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인리히 7세 (신성 로마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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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하인리히 7세는 발랑시엔 출신으로 룩셈부르크 백작을 거쳐 1308년 신성 로마 황제로 선출되었다. 프랑스 궁정에서 성장했으며, 룩셈부르크 백작으로 프랑스의 봉신이 되기도 했다. 1310년 이탈리아 원정을 시작하여 이탈리아 왕으로 즉위했으나, 피렌체 등 구엘프 도시들과 갈등을 겪었다. 나폴리 왕 로베르토와의 대립 속에서 말라리아로 사망했으며, 그의 사후 이탈리아에서 제국 권력에 대한 기대는 사라졌다. 단테는 하인리히 7세를 칭송하며 이상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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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인리히 7세 (신성 로마 황제)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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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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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함 | 룩셈부르크 백작 신성 로마 황제 |
출생일 | 1273년경 |
출생지 | 발랑시엔, 에노 백국 |
사망일 | 1313년 8월 24일 (40세) |
사망지 | 부온콘벤토, 이탈리아 |
매장지 | 피사 대성당, 피사 |
배우자 | 마르가레테 폰 브라반트 (1292년 결혼, 1311년 사망) |
자녀 | 요한, 보헤미아 왕 마리, 프랑스 왕비 베아트릭스, 헝가리 왕비 |
가문 | 룩셈부르크 가문 |
아버지 | 하인리히 6세 |
어머니 | 베아트리스 다베네 |
통치 | |
신성 로마 황제 즉위 | 1312년 6월 29일 |
신성 로마 황제 퇴위 | 1313년 8월 24일 |
신성 로마 황제 선임자 | 프리드리히 2세 |
신성 로마 황제 후임자 | 루트비히 4세 |
대관식 | 1312년 6월 29일, 로마 |
로마인의 왕 즉위 | 1308년 11월 27일 |
로마인의 왕 퇴위 | 1313년 8월 24일 |
로마인의 왕 선임자 | 알브레히트 1세 |
로마인의 왕 후임자 | 루트비히 4세 |
로마인의 왕 대관식 | 1309년 1월 6일, 아헨 |
이탈리아 왕 즉위 | 1311년 1월 6일 |
이탈리아 왕 퇴위 | 1313년 8월 24일 |
이탈리아 왕 선임자 | 콘라트 4세 |
이탈리아 왕 후임자 | 루트비히 4세 |
이탈리아 왕 대관식 | 1311년 1월 6일, 밀라노 |
룩셈부르크 백작 즉위 | 1288년 6월 5일 |
룩셈부르크 백작 퇴위 | 1313년 8월 24일 |
룩셈부르크 백작 선임자 | 하인리히 6세 |
룩셈부르크 백작 후임자 | 요한 1세 |
2. 생애
원래는 아버지를 계승한 룩셈부르크 백작이었으나, 1308년 알브레히트 1세가 암살된 후 교황 클레멘스 5세와 동생인 트리어 대주교 발두인, 마인츠 대주교 페터 폰 아스페르트 등 선제후들의 지지를 받아 로마 왕으로 선출되었다.[45] 이는 프랑스 왕 필리프 4세가 동생 샤를을 왕위에 앉히려는 움직임을 저지하려는 교황과 선제후들의 의도가 반영된 결과였다.[47] 1309년 1월 6일 아헨에서 대관식을 치렀다.[46]
1310년에는 아들 요한과 보헤미아 공주 엘리슈카의 결혼을 통해 보헤미아 왕위를 획득하며[48] 가문의 세력을 단기간에 크게 확장시켰고, 룩셈부르크 가문은 제국 내 유력 가문으로 부상했다.
