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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파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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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파극은 메이지 시대 일본에서 자유당 청년들이 정치적 주장을 펼치기 위해 연극을 이용하면서 시작된 연극 양식이다. 정치 의식이 약화되면서 상업 연극으로 발전했으며, 청일 전쟁 이후 신파극이라는 이름으로 구파와 대립했다. 일본에서는 가정비극, 화류비련극 등을 상연하며 전성기를 맞았고, 한국에는 일제강점기 이후 유입되어 일본 신파극을 모방하거나, 한국적 정서를 담은 작품으로 발전했다. 1920년대 개량신파로 변형되었으나, 한국 전쟁 이후 쇠퇴하여 영화 산업에 영향을 미쳤다. 신파극은 일본 영화에 영향을 주었고, 렌사게키와 같은 새로운 형태를 낳았지만, 현대 영화의 등장과 함께 쇠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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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파극
신파극
다른 이름신연극
기원자유민권운동 시대
창시 시기메이지 시대 중기
창시자가와카미 오토지로
영향가부키, 서양 연극
특징근대극, 통속극
소재멜로드라마, 사회 문제
쇠퇴 시기다이쇼 시대 이후
부활 노력전후 쇼치쿠 신키극
대표 극단쇼치쿠 신키극, 기타자와 구니히코 극단
대표 배우하나야기 쇼타로
오사나이 가오루
야마카와 우메코
다카다 미노루
구리시마 스미코
관련 용어구파 (연극)

2. 역사

메이지 시대 일본에서 '소시(壯士)'라 불리던 청년들은 이토 히로부미 내각의 유럽화 정책에 반대하며 정치적 주장을 담은 연극을 공연했다.[21] 이들은 정부의 언론 탄압에 맞서 연극을 통해 자신들의 목소리를 냈다.[21] 1894년 청일 전쟁이 일어나자 신연극 단체들은 전쟁 상황을 다룬 연극으로 큰 인기를 얻었다.[21] 이후 문학 작품이나 탐정 실화를 바탕으로 한 연극을 상연하면서 신파극의 예술적 특징이 확립되었고, '신파극(新派劇)'이라는 이름도 이때 생겨났다.[21]

신파극은 초기 정치극에서 가정 비극, 화류 비련극 등으로 변화하며 1904년부터 1910년까지 전성기를 맞이했다.[21]금색야차〉, 〈불여귀〉, 〈기지죄〉 등이 대표적인 작품이다.[21]

1910년대 일제강점기에 한국에 들어온 신파극은 처음에는 일본 작품을 그대로 수입하여 공연했다. 1912년 임성구의 혁신단이 '신파연극 원조'라는 광고를 내면서 '신파'라는 용어가 처음 사용되었다. 한국 신파극은 일본과 비슷하게 발전하여, 초기에는 군사극, 탐정극이 유행하다가 가정비극 멜로드라마가 큰 인기를 끌었다. 조중환의 《장한몽》, 이해조의 《봉선화》, 그리고 조선 시대 소설 《장화홍련전》, 《사씨남정기》 등이 공연되었다.

1920년대에는 개량신파라는 이름으로 변형되었고, 1931년 극예술연구회 창립으로 신극과 구분되었다. 1935년 동양극장 설립 이후 전성기를 맞이했으며, 이서구, 박진 등 전문 작가들이 인기를 얻었다. 임선규의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가 대표작이다. 광복 이후 왜색으로 치부되어 소멸한 신파극은, 현대 한국 영화산업 발전에 영향을 주었다.

