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유분자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유분자는 전한 성양경왕의 후손으로, 신나라 말 적미군에 의해 옹립된 황제이다. 15세의 어린 나이에 황제가 되었으나, 실질적인 권한은 없었고 적미군의 꼭두각시였다. 25년에 즉위하여 건세라는 연호를 사용했으나, 적미군의 약탈과 혼란 속에서 27년 광무제에게 항복했다. 이후 광무제는 그를 가련히 여겨 관직을 주고, 실명 후에는 토지를 하사하여 생계를 유지하도록 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중국의 시각 장애인 - 천광청
    시각 장애인 인권 운동가이자 변호사인 천광청은 중국의 한 자녀 정책의 강제 낙태 및 불임 수술 실태 폭로 활동으로 중국 당국의 탄압을 받다가 미국으로 망명하여 현재 미국 시민으로 활동하고 있다.
  • 11년 출생 - 헤로데 아그리파 1세
    헤로데 아그리파 1세는 헤로데 대왕의 손자이자 로마 황제와 친분을 쌓았으나 방탕한 생활을 하기도 했던 헤로데 왕조의 유대 왕으로, 영주로 임명되어 넓은 영토를 다스렸지만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했다.
  • 한나라의 황제 - 유비
    유비는 후한 말 평민 출신으로 시작하여 관우, 장비와 의형제를 맺고 여러 세력을 거치며 활동하다 제갈량을 영입하여 촉한을 건국하고 초대 황제가 되었으나, 이릉 전투 패배 후 병사하였다.
  • 한나라의 황제 - 한 경시제
    한 경시제 유현은 왕망의 신나라에 저항하는 과정에서 녹림군의 지지를 받아 잠시 한나라를 재건했으나, 유약한 성격과 지도력 부재로 빠르게 몰락한 황제이다.
유분자
인물 정보
이름유분자
로마자 표기Yu Bunja
출생10년
사망27년 이후
아버지유맹
왕조한나라
재위 정보
재위 기간25년 6월 - 27년 윤정월
수도장안
연호건세 : 25년 - 27년

2. 생애

wikitext

성양강왕 유순의 증손이자 식절후 유헌의 손자로, 전한이 망하고 신나라에서 전한의 왕후들을 폐하면서 아버지 유맹도 작위를 잃어 일가가 그냥 식현 사람이 됐다. 그러다가 적미군이 일어나 식현을 지나가면서 두 형 유공·유무와 함께 사로잡혀 끌려다녔다. 맏형 유공은 상서를 익혀 적미군의 지도자 번숭과 함께 경시제에게 복속해 아버지의 작위인 식후를 회복했고 시중이 되어 장안에 남았으나, 유분자는 둘째형 유무와 함께 적미군중에 남아 소에게 꼴을 먹이는 목동이 됐다.

경시 3년(25년), 경시제와 대립한 적미군이 경시제 군을 각지에서 무찌르고 화음 땅에 이르렀는데, 군중에 있던 제나라 출신 무당이 성양경왕에게 복을 빌던 중 신이 내려와 미쳐서 천자를 세우라고 부르짖고는 병이 들었다. 경시제에게 형 방망을 잃은 방양은 번숭에게 경시제를 대신하는 새 천자를 세우도록 권했다. 무당의 말과 제장들의 의견이 일치해 적미군은 새 황제를 세우기로 하고 군중에서 성양경왕의 후손 70여 명을 찾았는데, 그 중에서 유무·유분자 형제, 그리고 전 서안후(西安侯) 유효(劉孝)가 가장 가까웠다. 나이 순으로 제비를 뽑으니 유분자가 제일 어렸는데, 황제로 뽑히고 모든 장수들이 그 앞에 엎드려 신하로 일컬었다. 당시 15세에 불과한 데다 옷도 해지고 맨발로 다니는 처지였는데, 무리가 자신에게 엎드린 것을 보고 두려워 황제가 되지 않으려 했다. 유공이 제비를 잘 간직하라고 하자, 제비를 물어 끊어 버렸다. 결국은 어쩔 수 없이 황제가 됐지만, 목동으로 계속 살았다. 이해 6월, 즉위하여 연호를 건세로 정했다.

