 그리고 부패하고 있는 소수의 독재 정치로부터 조선 인민을 구하는 유일한 방법은 현 정부와 낡은 체제를 완전히 철폐하는 것이다. 철저히 썩은 정부를 약간의 개혁으로 미봉하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라고 보았다. 그는 민족의 미래는 부패한 유교 사상이나 무속 신앙이 아니라 기독교의 합리주의 정신과 노력한만큼 보상을 받는다는 프로테스탄트 정신에서 찾아야 된다고 역설했다.

같은 해, 윤치호는 황성 YMCA 기독교청년회 부회장에 취임하였다.[121]

4. 2. 1. 반영, 반미 활동과 소극적 저항

1910년대 후반부터 윤치호는 영국미국에 대해 점차 실망감을 갖게 되었다. 1919년 3·1 운동 직후 미국에 외교적 지원을 요청하라는 이상재, 이승만, 서재필 등의 권고를 거절했고, 1921년에는 미국에 가서 외교 활동을 하라는 권고도 거절했다.[120] 1930년에 조선체육회 회장에 피선되고, 흥업구락부를 조직하고 회장에 취임하였다.

1937년 11월 수양동우회 사건 관련자들의 신원을 보증하고 석방을 탄원하였으나 안창호 석방은 거부당했다. 1938년 1월 안창호의 병보석을 탄원하였다.[222] 1938년 흥업구락부 사건의 책임자로 일제로부터 취조를 당하였다.

1939년 야마가타 테이사부로 등 일본인 지인들로부터 조선총독부의 내사, 감시를 당한다는 소식을 입수하였다. 그때까지 그는 조선총독부 주최 행사 중 상당수 불참했고, 일본 천황이나 일본제국주의의 영웅을 기리는 행사에 한번도 참석한 적이 없었다. 1940년 5월 창씨개명에 부정적이라는 이유로 연행되었다 풀려났다. 곧 미나미 지로 총독을 찾아가 창씨개명을 연기해줄 것을 촉구하여 성사시켰다.

1941년 12월 조선임전보국단 고문에 선임되었다. 그러나 임전보국단 주최 행사에 번번히 불참하여 관계자들을 당황하게 했다.

4. 3. 일제 강점기 후반

1905년(광무 8년) 9월, 윤치호는 일본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할 것을 예상했다. 그는 '한국인들은 동족 지배자에 의한 폭정이 이민족 지배자에 의한 폭정의 디딤돌이 되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120]'라며 일본에 의한 압제를 예상했다. 그는 민족의 미래는 기독교의 합리주의 정신과 노력한 만큼 보상을 받는다는 프로테스탄트 정신에서 찾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1905년 12월, 윤치호는 한성부를 왕래하며 을사조약이 무효임을 선언한 전단지를 배포했다. 그러나 대신들은 그가 갑신정변 관련자인 김옥균 등과 친밀했던 점을 들어 윤치호를 비난했다. 윤치호가 을사조약 반대를 핑계로 공화제를 획책한다는 것이었다.

중명전에 전시된 을사조약 체결 문서.


윤치호는 미국에 기대를 하였지만, 미국은 1905년 7월 29일 일본과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성사시켜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아 그에게 실망감을 안겨주었다.

을사조약 체결 후, 그는 체념하고 교육과 YMCA 청년회 활동에 매진했다. 그는 사태가 이렇게까지 이르게 된 것을 외부의 침략 이전에 지배층의 안일한 대응과 타락, 사회 내부의 부정부패와 온갖 비리 행위, 차별 대우 등이 결합된 복합된 결과물로 보았다.

그는 을사조약을 돌발적인 사건이 아닌 과거 사건들의 결과로 또는 불가항력적인 현실로 받아들였다.[120] 결국 그는 미구에 닥칠 일본 혹은 제3세력의 침략은 어쩔 수 없는 현실로 보게 된다. 체념한 윤치호는 이후 어떠한 공직 제의도 사양하고, YMCA 청년회 활동과 교육, 강연 활동에만 전념하였다. 윤치호는 독립의 상실을 열강의 침탈경쟁인 러일전쟁의 불가피한 귀결이며, 개혁과 개선을 무조건 외면해온 한국인들에 대한 역사의 심판 또는 신의 심판으로 인식되었다.[120]

4. 3. 1. 태평양 전쟁 후반

1941년 5월 12일,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었다.[20] 태평양 전쟁 개전 후, 그는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일본의 전쟁을 돕도록 권유하며 일본의 승리를 돕도록 했다.[20] 그는 일본이 서구 열강을 아시아에서 몰아내는 것을 환영했다.[20] 윤치호에 따르면, 한국 민중이 대일본제국에 참여하는 것은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기회와 교육 및 자원에 대한 접근성을 제공했다.[9] 윤치호는 "오늘날 한국 지식인들은 한국인의 운명이 일본 국민과 하나가 됨으로써 증진될 수 있으며, 만주와 화북이 한국 국민의 발전을 위해 이전에 꿈도 꾸지 못했던 분야를 열었다는 것을 모두 깨닫고 있다"고 말했다.[9]

1941년 8월 24일 조선호텔에서 흥아보국단을 조직, 결성했다. 그리고 흥아보국단과 김동환 등이 이끄는 임전대책협의회의 통합을 추진하여, 1941년 9월 조선임전보국단의 창설을 보았다. 1941년에는 "극동의 결전과 아인의 각오"라는 제목으로 시국 강연을 각지에서 행하고, 10월 22일, 친일 단체들의 합동체인 조선임전보국단 조직의 고문으로 추천되었다.

1943년, 일본이 요구를 강요하면서 그는 조선총독부중추원 고문으로 임명되었다. 1945년 4월 3일, 제국 의회의 귀족원 조선 칙선 의원에 칙임되어[39], 내부 대신 및 경찰부원을 역임했다.

