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애나폴리스 콜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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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인디애나폴리스 콜츠는 1953년 볼티모어에서 창단된 NFL 팀으로, 1984년 인디애나폴리스로 연고지를 이전했다. 볼티모어 시절에는 1958년과 1959년 NFL 챔피언십에서 우승했으며, 1970년 NFL과 AFL 통합 이후에는 1970년 AFC 챔피언십과 1971년 슈퍼볼에서 우승했다. 인디애나폴리스 이전 후에는 쿼터백 페이튼 매닝을 중심으로 2006년 슈퍼볼에서 우승했으며, 2000년대 NFL 정규 시즌 최다 승리를 기록했다. 현재 루카스 오일 스타디움을 홈구장으로 사용하며, 라이벌 팀으로는 휴스턴 텍산스, 재크슨빌 재규어스, 테네시 타이탄스, 뉴잉글랜드 패트리어츠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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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애나폴리스 콜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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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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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고지 | 루카스 오일 스타디움, 인디애나주인디애나폴리스 |
소재지 | 인디애나 팜 뷰로 풋볼 센터, 인디애나폴리스 |
창단 | 1953년 1월 23일 |
첫 시즌 | 1953년 |
팀 색상 | 스피드 블루, 흰색, 페이스마스크 회색, 앤빌 블랙 |
구단주 | 짐 어세이 |
CEO | 짐 어세이 |
단장 | 크리스 밸러드 |
감독 | 셰인 스테이컨 |
마스코트 | 블루 |
웹사이트 | colts.com |
역사 | |
이전 명칭 | 볼티모어 콜츠 (1953–1983) |
NFL 시작 연도 | 1953년 |
리그 및 지구 소속 | |
역대 성적 | |
리그 우승 | 4회† |
슈퍼볼 우승 | 2회 |
콘퍼런스 우승 | 7회 |
지구 우승 | 16회 |
플레이오프 진출 | 29회 |
우승 기록 | |
리그 우승 (NFL 챔피언십, 1970년 이전) | 1958년, 1959년, 1968년 |
슈퍼볼 우승 | 1970년 (V), 2006년 (XLI) |
콘퍼런스 우승 | NFL 서부: 1958년, 1959년, 1964년, 1968년 AFC: 1970년, 2006년, 2009년 |
지구 우승 | NFL 해안: 1968년 AFC 동부: 1970년, 1975년, 1976년, 1977년, 1987년, 1999년 AFC 남부: 2003년, 2004년, 2005년, 2006년, 2007년, 2009년, 2010년, 2013년, 2014년 |
플레이오프 진출 연도 | |
스타디움 | |
이전 스타디움 | 메모리얼 스타디움 (1953–1983) RCA 돔 (1984–2007) |
현재 스타디움 | 루카스 오일 스타디움 (2008–현재) |
구단주 | |
역대 구단주 | 캐럴 로젠블룸 (1953–1972) 로버트 어세이 (1972–1997) |
현재 구단주 | 짐 어세이 (1997–현재) |
영구 결번 |
2. 역사
1953년 메릴랜드주볼티모어를 연고지로 하는 '''볼티모어 콜츠'''(Baltimore Colts)로 창단되었다. 1947년부터 1950년까지 존재했던 볼티모어 콜츠를 직접적인 전신으로 하며, 1970년 아메리칸 풋볼 리그(AFL)와 NFL의 합병에 따라 아메리칸 풋볼 컨퍼런스(AFC)에 소속되었다. 1984년 연고지를 인디애나주인디애나폴리스로 이전하여 현재의 인디애나폴리스 콜츠가 되었다.
볼티모어 콜츠는 제3회 슈퍼볼에서 뉴욕 제츠에 패했으나, 제5회 슈퍼볼에서 댈러스 카우보이스를 꺾고 우승했다. 인디애나폴리스 이전 후에는 제41회 슈퍼볼에서 시카고 베어스를 꺾고 두 번째 슈퍼볼 우승을 차지했다.
NFL에는 '''볼티모어 콜츠'''라는 이름의 팀이 두 개 존재했다. 현재의 인디애나폴리스 콜츠는 1953년 볼티모어에서 발족되었으며, 그 이전에는 댈러스 텍선스 등의 팀으로 운영되었다.
2. 1. 볼티모어 콜츠 (1953-1983)
1953년, 볼티모어 시 정부의 지원과 팬들의 시즌 티켓 구매로 자금을 확보한 볼티모어 기반의 새로운 그룹이 지역 구단주 캐럴 로젠블룸을 필두로 새로운 볼티모어 NFL 구단의 권리를 획득했다.[7][8] 로젠블룸은 댈러스 텍산스 구단의 잔여 자산을 배정받았는데, 이 팀은 복잡한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댈러스 텍산스는 1944년 보스턴 얀스로 시작하여 브루클린 타이거스와 합병했으며, 브루클린 타이거스는 1913년 리그 창설 이전부터 존재했던 NFL 원년 팀 중 하나인 데이턴 트라이앵글스였다. 이 팀은 1950년 뉴욕 얀스로 변경되었으며, 이전 경쟁 리그인 올 아메리카 풋볼 컨퍼런스 (1946–49)의 뉴욕 양키스 선수들이 1950 시즌에 합류했다. 얀스는 1951 시즌 이후 텍사스주 댈러스로 연고지를 옮겨 두 시즌을 뛰었지만, 1952 시즌 마지막 두 홈 경기는 오하이오주 애크런의 러버 볼 풋볼 경기장에서 "원정팀"으로 치렀다. NFL은 텍산스와 콜츠를 별개의 팀으로 간주하지만, 이전 팀들은 파란색과 흰색의 같은 색상을 공유했다. 따라서, 인디애나폴리스 콜츠는 법적으로 1953년 확장팀으로 간주된다.1947년부터 1950년까지 존재했던 볼티모어 콜츠를 직접적인 전신으로 하여, 메릴랜드주볼티모어를 연고지로 하는 동일 명칭의 '''볼티모어 콜츠'''(Baltimore Colts)로 창단되었다. 1970년에는 아메리칸 풋볼 리그(AFL)의 NFL 합병에 따라 결성된 아메리칸 풋볼 컨퍼런스에 소속되었다.
볼티모어 시대의 제3회 슈퍼볼에서 뉴욕 제츠 (당시 AFL)에 패한 후, 제5회 슈퍼볼 (대댈러스 카우보이스)에서 우승했다.
1958년, 프로 풋볼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헤드 코치 위브 유뱅크 아래에서, 같은 명예의 전당 쿼터백인 조니 유나이터스가 이끄는 콜츠는, 양키 스타디움에서 열린 NFL 챔피언십에서 뉴욕 자이언츠를 23-17로 꺾었다. 연장전까지 이어진 이 경기는 "역대 최고의 경기"로도 불린다[228][229]). 콜츠는 이듬해 1959년에도 자이언츠에 31-16으로 승리하며 NFL 챔피언십을 획득했다.
