융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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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융무제는 명나라 황족 출신으로, 1644년 청나라에 의해 홍광제가 포로로 잡히자 푸저우에서 황위에 올라 융무 연호를 사용했다. 그는 숭정제에 의해 가택 연금되기도 했으나, 명나라 부흥을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푸젠성의 지리적 한계, 군사력 부족, 관료들의 분열로 인해 통치에 어려움을 겪었고, 1646년 청나라 군대에 포로로 잡혀 단식하다 사망했다. 융무제는 황제 즉위 후 자신의 조상들을 황제로 추존했으며, 정성공을 아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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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융무제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 | |
| 휘 | 주율건(朱聿鍵) |
| 자 | 장수(長寿) |
| 묘호 | 소종(紹宗) |
| 시호 | 배천지도홍의숙목사문열무민광효양황제(配天至道弘毅肅穆思文烈武敏仁廣孝襄皇帝) |
| 연호 | 융무(隆武) |
| 출생 | 1602년 5월 25일 |
| 사망 | 1646년 10월 6일 |
| 매장지 | 뤄한링(羅漢嶺), 팅저우 |
| 정치 | |
| 직위 | 남명의 황제 |
| 재위 기간 | 1645년 8월 18일 – 1646년 10월 6일 |
| 이전 통치자 | 홍광제 |
| 다음 통치자 | 소무제 |
| 왕조 | 남명 |
| 연호 | 융무(隆武) |
| 가계 | |
| 아버지 | 주기성 |
| 어머니 | 모씨 부인 |
| 배우자 | 효의양황후 |
| 자녀 | 주린원, 장경태자 |
| 기타 | |
| 존호 | 사문황제 (사후 영력제에 의해 추존) |
| 시호 | 패천지도홍의숙목사문열무민광효양황제 (사후 영력제에 의해 추존) |
| 사당호 | 소종 (사후 영력제에 의해 추존) |
2. 생애
1602년 명나라의 제후국 당왕(唐王) 주석황(朱碩熿)의 손자이자, 주기성(朱器墭)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주원장의 23번째 서자로 당(唐)에 봉작된 주경(朱桱)의 8대손으로 명나라 황실과는 먼 친척이었다.[6] 1632년 할아버지 주석황의 뒤를 이어 당왕에 올랐다.
1636년 숭정제에 의해 작위가 박탈되고 펑양에 가택 연금되었다가, 1644년 숭정제가 사망한 후 홍광제가 즉위하자 사면되었다. 홍광제가 청군에 포로로 잡히자, 1645년 복주에서 정지룡, 황도주 등의 추대로 황제에 즉위하여 융무 연호를 사용하였다.
홍광제가 청나라군에 포로로 붙잡혀 처형당하자 명나라 부흥군에 의해 황제로 옹립되었으나, 다른 부흥군은 연락이 되지 않아 주이해를 황제로 옹립하는 등 혼선이 빚어졌다.[6]
정지룡의 아들 정성공이 융무제에게 처음 알현했을 때, 융무제는 그의 용모와 총명함을 마음에 들어 하며 "짐에게 공주(딸)가 없는 것이 유감이다"라고 말하며 국성인 주씨 성을 하사하였다.
1646년 청나라 군대가 푸젠성으로 진격해 오자 융무제는 포로로 잡혔다.[6] 융무제는 단식으로 저항하다가 4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6]
2. 1. 초기 생애와 당왕 즉위
1602년 명나라의 제후국인 당왕(唐王) 주석황(朱碩熿)의 손자이자, 주기성(朱器墭)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주원장의 23번째 서자로 제후국 당(唐)에 봉작된 주경(朱桱)의 8대손으로 명나라 황실과는 먼 친척이었다.[6] 아버지 주기성은 주석황의 서자(庶子)였다.1632년 할아버지 주석황의 뒤를 이어 당왕에 올랐는데, 이는 아버지 주기성이 요절했기 때문이었다. 당왕에 오르자 그는 아버지 주기성을 왕으로 추존하여 유왕(裕王)이라 하고 조부에게는 시호를 단왕(端王)이라 했다.
융무제의 아버지 주기는 당단왕 주석황의 적장자였다. 만력 22년(1594년) 주기는 세자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이후 주석황은 총애하는 측실의 아들 주기상을 세자로 삼으려 하여 장남을 학대했다. 만력 30년 4월 5일(1602년 5월 25일), 주기의 아내 모씨는 환관의 집에서 주율건을 낳았다. 주석황은 이 손자를 사랑하지 않았지만, 주석황의 어머니 태비 위씨(만력 41년(1613년) 훙거)는 증손자를 사랑하고 돌보았다. 이후 주기상은 입술 종양이라는 이유[4]로 감금되었고, 숭정 2년(1629년) 주기상에 의해 독살당했다. 이 사건은 혼란을 야기했고, 주석황도 두려워하여 내키지 않았지만 손자 주율건을 가독 상속자로 세웠다. 1630년 주석황도 사망했다.