하인리히 7세는 황제 대관식을 위해 로마로 향했으나, 그의 이탈리아 진입은 현지 세력 간의 내란을 격화시켜 로마 도착까지 2년이나 소요되었다. 게다가 아비뇽에 머물던 교황은 로마에 오지 않았고, 결국 추기경으로부터 제관을 받아야 했다. 이후 나폴리 원정을 준비하던 중 말라리아에 걸려 1313년 사망했다.[49] 일각에서는 황제 권력 강화를 경계한 프랑스와 교황파에 의해 암살되었다는 설도 제기된다.[50] 그의 장례는 피사 대성당에서 거행되었고 그곳에 묻혔으나, 석관은 이후 인근 캄포산토로 옮겨졌다가 1921년 베네데토 크로체에 의해 다시 피사 대성당으로 돌아왔다.[51]
이탈리아 원정 당시 시인 단테는 자신의 저서 『제정론』에서 하인리히 7세를 이상적인 군주로 묘사하며 극찬했고,[52] 이는 후세 사람들의 황제에 대한 인식에 큰 영향을 주었다.[53] 피렌체의 정치가 디노 콤파니 역시 그에게 기대를 걸며 연대기에서 "신의 어린 양", "이탈리아의 교정자"라고 칭했다.
2. 1. 로마 왕 선출
하인리히는 1308년 5월 1일 알베르트 1세가 암살되면서 신성 로마 제국의 정치 무대에 등장하게 되었다. 알베르트 1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로마 왕위가 공석이 되자, 프랑스 왕 필리프 4세는 자신의 동생인 발루아 백작 샤를을 다음 로마 왕으로 세우기 위해 적극적으로 움직였다.[9][47] 필리프 4세는 프랑스 출신으로 아비뇽에 머물던 교황 클레멘스 5세의 지원을 기대하며, 막대한 프랑스 자금을 풀어 독일 선제후들을 매수하려 했다.[7] 샤를은 프랑스 지지자인 쾰른 대주교 하인리히 2세의 지지를 받았지만, 많은 선제후들과 교황 클레멘스 5세조차 프랑스 세력의 확대를 경계했다.[7][10][47] 당시 샤를의 주요 경쟁자로는 팔츠 백작 루돌프 1세가 거론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인리히가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는 룩셈부르크 백작으로,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제국 변방의 비교적 작은 영주였고 프랑스 궁정에서 성장했으며 필리프 4세의 봉신이기도 했다.[7][8] 하지만 그는 특정 국가나 세력에 깊이 얽매이지 않아 여러 선제후들에게 타협적인 후보로 여겨졌다.[11] 특히 수십 년간 황제 없이 지내왔고, 샤를과 루돌프 모두에게 불만을 가진 선제후들에게 매력적인 대안이었다. 하인리히의 형제인 트리어 대주교 발두인은 쾰른 대주교를 포함한 여러 선제후들에게 상당한 양보를 약속하며 하인리히 지지를 설득했다.[7][45]

결국 하인리히는 1308년 11월 27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선거에서 보헤미아의 하인리히를 제외한 6명의 선제후로부터 표를 얻어 로마 왕으로 선출되었다.[7][46] 그는 1309년 1월 6일 아헨에서 로마 왕 대관식을 치렀다.[7][46]
1309년 7월, 교황 클레멘스 5세는 하인리히의 선출을 공식적으로 확인했다.[12] 또한 프리드리히 2세 사후 공석이었던 신성 로마 황제 대관식을 1312년 성촉절에 직접 거행하기로 약속했다.[13] 이에 대한 대가로 하인리히는 교황을 보호하고, 교황령 도시들의 권리를 존중하며, 황제가 된 후 십자군에 참여하기로 서약했다.
그러나 황제 대관식을 위해 로마로 가기 전, 하인리히는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었다. 보헤미아의 귀족과 성직자 일부가 당시 보헤미아를 통치하던 카린티아의 하인리히에게 불만을 품고, 합스부르크 가문의 개입을 경계하며 하인리히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하인리히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1310년, 자신의 아들 요한을 바츨라프 2세의 딸 엘리슈카와 결혼시켜 보헤미아 왕위를 룩셈부르크 가문에 확보하고 카린티아의 하인리히를 축출했다.[48] 이로써 룩셈부르크 가문은 단숨에 제국 내 유력 가문으로 부상했다.
로마 원정을 준비하며 하인리히는 합스부르크 가문과의 관계 개선에도 힘썼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보헤미아 왕위 계승 문제에서 하인리히에게 양보할 수밖에 없었지만, 하인리히는 1309년 10월 그들의 제국 봉토 소유를 공식적으로 인정해주었다. 그 대가로 오스트리아 공작 레오폴트 1세는 하인리히의 이탈리아 원정에 동행하고 군대를 지원하기로 약속했다.
