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미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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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적미군은 신나라 말기에 일어난 농민 반란 세력으로, 붉은 눈썹을 표식으로 삼아 적미(赤眉)라고 불렸다. 18년에 번숭 등이 낭야군에서 봉기하여 세력을 키웠으며, 왕망 정권의 공격을 물리치고 세력을 확장했다. 이후 경시제를 옹립하고 장안을 점령했으나, 식량 부족과 민심 이반으로 몰락했다. 27년에 후한의 광무제에게 항복하며 해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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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미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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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 | |
발생 시기 | 1세기 |
발생 장소 | 중국 |
원인 | 왕망의 신(新)에 대한 반란, 황하의 범람으로 인한 기근 |
목표 | 한나라의 재건 |
결과 | 후한군에 의해 진압됨, 일부는 공손술에게 투항, 나머지는 내부 분열로 자멸 |
명칭 | |
한자 | 赤眉 |
병음 | Chìméi |
웨이드-자일스 | Ch'ih-mei |
한국어 | 적미 |
일본어 | Sekibi |
영어 | Red Eyebrows |
역사적 배경 | |
주요 사건 | 왕망의 실정 황하 범람과 대기근 관리들의 부정부패 |
주요 인물 | |
지도자 | 초기: 왕광(王匡), 왕봉(王鳳) 후기: 번숭(樊崇), 서선(徐宣), 양음(楊音) |
주요 장군 | 사록(謝祿) 동해(董海) 방안국(逄安國) |
세력 분포 | |
주요 근거지 | 산둥반도, 장쑤성 북부, 안후이성 북부 |
활동 지역 | 중원 지역 |
군사력 | |
병력 규모 | 수십만 명 (최대 100만 명 추정) |
주요 무기 | 칼, 창, 활, 몽둥이 등 |
주요 전투 | |
주요 전투 | 곤양 전투 (일부 참가) 정공 전투 낙양 전투 (점령) 고릉 전투 |
쇠퇴 및 멸망 | |
쇠퇴 원인 | 군율 부족으로 인한 민심 이반 후한군의 강력한 진압 내부 분열 및 지도부의 갈등 |
멸망 과정 | 유수의 후한군에 의해 격파 일부는 공손술에게 투항 나머지는 내부 분열로 자멸 |
영향 | |
역사적 의의 | 신나라 멸망에 기여, 후한 건국에 간접적 영향 |
평가 | 대규모 농민 반란이었으나, 약탈과 파괴로 민생에 악영향을 미침 |
2. 발생과 명칭의 유래
천봉 5년(18년) 번숭은 낭야군 거현(莒縣)에서 거병하여, 처음에는 백여 명이 태산으로 들어갔다. 당시 청주와 서주에 큰 기근이 들어 도적들이 봉기하였는데, 이들이 번숭을 용맹하다고 여겨 따랐으므로, 번숭의 세력은 1년 만에 만여 명이 되었다. 낭야군 사람 방안(逄安), 동해군 사람 서선(徐宣), 사록(謝祿), 양음(楊音) 등도 번숭에게 가담했는데 이들의 수는 수만 명에 달했다.[5]
번숭 등은 처음에는 가난 때문에 도적이 되었으므로 성을 공격하거나 땅을 점령할 계획은 없었다. 무리가 많아지면서 '살인하는 자는 죽이며, 상처를 입히는 자는 그대로 되갚아서 상처를 입힌다'는 규약을 세웠으나, 약속은 구두로 하고 문서나 깃발, 호령은 없었다. 무리 중에서 가장 높은 자를 '삼로(三老)'라 불렀는데, 이는 번숭이 거병 당시 스스로 부르던 호칭이었다. 그 밑으로 종사(從事), 졸사(卒史)가 있었으며, 서로를 '거인(巨人)'이라 불렀다.[5]