적미군이 경시제의 장군 장앙 등과 내통해 장안성에 들어가니, 경시제는 항복하고 폐위됐다. 유분자는 장락궁에 살았지만, 제장들은 서로 공을 내세우며 떠들고 다투니 결론이 나지 않았다. 적미군은 백성들을 약탈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납일이 되자 번숭 등이 대회를 열어 정전에 와서 앉았는데, 연회 자리가 전혀 정돈되지 않아 대사농 양음(楊音)이 칼을 끼고 난장판이 된 자리를 놓고 꾸짖었으나, 술과 고기를 두고 칼부림을 벌이다가 서로 죽고 다치는 자들이 있었고, 위위 제갈치(諸葛穉)가 백여 명을 죽여 가까스로 진정시켰다. 유분자는 이런 혼란한 연회를 보고 공황에 빠져 하루종일 울기만 했다. 경시제가 패망한 후 액정(掖庭)의 궁녀 수 백천 명이 감금돼 굶어죽어가고 있었는데 감천궁(甘泉宮)의 악사들이 유분자를 보고 고두하고 기아에 빠졌다고 호소했고, 유분자가 쌀을 내어주어 이들은 굶어죽지 않게 됐다.

유공은 적미군이 장차 망할 것이라 보고 자신들에게 화가 연루되지 않기 위해 동생에게 와서 제위를 내놓을 절차를 알려주고, 26년 정월 초하루에 열린 대회에서 유분자를 폐할 것을 상주했다. 그러나 번숭 등이 완고하게 반대해 결국 그 자리를 떠났다. 이에 유분자는 스스로 인수를 풀고 고두하고 울고 탄식하면서 제위를 사양했다. 번숭 등 수백 명은 이를 두고 슬퍼하고 가련히 여겨 조아려 사죄하고 인수를 다시 채워 주니, 부득이하여 계속 제위에 있었다. 적미군은 그간의 경거망동을 삼가고 각자 영채를 닫고 지키니, 삼보가 조용해져 사람들이 천자를 총명하다 하고, 백성들은 앞다투어 장안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20여 일이 지나니 적미군은 다시 약탈을 시작했고, 성중에 양식이 떨어지고 보물도 이미 다 약탈해버렸기에 궁실들을 불태우고 서쪽으로 갔다. 유분자는 왕거를 타고 수백 기가 따랐다. 적미군은 경시장군 엄춘(嚴春)을 미(郿)에서 격파해 죽였다. 드디어 안정군북지군까지 진격했으나, 큰 눈이 내려 골짜기를 메워버리니 많이 얼어죽었다. 나머지는 돌아오는 길에 능을 약탈하고 여후의 시체를 욕보였다. 후한 광무제(光武帝) 유수의 대사도 등우가 장안에 와서 욱이현을 쳤으나 적미군에게 격파됐다. 9월, 적미군은 장안으로 들어왔다.

당시 한중군에서 독립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연잠이 산관을 나와 두릉현에 주둔하자(실은 유가에게 얼마 전 져서 두릉현에 물러나 있던 상태였음) 적미군의 장수 방안(逄安)이 10여 만 군을 거느리고 격파했다. 등우가 방안이 정병을 거느리고 나간 틈을 타 연약한 유분자를 노려 공격했으나 적미군의 장수 사록(謝祿)이 구원을 오니 장안성 내의 고가(槀街)에서 등우를 무찔렀다. 연잠이 이번에는 경시장군 이보(李寶)와 합해서 또 두릉을 쳤으나 또 방안에게 격파됐고 이보는 방안에게 항복했다. 그러나 이보가 연잠에게 은밀히 서신을 보내 내통해, 연잠이 방안을 도발하고 방안이 진채를 비운 사이 이보가 방안의 진채를 장악했다. 방안은 패주했고 십여 만 명이 죽었다. 삼보는 황폐해져서 사람을 잡아먹을 지경이라 더 양식을 구할 수 없었다. 12월, 아직 20여 만 명이 남아 있는 적미군은 동쪽으로 돌아갈 것을 결정했다.