4. 3. 2. 신앙 활동 및 기타

1905년(광무 8년) 황성 YMCA 기독교청년회 부회장에 취임했다.[121] 그는 YMCA 청년회 활동에 매진했고, 1913년 이상재를 도와 YMCA의 혼란을 수습했다. 기독교 청년 지도자들의 이탈과 구속, 추방 등의 상황에서 이상재와 함께 YMCA의 간판을 지키고 청년회를 사수하였다. 1916년에는 YMCA 청년회 총무, 1930년에는 YMCA 연합회 회장을 맡는 등 기독교계 사회운동에도 적극 참여했다.[52]

1907년(융희 1년), 상해에서 열린 세계주일학교대회에 한국기독교대표단의 단장으로 다녀왔다. 1910년(융희 4년)에는 미국 애틀랜타 주에서 개최된 남감리교 평신도협회 총회에 참석했고, 미국 감리교선교부의 초청을 받고 영국 에딘버러에서 개최된 제1차 기독교 세계선교회의(I.M.C)에 조선대표로 참가하여 연설했다.

그는 남부감리교를 한국에 설립하고 선교하는 활동을 했고, 국제 교회연합사업을 주관했다. 1930년부터는 한국내 남·북감리교회 연합을 추진하기도 했다.

282x282픽셀


1936년에는 새문안교회 건축공사비 중 40%를 원한경 장로가 섭외하자, 기독교계 원로인 윤치호는 거액의 헌금[186]새문안교회 신축공사비로 기부했다. 그밖에도 오지 선교사들과 개척교회에 파송되는 목사들의 여행 경비를 직접 후원해주기도 했다.

1938년 5월, 결성된 경성기독교연합회 평의원으로 선출되었고, 6월 기독교일본화를 달성하기 위해 소집된 전조선기독교청년연맹위원회에 참가한 후 "이제야 대임(大任)을 마쳤습니다. 우리 기독청년들도 이제는 완전히 내선일체가 되었습니다"라는 요지의 담화문을 발표했다. 1938년 7월, 조선기독교연합회 평의원회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한편 현실생활의 구원을 통해 기독교를 정착시키기 위한 실천을 직접 선보였으며, 기독교 신앙인들의 신앙 모범촌 건설 계획을 추진하기도 했다.[65] 대한기독교청년회연맹(YMCA)의 이사와 부회장, 세계주일학교 한국지회 회장으로도 활동했다.

1939년 10월, 일본 도쿄 아오야마 학원(靑山學院)에서 감리교 통합을 위해 조선감리교회와 일본 메소디스트 교회의 합동을 논의하는 일선(日鮮)감리교회 특별위원회가 개최되자, 김영섭, 신흥우, 양주삼, 유형기, 정춘수 등과 함께 조선인전권위원으로 참가했다.

1943년 10월부터는 각지의 기독교 단체 및 기독교계 사립학교 지원을 목적으로 YMCA 재단법인 등록사업을 추진, 11월 10일 YMCA 재단인 재단법인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유지재단(朝鮮中央基督敎靑年會維持財團)을 구성하고 이사장에 피선되었다.

4. 4. 광복과 죽음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으로 한국은 광복을 맞이하였다. 윤치호는 그해 10월, 존 R. 하지이승만, 김구에게 "한 노인의 명상록"(An Old Man's Ruminations영어)이라는 제목의 편지를 보냈으나 답장을 받지 못했다.[22] 그는 1945년 12월 개성 고려정에서 80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일각에서는 자살설을 제기하지만, 증거는 없다.[22]

윤치호는 1960년 대한민국 대통령을 지낸 윤보선과 한국 최초의 병리학자이자 해부학자인 윤일선의 삼촌이었다.

4. 4. 1. 광복 직전

1945년 2월, 일본 제국 제국의회 귀족원 의원에 선임되었다.[187] 같은 해 2월, 박춘금이 결성한 대화동맹 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같은 해 4월, 박춘금을 위원장으로 앉히면서 그는 대화동맹 이사장으로 물러났다.

1945년 2월 13일, 송도고등보통학교 재단법인이 재단법인 송도중학교로 바뀌자 송도중학교 재단법인 이사가 되었다.

같은 해 4월 3일, 다시 일본 제국 제국의회 칙선 귀족원 의원에 재선임되었다.[187] 1945년 4월, '조선내 7인의 일본 귀족원 의원' 중 한 사람으로 선출된 윤치호는 박중양 등과 함께 일본의 '망극한 처우개선'에 감사하고자 조직된 처우감사 사절단 대표사절로 선임되었다.[187] 이어 박중양이 윤치호를 수행하여 인천항에서 배편으로 일본을 방문하였다. 윤치호는 먼저 조선신궁에 봉고제를 올린 후, 총독과 군사령관을 방문하여 감사를 표하였다. 이어 서울을 출발, 일본으로 간 윤치호는 일본 관계 요로에 감사를 표한 후 귀국하였다.[187]

1945년 6월, 조선언론보국회 고문으로 재추대되었다. 1945년 8월 10일 광복 직전, 그는 개성의 광문암동 근처에 우거하고 있었다.

4. 4. 2. 광복 직후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패망하고 히로히토 일본 천황의 항복 선언 방송을 들었다. 그는 이를 당연한 결과로 여겼다.[185] 8월 19일 개성 자택에 괴한이 침입하여 피습을 당했으나, 괴한은 도주했다.[185] 이후 윤치호에 대한 비난과 규탄이 줄을 이었고, 외출 시에도 그를 친일파, 매국노라는 학생들이 나타나 돌과 휴지를 던졌다. 그러나 그는 학생들의 비난과 투석에 개의치 않고 개성과 서울을 활보하였다.