번숭군의 규모가 커지면서 약탈이 심해지자, 왕망은 각 군(郡)과 국(國)에 사자를 보내 이들을 공격하게 하였으나 이길 수 없었다. 지황 3년(22년)에는 번숭군이 관군을 크게 이겨 1만여 명을 죽이고 청주 지역을 약탈했다. 이에 왕망은 태사 왕광과 경시장군(更始將軍) 염단에게 정예군 10만 명을 이끌고 공격하게 했다. 번숭 등은 왕망의 군사들과 아군을 구별하기 위해 눈썹을 붉게 물들였고, 이로 인해 '''적미'''(赤眉), 즉 붉은 눈썹으로 불리게 되었다.[5]
2. 1. 봉기의 배경
17년경, 왕망의 실정과 대규모 황하 홍수로 인해 산둥성과 장쑤성 북부 지역의 농민들은 더 이상 농업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생존을 위해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그중 대표적인 것이 번숭과 여모(呂母)의 봉기였다.[5]천봉 원년(14년), 낭야군 해곡현(현재의 산둥성르자오시둥강구)에서 양조로 재산을 모은 집안의 여모(呂母)라는 노부인의 아들 여육은 현청에 근무하고 있었으나 작은 죄로 상사인 현재(현의 장관, 현령에서 개칭)에게 처형당했다.[5] 여모는 현재를 원망하며 아들의 원수를 갚을 것을 계획했다. 재산을 이용하여 젊은이들에게 술을 외상으로 주고, 옷을 빌려주었다. 수년이 지나 재산이 다 떨어졌을 때, 젊은이들은 외상값을 치르려 했고, 여모는 현재에 대한 복수를 호소했다. 젊은이들은 복수에 가담하여 수천 명의 인원을 모아 현재에게 반란을 일으켰다. 여모는 현재를 살해한 후 사망했지만, 모인 사람들은 법이 가혹하고 부세가 무겁다는 이유로 해산하지 않고, 천봉 5년(18년)에 해곡현 서쪽, 거현(현재의 산둥성 르자오시 쥐현)에서 봉기하여 낭야 출신인 번숭을 지도자로 하는 반란군에 합류했다.
천봉 5년(18년) 번숭 등은 낭야군 거현(莒縣)에서 거병하여, 처음에는 백여 명이 모여 태산으로 들어갔다. 당시 청주, 서주에 큰 기근이 들어 도적들이 봉기하였는데, 이들이 번숭을 용맹하다고 여겨 따랐으므로, 번숭의 세력은 1년 만에 만여 명이 되었다. 또한 낭야군 사람 방안(逄安), 동해군 사람 서선(徐宣), 사록(謝祿), 양음(楊音) 등의 거병 세력들도 번숭에게 가담했는데 이들의 수가 수만 명에 달했다.
번숭 등은 처음에는 단지 가난해서 도적이 되었으므로 성을 공격하고 땅을 점령할 계책을 갖고 있지 않았다. 무리가 많아지다 보니 '살인하는 자는 죽이며, 상처를 입히는 자는 그대로 되갚아서 상처를 입힌다'는 규약을 세웠으나, 약속은 구두로 하고 문서나 깃발, 호령 같은 것이 없었다. 무리 중에서 제일 높은 자를 '삼로(三老)'라 불렀는데, 이는 번숭이 거병 당시 스스로를 부르던 호칭이었다. 그 밑으로 종사(從事), 졸사(卒史)가 있었으며, 서로를 '거인(巨人)'이라 불렀다고 한다.
2. 2. 번숭의 봉기
18년 번숭은 산둥성 르자오(日照) 지역 근처인 거현(莒縣)과 낭야군에서 독자적인 반란을 일으켰다.[3] 그는 태산을 근거지로 삼아 세력을 키웠으며, 방안(逄安), 서선(徐宣), 사록(謝祿), 양음(楊音) 등 다른 반란 지도자들과 연합하여 지방 정부가 막을 수 없을 정도로 성장했다.[3]번숭 등은 처음에는 가난 때문에 도적이 되었으므로, 성을 공격하거나 땅을 점령할 계획은 없었다. 그러나 무리가 많아지면서 '살인하는 자는 죽이며, 상처를 입히는 자는 그대로 되갚아서 상처를 입힌다'는 규약을 세웠다. 다만, 약속은 구두로 이루어졌고 문서나 깃발, 호령 같은 것은 없었다. 무리 중에서 가장 높은 자는 '삼로(三老)'라고 불렀는데, 이는 번숭이 거병 당시 스스로를 부르던 호칭이었다. 그 밑으로는 종사(從事), 졸사(卒史)가 있었으며, 서로를 '거인(巨人)'이라고 불렀다.