그러나 서쪽의 두 길을 광무제의 수하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파간장군 후진(侯進) 등은 신안에 주둔하고, 건위대장군 경감 등은 의양에 주둔하면서 어느 한쪽으로 적미군이 나오면 그쪽으로 합류하기로 약속했다. 이듬해 정월, 등우가 하북에서 와서 또 적미를 호(湖)에서 쳤고 또 패주했다. 적미군이 마침내 관문을 나섰으나, 광무제의 정이대장군 풍이에게 효저에서 격파당했다. 이를 들은 광무제는 의양으로 와서 맞아 싸우게 했다. 대군을 홀연히 만난 적미군은 광무제에게 투항하기로 했고, 유분자는 승상 서선(徐宣) 이하 30여 명과 함께 웃옷을 벗어(육단) 항복하고 전국옥새와 경시제의 7척 보검과 옥벽을 건네주었다. 광무제는 유분자를 가련히 여겨 상을 후하게 주었고 숙부 조왕 유량의 낭중으로 삼았다. 나중에 병으로 실명하자 형양(滎陽)의 균수관의 땅을 주어 종신토록 그 세로 먹고 살게 했다.

2. 1. 가계 배경

유분자는 서한 시대 유장의 후손이자, 많은 적미군 출신이 나온 청양 경왕의 후손이었다. 그 지역 사람들은 오랫동안 경왕을 신으로 숭배했다. 유분자의 할아버지 유헌(劉憲)은 원제에 의해 시후(Shi侯)에 봉해졌고, 유분자의 아버지 유맹(劉萌)은 유헌 사후 후작위를 상속받았다. 왕망이 8년에 한나라 왕위를 찬탈하고 을 세웠을 때, 이 후작위는 폐지되었다.[2]

유분자는 세 형제 중 막내였다. 그의 형들은 유공(劉恭)과 유모(劉茂)였다. 신나라 말에 적미군이 봉기하면서 유씨 형제들은 어린 병사로 적미군에 강제로 징집되었다. 이후, 적미군 장수 번숭(樊崇)이 경시제가 왕망을 몰아낸 후 일시적으로 경시제의 권위에 복종했을 때, 유공은 번숭을 따라 수도 낙양으로 가서 아버지의 작위를 상속받아 시후에 봉해졌다. 그는 번숭이 후에 낙양에서 적미군의 거점인 푸양시(현 푸양시, 허난성)로 도망갈 때 따라가지 않고 경시제의 추종자로 남았다. 유모와 유분자는 적미군에 남아 소를 치는 사람이 되었다.

2. 2. 적미군에 옹립되다

성양강왕 유순의 증손이자 식절후 유헌의 손자로, 전한이 망하고 신나라에서 전한의 왕후들을 폐하면서 아버지 유맹도 작위를 잃어 일가가 그냥 식현 사람이 됐다. 그러다가 적미군이 일어나 식현을 지나가면서 두 형 유공·유무와 함께 사로잡혀 끌려다녔다. 맏형 유공은 상서를 익혀 적미군의 지도자 번숭과 함께 경시제에게 복속해 아버지의 작위인 식후를 회복했고 시중이 되어 장안에 남았으나, 유분자는 둘째형 유무와 함께 적미군중에 남아 소에게 꼴을 먹이는 목동이 됐다.