1967년, 콜츠는 정규 시즌 마지막 주를 무패로 맞이했지만,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로스앤젤레스 램스와의 경기에서 10-34로 패했다. 콜츠와 램스 모두 11승 1패 2무였기 때문에, 이 경기에서 승리한 램스가 서부 컨퍼런스 해안 지구 1위가 되었고, 콜츠는 플레이오프에 진출할 수 없었다.
1968년, 시즌 13승 1패를 기록한 콜츠는 NFL 챔피언십 게임에서 클리블랜드 브라운스를 34-0으로 꺾었다. 이 성적과 브라운스전 압승으로 콜츠는 언론으로부터 "역대 가장 위대한 풋볼 팀"으로 칭송받았다. 제3회 슈퍼볼에서는 조 네이머스와 맷 스넬이 이끄는 AFL 챔피언 뉴욕 제츠에게 7-16으로 패했는데, 이때 제츠의 헤드 코치는 과거 콜츠를 두 번의 NFL 챔피언으로 이끈 위브 유뱅크였다.
1970년, NFL과 AFL이 통합되면서 클리블랜드 브라운스, 피츠버그 스틸러스와 함께 AFC로 옮긴 콜츠는 오클랜드 레이더스를 27-17로 꺾고 AFC 챔피언십을 획득했다. 통합 후 첫 제5회 슈퍼볼에서 댈러스 카우보이스를 짐 오브라이언의 필드골로 16-13으로 꺾고 우승했다.
1972년 7월 13일, 로젠블룸과 로버트 어세이는 콜츠와 로스앤젤레스 램스의 소유권을 교환했지만, 양 팀의 연고지는 바뀌지 않았다. 콜츠는 1970년대에 1971년 와일드카드를 포함, 1975년부터 1977년까지 3년 연속 AFC 동부 지구 우승을 차지하며 4번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그러나 1978년부터 9시즌 연속으로 부진한 성적을 거두었다.
1981년 콜츠의 수비는 NFL 기록인 533실점을 기록했고,[230] 색 수는 역대 최저인 13개였다. 1982년에는 선수들의 파업으로 9경기만 열렸고, 콜츠는 0승 8패 1무로 시즌을 마쳤다.[231]
2. 1. 1. 창단과 초기 (1953-1957)
올-아메리카 풋볼 컨퍼런스(AAFC)는 1946년에 시작되었다. 두 번째 해에, 마이애미 시호크스 프랜차이즈는 메릴랜드의 주요 도시인 볼티모어로 이전되었다. 팬 투표를 거쳐 팀은 볼티모어 콜츠로 개명되었으며 팀 색상은 은색과 녹색을 사용했다. 콜츠는 NFL이 재편성되면서 옛 내셔널 풋볼 리그 (1920–1922년부터 1950년까지)와 합병하기로 동의할 때까지 이전 AAFC에서 다음 세 시즌 동안 경기를 했다. 볼티모어 콜츠는 당시 NFL과 합병한 세 개의 전 AAFC 강팀 중 하나였으며, 다른 팀은 샌프란시스코 49ers와 클리블랜드 브라운스였다. 이 콜츠 팀은 재정 및 소유권이 불안정했지만, 처음으로 프로 미식축구의 "메이저 리그"에 진출하여 1950년 NFL 시즌에만 경기를 했고 나중에 해산되었다.NFL에는 '''볼티모어 콜츠'''라는 명칭의 팀이 두 개 존재했다. 초대 콜츠는 1946년의 올-아메리카 풋볼 컨퍼런스 (AAFC) 창설 당시의 팀 중 하나였으며, 1950년의 AAFC 합병 시 NFL에 가맹했지만, 그 시즌 후에 해산했다.
현재의 인디애나폴리스 콜츠는 긴 여정을 거쳐 지금의 위치에 정착했다고 할 수 있다. NFL의 공식 기록으로는 콜츠는 1953년에 볼티모어에서 발족한 것으로 되어 있다. 1953년, NFL은 볼티모어시에 옛 댈러스 텍선스의 프랜차이즈를 부여했다. 이 프랜차이즈는 콜츠 발족까지 보스턴 얀크스 (1944-48), 뉴욕 불독스 (1949), 뉴욕 얀크스 (1950-51), 댈러스 텍선스 (1952)로 이동해 왔다. 한편 초대 볼티모어 콜츠는 1946년에 AAFC에 창설된 '''마이애미 시호크스'''를 전신으로 하며, 이 팀이 1947년에 볼티모어로 이전하여 탄생했다. 이 콜츠는 1950년에 NFL에 가맹하여 시즌을 1승 11패로 마쳤다. 이 팀은 1950년 시즌 후에 해산되었지만, 팬클럽이나 마칭 밴드 등의 지원 단체는 활동을 계속하며 팀의 부활을 위해 노력했다.

1953년, 캐럴 로젠블룸이 신생 NFL 볼티모어 콜츠의 으뜸가는 구단주가 되었다.
