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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모로코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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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1차 모로코 위기는 1905년 독일 제국이 모로코에 대한 프랑스의 영향력 확대를 견제하면서 발생한 국제적 위기이다. 19세기 말 모로코는 유럽 열강의 제국주의적 팽창 대상이었으며, 프랑스는 영불 협상을 통해 모로코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고 있었다. 1905년 독일 황제 빌헬름 2세가 탕헤르를 방문하여 모로코의 독립을 지지하는 연설을 하면서 위기가 시작되었다. 독일은 프랑스에 국제 회의를 제안했지만, 프랑스는 이를 거부하며 긴장이 고조되었다. 결국 1906년 알헤시라스 회의가 개최되었지만, 독일은 외교적으로 고립되었고, 모로코에 대한 프랑스와 스페인의 실질적인 지배권을 인정하는 알헤시라스 의정서가 체결되었다. 이 사건은 삼국 동맹과 삼국 협상 간의 긴장을 심화시켰으며, 빌헬름 2세의 분노는 제2차 모로코 위기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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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모로코 위기 - [전쟁]에 관한 문서
개요
카이저 빌헬름이 탕헤르를 행진함.
카이저 빌헬름이 탕헤르를 행진함.
분쟁탕헤르 위기
일부제1차 세계 대전의 원인
날짜1905년 3월 31일 – 1906년 4월 7일
장소탕헤르, 모로코
결과알헤시라스 조약
교전 세력
교전국 1
지휘관
지휘관 1테오필 델카세
지휘관 2빌헬름 2세
배경
원인프랑스의 모로코 지배에 대한 독일의 반발
사건
주요 사건빌헬름 2세의 탕헤르 방문 (1905년 3월 31일)
알헤시라스 회의 (1906년)
결과
알헤시라스 조약프랑스의 모로코 우위 인정, 독일의 경제적 이익 보장
영향유럽 열강 간의 긴장 고조, 제1차 세계 대전의 간접적 원인

2. 배경

1890년 비스마르크가 퇴진하고 빌헬름 2세가 친정을 시작하면서, 독일식민지 획득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러나 이는 영국, 프랑스, 러시아에 비해 늦은 পদক্ষেপ이었고, 중동과 아프리카 진출 과정에서 이들과 잦은 충돌을 겪었다.

19세기 말 모로코는 유럽 열강들의 제국주의적 팽창 정책의 주요 대상이었다. 특히, 탕헤르지브롤터 해협을 사이에 두고 지중해 제해권을 좌우하는 전략적 요충지였다.[1]

2. 1. 유럽 열강의 각축

19세기 말 모로코는 영국, 프랑스, 스페인에게 제국주의적 팽창 정책의 좋은 표적이 되었다. 스페인은 1859년 이후 모로코 북부를 침략했고, 프랑스도 동쪽의 알제리에서 침공했다.[1] 탕헤르는 지브롤터 해협을 사이에 두고 지중해 지역의 제해권을 좌우하는 중요한 전략 거점이었고, 고대부터 격렬한 쟁탈전이 벌어졌으며, 근대에는 긴 아프리카 항로 운항에 필요한 중간 기항지로 번성했기 때문에 열강의 관심을 끌었다.[1]

1684년에 탕헤르는 모로코의 영토가 되었지만, 19세기에 이르러 유럽 열강의 항쟁이 다시 격화되었다.[1] 1880년 마드리드 조약으로 이 지역의 권익 균형이 이루어졌고, 동시에 모로코의 독립이 인정되었지만, 그 실상은 외압에 의한 탕헤르 개항과 각국의 치외 법권 승인에 불과했다.[1] 프랑스는 1901년 이탈리아와 동 지역에서의 프랑스 우선권을 확인하는 협정을 체결하는 등, 모로코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해 나갔다.[1]

파쇼다 사건에서 정점에 달했던 영국과 프랑스 간의 위기 상황은 1899년 세력 범위 조정으로 종식되었다.[1] 독일의 진출에 대항하여 1904년 성립된 영불 협상에서, 프랑스는 모로코에서의 우월권, 영국은 이집트에서의 우월권을 서로 확인했다.[1]

세우타멜리야 등 일부 지역은 스페인의 세력권에 속하게 되었고, 모로코 영토는 프랑스, 스페인 양국에 귀속되는 것이 거의 확실한 상황이 되었다.[1]

2. 2. 영불 협상과 프랑스의 모로코 영향력 강화

1880년 마드리드 조약으로 모로코의 독립이 인정되었지만, 프랑스는 1901년 이탈리아와 모로코에서 프랑스의 우선권을 확인하는 협정을 체결하는 등 모로코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해 나갔다.[3]

파쇼다 사건으로 정점에 달했던 영국과 프랑스 간의 위기는 1899년 세력 범위 조정으로 종식되었다. 1904년 양국은 독일의 진출에 대항하여 영불 협상을 성립, 프랑스는 모로코에서의 우월권, 영국은 이집트에서의 우월권을 서로 확인했다.[4]

2. 3. 독일의 뒤늦은 참전과 불리한 상황

1890년, 비스마르크가 퇴진하고 빌헬름 2세가 친정을 시작하면서, 독일은 식민지 획득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러나 이는 영국, 프랑스, 러시아에 비해 늦은 পদক্ষেপ이었고, 중동과 아프리카 진출 과정에서 이들과 잦은 충돌을 겪었다.