2. 3. 여모의 봉기
어머니 뤼는 아들이 산둥성 르자오시 하이취 현(海曲)의 현령에게 처형당하자, 재산을 팔아 가난한 젊은이들을 모아 복수하였다.[5] 그녀는 17년에 현청을 습격하여 현령을 죽이고 수만 명의 병사를 모았으나, 18년에 질병으로 사망했다.[5] 어머니 뤼가 사망한 후, 그녀의 추종자들은 대부분 번숭에게 합류했다.2. 4. 적미군의 명칭
왕망이 보낸 군사들과 아군을 구별하기 위해 번숭 등은 눈썹을 붉게 물들였다. 이로 인해 '적미', 즉 붉은 눈썹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5]3. 세력의 확대와 활동
지황 3년(22년), 왕망은 왕광과 염단에게 약 10만 명의 병사를 주어 적미군 토벌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왕광과 염단의 군대를 무찌른 적미군은 만여 명을 살해하였고, 염단은 전사, 왕광은 도주하였다. 이후 십여 만의 병사를 동원할 수 있는 세력으로 성장하였고, 낭야군 출신의 반란군 지도자 여모가 죽은 뒤에는 그녀가 이끌던 반란군의 일부도 적미군에 가담하였다. 적미군은 동해군을 공격하였으나 패배하여 수천 명의 사망자를 내고 물러났다. 그 후 초(楚), 패(沛), 여남(汝南), 영천(潁川) 등의 군을 약탈하고 진류군에 들어가, 노성(魯城)을 함락시키고 복양에까지 이르렀다.[5]
장안 입성을 달성했을 때 적미군은 그 규모 유지가 한계에 달해 각지에서 식량을 구하며 이동하는 상황이었다. 롱우로 행군 시 대설을 만나 막대한 피해를 입어 진로를 동쪽으로 바꾸었다. 그 후 장안으로 돌아왔으나, 관중을 포기하고 건무 3년(27년)에 효저(현재의 허난성뤄양시뤄닝현)에서 광무제의 장군 풍이의 군에게 패배하고, 의양에서 대기하고 있던 광무제 본군에 번숭 등은 투항했다. 번숭 등은 다시 거병을 꾀하다 발각되어 살해되고, 적미군은 소멸했다. 다만, 서선·양음 두 사람은 귀향하여 평온한 여생을 보냈다.
3. 1. 초기 활동
번숭 등은 처음에는 가난 때문에 도적이 되었으므로, 성을 공격하거나 점령할 계획은 없었다. 이들은 '살인하는 자는 죽고, 상처를 입히는 자는 그대로 갚는다'는 규약을 세웠으나, 구두로 약속하고 문서나 깃발, 호령 등은 없었다.[5] 이들은 서로를 '거인(巨人)'이라 불렀고, 무리 중에서 제일 높은 자를 '삼로(三老)'라 불렀으며, 그 밑으로 종사(從事), 졸사(卒史) 등의 직책이 있었다.[5]3. 2. 왕망 정권과의 대립
赤眉軍중국어이 성장하자, 왕망은 각 군(郡)과 국(國)에 사자를 보내 공격하게 했으나 이길 수 없었다. 지황 3년(22년), 赤眉軍중국어은 관군을 크게 이겨 청주 지역을 약탈했다.[5] 왕망은 태사 왕광과 경시장군(更始將軍) 염단에게 10만 명의 정예군을 이끌고 공격하게 했다.[5] 그러나 赤眉軍중국어은 이들을 격파하고 염단은 전사했다.[5]왕광과 염단이 이끄는 군대가 격파되자, 적미군은 십여 만의 병사를 동원할 수 있는 세력으로 성장하였다.[5]
3. 3. 경시제와의 관계
경시제가 23년에 즉위하고 장안에 입성하자, 적미군은 한때 경시제에게 귀순했다.[5] 그러나 열후로 서훈된 상층부도 봉지가 정해지지 않았고, 병사들이 이반하기 시작하면서 경시제와 대립하게 되었다.[5]3. 4. 유분자 옹립과 장안 점령
25년, 적미군은 관중(關中)으로 침공하여 한(漢) 왕실의 후손인 유분자를 황제로 옹립했다. 그러나 유분자는 실질적인 권력이 없었고, 군대에서 계속 소를 치는 일을 했다.[2][3]적미군은 장안을 점령했고, 경시제는 도망쳤으나 곧 항복했다. 유분자의 형인 유공의 중재로 경시제는 장사왕에 봉해졌으나,[3] 이후 적미군에게 살해당했다.