2. 1. 일본 신파극의 기원과 발전

메이지 시대이토 히로부미 내각의 급진적인 유럽화 정책에 대한 반발로, 자유당 청년들이 정치적 주장을 펼치기 위해 연극을 활용하면서 신파극이 시작되었다.[21] 이들은 '소시(壯士)'라 불렸으며, 정부의 언론 탄압에 맞서 연극을 통해 국민들에게 자신들의 불만을 호소했다.[21] 1888년(메이지 12월), 스미노 후지노리는 오사카에서 "대일본 장사 개량 연극회"를 설립하여 '''장사극'''(소시 시바이)을 시작했고, 이는 신파극의 발상으로 여겨진다.[11]

1891년 3월, 가와카미 오토지로는 사카이시에서 "개량 연극"을 내세운 극단을 만들어 '''서생극'''(쇼세이 시바이)을 시작했다.[11] 장사극은 곧 쇠퇴했지만, 자유 민권 운동의 선전 역할을 한 서생극은 큰 인기를 얻어 신파극의 기반이 되었다.[11] 같은 해 11월, 이이 요호는 아사쿠사에서 "남녀 합동 개량 연극"을 내세운 '''제미관'''(세이비칸)을 설립하여 예술 지향적인 연극을 선보였다.[10]

1894년 청일 전쟁이 발발하자 여러 신연극 단체들이 전쟁 상황을 다룬 연극을 상연하여 큰 인기를 얻었다.[21] 이를 통해 신연극은 자리를 잡았고, 1897년 전후부터는 문학 작품을 각색하거나 탐정 실화를 바탕으로 한 연극을 상연하며 신파극의 예술적 특징이 확립되었다.[21] 이때부터 '신파극(新派劇)'이라는 이름이 생겨났다.[21]

1896년 4월, 이이 요호는 다시 이이 요호 극단을 조직하여 평생 좌장으로 활동했다.[12] 같은 해 9월, 가와카미 오토지로 극단에서 탈퇴한 다카다 미노루 등과 기타무라 료쿠로 등이 오사카에서 합류하여 '''성미단'''(세이비단)을 결성했다.[12] 이들은 오자키 고요의 『황금야차』, 도쿠토미 로카의 『부여귀』 등, 오늘날 신파극의 고전으로 불리는 작품들을 연이어 상연했다.[12]

이후 수년간 신파극은 발전기를 거치며, 초기 정치극에서 가정 비극, 화류 비련극 등을 상연하며 1904년부터 1910년까지 전성기를 맞이했다.[21]금색야차〉, 〈불여귀〉, 〈기지죄〉 등 대표적인 상연 목록들이 이 시기에 나왔다.[21] 1900년대 초에는 가부키에 비해 고등학교 이상의 지적 수준을 가진 관객들에게 지지를 받았다.[12]

2. 2. 한국 신파극의 수용과 전개

1910년대에 한일 병합 조약 체결 및 일제강점기 이후 한국에 유입되어 상연되었다. 처음에는 언어만 한국어로 바꾸어 공연했을 뿐, 일본 신파극을 그대로 수입한 경우가 많았다. 한국에서 '신파'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것은 1912년 2월 18일자 《매일신보》에서 임성구 일행의 혁신단이 낸 제2회 공연 광고를 '신파연극 원조'라고 이름 지은 것이 시초이다.

한국에서의 신파극 발전 과정은 일본과 비슷하게 진행되었다. 초기에는 일본식 군사극이 많았고, 탐정극을 거쳐 가장 큰 인기를 끈 것은 가정비극을 다룬 멜로드라마였다. 조중환의 《장한몽》, 이해조의 《봉선화》가 대표적이다. 조선 시대의 전래 소설 중 가정비극적 요소를 담은 《장화홍련전》, 《사씨남정기》 등도 공연되었다.

신파극에는 가부장제와 같은 구시대적 요소가 많았기 때문에, 1920년대에는 근대적 인식이 본격화되면서 개량신파라는 이름으로 변형되었다. 1931년 극예술연구회가 창립되면서 신극과 확연히 구분되는 장르가 되었다. 신파극도 선진적인 신극의 영향을 받아 발전을 위한 노력이 이루어졌다.