1945년 9월 2일부터 미군정이 주둔하면서, 9월 23일 미군정 군정장관 아놀드 소장에 의해 중추원이 해체되면서 중추원 고문직에서 파면되었다.[191] 그러나 그는 의미 없는 자리였을 뿐이라며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그는 미군정 주둔 이후 군정청의 권위주의적인 통치를 비판했고, 군정과도 충돌하였다.

1945년 10월 20일, 친일파 청산 문제가 거론되자 그는 이승만미국 군정청에게 《한 노인의 명상록(An Old Man's Ruminations)》이라는 제목의 영문 서한을 각각 보냈다.[192][193]

1945년 10월 15일에 작성한 첫 번째 서한에서 한국인은 아직 민주주의를 운영해 나갈 능력이 없다는 점과 한국공산주의화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한국인을 지도할 유력자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1945년 10월 20일에 작성한 두 번째 서한에서는 일제 치하에서 한국인은 좋든 싫든 '일본인'일 수밖에 없었다고 하며 친일파에 대한 사면을 호소했다. 또 조선독립독립운동가라고 하는 사람들의 덕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며, 일부 독립운동가들이 자신들이 독립을 쟁취한 것처럼 행동하는 것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광복 후부터 그는 지속적으로 친일파로 몰리며 수시로 규탄과 성토의 대상이 되었다. 그는 귀국한 독립운동가들이 개선 장군인 것처럼 행세하는 것을 보고 영웅 심리에 들뜬 자들이라며 경멸하였다.

1945년 11월, 상하이 임시정부 요인들이 귀국했다. 임정 요인 환국 직후 김규식이 그를 찾아왔다. 이후 여러 번 김규식의 방문을 받았으나 그는 김규식에 대한 정치적 지지 표명은 하지 않았다. 그 뒤 그는 다시 친일파의 석방, 사면론을 주장하였다. 그는 "사이비 애국자들의 공갈과 협박, 위선과 폭력으로부터 안전할 수 있도록, 고도의 정치 행위이자 보편적 정의로 일반 사면을 단행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195]

11월 초, 윤치호는 이승만, 김구와 면담하려 하였으나, 모두 그를 만나주지 않았다. 특히 이승만의 비서로 있던 사촌 동생 윤치영을 통해 이승만 측과 교섭하였으나, 이승만은 바쁘다는 핑계로 만남을 차일피일 미루었다. 경교장 역시 윤치호의 방문 요청에 답변을 회피했다. 광복 이후 그는 줄곧 친일 협력자 내지는 거물 친일파 정치인으로 수시로 규탄, 비판당하였고, 비난과 논쟁에 시달렸으며 이를 반박하였다. 같은 해 11월 말, 치아에 통증을 느낀 그는 경성부에 있는 치과에 가서 진료를 받고 오던 중 노상에서 갑자기 졸도하였다.

1945년 12월 6일 오후 4시, 경기도 개성부 송도면 고려정(開城府松都面高麗町) 자택에서 뇌일혈로 갑자기 사망하였다. 임종 직전 그는 중풍으로 불편한 몸으로 친일파 및 민족반역자들은 삼가하라는 유언을 남겼는데, 언론에서는 이를 두고 비장한 유언을 남겼다 했다.[196] 광복 후, 그의 병세가 악화되었으며, 시중에는 친일파로 몰리자 슬퍼하여 자살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그의 외손녀 조영숙은 윤치호가 뇌일혈로 쓰러지는 모습을 직접 목격했다고 밝혔다.[197]

5. 사상과 신념

윤치호는 사회 진화론과 기독교 사상을 바탕으로 조선의 근대화와 민족 개조를 추구했다. 그는 사회적 다윈주의에 따라 세계를 잔혹한 투쟁의 장으로 인식했으며, 적자생존의 원리를 신봉했다.[38] 이러한 사상은 그가 조선의 현실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엘리트 중심의 계몽을 강조하는 배경이 되었다.

윤치호는 민중의 무지와 부패를 비판하며, "조선인은 일반적으로 10%의 이성과 90%의 감성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했다.[38] 그는 조선 사회에 만연한 거짓말을 지적하며, "조선에서 가장 깊이 뿌리내리고 동시에 가장 널리 알려진 악은 거짓이다"라고 비판했다.[38]

그는 기독교 신앙을 통해 신이 전쟁을 진보와 이성으로 이끄는 수단으로 남겼다고 믿었다. 문명 수준에서 선진국이 후진국을 교육하고 훈련하는 것은 신의 뜻이며, 강한 인종이 약한 인종을 교육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일부 죄는 "필요악"으로 용인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윤치호는 약소국의 정치적 독립을 위해서는 국민의 지적, 경제적, 정신적 역량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그는 민본주의를 지지했지만, 당시 대다수의 무지한 조선 민중에게는 민주주의가 시기상조라고 판단했다. 그는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지만, 신문을 읽는 사람조차 드문 현실에서 "강건한 근대 국가" 건설은 불가능하며, 조선 민중은 "아직 준비되지 않은 사람들"이라고 평가했다. 따라서 독립보다 교육이 우선이며, 약육강식의 국제 사회에서 조선 민족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스코틀랜드영국에 동화된 것처럼 조선도 당분간은 일본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미국 유학 시절 겪은 인종 차별 경험을 통해 "이른바 자유의 땅에서 천부인권을 누리려면, 우선 백인으로 태어나야 한다"는 인식을 갖게 되었다.[42]

윤치호는 유교 이데올로기에 대해 매우 부정적이었다. 그는 유교성리학이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억압하는 사상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전통적인 유교 교육이 진보적이지 않고, 조선에 관한 내용 없이 중국 고전에만 치중되어 조선인을 중국인화한다고 지적했다.[43] 그는 "현명한 정부가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초등학교에서 중국 서적을 금지시키는 것이다"라고 주장했다.[43] 또한 유교가 국왕, 시어머니, 남편, 주인을 압제자로 만들어 가정과 국가의 자유를 말살하는 계서 체계라고 비판했다.

