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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연 (삼국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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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장연은 삼국 시대 인물로, 흑산적이라 불리는 산적 집단의 수령이었다. 황건적의 난 시기에 장우각과 함께 도적단을 결성했으며, 장우각 사망 후 그의 뒤를 이어 두목이 되었다. 후한 조정에 귀순하여 평난중랑장에 임명되었으나, 이후 원소와 대립하며 여러 차례 전투를 벌였다. 205년 조조에게 항복하여 평북장군에 임명되었으며, 업의 수비를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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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연 (삼국지)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이름장연
본명저연
비연
출생지상산군진정현
사망지미상
직업도적 두목, 장군, 관료
관직
관내후보장군 (관내후보장군)180년대/190년대
평북장군 (평북장군)204년 ~ ?
작위안국정후 (安國亭侯)
가족 관계
아들장방
별칭
이명장비연

2. 생애

장연은 흑산적(黑山賊)이라 불리는 산적과 죄인들을 이끄는 수령이었다. 황건적의 난이 일어났을 때, 장우각과 함께 도적단을 결성하여 각지를 휩쓸고 다녔다. 전투 중 장우각이 화살에 맞아 상처가 악화되어 죽기 직전, 장연에게 뒤를 부탁했다. 장연은 장우각의 사후 그의 뒤를 이어 두목이 되었고, 성씨를 장(張)씨로 고쳤다.[4]

이후 원소공손찬과의 싸움을 계속하는 틈을 타 을 공격해 함락시키나, 혼란을 수습한 원소의 역공으로 3개월 만에 다시 업을 빼앗겼다(193년). 이후 원소는 장연을 계속 공격하여 상산에서 원소와 맞붙었다. 이 전투에서 장연은 수만의 정예병과 수천 기병을 거느리고, 흉노·오환의 지원을 받으며 맞섰으나, 10여 일간의 치열한 교전 끝에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퇴각했다.

진수는 장연이 원소에게 패하여 무리가 흩어졌다고 기록하여 상산 전투가 장연을 완전히 몰락시킨 전투라는 인식이 널리 알려져 있으나, 상산 전투 뒤에 원소군은 그동안 거듭된 전투로 피로가 극에 달해 장연을 더 이상 공격하지 못하고 물러났다는 기록도 있어, 상산 전투가 장연에게 대단히 치명적인 타격을 입힌 전투로는 보이지 않고 이후에도 어느 정도 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195년, 6년 무렵 장홍이 원소를 등졌을 때 장연과 연합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199년에는 역경을 지키던 공손찬이 원소에게 공격당하자 10만 군사를 이끌고 공손찬을 구원했으나 원소에게 패하여 많은 병사를 잃고 달아났다.[18][22]

관도 대전 이후 202년 원소가 죽은 뒤 원씨가 몰락하고 조조가 기주를 평정하자, 장연은 남은 무리를 이끌고 조조에게 항복했으며(205년 4월) 그 공적으로 평북장군(平北將軍)이란 직위와 안국정후(安國亭侯)란 봉호를 하사받았다. 업의 수비를 맡았고, 식읍은 500호였다.[23]

군을 이끌 때는 항상 용맹하고 민첩하게 움직였기 때문에 비연(飛燕; 날아다니는 제비)이란 별명을 얻었다.

증손 장림(張林)은 서진을 섬기고, 조왕 사마륜찬탈에 가담했으나 얼마 가지 않아 주살당했다.

2. 1. 초기 활동과 흑산적 결성

황건적의 난 당시, 장우각과 함께 도적단을 결성하여 각지에서 세력을 떨쳤다. 장우각이 전투 중 화살에 맞아 부상이 악화되어 사망하자, 그의 뒤를 이어 도적단의 두목이 되었고, 장우각을 기리기 위해 성씨를 장씨로 고쳤다.[7] 이때 褚燕|추연중국어에서 張燕|장연중국어으로 개명했다.

장연이 이끄는 흑산적은 병주를 중심으로 상산, 조군, 중산, 상당, 하내로 이어지는 기주의 산지를 근거지로 삼았다.[12] 손경, 왕당(王當) 등의 무리가 장연에게 투항하면서 그 숫자가 100만 명에 달한다고 칭해질 정도로 세력이 커졌다.[8][1][9] 黑山賊|흑산적중국어은 태행산맥에서 산적 연합으로 활동했다.[9] 후한 조정은 흑산적을 무력으로 진압하지 못했고, 하북 지역에서는 흑산적에게 피해를 입지 않은 군현이 없을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었다.[13]

결국 조정은 장연을 회유하기 위해 平難中郞將|평난중랑장중국어에 임명하고 효렴을 추천할 수 있는 자격을 주었다.[14] 또한 定路校尉|정로교위중국어로 임명하고 그의 영토에서 관리를 임명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여, 그 집단을 행정 체제 내로 끌어들였다.[15] 이는 사실상 조정이 장연의 병주 지배를 인정한 것이었다.

