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령 알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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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령 알제리는 1830년부터 1962년까지 프랑스가 알제리를 식민 통치한 시기를 의미한다. 1830년 프랑스의 알제리 침공으로 시작되어, 1848년 알제, 오랑, 콘스탄틴이 프랑스의 주로 편입되었다. 프랑스는 알제리의 경제적 수탈, 교육 및 문화 정책을 통해 알제리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알제리인들의 저항과 알제리 전쟁(1954-1962)을 겪으며 1962년 알제리가 독립하게 되었다. 프랑스령 알제리 시기 동안 프랑스에 의한 알제리인 학살이 자행되었으며, 독립 이후에도 알제리-프랑스 관계는 복잡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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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령 알제리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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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및 위치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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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공식 명칭 | 프랑스령 알제리 |
로마자 표기 | Algérie française |
아랍어 표기 | الجزائر المستعمرة |
일반 명칭 | 알제리 |
상태 | 1830–1848: 프랑스 식민지 1848–1962: 프랑스의 일부 (데파르트망) |
수도 | 알제 |
가장 큰 도시 | 수도 |
공식 언어 | 프랑스어 |
사용 언어 | 알제리 아랍어 하사니아 아랍어 베르베르어 |
종교 | 이슬람교 (다수), 로마 가톨릭교 |
통화 | 알제리 부주 (1830–1848) 알제리 프랑 (1848–1962) |
면적 | 2,381,741 km² (919,595 sq mi) |
역사 | |
건국 시기 | 1830년 |
멸망 시기 | 1962년 |
건국 사건 | 알제 항복 (1830년 7월 5일) |
멸망 사건 | 알제리 독립 (1962년 7월 5일) |
이전 국가 | 알제 섭정령 압델카데르 토후국 베니 아바스 왕국 켈 아하가르 |
이후 국가 | 알제리 |
정치 | |
정부 형태 | 프랑스령 알제리 |
대표 직책 | 총독 |
첫 번째 대표 | 루이-오귀스트-빅토르 부르몽 (1830년) |
마지막 대표 | 크리스티앙 푸셰 (1962년) |
입법부 | 알제리 의회(1948–1956) |
국가 | |
국가 (1830–1848) | 라 파리지엔 |
국가 (1848–1852) | 지롱드당의 노래 |
국가 (1852–1870) | 시리아로 떠나면서 |
국가 (1870–1962) | 라 마르세예즈 |
기타 | |
ISO 3166 코드 | 생략됨 |
2. 역사
프랑스는 샤를 10세 치하에서 국내 정치적 불안정을 해소하고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목적으로 1830년 알제리 침공을 단행했다. 쥘 드 폴리냐크 총리가 주도한 이 침공은 '파리채 사건' 등을 명분으로 삼았으며, 초기에는 해안 지역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같은 해 발발한 프랑스 7월 혁명으로 프랑스 부르봉 왕정이 붕괴되면서 점령지 관리에 혼란이 발생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도 유럽인들의 식민 활동은 시작되었고, 이는 1834년 북아프리카 프랑스령 총독부 설립 이후 본격화되었다. 이는 130년 이상 지속될 프랑스의 알제리 식민 지배의 시작이었다.
2. 1. 갈등의 시작
1516년 오스만 제국의 제독 오루치 레이스와 하이레딘 바르바로사 형제가 알제를 점령한 이후, 알제리 일대는 지중해에서 해적 활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에 1681년,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는 아브라함 뒤케인 제독에게 바르바리 해적 토벌과 기독교도 노예 해방을 명분으로 알제에 대한 공격을 지시했다.[11] 1682년부터 1683년 사이에 대규모 공격이 이루어졌고, 이후 1685년부터 1688년까지는 장 2세 데스트레 제독이 트리폴리와 알제 해안을 폭격했다. 결국 알제에서 파견한 사절이 베르사유궁을 방문하여 1690년에 조약이 체결되었고, 18세기 동안 양측 간에는 대체로 평화가 유지되었다.[12]
그러나 프랑스 제1공화국의 총재정부 시기(1795~1799)에 새로운 갈등의 씨앗이 뿌려졌다. 알제의 유대인 상인 바크리와 부스나크는 1796년 나폴레옹의 이탈리아 원정군에 상당한 양의 곡물을 공급했지만, 나폴레옹은 비용이 과다하다는 이유로 대금 지불을 거부했다. 이후 1820년, 루이 18세가 총재정부 시절의 부채 중 절반을 상환했으나, 당시 바크리에게 을 빌려준 알제의 태수는 프랑스 측에 나머지 부채 상환을 계속 요구했다.
당시 알제 태수는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으로 약한 상태였다. 알제리는 명목상 마흐무트 2세 치하 오스만 제국의 속령이었지만 상당한 자치권을 누리는 바르바리 연안 국가 중 하나였다. 이 지역은 유럽과 미국 선박을 상대로 한 바르바리 해적의 근거지였으며, 이로 인해 미국과 두 차례의 바르바리 전쟁(1801~1805, 1815)을 겪기도 했다. 또한 1816년 8월에는 에드워드 펠루 제독이 이끄는 영국-네덜란드 연합 함대가 알제를 포격하는 등 서구 열강의 군사적 압박이 거세졌다. 산업 혁명 이후 기술적으로 우세해진 서구 해군력 앞에 알제리 해군은 무력했고, 결국 알제 태수는 불리한 내용의 바르바리 조약을 체결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프랑스 샤를 10세의 총리였던 쥘 드 폴리냐크는 국내의 정치적 불만을 외부로 돌리기 위해 알제리 침공을 계획했다. 프랑스는 알제 태수와의 부채 문제 및 외교적 마찰(이른바 '부채 사건' 또는 '파리채 사건') 등을 명분으로 삼아 1830년 알제리 침공을 감행하게 된다.
2. 2. 프랑스의 알제리 점령 (1830-1847)
복고된 부르봉 왕조의 샤를 10세는 국내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고 국민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알제리 침공을 결정했다.[14][15][16][17] 프랑스 총리 쥘 드 폴리냐크는 이러한 국내 불만을 해소할 방안으로 북아프리카 원정을 추진했다. 1830년 프랑스군이 알제리 해안에 상륙하며 점령이 시작되었으나, 같은 해 프랑스 7월 혁명으로 샤를 10세가 퇴위하고 부르봉 왕정이 붕괴되면서 초기 점령 정책은 혼란을 겪었다. 이러한 상황은 1834년 7월 22일 북아프리카 프랑스령 총독부가 설립될 때까지 이어졌다.
1830년 프랑스의 알제리 진입 이후, 유럽 각지에서 온 이주민들의 무질서한 식민 활동이 시작되었다. 1839년에는 알제리 내 유럽계 주민이 2만 5천 명에 달했는데, 이 중 절반 미만이 프랑스인이었고 나머지는 스페인, 이탈리아, 독일 등지에서 온 사람들이었다.[104] 이들은 대부분 해안 도시에 정착했으며, 초기 이주민 사회는 남성 비율이 여성보다 5배나 높았다. 시골 지역으로 들어간 소수의 정착민은 프랑스 정부로부터 토지를 받은 군인들이거나 시토회 수도사들이었다.[104]
프랑스 식민 당국은 이민 과정을 통제하고자 했다. 1830년 11월부터 알제리 항구 입국 시 여권과 거주 허가증 제시를 요구했고[103], 1831년 5월에는 프랑스 내무부의 허가를 받아야 알제리 및 기타 프랑스령으로 입국할 수 있도록 규정을 강화했다.[103] 이로 인해 상인이나 농업 기업 설립 계획이 있는 부유층은 비교적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었으나, 빈민이나 특정 기술이 없는 노동자의 이주는 제한되었다.[103]
1840년대에 들어서 프랑스 정부는 자국의 인구 과잉 및 실업 문제 해결책으로 알제리 이주를 장려하며 특정 이민자 집단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지원 대상은 주로 파리 분지나 프랑스 동부 국경 출신의 도시 노동자들이었으며, 식민 당국이 기대했던 농업 노동력과는 거리가 있었다.[103] 정부 지원 이민 정책은 독신 남성에게 유리하게 운영되어, 무료 통행 혜택의 68%를 독신 남성이 받았고 여성 이민자는 전체의 14%에 불과했다. 이는 식민지에서의 고된 노동에 독신 남성이 더 적합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103] 이민자들에게는 무료 통행, 식량 배급, 토지 양허, 높은 임금 등 다양한 정부 지원이 약속되었다.[103] 1841년부터 1845년까지 약 2만 명이 프랑스 정부의 지원 이민 제안을 받았으나, 실제 이주 규모는 불분명하다.[103]
당시 알제리 총독 토마 로베르 부주는 군사적 통제 하에 체계적인 식민 활동을 추진하려 했으나, 그의 시도는 성공적이지 못했다. 1847년까지 프랑스는 주로 해안 지역을 중심으로 점령지를 확보하고 유럽인 이주를 통해 식민 기반을 다져나갔지만, 알제리 전역에 대한 완전한 지배나 일관된 식민화 정책은 아직 확립되지 않은 상태였다.