1935년 동양극장 설립 이후 체계적인 공연 체제를 가동하면서 상업적인 성공으로 전성기를 맞았다. 이서구, 박진, 송영, 김건, 박영호, 최독견 등이 신파극 전문 작가로 인기를 모았다. 소재는 가정비극과 사극이 주된 내용을 이루었다. 이 시기의 대표작은 흥행에 크게 성공한 임선규의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이다.

이러한 한국 신파극은 한국 전쟁이 일어나기 전인 1940년대까지 공연되다가 광복과 동시에 왜색으로 치부되어 소멸했다. 이러한 신파극의 소멸은 현대 한국 대중문화에서 영화산업이 큰 지분을 차지하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3. 특징

신파극은 메이지 시대에 서양 연극의 영향을 받아 등장한 일본의 연극 양식이다. 초기에는 정치적인 내용을 담은 연극으로 시작되었으나, 점차 오락적이고 감상적인 요소가 강해지면서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다.[21]

당시 일본에서 정치 운동에 참여한 청년들을 가리키는 '소시(壯士)'는 연극을 통해 자신들의 주장을 펼쳤다. 이토 내각의 유럽화 정책에 반대하는 자유당 청년들은 언론 탄압에 맞서 연극을 통해 국민들에게 자신들의 불만을 호소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연극 개량의 움직임이 나타났고, 점차 상업적인 연극으로 발전하게 되었다.[21]

1894년 청일 전쟁을 배경으로 한 군사극이 큰 인기를 얻으면서 신파극은 더욱 발전했다. 이후 소설극, 서구 번안극, 탐정극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이 상연되면서 신파극만의 특징이 확립되었다. 이때부터 '신파극(新派劇)'이라는 이름이 사용되기 시작했고, 기존의 전통극인 구파(舊派)와 대립하게 되었다.[21]

1904년부터 1910년까지 신파극은 전성기를 맞이했다. 이 시기에는 가정 비극, 화류비련극(花柳悲戀劇) 등 다양한 작품들이 상연되었으며, 〈금색야차〉, 〈불여귀〉, 〈기지죄〉등이 대표적인 작품으로 꼽힌다.[21]

신파극은 전통적인 가치를 일부 거부하면서도, 서구화된 도시 중산층의 취향에 맞는 소재를 선택했다. 공연 시간 단축, 여성 배우의 무대 복귀, 셰익스피어 희곡 각색 등 여러 혁신을 통해 구파와 대조되는 신파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3][1]

3. 1. 주제와 내용

신파극은 메이지 시대에 서양 연극의 영향을 받아 등장한 정치극에서 시작되었다.[21] 초기의 신파극은 이토 히로부미 내각의 급진적인 유럽화 정책에 대한 반대와 언론 탄압에 대한 저항으로, 정치적 주장을 펼치는 수단으로 활용되었다.[21] 그러나 점차 정치적 색채가 옅어지고 상업적인 연극으로 변화하였다.[21]

1894년 청일 전쟁을 계기로 전쟁 상황을 다룬 군사극이 인기를 얻으면서 신파극은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21] 이후 문단의 소설이나 서구의 번안극, 범죄 소설 등을 각색한 탐정극이 상연되면서 신파극의 예술적 특징이 확립되었다.[21]

신파극은 가정 비극이나 남녀 간의 사랑과 이별을 다룬 비련극을 주로 상연하며 전성기를 맞이했다.[21] 이 시기 대표작으로는 〈금색야차〉, 〈불여귀〉, 〈자신의 죄〉 등이 있다.[21]

한국에서는 일제강점기에 신파극이 유입되어 발전하였다. 초기에는 일본 신파극을 그대로 공연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점차 한국적인 소재와 정서를 담은 작품들이 창작되었다. 조중환의 《장한몽》, 이해조의 《봉선화》 등이 대표적이며, 조선 시대 고전 소설인 《장화홍련전》, 《사씨남정기》 등도 신파극으로 각색되어 공연되었다.