경시 3년(25년), 경시제와 대립한 적미군이 경시제 군을 각지에서 무찌르고 화음 땅에 이르렀는데, 군중에 있던 제나라 출신 무당이 성양경왕에게 복을 빌던 중 신이 내려와 미쳐서 천자를 세우라고 부르짖고는 병이 들었다. 경시제에게 형 방망을 잃은 방양은 번숭에게 경시제를 대신하는 새 천자를 세우도록 권했다. 무당의 말과 제장들의 의견이 일치해 적미군은 새 황제를 세우기로 하고 군중에서 성양경왕의 후손 70여 명을 찾았는데, 그 중에서 유무·유분자 형제, 그리고 전 서안후(西安侯) 유효(劉孝)가 가장 가까웠다. 나이 순으로 제비를 뽑으니 유분자가 제일 어렸는데, 황제로 뽑히고 모든 장수들이 그 앞에 엎드려 신하로 일컬었다. 당시 15세에 불과한 데다 옷도 해지고 맨발로 다니는 처지였는데, 무리가 자신에게 엎드린 것을 보고 두려워 황제가 되지 않으려 했다. 유공이 제비를 잘 간직하라고 하자, 제비를 물어 끊어 버렸다. 결국은 어쩔 수 없이 황제가 됐지만, 목동으로 계속 살았다. 이해 6월, 즉위하여 연호를 건세로 정했다.

2. 3. 허수아비 황제

신나라적미군이 식현을 지나가면서 유분자는 두 형 유공, 유무와 함께 사로잡혀 끌려다녔다. 맏형 유공은 상서를 익혀 적미군의 지도자 번숭과 함께 경시제에게 복속해 아버지의 작위를 회복하고 시중이 되었으나, 유분자는 둘째 형 유무와 함께 적미군에 남아 소에게 꼴을 먹이는 목동이 됐다.

25년, 경시제와 대립한 적미군이 경시제 군을 각지에서 무찌르고 화음 땅에 이르렀는데, 군중에 있던 제나라 출신 무당성양경왕에게 복을 빌던 중 신이 내려와 천자를 세우라고 부르짖었다. 경시제에게 형을 잃은 방망의 동생 방양은 번숭에게 경시제를 대신하는 새 천자를 세우도록 권했다. 무당의 말과 제장들의 의견이 일치해 적미군은 새 황제를 세우기로 하고 군중에서 성양경왕의 후손 70여 명을 찾았는데, 그 중에서 유무·유분자 형제, 그리고 전 서안후 유효(劉孝)가 가장 가까웠다. 나이 순으로 제비를 뽑으니 유분자가 제일 어렸는데, 황제로 뽑히고 모든 장수들이 그 앞에 엎드려 신하로 일컬었다. 당시 15세에 불과한 데다 옷도 해지고 맨발로 다니는 처지였는데, 무리가 자신에게 엎드린 것을 보고 두려워 황제가 되지 않으려 했다. 유공이 제비를 잘 간직하라고 하자, 제비를 물어 끊어 버렸다. 결국은 어쩔 수 없이 황제가 됐지만, 목동으로 계속 살았다. 이해 6월, 즉위하여 연호를 건세로 정했다.

적미군이 경시제의 장군 장앙 등과 내통해 장안성에 들어가니, 경시제는 항복하고 폐위됐다. 이에 장락궁에 살았지만, 제장들은 서로 공을 내세우며 떠들고 다투니 결론이 나지 않았다. 적미군은 백성들을 약탈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납일이 되자 번숭 등이 대회를 열어 정전에 와서 앉았는데, 연회 자리가 전혀 정돈되지 않아 대사농 양음(楊音)이 칼을 끼고 난장판이 된 자리를 놓고 꾸짖었으나, 술과 고기를 두고 칼부림을 벌이다가 서로 죽고 다치는 자들이 있었고, 위위 제갈치(諸葛穉)가 백여 명을 죽여 가까스로 진정시켰다. 이런 혼란한 연회를 보고 공황에 빠져 하루종일 울기만 했다.

유공은 적미군이 장차 망할 것이라 보고 자신들에게 화가 연루되지 않기 위해 동생에게 와서 제위를 내놓을 절차를 알려주고, 26년 정월 초하루에 열린 대회에서 유분자를 폐할 것을 상주했다. 그러나 번숭 등이 완고하게 반대해 결국 그 자리를 떠났다. 이에 스스로 인수를 풀고 고두하고 울고 탄식하면서 제위를 사양했다. 번숭 등 수백 명은 이를 두고 슬퍼하고 가련히 여겨 조아려 사죄하고 인수를 다시 채워 주니, 부득이하여 계속 제위에 있었다.