2. 2. 후한 조정 귀순과 병주 지배

흑산적(黑山賊)이라 일컫는 산적 및 죄인들을 이끄는 수령이다. 황건적의 난이 일어난 시기 장우각(張牛角)과 함께 도적단을 결성해 각지를 헤집고 다녔다. 전투 중에 장우각이 화살에 맞아 상처가 악화되어 최후를 맞이할 때 저연에게 뒤를 부탁했다. 저연은 장우각의 사후 그의 뒤를 이어 두목이 되어 장씨로 성씨를 고쳤다.[4]

장연이 이끄는 흑산적은 병주를 중심으로 상산·조군·중산·상당·하내로 이어지는 기주의 산지들을 근거지로 삼았고, 손경·왕당(王當) 등의 무리가 장연에게 투항하니 그 숫자가 무려 100만이라고 칭해졌다. 후한 정부는 거대한 흑산적을 무력으로 진압하지 못해 하북에선 흑산적에게 해를 입지 않은 군현이 없을 정도로 피해가 심각했다.[8][1][9]

장연은 스스로 귀순하여 평난중랑장(平難中郞將)에 임명되어 효렴을 추천할 수 있는 자격이 내려졌다. 정부가 사실상 장연의 병주 지배를 인정한 것이었다.[14]

190년 동탁이 후한의 실권을 장악하자, 반동탁연합군에 참가했다. 이후 기주 한복이 공손찬에게 패하고 위세를 잃자 인접해 있던 장연 역시 기주를 노려 병력을 파견하지만, 이 일련의 사건을 배후에서 조종한 원소에게 격파되면서 대립이 시작된다. 원소가 기주목이 되어 공손찬과 싸우게 되자 장연은 공손찬을 지원하여 군대를 파견하지만 원소에게 격파된다.

이후로도 원소가 공손찬과의 싸움을 계속하는 틈을 타 장연은 을 공격해 함락시키나 혼란을 수습한 원소의 역공을 받아 3개월 만에 다시 업을 빼앗긴다.(193년) 이후 원소는 장연을 계속 공격하여 마침내 장연은 상산에서 원소와 맞붙는다. 이 전투에서 장연은 수만의 정예병과 수천의 기병을 거느리고, 흉노·오환의 지원을 받으며 맞섰으나, 10여 일간의 치열한 교전 끝에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퇴각했다. 이후에도 원소의 집요한 군사, 외교적인 공격을 받아 서서히 세력이 쇠퇴한 것으로 보인다(이 무렵부터 흉노·오환 등은 원소에게 협력했다).[16][17][18][19]

진수는 장연의 열전에서 장연이 원소에게 패하여 무리가 흩어졌다고 기록하여 상산전투가 장연을 완전히 몰락시킨 전투라는 인식이 널리 알려져 있으나, 상산 전투 뒤에 원소군은 그동안 거듭된 전투로 피로가 극에 달해 장연을 더 이상 공격하지 못하고 물러났다는 기록도 있어, 상산전투가 장연에게 대단히 치명적인 타격을 입힌 전투로는 보이지 않고 이후에도 어느 정도 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195, 6년 무렵 장홍이 원소를 등졌을 때 장연과 연합했다는 기록이 보이며, 199년에는 역경을 지키던 공손찬이 원소에게 공격당하자 10만의 군사를 이끌고 공손찬을 구원했으나 원소에게 패하여 많은 병사를 잃고 달아났다고 한다.[18][22]

202년 원소가 죽은 뒤 원씨가 몰락하고 조조가 기주를 평정하자, 남은 무리를 이끌고 조조에게 항복했으며(205년 4월) 그 공적으로 평북장군(平北將軍)이란 직위와 안국정후(安國亭侯)란 봉호를 하사받았다. 업의 수비를 맡았고, 식읍은 500호였다.[23]

2. 3. 반동탁 연합군 참가와 원소와의 대립

황건적의 난 시기, 장연은 장우각과 함께 도적단을 결성하여 각지를 누볐다. 장우각이 전투 중 화살에 맞아 사망하자, 그의 유언에 따라 장연이 뒤를 이어 두목이 되었고, 성을 장(張)씨로 바꾸었다.

장연이 이끄는 흑산적은 병주를 중심으로 기주의 산지를 근거지로 삼았으며, 손경, 왕당(王當) 등이 투항하여 그 수가 100만에 달한다고 칭해졌다. 후한 정부는 흑산적을 진압하지 못했고, 하북 지역은 큰 피해를 입었다.

장연은 스스로 귀순하여 평난중랑장(平難中郞將)에 임명되었고, 효렴을 추천할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 이는 사실상 정부가 장연의 병주 지배를 인정한 것이었다.

190년 동탁이 후한의 실권을 장악하자, 장연은 반동탁 연합군에 참가했다. 이후 기주 한복이 공손찬에게 패하고 위세를 잃자, 장연은 기주를 노리고 병력을 파견했지만, 이 사건을 배후에서 조종한 원소에게 격파당하면서 대립이 시작되었다. 원소가 기주목이 되어 공손찬과 싸우게 되자, 장연은 공손찬을 지원했지만 원소에게 다시 격파당했다.