1920년대에는 근대적 인식이 확산되면서 신파극은 '개량신파'라는 이름으로 변화를 시도했고, 1931년 극예술연구회 창립 이후에는 신극과 뚜렷하게 구분되는 장르로 자리 잡았다. 1935년 동양극장 설립 이후 신파극은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며 전성기를 맞이했다. 임선규의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는 이 시기 대표작으로 꼽힌다. 그러나 광복 이후 신파극은 왜색으로 여겨져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신파극은 가부키와 같은 전통극과 달리, 현실적인 이야기와 무대 장치, 여성 배우의 등장 등으로 차별화되었다.[3][1] 또한, 셰익스피어 희곡이나 ''몬테크리스토 백작''과 같은 서양 고전을 각색하여 공연하기도 했다.[1]

신파극의 주요 작가와 작품은 다음과 같다.

작가작품
가와구치 마쓰타로『메이지 1대 여자』, 『쓰루하치 쓰루지로』, 『풍류 심카와 노래』, 『달밤의 까마귀』, 『황녀 와노미야』, 『유녀 유기리』
이즈미 쿄카『부인계도』, 『폭포의 흰 실』, 『일본 다리』
무라마쓰 소후『잔국 이야기』
도쿠토미 로카『호토토기스』
세토 에이이치『두 갈래 길』
나카노 미노루『내일의 행복』
오자키 코요『금색야차』
히구치 이치요『13야』
무로 사이세이『형 누이』
기쿠치 유호『자신의 죄』
미조구치 겐지『나니와 여자』
호조 히데지『여관 여주인』


3. 2. 형식

메이지 시대에 서양의 연극 양식을 받아들인 정치극으로 시작되어 19세기 말엽에 지위를 굳혔다. 발전 과정에서 점차 초기의 계몽적, 정치적 요소가 탈색되면서 오락적, 감상적 요소가 강해졌다.[21]

'소시(壯士)'는 당시 일본에서 초야에 있다가 정치운동에 투신한 청년을 일컫는 말인데, 그들은 정론(政論) 고취를 목적으로 연극을 이용하였다. 이토 내각의 극단적인 유럽화 정책에 대한 반대 입장에 있던 자유당 청년들은 안보조례(安保條例)로 인한 언론탄압에 대응하여 연극을 통해 국민에게 불만을 호소했다. 이것이 소박한 연극 개량의 의도를 부각시켰고, 생활수단으로 연극을 이용하게 되면서, 당초의 정치 의식은 약해지고 상업 연극으로 발전하게 되었다.[21]

1894년 청일 전쟁을 계기로 여러 신연극 단체는 전황 보고 연극을 상연하여 큰 호평을 받았다. 이러한 군사극으로 자리를 잡은 신연극은 1897년 전후부터 문단에 접근하여 소설극, 서구 번안극, 탐정극 등을 상연하며 신연극의 예풍(藝風)을 확립했다. 이때부터 '신파극(新派劇)'이라는 이름이 생겨 구파(舊派)와 대립하게 되었다.[21]

이후 수년간 발전기가 계속되고, 정치극에서 출발한 신파는 가정 비극, 화류비련극(花柳悲戀劇)을 상연하며 전성기(1904년~1910년)를 맞이했다. 〈금색야차(金色夜叉)〉, 〈불여귀(不如歸)〉, 〈하소수(夏小袖)〉, 〈상부련(想夫戀)〉, 〈고야성(高野聖)〉, 〈부자매(浮姉妹)〉, 〈여부파(女夫波)〉, 〈신생애(新生涯)〉, 〈기지죄(己之罪)〉, 〈협염록(俠艶錄)〉 등이 이 시기 대표적인 상연 목록이다.[21]

신파극은 "낡은" 가치를 거부하고 서구화된 도시 중산층의 입맛에 맞는 소재를 선호했지만, 여전히 몇 가지 전통적인 사고방식을 유지했다. 이는 ''큐하''(옛 학교)와 대조되어 신파(문자 그대로 "새로운 학교")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3]