2. 2. 1. 파리채 사건 (1827)
1790년대 프랑스는 알제의 상인 바크리(Bacri)와 부슈낙(Boushnak) 두 사람으로부터 프랑스 군대에 필요한 밀을 구매하기로 계약했으나, 대금 지불이 지연되었다. 바크리와 부슈낙은 데이(dey, 알제의 통치자)에게 빚을 지고 있었고, 프랑스가 자신들에게 빚을 갚기 전에는 데이에게 빚을 갚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데이는 프랑스 영사인 피에르 드발(Pierre Deval)과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협상을 벌였으나 실패했고, 특히 1820년 프랑스 정부가 상인들에게 지불할 돈을 마련하지 않자 드발이 상인들과 공모하여 자신을 배신하고 있다고 의심했다. 드발의 조카 알렉상드르(Alexandre)는 본(Bône) 영사로서 본과 엘 칼라(El Kala, La Calle)에 있는 프랑스 창고를 이전 합의 조건에 어긋나게 요새화하여 데이의 분노를 더욱 자극했다.[18]1827년 4월 29일, 드발이 만족스러운 답변을 거부한 논쟁적인 회의 후, 데이는 드발을 파리채(fly whisk)로 때렸다. 샤를 10세는 자신의 외교 대표에 대한 이러한 무례를 이유로 먼저 데이에게 사과를 요구한 뒤, 알제 항구에 대한 봉쇄를 시작했다. 프랑스는 데이가 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프랑스에 사절을 파견할 것을 요구했다. 데이가 봉쇄 함선 중 한 척을 향해 포격으로 응답하자, 프랑스는 더 강력한 조치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19]
2. 2. 2. 알제리 침공 (1830)
복고된 부르봉 왕조의 샤를 10세는 프랑스 국민, 특히 파리에 거주하는 나폴레옹 전쟁 참전 용사들 사이에서 자신의 인기를 높이기 위한 시도로 알제리 침공을 시작했다.[14] 그는 알제리 데이와의 소규모 충돌을 통해 애국심을 고취하고, 미숙하게 처리된 국내 정책에 대한 국민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 했다.[15][16][17]1516년 오스만 제국의 제독 형제인 오루치 레이스와 하이레딘 바르바로사가 알제를 점령한 이후, 알제리는 지중해 분쟁과 바르바리 해적 활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1681년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는 아브라함 뒤케인 제독에게 바르바리 해적과 싸울 것을 명령했고, 기독교인 포로 구출을 명분으로 1682년에서 1683년 사이 알제에 대한 대규모 공격을 지시했다.[11] 이후 1685년부터 1688년까지 장 2세 데스트레가 트리폴리와 알제를 폭격했다. 알제의 사절단이 베르사유 궁정을 방문한 뒤 1690년에 조약이 체결되어 18세기 동안 평화가 유지되었다.[12]
프랑스 제1공화국의 디렉토리 정권(1795~1799) 시기, 알제의 유대인 상인 바크리와 부스나크는 나폴레옹의 1796년 이탈리아 원정군에게 대량의 곡물을 공급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비용이 과다하다며 지불을 거부했다. 1820년 루이 18세는 이 채무의 절반을 상환했지만, 바크리에게 돈을 빌려주었던 알제리의 데이는 프랑스에 나머지 금액 지불을 요구했다.
당시 알제의 데이는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으로 약화된 상태였다. 알제리는 튀니지와 함께 바르바리 제국의 일부로, 마흐무드 2세가 통치하던 오스만 제국에 속해 있었지만 상당한 자치권을 누리고 있었다. 바르바리 해안은 유럽과 미국 선박을 공격하는 베르베르 해적들의 근거지였으며, 이로 인해 신생 미국과의 갈등이 제1차 바르바리 전쟁(1801~1805)과 제2차 바르바리 전쟁(1815)으로 이어졌다. 1816년 8월에는 에드워드 펠로 제독이 이끄는 영국-네덜란드 연합 함대가 알제 포격이라는 응징 작전을 감행했다. 서구 열강의 군사 기술적 우위 앞에 알제리 해군은 무력했고, 데이는 결국 불리한 내용의 바르바리 조약에 서명할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 총리였던 쥘 드 폴리냐크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국내의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 북아프리카 원정을 추진했다. 1830년 1월 말, 프랑스는 부채 문제와 소위 '부채 사건'(扇의 일격 사건) 등을 빌미로 알제리를 침공하여 연안 지역의 지배권을 확보했다. 그러나 같은 해 7월 프랑스 7월 혁명이 일어나 샤를 10세가 퇴위하고 부르봉 왕정이 붕괴되었다. 새롭게 들어선 7월 왕정 정부는 구체제 왕정 복고의 골칫거리였던 알제리 점령지의 처리에 어려움을 겪었으며, 이러한 혼란은 1834년 7월 22일 북아프리카 프랑스령 총독부가 설립될 때까지 지속되었다.
2. 2. 3. 저항 운동
프랑스는 1830년 알제 상륙을 시작으로 알제리 점령을 시작했다. 점령이 식민화로 이어지면서 카빌리는 프랑스 정부의 지배를 받지 않는 유일한 지역으로 남았다. 이 지역에 대한 프랑스의 압력이 증가함에 따라 카빌리 지역 주민들의 저항 의지와 방어 의지 또한 강해졌다.
1849년경, 셰리프 부바글라로 알려진 무하마드 벤 아브달라가 카빌리에 도착했다. 그는 아마도 1847년 프랑스에 최종적으로 패배한 에미르 압델카데르 군대의 전직 부관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부바글라는 항복을 거부하고 카빌리로 후퇴하여 프랑스군과 그 동맹국들에 대한 게릴라전을 시작했다. 그는 끈질긴 전사이자 아랍어에 능통했으며, 매우 종교적인 인물로 알려져 있다.
부바글라는 종교 지도자들을 만나기 위해 수메르를 자주 방문했고, 그곳에서 랄라 파드마 앤수메르를 만났다. 파드마는 부바글라의 강한 개성에 매료되었고, 부바글라 역시 프랑스에 맞서 싸우려는 파드마의 의지에 감명받았다. 파드마는 연설을 통해 많은 남성들이 imseblenkab(순교할 각오가 된 자원병)으로 전투에 참여하도록 독려했으며, 자신도 다른 여성들과 함께 전투에 참여하여 부대에 음식, 의약품 등을 제공했다.
전통적인 자료에 따르면 파드마와 부바글라 사이에는 강한 유대감이 형성되었다. 파드마는 부바글라와의 관계를 동등한 관계로 보았으나, 당시 카빌리 관습상 남편과의 혼인 관계가 유효하여 부바글라와의 관계는 플라토닉하게 유지되었다.
파드마는 부바글라가 참여한 많은 전투에 직접 참여했으며, 특히 타셰키르트 전투(1854년 7월 18~19일)에서는 부바글라 부대가 승리하고 프랑스 장군 자크 루이 세자르 랑동을 잠시 사로잡기도 했다. 그러나 1854년 12월 26일, 부바글라는 동맹의 배신으로 추정되는 이유로 사망했다.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를 잃은 저항 세력은 1855년 초, 아즈루 네토르 봉우리에서 회의를 열고 랄라 파드마에게 전투 지휘권을 부여하기로 결정했다.
압드 알 카디르 시대 이후 가장 심각한 토착민 반란인 모크라니 반란이 1871년 카빌리아에서 발발하여 알제리 대부분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이 반란은 프랑스가 자치적인 부족 보호구역에 민정 권한을 확대하고 군정이 했던 약속을 파기한 것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지만, 더 깊은 원인이 있었다. 크림 전쟁(1854~1856) 이후 곡물 수요 증가로 알제리 밀 가격이 급등하자, 투기꾼들이 곡물을 사재기했고 무슬림 농민들은 비축량까지 팔아넘겼다. 이는 흉년에 대비하는 전통적인 자급 경제 시스템을 무너뜨렸다. 1866년부터 이어진 심각한 가뭄으로 무슬림 지역은 기근에 시달렸고 전염병까지 확산되었다. 1871년, 민정 당국은 종자 공급을 위한 대출 보증 약속마저 부인하며 친프랑스 무슬림 지도자들까지 소외시켰다. 이런 상황에서 프랑스 군대의 무슬림 스파히 부대가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참전을 위해 프랑스로 출병하라는 명령을 받자 반란이 일어났고, 카빌리아인들이 이에 합세했다.[111] 프랑스 군대의 상당수가 철수한 상황과 프랑스의 패전 소식은 프랑스의 위신을 떨어뜨리고 반란을 더욱 확산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1871년 봉기 이후 프랑스 당국은 전체 무슬림 인구를 처벌하고 통제하기 위해 가혹한 조치를 시행했다. 프랑스는 5000km2가 넘는 부족 토지를 몰수하고 카빌리아를 예외적 통치(régime d'exception) 하에 두어 프랑스 국민에게 보장된 적법 절차를 부인했다. 특별 토착민법(indigénat)은 프랑스 법으로는 처벌되지 않는 행위까지 범죄로 규정했으며, 총독은 재판 없이 최대 5년까지 용의자를 투옥할 수 있는 권한을 가졌다. 이러한 억압적인 조치는 프랑스 형법이 무슬림 통제에 너무 관대하다는 논리로 정당화되었다. 일부 저항 세력은 누벨칼레도니로 추방되기도 했다.
1881년에는 폴 플라테르 중령이 이끈 프랑스 군사 원정대가 투아레그족의 공격으로 궤멸되는 사건도 있었다. 프랑스는 투아레그족과 차암바 아랍인 사이의 오랜 적대감을 이용하여 주로 차암바 부족민으로 구성된 메하리스트 기병대(Compagnies Méharistes)를 창설했다. 이 낙타 기병대는 사막 지역의 치안 유지에 효과적인 수단이 되었다. 1902년, 가스통-에르네스트 코테네스트 중위는 호가르 산맥에 진입하여 티트 전투에서 아하가르 투아레그족을 패퇴시켰다.