하인리히는 자신의 가문 기반이 상대적으로 약하고 왕위 선출 과정에서 여러 양보를 해야 했기 때문에, 교황으로부터 직접 황제관을 받는 것이 자신의 권위를 확립하는 데 필수적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황제 즉위는 프랑스 왕 필리프 4세의 야심을 견제하는 데 필요하다고 여겼다. 이탈리아 원정의 성공을 보장하기 위해, 하인리히는 1310년 중반 나폴리의 로베르토 왕과 협상하여 자신의 딸 룩셈부르크의 베아트리스를 로베르토의 아들 칼라브리아 공작 카를과 결혼시키려 했다. 이는 이탈리아 내 반황제파인 구엘프 (나폴리 왕이 지도자로 여겨짐)와 황제파인 기벨린 사이의 긴장을 완화하려는 목적이었으나, 로베르토의 과도한 금전 요구와 프랑스 왕 필리프 4세의 방해로 결국 협상은 결렬되었다. 하인리히는 1309년 8월 15일 로마 원정 계획을 공식 발표하고, 1310년 10월 1일까지 군대를 준비하여 이탈리아로 출발할 예정이었다.
2. 2. 이탈리아 원정


1310년 10월, 하인리히 7세는 장남 요한을 프라하에 제국 부황으로 남겨두고 북부 이탈리아로 진군을 시작했다. 그가 알프스 산맥을 넘어 롬바르디 평원에 들어서자, 구엘프와 기벨린 양 진영의 귀족과 성직자들이 그를 맞이했으며, 단테는 통치자와 백성을 위한 낙관적인 공개 서한을 배포했다.[14] 황제로서 하인리히는 신성 로마 제국의 영광을 되찾으려 했으나, 수십 년간의 전쟁과 갈등으로 분열된 이탈리아의 복잡한 현실을 제대로 예상하지 못했다. 당시 이탈리아는 수많은 독립 도시 국가로 나뉘어 있었고, 각 국가는 명목상 구엘프 또는 기벨린에 속하며 강력한 통치자를 지지하는 도시 귀족이나 과두 공화국 형태의 상인 계급에 의해 지배되고 있었다.
하인리히는 정치적 수완 부족과 고결한 이상주의를 드러내며, 모든 롬바르디아 도시가 정치적 성향에 관계없이 망명자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는 구엘프와 기벨린 양측을 정중하게 맞이하며 처음에는 뚜렷한 편애를 보이지 않았으나,[15] 동시에 기존 도시 통치자들의 권력을 찬탈된 것으로 간주하고 제국의 직접적인 통제를 주장했다. 그는 도시들이 제국의 요구에 따르도록 강요했고, 항복한 도시의 지도자들에게 칭호와 봉토를 주었지만, 이는 오히려 더 큰 원한을 불러일으켰다. 1310년 11월, 그는 5,000명의 병사(기병 500명 포함)를 이끌고 토리노에 도착했다.
아스티에서 잠시 머문 뒤,[16] 하인리히는 밀라노로 진군하여 1311년 1월 6일 롬바르디아의 철관을 쓰고 이탈리아 왕으로 즉위했다. 토스카나 구엘프 세력은 이 행사에 참석을 거부하고 하인리히의 제국적 야심에 저항할 준비를 시작했다. 정치적 안정을 위한 계획의 일환으로 그는 밀라노의 전 통치자였던 비스콘티를 망명에서 소환했다. 이에 반발한 귀도 델라 토레가 하인리히에 대한 반란을 조직했으나 잔혹하게 진압되었고, 비스콘티 가문은 권력을 되찾았다. 하인리히는 마테오 1세 비스콘티를 밀라노 제국 부황으로, 매형인 사보이의 아메데우스를 롬바르디아 총독으로 임명했다.[17] 이러한 조치와 이탈리아 도시에 부과된 대규모 징수, 공동 규정을 제국법으로 대체하려는 시도는 구엘프 도시들의 반감을 더욱 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르마, 로디, 베로나, 파도바와 같은 도시들은 그의 통치를 받아들였다.