4. 몰락
천봉 5년(18년) 낭야군 출신 번숭을 지도자로 하는 반란군에 합류한 적미군은 태산 산악부를 거점으로 세력을 확대했다. 지황 3년(22년), 왕망은 왕광과 렴단에게 약 10만 명의 병사를 주어 적미군 토벌을 명했으나 실패했고, 이 시점에서 적미군의 세력은 10만을 넘어섰다.[5]
경시 원년(23년) 경시제가 즉위하고 장안에 입성하자, 적미군은 한때 경시제에게 귀순했다. 그러나 열후로 서훈된 상층부도 봉지가 정해지지 않았고, 병사들은 이반하기 시작하여 경시제와 대립했다. 건무 원년(25년), 적미군은 관중으로 침공하여 유분자를 황제로 옹립하고, 서선을 승상으로, 번숭을 어사대부로 삼았다. 권력 투쟁에서 밀려난 왕광이 적미군에 투항하자, 적미군은 장안에 입성하여 경시제를 살해했다.
4. 1. 민심 이반과 식량 부족
장안에 입성했을 때 적미군은 그 규모를 유지하기가 어려워 각지에서 식량을 구하며 이동해야 했다.[3] 이 과정에서 롱우로 행군하다가 대설을 만나 막대한 피해를 입고 동쪽으로 진로를 바꾸었다.[3]적미군의 약탈로 인해 장안 백성들은 경시 황제를 그리워하게 되었다.[3] 얼마 지나지 않아 식량 공급이 완전히 고갈되자, 적미군은 장안의 많은 궁궐과 건물들을 불태우고 약탈한 뒤 간쑤성 동부 지역으로 서쪽으로 이동했다.[3]
4. 2. 광무제와의 전투 및 투항
26년 가을, 적미군은 괴효의 영토를 공격했지만 격퇴당했다. 이때 갑작스러운 추위로 많은 군인들이 동사했다. 적미군은 동쪽으로 이동하여 장안으로 다시 들어가 등우와 일련의 전투를 벌였으나, 병력이 줄어들었음에도 등우의 군대를 격파했다. 이 전쟁들은 관중 지역에 심각한 기근을 초래하여, 주민들뿐만 아니라 적미군과 등우의 군대 모두에게 영향을 미쳤다. 식량이 부족해진 적미군은 결국 장안을 포기하고 동쪽으로 향했다.[3] 유수는 적미군을 계속 공격하는 등우와 풍이 휘하 부대를 구원하기 위해 신안(현재의 뤄양, 허난성)과 이양(현재의 뤄양)에 두 개의 부대를 배치하여 진격을 막았다.27년 봄, 적미군은 호현(현재의 싼먼샤, 허난성)에서 등우와 풍이 모두에게 큰 승리를 거두었다. 적미 장군은 패배를 가장하고 퇴각하는 전술을 사용, 식량 보급품으로 보이는 것을 버렸다. 배고픈 등우의 군대는 그 식량을 가져가려 했지만, 흙 아래에 콩 한 겹만 있었다. 적미군은 등우의 군대를 좁은 지역으로 제한한 후 공격하여 격파했다.