그러나 20여 일이 지나니 적미군은 다시 약탈을 시작했고, 성중에 양식이 떨어지고 보물도 이미 다 약탈해버렸기에 궁실들을 불태우고 서쪽으로 갔다. 27년, 적미군은 후한 광무제의 군대와 소모전을 벌이다 완전히 지쳐 항복했다.[2] 유분자는 승상 서선(徐宣) 이하 30여 명과 함께 웃옷을 벗어(육단) 항복하고 전국옥새와 경시제의 7척 보검과 옥벽을 건네주었다. 광무제는 유분자를 가련히 여겨 상을 후하게 주었고 숙부 조왕 유량의 낭중으로 삼았다. 나중에 병으로 실명하자 형양의 균수관의 땅을 주어 종신토록 그 세로 먹고 살게 했다.

2. 4. 퇴위와 항복

유분자는 성양강왕 유순의 증손이자 식절후 유헌의 손자였다. 신나라에서 전한의 왕후들을 폐하면서 아버지 유맹도 작위를 잃었고, 일가는 그냥 식현 사람이 되었다. 적미군이 식현을 지나갈때 유분자는 두 형 유공, 유무와 함께 사로잡혀 끌려다녔다. 맏형 유공은 상서를 익혀 적미군의 지도자 번숭과 함께 경시제에게 복속해 아버지의 작위인 식후를 회복했고 시중이 되어 장안에 남았으나, 유분자는 둘째형 유무와 함께 적미군중에 남아 소에게 꼴을 먹이는 목동이 되었다.

갱시 3년(25년), 적미군은 경시제 군을 각지에서 무찌르고 화음 땅에 이르렀다. 이때 군중에 있던 제나라 출신 무당이 성양경왕에게 복을 빌던 중 신이 내려와 천자를 세우라고 부르짖고는 병이 들었다. 경시제에게 형을 잃은 방양(方陽)은 번숭에게 경시제를 대신하는 새 천자를 세우도록 권했다. 무당의 말과 제장들의 의견이 일치해 적미군은 새 황제를 세우기로 하고 군중에서 성양경왕의 후손 70여 명을 찾았는데, 그 중에서 유무·유분자 형제, 그리고 전 서안후(西安侯) 유효(劉孝)가 가장 가까웠다. 나이 순으로 제비를 뽑으니 유분자가 제일 어렸는데, 황제로 뽑히고 모든 장수들이 그 앞에 엎드려 신하로 일컬었다. 당시 15세에 불과한 데다 옷도 해지고 맨발로 다니는 처지였는데, 무리가 자신에게 엎드린 것을 보고 두려워 황제가 되지 않으려 했다. 유공이 제비를 잘 간직하라고 하자, 제비를 물어 끊어 버렸다. 결국은 어쩔 수 없이 황제가 됐지만, 목동으로 계속 살았다. 이해 6월, 즉위하여 연호를 건세로 정했다.

적미군이 경시제의 장군 장앙(張卬) 등과 내통해 장안성에 들어가니, 경시제는 항복하고 폐위됐다. 유분자는 장락궁에 살았지만, 제장들은 서로 공을 내세우며 떠들고 다투니 결론이 나지 않았다. 적미군은 백성들을 약탈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납일이 되자 번숭 등이 대회를 열어 정전에 와서 앉았는데, 연회 자리가 전혀 정돈되지 않아 대사농 양음(楊音)이 칼을 끼고 난장판이 된 자리를 놓고 꾸짖었으나, 술과 고기를 두고 칼부림을 벌이다가 서로 죽고 다치는 자들이 있었고, 위위 제갈치(諸葛穉)가 백여 명을 죽여 가까스로 진정시켰다. 유분자는 이런 혼란한 연회를 보고 공황에 빠져 하루종일 울기만 했다. 경시제가 패망한 후 액정(掖庭)의 궁녀 수 백천 명이 감금돼 굶어죽어가고 있었는데 감천궁(甘泉宮)의 악사들이 유분자를 보고 고두하고 기아에 빠졌다고 호소했고, 유분자가 쌀을 내어주어 이들은 굶어죽지 않게 됐다.