2. 1. 2. 위브 유뱅크와 조니 유나이타스 시대 (1958-1962)
1953년 볼티모어에서 첫 시즌을 치른 볼티모어 콜츠는 초대 감독 키스 몰스워스 아래 3승 9패를 기록했다.[9] 이후 1957 시즌까지 승리 기록을 달성하지 못하며 초반 어려움을 겪었다.[8]2. 1. 3. 돈 슐라 시대 (1963-1969)
1963년, 콜츠는 돈 슐라를 감독으로 교체했다.[14] 슐라 감독 체제에서 두 번째 시즌에 콜츠는 12승 2패를 기록했지만, 1964년 NFL 챔피언십 게임에서 클리블랜드 브라운스에게 27-0으로 패했다.[15]2. 1. 4. 돈 매카퍼티 시대와 슈퍼볼 우승 (1970-1972)
콜츠의 로젠블룸, 브라운스의 아트 모델, 피츠버그 스틸러스의 아트 루니는 1970년 AFL-NFL 합병의 일환으로, 그들의 팀이 10개의 AFL 팀과 함께 아메리칸 풋볼 컨퍼런스에 합류하는 것에 동의했다.[8]2. 1. 5. 로버트 이르세이 시대와 침체기 (1972-1983)
캐럴 로젠블룸은 볼티모어 시 및 지역 언론과의 마찰을 이유로 1972년 7월 13일에 콜츠 구단을 로버트 아이르세이에게 넘기고 그 대가로 로스앤젤레스 램스를 받았다.[22] 아이르세이 구단주 체제 하에서 콜츠는 1971년 이후 3시즌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했고, 1972 시즌 이후에는 주전 쿼터백이자 전설적인 선수인 조니 유니타스가 샌디에이고 차저스로 트레이드되었다.[8]유니타스의 이적 이후, 콜츠는 1975년부터 1977년까지 3시즌 연속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지만, 매번 디비전 라운드에서 패했다. 1977년 오클랜드 레이더스와의 더블 연장전에서 패한 경기는 볼티모어에서 열린 콜츠의 마지막 플레이오프 경기였으며, Ghost to the Post 플레이로도 유명하다.[23] 이 챔피언십 팀들은 1976년 NFL 최우수 선수(Most Valuable Player)인 쿼터백 버트 존스와 "Sack Pack"이라는 별명을 가진 뛰어난 수비 라인을 갖추고 있었다.[24]
1970년대의 성공 이후, 팀은 1978년부터 9시즌 연속으로 부진한 성적을 거두었다. 1981년 콜츠의 수비는 NFL 역대 최다 실점인 533점을 허용했고, 역대 최소 sack(13) 기록을 세웠으며, 펀트 리턴 횟수(12회)도 현대 기록상 최소를 기록했다.[25] 그 다음 해, 공격진은 붕괴되었고, 버펄로 빌스와의 경기에서는 콜츠 공격진이 경기 내내 하프라인을 넘지 못하기도 했다. 콜츠는 파업으로 단축된 1982 시즌을 0–8–1로 마감하여 스탠퍼드 쿼터백 존 엘웨이를 전체 1순위로 지명할 권리를 얻었다. 그러나 엘웨이는 볼티모어에서 뛰기를 거부했고, 뉴욕 양키스 야구 클럽 드래프티 지위를 활용하여 덴버 브롱코스로의 트레이드를 강요했다.[26] 개선된 수비를 바탕으로 팀은 1983년에 7–9의 성적을 거두었지만, 그 해는 볼티모어에서의 마지막 시즌이 되었다.[27]
2. 2. 인디애나폴리스 콜츠 (1984-현재)
1984년 볼티모어에서 인디애나폴리스로 연고지를 이전한 후, 콜츠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1984년 시즌에는 4승 12패, 이후 두 시즌 동안에도 각각 5승 11패, 3승 13패로 부진을 면치 못했다.[36][47]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콜츠는 1987년 시즌 중반, 로스앤젤레스 램스와의 대형 트레이드를 통해 스타 러닝백 에릭 디커슨을 영입했다.[37] 디커슨의 합류는 콜츠 공격에 활력을 불어넣었고, 1987년 시즌에 9승 6패의 성적으로 AFC 동부지구 우승을 차지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는 콜츠가 인디애나폴리스로 연고지를 이전한 후 첫 번째 지구 우승이자, 1977년 이후 첫 번째 플레이오프 진출이었다. 그러나 플레이오프에서는 클리블랜드 브라운스에게 패하며 시즌을 마감했다.
1987년 이후, 콜츠는 다시 하락세를 겪으며 7시즌 연속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다. 특히 1991년에는 1승 15패라는 최악의 성적을 기록하며 리그 최하위로 추락했다. 이로 인해 론 메이어 감독이 해고되고, 과거 콜츠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던 테드 마르치브로다 감독이 복귀했다.
1994년, 콜츠는 새로운 단장 빌 토빈을 영입하며 변화를 모색했다. 토빈은 1994년 NFL 드래프트에서 전체 2순위로 러닝백 마샬 포크를 지명하고, 쿼터백 짐 하보를 영입하며 팀의 전력을 강화했다.[41] 이러한 노력은 1995년과 1996년, 2년 연속 플레이오프 진출이라는 성과로 이어졌다. 특히 1995년에는 인디애나폴리스 콜츠로서 첫 플레이오프 승리를 거두었고, AFC 챔피언십 게임까지 진출하며 슈퍼볼 XXX 진출을 눈앞에 두기도 했다. 그러나 피츠버그 스틸러스와의 경기에서 헤일 메리 패스를 허용하며 아쉽게 패배했다.[42]
1996년 시즌 후, 마르치브로다 감독이 은퇴하고 린디 인판테 감독이 부임했지만, 1997년 시즌에는 3승 13패로 다시 부진에 빠졌다.[46]
1997년 1월, 콜츠의 구단주 로버트 어세이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 짐 어세이가 구단주 자리에 올랐다. 짐 어세이는 팀의 변화를 위해 빌 폴리언을 새 단장으로 임명하고, 1998년 NFL 드래프트를 통해 팀을 재건하기로 결정했다.[48]
2. 2. 1. 인디애나폴리스로의 이전 (1984)
볼티모어 시와 지역 언론과의 마찰을 겪은 후, 로젠블룸은 1972년 7월 13일에 콜츠 구단을 로버트 아이르세이에게 넘기고 그 대가로 로스앤젤레스 램스를 받았다.[22] 새로운 구단주 아래에서 콜츠는 1971년 이후 3시즌 연속 포스트시즌에 진출하지 못했고, 1972 시즌 이후에는 주전 쿼터백이자 전설적인 선수인 조니 유니타스가 샌디에이고 차저스로 트레이드되었다.[8] 유니타스의 이적 이후, 콜츠는 1975년부터 1977년까지 3시즌 연속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지만, 매번 디비전 라운드에서 패했다.[23] 1970년대의 성공 이후, 팀은 1978년부터 9시즌 연속으로 부진한 성적을 거두었다. 1981년에는 콜츠의 수비가 NFL 역대 최다 실점인 533점을 허용했고, 역대 최소 sack(13) 기록을 세웠으며, 펀트 리턴 횟수(12회)도 현대 기록상 최소를 기록했다.[25] 그 다음 해, 공격진은 붕괴되었고, 심지어 버펄로 빌스와의 경기에서는 콜츠의 공격진이 경기 내내 하프라인을 넘지 못했다. 콜츠는 파업으로 단축된 1982 시즌을 0–8–1로 마감하여 스탠퍼드 쿼터백 존 엘웨이를 전체 1순위로 지명할 권리를 얻었다. 그러나 엘웨이는 볼티모어에서 뛰기를 거부했고, 뉴욕 양키스 야구 클럽의 드래프티로서의 지위를 활용하여 덴버 브롱코스로의 트레이드를 강요했다.[26]
