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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대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 플랜태저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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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토머스 플랜태저넷은 13세기 후반과 14세기 초 잉글랜드의 귀족으로, 제2대 랭커스터 백작이자 레스터 백작이었다. 그는 에드먼드 크라우치백과 블랑슈 다르투아의 아들로, 1294년 앨리스 드 레이시와 결혼하여 랭커스터 백작위를 상속받았다. 그는 에드워드 2세 통치 초기에 국왕을 지지했으나, 국왕의 총신 피어스 개버스턴을 경멸하며 반(反) 국왕파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개버스턴 처형에 관여하고, 배넉번 전투 패배 이후 국정을 장악했으나, 1322년 반란 실패로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사후 랭커스터 백작위는 동생에게 돌아갔으며, 그는 순교자로 추앙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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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대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 플랜태저넷
기본 정보
이름토마스
작위제2대 랭커스터 백작, 레스터 백작, 더비 백작, 링컨 백작, 솔즈베리 백작
로마자 표기Tomaseu Plantajinet
가문플랜태저넷 가문
아버지에드먼드 크라우치백
어머니블랑슈 다르투아
출생1278년경
사망1322년 3월 22일
사망 장소잉글랜드, 폰테프랙트
사망 원인참수형
배우자앨리스 드 레이시 (1294년 결혼, 1318년경 이혼)
토마스와 성 조지
토마스 (좌)와 성 조지 (우)
작위 계승 정보
작위랭커스터 백작, 레스터 백작, 더비 백작, 링컨 백작, 솔즈베리 백작
이전에드먼드 크라우치백
이후헨리, 제3대 랭커스터 백작

2. 초기 생애 및 결혼

에드먼드 크라우치백과 아르투아의 블랑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 블랑슈는 나바라의 왕태후이자 프랑스루이 9세의 조카였으며, 아버지 크라우치백은 잉글랜드헨리 3세의 아들이었다. 그의 어머니를 통해 토머스는 나바라의 조안 1세 여왕의 이복 형제가 되었다.

1277년에서 1280년 경, 헨리 3세의 차남인 초대 랭커스터 백작·초대 레스터 백작에드먼드와 그의 아내 블랑슈 (프랑스 국왕 루이 9세의 동생 아르투아 백작로베르 1세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1294년 제3대 링컨 백작 토마스 드 레이시의 딸 앨리스 드 레이시와 결혼했다. 1296년에 사망한 아버지로부터 막대한 영지를 상속받아 잉글랜드 유수의 귀족이 되었으며,1298년9월 8일에는 정식으로 제2대 랭커스터 백작위와 제2대 레스터 백작위를 계승했다.

그의 앨리스 드 레이시와의 결혼은 성공적이지 못했다. 그들은 자녀를 갖지 못했지만, 토머스는 사생아로 존과 토머스라는 두 아들을 두었다.[1] 1317년, 앨리스는 도싯의 캔포드에 있는 그녀의 영지에서 서리 백작 존 드 와렌, 7대의 기사인 리처드 드 세인트 마틴에게 납치당했다. 이 사건은 랭커스터와 서리 사이의 불화를 야기했고, 랭커스터는 보복으로 서리의 성 두 곳을 점령했다. 이후 에드워드 2세 왕이 개입하여 두 백작은 불안한 휴전을 맺었다. 토머스는 계속해서 링컨솔즈베리의 강력한 백작령을 유지했는데, 이는 두 가문이 합의한 결혼 계약 때문이었다. 그의 장인이 사망하면 토머스는 그의 아내가 아닌, 자신의 권리로 이 백작령을 보유하게 되어 있었다.

3. 랭커스터 백작

성년이 된 토머스는 랭커스터 주의 세습 치안관이 되었지만, 이후 10년 동안 대부분을 에드워드 1세를 위해 스코틀랜드에서 싸우며 치안관 직무를 대리인에게 맡겼다. 1298년 폴커크 전투에 에드워드 1세의 군대 일부로 참전했다.

1308년 2월 25일, 사촌인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2세 국왕의 대관식에 참여하여 에드워드 참회왕의 검인 커타나를 들었다. 국왕의 통치 초기에는 랭커스터는 에드워드 2세를 공개적으로 지지했지만, 국왕과 귀족 간의 갈등이 심화되면서 랭커스터의 충성심은 변했다. 그는 왕의 총신인 피어스 개버스턴을 경멸했는데, 개버스턴은 그를 "바이올린 연주자"라고 조롱했으며, 개버스턴이 국왕에게 랭커스터의 측근 중 한 명을 해고하라고 요구하자 복수를 맹세했다.