신파극과 관련된 혁신으로는 공연 시간 단축, 여성 배우의 무대 복귀, 찻집 폐지, 셰익스피어 희곡이나 ''몬테크리스토 백작''과 같은 서양 고전의 잦은 각색 등이 있었다.[1] 사회적, 정치적 투쟁은 애국적인 사건들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극적 소재가 되었다.[2] 미학적으로 신파극 공연은 어두운 강당, 오케스트라 구역, 무대 장치 변화, 그리고 정교한 무대 조명으로 차별화되었다.[2]

3. 3. 주요 극단 및 인물

메이지 시대에 서양의 연극 양식을 받아들인 정치극으로 시작되어 19세기 말엽에 지위를 굳힌 일본 신파극은, 발전 과정에서 점차 초기의 계몽적, 정치적 요소가 탈색되면서 오락적, 감상적 요소가 강해졌다. 한국에서는 일제강점기1910년대부터 유입되어 상연되었다.[21]

주목할 만한 극단으로는 세이비칸, 세이비단, 이사미엔게키, 혼고좌가 있었고, 이이 요호, 다카다 미노루, 키타무라 로쿠로와 같은 배우들이 명성을 얻었다.[2] 세이비단 극단은 온나가타와 무대 밖 음악을 지속적으로 사용하여 이후의 신극("신극")보다 가부키에 가까운 보수적인 형태를 띠었다.[3][5]

1935년 동양극장 설립 이후 체계적인 공연 체제를 가동하면서 상업적인 성공으로 전성기를 맞았다. 이서구, 박진, 송영, 김건, 박영호, 최독견 등이 신파극 전문 작가로 인기를 모았다.[21]

4. 신파극의 유산과 현대적 의의

일본에서 신파극은 '소시(壯士)'라 불리는 청년들이 정치적 목적을 위해 연극을 이용하면서 시작되었다. 메이지 시대 초기, 이토 히로부미 내각의 급진적인 유럽화 정책에 반대하는 자유당 청년들은 언론 탄압을 받자 연극을 통해 국민에게 불만을 호소했다. 이 과정에서 연극개량 의도가 부각되었고, 상업 연극으로 발전하면서 정치적 의식은 약화되었다.[21]

1894년 청일 전쟁을 계기로 군사극이 인기를 얻었고, 이후 문단과의 교류, 서구 번안극, 탐정극 등을 통해 신파극의 예술적 특징이 확립되었다. 신파는 구파(舊派)와 대립하며 '신파극(新派劇)'이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다.[21]

1904년부터 1910년까지 신파극은 전성기를 맞이하여 〈금색야차〉, 〈불여귀〉, 〈신생애〉, 〈기지죄〉 등 대표작을 남겼다.[21]

4. 1. 쇠퇴와 변용

메이지 시대에 서양 연극 양식을 받아들인 정치극에서 시작된 신파극은 19세기 말엽에 그 지위를 굳혔다. 발전 과정에서 점차 초기의 계몽적, 정치적 요소는 사라지고 오락적, 감상적 요소가 강해졌다.[21]

한국에서는 한일 병합 조약 체결 및 일제강점기 이후인 1910년대부터 신파극이 유입되어 상연되었다. 처음에는 언어만 한국어로 바꾸어 공연했을 뿐, 일본산 신파극을 그대로 수입한 경우가 많았다. 한국에서 신파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것은 1912년 2월 18일자 《매일신보》에서 임성구 일행의 혁신단이 낸 제2회 공연 광고를 '신파연극 원조'라고 이름 붙인 것이 시초다.

한국에서의 신파극 발전 과정은 일본의 사례와 비슷했다. 초기에는 일본식 군사극이 많았고, 이후 탐정극을 거쳐, 결국 가장 큰 인기를 끈 것은 가정비극을 다룬 멜로드라마였다. 조중환의 《장한몽》, 이해조의 《봉선화》가 대표적이다. 조선 시대의 전래 소설 중 가정비극적 요소를 담은 《장화홍련전》, 《사씨남정기》 등도 공연되었다.