2. 3. 프랑스 통치 (1848-1962)
1848년 프랑스 헌법은 알제리를 프랑스의 일부로 선언했지만, 이는 법적인 규정일 뿐 실제로는 1962년 독립까지 100년 넘게 차별적인 식민 통치가 이어졌다.[73] 프랑스인들조차 알제리를 프랑스의 일부로 여겼지만, 약 100만 명의 유럽계 이주민(피에 누아르)이 900만 명에 달하는 알제리 원주민('무슬림'으로 통칭됨)을 지배하는 구조는 극심한 불평등을 낳았고, 이는 훗날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 체제에 비유되기도 했다.[74] 프랑스 통치 기간 내내 알제리 사회는 프랑스 시민권을 가진 유럽인과 법적, 사회적으로 차별받는 알제리 원주민이라는 이중 구조로 나뉘어 있었다.프랑스 당국은 알제리 정복 초기부터 현지 관습법(이슬람법, 유대 율법)을 존중한다고 약속했지만[75][76], 실제 통치는 달랐다. 1834년 법령을 통해 알제리를 사실상 프랑스에 병합하면서[77] 알제리 주민들은 오스만 제국과의 법적 연결이 끊기고 '프랑스 신민'(sujets français|쉬제 프랑세fra)이 되었으나[78], 프랑스 시민권은 부여되지 않았다.[79] 이러한 모호하고 차별적인 법적 지위는 이후에도 계속 유지되었고, 특히 무슬림 알제리인들이 프랑스 시민권을 얻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시민권을 얻으려면 이슬람 관습에 따른 개인적 지위(statut personnel|스타튀 페르소넬fra)를 포기해야 했는데, 이는 사실상 배교를 강요하는 것과 같아 대부분의 무슬림에게 받아들여지기 힘들었다.[83][86]
프랑스 통치가 강화되면서 차별은 더욱 공식화되었다. 특히 토마 로베르 뷔조 총독(1841-48)은 유럽인 정착 지역과 원주민 지역을 분리하여 통치했고[80], '칸토네망'(cantonnement|캉톤망fra) 정책을 통해 원주민들의 토지를 빼앗아 유럽 정착민에게 넘겨주었다.[81] 이러한 토지 수탈은 이후에도 계속되어 알제리인들의 경제적 기반을 약화시켰다. 또한, 1881년 도입된 인디제나 법전( Code de l'indigénat|코드 드 랭디제나fra)은 알제리 원주민들에게만 적용되는 특별법으로, 프랑스 행정관이 적법한 절차 없이 벌금이나 처벌을 가할 수 있게 하여 통제를 더욱 강화했다.[89] 이러한 법적, 경제적 차별과 억압은 알제리인들의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프랑스는 제한적인 개혁을 시도했다. 1944년 인디제나 법전이 공식적으로 폐지되었고, 1946년 라민 게예 법(Loi Lamine Guèye)을 통해 모든 해외 영토 주민에게 프랑스 시민권을 부여했다. 1947년에는 알제리인에게 별도의 지위를 부여하는 법령(1947년 법령)이 제정되어 '무슬림 프랑스인'(Français musulmans|프랑세 뮈쥘망fra)과 '비무슬림 프랑스인'(Français non-musulmans|프랑세 농뮈쥘망fra)으로 구분했다.[100] 그러나 이러한 조치들은 여전히 차별적인 요소를 포함하고 있었고, 별도의 유권자 명부를 유지하는 등[99] 실질적인 평등을 보장하지 못했다. 이러한 불완전한 개혁은 유럽 정착민과 알제리 민족주의자 양측 모두에게 불만을 샀고[101], 결국 독립 전쟁의 배경이 되었다.
프랑스 통치 기간 동안 알제리의 인구는 변화를 겪었다. 1830년 약 300만 명으로 추산되었던 인구는[27], 전쟁, 질병, 기근 등으로 인해 1870년대까지 일시적으로 감소하기도 했다.[28][29] 이후 점차 증가하여 1962년 독립 직전에는 약 1,100만 명에 달했다.
2. 3. 1. 식민 통치 체제









1830년 프랑스가 오스만 제국의 지배하에 있던 알제리를 정복한 이후, 1세기 이상 사실상의 식민 통치를 유지했다. 비록 1848년 프랑스 헌법에서 알제리를 프랑스의 일부로 규정하고 많은 프랑스인들이 그렇게 인식했지만[73], 실제 통치는 차별적이었고 알제리는 프랑스 식민 통치의 대표적인 사례가 되었다. 약 100만 명의 유럽계 이주민(콜롱, colons|콜롱fra)이 900만 명에 달하는 '무슬림' 알제리인을 지배하는 구조는 이후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에 비유되기도 했다.[74] 이러한 개인 신분 제도는 알제리가 프랑스령이었던 1830년부터 1962년까지 여러 변화를 겪으며 지속되었다.
=== 법적 지위와 차별 ===
프랑스 통치 초기, 체계적인 식민 통치 시스템은 부재했고, 1685년의 흑인법( Code Noir|코드 누아르fra) 같은 기존 법규는 알제리 상황에 맞지 않았다. 프랑스는 1830년 7월 5일 알제리 섭정 후세인 데이와의 항복 문서에서 "모든 계층의 사람들과 그들의 종교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기로" 약속하며[75], 무슬림은 이슬람법(샤리아)을, 유대인은 모세의 율법을 따르도록 허용했다.[76]
그러나 1834년 7월 22일 법령(Ordonnance du 22 juillet 1834|오르도낭스 뒤 22 쥘리에 1834fra)은 북아프리카 프랑스 영토의 정부와 행정을 조직하며 사실상 알제리를 프랑스에 병합하는 조치로 간주된다.[77] 이로써 알제리 주민들은 법적으로 오스만 제국과의 연결이 끊기고 '프랑스 신민'(sujets français|쉬제 프랑세fra)이 되었지만[78], 프랑스 시민권은 부여받지 못했다.[79] 이러한 모호한 법적 지위는 1848년 프랑스 헌법에서도 확인되었다.[76][78] 1861년에는 알제리 출신 유대인 엘리 에노(Élie Énos)가 프랑스 시민이 아니라는 이유로 변호사 등록을 거부당하는 사건이 발생했으나, 법원은 항소심에서 프랑스 시민의 완전한 권리가 없어도 프랑스 국적을 가질 수 있다고 판결했다.[82]
나폴레옹 3세는 1860년대 이스마엘 우르뱅의 영향을 받아 동화 정책( assimilation|아시밀라시옹fra)을 장려하며 자유화 개혁을 시도했다. 1865년 7월 14일 법령(sénatus-consulte du 14 juillet 1865 sur l'état des personnes et la naturalisation en Algérie|세나투스-콩쉴트 뒤 14 쥘리에 1865 쉬르 레타 데 페르손 에 라 나튀랄리자시옹 앙 알제리fra)은 "모든 식민지 원주민은 프랑스 국민"이라고 명시하고 아랍, 유대, 베르베르계 알제리인이 프랑스 시민권을 신청할 수 있도록 허용했지만, 이는 "무슬림 종교와 문화를 포기하는" 경우에만 가능했다.[83] 이 조건은 무슬림의 개인적 지위(statut personnel|스타튀 페르소넬fra)[85]와 양립할 수 없다는 이유(결혼, 이혼 등에 대한 법률 충돌)로 포함되었으며[86], 이는 사실상 배교를 강요하는 것이었다. 때문에 이 법령은 동화를 촉진하기보다는 오히려 방해했고, 1913년까지 프랑스 시민권을 얻은 무슬림은 1,557명에 불과했다.[80] 아제딘 하두르는 이 법령이 "정치적 아파르트헤이트의 공식 구조를 확립했다"고 비판했다.[87]
프랑스 제3공화국 하에서, 1870년 10월 24일 법무장관 아돌프 크레미외는 크레미외 법령( Décret Crémieux|데크레 크레미외fra)으로 알려진 136호 법령을 통해 알제리 유대인 약 4만 명에게 프랑스 시민권을 부여했다.[96][110] 이는 유대인 공동체의 오랜 요구[96][97]와 제2제정 시기의 계획에 기반한 것이었지만[98], 무슬림에게는 적용되지 않았다. 이 조치는 유대인들을 무슬림과 분리시켰고, 무슬림의 눈에는 그들을 콜롱과 동일시하게 만들었다. 무슬림이 시민권을 신청하려면 여전히 21세 이상이어야 한다는 조건(137호 법령)이 붙었다. 이로써 대부분의 알제리 무슬림들은 프랑스 법의 적용을 받는 '프랑스 국민'으로 간주되었지만, 투표권 없는 사실상의 이등 시민으로 남게 되었다.[87] 이후 1889년에는 알제리에서 태어난 비프랑스계 유럽인의 자녀들에게도 시민권이 확대되었다.
