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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백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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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백록은 15세기 후반에서 16세기 중반에 걸쳐 활동한 조선 시대의 인물이다. 1519년 기묘사화에 연루되었으며, 1522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사마시에 천거되었으나 관직에 나아가지 못했다. 이후 선교랑 평시서 봉사를 지냈으나 탄핵을 받아 용인 수지읍 고기리에서 여생을 보냈다. 1545년 사망했으며, 명종 대에 녹안이 해제되었다. 이순신의 태몽에 등장하는 일화가 전해지며, 광해군 때 증직되었다.

2. 생애

이백록은 기묘사화의 영향으로 관직에 뜻을 접고 은거 생활을 하였다. 1519년(중종 14년) 학행과 문장으로 기묘사적(己卯史籍)에 올랐고,[1] 1522년(중종 17년) 생원시에 합격하였다.[1] 같은 해 생원, 선교랑 참봉에 천거되었으나 기묘사화의 영향으로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1] 이후 성균관 생원 대표로 활동하였고,[1] 선교랑 평시서 봉사(종8품)에 임명되었으나,[1] 1540년(중종 35년)경 탄핵을 받았다.[1] 이후 경기도 용인시 수지읍 고기리에 은거하였다.[1] 1544년(중종 39년) 중종 국상 때 상례를 어겼다는 오해를 받아 녹안(錄案)되었으나,[2] 1545년(중종 40년)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사후 1546년(명종 1년) 장남 이정의 상소로 복권되었고,[3] 1619년(광해군 11년) 정2품 가선대부 호조참판으로 추증되었다.

2. 1. 출생과 가계

이백록의 출생년도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으나, 장남 이정의 출생연도와 조선시대 평균 혼인 나이를 고려하면 1491년에서 1495년 사이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중종 6년(1511) 7월 2일에 장남 이정이 태어났다.[1]

배위는 증 정부인 초계 변씨이며 아버지는 생원 변성, 조부는 참봉 변균으로 직제학 변효문의 증손이다. 기일은 6월 22일이다. 슬하에 증 좌의정 덕연부원군 이정(1511~1583)을 두었다. 묘는 농소동에서 장례하였으나 1975년 을묘 4월 17일 면봉 합폄하였다.[2]

계배위는 증 정부인 재령 이씨로 아버지는 현령 이련이며 조부는 감사 이맹현이다. 슬하에 이현(李賢), 이귀(李貴)를 두었다. 묘는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고기동 산 18-1에 있으며 쌍분이다.[3]

2. 2. 초기 활동

이백록의 정확한 출생년도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장남 이정의 출생연도와 조선시대 평균 혼인 나이를 고려하여 1491년에서 1495년 사이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중종 6년(1511) 7월 2일에 장남 이정이 태어났다.

중종 14년(1519)에는 학행이 높고 문장과 기절을 지녔다고 평가받아 기묘사적에 들어갔다. 중종 17년(1522) 임오 식년시 생원 3등(50/100위)에 합격하였다. 이때 생원시 동방으로 충무공 이순신과 온양 방씨의 혼사에 영향을 준 영의정 이준경, 이순신의 처조부인 방국형 등이 있었다. 같은 해 사마 행검으로 생원 선교랑 참봉에 천거되었으나, 기묘사화의 영향으로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이후 연도 미상으로 차남 이현(李賢)과 삼남 이귀(李貴)가 태어났다. 중종 29년(1534) 중종실록에는 성균관 생원 대표로 이름이 올라와 있다. 장남 이정의 출생년도로 이백록의 나이를 추정했을 때 40세 전후로, 성균관 생원으로는 연령이 높은 편이었다. 연도 미상으로 선교랑 평시서 봉사(종8품)가 되었다. 중종 35년(1540) 평시서 봉사 역임 년도는 알 수 없지만, 조선왕조실록의 기록 상 1540년경 탄핵되었음을 알 수 있다.[1] 탄핵된 후에는 경기 용인시 수지읍 고기리에서 남은 여생을 보냈다.

중종 39년(1544) 중종의 국상에 결례를 범한 오해(삼남 이귀(李貴)의 혼사시 주육설판)로 녹안되었다. 이는 수도 한성과 거리가 먼 경기 용인 수지읍 고기리에 기거하여 중종 대왕의 국휼(國恤)을 알지 못하여 발생한 일이었다.[2]

2. 3. 기묘사화와 은거

기묘사화(己卯士禍)의 여파로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은거하였다.