랭커스터는 개버스턴의 추방과 귀족 과두제 수립을 요구한 임명령 영주 중 한 명이었다. 그의 사병은 국왕과 개버스턴을 분리하는 데 도움을 주었고, 랭커스터는 1312년 개버스턴을 유죄 판결하고 처형하는 데 관여한 "판사" 중 한 명이었다.

1314년 배넉번 전투의 참패 이후, 에드워드는 랭커스터에게 복종했고, 그는 사실상 잉글랜드의 통치자가 되었다. 그는 그 후 4년 동안 통치를 시도했지만, 질서를 유지하거나 스코틀랜드인이 북부 지역을 침략하고 탈환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1318년 그의 귀족들 사이에서의 인기는 감소했고, 그는 "감소된 권한을 받아들이도록" 설득되었다.

4. 반(反) 국왕파 귀족의 지도자



성년이 된 토머스는 랭커스터 주의 세습 치안관이 되었지만, 그 후 10년 동안 대부분을 에드워드 1세를 위해 스코틀랜드에서 싸우며 치안관 직무를 대리인에게 맡겼다. 그는 1298년 폴커크 전투에 에드워드 1세의 군대 일부로 참전했다.

1307년에 사촌인 에드워드 2세가 즉위했지만, 새 국왕은 총신 피어스 개버스턴을 중심으로 하는 총신 정치를 펼쳐 제후들과 대립이 깊어졌다. 랭커스터 백작도 반(反) 국왕파 제후 중 한 명이 되었다. 1310년에는 개혁 칙령 기초 위원회(Lords Ordainers)의 멤버가 되어, 국왕에게 정치 개혁과 개버스턴 추방을 요구했다. 1308년 2월 25일 에드워드 2세 국왕의 대관식에 참여하여 에드워드 참회왕의 검인 커타나를 들었다. 국왕의 통치가 시작될 때 랭커스터는 에드워드를 공개적으로 지지했지만, 국왕과 귀족 간의 갈등이 심화되면서 랭커스터의 충성심은 변했다. 그는 왕의 총신인 피어스 개버스턴을 경멸했는데, 개버스턴은 그를 "바이올린 연주자"라고 조롱했으며, 개버스턴이 국왕에게 랭커스터의 측근 중 한 명을 해고하라고 요구하자 복수를 맹세했다.

1311년에 제후들의 최고 연장자였던 장인 링컨 백작이 사망한 후, 랭커스터 백작이 반(反) 국왕파 제후의 리더 격이 되었다. 그는 아내의 권리로서 링컨 백작의 칭호와 영지를 상속받아 잉글랜드 최대의 귀족이 되었으며, 또한 국왕의 사촌이라는 좋은 출신으로 자연스럽게 지도자로 추대되었다. 랭커스터는 개버스턴의 추방과 귀족 과두제 수립을 요구한 임명령 영주 중 한 명이었다. 그의 사병은 국왕과 개버스턴을 분리하는 데 도움을 주었고, 랭커스터는 1312년 개버스턴을 유죄 판결하고 처형하는 데 관여한 "판사" 중 한 명이었다.

국외로 추방되었던 개버스턴은 몰래 잉글랜드로 귀국하여, 1312년에는 국왕과 합류하여 추방 취소를 받았다. 이에 격노한 제후들은 윈저로 진군하여, 국왕과 개버스턴은 스카버러 성에서 3주간 농성했지만 결국 항복했다. 개버스턴은 다시 국외 추방될 예정이었고, 그의 신병은 제2대 펨브룩 백작에이머 드 발랑스/Aymer de Valence, 2nd Earl of Pembroke영어에게 인도되었지만, 이송 과정에서 개버스턴의 생명 구명을 반대했던 제10대 워릭 백작가이 드 비참이 개버스턴의 신병을 강탈하여, 자신의 워릭 성으로 연행했다. 그리고 랭커스터 백작과 제9대 아런델 백작에드먼드 피츠알란 등의 입회하에 개버스턴을 사형으로 참수했다. 이 일로 에드워드 2세는 분개했고, 또한 랭커스터 백작 등과 펨브룩 백작의 관계에도 균열이 생겨, 제후들의 연대가 무너졌다. 내란의 기운마저 감돌았지만, 황태자 에드워드 출산의 경사가 있었기 때문에, 위기는 회피되었다.