=== 인디제나 법전과 통제 강화 ===
프랑스 통치가 확장되면서, 특히 토마 로베르 뷔조 총독(1841-48) 하에서 차별적 통치가 공식화되었다. 1844년, 뷔조는 해안의 유럽인 정착촌은 민정부, 내륙의 아랍/베르베르 지역은 군정부 하에 두었다.[80] 프랑스 지배의 중요한 특징은 '칸토네망'(cantonnement|캉톤망fra) 정책이었는데, 이는 추정상 사용되지 않는 부족 토지를 국가가 압수하여 프랑스 정착민에게 분배하고 원주민들을 변두리로 몰아내는 것이었다.[81] 이는 뷔조의 후임인 자크 루이 랑동 총독 하에서 더욱 확대되었다.[80]
1871년 모크라니 반란 이후, 프랑스 당국은 무슬림 인구를 통제하기 위해 더욱 엄격한 조치를 취했다. 프랑스는 5000km2가 넘는 부족 토지를 몰수하고 카빌리 지역을 예외적 통치(régime d'exception|레짐 덱셉시옹fra) 하에 두어 적법 절차를 부인했다. 특별법인 인디제나 법전( Code de l'indigénat|코드 드 랭디제나fra)이 1881년 7월 28일 공식적으로 도입되어 7년간 시행될 예정이었으나[89], 이후 여러 차례 임시 법률로 갱신되어 사실상 계속 유지되었다.[90] 이 법은 지방 관리들이 적법한 절차 없이 무슬림들에게 즉결 벌금을 부과하고 특별 세금을 징수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프랑스 법으로 처벌되지 않는 무례나 무단 집회 같은 행위도 범죄로 규정되었고, 카디(cadi)의 사법권은 크게 제한되었다. 1897년까지 벌금은 강제 노역으로 대체될 수 있었다.[91] 총독은 재판 없이 최대 5년 동안 용의자를 투옥할 권한을 가졌다. 이러한 예외 조치는 프랑스 형법이 무슬림 통제에 너무 관대하다는 논리로 정당화되었다. 일부 반란 가담자들은 누벨칼레도니로 추방되기도 했다.
1909년에는 알제리의 모든 직접세 중 70%를 빈곤에도 불구하고 무슬림이 부담했다.[80] 1890년대부터 도시 엘리트 계층을 중심으로 무슬림의 기회가 약간 개선되었지만, 이는 1911년 무슬림에 대한 군 복무 징집 도입에 대한 묵인을 얻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81]
=== 행정 체제 ===
1845년 왕실 조례는 알제리에 세 가지 유형의 행정을 규정했다.
- Communes de plein exercice|코뮌 드 플랭 제그제르시스fra (완전 행사 코뮌): 유럽인(콜롱)이 다수인 지역으로, 시장과 의회를 직접 선출하여 자치권을 행사했다.
- Communes mixtes|코뮌 믹스트fra (혼합 코뮌): 무슬림이 다수인 지역으로, 프랑스 행정관과 임명직 또는 선출직 관리(고위 족장 대표 포함)가 정부를 운영했다.
- Communes indigènes|코뮌 앵디젠fra (토착 코뮌): 충분히 평정되지 않은 외딴 지역으로, 군사 통치(régime du sabre|레짐 뒤 사브르fra, 검의 지배) 하에 남아 있었다.
1848년 프랑스 제2공화국 수립 후, 알제리는 식민지 지위를 벗어나 프랑스의 불가분의 일부로 선포되었고, 알제, 오랑, 콘스탄틴의 세 지역이 민정부 아래 주(데파르트망)로 조직되었다. 민정 지역의 프랑스 시민들은 자신의 의회와 시장을 선출했지만, 무슬림은 임명될 수 있었으나 의석의 3분의 1을 넘을 수 없었고 시장이나 부시장이 될 수 없었다. 정착민 지역 밖에서는 여전히 프랑스 군대가 행정을 담당했고, 지역 무슬림 행정은 군 사령관의 감독 하에 허용되었다.
식민 행정의 중요한 도구였던 아랍 사무국( bureaux arabes|뷔로 아랍fra)은 아랍어 전문가들이 토착민 정보를 수집하고 행정 업무를 수행했으며, 때로는 현지 주민과 콜롱 사이의 완충 역할을 했다. 그러나 콜롱들은 아랍 사무국이 식민지화를 방해한다고 비난하며 군정 폐지와 완전한 민정 통합을 요구했다. 군부는 민정 도입이 무슬림의 보복을 초래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프랑스 정부는 양측의 요구 사이에서 정책적 동요를 보였다.
1870년 프랑스 제3공화국 수립 후, 아돌프 크레미외 법무장관은 군정을 폐지하고 알제리를 프랑스에 완전히 동화시키라는 지시를 받았다. 1870년 10월 법령들은 알제리 주들이 프랑스 국민의회에 대표를 파견하고, 콜롱 통제 하의 지역 행정을 확립하도록 했다. 민간 총독은 내무부 소속이 되었다.
공식적으로 알제리는 식민지가 아닌, 해외 주(Département d'outre-mer|데파르트망 두트르메르fra)와 해외 영토(Territoire d'outre-mer|테리투아르 두트르메르fra)의 중간적 존재로 간주되었다. 1898년과 1900년의 법령은 여러 주의 집합체이지만 알제리 총독에게 속하며, 치안 유지는 식민지성이 아닌 본국처럼 내무부가 담당하도록 규정했다. 1934년 이후 세 명의 주지사는 총독 직속이었고, 사법, 교육 등 일부 부서는 본국 부처 직속이었다. 1833년 법률에 따라 프랑스 정부는 의회를 거치지 않고 알제리에 적용될 법령을 제정할 수 있었다.[131]
=== 유럽인 정착과 이주 ===
1830년 11월부터 프랑스 식민 당국은 여권과 거주 허가증을 요구하며 알제리 항구 입국을 제한하려 했다.[103] 1839년 알제리에는 유럽인 2만 5천 명이 거주했는데, 절반 미만이 프랑스인이었고 나머지는 스페인, 이탈리아, 독일 등 출신이었다. 대부분 해안 도시에 머물렀고, 남성이 여성보다 5배 많았다.[104]
1840년대 프랑스 정부는 파리 분지와 동부 국경 출신의 도시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알제리 이주를 지원했다. 독신 남성이 무료 통행의 68%를 차지했고, 여성은 14%에 불과했다. 정부는 무료 통행, 식량 배급, 토지 양허, 높은 임금 등을 약속하며 이주를 장려했다.[103] 이는 프랑스 내 인구 과잉과 실업 문제를 해결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1841년부터 1845년까지 약 2만 명이 정부 지원 이민을 제안받았다.[103] 1848년까지 알제리 거주 유럽인은 10만 9,400명으로 늘었으나, 프랑스인은 4만 2,274명에 불과했다.[103]
1871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패배 후 알자스-로렌이 독일에 넘어가자, 프랑스 정부는 약 5,000명의 알자스-로렌 난민을 알제리에 재정착시키기 위해 토지 확보 압력을 받았다. 1870년대에는 유럽인 소유 토지와 정착민 수가 두 배로 증가했고, 땅을 잃은 수만 명의 무슬림들이 도시나 농업 지역으로 이주해야 했다.
콜롱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려 했다. 1945년 이전까지 무슬림은 프랑스 국민의회에 대표가 없었고 지방 의회에서도 소수였다. 1915년에는 약 5만 명의 무슬림만이 시민 코뮌 선거 투표권을 가졌다. 콜롱이 장악한 알제리 지방 행정부와 국민의회의 콜롱 대표 27명(각 주에서 국회의원 6명, 상원의원 3명)은 미미한 개혁조차 저지하거나 지연시켰다. 일단 국민의회에 선출되면 콜롱 대표들은 상임직처럼 활동하며 불균형적인 영향력을 행사했고, 그들의 지지는 정부 유지에 중요했다.[68] 오귀스트 바르니에(Auguste Warnier) 같은 인물은 1870년대 토지를 정착민에게 쉽게 이전하고 국가가 원주민 토지를 몰수하여 분배하는 법률을 제정하거나 개정하는 데 성공했다. 조르주 클레망소나 장 조레스처럼 개혁을 지지하는 목소리는 드물었다.
=== 개혁 시도와 한계 ===
부분적인 개혁 시도는 주기적으로 있었으나 대부분 실패했다.
- 1881년, 폴 르루아-보리외는 원주민에게 투표권을 부여하기 위한 단체를 설립했다.[92][93]
- 1887년, 앙리 미슐랭 등은 개인적 지위를 유지하면서 귀화하는 방안을 제안했다.[92][94]
- 1890년, 알프레드 알베르 마르티노는 모든 무슬림의 점진적 귀화를 제안했다.[92][95]
- 1911년, 법학 교수들은 개인적 지위를 유지하며 귀화하는 것을 옹호했다.[92]
- 1912년, 알제리 젊은이들 운동은 개인적 지위 유지를 조건으로 귀화를 요구했다.[92]
제1차 세계 대전에 17만 명 이상의 알제리인이 참전한 후, 1919년 존나르 법(Loi Jonnart)은 특정 조건(프랑스군 복무, 프랑스어 능력, 공직 경험 등)을 충족하는 이들에게 시민권 취득을 용이하게 했다. 약 50만 명의 알제리인이 인디제나 지위에서 면제되었지만, 이 법전은 1944년 공식 폐지될 때까지 일부 지역에서 계속 적용되었다.[91]
1944년 3월 7일 법령으로 인디제나 법전이 폐지되고, 비시민권 무슬림을 위한 두 번째 선거인단이 만들어졌으며, 약 6만 명의 무슬림이 프랑스 시민이 되어 첫 번째 선거인단에서 투표권을 얻었다. 1945년 8월 17일 법령은 두 선거인단에 각각 15명의 국회의원과 7명의 상원의원을 배정했다. 1946년 5월 7일 라민 게예 법(Loi Lamine Guèye)은 알제리인을 포함한 모든 해외 국민에게 프랑스 시민권을 부여하여 21세 이상에게 투표권을 주었다. 프랑스 제4공화국의 1946년 헌법은 시민권과 개인적 지위의 분리를 명시했지만, 이를 시행할 구체적인 법률은 없었다.