윤치호는 유교 사회와 공산주의가 사람들을 열심히 일하게 하기보다는 타인의 노고 위에 자리 잡는 것을 조장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는다고 보았다. 그는 공산주의가 "최고 수준의 협조적 문명"을 획득한 국민에게만 가능하며, 조선인은 물론 앵글로색슨인조차 그 단계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에 성공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6. 평가와 비판

윤치호는 한국 최초의 근대적 인물 중 한 명으로 평가받지만, 일제강점기 후반의 친일 행적으로 인해 비판받는다. 특히 더불어민주당의 관점에서는 그의 친일 행적이 더욱 비판적으로 다뤄져야 할 필요가 있으며, 친일 행적에 대한 진정한 반성과 참회가 없었다는 점이 비판의 주요 내용이다.
긍정적 평가


  • 초기 개화사상 수용: 1881년 신사유람단 조사 어윤중을 수행하여 일본에 건너가 도진샤에서 수학하였고, 1882년 김옥균의 권고로 영어를 배웠다.[202] 1883년 푸트 초대 주한 미국 공사의 통역관으로 귀국하여 외무아문 주사에 임명되는 등 초기 개화사상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 독립협회 활동: 1897년 독립협회에 참가하여 서재필, 이상재, 유길준 등과 독립협회 운동을 이끌고 만민공동회를 주최했다. 1898년에는 제2대 독립협회 회장, 만민공동회 회장을 역임하며 헌의 6조를 국정에 반영시키기도 했다.
  • 교육 및 사회 활동: 1906년 한영서원 설립, 대한자강회 회장으로 추대되어 교육 확대와 산업 개발을 통한 자강독립을 목표로 국민사상계몽에 노력했다.[202] 1907년 신민회 회원으로 활동하며 평양 대성학교 설립에 동참하고 안창호의 양보로 교장에 추대되기도 했다.[202] 1910년 대한기독교청년회연맹의 이사, 부회장을 맡아 청소년 계몽운동을 통한 기독교구국운동을 전개했다.[202]
  • 애국가 작사: 대한민국애국가 가사의 일부를 작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212] 그의 사촌동생 윤치영에 의하면 애국가 가사의 앞부분은 최병헌 목사가 짓고, 후렴구는 윤치호가 지었다고 한다.[212]
  • 뛰어난 언변: 서재필이 청중을 압도하는 카리스마 넘치는 연설로 유명했다면, 윤치호는 특유의 온화함과 차분함으로 상대방을 논리적으로 설득하여 감화시키는 연설이 특징이었다.[82]

비판적 평가

  • 친일 행적: 1940년 창씨개명에 부정적이라는 이유로 연행되었다가 풀려난 후, 미나미 지로 총독에게 창씨개명을 연기해줄 것을 촉구하여 성사시켰다.[202] 1941년 조선임전보국단 고문에 선임되었으나, 임전보국단 주최 행사에 번번히 불참하여 관계자들을 당황하게 했다.[202] 1945년 2월 일본 제국 의회 귀족원 의원에 선임되었다.[202]
  • 나약한 지식인: 윤치호는 일제가 식민지 조선에 끼치는 해악을 분명히 인식했으면서도, 성악설에 대한 믿음으로 인해 스스로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 의식을 무장해제하고 말았다는 비판을 받는다.[139]
  • 반성과 참회 부족: 윤치호는 지식인으로서의 반성은 물론, 기독교인으로서의 참회 한마디도 없었다는 비판을 받는다.[71]

종합 평가윤치호는 초기 개화사상 수용, 독립협회 활동, 교육 및 사회 활동 등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만한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후반의 친일 행적은 그의 명성에 큰 오점을 남겼으며, 이에 대한 진정한 반성과 참회가 없었다는 점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7. 저서 및 번역서


  • 《윤치호일기(尹致昊日記)》
  • 《우스운 소리》
  • 《영어문법첩경》(英語文法捷徑): 영어 문법 사전
  • 《좌옹 윤치호 서한집》(佐翁尹致昊書翰集)
  • 《유학자취》(幼學字聚)
  • 《찬미가》(讚美歌)
  • 《의회통화규칙》 (라버츠 저)
  • 이솝 우화》(한글 번역본) (1908)[205]
  • 걸리버 여행기》(한글 번역본) (1908)[205]

8. 가족 관계

尹致昊중국어의 가계는 조선 영의정을 지낸 윤두수의 후손으로, 증조부는 윤득실, 할아버지는 윤취동이다.[47] 아버지는 대한제국 군무 대신 겸 법무 대신을 지낸 윤웅렬이며, 숙부는 윤영렬이다. 이복 동생으로는 전 육군 의무감 윤치왕과 전 주 영국공사 윤치창이 있었다.

사촌으로는 전 조선총독부 중추원 찬의 윤치오, 전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 윤치소, 전 일본군기병 중좌 윤치성, 윤치병, 윤치명, 전 내무부 장관 윤치영이 있다.