1983년 12월 18일, 볼티모어 콜츠는 휴스턴 오일러스를 상대로 볼티모어에서 마지막 홈 경기를 치렀다. 이르세이는 메모리얼 스타디움의 개조 또는 새로운 경기장 건설을 계속해서 요청했다.[28] 경기력 부진과 경기장 문제로 인해 팬 출석률과 팀 수익이 계속 감소했다. 시 공무원은 새로운 경기장 건설에 세금을 사용할 수 없었고, 시에서 제안한 미미한 제안은 콜츠와 시의 MLB 프랜차이즈인 오리올스 모두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모든 관계자는 계속 협상했다.[28] 이르세이와 볼티모어 시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이르세이는 팬들에게 궁극적인 바람은 볼티모어에 남는 것이라고 확신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풋볼 경기장 건설을 기꺼이 해줄 다른 여러 도시들과 논의를 시작했고, 결국 인디애나폴리스와 피닉스로 도시 목록을 좁혔다.[29] 리처드 루가와 윌리엄 허드넛 시장의 행정부 아래에서, 인디애나폴리스는 '위대한 미국 도시'로 스스로를 재창조하려는 야심찬 노력을 시작했다.[30] 나중에 RCA 돔으로 이름이 바뀐 후지어 돔은 특히 NFL 확장 팀을 위해 건설되었으며 유치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31]
한편, 볼티모어에서는 상황이 악화되었다. 메릴랜드주 의회는 볼티모어 시에 팀 소유권을 수용으로 빼앗을 권한을 부여하는 법안을 제출하며 개입했다. 그 결과 이르세이는 메릴랜드 주 의회가 법을 통과시키기 전에 팀을 옮기기 위해 허드넛과 진지한 협상을 시작했다. 인디애나폴리스는 대출뿐만 아니라 후지어 돔과 훈련 시설을 제공했다.[32] 거래가 성사된 후, 인디애나폴리스에 본사를 둔 메이플라워 트랜짓의 이삿짐 트럭이 밤새 팀의 메릴랜드 훈련 시설로 파견되어 1984년 3월 29일 아침에 도착했다. 메릴랜드에 도착한 작업자들은 팀의 모든 소지품을 싣고 정오 무렵 트럭은 인디애나폴리스로 출발하여 볼티모어에 콜츠 조직이 압류할 수 있는 것을 남기지 않았다.[33] 볼티모어 콜츠 마칭 밴드 또한 장비와 유니폼이 인디애나폴리스로 배송되기 전에 서둘러 회수해야 했다.[34]
2. 2. 2. 초기 어려움과 에릭 디커슨 영입 (1984-1987)
1984년 볼티모어에서 인디애나폴리스로 연고지를 옮긴 후, 콜츠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1984년 시즌에는 4승 12패라는 저조한 성적을 기록했고, 이후 두 시즌 동안에도 각각 5승 11패, 3승 13패로 부진을 면치 못했다.[47]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콜츠는 1987년 시즌 중반, 로스앤젤레스 램스와의 대형 트레이드를 통해 스타 러닝백 에릭 디커슨을 영입했다.[48] 디커슨의 합류는 콜츠 공격에 활력을 불어넣었고, 1987년 시즌에 9승 6패의 성적으로 AFC 동부지구 우승을 차지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는 콜츠가 인디애나폴리스로 연고지를 이전한 후 첫 번째 지구 우승이자, 1977년 이후 첫 번째 플레이오프 진출이었다.
다음은 콜츠가 참가한 1970년부터 1987년까지의 NFL AFC 동부지구 순위이다.
연도 | 지구 우승 | 2위 | 3위 | 4위 | 5위 | |||||||||||||||
---|---|---|---|---|---|---|---|---|---|---|---|---|---|---|---|---|---|---|---|---|
팀 | 승 | 패 | 무 | 팀 | 승 | 패 | 무 | 팀 | 승 | 패 | 무 | 팀 | 승 | 패 | 무 | 팀 | 승 | 패 | 무 | |
1987 | IND(3d) | 9 | 6 | 0 | NE | 8 | 7 | 0 | MIA | 8 | 7 | 0 | BUF | 7 | 8 | 0 | NYJ | 6 | 9 | 0 |
1986 | NE(3d) | 11 | 5 | 0 | NYJ(4d) | 10 | 6 | 0 | MIA | 8 | 8 | 0 | BUF | 4 | 12 | 0 | IND | 3 | 13 | 0 |
1985 | MIA(2c) | 12 | 4 | 0 | NYJ(4w) | 11 | 5 | 0 | NE(5s) | 11 | 5 | 0 | IND | 5 | 11 | 0 | BUF | 2 | 14 | 0 |
1984 | MIA(1s) | 14 | 2 | 0 | NE | 9 | 7 | 0 | NYJ | 7 | 9 | 0 | IND | 4 | 12 | 0 | BUF | 2 | 14 | 0 |
1983 | MIA(2d) | 12 | 4 | 0 | NE | 8 | 8 | 0 | BUF | 8 | 8 | 0 | BAL | 7 | 9 | 0 | NYJ | 7 | 9 | 0 |
1982 | MIA(2s) | 7 | 2 | 0 | NYJ(6c) | 6 | 3 | 0 | NE(7w) | 5 | 4 | 0 | BUF | 4 | 5 | 0 | BAL | 0 | 8 | 1 |
1981 | MIA(2d) | 11 | 4 | 1 | NYJ(4w) | 10 | 5 | 1 | BUF(5d) | 10 | 6 | 0 | BAL | 2 | 14 | 0 | NE | 2 | 14 | 0 |
1980 | BUF(3d) | 11 | 5 | 0 | NE | 10 | 6 | 0 | MIA | 8 | 8 | 0 | BAL | 7 | 9 | 0 | NYJ | 4 | 12 | 0 |
1979 | MIA(3d) | 10 | 6 | 0 | NE | 9 | 7 | 0 | NYJ | 8 | 8 | 0 | BUF | 7 | 9 | 0 | BAL | 5 | 11 | 0 |
1978 | NE(2d) | 11 | 5 | 0 | MIA(4w) | 11 | 5 | 0 | NYJ | 8 | 8 | 0 | BUF | 5 | 11 | 0 | BAL | 5 | 11 | 0 |
1977 | BAL(2d) | 10 | 4 | 0 | MIA | 10 | 4 | 0 | NE | 9 | 5 | 0 | BUF | 3 | 11 | 0 | NYJ | 3 | 11 | 0 |
1976 | BAL(2d) | 11 | 3 | 0 | NE(4d) | 11 | 3 | 0 | MIA | 6 | 8 | 0 | NYJ | 3 | 11 | 0 | BUF | 2 | 12 | 0 |
1975 | BAL(3d) | 10 | 4 | 0 | MIA | 10 | 4 | 0 | BUF | 8 | 6 | 0 | NYJ | 3 | 11 | 0 | NE | 3 | 11 | 0 |
1974 | MIA(d) | 11 | 3 | 0 | BUF(d) | 9 | 5 | 0 | NE | 7 | 7 | 0 | NYJ | 7 | 7 | 0 | BAL | 2 | 12 | 0 |
1973 | MIA(v) | 12 | 2 | 0 | BUF | 9 | 5 | 0 | NE | 5 | 9 | 0 | NYJ | 4 | 10 | 0 | BAL | 4 | 10 | 0 |
1972 | MIA(v) | 14 | 0 | 0 | NYJ | 7 | 7 | 0 | BAL | 5 | 9 | 0 | BUF | 4 | 9 | 1 | NE | 3 | 11 | 0 |
1971 | MIA(s) | 10 | 3 | 1 | BAL(c) | 10 | 4 | 0 | NE | 6 | 8 | 0 | NYJ | 6 | 8 | 0 | BUF | 1 | 13 | 0 |
1970 | BAL(v) | 11 | 2 | 1 | MIA(d) | 10 | 4 | 0 | NYJ | 4 | 10 | 0 | BUF | 3 | 10 | 1 | BOS | 2 | 12 | 0 |
- BUF: 버팔로 빌스, MIA: 마이애미 돌핀스, BOS→NE: 보스턴 패트리어츠→뉴잉글랜드 패트리어츠, NYJ: 뉴욕 제츠, BAL→IND: '''볼티모어 콜츠→인디애나폴리스 콜츠'''
- 괄호 안의 숫자는 플레이오프 출전 시의 시드 순위(시드 제도 도입 전에는 표기 없음), 문자는 v: 슈퍼볼 우승, s: 슈퍼볼 패배·컨퍼런스 우승, c: 컨퍼런스 결승 패배, d: 디비전 플레이오프 패배, w: 와일드카드 플레이오프 패배를 나타낸다. 1982년에 대해서는 d: 2라운드 패배, w: 1라운드 패배를 나타낸다.