무슬림 알제리인에게 시민권이 부여되었음에도, 차별 시스템은 '프랑스' 민법 신분과 '무슬림' 민법 신분을 구분하는 별도의 유권자 명부 등을 통해 비공식적으로 유지되었다.[99] 1947년 법령(1947년 법령)은 '토착민'에게 지역적 지위 시민권을 부여하여 "무슬림 프랑스인"(Français musulmans|프랑세 뮈쥘망fra)으로 규정하고, 다른 프랑스인들은 "비무슬림 프랑스인"(Français non-musulmans|프랑세 농뮈쥘망fra)으로 남겼다.[100] 이 시스템은 무슬림을 유럽 선거인단에 포함시킨다는 이유로 일부 유럽인들에게, 완전한 주권을 부여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일부 알제리 민족주의자들에게 거부되었다. 이러한 "내부 아파르트헤이트 시스템"[101]은 무슬림들의 큰 저항에 직면했고, 1954년 봉기의 주요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된다.
=== 후기 영토 확장 ===
1890년대 프랑스 행정부와 군부는 투아트, 구라라, 티디켈트 오아시스 지역의 합병을 추진했다.[112] 이 지역들은 명목상 모로코 영토였으나 중앙 정부의 통제를 받지 않는 Bled es-Siba|블레드 에스 시바ar (반항의 땅)의 일부였다.[113][114] 프랑스 제19군단은 이 지역에서 아이트 아타 연합 부족과 충돌했고, 1901년 이 지역들을 최종 합병했다.[115] 1930년대에는 사우라 계곡과 틴두프 지역이 모로코(당시 프랑스 보호령)에서 프랑스령 알제리로 편입되었다. 1938년 프랑스 대통령 법령은 내무장관 알베르 사로에게 알제리에 대한 군사 통제권을 부여하며 프랑스 정부의 통제를 더욱 강화했다.[116]
2. 3. 2. 경제 수탈

프랑스는 알제리를 점령한 후 경제적 이익을 위해 다양한 수탈 정책을 시행했다. 프랑스 당국은 먼저 오스만 제국 관리들이 수입원으로 삼았던 베일릭 토지를 장악했다. 이후 유럽인 정착지를 확대하기 위해 부족 공동체, 종교 재단, 마을 등이 소유하거나 사용하던 토지를 점차 몰수했다. 특히 후세인 이븐 파샤가 항복한 뒤에는 모스크가 보유한 와크프(기부 재산)를 빼앗았는데, 이는 빈민 구제, 교육, 공공사업 등에 사용되던 자금이었기에 알제리 사회에 큰 타격을 주었다.[140] 또한, 농업이나 목축에 사용되었으나 매매는 금지되었던 부족 공유 재산인 아르크 역시 강탈 대상이 되었다.[140] 프랑스는 심지어 저항하지 않은 농민들의 비옥한 토지마저 다양한 구실을 붙여 빼앗았다.[141]
1863년, 나폴레옹 3세는 부족 토지에 대한 국가의 소유권 주장을 포기하고 장기적으로 개인에게 사유지를 분배하여 부족 구조를 해체하려는 법령을 발표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프랑스 관리들이 조사 과정에서 상당수 부족 토지를 공유지로 만들었고, 일부 부족 지도자들은 공동 토지를 팔아넘겼다. 1870년대에 제정된 추가 법률은 개인 무슬림의 토지 매각을 용이하게 하여 토지 상실을 더욱 가속화했다. 프랑스에 의해 임명된 부족 관리들은 점차 프랑스에 종속되면서 부족민들의 신뢰를 잃고 béni-oui-oui|베니-우이-우이프랑스어(맹목적 추종자)라 불리며 조롱받았다.
1871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패배 후 알자스-로렌 지역 난민들을 알제리에 정착시킨다는 명분 아래 토지 확보 압력은 더욱 거세졌고, 1870년대에 유럽인 소유 토지와 정착민 수는 두 배로 증가했다. 이 과정에서 토지를 잃은 수많은 알제리인들은 일자리를 찾아 도시나 유럽인 농장으로 내몰렸다.

알제리로 이주한 유럽 정착민, 즉 콜롱(또는 pieds noirs|피에 누아르프랑스어)들은 대부분 이탈리아, 스페인 및 프랑스 남부 출신의 가난한 소작농이나 노동자 계층이었으며, 범죄자나 정치범도 포함되었다. 이들 콜롱, 특히 소수의 grands colons|그랑 콜롱프랑스어(대지주)들은 알제리의 부를 장악했다. 유럽인들은 제조업, 광업, 농업, 무역 등 경제 전반을 통제했으며, 특히 가장 비옥한 토지와 관개 시설을 포함한 경작 가능 토지의 상당 부분을 소유했다. 1900년경 유럽인들은 농업 생산 가치의 3분의 2 이상과 거의 모든 농업 수출품을 생산했으며, 1914년에는 유럽인 소유 부동산 가치의 절반 가까이가 포도원에 집중되었다. 이들의 경제 활동은 주로 포도주, 감귤류, 올리브, 채소 등을 프랑스 시장에 공급하는 수출 농업에 맞춰져 있었다. 1953년에는 전체 인구 900만 명 중 약 100만 명에 불과했던 유럽인들이 경작 가능 토지의 약 66%를 소유하고 알제리 경제의 기반이 된 포도주 130만 톤을 전량 생산했다.[70] 콜롱들은 알제리인을 "쥐"라고 부르는 등 열등하게 여기며 차별적인 태도를 보였다.[141]
반면, 알제리인들의 전통적인 경제 기반이었던 자급자족적 곡물 농업(올리브, 무화과, 대추, 축산 보완)은 상대적으로 척박한 토지에서 이루어졌고 점차 위축되었다. 1953년에는 농촌 무슬림 인구의 60%가 공식적으로 빈곤층으로 분류될 정도로 경제적 어려움이 심화되었다.[70]
프랑스는 자국의 공업 발전을 위해 알제리를 원료 생산 기지로만 활용하려 했다. 알제리에서 오랫동안 이어져 온 직물, 도자기, 가죽, 금속 가공 등 전통 수공업 기술은 프랑스산 공산품 유입과 프랑스 당국의 통제로 인해 설 자리를 잃었다. 프랑스의 경쟁 상대로 여겨지는 알제리 공장들은 강제로 폐쇄되거나 도산에 이르렀다.[142] 프랑스는 알제리인을 값싼 노동력으로 동원하여 자원을 착취했으며, 이러한 과정 속에서 알제리의 전통 공예와 문화는 심각하게 훼손되었다.[142]
조세 제도 역시 차별적이었다. 무슬림들은 프랑스 정복 이전부터 존재했던 세금에 더해 새로운 세금까지 부담해야 했지만, 콜롱들은 종종 이러한 세금에서 면제되었다. 1909년의 경우, 인구의 약 90%를 차지했지만 알제리 전체 소득의 20%만을 벌어들인 무슬림들이 직접세의 70%, 총 세금의 45%를 납부했다. 콜롱들은 이렇게 걷힌 세금이 어떻게 사용될지를 통제했고, 그 결과 콜롱들이 거주하는 지역은 잘 정비되었지만 알제리인 마을과 농촌 지역은 세금 혜택을 거의 받지 못했다.
재정적으로 알제리 식민지 운영은 프랑스 본국에도 부담이 되었다. 1950년대 초 알제리 총예산에는 프랑스 본국에서 지원된 상당한 규모의 직접 보조금이 포함되어 있었다.[71]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는 역사적 감정, 전략적 가치, 그리고 콜롱들의 정치적 영향력 등을 이유로 알제리에 대한 통치를 지속했다.[71]
2. 3. 3. 교육 및 문화 정책

프랑스 식민 정권의 교육 정책은 기존의 이슬람 종교 학교 중심 교육 시스템에 심각한 피해를 주었다. 이전까지 알제리 무슬림들은 종교 학교를 통해 읽고 쓰는 법을 배우고 종교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1843년, 프랑스 당국은 학교 등 종교 기관의 주요 수입원이었던 종교 재단 토지(하부스)를 몰수했다. 또한, 프랑스 관리들은 학교와 모스크를 제대로 유지하고 증가하는 인구에 맞춰 충분한 교사와 종교 지도자를 양성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제대로 지원하지 않았다.
교육 예산의 차별은 극심했다. 1892년 기준으로, 프랑스 정착민(콜롱) 자녀 교육에 투입된 비용은 무슬림 교육 예산의 5배가 넘었다. 이는 무슬림 학령기 아동 수가 유럽인 아동 수의 5배가 넘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벌어진 일이었다. 무슬림 교사 부족으로 인해 무슬림 학교조차 대부분 프랑스 교사들이 가르쳤으며, 국가가 운영하는 마드라사(학교)에서도 프랑스인 교수가 배치되는 경우가 많았다.