동시에 북부 이탈리아 코뮌에 대한 저항은 무자비하게 진압되었고, 항복한 도시에 가해진 처벌은 다른 도시의 저항 의지를 더욱 굳건하게 만들었다. 크레모나는 토리아니 가문과 그 지지자들이[19] 밀라노에서 도망친 후 1311년 4월 26일에 함락되었고, 하인리히는 도시 성벽을 파괴했다. 브레시아에서의 4개월간의 포위 공격(1311년)과 같은 지연은 로마로 가는 여정을 늦추고 그의 입지를 약화시켰다. 여론은 하인리히에게 등을 돌리기 시작했고, 피렌체는 루카, 시에나, 볼로냐의 구엘프 공동체와 동맹을 맺고 왕에 대한 선전전을 시작했다. 이는 프랑스 왕 필리프 4세의 압력을 받은 교황 클레멘스 5세가 하인리히와 거리를 두기 시작하고 교황령에 지원을 호소했던 이탈리아 구엘프들의 대의를 지지하기 시작하면서 더욱 힘을 얻었다.
역병과 탈영에도 불구하고, 그는 1311년 9월 브레시아의 항복을 받아냈다. 하인리히는 파비아를 거쳐 제노바에 도착했는데, 그곳에서 그는 도시 내의 교전 세력 사이에서 다시 중재를 시도했다. 그가 이 도시에 머무는 동안 그의 아내 브라반트의 마가렛이 사망했다.[20] 또한 제노바에 있는 동안 그는 나폴리 왕 로베르토가 이탈리아 반도에서 제국 권력 확장에 반대하기로 결정하고 구엘프 당의 전통적인 수장 자리를 다시 차지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21] 피렌체, 루카, 시에나, 페루자가 모두 로베르토에 대한 지지를 선언했다. 하인리히는 로베르토에게 제국 대관식에 참석하고 피에몬테와 프로방스에 있는 그의 제국 봉토에 충성을 맹세하도록 명령함으로써 그를 위협하려 했다.[22] 피렌체의 격려에 힘입어 롬바르디아 대부분이 1311년 12월과 1312년 1월에 반란을 일으켰고, 반면 로마냐에서 로베르토 왕은 자신의 입지를 강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인리히의 지지자들은 비첸차를 점령했고, 그는 베네치아로부터 사절을 받았으며, 베네치아는 그에게 도시의 우정을 제공했다. 하인리히는 또한 1311년 12월 피렌체에 대한 법적 절차를 시작하여 도시에 대해 국가 반역죄를 제기하고 제국 금지령을 내렸다.
하인리히는 제노바에서 두 달을 보낸 후, 배를 타고 피사로 이동했는데, 그곳에서 그는 피렌체의 전통적인 적이자 기벨린 세력이었던 주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그는 여기서 다시 나폴리의 로베르토와 협상을 시작했고,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고 나폴리의 로베르토에게 압력을 가하기를 바라면서 시칠리아의 프레데리코 3세와 동맹을 맺기로 결정했다. 그는 황제로 대관하기 위해 1312년 피사를 떠나 로마로 갔지만, 가는 길에 클레멘스 5세가 그곳에서 그를 대관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황제의 침입으로 이탈리아 내란은 격화되었고, 로마 도착까지 2년이나 걸렸다. 게다가 아비뇽의 교황은 로마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고, 결국 하인리히는 추기경으로부터 제관을 받게 되었다.
황제 대관식 이후, 하인리히는 나폴리 원정을 준비하던 중 말라리아에 걸려 1313년 부온콘벤토에서 사망했다.[49] 황제 권력의 신장을 싫어하는 프랑스와 교황파에 의해 암살되었다는 설도 제기된다.[50] 그의 장례는 1313년 9월 2일, 일요일에 피사 대성당에서 거행되었고, 같은 날 매장되었지만, 나중에 석관은 인근 캄포산토(Camposanto)로 옮겨졌다. 그러나, 단테 사후 600주년 기념인 1921년에, 당시 이탈리아 문부 대신이었던 철학자 · 역사학자 베네데토 크로체는 석관을 피사 대성당으로 돌려놓았다.[51]
이탈리아 원정 때, 시인이자 유명한 단테는 『제정론』에서 그를 절찬했다.[52] 단테에 의한 이상화는, 후세 사람들의 황제에 대한 이미지에 큰 영향을 주었다.[53] 피렌체의 정치가 디노 콤파니는 하인리히에게 기대를 걸어, 그 연대기 속에서 "신의 어린 양" "이탈리아의 교정자"라고 불렀다.