2. 2. 3. 짐 하보와 마샬 포크 시대 (1990-1997)
1997년 1월, 인디애나폴리스 콜츠의 구단주 로버트 어세이가 수년간의 건강 악화 끝에 사망했다.[47] 그의 아들 짐 어세이가 구단주 자리에 올랐고, 팀을 빠르게 변화시키기 시작했다. 짐 어세이는 1997년 단장 토빈을 빌 폴리언으로 교체했으며, 팀은 1998년 NFL 드래프트에서 전체 1순위 지명 선수를 통해 팀을 재건하기로 결정했다.[48]1990년대 콜츠의 AFC 동부지구 성적은 다음과 같다.
연도 | 지구 우승 | 2위 | 3위 | 4위 | 5위 | |||||||||||||||
---|---|---|---|---|---|---|---|---|---|---|---|---|---|---|---|---|---|---|---|---|
팀 | 승 | 패 | 무 | 팀 | 승 | 패 | 무 | 팀 | 승 | 패 | 무 | 팀 | 승 | 패 | 무 | 팀 | 승 | 패 | 무 | |
1997 | NE (3d) | 10 | 6 | 0 | MIA (6w) | 9 | 7 | 0 | NYJ | 9 | 7 | 0 | BUF | 6 | 10 | 0 | IND | 3 | 13 | 0 |
1996 | NE (2s) | 11 | 5 | 0 | BUF (4w) | 10 | 6 | 0 | IND (6w) | 9 | 7 | 0 | MIA | 8 | 8 | 0 | NYJ | 1 | 15 | 0 |
1995 | BUF (3d) | 10 | 6 | 0 | IND (5c) | 9 | 7 | 0 | MIA (6w) | 9 | 7 | 0 | NE | 6 | 10 | 0 | NYJ | 3 | 13 | 0 |
1994 | MIA (3d) | 10 | 6 | 0 | NE (5w) | 10 | 6 | 0 | IND | 8 | 8 | 0 | BUF | 7 | 9 | 0 | NYJ | 6 | 10 | 0 |
1993 | BUF (1s) | 12 | 4 | 0 | MIA | 9 | 7 | 0 | NYJ | 8 | 8 | 0 | NE | 5 | 11 | 0 | IND | 4 | 12 | 0 |
1992 | MIA (2c) | 11 | 5 | 0 | BUF (4s) | 11 | 5 | 0 | IND | 9 | 7 | 0 | NYJ | 4 | 12 | 0 | NE | 2 | 14 | 0 |
1991 | BUF (1s) | 13 | 3 | 0 | NYJ (6w) | 8 | 8 | 0 | MIA | 8 | 8 | 0 | NE | 6 | 10 | 0 | IND | 1 | 15 | 0 |
1990 | BUF (1s) | 13 | 3 | 0 | MIA (4d) | 12 | 4 | 0 | IND | 7 | 9 | 0 | NYJ | 6 | 10 | 0 | NE | 1 | 15 | 0 |
2. 2. 4. 페이튼 매닝 시대 (1998-2011)
1998년 NFL 드래프트에서 페이튼 매닝이 전체 1순위로 인디애나폴리스 콜츠에 지명되었다.[48] 1998년부터 2010년까지 콜츠는 매년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으며, 2003년부터 2010년까지는 7번의 AFC 사우스 우승을 차지했다. 2003년 AFC 챔피언십 경기와 2004년 디비전 플레이오프에서 뉴잉글랜드 패트리어츠와 톰 브래디에게 패배하면서, 두 팀 간, 그리고 매닝과 브래디 간의 라이벌 관계가 시작되었다.[63] 2005 시즌, 매닝과 마빈 해리슨은 쿼터백과 리시버 콤비의 터치다운 NFL 기록을 경신했다.[65] 2009년 시즌에는 슈퍼볼 XLIV에 진출하여 뉴올리언스 세인츠와 맞붙었지만, 31-17로 패했다.[79][80][81]2000년대 첫 10년(2000-2009) 동안 콜츠는 정규 시즌 최다 승리(115승)와 최고 승률(.719)을 기록했다.[82][83][84][85]
2010년 팀은 10승 6패를 기록, 플레이오프 와일드카드 라운드에서 뉴욕 제츠에게 패했다.[86] 이 경기는 페이튼 매닝의 콜츠 소속 마지막 경기였다.[87] 매닝은 2011년 시즌 전체를 결장했다.[88] 콜츠는 2승 14패로 시즌을 마쳤다.[90][91] 2012년 3월 8일, 짐 어세이 구단주는 매닝이 13시즌 만에 로스터에서 방출되었다고 발표하며 페이튼 매닝 시대는 막을 내렸다.[93]
2. 2. 5. 앤드루 럭 시대 (2012-2018)
2012년 오프 시즌 동안 구단주 짐 어세이는 단장으로 라이언 그리슨[94]을 고용했다. 그리슨은 헤드 코치 짐 캘드웰을 해고하고, 척 파가노를 새로운 헤드 코치로 고용했다.[95] 콜츠는 조지프 아다이, 댈러스 클라크, 게리 브래킷 등 연봉이 높고 부상으로 자주 결장하는 베테랑 선수들을 방출했다.[96] 콜츠는 2012년 드래프트에서 전체 1순위 지명권을 사용하여 스탠퍼드 카디널 쿼터백 앤드루 럭을 지명했고, 2라운드에서 그의 팀 동료인 코비 플리너를 지명했다.[97][98] 또한 팀은 3-4 수비 전술로 전환했다.[99]럭과 베테랑 리시버 레지 웨인의 활약으로, 콜츠는 2011년 2-14 시즌에서 반등하여 2012 시즌 11-5의 성적을 기록했다.[100] 구단, 팀, 팬들은 백혈병과 싸우는 헤드 코치 척 파가노를 응원했다.[101] 2012–13 NFL 플레이오프에서 예상치 못한 플레이오프 진출을 확정지었는데, 이는 1995년 이후 구단의 14번째 플레이오프 진출이었다. 시즌은 결국 볼티모어 레이븐스에게 24-9로 패배하며 마무리되었고, 볼티모어 레이븐스는 슈퍼볼 챔피언이 되었다.[102]