무슬림과 유럽 어린이를 함께 교육하려는 목적으로 시도된 이중 언어, 이중 문화 학교 설립은 양측 공동체 모두의 반발에 부딪혀 실패로 돌아갔고, 1870년 이후 점차 폐지되었다. 1870년 당시 알제리 전체 아동 중 학교 교육을 받는 비율은 5% 미만에 불과했다. 이러한 상황은 개선되지 않아 1954년에도 무슬림 남학생의 1/5, 여학생의 1/16만이 정규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무슬림 전체 인구의 문맹률은 도시 지역 2%, 농촌 지역은 그 절반 수준으로 추정되었다.[72]
1890년대부터 프랑스는 소위 '문명화 사명'을 내세우며 프랑스식 학교 시스템 안에서 소수의 무슬림과 유럽 학생들을 함께 교육하려는 정책을 추진했다. 교육 과정은 철저히 프랑스어로 진행되었고, 무슬림 학교에서조차 아랍어 학습은 의도적으로 배제되었다. 이러한 정책은 한 세대 만에 프랑스 교육을 받고 프랑스 문화에 동화된 무슬림 엘리트 계층, 이른바 évolués|에볼뤼에fra(진화된 사람들이라는 뜻)를 만들어냈다. 프랑스 시민권을 얻은 소수의 무슬림 대부분이 이들이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프랑스 문화와 정치 사상의 영향을 깊이 받은 이 특권층은 오히려 새로운 알제리 민족 정체성을 발전시키는 데 기여하게 된다.
2. 3. 4. 알제리 전쟁 (1954-1962)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많은 알제리인들이 프랑스 군인으로 참전했으나, 전쟁 후에도 차별은 계속되었다. 특히 1947년 설립된 알제리 의회에서는 약 685만 명의 알제리 무슬림과 115만 명의 비무슬림 알제리인이 각각 의석의 절반씩을 차지하도록 규정되어, 인구 수에 비해 무슬림의 투표권이 현저히 낮게 보장되었다. 이러한 불평등은 알제리인들의 불만을 키웠다.
결정적으로 1945년 5월 8일, 세티프 학살이 발생했다. 알제리인들이 프랑스 군을 상대로 민족적 요구를 내걸고 시위를 벌이는 과정에서 경찰과 충돌이 일어났고, 이후 알제리인들이 약 100명의 프랑스인을 살해하자 프랑스군은 대대적인 보복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최소 6,000명에서 최대 45,000명에 달하는 알제리인들이 학살당했다.[118] 이 사건은 알제리 민족주의 운동이 급진화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알제리 전쟁의 중요한 배경으로 작용했다.
1954년 민족해방전선(FLN)을 중심으로 독립 전쟁이 시작되자, 프랑스는 이를 진압하기 위해 대규모 군대를 파견했다. 1956년에는 약 51만 2천 명의 프랑스 군인이 알제리에 주둔했다. 그러나 전쟁은 장기화되었고, 프랑스 내에서도 전쟁에 대한 회의론과 반대 여론이 커져갔다. 알제리 무슬림들 사이에서는 독립 의지가 확고해졌지만, 프랑스 정치권은 식민지 유지를 고수하며 해결책을 찾지 못했다. 이러한 정치적 교착 상태는 결국 프랑스 제4공화국의 붕괴를 초래했다.
1958년 5월, 알제 주둔 프랑스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키자(1958년 5월 위기) 프랑스는 극심한 혼란에 빠졌고, 이를 수습하기 위해 샤를 드골이 다시 권력을 잡았다. 드골은 초기에는 "Vive l'Algérie française!|프랑스령 알제리 만세!프랑스어"[119]를 외치며 알제리가 프랑스의 일부로 남을 것이라는 입장을 보였고, 1958년 프랑스 헌법 국민투표를 통해 제5공화국을 수립했다.
그러나 전쟁이 계속되고 국제적인 압력이 거세지자 드골은 점차 입장을 바꾸었다. 1961년 1월 알제리 자결권에 관한 국민투표를 실시하여 알제리인들의 자결권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에 반발한 일부 프랑스 군 장성들이 1961년 4월 알제에서 군사 쿠데타를 시도했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결국 드골 정부는 민족해방전선과 협상을 시작했고, 1962년 3월 18일 에비앙 협정을 체결했다. 이 협정은 알제리의 자결권을 인정하고, 모든 알제리 시민의 보호, 차별 금지, 재산권을 보장하는 내용을 담았다.[102] 협정은 알제리 시민권, 일반 시민 신분의 알제리 시민 권리, 알제리에 거주하는 외국인 신분의 프랑스 국민 지위 등을 규정했다.[102] 또한 프랑스 국민에게는 3년 동안 알제리 시민권을 신청할 기회를 주었으며, 이 기간 동안 "그들은 그들의 문화적, 언어적, 종교적 특성에 적합한 보장을 받을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개인적 신분을 유지하며, 이는 동일한 신분의 판사들로 구성된 알제리 법원에 의해 존중되고 집행될 것입니다. 그들은 의회 내에서 그리고 구성된 당국과의 관계에서 프랑스어를 사용할 것입니다."[102]라고 명시했다. 특히 유럽계 프랑스인(피에드누아르)과 알제리 토착 유대인에게는 프랑스 시민권과 함께 종교의 자유, 재산권을 보장하고, 3년 후 프랑스 국적과 알제리 국적 중 하나를 선택할 권리를 부여했다.[102] 또한 알제리인들은 노동을 위해 프랑스와 알제리 사이를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게 되었다. 에비앙 협정은 1962년 프랑스 에비앙 협정 국민투표를 통해 프랑스에서 승인되었다.
하지만 프랑스의 극우 민족주의 세력, 특히 OAS(Organisation Armée Secrète)는 에비앙 협정에 격렬하게 반대하며 테러 활동을 벌였다. 전쟁 기간 동안 프랑스 군은 알제리 민간인들을 상대로 고문과 학살을 자행했으며, 특히 여성에 대한 성폭력도 빈번하게 발생했다.[149] 많은 알제리인들이 독립을 위해 싸우다 희생되었다.[149]
3. 행정 구역
북부 알제리는 1848년 12월 9일 프랑스에 의해 공식적으로 준해외주(département|데파르트망프랑스어)가 되었다. 초기에는 알제주(알제), 오랑주(오랑), 콘스탄틴주(콘스탄틴) 3개 주로 구성되었으며, 이들은 프랑스 본토, 즉 프랑스 내지로 취급되었다.
1902년에는 사하라 사막 지역이 통합되었고, 이 지역은 "남부 영토"로 불리며 준주(準州)로 취급되었다. 1905년에는 남부 영토 내에 4개의 데파르트망이 추가로 설치되었다. 1957년 이전의 행정 구역은 다음과 같다.
번호 | 지역명 | 주청 소재지 | 존재 기간 |
---|---|---|---|
91 | 알제주 (département d'Alger프랑스어) | 알제 (Alger프랑스어) | 1848년 - 1957년 |
92 | 오랑주 (département d'Oran프랑스어) | 오랑 (Oran프랑스어) | 1848년 - 1957년 |
93 | 콘스탄틴주 (département de Constantine프랑스어) | 콘스탄틴 (Constantine프랑스어) | 1848년 - 1957년 |
94 | 앵세프라주 (département d'Ain Sefra프랑스어) | 앵세프라 (Ain Sefra프랑스어) | 1905년 - 1957년 |
95 | 오아시스주 (département des Oasis프랑스어) | 와르글라 (Ouargla프랑스어) | 1905년 - 1957년 |
96 | 가르다이아주 (département de Ghardaïa프랑스어) | 라그와트 (Laghouat프랑스어) | 1905년 - 1957년 |
97 | 투구르주 (département de Touggourt프랑스어) | 비스크라 (Biskra프랑스어) | 1905년 - 1957년 |
알제리 전쟁 중 치안 유지와 현지 주민에 대한 행정 강화를 위해 1957년에 대대적인 행정 구역 개편이 이루어졌다.