1519년(중종 14년), 학행이 높고 문장과 기절을 지녔다는 이유로 기묘사적(己卯史籍)에 포함되었다.[1] 1522년(중종 17년)에는 임오식년시(壬午式年試) 생원시에 3등(三等) 50위(80/100)로 합격하였다.[1] 이때 함께 합격한 동방(同榜)으로는 훗날 충무공 이순신과 온양 방씨의 혼사에 영향을 준 영의정 이준경과 이순신의 처조부인 방국형 등이 있었다.

1522년(중종 17년) 사마 행검으로 생원, 선교랑 참봉에 천거되었으나, 기묘사화의 영향으로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1] 이후 성균관 생원 대표로 이름이 올라와 있었으며,[1] 선교랑 평시서 봉사(종8품)가 되었으나,[1] 1540년(중종 35년)경 탄핵을 받았다.[1] 탄핵 이후 경기도 용인시 수지읍 고기리에 은거하며 남은 여생을 보냈다.[1]

1544년(중종 39년)에는 중종의 국상에 결례를 범했다는 오해를 받아 녹안(錄案)되기도 하였다.[2] 이는 수도 한성과 거리가 먼 경기도 용인시 수지읍 고기리에 기거하여 중종 대왕의 국휼(國恤)을 알지 못하여 발생한 일이었다.[2]

2. 4. 말년과 사망

이백록은 중종 35년(1540년)경 평시서 봉사(종8품)로 재직 중 탄핵을 받았다.[1] 탄핵 이후 경기도 용인시 수지읍 고기리에 남은 여생을 보냈다.

중종 39년(1544년) 중종의 국상에 결례를 범했다는 오해로 녹안(錄案)되었다. 이는 수도 한성과 거리가 먼 경기도 용인 수지읍 고기리에 거주하여 중종 대왕의 국휼(國恤)을 알지 못해 발생한 일로, 삼남 이귀(李貴)의 혼사 때 주육설판(酒肉設판)을 한 것이 문제가 되었다.[2]

1545년에 별세한 것으로 추정된다. (향년 51~55세 추정) 의금부에서 곤장을 맞고 복초(服招)를 당한 후 회복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충무공 행록에 따르면, 충무공 이순신의 태몽에 풍암공 이백록이 나타나 "이 아이가 반드시 귀히 될 것이니 이름을 순신이라 하여라"라고 했다고 한다. 이를 보아 충무공 탄신일인 4월 28일 전후로 위중했거나 별세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명종 1년(1546년), 장남 이정의 진소(陳疏)로 이백록의 녹안이 해제되었다.[3] 광해군 11년(1619년), 가선대부 의정부 호조참판 동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 총관에 증직되었다.

배위는 증 정부인 초계 변씨이며, 아버지는 생원 변성, 조부는 참봉 변균으로 직제학 변효문의 증손이다. 기일은 6월 22일이다. 슬하에 증 좌의정 덕연부원군 이정(1511~1583)을 두었다. 묘는 농소동에서 장례하였으나 1975년 을묘 4월 17일 면봉 합폄하였다. 계배위는 증 정부인 재령 이씨로 아버지는 현령 이련이며 조부는 감사 이맹현이다. 슬하에 이현(李賢), 이귀(李貴)를 두었다.

묘는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고기동 산 18-1에 있으며 쌍분이다.[8]

형제가 묘터를 잡을 때, 형님인 함종공 백복의 묘터는 문인이 나올 자리이고 동생인 풍암공의 묘자리는 무인이 많이 나올 자리이나, 풍암공의 묘터는 북에 해당하므로 소리를 나게 하는 북채가 없으면 발복하지 못함을 알고 함종공이 북채에 해당하는 앞산을 사주었다고 한다.[9]

3. 평가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이백록(李百綠)은 주도적인 성격에 호탕한 인물로 평가된다. 다만, 고위 문무반 직을 지낸 선대에 비해 크게 출세하지는 못했다.[6]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살펴보면, 중종 29년(1534) 8월 18일 기사에는 생원 이백록이 왕에게 감사의 전을 올렸다는 내용이 있고,[5] 중종 35년(1540) 6월 27일 기사에는 평시서 봉사 이백록이 광패한 성품으로 무뢰배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고 외람된 짓을 일삼아 파직시켜야 한다는 상소가 올라왔다.[6] 명종 1년(1546)에는 이백록이 중종 국휼 때 주육을 갖추어 아들을 성혼시켰다는 잘못된 기록에 대해 억울함을 호소하는데, 이는 경상 감사의 계본에는 없던 내용으로 형조에서 '주육설판(酒肉設辦)' 네 글자를 추가하여 곤장을 쳐서 자백을 받았다는 것이다.[7]