2. 3. 피렌체와의 전쟁과 나폴리 왕 로베르토와의 갈등
하인리히 7세가 로마 성벽에 접근하자 도시는 혼란에 빠졌다. 오르시니 가문은 나폴리의 로베르토를 지지했고, 콜론나 가문은 하인리히를 지지했다. 거리에서 양측 지지자들이 충돌하는 가운데, 하인리히는 산탄젤로 성과 바티칸 구역이 로베르토의 수중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24] 로베르토는 피렌체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왕조 이익에 황제의 등장이 부합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1312년 5월 7일, 하인리히의 독일군은 폰테 밀비오를 건너 로마로 들어갔지만, 성 베드로 대성당 주변을 장악한 앙주 가문 군대를 몰아내기는 어려웠다. 콜론나 가문이 라테란 대성전, 산타 마리아 마조레, 콜로세움 주변을 장악하고 있었기에, 하인리히는 1312년 6월 29일 라테란 대성전에서 대관식을 치러야 했다. 이 의식은 하인리히를 따라 이탈리아로 온 세 명의 기벨린파 추기경들이 집전했다.[25] 대관식 직후 열린 연회에서는 적대적인 석궁병들이 황제 일행에게 화살을 쏘기도 했다.[26]
한편, 나폴리의 로베르토는 하인리히에게 점점 더 많은 요구를 했다. 그는 하인리히가 자신의 아들을 토스카나의 제국 총독으로 임명하고, 대관식 후 4일 안에 로마를 떠나라고 요구했다. 하인리히는 교황권보다 제국의 특권이 우위에 있으며, 이탈리아 전체가 황제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그는 교황 클레멘스 5세가 요청한 로베르토와의 휴전 협정을 거부하고, 나폴리 왕국 공격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하인리히는 시칠리아 왕위를 놓고 로베르토와 경쟁하던 아라곤의 페데리코 3세와 공식 조약을 맺었다. 이후 로마 시의 혼란 때문에 하인리히는 도시를 떠나 토스카나 기벨린파의 조언에 따라 북쪽 아레초로 이동했다.
1312년 9월 아레초에서 하인리히는 로베르토를 반역죄로 선고했다.[27][28] 그러나 아비뇽 근처 카르팡트라에 있던 클레멘스 5세는 하인리히를 전적으로 지지하지 않았다. 프랑스 왕족인 로베르토는 이탈리아에서 프랑스 세력을 대변했고, 교황은 프랑스의 영향력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또한 하인리히가 로베르토를 꺾을 경우 자신이 포위될 가능성도 우려했다. 하인리히는 로베르토를 공격하기 전에 먼저 피렌체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피렌체는 하인리히에 저항하는 롬바르디아 도시들에 자금을 지원하고, 포위 공격에 대비해 성벽을 강화하고 있었다.
1312년 9월 중순, 하인리히는 피렌체에 접근했다. 피렌체 민병대와 구엘프 기병대는 하인리히의 숙련된 북부 병력과 정면으로 맞서기 어렵다는 것이 명백했다. 피렌체군은 전술적으로 밀리고 식량이 부족해지자 밤에 도시로 후퇴했다. 시에나, 볼로냐, 루카 등 주변 도시들도 피렌체 수비를 돕기 위해 병력을 보냈다.[29] 피렌체 포위전이 시작되었고, 하인리히는 보병 약 15,000명과 기병 2,000명을 동원했으며, 피렌체의 총 방어 병력은 64,000명에 달했다. 피렌체는 황제군과 마주한 성문을 제외한 모든 성문을 열어 교역로를 유지했다. 하인리히는 6주 동안 피렌체 성벽을 공격했지만 결국 포위를 풀어야 했다. 그럼에도 1312년 말까지 그는 토스카나의 상당 부분을 장악했고, 패배한 적들에게는 비교적 관대하게 대했다.