19세기 말, 모로코는 제국주의 열강들의 주요 표적이 되었다. 스페인1859년부터 모로코 북부를 침략했고, 프랑스는 동쪽의 알제리에서 침공해왔다. 특히 지브롤터 해협에 위치한 탕헤르지중해 제해권을 좌우하는 전략적 요충지였고, 아프리카 항로의 중간 기항지로 번성하여 열강들의 관심을 끌었다.[1]

1684년 탕헤르는 모로코 영토가 되었으나, 19세기 유럽 열강들의 각축전이 재개되었다. 1880년 마드리드 조약으로 모로코의 독립이 인정되었지만, 이는 탕헤르 개항과 각국의 치외 법권 승인이라는 외압의 결과였다. 1901년 프랑스는 이탈리아와 협정을 맺어 모로코에서의 우선권을 확인하는 등 영향력을 강화했다.[2]

파쇼다 사건 이후 1899년 영국과 프랑스는 세력권 조정을 통해 관계를 개선했다. 1904년 영불 협상에서 양국은 프랑스의 모로코, 영국의 이집트 지배를 상호 인정하며 독일에 대항했다.[3]

세우타멜리야 등 일부 지역은 스페인령으로 남았고, 모로코는 사실상 프랑스와 스페인에 귀속될 상황이었다. 독일은 뒤늦게 세계 정책을 추진하며 불리한 상황을 뒤집고자 했다.[4]

3. 탕헤르 방문 (1905년 3월 31일)

1905년 3월 31일, 독일 제국 황제 빌헬름 2세는 모로코탕헤르를 방문하여 모로코의 압델아지즈 술탄의 대표들과 회담을 가졌다.[2] 황제는 흰 말을 타고 도시를 순회했으며, 멘두비아 독일 공사관에서 술탄의 주권을 지지한다는 연설을 했다.[3] 이는 모로코에서 프랑스의 영향력에 대한 도발적인 도전이었다. 술탄은 이후 프랑스가 제안한 개혁안을 거부하고, 알헤시라스 회의에 주요 강대국들을 초청했다.

3. 1. 독일의 의도

프랑스는 모로코의 재정 위기를 틈타 차관을 제공하고, 그 대가로 모로코 관세 수입의 60%를 얻게 되었다. 또한 1905년 1월에는 프랑스 장교가 주도하는 국군 창설, 프랑스 자본에 의한 국립 은행 설치 등 내정 개혁을 요구했다. 독일은 이러한 프랑스의 움직임에 반응했다.[2]

1905년 봄, 독일 제국 황제 빌헬름 2세는 연례적인 봄 휴가를 지중해 크루즈로 즐기고 있었지만, 3월 31일 갑자기 탕헤르를 방문했다. 빌헬름 2세는 부두에서 환영을 받은 후 독일 영사관에서 모로코의 영토 보전과 문호 개방을 주장하는 연설을 하여, 동석했던 프랑스 대표 샤라사를 깜짝 놀라게 했다. 술탄 아브드 알아지즈가 병으로 면회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의 큰아버지와 회담하여 독립국으로서의 모로코의 지위를 지지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역설했다.[3]

빌헬름 2세 자신은 탕헤르 방문에 소극적이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이 방문으로 유럽은 소란스러워졌다.

3. 2. 빌헬름 2세의 속내

빌헬름 2세는 탕헤르 방문에 소극적이었으며, 전쟁을 원하지 않았다. 그는 브레멘에서 "정직하고 평화로운 이웃"으로 여겨지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4. 모로코 위기의 전개

모로코 술탄 압둘아지즈는 독일의 지지를 얻어 프랑스가 제시한 내정 개혁 요구를 단호히 거부했다. 독일 총리 베른하르트 폰 뷜로는 프랑스에 문제 해결을 위해 국제 회의를 개최할 것을 요구하여 독불 간에 긴장이 흘렀다.[4][5]

프랑스 여론은 강경하게 돌아섰다. 특히 외무 장관 테오필 델카세는 대독 강경책을 주장하며 물러서지 않았다. 그러나 영국의 군사 원조는 불투명했고, 러불 동맹을 맺고 있던 러시아 제국러일 전쟁으로 인해 프랑스를 지원하기 어려웠다.

위기는 6월 중순에 최고조에 달했다. 프랑스는 모든 군사 휴가를 취소했고(6월 15일), 독일은 술탄과 방어 동맹을 체결하겠다고 위협했다(6월 22일).[4][5]

4. 1. 프랑스의 강경 대응과 델카세의 사임

독일은 다자간 회담을 추진했고, 프랑스 외무장관 테오필 델카세는 회담이 불필요하다는 강경한 입장을 보였다. 독일 제국 재상 베른하르트 폰 뷜로프 백작은 전쟁을 위협했지만, 이는 허세였다.[4][5] 프랑스 총리 모리스 루비에는 전쟁을 원치 않았고, 델카세는 프랑스 정부의 지지를 잃고 사임했다. 7월 1일 프랑스는 회담 참석에 동의했다.