그러나 이 승리는 적미군의 마지막 승리였다. 약 한 달 후, 풍이에게 크게 패배했는데, 풍이는 군대의 눈썹을 붉게 칠하여 적미군에게 혼란을 주었다. 적미군의 잔당은 동쪽으로 물러나 이양으로 향했다. 유수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그들을 기다렸다. 적미군이 이양에 도착했을 때, 유수의 압도적인 군대를 보고 놀랐고, 항복 조건을 협상하기로 결정했다. 유수가 유분자 황제를 처형하지 않기로 동의한 후, 적미 황제와 장군들은 항복했다.
건무 3년(27년), 효저(현재의 허난성뤄양시뤄닝현)에서 광무제의 장군 풍이에게 패배하고, 의양에서 대기하던 광무제 본군에 번숭 등은 투항했다. 그 후, 번숭 등은 다시 거병을 꾀하다 발각되어 살해되었고, 적미군은 소멸했다. 다만, 서선·양음 두 사람은 귀향하여 평온한 여생을 보냈다.
5. 주요 인물
천봉 원년(14년), 낭야군 해곡현(현재의 산둥성르자오시둥강구)에서 양조업으로 재산을 모은 여모의 아들 여육은 현청에 근무했으나, 작은 죄로 상사인 현재(현령에서 개칭)에게 처형당했다.[5] 여모는 아들의 원수를 갚기 위해 재산을 털어 젊은이들에게 술과 옷을 제공하며 복수를 계획했다.
여모는 젊은이들을 모아 반란을 일으켜 현재를 살해했으나, 이후 사망했다. 그러나 가혹한 법과 무거운 세금에 불만을 품은 백성들은 해산하지 않고 번숭이 이끄는 반란군에 합류했다. 이들은 대부분 농민 출신으로 글을 읽지 못했기에 구두로 연락을 주고받았다. 조직의 최고 책임자는 삼로, 그 아래는 종사, 졸사 등으로 불렸는데, 이는 대부분 한나라 시대 향관의 명칭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었다.
5. 1. 적미군 수령 및 부장
천봉 5년(18년), 낭야군 출신인 번숭을 지도자로 하여 봉기하였다. 태산의 산악부를 거점으로 정부군에 대항하며 수년 후에는 수만 명의 군세를 거느리게 되었다. 구성원 대부분은 농민 출신이고, 대부분 문맹이어서 구두 전달이 조직 내 연락 수단이 되었다. 조직의 최고를 삼로, 다음을 종사, 졸사 등의 명칭을 사용했지만, 대부분은 한대의 향관 명칭을 원용했다.[5]건무 원년(25년), 적미군은 번숭과 서선이 관중으로 침공하여 한 종실의 유분자를 황제로 옹립, 글을 읽을 수 있던 서선을 승상으로, 번숭은 어사대부가 되었다.
5. 2. 유분자 정권의 중진
건무 원년(25년), 적미군은 번숭과 서선을 관중으로 보내 한나라 종실인 유분자를 황제로 옹립하였다. 글을 읽을 수 있던 서선은 승상이 되고, 번숭은 어사대부가 되었다.[5] 경시제 군 내부의 권력 투쟁 이후, 왕광이 적미군에 투항하자 적미군은 장안에 입성하여 투항한 경시제를 살해했다.6. 역사적 의의
적미군은 왕망의 신을 멸망시키고 후한 건국에 영향을 미친 농민 반란군 중 하나였다. 그러나 이들은 명확한 정치적 목표나 이념 없이 약탈과 전투를 반복하여 민심을 잃고 결국 몰락하였다.[5]
참조
[1]
서적
Women in Early Imperial China
https://books.google[...]
Rowman & Littlefield Publishers
2010-08-16
[2]
웹사이트
Chinese History - Han Dynasty 漢 (206 BC-8 AD, 25-220) emperors and rulers
http://www.chinaknow[...]
Chinaknowledge
2007-11-03
[3]
웹사이트
Chinese History - Han Dynasty 漢 (206 BC-8 AD, 25-220) event history
http://www.chinaknow[...]
Chinaknowledge
2007-11-03
[4]
웹사이트
Sinian Period
http://library.think[...]
Oracle ThinkQuest Education Foundation
2007-11-02
[5]
서적
後漢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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