당왕가 내의 긴 다툼 끝에, 숭정 5년(1632년) 주율건은 조부의 작위를 상속받아 당왕이 되었다. 숭정 7년(1634년)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숙부 주기상을 직접 죽였다. 숭정 9년(1636년) 겨울, 북방 정세의 위급함에 처해 주율건은 무장한 가신들을 이끌고 북경으로 올라가 숭정제를 지원하려 했다. 그러나 숭정제는 의심이 많아 이를 권력 탈취의 꾀로 의심했다. 이듬해 봄 주율건은 "무단 용병죄"와 "시숙죄"를 물어 서인으로 강등되어 펑양 고창(황족의 감옥)에 수감되었다. 옥중에서 주율건은 잦은 혹독한 고문으로 한 번은 위독한 상태에 빠졌다. 아내 증씨와 몇몇 관리들이 숭정제에게 상소를 올렸지만, 숭정제가 살아있는 8년 동안 효과가 없었다.
숭정 17년(1644년), 숭정제가 자살하고 홍광제가 남경에서 즉위하자 사면을 받아 광시 평락으로 이송될 예정이었다.
2. 2. 숭정제 시기의 시련
1636년, 주율건은 숭정제에 의해 작위를 박탈당하고 펑양에서 가택 연금되었다. 그의 이전 작위는 그의 동생 주율모(朱聿鏌중국어)에게 넘어갔다. 1641년, 이자성이 남양을 침략하자 주율모는 자결했다. 1644년 숭정제가 사망한 후, 명나라의 뒤를 이은 홍광제는 당왕을 가택 연금에서 해제했다.[4]숭정 5년(1632년), 주율건은 조부의 작위를 상속받아 당왕이 되었다. 숭정 7년(1634년),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숙부 주기상을 직접 죽였다. 숭정 9년(1636년) 겨울, 북방 정세가 위급해지자 주율건은 무장한 가신들을 이끌고 북경으로 올라가 숭정제를 지원하려 했다. 그러나 숭정제는 이를 권력 탈취 시도로 의심했다. 이듬해 봄, 주율건은 "무단 용병죄"와 "시숙죄"로 서인으로 강등되어 펑양 고창(황족 감옥)에 수감되었다. 옥중에서 주율건은 잦은 혹독한 고문으로 한 번은 위독한 상태에 빠지기도 했다. 아내 증씨와 몇몇 관리들이 숭정제에게 상소를 올렸지만, 숭정제가 살아있는 8년 동안 효과가 없었다.
2. 3. 남명 황제 즉위
1645년 8월, 여러 고위 관리들의 간청에 따라 푸저우에서 명나라 황위에 올라 연호를 "융무"(隆武)로 정했다.[6] 그의 연호는 "풍요롭고 무예가 뛰어남"을 의미한다. 유망한 시작을 보였지만, 여러 산맥으로 인해 제국의 중심부와 단절된 푸젠성의 지리적 위치, 효과적인 군대의 부족, 그리고 관료들이 통일된 입장을 찾지 못한 점은 융무 정부를 멸망으로 이끌었다.[6]홍광제가 청나라군에 포로로 붙잡혀 처형당하자 명나라 부흥군에 의해 황제로 옹립되었다. 그러나 부흥군의 다른 분파는 연락이 되지 않아 주이해를 황제로 옹립하는 등 혼선이 빚어졌다.[6]
1644년, 숭정제가 자살하고 홍광제가 남경에서 즉위하자 사면을 받아 광시 평락으로 이송될 예정이었다. 이송 중 홍광제가 청군에게 포로로 잡혔다는 소식을 들은 주율건은 복주에서 정지룡, 황도주 등의 추대로 황제에 즉위하고 융무 연호를 세웠다. 동족인 계림의 정강왕 주형가(주약극(석도)의 아버지)가 감국을 칭하자, 양광 총독 딩콰이추에게 명하여 이를 토벌하게 하여, 그를 잡아 복주로 끌고 가서 왕위를 박탈한 후 옥사시켰다.
정지룡의 아들 정성공이 융무제에게 처음 알현했을 때, 융무제는 그의 용모와 총명함을 마음에 들어하며 "짐에게 공주(딸)가 없는 것이 유감이다"라고 말했다. 융무제가 공주 대신 국성인 주씨 성을 하사했으나(정성공은 사양했다) 정성공은 "국성야"라는 이명으로 불리게 되었다.
2. 4. 융무제의 통치와 최후
1646년 청나라 군대가 푸젠성으로 진격해 오자 융무제는 포로로 잡혔다.[6] 융무제는 단식으로 저항하다가 4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6] 융무제는 양황후 증씨에게서 아들 주림원과 9명의 딸을 두었으나, 아들 주림원은 요절했다.[6] 동생 주율모는 이미 이자성의 난 당시 이자성에게 살해당했고, 융무제가 후계 없이 죽자 명나라 부흥군은 후계자 선정을 놓고 다시 내분에 휩싸였다.[6]1645년 6월 청나라 군대가 난징을 점령하자 융무제는 항저우로 도주했다. 그러나 같은 해 7월 6일 항저우가 청나라에 함락되자, 융무제(당왕)는 육로를 통해 동남부의 푸젠성으로 탈출했다.