3. 1. 기묘사화 관련 논란

각종 드라마와 소설에서 증손자인 충무공 이순신을 돋보이게 하고 극 전개를 역동적으로 하기 위하여 기묘사화와 연루되어 사약을 받았다고 하는 등 역적 집안의 몰락한 양반 가문으로 묘사하는데 이는 허구이며 사실과 다르다.[4]

기묘사화와 관련된 인물의 전기와 사화의 내용을 수록한 기묘록 속집(己卯錄續集) 별과시 천거인에 경외관동천인(京外官同薦人)이라고 하여 현량과에 천거된 인물 가운데 급제하지 못한 78인의 간략한 전기를 기록한 부분에 "진사 이백록(李百祿)은 배우기를 좋아하고 검행하였다."라고 서술되어 있다.[4] 다만 이백록(李百綠)은 진사시에 합격한 적이 없어 생원을 진사로 오인 기록하였거나 중종 5년(1510) 경오(庚午) 식년시(式年試) [진사] 3등(三等) 17위로 진사에 합격하였던 형 이백복(李百福)을 오인 기술하였을 수 있다. 오인 기술은 한자로 표기된 이름으로도 알 수 있는데 이백록(李百綠)은 푸를 록(綠)을 사용하는 반면 기묘록속집(己卯錄續集)의 이백록(李百祿)은 녹 록(祿)을 사용하여 복 복(福)자로 해석 가능하다. 덕수이씨세보(德水李氏世譜)에 기재되어 있는 입기묘사적(入己卯士籍)을 참고하였을 때에 생원을 진사로 오인하여 기재하였을 확률이 더 높을 것으로 사료된다.

충무공파 종회는 2009년 "1519년 풍암공(楓巖公)이 흠모하던 정암 조광조가 훈구세력이 일으킨 기묘사화로 인해 화순에서 사약을 받아 죽고, 주위 사람들도 같은 당여(黨與)로 몰려 참형을 당하자 서울에 살던 풍암공은 곧바로 조광조의 묘소가 있는 경기도 용인 심곡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고기리에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은거하다 생을 마치셨습니다. 풍암공의 묘소도 용인의 고기리에 있으며, 풍암공의 생몰년을 모르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습니다."라고 인터넷에 게시하였지만 이백록(李百綠)의 선교랑 평시서 봉사직 수행과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근거로 생애를 비교해 보았을 때 일부 사실관계가 다른 주장이다.

4. 가족 관계

관계이름비고
증조부이변1391년 ~ 1473년
조부이효조통훈대부 통례원 봉례
조모행주 기씨기분(奇賁)의 딸
아버지이거통정대부 병조참의
어머니임피 진씨현령 진세번의 딸
이백복(李百福)통훈대부 함종현령
형수숙인 경주 이씨판관 이종순의 딸
본인이백록호는 풍암(楓巖), 이순신의 조부
부인증 정부인 초계 변씨생원 변성의 딸
장자이정1511년 ~ 1583년, 이순신의 아버지, 이완의 조부
며느리증 정경부인 초계 변씨변수림의 딸
부인증 정부인 재령 이씨현령 이련의 딸
차남이현(李賢)
며느리죽산 박씨부사 박영의 딸
삼남이귀(李貴)
며느리우계 이씨참봉 이준근의 딸
동생이백령(李百齡)생원
제수우계 이씨감찰 이대근의 딸


5. 묘소

이백록의 묘소는 용인시 수지구 고기동 손기(옛 지명 용인군 수지면 고기리)에 있으며, 서쪽을 바라보고 있다. 묘소에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부인 초계 변씨와 합장되어 있으며, 1975년 4월 17일에 묘소를 단장하면서 합장하였다. 계배(繼配) 재령 이씨의 묘는 쌍분(雙墳)으로 조성되어 있다.[8]

형제가 묘터를 잡을 때, 형인 함종공 이백복의 묘터는 문인이 나올 자리이고, 동생인 풍암공 이백록의 묘터는 무인이 많이 나올 자리이지만 북쪽에 해당되어 소리를 내는 북채가 없으면 발복하지 못함을 알고, 함종공이 북채에 해당하는 앞산을 사주었다고 한다.[9]

참조

[1] 서적 조선왕조실록
[2] 서적 조선왕조실록
[3] 서적 조선왕조실록
[4] 서적 기묘록속집((己卯錄續集))
[5] 서적 조선왕조실록
[6] 서적 조선왕조실록
[7] 서적 조선왕조실록
[8] 서적 德水李氏世譜 덕수이씨세보
[9] 서적 덕수이씨 800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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