유공은 적미군이 장차 망할 것이라 보고 자신들에게 화가 연루되지 않기 위해 동생에게 와서 제위를 내놓을 절차를 알려주고, 건무 2년(26년) 정월 초하루에 열린 대회에서 유분자를 폐할 것을 상주했다.[2] 그러나 번숭 등이 완고하게 반대해 결국 그 자리를 떠났다. 이에 유분자는 스스로 인수를 풀고 고두하고 울고 탄식하면서 제위를 사양했다. 번숭 등 수백 명은 이를 두고 슬퍼하고 가련히 여겨 조아려 사죄하고 인수를 다시 채워 주니, 부득이하여 계속 제위에 있었다. 적미군은 그간의 경거망동을 삼가고 각자 영채를 닫고 지키니, 삼보가 조용해져 사람들이 천자를 총명하다 하고, 백성들은 앞다투어 장안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20여 일이 지나니 적미군은 다시 약탈을 시작했고, 성중에 양식이 떨어지고 보물도 이미 다 약탈해버렸기에 궁실들을 불태우고 서쪽으로 갔다. 유분자는 왕거를 타고 수백 기가 따랐다. 적미군은 경시장군 엄춘(嚴春)을 미(郿)에서 격파해 죽였다. 드디어 안정군북지군까지 진격했으나, 큰 눈이 내려 골짜기를 메워버리니 많이 얼어죽었다. 나머지는 돌아오는 길에 능을 약탈하고 여후의 시체를 욕보였다. 후한 광무제(光武帝) 유수의 대사도 등우가 장안에 와서 욱이현을 쳤으나 적미군에게 격파됐다. 9월, 적미군은 장안으로 들어왔다.

당시 한중왕 유가를 무도군으로 내쫓고 무안왕(武安王)을 자칭해 한중군에서 독립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연잠이 산관을 나와 두릉현에 주둔하자(실은 유가에게 얼마 전 져서 두릉현에 물러나 있던 상태였음) 적미군의 장수 방안(逄安)이 10여 만 군을 거느리고 격파했다. 등우가 방안이 정병을 거느리고 나간 틈을 타 연약한 유분자를 노려 공격했으나 적미군의 장수 사록(謝祿)이 구원을 오니 장안성 내의 고가(槀街)에서 등우를 무찔렀다. 연잠이 이번에는 경시장군 이보(李寶)와 합해서 또 두릉을 쳤으나 또 방안에게 격파됐고 이보는 방안에게 항복했다. 그러나 이보가 연잠에게 은밀히 서신을 보내 내통해, 연잠이 방안을 도발하고 방안이 진채를 비운 사이 이보가 방안의 진채를 장악했다. 방안은 패주했고 십여 만 명이 죽었다. 삼보는 황폐해져서 사람을 잡아먹을 지경이라 더 양식을 구할 수 없었다. 12월, 아직 20여 만 명이 남아 있는 적미군은 동쪽으로 돌아갈 것을 결정했다.

그러나 서쪽의 두 길을 광무제의 수하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파간장군 후진(侯進) 등은 신안에 주둔하고, 건위대장군 경감 등은 의양에 주둔하면서 어느 한쪽으로 적미군이 나오면 그쪽으로 합류하기로 약속했다. 이듬해 정월, 등우가 하북에서 와서 또 적미를 호(湖)에서 쳤고 또 패주했다. 적미군이 마침내 관문을 나섰으나, 광무제의 정이대장군 풍이에게 효저에서 격파당했다. 이를 들은 광무제는 의양으로 와서 맞아 싸우게 했다. 대군을 홀연히 만난 적미군은 광무제에게 투항하기로 했고, 유분자는 승상 서선(徐宣) 이하 30여 명과 함께 웃옷을 벗어(육단) 항복하고 전국옥새와 경시제의 7척 보검과 옥벽을 건네주었다. 광무제는 유분자를 가련히 여겨 상을 후하게 주었고 숙부 조왕 유량의 낭중으로 삼았다. 나중에 병으로 실명하자 형양(滎陽)의 균수관의 땅을 주어 종신토록 그 세로 먹고 살게 했다.