2013 시즌 2주차에, 콜츠는 2014 NFL 드래프트에서 1라운드 지명권을 클리블랜드 브라운스에 트레이드하여 러닝백 트렌트 리처드슨을 영입했다.[103] 7주차에, 럭은 콜츠를 이끌고 그의 전임자 페이튼 매닝과 무패의 브롱코스를 상대로 39-33 승리를 거두었다.[104] 럭은 그 시즌 후반에 콜츠를 15번째 디비전 챔피언십으로 이끌었다. 2013 NFL 플레이오프 첫 라운드에서 앤드루 럭은 콜츠를 이끌고 캔자스시티를 상대로 45-44 승리를 거두며, NFL 플레이오프 역사상 두 번째로 큰 역전승을 기록했다.[105]
2014 시즌 동안, 럭은 매닝이 이전에 보유했던 콜츠의 단일 시즌 패싱 야드 기록을 깨면서 생애 처음으로 콜츠를 AFC 챔피언십 게임으로 이끌었다.[106]
콜츠가 2015와 2016 시즌 모두 8-8로 마감하고, 1997-98년 이후 처음으로 2시즌 연속 플레이오프에 진출하지 못하면서, 그리슨은 단장에서 해고되었다.[107][108][109] 그가 해고될 당시, 그의 이전 18명의 드래프트 지명 선수 중 단 3명만이 팀에 남아 있었다.[110] 2017년 1월 30일, 팀은 캔자스시티 치프스 풋볼 운영 이사로 활동했던 크리스 발라드를 그리슨의 후임으로 고용했다.[111]
2017년 12월 31일,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승리하여 최종 4-12의 성적을 거둔 후, 콜츠는 파가노와 결별했다.[112][113] 2015 시즌에 여러 부상을 입고 9경기에 결장했던 럭은 어깨 수술 후 회복을 위해 2017 시즌 전체를 결장했다.[114]
2017 시즌이 끝난 후 몇 주 동안, 콜츠가 뉴잉글랜드 패트리어츠의 공격 코치인 조시 맥다니엘스를 파가노의 후임으로 고용할 것이라는 보도가 널리 퍼졌으며, 맥다니엘스는 슈퍼볼 LII에서 패트리어츠에 대한 의무를 다했다.[115] 2018년 2월 8일, 콜츠는 맥다니엘스를 새로운 헤드 코치로 발표했다.[116] 그러나 몇 시간 후, 맥다니엘스는 헤드 코치가 되기로 한 결정을 철회하고 패트리어츠로 돌아갔다.[117][118]
2. 2. 6. 프랭크 라이크 시대 (2018-2022)
실망스러운 시즌과 함께, 1997년 1월 인디애나폴리스로 팀을 옮긴 구단주 로버트 어세이가 수년간의 건강 악화 끝에 사망했다.[47] 로버트 어세이의 아들인 짐 어세이는 아버지의 사망 후 구단주 자리에 올랐고, 빠르게 팀을 변화시키기 시작했다. 짐 어세이는 1997년 단장 토빈을 빌 폴리언으로 교체했으며, 팀은 1998년 드래프트에서 전체 1순위 지명 선수를 통해 팀을 구축하기로 결정했다.[48]2. 2. 7. 셰인 스테이켄 시대 (2023-현재)
Shane Steichen영어 시대는 2023년에 시작되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3. 경기장
(이전 출력과 동일하게, 원본 소스에 '경기장' 관련 내용이 없으므로 출력하지 않음)
4. 라이벌 관계
콜츠는 1953년부터 1966년까지 NFL 서부 컨퍼런스 소속이었으나, 동부에 위치한 팀이었다. 그레이트 레이크스 지역의 그린베이 패커스, 디트로이트 라이온스, 시카고 베어스, 미네소타 바이킹스(1961년 이후), 그리고 샌프란시스코와 로스앤젤레스 등 서부 해안의 두 팀으로 구성된 지구의 나머지 팀들과는 뚜렷한 라이벌 관계를 형성하지 못했다. 볼티모어와 가장 가까운 팀은 워싱턴 레드스킨스였지만, 같은 지구에 속하지 않았고, 당시 대부분의 해 동안 경쟁력이 높지 않았다.
1958년 볼티모어는 첫 번째 NFL 챔피언십 경기에서 10승 3패의 뉴욕 자이언츠를 상대했다. 자이언츠는 클리블랜드 브라운스와의 타이브레이크 플레이오프에서 승리하여 챔피언십에 진출했다. 정규 시즌에서 이미 자이언츠에게 패배한 볼티모어는 우승 후보로 꼽히지 않았지만, 연장전에서 서든 데스 승리를 거두며 우승을 차지했다.[189] 콜츠는 이어진 1959년 결승전에서 자이언츠를 대파하며 동일한 기록으로 다시 한번 우승을 차지했다. 콜츠의 2연패 전까지 자이언츠는 NFL 최고의 팀이었으며, 그 다음 10년 동안에도 포스트 시즌 강호로 남아 결승전에서 세 번 연속 패배했다. 1968년 NFL 타이틀을 볼티모어가 획득하고 뉴욕이 인상적인 결과를 내지 못하면서 상황은 역전되었다. 최근 몇 년 동안 콜츠와 자이언츠는 형제가 각각 선발 쿼터백(페이튼 매닝과 일라이 매닝)으로 출전하면서, 이들의 가끔의 대결은 "매닝 볼"이라고 불렸다.[190] 2023년 시즌 현재, 콜츠가 역대 전적 12승 7패로 앞서고 있다.[191]
슈퍼볼 III은 뉴욕 제츠가 압도적으로 유리한 콜츠를 16-7로 꺾으면서 프로 스포츠 역사상 가장 유명한 이변 중 하나가 되었다.[192] 아메리칸 풋볼 리그(AFL)와 NFL의 합병으로 콜츠와 제츠는 새로운 AFC 동부에 배치되었다. 두 팀은 1970년부터 2001년까지 1년에 두 번씩 만났고 (1982년 선수 파업으로 중단), 콜츠가 AFC 남부로 옮겨가면서 두 팀의 라이벌 관계는 더욱 심화되었다. AFC 남부의 첫 9시즌 동안 플레이오프에서 세 번이나 만났는데, 제츠는 2002년 와일드 카드 플레이오프에서 콜츠를 41-0으로 꺾었고, 콜츠는 2009년 AFC 챔피언십 게임에서 제츠를 30-17로 이겼지만, 다음 해 와일드 카드 라운드에서 제츠는 콜츠를 상대로 또 한 번의 플레이오프 이변을 일으켜 17-16으로 승리했다. 이 경기는 페이튼 매닝의 콜츠에서의 마지막 경기였다. 제츠는 2012년, 앤드루 럭의 데뷔 시즌에 콜츠를 35-9로 꺾었고, 럭은 2연패 후 2016년에 제츠를 45-10으로 대파했다.