같은 해 8월, 여러 고위 관리들의 간청에 따라 융무제는 푸저우에서 명나라 황위에 올라 연호를 "융무"(隆武)로 정했다. 연호 융무는 "풍요롭고 무예가 뛰어남"을 의미한다. 유망한 시작을 보였지만, 여러 산맥으로 인해 제국의 중심부와 단절된 푸젠성의 지리적 위치, 효과적인 군대의 부족, 그리고 관료들이 통일된 입장을 찾지 못한 점은 융무 정권을 멸망으로 이끌었다. 1646년 늦여름, 청나라 군대가 푸젠을 침공했을 때, 황제의 가장 강력한 동맹자인 정지룡은 항복했고, 그의 아들 정성공(국성야)은 바다로 물러났다.
결국 융무제에게는 점점 줄어드는 조정만이 남았다. 1646년 10월 6일, 융무제는 체포되어 즉시 처형되었다.
정지룡의 아들 정성공이 융무제에게 처음 알현했을 때, 융무제는 그의 용모와 총명함을 마음에 들어 하며 "짐에게 공주(딸)가 없는 것이 유감이다"라고 말했다. 융무제는 공주 대신 국성인 주씨 성을 하사했으나(정성공은 사양했다), 정성공은 "국성야"라는 이명으로 불리게 되었다.
융무 2년(1646년), 청군이 복주를 공격하자 융무제는 팅저우로 피신했으나, 청의 이성동의 군에게 붙잡혔다. 연행 도중, 황후 증씨와 10여 명의 환관이 물에 빠져 자살했다. 이후, 청군의 경비가 강화되어 도망칠 기회가 없었고, 융무제는 다음 달에 붕어했다. 향년 45세. 단식 자살로 추정된다.
3. 융무제의 추존과 추증
명나라 황실과 촌수가 멀었던 주율건은 황제로 즉위하자 자신의 4대 선조를 황제로 추증하고 묘호와 시호를 올렸다.
그는 제후에 봉작받지 못하고 사망한 아버지 당유왕(唐裕王) 주기성(朱器墭)에게는 선황제(宣皇帝), 모친 모씨(毛氏)에게는 선황후(宣皇后)를 추존하였다. 또한 조부 단왕 주석황에게는 단황제(端皇帝), 조모 위씨(魏氏)에게는 단황후(端皇后)를 추존하였다. 증조부 순왕 주주영(朱宙栐)에게는 순황제(順皇帝), 증조모 주씨(周氏)에게는 순황후(順皇后)를 추존하였고, 고조부 당경왕(唐敬王) 주우온(朱宇溫)에게는 혜황제(惠皇帝), 고조모 조씨(趙氏)에게는 혜황후(惠皇后)로 각각 추존했다.
4. 가계
| 관계 | 이름 | 비고 |
|---|---|---|
| 증조부 | 순황제 주주영(順皇帝 朱宙栐) | |
| 조부 | 단황제 주석황(端皇帝 朱碩熿) | 1632년 사망 |
| 부친 | 선황제 주기성(宣皇帝 朱器墭) | |
| 황후 | 효의양황후 증씨(孝毅襄皇后曾氏) | 정식 시호는 효의정렬자숙현명승천창성양황후(孝毅貞烈慈肅賢明承天昌聖襄皇后).[7] 1646년 5월 사망. |
| 장남 | 장경태자 주림원(莊敬太子 朱琳源) | 1646년 출생 및 사망. |
| 동생 | 주율모(朱聿鏌) | 1641년 이자성에게 살해됨. |
'''후궁:'''
- 효의양황후 증씨 (孝毅襄皇后 曾氏)
- 빈, 심씨 (沈嬪)
- 빈, 진씨 (陳嬪)
- 첩(妻)
'''자녀:'''
'''12명의 빈:'''
- 모씨, 모씨 - 정주에서 자살.
- 심씨, 모씨 - 정주에서 융무제와 함께 포로가 됨.
- 모씨 - 정주에서 융무제를 지키며 청군과 격투하다 전사.
- 유씨 - 정주로 피난 갈 때 임신 중이었으나, 이후 상세한 기록은 없음.
5. 연호
6. 평가
당왕 주율건은 명나라 황족의 정치 참여를 제한하는 정책에 반하여, 일찍이 제국의 통치에 관심을 보였고 황족의 역할 확대를 꾀했다. 이러한 시도는 숭정제 재위 기간 동안 가택 연금으로 이어졌지만, 역사와 명나라 제도에 대한 그의 지식은 근면한 성격과 결합되어 그가 황제 역할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도록 했다.[3]
주율건은 옥살이를 하며 고난을 함께 했던 부인과 매우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다고 한다.[3] 그는 중국의 관습과 달리, 후궁을 들이는 것을 완강히 거부했다.
참조
[1]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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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3]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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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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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사문대기(思文大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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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7]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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