1313년 3월, 하인리히는 피사 요새로 돌아왔다. 로베르토가 마침내 구엘프 동맹의 수장직을 수락하자, 하인리히는 그를 반역죄로 공식 기소했다. 인내심이 바닥난 하인리히는 이탈리아 전역의 모든 반역 도시 주민들을 체포하여 옷을 벗기고 교수형에 처하라고 명령했다. 그는 피사에서 독일로부터 증원군을 기다리면서 전통적으로 피사의 적이었던 루카를 공격했다. 하인리히는 다음 단계를 준비했다. 피사에서 최대한 많은 자금(약 200만 플로린)을 확보한 후,[30] 1313년 8월 8일 오랫동안 미뤄왔던 나폴리의 로베르토에 대한 원정을 시작했다. 그의 이탈리아 동맹국들은 참전을 꺼렸고, 그의 군대는 약 4,000명의 기사로 구성되었다. 함대는 로베르토의 영토를 직접 공격할 준비를 했다.
첫 목표는 구엘프 도시인 시에나였다. 하인리히는 시에나를 포위했지만, 일주일 만에 말라리아에 걸려 급격히 건강이 악화되었다. 쇠약해진 그는 8월 22일 시에나를 떠나 시에나 근처 작은 마을인 부온콘벤토로 피신했고, 1313년 8월 24일 그곳에서 사망했다. 그의 시신은 피사로 옮겨졌다. 하인리히는 겨우 40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이탈리아에서 효과적인 제국 권력을 회복하려던 그의 높은 기대는 물거품이 되었다.[31]
2. 4. 죽음
하인리히 7세는 황제 대관식을 위해 로마로 향했으나, 그의 이탈리아 진입은 내란을 격화시켰고 로마 도착까지 2년이 걸렸다. 아비뇽에 머물던 교황은 로마에 나타나지 않았고, 결국 하인리히 7세는 추기경으로부터 제관을 받았다. 이후 나폴리 원정을 떠났으나, 그 과정에서 말라리아에 걸려 1313년 사망했다[49]. 황제 권력 강화를 경계한 프랑스와 교황파에 의해 암살되었다는 설도 있다[50].
그의 장례식은 1313년 9월 2일 피사 대성당에서 거행되었고 같은 날 매장되었다. 기벨린 도시였던 피사는 황제에 대한 충성심의 표시로 대성당 후진의 높은 제단 뒤편 중앙에 기념비적인 무덤을 건설했다. 이 무덤은 1315년 시에나 출신 조각가 티노 디 카마이노가 제작했으며[35], 하인리히 7세의 조각상을 비롯해 여러 조각상과 천사상으로 장식되었다. 그러나 정치적인 이유로 무덤은 해체되어 그 일부가 다른 곳에 재사용되었다. 이후 석관은 인근 캄포산토(Camposanto)로 옮겨졌다가, 단테 사후 600주년인 1921년에 당시 이탈리아 문부 대신 베네데토 크로체에 의해 다시 피사 대성당으로 돌아왔다[51]. 1985년까지 황제의 무덤은 대성당 오른쪽 트란셉트, 성 라니에리의 무덤 근처로 옮겨졌고, 일부 조각상이 정면 상단에 배치되었다. 하인리히 7세와 그의 고문들을 묘사한 여러 조각상들은 묘지에 있었다. 현재 조각상, 직물, 장식 금속 세공품 등 유물들은 피사 대성당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으며[34], 무덤 자체는 대성당 내에 남아 있다. 영국 런던의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 캐스트 코트에는 이 무덤의 석고 모형(1890년 제작)이 소장되어 있다.[35]
하인리히 7세의 무덤은 1921년 단테 서거 600주년을 기념하여 처음 개봉 및 조사되었고[36], 2013년 그의 서거 700주년을 맞아 다시 개봉되어 연구되었다. 유해는 1921년 조사 당시 "띠로 짠 고운 수의"로 묘사된 크고 화려한 직사각형 비단 수의에 싸여 있었으며, 분석을 위해 관에서 꺼내져 피사 대성당 박물관에 전시되었다.[36][37] 골격 분석 결과, 하인리히 7세의 키는 약 1.78m로 추정되었다.[36] 또한 중세 시대 사후 처리 방식을 연구하기 위해 뼈에 대한 X선 회절, 적외선 분광법, 주사 전자 현미경 검사 등이 이루어졌다.[38]
하인리히 7세는 단테의 ''신곡'' 중 ''천국'' 편에 등장하는 유명한 '알토 아리고(alto Arrigo|알토 아리고it)'로, 단테는 그를 위해 천국에 마련된 명예로운 자리를 묘사했다. ''천국'' xxx.137f에서 하인리히 7세는 "이탈리아가 준비되기 전에 이탈리아를 개혁하러 온 자"로 표현된다. 단테는 ''연옥'' 편에서도 그를 여러 차례 언급하며, 황제의 통치가 이탈리아를 구원하고 교회의 부적절한 세속 권력을 종식시킬 것이라 기대했다. 단테는 자신의 저서 ''제정론''에서도 하인리히 7세를 극찬했으며[52], 이러한 단테의 이상화는 후세 사람들의 하인리히 7세에 대한 인식에 큰 영향을 미쳤다[53]. 피렌체의 정치가 디노 콤파니 역시 하인리히 7세에게 기대를 걸며, 자신의 연대기에서 그를 "신의 어린 양", "이탈리아의 교정자"라고 칭했다.