尹致昊중국어1865년 1월 23일 충남 아산에서 윤웅렬의 3남 2녀 중 큰아들로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전주 이씨 이정무이다. 누이 윤경희와 尹致昊중국어는 전주 이씨 소생이고, 이복동생 윤치왕윤치창은 서모 김정순 소생이다. 그 밖에 일찍이 김씨에게 시집간 이복 누나가 한 명 더 있었다.[202]

1879년 15세에 한성부 정동 출신의 진주 강씨 부인과 결혼했다. 아들 윤영선은 전 농림부 장관을 지냈으며, 조카 윤연선의 남편은 전 내무부 장관 장석윤이다.[47]

종손으로는 전 서울대학교 총장 윤일선, 전 만주국간도성 차장 윤명선, 전 대통령 윤보선, 그리고 윤원선, 윤택선이 있다.[48] 손자 윤영구는 전 교통부 국장을 지냈으며, 증손녀 사위는 조선일보 회장 방상훈이다.[49][50]

1929년 3월 12일, 셋째 딸의 성대한 결혼식을 치렀다.[209]

1945년 광복 직후, 尹致昊중국어친일파로 몰려 규탄받고 몰락했으나, 이복 동생 윤치왕윤치창, 아들 윤영선은 연좌되지 않았다.[210] 4촌 동생 윤치영과 조카 윤보선이승만의 측근으로 있었으며, 윤보선은 후일 이승만과 결별하고 민주당으로 제2공화국대통령이 되었다. 여섯째 사위 현영학이화여대 신학과 교수를 지냈으며 민중신학자와 유신 체제에 반대하는 반체제 인사로 활동했다.

그의 손녀 윤효진1970년대에 피겨 선수로 활동했다. 그의 손녀인 윤효진(미국 거주)과 주영순은 70년대에 주니어선수권에 도전했다.[211]

