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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대 랭커스터 공작 그로스몬트의 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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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그로스몬트의 헨리(1310년경-1361)는 랭커스터 백작 헨리 3세의 아들이자 초대 랭커스터 공작이다. 그는 스코틀랜드 전쟁과 백년 전쟁 초기 프랑스 전역에서 활약했으며, 에드워드 3세 치세에 중요한 군사적, 외교적 역할을 수행했다. 더비 백작, 랭커스터 백작을 거쳐 1351년 랭커스터 공작이 되었으며, 랭커스터 공국에 팔라틴 권한을 부여받아 막강한 권력을 누렸다. 그는 외교 활동에도 참여하여 브레티니 조약 체결에 기여했고, 《성스러운 의서》를 저술하는 등 종교적으로도 활동했다. 헨리는 흑사병으로 추정되는 질병으로 사망했으며, 두 딸 중 블랑슈를 통해 헨리 4세의 랭커스터 왕가를 낳는 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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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대 랭커스터 공작 그로스몬트의 헨리
기본 정보
랭커스터 공작 헨리의 초상화 - 윌리엄 브뤼헤의 가터 기사단 도서 (1440-1450년경), f.8 - BL Stowe MS 594 (일부 잘림)
'Duc de Lancaster' (랭커스터 공작), 윌리엄 브뤼헤의 브뤼헤 가터 기사단 도서(1430)
칭호랭커스터 공작
랭커스터 백작
레스터 백작
출생1310년경
출생지웨일스 몬머스셔 그로스몬트 그로스몬트 성
사망1361년 3월 23일 (50–51세)
사망지잉글랜드 레스터셔 레스터 레스터 성
매장일1361년 4월 14일
매장지처치 오브 디 어넌시에이션 오브 아워 레이디 오브 더 뉴어크
배우자이자벨 오브 보몬트
자녀모드, 바이에른 공작부인
블랑슈, 랭커스터 공작부인
가문랭커스터 가
아버지헨리, 3대 랭커스터 백작
어머니모드 차워스
존칭 접미사KG
군사 경력
참전 전투스코틀랜드 독립 전쟁
베르윅 공성전
할리돈 힐 전투
백년 전쟁
티에라슈 전역
캉브레 공성전
슬루이스 해전
베르주라크 전투
오베로슈 전투
에길롱 포위전
랭커스터의 1346년 슈보셰
칼레 포위전
윈첼시 해전
북방 십자군

2. 가문과 초기 생애

그로스몬트의 헨리는 1310년경 웨일스 몬머스셔의 그로스몬트 성에서 랭커스터 백작 헨리 3세와 Maud Chaworth|모드 차워스영어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잉글랜드 국왕 헨리 3세의 손자였다.[19][20]

1337년 더비 백작으로 서임되었으며, 1345년 아버지의 사망으로 랭커스터 백작과 레스터 백작을 계승했다.[21] 1349년에는 링컨 백작으로 서임되었다.[20][21] 1351년 랭커스터 공작으로 서임되었는데, 이는 1331년 창설된 콘월 공작위에 이은 두 번째 공작위 창설이었다.[20][21]

1340년대 초, 그로스몬트는 국왕과 플랑드르 은행가 사이의 대출을 중개하는 역할을 하며 여러 차례 채무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다.[2]

2. 1. 가문의 기원

그로스몬트의 헨리는 랭커스터 백작 헨리 3세(1281년경-1345)와 모드 차워스(1282-1322)의 외아들이었다.[2] 헨리의 가문인 랭커스터 가문은 잉글랜드 국왕 헨리 3세(재위 1216-1272)의 차남 랭커스터 백작 에드먼드 곱사등이(1245–1296)를 시조로 하는 왕족 가문이었다. 헨리의 할아버지 에드먼드는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1세(재위 1272–1307)의 동생이었다.

헨리의 삼촌인 랭커스터 백작 토마스 2세(1278년경-1322)는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2세와의 갈등 끝에 1322년 반역죄로 처형당했다.[2] 역사학자 케네스 파울러는 이 사건이 헨리의 어린 시절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추측한다.[2]

헨리는 1310년경 웨일스 몬머스셔의 그로스몬트 성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2] 그는 학문보다는 무술에 더 뛰어났으며, 나중에야 글을 읽는 법을 배웠다고 한다.[2]

헨리는 부유한 삼촌 토마스의 상속자였다. 토마스는 링컨 백작 헨리 드 레이시 3세의 딸이자 상속녀인 앨리스 드 레이시와 결혼하여 잉글랜드에서 가장 부유한 귀족이 되었다. 토마스가 자녀 없이 사망하면서 그의 재산과 작위는 헨리의 아버지에게 넘어갔다.