신파극은 가부장제와 같은 구시대적 요소가 많았기 때문에, 근대적 인식이 본격화된 1920년대에는 개량신파라는 이름으로 변형되었다. 1931년 극예술연구회가 창립되면서 신파극은 신극과 확연히 구분되는 장르가 되었다. 신파극도 선진적인 신극의 영향을 받아 발전을 위한 노력이 이루어졌다.

1935년 동양극장 설립 이후 체계적인 공연 체제를 가동하면서 상업적인 성공으로 전성기를 맞았다. 이서구, 박진, 송영, 김건, 박영호, 최독견 등이 신파극 전문 작가로 인기를 모았다. 소재는 가정비극과 사극이 주된 내용을 이루었다. 이 시기의 대표작은 흥행에 크게 성공한 임선규의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이다.[21]

이러한 한국 신파극은 한국 전쟁이 일어나기 전인 1940년대까지 공연되다가 광복과 동시에 왜색으로 치부되어 소멸했다. 이러한 신파극의 소멸은 현대 한국 대중문화에서 영화산업이 큰 지분을 차지하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무대에서 신파극은 다이쇼 시대 이후 성공하지 못했지만, 가와구치 마쓰타로와 같은 극작가, 미즈타니 야에코와 같은 여배우, 키타무라 로쿠로와 하나야기 쇼타로와 같은 배우들이 이 형식을 유지하는 데 기여했다.[3] 신파극은 또한 대한민국 연극에 ''신파''(신파) 장르를 통해 영향을 미쳤다.[6]

일본에 영화가 도입되면서, 신파극은 구파극에 대항하는 최초의 영화 장르 중 하나가 되었는데, 많은 영화가 신파극을 바탕으로 제작되었기 때문이다.[7] 이노우에 마사오와 같은 신파극 배우들이 영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영화(야외 장면)와 연극을 무대에서 혼합한 형태인 렌사게키("체인 드라마")가 등장했다.[8] 1910년대 개혁적인 순수 영화 운동이 일어나면서, 계급과 사회적 편견에 시달리는 여성의 멜로드라마적인 이야기를 다룬 신파극 영화를 강력하게 비판했고, 결국 현대적인 소재를 다룬 영화는 1920년대에 역사극인 시대극에 대항하여 겐다이게키로 불리게 되었다. 신파극 이야기는 수십 년 동안 영화로 제작되었다.[7]

4. 2. 현대적 의의

19세기 말 일본에서 메이지 시대에 서양 연극 양식을 받아들인 정치극으로 시작되어 지위를 굳혔다. 발전 과정에서 점차 초기의 계몽적, 정치적 요소가 탈색되면서 오락적, 감상적 요소가 강해졌다.[21]

한국에서는 한일 병합 조약 체결 및 일제강점기 이후인 1910년대부터 유입되어 상연되었다. 처음 신파극이 도입되었을 때는 언어만 한국어로 바꾸어 공연했을 뿐, 일본 신파극을 직수입한 경우가 많았다. 한국에서 신파란 용어를 처음 사용한 것은 1912년 2월 18일자 《매일신보》에서 임성구 일행의 혁신단이 낸 제2회 공연 광고를 '신파연극 원조'라고 이름 지은 것이 그 시초다.

한국에서의 신파극 발전 과정 역시 일본과 비슷하게, 초기에는 일본식 군사극이 많다가 탐정극을 거쳐 가정비극을 다룬 멜로드라마가 가장 큰 인기를 얻었다. 조중환의 《장한몽》, 이해조의 《봉선화》가 대표적이다. 조선 시대의 전래 소설 중 가정비극적 요소를 담은 《장화홍련전》, 《사씨남정기》 등도 공연되었다.