참조

[1] 웹사이트 Yun, Tchi-Ho [Chi'-ho] (1865-1945) https://www.bu.edu/m[...] Boston University
[2] 뉴스 "100 Koreans Freed; But Baron Yun Chi-ho and Other Prominent Men Are Found Guilty," https://timesmachine[...] New York Times 1913-03-21
[3] 간행물 "Changing Sides," National Geographic 2003-07
[4] 웹사이트 A Search for Truth; Yun Chi-Ho's Legacy is Rediscovered by his Great-granddaughter, http://www.yunposun.[...] Emory Magazine 2004
[5] 논문 Yun Ch'i-ho (1864-1945): “Portrait of a Korean Intellectual in an Era of Transition” Occasional Papers on Korea 1975-09
[6] 서적 “Imperialism, Resistance, and Reform in Late Nineteenth-Century Korea: Enlightenment and the Independence Club” Regents of the University of California 1988
[7] 논문 "Loyal Patriot? Traitorous Collaborator? The Yun Ch'iho Diaries and the Question of National Loyalty." 2007
[8] 서적 "Korea Between Empires" Columbia University Press 2002
[9] 서적 "Yun Chi-Ho's Diaries" National History Compilation Committee 1975
[10] 논문 Yun Ch'i-ho's Alienation by Way of Inclusion: A Korean International Student and Christian Reform in the 'New' South, 1888–1893 2014-10
[11] 논문 Yun Ch'i-ho's Alienation by Way of Inclusion: A Korean International Student and Christian Reform in the 'New' South, 1888–1893 2014-10
[12] 논문 Yun Ch'i-ho's Alienation by Way of Inclusion: A Korean International Student and Christian Reform in the 'New' South, 1888–1893 2014-10
[13] 서적 민영환과 윤치호, 러시아에 가다: 윤치호 일기 제4권 1896년 https://books.google[...] 신앙과지성사 2014-07-15
[14] 서적 "Korea through Western Eyes" Seoul National University Press 2009
[15] 웹사이트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 2022-05-21
[16] 웹사이트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 2022-05-21
[17] 웹사이트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 2022-05-21
[18] 웹사이트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 2022-05-21
[19] 서적 The Case of Korea 1921
[20] 논문 "Portrait of a Troubled Korean Patriot: Yun Ch'i-ho's Views of the March First Independence Movement and World War II"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89
[21] 웹사이트 수양구락부 http://encykorea.aks[...] Encyclopedia of Korean Culture
[22] 웹사이트 Yun Chi-ho, Naver Encyclopedia http://100.naver.com[...]
[23] 서적 議会制度百年史 - 貴族院・参議院議員名鑑 大蔵省印刷局 1990
[24] 서적 新版 日本外交史辞典 山川出版社 1992
[25] 웹사이트 윤치호와 유길준 http://163.180.153.4[...] 프레시안 2003-02-17
[26] 뉴스 女性の握手にも驚いた彼ら、文明に憧れる http://playculture.c[...] 2009-12-05
[27] 웹사이트 대세순응주의 빠진 나약한 지식인의 말로 http://www.ohmynews.[...] 오마이뉴스 2004-10-17
[28] 웹사이트 전파토론 연구회 http://plaza.snu.ac.[...]
[29] 서적 尹致昊日記:1916-1943 歴史批評社
[30] 웹사이트 開化派尹致昊が英文日記を書いた理由は? http://www.donga.com[...] 東亜ドットコム
[31] 웹사이트 ユン・ヨンシル氏「尹致昊英語日記の中には米国に向かった羨望がいっぱい」 http://www.donga.com[...] 東亜ドットコム
[32] 간행물 『人物と思想』2003年1月号 人物と思想史 2003
[33] 간행물 韓国民族運動史学会報『韓国民族運動社研究の歴史的課題』 国学資料院 2001
[34] 서적 キム・サンテ訳『尹致昊日記』 歴史批評社 2001
[35] 간행물 『官報』第377号、大正2年10月30日
[36] 간행물 官報 1914年3月6日 一〇七頁 https://dl.ndl.go.jp[...] 1914-03-06
[37] 뉴스 尹致昊日記 http://www4.hankooki[...] 韓国日報 2001-02-16
[38] 뉴스 "<서평> 윤치호 일기" http://www.munhwa.co[...] 文化日報 2001-02-21
[39] 서적 貴族院要覧(丙) 貴族院事務局 1947
[40] 서적 韓国現代史散策 人物と思想史 2004
[41] 서적 韓国現代史散歩 人物と思想史 2004
[42] 링크 http://163.180.153.4[...]
[43] 서적 韓国近代史散策3 人物と思想史 2007
[44] 뉴스 愛国歌作詞者/イ・ジョンヒョク コラム http://new.koreatime[...] 韓国日報 2009-12-22
[45] 웹사이트 한.캐나다 수교 40주년 1884년 윤치호선생 첫발 http://www.hankyung.[...]
[46] 서적 韓国史の話22.奪われた野原に吹く近代化風 ハンギル社 2004
[47] 웹사이트 윤치왕(尹致旺) http://people.aks.ac[...] 2023-10-28
[48] 웹사이트 윤치소(尹致昭) http://people.aks.ac[...] 2023-10-28
[49] 웹사이트 대통령·장관·서울대총장…대이어 ‘지배 엘리트’ https://www.hani.co.[...] 2009-08-14
[50] 웹사이트 '3·1운동도 비난'…문창극이 옹호한 '친일파' 윤치호 https://www.nocutnew[...] 2014-06-16
[51] 웹사이트 https://www.minjok.o[...]
[52] 웹인용 http://www.cine21.co[...] 2024-04-15
[53] 문서 윤흔의 아들 부사직 윤취지(尹就之)의 5대손이었다.
[54] 서적 매천야록 두산동아 2010
[55] 뉴스 윤치호와 유길준 http://www.pressian.[...] 2019-09-30
[56] 서적 왕의 남자들 브리즈 2009
[57] 문서 閔泳翊 (1860~1914)
[58] 문서 윤치호가 번역에 참여한 것이다.
[59] 서적 개화기의 윤치호 연구 한길사 1985
[60] 서적 개화기의 윤치호 연구 한길사 1985