조 내머스와 조니 유니타스는 라이벌 관계의 시작에서 핵심 인물이었지만, 1972년 9월 24일까지 정규 경기에서 만난 적이 없었다. 내머스는 28번의 패스와 15번의 성공적인 패스에도 불구하고 6개의 터치다운과 496야드를 기록했다. 유니타스는 376야드와 2개의 터치다운을 기록했지만 6번의 색을 당했고, 제츠가 44-34로 승리했다. 이 경기는 NFL 역사상 최고의 10대 패싱 대결 중 하나로 여겨졌다.[193] 2023 시즌 현재, 콜츠가 역대 전적에서 44승 32패로 앞서고 있다.[194]
볼티모어는 NFL-AFL 통합 이후 AFC로 편입되면서 뉴욕 제츠, 마이애미 돌핀스, 버팔로 빌스, 보스턴 패트리어츠와 같이 공통점이 거의 없는 새로운 환경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볼티모어와 마이애미가 공통점을 갖는 한 가지 측면은 새로운 마이애미 코치 돈 슐라였다. 슐라는 통합 이전 7시즌(1963–69) 동안 콜츠의 코치를 맡았으며, 통합 후 조 로비와 계약을 맺었다. 이 계약이 통합 후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NFL의 선수 접촉 금지 규칙이 적용되어 돌핀스는 콜츠에게 1라운드 지명권을 넘겨줘야 했다.
쿼터백 얼 모럴의 활약으로 볼티모어는 컨퍼런스에서 디비전 타이틀을 차지한 최초의 비(非)AFL 프랜차이즈가 되었고, 마이애미 돌핀스보다 한 게임을 더 앞서며 1970년 NFL 시즌 3주차부터 디비전을 이끌었다. 두 프랜차이즈는 마이애미가 오클랜드 레이더스에게 1라운드에서 패배하면서 플레이오프에서 맞붙을 기회를 놓쳤지만, 볼티모어는 그 해 첫 번째 슈퍼볼 타이틀을 차지했다.
1971년, 두 팀은 시즌 마지막 주까지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마이애미는 홈에서 벌어진 13주차 경기에서 콜츠가 승리한 후,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보스턴에 패배했지만, 10–3–1의 기록으로 첫 디비전 타이틀을 획득했으며, 볼티모어는 10–4의 기록을 기록했다. 플레이오프에서 볼티모어는 클리블랜드를 20–3으로 꺾고 AFC 챔피언십 게임에 진출한 반면, 마이애미는 캔자스시티 치프스를 상대로 더블 연장전 끝에 승리했다. 이로 인해 디펜딩 리그 챔피언 콜츠가 유리할 것으로 예상되는 챔피언십 게임이 성사되었다. 그러나 마이애미는 AFC 챔피언십에서 21–0으로 승리하며 슈퍼볼 VI에서 댈러스에게 패했다. 1975년 볼티모어와 마이애미는 10–4의 기록으로 동률을 이루었지만, 콜츠가 상대 전적 우위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1977년 볼티모어는 마이애미와 함께 3년 연속(1976년에는 현재의 뉴잉글랜드 패트리어츠와 동률) 1위를 차지했고, 이번에는 시즌 상대 전적 2승, 컨퍼런스 기록 9–3(마이애미 8–4)으로 더 적은 자격으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이후 몇 년 동안의 라이벌 관계는 콜츠의 매우 저조한 경기력으로 인해 사실상 무효화되었다. 콜츠는 1977년 오클랜드 레이더스 시즌에 플레이오프에서 패배하고 스타 러닝백 마샬 포크를 1999년에 트레이드하기까지 21시즌(1978–98) 동안 단 117경기만 승리했다. 여기에는 NFL의 파업으로 단축된 1982 시즌 동안 0–8–1의 기록도 포함되었다.
1995년, 인디애나폴리스로 팀을 옮긴 콜츠는 1995년 버팔로 빌스 시즌에 버팔로를 상대로 9–7의 기록으로 동률을 이루며 다시 한 번 시즌 시리즈에서 승리하여 포스트 시즌에 진출했다. 이듬해에는 마이애미를 9–7의 기록으로 제치고, 큰 의미가 없는 3위 자리를 차지했지만 와일드 카드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1999년 마이애미 돌핀스 시즌과 1999년 인디애나폴리스 콜츠 시즌에 프로 풋볼 명예의 전당에 헌액될 댄 마리노와 떠오르는 스타 페이튼 매닝 사이의 경기는 드라마틱했다. 마리노는 RCA 돔에서 4쿼터에 25점의 대역전극을 펼쳐 돌핀스가 34–31로 승리했고, 하드록 스타디움에서 열린 경기에서 마리노는 또 한 번 역전을 이끌어내 종료 36초를 남기고 34–34 동점을 만들었지만, 매닝은 콜츠를 53야드 필드 골 범위까지 이끌어내 경기 종료와 함께 37–34로 콜츠가 승리했다.
두 프랜차이즈 간의 마지막으로 의미 있는 경기는 2000 시즌에 열렸으며, 마이애미는 11–5의 기록으로 인디애나폴리스를 제치고 디비전 챔피언십을 차지했다. 두 팀은 와일드 카드 라운드에서 맞붙었고, 돌핀스가 연장전에서 23–17로 승리한 후 2000년 오클랜드 레이더스 시즌에서 오클랜드에게 27–0으로 완패했다(콜츠는 시즌 2주차에 레이더스가 24–7의 점수 차를 뒤집고 38–31로 승리하면서 쓰라린 패배를 겪었다). 2002년 인디애나폴리스 콜츠 시즌에 콜츠는 새롭게 창설된 AFC 사우스 디비전으로 이동했다. 두 클럽은 9월 15일 RCA 돔에서 만나 돌핀스가 콜츠의 마지막 드라이브를 막아내고 21–13으로 승리했다. 이 경기를 마지막으로 라이벌 관계는 사실상 종결되었다. 두 클럽은 2009년 ''먼데이 나잇 풋볼'' 경기에서 만났는데, 콜츠는 15분밖에 공을 소유하지 못했지만 돌핀스를 27–23으로 꺾었다.