그 후, 왕과 제후의 화해가 진행되었지만, 랭커스터 백작은 반(反) 국왕의 입장을 뚜렷이 유지하며, 제후들 중에서도 점차 고립되었다. 그는 제후들의 리더일 뿐만 아니라, 궁정파와 대립하는 지방 영주들을 많이 거느리고 있었으며, 그들의 이해를 대변했기 때문에 국왕과의 타협은 불가능했다. 1314년 배넉번 전투의 참패 이후, 에드워드는 랭커스터에게 복종했고, 그는 사실상 잉글랜드의 통치자가 되었다. 그는 그 후 4년 동안 통치를 시도했지만, 질서를 유지하거나 스코틀랜드인이 북부 지역을 침략하고 탈환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1318년 그의 귀족들 사이에서의 인기는 감소했고, 그는 "감소된 권한을 받아들이도록" 설득되었다.

5. 국정 장악과 몰락

토머스의 문장: ''빨간색 바탕에 금색 사자 세 마리가 정면을 보고 지나가고 있고, 파란색 무기와 혀를 가지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파란색 삼지창 라벨이 있으며, 각 점에는 금색 플뢰르 드 리 세 개가 새겨져 있다''


성년이 된 토머스는 랭커스터 주의 세습 치안관이 되었지만, 그 후 10년 동안 대부분을 에드워드 1세를 위해 스코틀랜드에서 싸우며 치안관 직무를 대리인에게 맡겼다. 1298년 폴커크 전투에 에드워드 1세의 군대 일부로 참전했다.

1308년 2월 25일, 사촌인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2세 국왕의 대관식에 참여하여 에드워드 참회왕의 검인 커타나를 들었다. 국왕의 통치가 시작될 때 랭커스터는 에드워드를 공개적으로 지지했지만, 국왕과 귀족 간의 갈등이 심화되면서 랭커스터의 충성심은 변했다. 그는 왕의 총신인 피어스 개버스턴을 경멸했는데, 개버스턴은 그를 "바이올린 연주자"라고 조롱했으며, 개버스턴이 국왕에게 랭커스터의 측근 중 한 명을 해고하라고 요구하자 복수를 맹세했다.

랭커스터는 개버스턴의 추방과 귀족 과두제 수립을 요구한 임명령 영주 중 한 명이었다. 그의 사병은 국왕과 개버스턴을 분리하는 데 도움을 주었고, 랭커스터는 1312년 개버스턴을 유죄 판결하고 처형하는 데 관여한 "판사" 중 한 명이었다.

1314년 배넉번 전투에서 잉글랜드군이 스코틀랜드군에게 대패하면서 에드워드 2세의 권위가 크게 실추되었다. 랭커스터는 이 전투에 참가하지 않았고, 그 결과 잉글랜드 정부의 지도권은 랭커스터가 쥐게 되었다. 이후 랭커스터는 국정을 주도했지만, 적극적인 국정 운영을 하지 않아 국왕과 다른 제후들과의 관계가 소원해졌다.

1316년 의회에서 국왕으로부터 공식적으로 평의회 수석의 지위를 받았지만, 점차 펨브로크 백작 등 "중간파"에게 실권을 잠식당하게 되었다. "중간파"의 부상으로 국왕도 권력을 회복하기 시작했고, 그 총신 디스펜서 부자가 궁정 내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랭커스터 백작도 1320년 이후에는 디스펜서 부자와의 대결에 중점을 두게 되었다.

1321년에 국왕에게 디스펜서 부자 추방을 인정받았지만, 국왕은 그 다음 해에 디스펜서 부자를 불러들였다. 이에 격노한 랭커스터 백작은 국왕과 디스펜서 부자와의 철저한 대결을 결의했다.

6. 죽음

토머스 랭커스터 백작의 처형을 묘사한 중세 그림


1321년 랭커스터는 다시 반란을 주도했지만, 1322년 3월 16일 보로브리지 전투에서 패배하여 포로로 잡혔다. 랭커스터는 두 데스펜서와 아룬델 백작 에드먼드 피츠앨런, 에드워드 왕으로 구성된 재판을 받았다. 랭커스터는 자신의 변호를 위해 발언하거나 변호인을 둘 수 없었고, 반역죄로 유죄 판결을 받아 사형을 선고받았다. 왕은 랭커스터와의 친족 관계와 그의 왕족 혈통 때문에 교수형, 거세 및 참수형 대신 참수형으로 형을 감형했다. 랭커스터는 1322년 3월 22일 폰테프랙트 성 근처에서 처형되었다.