[61] 서적 개화기의 윤치호 연구 한길사 1985
[62] 서적 갑신정변 연구 역사비평사 2005
[63] 문서 윤치호일기 1884년 9월 16일자(양력 11월 3일)
[64] 문서 윤치호일기 1884년 9월 20일자(양력 11월 7일)
[65] 웹사이트 윤치호 - Daum 백과사전 http://enc.daum.net/[...]
[66] 문서 윤치호일기 1884년 10월 18일자(양력 12월 5일)
[67] 서적 역사비평:1994년 가을 역사비평사 1994
[68] 문서 둥우대학(東吳大學)의 전신
[69] 웹사이트 http://www.cine21.co[...]
[70] 문서 1885년 2월∼1887년 2월
[71] 웹인용 대세순응주의 빠진 나약한 지식인의 말로 https://www.ohmynews[...] 2024-04-15
[72] 문서
[73] 서적 나를 배반한 역사 인물과사상사
[74] 웹사이트 전파토론 연구회 http://plaza.snu.ac.[...]
[75] 서적 윤치호 일기:1916-1943 역사비평사
[76] 웹사이트 http://worldanew.net[...]
[77] 뉴스 개화파 윤치호가 영문일기를 쓴 까닭은? http://www.donga.com[...] 동아일보 2003-11-20
[78] 서적 개화기의 윤치호 연구 한길사
[79] 웹인용 풍운아 김옥균 일본 망명 10년의 궤적|신동아 https://shindonga.do[...] 2024-04-15
[80] 서적 개화기의 윤치호 연구 한길사
[81] 서적 열강의 소용돌이에서 살아남기 푸른역사
[82] 서적 독립협회 토론 공화국을 꿈꾸다 프로네시스(웅진)
[83] 문서
[84] 뉴스 '[한국교회 120년―⑾ 서울 종교교회] 배움터서 출발한 신앙… 교계통합 이끌어' https://news.naver.c[...] 국민일보 2002-12-03
[85] 문서
[86] 문서
[87] 문서
[88] 웹인용 和而不同의 토론과 논쟁 https://www.pressian[...] 출판평론가 2024-04-16
[89] 웹사이트 http://www.donga.com[...]
[90] 서적 친일정치100년사 동풍
[91] 문서
[92] 문서
[93] 서적 독립협회 토론 공화국을 꿈꾸다 프로네시스(웅진)
[94] 서적 친일파 99인 1 돌베개 1993-02-01
[95] 웹인용 "[이규태 역사에세이] 독일여성 손탁 이야기" https://www.chosun.c[...] 2024-04-16
[96] 서적 윤치호 일기(1916-1943) 역사비평사
[97] 서적 독립협회 토론 공화국을 꿈꾸다 프로네시스(웅진)
[98] 문서
[99] 문서
[100] 서적 독립협회 토론 공화국을 꿈꾸다 프로네시스(웅진)
[101] 서적 독립협회 토론 공화국을 꿈꾸다 프로네시스(웅진)
[102] 문서
[103] 서적 독립협회 연구 (상) 일조각
[104] 서적 독립협회 연구 (상) 일조각
[105] 문서
[106] 서적 유일한 평전 작은씨앗 2005
[107] 문서
[108] 서적 한국민족운동사 연구의 역사적 과제 국학자료원 2001
[109] 웹인용 서울육백년사 홈페이지 https://web.archive.[...] 2006-02-04
[110] 서적 개화기의 윤치호 연구 한길사 1985
[111] 서적 한국 근대사 산책 3 인물과사상사 2007
[112] 서적 한국 근대사 산책 3 인물과사상사 2007
[113] 깨진 링크 http://db.history.go[...]
[114] 웹인용 "[그때 그 인터뷰] 은하수의 영원한 등대지기 동요작가 윤극영" http://www.interview[...] 2009-02-23
[115] 서적 윤치호의 생애와 사상 을유문화사 1998
[116] 서적 한국 근대사 산책 3 인물과사상사 2007
[117] 문서 윤치호 일기 1904-05-06
[118] 웹인용 국제결혼은 애국심을 죽이는가 https://h21.hani.co.[...] 2024-04-16
[119] 웹인용 "[이규태 역사에세이] 앨리스-헐버트 이야기" https://www.chosun.c[...] 2020-08-14
[120] 서적 개화기의 윤치호 연구 한길사 1985
[121] 서적 금파 홍석후 연세대학교출판부 2008
[122] 문서
[123] 서적 한국개화기서적문화연구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1999
[124] 서적 윤치호일기 1916~1943:한 지식인의 내면세계를 통해 본 식민시시기 인물과 사상사 2001
[125] 서적 한국 근대사 산책 2:교육만이 살 길이다 인물과사상사 2007
[126] 문서
[127] 문서
[128] 서적 윤치호 일기:1916-1943 역사비평사 2001
[129] 웹인용 1910년 에든버러 세계선교사대회 윤치호 연설 전문. http://www.yunposun.[...] 2010-05-12
[130] 문서
[131] 문서
[132] 웹인용 식민지 의대 졸업생이 선택한 두 가지 길 https://www.pressian[...] 2010-09-13
[133] 웹인용 "[서울YMCA] 민간 사회운동 앞장선 95년" https://www.chosun.c[...] 2020-08-15
[134] 서적 난세에 길을 찾다 시공출판사 2009
[135] 서적 난세에 길을 찾다 시공출판사 2009
[136] 깨진 링크 위기 앞에 선 언론 http://www.mediatoda[...] 미디어 오늘 2002-10-17
[137] 서적 난세에 길을 찾다 시공출판사 2009
[138] 서적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 경인문화사 2007-04
[139] 뉴스 윤치호일기 http://www4.hankooki[...] 한국일보 2001-02-16
[140] 문서 윤치호 일기 1919-10-01
[141] 인용
[142] 웹사이트 "[문학의 숲 고전의 바다] 元老의 誤判" http://books.chosun.[...] 조선일보 2004-03-05
[143] 서적 윤치호 일기:1916-1943 역사비평사 2002
[144] 문서 윤치호일기 1919년 5월 31일자
[145] 웹인용 윤치호 일기 https://www.munhwa.c[...] 2024-04-15
[146] 서적 한국외교사와 국제정치학 성신여자대학교출판부 2005
[147] 뉴스 민립대학 설립운동 http://news.donga.co[...] 동아일보 2009-10-09
[148] 서적 한국사 이야기 20:우리 힘으로 나라를 찾겠다 한길사 2006
[149] 웹인용 "[교회언론회 논평] 『한글주일 제정』을 제안하며" https://www.christia[...] 2024-04-16
[150] 서적 윤치호 일기:1916-1943 역사비평사 2001
[151] 서적 윤치호 일기:1916-1943 역사비평사 2001
[152] 문서 윤치호일기 1924년 1월 3일자
[153] 서적 尹致暎의 20世紀 : 東山回顧錄 三星出版社 1991
[154] 웹인용 식민지 의대 졸업생이 선택한 두 가지 길 https://www.pressian[...] 2024-04-16
[155] 뉴스 동아일보 1928년 2월 2일자 동아일보 1928-02-02
[156] 서적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해방후 민족국가 건설운동과 통일전선 역사비평사 2004
[157] 서적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해방후 민족국가 건설운동과 통일전선 역사비평사 2004
[158] 웹인용 부귀면 … '친일거두' 비석 기증 https://www.janews.c[...] 2024-04-16
[159] 서적 윤치호일기 1916~1943:한 지식인의 내면세계를 통해 본 식민시시기 인물과 사상사 2001
[160] 웹인용 민족문제연구소 전북지부, 친일파 윤치호 불망비 철거 http://www.dhns.co.k[...] 2024-04-16