2. 5. 항복 이후

유분자는 성양강왕 유순의 증손이자 식절후 유헌의 손자였다. 신나라에서 전한의 왕후들을 폐하면서 아버지 유맹도 작위를 잃고 일가가 식현 사람이 되었다. 적미군이 일어나 식현을 지나가면서 두 형 유공, 유무와 함께 사로잡혀 끌려다녔다. 맏형 유공은 상서를 익혀 적미군의 지도자 번숭과 함께 경시제에게 복속해 아버지의 작위인 식후를 회복했고 시중이 되어 장안에 남았으나, 유분자는 둘째형 유무와 함께 적미군중에 남아 소에게 꼴을 먹이는 목동이 되었다.

갱시 3년(25년), 적미군이 경시제 군을 각지에서 무찌르고 화음 땅에 이르렀는데, 군중에 있던 제나라 출신 무당이 성양경왕에게 복을 빌던 중 신이 내려와 미쳐서 천자를 세우라고 부르짖고는 병이 들었다. 경시제에게 형을 잃은 방양(方陽)은 번숭에게 경시제를 대신하는 새 천자를 세우도록 권했다. 무당의 말과 제장들의 의견이 일치해 적미군은 새 황제를 세우기로 하고 군중에서 성양경왕의 후손 70여 명을 찾았는데, 그 중에서 유무·유분자 형제, 그리고 전 서안후(西安侯) 유효(劉孝)가 가장 가까웠다. 나이 순으로 제비를 뽑으니 유분자가 제일 어렸는데, 황제로 뽑히고 모든 장수들이 그 앞에 엎드려 신하로 일컬었다. 당시 15세에 불과한 데다 옷도 해지고 맨발로 다니는 처지였는데, 무리가 자신에게 엎드린 것을 보고 두려워 황제가 되지 않으려 했다. 유공이 제비를 잘 간직하라고 하자, 제비를 물어 끊어 버렸다. 결국은 어쩔 수 없이 황제가 됐지만, 목동으로 계속 살았다. 이해 6월, 즉위하여 연호를 건세로 정했다.

적미군이 경시제의 장군 장앙(張卬) 등과 내통해 장안성에 들어가니, 경시제는 항복하고 폐위됐다. 적미군은 백성들을 약탈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납일이 되자 번숭 등이 대회를 열어 정전에 와서 앉았는데, 연회 자리가 전혀 정돈되지 않아 대사농 양음(楊音)이 칼을 끼고 난장판이 된 자리를 놓고 꾸짖었으나, 술과 고기를 두고 칼부림을 벌이다가 서로 죽고 다치는 자들이 있었고, 위위 제갈치(諸葛穉)가 백여 명을 죽여 가까스로 진정시켰다. 이런 혼란한 연회를 보고 공황에 빠져 하루종일 울기만 했다. 경시제가 패망한 후 액정(掖庭)의 궁녀 수 백천 명이 감금돼 굶어죽어가고 있었는데 감천궁(甘泉宮)의 악사들이 유분자를 보고 고두하고 기아에 빠졌다고 호소했고, 유분자가 쌀을 내어주어 이들은 굶어죽지 않게 됐다.