3. 유산
하인리히 7세는 그의 이탈리아 원정이 비록 성공하지 못했지만, 후대에 중요한 영향을 남겼다. 특히 동시대의 단테와 같은 인물들은 그에게 큰 기대를 걸었으며, 이는 후세 사람들이 하인리히 7세를 평가하는 데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3. 1. 단테와의 관계
하인리히 7세가 황제 대관식을 위해 이탈리아 원정을 떠났을 때, 시인이자 유명한 단테는 『제정론』에서 그를 절찬했다[52]。 단테에 의한 이상화는, 후세 사람들의 황제에 대한 이미지에 큰 영향을 주었다[53]。피렌체의 정치가 디노 콤파니는 하인리히에게 기대를 걸어, 그 연대기 속에서 "신의 어린 양" "이탈리아의 교정자"라고 불렀다.
하인리히 7세는 1313년 이탈리아 원정 중 사망하여 피사 대성당에 매장되었지만, 나중에 석관은 인근 캄포산토(Camposanto)로 옮겨졌다. 그러나, 단테 사후 600주년 기념인 1921년에, 당시 이탈리아 문부 대신이었던 철학자 · 역사학자 베네데토 크로체는, 석관을 피사 대성당으로 돌려놓았다[51]。
4. 가족
하인리히는 1292년 7월 9일 테르뷔렌에서 브라반트 공작 요한 1세의 딸인 마르가레테 (1276년–1311년)와 결혼하여[39] 1남 2녀를 두었다.
이름 | 생몰년 | 배우자 | 비고 |
---|---|---|---|
보헤미아의 요한 1세 | 1296년 8월 10일 – 1346년 8월 26일 | 보헤미아 왕, 룩셈부르크 백작. 카를 4세 황제의 아버지.[39] | |
마리 | 1304년 – 1324년 3월 26일 | 프랑스 왕 샤를 4세 (1322년 결혼) | 이소됭에서 사망.[39] |
베아트릭스 | 1305년 – 1319년 11월 11일 | 헝가리 왕 카로이 1세 (1318년 결혼) | 출산 중 사망.[39] |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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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왕은 제위의 전제가 된 동프랑크 왕위에서 개칭된 왕호. 현대에서 보면 실질 독일 왕이지만, 당시 국가・지역・민족으로서의 독일은 성립 도상에 있다. 또한 [[이탈리아 왕국 (중세)|이탈리아]]와 [[아를 왕국|부르고뉴]]에 대한 종주권을 갖춘다.
[41]
문서
"7세"는 독일 왕(동프랑크 왕)으로서 [[하인리히 1세 (독일왕)|하인리히 1세]]부터 세는 숫자로, 황제로서는 6번째 하인리히. 또한 프리드리히 2세의 적자였던 반란을 일으켜 폐위된 로마왕 하인리히를 세지 않는 숫자이므로, 로마왕으로서는 8번째 하인리히
[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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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 로마 황제"는 역사학적 용어로 실제 칭호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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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dx.doi.org/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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