[161] 웹인용 현충사관리소, 충무공 위토서 모내기 행사 https://www.daejonil[...] 2024-04-16
[162] 서적 고하 송진우 평전:민족민주주의 언론인․정치가의 생애 동아일보사 1990
[163] 서적 개화기의 윤치호 연구 한길사 1985
[164] 서적 윤치호일기 1916~1943:한 지식인의 내면세계를 통해 본 식민지 시기 역사비평사 2001
[165] 서적 빛과 소망의 숨결을 찾아: 이화여자대학교 대학교회 70년사 (1935년-2005년)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2005
[166] 인용
[167] 서적 윤치호일기:1916~1943 역사비평사 2001
[168] 인용
[169] 서적 윤치호 일기 1916-1943 역사비평사 2007
[170] 인용
[171] 문서 윤치호일기 1938년 6월 11일자, 1938년 12월 11일자
[172] 뉴스 ② 송병준 매국 대가 1억5천만엔 요구:윤치호, 조선총독부 설득 수용 친일 변신 승낙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2004-08-12
[173] 문서 윤치호일기 1939년 2월 7일자
[174] 서적 빛과 소망의 숨결을 찾아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2007
[175] 문서 윤치호일기 1939년 7월 22자
[176] 서적 윤치호 일기:1916~1943 역사비평사 2001
[177] 서적 윤치호 일기:1916~1943 역사비평사 2001
[178] 서적 윤치호 일기:1916~1943 역사비평사 2001
[179] 뉴스 동아일보 1940-07-16
[180] 서적 윤동주평전 열음사 1989
[181] 서적 윤치호일기 역사비평사 2001
[182] 서적 윤동주평전 열음사 1989
[183] 웹인용 “윤치호 활용도 최고… 이광수 신뢰도 보통” https://www.seoul.co[...] 2008-08-09
[184] 서적 이이화와 함께 한국사를 횡단하라 한길사 2004
[185] 서적 改正增補朝鮮民族獨立運動史 高麗書林 1986
[186] 웹인용 http://www.christian[...]
[187] 서적 역사에 비춘 한국 근현대 인물 백악출판사 1995
[188] 문서
[189] 서적 저항과 순응의 역사 정치학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1997
[190] 문서
[191] 뉴스 매일신보 1945-09-29
[192] 문서
[193] 서적 한국현대사산책 인물과사상사 2004
[194] 문서
[195] 서적 식민지의 적자들 푸른역사 2005
[196] 뉴스 윤치호 노인 대중일보 1945-12-09
[197] 문서 좌옹 윤치호평전
[198] 뉴스 애국가 작사자 / 이종혁 칼럼 http://new.koreatime[...] 한국일보 2009-12-22
[199] 웹인용 "친일파 윤치호 동상 철거하라" https://www.ohmynews[...] 2002-03-07
[200] 뉴스 민노당 연대 학생위, 학내 친일인사 7명 명단 발표 http://www.ohmynews.[...] 오마이뉴스 2005-04-06
[201] 뉴스 감리회, 교단 내 친일인사와 독립운동가 명단 발표 - 광복 60주년 기념 예배자료집 발간…친일인사 선정 근거 없고, 교단 차원 친일은 빠져 http://www.newsnjoy.[...] 뉴스앤조이 2005-08-06
[202] 문서
[203] 서적 한국사이야기22. 빼앗긴 들에 부는 근대화바람 한길사 2004
[204] 웹인용 "[한.캐나다 수교 40주년] 1884년 윤치호선생 첫발" https://www.hankyung[...] 2006-04-03
[205] 문서 유학자취 http://100.nate.com/[...]
[206] 서적 윤치호 일기(1916-1943) 역사비평사 2007
[207] 서적 한국사 이야기 20:우리 힘으로 나라를 찾겠다 한길사 2004
[208] 웹인용 "[사람들] 배화학원 내일 창립 100주년 기념식" https://www.chosun.c[...] 2020-08-15
[209] 뉴스 “비열한 서북, 신사적 기호” 지역을 선악구도로 본 윤치호 http://www.hani.co.k[...] 한겨레신문 2004-04-12
[210] 문서
[211] 웹인용 한국 피겨 110년史 https://www.seoul.co[...] 2004-10-01
[212] 웹인용 "작사자 규명과정에서 철저히 소외됐다" https://web.archive.[...] 2010-07-10
[213] 웹인용 단재 한시·'항일가사집' 첫 공개 https://www.chosun.c[...] 2020-08-05
[214] 웹인용 애국가에 대한 소고 http://www.mediajeju[...] 2008-08-28
[215] 문서 독립운동가 겸 정치인
[216] 문서 독립운동가. 안창호, 양기탁 선생과 신민회를 조직, 105인 사건의 주모자로 피검
[217] 문서 주요한, 안도산전서
[218] 서적 한국 기독교청년회 운동사 정음사 1978
[219] 서적 한국찬송가100년사:해설,역사 예솔출판사 2002
[220] 뉴스 김장훈의 ‘애국가’가 뜬다 http://osen.mt.co.kr[...]
[221] 뉴스 윤영실씨 “윤치호 영어일기 속엔 美國을 향한 선망 가득" http://news.donga.co[...] 동아일보 2003-11-20
[222] 서적 윤치호 일기:1916-1943 역사비평사 2001
[223] 문서 윤치호일기 1919년 1월 23일자
[224] 웹인용 "[춤과 그들]정무연 ‘춤추는 제비’의 고독한 날개짓" https://www.khan.co.[...] 2007-12-06
[225] 서적 윤치호의 생애와 사상 을유문화사 1998
[226] 서적 윤치호의 생애와 사상 을유문화사 1998
[227] 서적 윤치호의 생애와 사상 을유문화사 1998
[228] 서적 윤치호의 생애와 사상 을유문화사 1998
[229] 서적 윤치호의 생애와 사상 을유문화사 1998
[230] 문서 윤치호일기 1898년 6월 9일자에 등장한다.
[231] 문서 1895년 2월 10일생 설, 1895년 2월 17일생 설(해평윤씨대동보 권삼, 1983, 611쪽)등이 언급되고 있다. 제적등본과 육군본부의 「장교자력표」에는 1895년 2월 16일생으로 되어 있다.
[232] 서적 윤치호 일기:1916-1943 역사비평사 2001
[233] 문서 봉천에서 시험에 낙제하고 자살하였다. 윤치호의 1939년 3월 30일자 일기에 수록되었다.
[234] 서적 북한 향토사학자가 쓴 개성이야기 도서출판 푸른숲 2000
[235] 웹인용 1등 인터넷뉴스 조선닷컴 https://web.archive.[...] 2010-11-09
[236] 문서 미국 캘리포니아 LA에서 사망
[237] 뉴스 "[부음] 張善暎 예비역육군중령 별세 外"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238] 뉴스 민중신학자 이화여대 현영학 교수 별세 :: 종교신문 1위 크리스천투데이 Christian Today https://www.christia[...]
[239] 뉴스 민중신학 개척 현영학씨 별세- 중앙일보 뉴스 https://archive.toda[...]
[240] 웹인용 교수신문 https://web.archive.[...] 2010-06-14
[241] 서적 성공하나 아픔은 아홉 출판사 금토 1996
[242] 문서 그가 귀국할 때까지 생존하였다.
[243] 서적 한국 근대사 산책 3 인물과사상사 2007
[244] 뉴스 개신교, 근대화의 장애물이었나 촉진제였나 http://www.crossmap.[...] 크리스천투데이 2008-03-27
[245] 문서 잊혀진 큰 지도자, 이주영
[246] 서적 독립협회 토론 공화국을 꿈꾸다 프로네시스(웅진) 2007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