6월, 모리스 루비에 총리는 주전론자인 델카세를 해임하고 국제 회의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그러나 12월에 독일군이 부분 동원을 시작했고, 프랑스도 다음 해인 1906년 1월 국경에 기병 부대를 배치하는 등 전쟁 발발 직전의 상황으로 치달았다.

4. 2. 군사적 긴장 고조

독일은 12월에 예비군을 소집하며 부분 동원을 시작했고,[4] 프랑스도 1906년 1월, 국경에 기병 부대를 배치하는 등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었다.[5] 러일 전쟁 와중에도 러시아는 러불 동맹에 따라 프랑스를 지원했다.[5]

5. 알헤시라스 회의 (1906년 1월 16일 ~ 4월 7일)

1906년 1월, 스페인의 알헤시라스에서 독일의 요구로 국제 회의가 개최되었다. 그러나 독일은 다른 국가들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모로코의 현상 유지를 승인해야 했다. 테오필 델카세는 이 사건으로 외무 장관직에서 물러났으나, 프랑스 국민들은 "원칙을 지켰다"며 그를 환영했다.

5. 1. 독일의 외교적 고립

알헤시라스 회의는 1906년 1월 16일부터 4월 7일까지 분쟁 해결을 위해 소집되었다. 회의에 참석한 13개국 중, 독일 대표단은 유일한 지지국이 오스트리아-헝가리임을 알게 되었다. 독일의 타협 시도는 오스트리아-헝가리를 제외한 모든 국가로부터 거부되었다.[7] 프랑스는 영국, 러시아, 이탈리아, 스페인, 미국으로부터 확고한 지지를 받았다. 결국 독일은 1906년 3월 31일에 체면을 살리는 타협안에 동의해야 했다.

5. 2. 알헤시라스 의정서 (1906년 4월 7일)

1906년 4월 7일 체결된 알헤시라스 의정서는 모로코의 주권을 존중하고, 모든 국가에 대한 문호 개방과 기회 균등을 명시했다. 그러나 치안과 금융에 대한 통제권을 인정받은 프랑스와 스페인이 실질적인 지배권을 행사했다.[7]

6. 결과 및 영향

알헤시라스 회담은 제1차 모로코 위기를 일시적으로 해결했지만, 삼국 동맹과 삼국 협상 간의 긴장을 악화시켰다.[8] 이 위기는 영국-프랑스 협상이 강력하다는 것을 보여주었으며, 영국-러시아 협상과 영국-프랑스-스페인 카르타헤나 조약 체결의 계기가 되었다.

1906년 1월, 스페인의 알헤시라스에서 독일의 요구대로 국제 회의가 개최되었으나, 여러 국가의 지지를 얻는 데 실패한 독일은 모로코의 현상 유지를 승인할 수밖에 없었다. 1906년 4월 7일 성립된 알헤시라스 의정서에서는 모로코의 주권 존중, 열강 각국에 대한 문호 개방과 기회 평등이 정해졌지만, 실질적인 지배권은 치안과 금융 장악을 인정받은 프랑스와 스페인에 있었다.

델카세는 이 사건으로 외무 장관 자리를 잃었으나, "원칙을 지켰다"며 프랑스 국민들로부터 환영받았다.

6. 1. 제2차 모로코 위기로의 연결

알헤시라스 회담은 제1차 모로코 위기를 일시적으로 해결했지만, 결국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이어진 삼국 동맹과 삼국 협상 간의 긴장을 악화시켰을 뿐이다.[8]

제1차 모로코 위기는 영국이 위기 상황에서 프랑스를 옹호하면서 영국-프랑스 협상이 강력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 위기는 다음 해에 영국-러시아 협상과 영국-프랑스-스페인 카르타헤나 조약이 체결된 이유로 볼 수 있다. 빌헬름 2세는 굴욕을 당한 것에 분노했고 다시는 물러서지 않기로 결심했으며, 이는 제2차 모로코 위기에 독일이 개입하는 결과를 낳았다.

참조

[1] 학술지 General Act of the International Conference of Algeciras, signed April 7, 1906 https://www.jstor.or[...] 1907
[2] EB1911 Morocco
[3] 뉴스 The First Moroccan Crisis https://historylearn[...] 2015-03-31
[4] 서적 Twenty-Five Years, Vol. 1 https://archive.org/[...] Frederick A. Stokes 1925
[5] 서적 Dreadnought: Britain, Germany, and the coming of the Great War Cape 1992
[6] 서적 Ereignisse und Gestalten
[7] 서적 A Dictionary of World History https://books.google[...] Oxford University Press
[8] 서적 Britain, Russia, and the Road to the First World War https://books.google[...] Ashgate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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