그가 죽자 그의 작위와 영지는 몰수되었고, 1323년 그의 남동생 제3대 랭커스터 백작 헨리는 레스터 백작령을 소유하기 위해 청원하여 성공했다. 1326년 또는 1327년에 의회는 사후에 토머스의 유죄 판결을 번복했으며, 헨리는 랭커스터, 더비, 솔즈베리, 링컨 백작령을 소유하는 것을 추가로 허가받았다.

토머스가 죽은 직후, 폰테프랙트에 있는 그의 무덤에서 기적이 보고되었고, 그는 순교자이자 성인으로 존경받게 되었다. 1327년 하원은 에드워드 3세에게 그의 시성을 요청하도록 청원했고, 민중의 존경은 종교 개혁까지 계속되었다.

1822년 3월 23일, 페리 프리스턴 교구의 들판에 묻힌 큰 돌 관에서 토머스의 유해가 발견되었다.[4] 1942년 E. J. Rudsdale은 1885년 폰테프랙트 성에서 옮겨진 토머스의 뼈 일부가 에식스주 콜체스터의 Paskell 경매장에서 상자에 담겨 발견되었다고 보고했다.[5]

7. 유산

토머스 플랜태저넷의 에드워드 2세에 대한 거만한 행동은, 혈통이 좋은 자신이 가베스톤이나 디스펜서와 같은 신분 상승을 이룬 국왕의 총신들보다 가볍게 여겨진 것에 대한 불만으로 설명할 수 있다.

그와는 별개로, 그가 기안에 참여한 개혁 칙령에는 민중의 강한 지지를 받은 조항도 있었고, 이 개혁 칙령을 일관되게 왕궁에 요구했기 때문에, 생존 중의 토머스에게는 열렬한 지지자가 있었고, 사후에도 민중으로부터 순교자로서 신격화되었다.

8. 문장

그의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토머스는 왕국의 문장을 사용했으며, 세 점의 프랑스 문장(즉, 청색 바탕에 세 개의 금색 백합 문양)으로 구별하였다.[7]

9. 가계도

토머스는 카페 프랑스 국왕과 플랜태저넷 잉글랜드 국왕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그의 동시대인들은 "두 부모 모두 왕족이었으므로, 그는 다른 백작들보다 분명히 더 고귀한 혈통을 가지고 있었다"고 언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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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엘레오노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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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헨리블랑슈에드먼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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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프후안토머스헨리
!^|-|-|v|-|-|-|v|-|-|-|.|
에드워드이자벨라루이필리프샤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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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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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헨리 = 잉글랜드의 헨리 3세
  • 엘레오노르 = 프로방스의 엘레오노르
  • 에드먼드 = 곱사등이 에드먼드
  • 에드워드 =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1세
  • 블랑슈 = 아르투아의 블랑슈
  • 헨리 = 나바라의 헨리 1세
  • 헨리 = 랭커스터의 헨리
  • 토머스 = 토머스 플랜태저넷
  • 후안 = 나바라의 후안 1세
  • 필리프 = 프랑스의 필리프 4세
  • 에드워드 =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2세
  • 이자벨라 = 프랑스의 이사벨라
  • 루이 = 프랑스의 루이 10세
  • 필리프 = 프랑스의 필리프 5세
  • 샤를 = 프랑스의 샤를 4세
  • 에드워드 =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3세

참조

[1] 서적 Blood Roses The History Press 2018
[2] 간행물 Gaveston, Piers, earl of Cornwall https://doi.org/10.1[...] 2019-02-11
[3] 서적 The Companion to British History https://books.google[...] Routledge 2022-11-23
[4] 웹사이트 GENUKI: The Ancient Parish of FERRY FRYSTON https://www.genuki.o[...] 2023-01-31
[5] 웹사이트 WW2: A Civilian in the Second World War: 31st January 1942: The Earl of Lancaster's Bones http://wwar2homefron[...]
[6] 웹사이트 Thomas, 2nd Earl of Lancaster http://www.englishmo[...] 2015-09-13
[7] 웹사이트 marks of cadency in the British royal family https://www.heraldic[...]
[8] 웹사이트 Thomas Plantagenet, 2nd Earl of Lancaster http://www.thepeerag[...] 2016-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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