이후에도 장연은 을 공격하여 함락시키는 등 원소에게 지속적으로 저항했으나, 원소의 역공으로 3개월 만에 업을 빼앗겼다(193년). 원소는 계속해서 장연을 공격했고, 장연은 상산에서 흉노, 오환의 지원을 받으며 맞섰으나, 10여 일간의 격전 끝에 많은 사상자를 내고 퇴각했다. 이후 원소의 군사, 외교적 공격으로 장연의 세력은 점차 쇠퇴한 것으로 보인다.

진수는 장연이 원소에게 패하여 무리가 흩어졌다고 기록했지만, 상산 전투 이후에도 원소군이 피로로 인해 더 이상 공격하지 못하고 물러났다는 기록도 있어, 장연이 완전히 몰락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199년, 장연은 역경을 지키던 공손찬을 구원하기 위해 10만 군사를 이끌었으나 원소에게 패하여 많은 병사를 잃고 달아났다.[18]

2. 4. 조조에게 항복

황건적의 난 당시 장우각과 함께 도적단을 결성하여 각지에서 횡행하였다. 장우각이 죽은 후 그 뒤를 이어 두목이 되었고, 장씨로 성을 고쳤다. 후한 조정은 여러 차례 흑산적을 진압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결국 장연은 스스로 귀순하여 평난중랑장에 임명되었고, 효렴을 추천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 이는 사실상 후한 조정이 장연의 지배권을 인정한 것이었다.

동탁이 후한의 실권을 장악하자, 반동탁 연합군에 참가했다. 이후 공손찬과 연합하여 원소와 대립했으나, 원소 휘하의 여포에게 패하여 군세가 꺾였다. 관도 대전 이후 원소가 죽고 원씨가 몰락하자, 조조에게 항복하여 평북장군 지위를 받았다.[23]

3. 장연을 섬긴 사람들

곽대현

두장

변희

수고

손경

왕당

우독

우저근

유석

이대목

좌교

좌자장팔

청우각

황룡

4. 친족 관계

장연

5. 평가

장연은 용맹하고 민첩하여 '비연(飛燕)'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1] 흑산적(黑山賊)이라 불리는 산적과 죄인들을 이끄는 수령으로, 그 세력이 100만에 달했다고 한다.[1] 비록 산적 출신이었으나, 스스로 후한에 귀순하여 평난중랑장(平難中郞將)에 임명되기도 했다.[1]

6. 대중문화 속 장연

토탈 워: 삼국지에 등장하며, 자신의 산적 세력을 이끌고 나온다.

참조

[1] 간행물 Genuine Words: Deception as a War Tactic and a Mode of Writing in Third-Century China https://www.tandfonl[...] 2022
[2] 문서 Sanguozhi vol.8
[3] 서적 A Biographical Dictionary of Later Han to the Three Kingdoms 23–220 AD Brill
[4] 문서 張燕,常山真定人也,本姓褚。Sanguozhi vol.8
[5] 문서 黃巾起,燕合聚少年為群盜,在山澤閒轉攻,還真定,眾萬餘人 ''Sanguozhi'' vol. 8
[6] 문서 博陵張牛角亦起眾,自號將兵從事,與燕合。燕推牛角為帥 Sanguozhi vol.8
[7] 문서 俱攻廮陶。牛角為飛矢所中。被創且死,令眾奉燕,告曰:「必以燕為帥。」Sanguozhi vol.8
[8] 문서 其後人眾寢廣,常山、趙郡、中山、上黨、河內諸山谷皆相通,其小帥孫輕、王當等,各以部眾從燕,眾至百萬,號曰黑山。靈帝不能征,河北諸郡被其害。燕遣人至京都乞降,拜燕平難中郎將 ''Sanguozhi'' vol.8
[9] 서적 Fire over Luoyang: A History of the Later Han Dynasty 23–220 AD Brill
[10] 서적 Ts'ao Ts'ao and the Rise of Wei: The Early Years Columbia University
[11] 간행물 The Three Kingdoms and Western Jin A History of China in the Third Century A.D. https://openresearch[...] 2003
[12] 서적 Imperial Warlord: A Biography of Cao Cao 155-220 AD https://books.google[...] Brill 2010
[13] 문서 Houhanshu vol. 71
[14] 문서 燕遣人至京都乞降,拜燕平難中郎將 ''Sanguozhi'' vol.8
[15] 서적 Ts'ao Ts'ao and the Rise of Wei: The Early Years Columbia University
[16] 문서 Yingxiongji Sangzuozhi vol.6
[17] 문서 紹與布擊張燕于常山。燕精兵萬餘,騎數千。常與其親近成廉、魏越等陷鋒突陳,遂破燕軍。''Sanguozhi'' vol.7
[18] 서적 Imperial Warlord: A biography of Cao Cao 155-220 AD Brill 2010-08-18
[19] 서적 Ts'ao Ts'ao and the Rise of Wei: The Early Years Columbia University
[20] 서적 Imperial Warlord: A biography of Cao Cao 155-220 AD Brill 2010-08-18
[21] 서적 Ts'ao Ts'ao and the Rise of Wei: The Early Years Columbia University
[22] 서적 Ts'ao Ts'ao and the Rise of Wei: The Early Years Columbia University
[23] 문서 Sanguozhi vol.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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