신파극에는 가부장제와 같은 구시대적 요소가 많았기 때문에, 근대적 인식이 본격화된 1920년대에는 개량신파라는 이름으로 변형되었고, 1931년 극예술연구회 창립으로 신극과 확연히 구분되는 장르가 되었다. 신파극도 선진적인 신극의 영향을 받아 발전을 위한 노력이 이루어졌다.

1935년 동양극장 설립 이후 체계적인 공연 체제를 가동하면서 상업적인 성공으로 전성기를 맞았다. 이서구, 박진, 송영, 김건, 박영호, 최독견 등이 신파극 전문 작가로 인기를 모았다. 소재는 가정비극과 사극이 주를 이루었다. 이 시기의 대표작은 흥행에 크게 성공한 임선규의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이다.

한국 신파극은 한국 전쟁 이전인 1940년대까지 공연되다가 광복과 동시에 왜색으로 치부되어 소멸했다. 이러한 신파극의 소멸은 현대 한국 대중문화에서 영화산업이 큰 지분을 차지하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5. 코로나19 팬데믹의 영향

2020년 2월 16일부터 3월 3일까지 신바시 연무장, 같은 해 6월 13일부터 25일까지 오사카 쇼치쿠자에서 "8묘촌"을 공연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2020년 2월 26일 아베 신조 당시 총리의 요청과 2020년 4월 7일 신종 인플루엔자 등 긴급 사태 선언으로 인해 2020년 2월 28일 이후 공연은 중단되었다. 이후 2021년 10월 2일 신바시 연무장 공연까지는 일반적인 공연은 열리지 않았고, 낭독 공연만 개최되었다.[15]

참조

[1] 서적 The Cambridge Guide to Theatre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5-05-12
[2] 서적 The Japanese Theatre: From Shamanistic Ritual to Contemporary Pluralism Princeton University Press
[3] 서적 Columbia Encyclopedia of Modern Drama Columbia University Press
[4] 웹사이트 Japanese performing arts: Meiji period https://www.britanni[...] 2023-07-26
[5] 서적 The Similitude of Blossoms: A Critical Biography of Izumi Kyōka (1873–1939), Japanese Novelist and Playwright Harvard University Asia Center
[6] 서적 The Cambridge Guide to Theatre https://archive.org/[...] Cambridge University Press
[7] 서적 Writing in Light: The Silent Scenario and the Japanese Pure Film Movement Wayne State University Press
[8] 서적 Japan's Modern Theatre: A Century of Change and Continuity
[9] 뉴스 劇団新派、復活への幕開き 月乃助が緑郎襲名 https://www.nikkei.c[...] 日本経済新聞社/日経BP社 2017-02-03
[10] 웹사이트 千歳 米坡 https://kotobank.jp/[...]
[11] 웹사이트 山口定雄 https://kotobank.jp/[...]
[12] 학술지 上山草人年譜稿(一): 谷崎潤一郎との交友を中心に https://konan-wu.rep[...] 甲南女子大学 2002-03
[13] 뉴스 二代目喜多村緑郎襲名「一生の思い出に」 http://www.news24.jp[...] 日テレNEWS24 2016-09-05
[14] 뉴스 【亀岡典子の恋する伝芸】劇団新派に新風-歌舞伎界から市川月乃助に続き市川春猿も入団、「様式美+リアルさ」の魅力、深化へ https://www.sankei.c[...] 産業経済新聞社/産経デジタル 2017-02-03
[15] 간행물 「十月新派特別公演」パンフレット 2021-10
[16] 서적 柳永二郎:『木戸哀楽 新派九十年の歩み』 読売新聞社
[17] 웹사이트 国立劇場文化デジタルライブラリー https://www2.ntj.jac[...]
[18] 웹사이트 明治座 過去の公演一覧 http://www.meijiza.c[...]
[19] 웹사이트 劇団新派公式サイト https://www.shochiku[...]
[20] 웹사이트 早稲田大学演劇博物館 現代演劇上演記録 http://enpaku.waseda[...]
[21] 백과사전 신파 글로벌 세계 대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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