2012년 NFL 드래프트에서 라이언 태너힐과 럭이 각 팀의 새로운 쿼터백으로 합류하면서 라이벌 관계가 다시 불붙었다. 두 팀은 2012 시즌에 만나 럭이 돌핀스를 상대로 23–20으로 승리하며 신인 선수 한 경기 최다 패싱 야드 기록을 갱신했지만, 다음 시즌에는 태너힐과 돌핀스가 콜츠를 24–20으로 꺾었다. 돌핀스의 승리는 AFC 동부 팀을 상대로 럭과 콜츠에게 슬럼프(콜츠의 8연패)를 시작하게 했으며, 2016년 12월 2016년 뉴욕 제츠 시즌에서 41–10으로 승리하면서 끝이 났다. 2023 시즌 현재 돌핀스는 통산 전적 48–28로 앞서고 있다.[195]
4. 1. 지구 라이벌
잭슨빌 재규어스와 인디애나폴리스 콜츠는 NFL의 AFC 사우스 디비전에 함께 속해 있어 라이벌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콜츠가 이 관계에서 우위를 점했는데, 특히 페이튼 매닝 시대에 두드러졌다. 재규어스는 지속적으로 경쟁력 있는 팀을 구성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지만, 콜츠를 상대로 예상을 뒤엎는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167][168][169] 또한 재규어스는 타이탄스나 텍산스를 상대로 거둔 승리보다 콜츠를 상대로 더 많은 승리를 기록했다.[170] 2020년대 들어 양 팀의 경쟁은 더욱 치열해졌다.[171]콜츠와 타이탄스는 AFC 사우스에서 가장 오래된 라이벌 관계이다. 이들은 1970 시즌부터 각각 볼티모어 콜츠와 휴스턴 오일러스라는 이름으로 경쟁을 시작했다.[172] 2002 시즌부터 같은 지구에 속하게 되면서, AFC 사우스 타이틀을 놓고 여러 차례 맞붙었다. 타이탄스가 콜츠로부터 타이틀을 빼앗기도 했다.[173][174] 그러나 최근 몇 년 동안은 콜츠가 쿼터백 페이튼 매닝과 앤드류 럭의 활약에 힘입어 라이벌 관계를 주도했다. 특히 럭은 타이탄스를 상대로 11승 무패의 기록을 남겼다.[175][176] 2020년대 들어 두 팀 모두 AFC 사우스 타이틀과 플레이오프 진출을 놓고 경쟁하면서 다시 경쟁 구도가 형성되었다.[177]
2023 시즌까지 콜츠가 상대 전적에서 37승 22패로 앞서고 있다. 두 팀은 플레이오프에서 한 차례 만났으며, 2000 AFC 디비전 플레이오프 경기에서 타이탄스가 19-16으로 승리했다.[178]
4. 2. 컨퍼런스 라이벌
콜츠와 잭슨빌 재규어스는 NFL의 AFC 사우스 디비전에 함께 속해 있어 라이벌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콜츠가 이 관계에서 우위를 점했는데, 특히 페이튼 매닝 시대에 두드러졌다. 재규어스는 지속적으로 경쟁력 있는 팀을 구성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지만, 콜츠를 상대로는 상당한 이변을 일으키기도 했다.[167][168][169] 또한 재규어스는 타이탄스나 텍산스를 상대로 거둔 승리보다 콜츠를 상대로 더 많은 승리를 기록하기도 했다.[170] 2020년대에 들어서는 양 팀 모두에게 경쟁이 더욱 치열해지는 시기였다.[171]5. 주요 선수
인디애나폴리스 콜츠는 여러 유명 선수들을 배출했다. 포지션별 주요 선수는 다음과 같다.
'''쿼터백'''
- 페이튼 매닝: 1998년부터 2011년까지 콜츠에서 활동하며 팀을 슈퍼볼 우승으로 이끌었고, 여러 MVP를 수상했다.[196][197]
- 조니 유니타스: 1956년부터 1972년까지 콜츠의 쿼터백으로 활약하며 팀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러닝백'''
- 마셜 포크: 1994년부터 1998년까지 콜츠에서 뛰며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 에저린 제임스: 1999년부터 2005년까지 콜츠의 주전 러닝백으로 활약하며 많은 기록을 세웠다.
'''와이드 리시버'''
- 마빈 해리슨: 1996년부터 2008년까지 콜츠에서 활동하며 페이튼 매닝과의 콤비로 유명했다.
- 레이몬드 베리: 1955년부터 1967년까지 콜츠의 와이드 리시버로 활약하며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수비수'''
- 지노 마르케티: 1953년부터 1966년까지 콜츠의 디펜시브 엔드로 뛰며 강력한 수비를 이끌었다.
- 아트 도노반: 1953년부터 1961년까지 콜츠의 디펜시브 태클로 활약하며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 드와이트 프리니: 2002년부터 2012년까지 콜츠에서 활동하며 뛰어난 패스 러셔로 명성을 떨쳤다.
이 외에도 짐 파커, 테드 헨드릭스, 존 매키, 레니 무어 등 많은 선수들이 콜츠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5. 1. 영구 결번
번호 | 선수 | 포지션 | 뛴 년도 | 영구 결번 지정 |
---|---|---|---|---|
18 | 페이튼 매닝 | QB | 1998–2011 | 2017년 10월 8일[196][197] |
19 | 조니 유니타스 | QB | 1956–1972 | |
22 | 버디 영 | RB | 1953–1955 | |
24 | 레니 무어 | HB | 1956–1967 | 1968년 11월 24일 |
70 | 아트 도노반 | DT | 1953–1961 | 1962 |
77 | 짐 파커 | OL | 1957–1967 | |
82 | 레이몬드 베리 | WR | 1955–1967 | |
89 | 지노 마르케티 | DE | 1953–1966 |
5. 2. 프로 풋볼 명예의 전당
No. | 이름 | 포지션 | 시즌 | 헌액 |
---|---|---|---|---|
82 | 레이먼드 베리 | SE | 1955–1967 | 1973 |
96 | 리처드 덴트 | DE | 1996 | 2011 |
29 | 에릭 디커슨 | RB | 1987–1991 | 1999 |
70 | 아트 도노반 | DT | 1953–1961 | 1968 |
28 | 마셜 포크 | RB | 1994–1998 | 2011 |
93 | 드와이트 프리니 | DE | 2002–2012 | 2024 |
88 | 마빈 해리슨 | WR | 1996–2008 | 2016 |
83 | 테드 헨드릭스 | LB | 1969–1973 | 1990 |
32 | 에저린 제임스 | RB | 1999–2005 | 2020 |
81 | 안드레 존슨 | WR | 2015 | 2024 |
88 | 존 매키 | TE | 1963–1971 | 1992 |
89 | 지노 마르케티 | DE | 1953–1964, 1966 | 1972 |
18 | 페이튼 매닝 | QB | 1998–2011 | 2021 |
77 | 짐 파커 | OT | 1957–1967 | 1973 |
24 | 레니 무어 | HB | 1956–1967 | 1975 |
34 | 조 페리 | FB | 1961–1962 | 1969 |
19 | 조니 유니타스 | QB | 1956–1972 | 1979 |
이름 | 포지션 | 재임 기간 | 헌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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윕 이뱅크 | 헤드 코치 | 1954–1962 | 1978 |
돈 슐라 | 헤드 코치 | 1963–1969 | 1997 |
빌 폴리안 | 사장/GM | 1998–2011 | 2015 |
토니 던지 | 헤드 코치 | 2002–2008 | 20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