번호 | 지역명 | 현청 소재지 | 존재 기간 |
---|---|---|---|
8A | 오아시스주 | 와르글라 | 1957년 - 1962년 |
8B | 사우라주 | 콜롬베샤르 | 1957년 - 1962년 |
9A | 알제주 | 알제 | 1957년 - 1962년 |
9B | 바트나주 | 바트나 | 1957년 - 1962년 |
9C | 보네주 | 보네 | 1957년 - 1962년 |
9D | 콩스탕틴주 | 콩스탕틴 | 1957년 - 1962년 |
9E | 메데아주 | 메데아 | 1957년 - 1962년 |
9F | 모스타가넴주 | 모스타가넴 | 1957년 - 1962년 |
9G | 오랑주 | 오랑 | 1957년 - 1962년 |
9H | 오를레앙빌주 | 오를레앙빌 | 1957년 - 1962년 |
9J | 세티프주 | 세티프 | 1957년 - 1962년 |
9K | 티아레트주 | 티아레트 | 1957년 - 1962년 |
9L | 티지우주주 | 티지우주 | 1957년 - 1962년 |
9M | 틀렘센주 | 틀렘센 | 1957년 - 1962년 |
9N | 우마르주 | 우마르 | 1958년 - 1959년 |
9P | 부지주 | 부지 | 1958년 - 1959년 |
9R | 시디벨아베스주 | 시디벨아베스 | 1955년 - 1957년[1] |
4. 인구 구성
프랑스령 알제리의 인구는 시기별로 큰 변화를 겪었다. 1830년 프랑스 침공 당시 원주민 인구는 약 300만 명으로 추산된다.[31][134] 그러나 프랑스 지배 이후, 특히 1866년부터 1872년 사이에는 인구가 지속적으로 감소했다.[135] 프랑스 당국은 이러한 인구 감소의 원인을 1866년과 1868년의 메뚜기떼 창궐, 1867년부터 1868년까지 이어진 혹독한 겨울과 기근, 그리고 콜레라와 같은 질병의 유행 탓으로 돌렸다.[136]
당시 알제리 원주민들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 살았다. 많은 이들이 개집 같은 판잣집에서 누더기를 걸치고 생활했으며, 식량 부족으로 결핵이나 콜레라 등 전염병에 시달렸다. 어린이의 절반 가량이 5세 이전에 사망할 정도로 생활 환경은 비참했다.[138]
프랑스 지배 초기에는 아랍인과 베르베르인이 대대로 살아온 땅에서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도시 지역에는 유대인 인구도 상당수 거주했다. 1870년 프랑스 제3공화국이 수립된 후, 법무부 장관 아돌프 크레미외(Adolphe Crémieux)는 알제리 유대인 약 4만 명에게 완전한 프랑스 시민권을 부여하는 크레미외 법령을 발표했다.[110] 이 조치는 유대인을 무슬림과 법적으로 분리시켰고, 이후 무슬림들은 유대인을 유럽 정착민(콜롱, colon|콜롱fra)과 동일시하게 되었다. 이 법령은 무슬림과 유대인을 크게 구별하지 않았던 유럽 정착민들의 반대 속에서 시행되었다. 1889년에는 알제리에서 태어난 비프랑스계 유럽인의 자녀들에게도 거부하지 않는 한 자동으로 프랑스 시민권이 부여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해안 지역, 평야, 도시는 점차 유럽화되어 다양한 민족이 섞여 살게 되었다. 피에 누아르(Pied-noir)로 불리는 유럽 정착민(콜롱)은 초기에는 프랑스인이 다수였으나, 점차 이탈리아, 스페인, 몰타 등지에서도 이주민이 유입되었다. 특히 1871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이후 프로이센 왕국에 합병된 알자스-로렌 지역 출신 프랑스인들이 대거 유입되면서, 1917년경에는 피에 누아르 중 프랑스 본토 출신 비율이 약 20%까지 낮아지기도 했다. 프랑스 정부는 알자스-로렌 난민 약 5,000명을 알제리에 정착시키기 위해 새로운 토지를 마련해야 한다는 압력을 받았고, 이는 원주민 토지 수탈을 더욱 가속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1870년대에는 유럽인 소유 토지와 정착민 수가 두 배로 증가했으며, 땅을 빼앗긴 수만 명의 무슬림 원주민들은 일자리를 찾아 도시나 유럽인 농장 지대로 흘러 들어갔다.
반면, 오레스 산맥이나 카빌리 산지 같은 산악 지역은 베르베르인 등 원주민들이 주로 거주하며 전통적인 생활 방식을 유지했고, 근대화 과정에서 소외되었다. 1877년 통계에 따르면, 알제리 인구는 무슬림 원주민이 대다수를 차지했으며, 프랑스 시민(알제리 태생, 프랑스 태생, 귀화 외국인, 귀화 유대인 포함)과 기타 외국인이 소수를 구성했다. 1875년 통계는 민간 지역과 군사 지역 모두에서 무슬림 원주민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았음을 보여준다.
무슬림 원주민들은 정치적으로 철저히 소외되었다. 1945년 이전까지 프랑스 국민의회에 대표를 보내지 못했으며, 지방 의회에서도 극소수만 참여할 수 있었다. 프랑스 당국이 부과한 여러 제약으로 인해 1915년에는 약 5만 명의 무슬림만이 선거권을 가질 수 있었다. 원주민의 권리를 일부라도 신장하려는 개혁 시도는 번번이 알제리 내 유럽 정착민(콜롱)들이 장악한 지방 행정부와 프랑스 국민의회 내 콜롱 대표단(27명)에 의해 저지되거나 지연되었다.
국민의회에 진출한 콜롱 대표들은 점차 기득권을 형성하며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고, 이들의 지지는 프랑스 정부의 유지에도 중요하게 작용했다.[68] 콜롱 대표단의 지도자였던 오귀스트 바르니에(Auguste Warnier, 1810~1875)는 1870년대에 원주민 토지를 정착민에게 쉽게 넘기고, 국가가 원주민 토지를 몰수하여 정착민에게 분배하는 것을 합법화하는 법안들을 통과시키는 데 성공했다. 조르주 클레망소나 장 조레스와 같이 원주민 권익 보호와 개혁을 지지하는 정치인들은 국민의회 내에서 소수에 불과했다.
한편, 나폴레옹 3세는 1860년대 알제리를 방문한 후, 콜롱들의 이기심에 분노하고 알제리 부족 지도자들의 모습에 감명받아 유럽인 식민 확장을 중단시키고 알제리를 프랑스와 연계된 '아랍 왕국'(royaume arabe|루아욤 아랍fra)으로 만들려는 구상을 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을 '아랍의 왕'(roi des Arabes|루아 데 자랍fra)으로 칭하며 전통적인 부족 지도자들을 통해 무슬림과 직접 소통하는 정책을 시도했으나,[139] 이 계획은 그가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서 패배하고 프랑스 제2제정이 무너지면서 프랑스 제3공화국에 의해 폐기되었다.[69]
5. 프랑스의 알제리인 학살
벤 키어넌(Ben Kiernan)에 따르면, 프랑스의 알제리 식민화 과정은 집단 학살과 동시에 진행되었다. 프랑스 정복 초기 30년(1830~1860) 동안, 약 300만 명의 알제리인 중 50만 명에서 100만 명이 전쟁, 학살, 질병 및 기근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33][34] 특히 1950년대 알제리 전쟁 중 프랑스군은 비무장 민간인에 대한 고의적인 폭격과 살해, 강간, 고문, "죽음의 비행" 또는 생매장을 통한 처형, 절도 및 약탈 등 잔혹 행위를 저질렀다.[35][36][37] 또한 최대 200만 명에 달하는 알제리 민간인이 강제 수용소에 갇혔다.[38]
알제리 평정(1835-1903) 기간 동안 프랑스군은 알제리 주민들을 상대로 초토화 작전을 전개했다. 당시 루시앵 드 몽타냐크(Lucien de Montagnac) 대령은 평정의 목표를 "개처럼 우리 발밑을 기어 다니지 않는 모든 것을 파괴하는 것"이라고 공언했다.[39] 토마 로베르 부주(Thomas Robert Bugeaud) 총독이 주도한 초토화 작전은 알제리의 사회경제적 기반과 식량 공급 체계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다. 부주는 "우리는 총을 조금 쏘고, 모든 두아르(douar, 베르베르족의 마을), 모든 마을, 모든 오두막을 불태운다. 적은 가축을 데리고 도망친다"고 작전 방식을 설명했다.[39] 역사가 올리비에 르 쿠르 그랑드메종(Olivier Le Cour Grandmaison)은 알제리 식민화 과정에서 학살, 강제 이주, 기근, 전염병 등 복합적인 원인으로 인해 알제리 인구의 3분의 1이 사라졌다고 분석했다.[40] 알제리를 직접 방문했던 토크빌(Tocqueville)조차 "우리는 아랍인들보다 훨씬 더 야만적인 전쟁을 한다 [...] 문명은 그들의 입장에 있다"고 기록하며 프랑스군의 잔혹성을 비판했다.[41]
프랑스군은 알제리 부족 전체를 강제로 이주시키거나 추방하는 정책을 시행했다. 틀렘센(Tlemcen)의 무어인 가족들은 동쪽으로 쫓겨났고, 다른 부족들도 고향을 떠나야 했다. 저항이 심한 부족들은 해체되었으며, 일부는 튀니지, 모로코, 시리아 등으로 피신하거나 뉴칼레도니아 또는 기아나로 강제 이주되었다. 프랑스군은 특정 부족 전체를 대상으로 한 학살도 자행했다. 엘 우피아 부족은 남녀노소 500명이 하룻밤 사이에 몰살당했고,[42] 우레드 리아(Ouled Rhia) 부족 500~700명은 동굴에 갇혀 질식사했다.[42] 라구아트 포위전은 알제리인들에게 도시 인구가 사라진 해라는 의미의 "칼리야(Khalya)", 즉 '빈 공허함의 해'로 기억된다.[43][44] 또한, 포로로 잡힌 남성과 소년들을 산 채로 삼베 자루에 넣어 구덩이에 던져 죽인 방식 때문에 '삼베 자루의 해'로도 알려져 있다.[45][46]
