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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세 (188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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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기세는 1888년 황해도 개성부에서 태어난 일제강점기의 연극인, 언론인, 기업인이다. 그는 일본 유학 후 신파극을 국내에 도입하여 유일단을 조직하고, 《장한몽》의 이수일 역으로 이름을 알렸다. 이후 예성좌, 조선문예단을 거쳐 예술협회를 창단하여 개량 신파극을 공연했으며, 윤심덕, 이애리수를 발굴하는 등 음반 및 영화 분야에서도 활동했다. 1920년대부터 국민협회 기관지 《시사신문》에 근무하며 언론인으로 활동했고,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서 사회부장, 편집인 겸 발행인을 역임하며 친일 행적을 보였다. 1938년 국일관을 인수하고 중일 전쟁 국방헌금을 헌납했으며, 2007년 친일반민족행위 195인 명단,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포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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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세 (1888년)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2. 생애

이기세는 1930년대 들어 음반 및 영화 보급 분야에서 활동했다. 1920년대에 이미 한국 최초의 소프라노이자 대중 가수인 윤심덕을 데뷔시켰고,[2]황성의 적〉으로 유명한 이애리수도 발굴했다.[3] 1930년 조선음률협회를 창립했으며, 영화배급사인 기신양행을 운영하기도 했다. 1934년에는 인기 레코드사인 빅타레코드의 문예부장을 지냈다.

2. 1. 초기 생애 및 연극 활동 (1888~1922)

1888년 황해도 개성부에서 태어났다.

신연극을 실행할 목적으로 교토로 건너가 당시 일본 신파극계 9간부의 한 사람이며 교토 신파극의 거두였던 시즈마(靜間小次郞)의 문하에서 2년간 주로 남의 연극을 산기(算記)하여 오는 일을 맡아보며 연극공부를 하고 귀국했다.[1]

1912년 안광익(安光翊), 김영근(金永根), 고수철(高秀喆) 등과 함께 신파극단인 유일단을 조직하고,[1] 극장 개성좌를 건립하며 초창기 연극계에서 신파극의 선구자로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이때 대표작인 《장한몽》에서는 주인공 이수일 역으로 열연하여 후세인들에게 오래 기억되고 있다.

한국사극의 세 번째 극단인 유일단은 1914년까지 《처(妻)》, 《자기의 죄(罪)》 등 인기 레퍼토리를 상연했다. 유일단이 해산된 후 1916년에 윤백남, 이범구(李範龜) 등과 함께 ‘예성좌(藝星座)’를 조직, 그 해 말 해산될 때까지 《카추샤》, 《쌍옥루(雙玉淚)》 등을 공연했다. 1919년에는 다시 ‘조선문예단’을 발족시켜 연쇄극(連鎖劇)을 상연했고, 잠시 연극을 떠나 《시사신문사(時事新聞社)》에 근무하다가, 1922년부터는 개량 신파극단인 ‘예술협회(藝術協會)’를 창단하여 《운명》, 《희망의 눈물》, 《눈오는 밤》 등 개량신파극을 공연했다.[1]

2. 2. 언론 활동 및 친일 행적 (1920~1938)

1920년 국민협회 기관지 《시사신문》에 근무하면서 언론인으로서 이력을 시작했다. 민원식과의 인연으로 시사신문에 들어가게 된 것으로 알려졌다. 1921년 국민협회 평의원을 지내는 등 3·1 운동에 대항하는 이념으로 신일본주의를 내세운 이 단체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1921년 1월 경성공회당에서 국민협회 창립 1주년 기념식이 열렸는데, 이때 이기세는 '소위민심악화'라는 제목으로 연설했다.

1923년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사회부장으로 발탁되어 3년 동안 재직했다. 1927년 매일신보 이사 겸 편집국 주사로 승진했고, 곧 편집인 겸 발행인에 올랐다. 1927년 7월 23일부터 1928년 2월 27일까지 이기세가 편집인 겸 발행인으로 근무하는 동안 매일신보는 사설을 통해 학생들의 동맹휴학을 '불상사'라며 비난하는 등 총독부 외곽 단체로서 기능을 충실히 수행했다.

1938년 유명한 유흥 음식점 국일관을 인수했다. 같은 해 중일 전쟁을 위한 국방헌금으로 거액인 500JPY을 헌납하기도 했다.

3. 친일 논란

이기세는 1920년부터 국민협회 기관지 《시사신문》에서 언론인으로 일했다. 민원식과의 인연으로 시사신문에 들어간 것으로 알려졌다. 1921년 국민협회 평의원을 지냈으며, 3·1 운동에 대항하는 신일본주의를 내세운 이 단체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같은 해 1월 경성공회당에서 열린 국민협회 창립 1주년 기념식에서 '소위민심악화'라는 제목으로 연설했다.[1]

1923년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사회부장으로 3년 동안 재직했다. 1927년 매일신보 이사 겸 편집국 주사로 승진했고, 곧 편집인 겸 발행인이 되었다. 1927년 7월 23일부터 1928년 2월 27일까지 편집인 겸 발행인으로 근무하는 동안 매일신보는 사설을 통해 학생들의 동맹휴학을 '불상사'라며 비난하는 등 총독부 외곽 단체로서의 기능을 수행했다.[1]

1938년 유흥 음식점 국일관을 인수했다. 같은 해 중일 전쟁 국방헌금으로 500JPY을 냈다. 1942년 유한회사 국일관을 설립해 이사가 되었다.[1]

3. 1. 친일파 명단 등재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2007년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확정한 친일반민족행위 195인 명단 언론 부문에 선정되었다.

참조

[1] 간행물 글로벌 세계 대백과 (추가 정보 필요)
[2] 웹인용 사의찬미 http://100.empas.com[...] 엠파스 백과사전 2008-04-25
[3] 서적 식민지시대 대중예술인 사전 소도 2006-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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