유공은 적미군이 장차 망할 것이라 보고 자신들에게 화가 연루되지 않기 위해 동생에게 와서 제위를 내놓을 절차를 알려주고, 건무 2년 정월 초하루에 열린 대회에서 유분자를 폐할 것을 상주했다. 그러나 번숭 등이 완고하게 반대해 결국 그 자리를 떠났다. 이에 스스로 인수를 풀고 고두하고 울고 탄식하면서 제위를 사양했다. 번숭 등 수백 명은 이를 두고 슬퍼하고 가련히 여겨 조아려 사죄하고 인수를 다시 채워 주니, 부득이하여 계속 제위에 있었다. 적미군은 그간의 경거망동을 삼가고 각자 영채를 닫고 지키니, 삼보가 조용해져 사람들이 천자를 총명하다 하고, 백성들은 앞다투어 장안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20여 일이 지나니 적미군은 다시 약탈을 시작했고, 성중에 양식이 떨어지고 보물도 이미 다 약탈해버렸기에 궁실들을 불태우고 서쪽으로 갔다. 유분자는 왕거를 타고 수백 기가 따랐다. 적미군은 경시장군 엄춘(嚴春)을 미(郿)에서 격파해 죽였다. 드디어 안정군북지군까지 진격했으나, 큰 눈이 내려 골짜기를 메워버리니 많이 얼어죽었다. 나머지는 돌아오는 길에 능을 약탈하고 여후의 시체를 욕보였다. 후한 광무제(光武帝) 유수의 대사도 등우가 장안에 와서 욱이현을 쳤으나 적미군에게 격파됐다. 9월, 적미군은 장안으로 들어왔다.

당시 한중군에서 독립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연잠이 산관을 나와 두릉현에 주둔하자 적미군의 장수 방안(逄安)이 10여 만 군을 거느리고 격파했다. 등우가 방안이 정병을 거느리고 나간 틈을 타 연약한 유분자를 노려 공격했으나 적미군의 장수 사록(謝祿)이 구원을 오니 장안성 내의 고가(槀街)에서 등우를 무찔렀다. 연잠이 이번에는 경시장군 이보(李寶)와 합해서 또 두릉을 쳤으나 또 방안에게 격파됐고 이보는 방안에게 항복했다. 그러나 이보가 연잠에게 은밀히 서신을 보내 내통해, 연잠이 방안을 도발하고 방안이 진채를 비운 사이 이보가 방안의 진채를 장악했다. 방안은 패주했고 십여 만 명이 죽었다. 삼보는 황폐해져서 사람을 잡아먹을 지경이라 더 양식을 구할 수 없었다. 12월, 아직 20여 만 명이 남아 있는 적미군은 동쪽으로 돌아갈 것을 결정했다.

그러나 서쪽의 두 길을 광무제의 수하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파간장군 후진(侯進) 등은 신안에 주둔하고, 건위대장군 경감 등은 의양에 주둔하면서 어느 한쪽으로 적미군이 나오면 그쪽으로 합류하기로 약속했다. 이듬해 정월, 등우가 하북에서 와서 또 적미를 호(湖)에서 쳤고 또 패주했다. 적미군이 마침내 관문을 나섰으나, 광무제의 정이대장군 풍이에게 효저에서 격파당했다. 이를 들은 광무제는 의양으로 와서 맞아 싸우게 했다. 대군을 홀연히 만난 적미군은 광무제에게 투항하기로 했고, 유분자는 승상 서선(徐宣) 이하 30여 명과 함께 웃옷을 벗어(육단) 항복하고 전국옥새와 경시제의 7척 보검과 옥벽을 건네주었다. 광무제는 유분자를 가련히 여겨 상을 후하게 주었고 숙부 조왕 유량의 낭중으로 삼았다. 나중에 병으로 실명하자 형양(滎陽)의 균수관의 땅을 주어 종신토록 그 세로 먹고 살게 했다.

3. 연호

유분자는 적미군이 옹립한 황제로, 25년부터 27년까지 재위했다. 연호는 젠시(建始)이다.

4. 평가

4. 1. 긍정적 평가

4. 2. 부정적 평가

4. 3. 한국적 관점

참조

[1] 웹사이트 Sinan Period http://library.think[...] Oracle ThinkQuest Education Foundation 2007-10-31
[2] 웹사이트 Chinese History - Han Dynasty http://www.chinaknow[...] Ulrich Theobald 2005-12-17
[3] 서적 後漢書』巻11、劉玄劉盆子列伝第1、劉盆子伝
[4] 문서 한서 왕자후표에 따르면 서안후 일가는 [[유우 (동평사왕)|동평사왕]]의 후손이며, [[유한 (서안후)|유한]]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봉해졌다. 유효는 찾을 수 없다.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