1945년 5월 8일,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나치 독일의 항복을 기념하는 행진이 세티프에서 열렸다. 약 5,000명의 무슬림 알제리인이 참여한 이 행진에서 프랑스 헌병이 식민 통치를 비판하는 현수막을 압수하려 하자 충돌이 발생했다.[47] 이후 5월 8일부터 6월 26일까지 프랑스 식민군과 경찰은 반란 진압을 명목으로 무슬림 민간인에 대한 대대적인 보복 학살을 자행했는데, 이것이 바로 세티프와 겔마 학살이다.[48] 이 학살로 인해 6,000명에서 최대 80,000명에 달하는 알제리 무슬림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프랑스군은 무슬림 마을에 대한 즉결처형을 감행했고, 접근이 어려운 마을은 항공기로 폭격했다. 해안에 정박 중이던 순양함 뒤게-트루앵은 케라타 지역에 포격을 가했다.[49] 프랑스인 자경단은 교도소에서 무슬림 수감자들을 끌어내 린치를 가하거나, 군의 지시에 따라 흰색 완장을 차지 않은 무슬림을 무차별적으로 사살했다.[47] 희생된 무슬림 대다수는 최초 시위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었다.[50] 겔마 지역의 희생자 시신은 공동묘지에 매장되었다가 나중에 파헤쳐져 헬리오폴리스에서 소각되었다.[51]
알제리 전쟁(1954-1962) 기간 동안 프랑스군은 알제리인들을 상대로 고문을 체계적으로 자행했다. 직접 고문을 당했던 앙리 알레(Henri Alleg)나 역사가 라파엘 브랑슈(Raphaëlle Branche) 등의 증언에 따르면, 구타, 감전 고문, 워터보딩, 화상, 강간 등 불법적인 방법이 동원되었다.[37][52] 포로들은 음식을 주지 않은 채 작은 감방에 감금되거나, 생매장되거나, 헬리콥터에서 던져져 살해되거나, 발에 시멘트를 채운 채 바다에 던져졌다.[37][53][54][55] 언론인 클로드 부르데(Claude Bourdet)는 1951년 12월 6일 잡지 ''L'Observateur''에 기고한 글에서 이러한 만행을 비판하며 "알제리에 게슈타포가 있나?"라고 개탄했다.[56][57][58]
역사가 D. 허프(D. Huf)는 고문 사용이 프랑스 내에서 전쟁 반대 여론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요인이었다고 분석했다. 그는 "이러한 전술은 프랑스의 혁명적 역사와 불편하게 맞물려 있으며, 나치 독일과의 참을 수 없는 비교를 불러일으켰다. 프랑스 국민의 정신은 그들의 점령 경험과 알제리에 대한 식민 지배 사이의 어떤 유사점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지적했다.[59] 폴 오사레스(Paul Aussaresses) 장군은 2000년에 전쟁 중 고문이 체계적으로 사용되었음을 인정하고 이를 정당화했다. 그는 또한 변호사 알리 부멘드젤(Ali Boumendjel)과 알제 FLN 지도자 라르비 벤 메히디(Larbi Ben M'Hidi)의 암살이 자살로 위장되었다는 사실도 시인했다.[60] FLN 활동가들을 "야만인"이라 부른 마르셀 비제르(Marcel Bigeard) 장군은 고문이 "필요악"이었다고 주장했다.[61][62] 반면, 자크 마수(Jacques Massu) 장군은 오사레스의 폭로 이후 고문을 비난했으며, 사망 전 고문 사용에 대한 공식적인 비난에 찬성한다는 입장을 밝혔다.[63]
2000년 6월, ALN(민족해방군) 활동가였던 루이제트 이길라리즈(Louisette Ighilahriz)가 르 몽드 신문을 통해 마수 장군에게 고문당했다고 폭로하자,[64] 비제르 장군은 이를 "거짓말"이라고 일축했으나, 자신이 주둔했던 시디 페루슈가 고문 센터였음을 인정했다. 마수 장군의 고문 인정 이후 비제르 역시 고문 사용 사실을 시인했지만, 직접 가담하지는 않았다고 주장하며 "84세 노인의 심장을 찌르고 있다"고 항변했다. 비제르는 라르비 벤 메히디가 암살되었고 그의 죽음이 자살로 위장되었다는 사실도 인정했다.
2018년, 프랑스 정부는 알제리 전쟁 당시 고문이 체계적이고 일상적으로 자행되었음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65][66][67] 프랑스군의 탄압 과정에서 수많은 알제리 여성이 성폭행 피해를 입었으며,[149] 일부 여성들은 독립을 위해 무기를 들고 싸우다 순국하기도 했다.[149]
6. 탈식민 관계
1962년 3월 18일 체결된 에비앙 협정은 모든 알제리 시민의 보호, 차별 금지, 재산권을 보장하고 알제리의 자결권을 인정했다.[102] 이 협정은 프랑스 국민투표를 통해 승인되었다.
협정은 알제리 시민권, 일반 시민 신분의 알제리 시민의 권리와 자유, 알제리에 거주하는 외국인 신분의 프랑스 국민 등 다양한 신분을 규정했다.[102] 프랑스 국민에게는 3년 동안 알제리 시민권을 신청할 기회가 주어졌다.[102] 협정은 이 3년 기간 동안 프랑스 국민은 "문화적, 언어적, 종교적 특성에 적합한 보장을 받을 것"이며, "자신의 개인적 신분을 유지하며, 이는 동일한 신분의 판사들로 구성된 알제리 법원에 의해 존중되고 집행될 것"이고, "의회 내에서 그리고 구성된 당국과의 관계에서 프랑스어를 사용할 것"이라고 명시했다.[102]
알제리의 유럽계 프랑스 공동체인 피에드누아르와 19세기 말 크레미외 법령으로 프랑스 시민권을 얻었던 알제리 유대인들은 종교의 자유와 재산권, 프랑스 시민권을 보장받았으며, 3년 후 프랑스 국적과 알제리 국적 중 선택할 권리를 가졌다. 알제리인들은 일을 위해 프랑스와 자국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었지만, 프랑스 시민과 동등한 정치적 권리는 없었다. 극우 비밀군 조직(OAS)은 이 협정에 반대했다.
탈식민 시대 알제리와 프랑스 관계는 오랜 기간 긴밀하게 유지되었으나 때때로 어려움을 겪었다. 1962년 에비앙 협정은 프랑스군이 사하라 사막의 토지를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했는데, 이 땅은 샤를 드골 대통령 시절 첫 핵실험(제르부아즈 블뢰) 장소로 사용되었다. 알제리에 거주하던 많은 유럽 정착민(피에드누아르)과 알제리 유대인들은 프랑스로 이주하여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했다. 반면, 전쟁 중 프랑스 편에서 싸웠던 무슬림인 harkis|하르키프랑스어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과제로 남아 있다. 1962년 알제리 전쟁 직후 많은 harkis|하르키프랑스어가 학살당했으며, 가족과 함께 프랑스로 탈출한 이들은 동화되지 못한 난민 공동체로 남는 경향이 있다. 현재 알제리 정부는 harkis|하르키프랑스어와 그 후손들의 알제리 귀환을 계속 거부하고 있다.
2005년 2월 23일, 인민운동연합(UMP)의 보수 다수당은 프랑스 식민주의 법을 통과시켰다. 이 법의 제4조는 고등학교 교사들에게 특히 북아프리카에서의 식민주의의 "긍정적 가치"를 가르치도록 요구했다. 이 법은 광범위한 대중적 분노와 모든 좌파 진영의 반대에 부딪혔으며, 여러 교사와 역사학자들로부터 역사 수정주의라는 비판을 받았다. 결국 2006년 초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UMP)에 의해 폐지되었다.
이 법은 프랑스가 알제리 통치의 어두운 측면을 외면하게 만들 것이라는 우려를 낳았다. 법률 제4조는 "학교 교육 과정은 특히 북아프리카에서 프랑스의 해외 존재의 긍정적 역할을 인정해야 한다"고 명시했기 때문이다.[120] 프랑스의 알제리 식민사 전문가이자 피에드누아르 출신인 뱅자맹 스토라는 "프랑스는 식민 역사를 결코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며, "포스트 식민 연구가 활발한 영미권 대학들과 큰 차이가 있다. 우리는 엄청나게 시대에 뒤떨어져 있다"고 지적했다.[120] 그는 역사적 사실이 학계에는 알려져 있지만 프랑스 대중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으며, 이로 인해 프랑스가 알제리 국민에 대한 식민 통치에 대해 정직하지 못한 태도를 보이게 되었다고 비판했다.[120]
2017년,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프랑스의 알제리 식민화를 "반인도 범죄"라고 규정하며,[121][122] "그것은 정말 야만적이며, 우리가 이러한 행위를 저지른 사람들에게 사과함으로써 직면해야 할 과거의 일부"라고 말했다.[123] 이 발언 이후 여론조사에서 그의 지지율이 하락하기도 했다.[121]
2020년 7월, 19세기 프랑스 식민군에 의해 참수되어 전리품으로 파리로 옮겨져 인류박물관에 보관되었던 알제리 저항군 및 지도자 24명의 유해가 알제리로 송환되어 엘 알리아 묘지의 순교자 광장에 안장되었다.[124][125][126]
그러나 2021년 1월, 마크롱 대통령은 알제리의 프랑스 식민화, 식민 시대의 학대, 알제리 독립 전쟁 중 프랑스의 개입에 대해 "회개도 사과도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127][128][129] 대신 화해를 위한 노력을 기울일 것이라고 덧붙였다.[127][128][129] 알제리 독립 60주년인 2022년 8월 25일,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알제리를 방문하여 압델마지드 테분 알제리 대통령과 회담하고, 알제리 지배 역사를 검증할 양국 역사학자 공동위원회를 설치할 것이라고 발표했다.[150]
참조
[1]
문서
Le pays occupé par les Français dans le nord de l'Afrique sera, à l'avenir, désigné sous le nom d'Algérie.
1839-10-14
[2]
웹사이트
Non exhaustive list of ancient and modern books named "Algérie française"
https://archive.org/[...]
2019-02-13
[3]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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