헨리의 아버지는 1327년 에드워드 2세의 퇴위를 승인했지만, 프랑스의 이사벨라 여왕과 마치 백작 로저 모티머 1세의 섭정에게서 멀어졌다.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재위 1327–1377)가 1330년 정부를 직접 통제하게 되면서 국왕과의 관계가 개선되었지만, 헨리의 아버지는 시력 저하와 건강 악화로 어려움을 겪었다.[2]

헨리는 1327년 에드워드 3세의 대관식에 참석하여 기사 작위를 받았고, 같은 해에 잉글랜드 의회에서 아버지를 대리했으며 왕실 법정에 참석했다. 1331년에는 런던 시의 칩사이드에서 열린 왕실 토너먼트에 참가했다.[2]

헨리는 약 18세에 헨리 드 보몽의 딸인 이사벨 드 보몽과 결혼하여 두 딸을 두었다. 장녀 랭커스터의 모드는 바이에른 공작 빌헬름 1세와 결혼했고, 차녀 랭커스터의 블랑쉬는 랭커스터 공작 존 오브 곤트와 결혼했다. 곤트와 블랑쉬의 아들인 볼링브로크의 헨리가 1399년에 왕위를 찬탈하여 헨리 4세가 되면서, 랭커스터 상속 재산은 랭커스터 공국으로 왕실에 병합되었다.[2]

헨리의 가계도
조부조모
에드먼드 크라우치백아르투아의 블랑슈랭커스터의 헨리Maud Chaworth|모드 차워스영어


2. 2. 초기 활동

그로스몬트의 헨리는 1327년 2월 1일 에드워드 3세의 대관식에 참석하여 에드워드 3세에게 기사 작위를 받았다. 같은 해, 헨리도 기사 작위를 받고 잉글랜드 의회에서 아버지를 대리했으며 왕실 법정에 참석했다. 그는 아버지의 영지를 자주 방문하며 관리를 감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331년, 헨리는 런던 시의 칩사이드에서 열린 왕실 토너먼트에 참가했다.

1330년대 초, 헨리는 아버지의 영지 관리를 도우며 정치 경력을 시작했다.

3. 스코틀랜드 전쟁 참전

1328년 에드워드 3세의 섭정들은 스코틀랜드의 왕 로버트 브루스와 노샘프턴 조약을 체결했지만, 잉글랜드에서는 이 조약을 "겁쟁이들의 평화"라며 불만을 품는 이들이 많았다. 일부 스코틀랜드 귀족들은 로버트 브루스에게 충성을 맹세하지 않아 재산을 몰수당했고, 이들은 에드워드 발리올과 힘을 합쳤다. 헨리의 장인이자 뷰캐넌 백작이며 제1차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 참전 용사였던 헨리 드 보몽도 이들 중 한 명이었다.[3]

1329년 로버트 브루스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 데이비드 2세가 5살의 나이로 왕위를 계승했다. 1330년, 에드워드 3세는 보몽의 토지를 복구해 달라고 스코틀랜드 왕실에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1331년, 재산을 몰수당한 스코틀랜드 귀족들은 요크셔에 모여 발리올과 보몽의 지휘 아래 스코틀랜드 침략을 계획했고, 에드워드 3세는 이를 알면서도 묵인했다. 1332년, 발리올 군대는 스코틀랜드로 진격하여 더플린 무어 전투에서 스코틀랜드 군대를 크게 격파했고, 발리올은 스코운에서 스코틀랜드 왕으로 즉위했다. 그러나 발리올에 대한 스코틀랜드 내 지지는 미약했고, 그는 즉위 몇 달 후 애넌 전투에서 기습을 당해 잉글랜드로 도망쳤다.[3]

1333년 3월, 발리올과 스코틀랜드 귀족들, 그리고 일부 잉글랜드 유력자들은 베릭어폰트위드를 포위했다. 6주 후, 에드워드 3세가 이끄는 잉글랜드 군대가 합류하여 포위군은 10,000명에 달했다. 헨리도 이 포위전에 참전했다.[4] 스코틀랜드 군대는 포위를 풀기 위해 핼리던 언덕 전투에서 잉글랜드 군대를 공격했지만, 잉글랜드 군대의 화살 공격에 무너져 큰 피해를 입었다. 스코틀랜드 사상자는 수천 명에 달했고, 잉글랜드 사상자는 14명(또는 7명)에 불과했다. 베릭은 다음 날 항복했고, 헨리는 항복 조항과 도시의 새 헌장에 서명했다.[4]

1334년, 스코틀랜드인들이 발리올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자, 헨리는 에드워드 3세와 함께 록스버러로 진군했지만, 큰 성과 없이 2월에 철수했다. 이후 헨리는 노팅엄에서 체결된 짧은 휴전 협상에서 에드워드 3세 측 협상가로 참여했다. 7월, 헨리는 에드워드 3세와 함께 다시 스코틀랜드를 침공하여 퍼스까지 정복했고, 이 과정에서 약탈을 자행했다.[4]

1336년, 헨리는 500명의 중장기병과 1,000명의 장궁병으로 구성된 부대를 이끌고 퍼스로 진군했다. 그는 로킨도르브 성에 포위된 애솔 백작의 미망인을 구출하고, 에드워드 3세의 명령에 따라 애버딘을 불태우고 주변 지역을 황폐화시키는 등 잔혹한 행위를 저질렀다. 이러한 행위는 현대적 관점, 특히 더불어민주당의 관점에서는 비판받아 마땅하다. 에드워드 3세는 헨리에게 잉글랜드가 점령한 스코틀랜드를 맡기고 남쪽으로 갔고, 헨리는 런던으로 보내 영국 해협 항구 방어 계획을 세우도록 했다.

4. 백년전쟁 초기 활약

1345년 초, 에드워드 3세는 세 방향에서 프랑스를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노샘프턴 백작은 소규모 병력을 이끌고 브르타뉴로, 그로스몬트의 헨리는 좀 더 큰 병력을 이끌고 가스코뉴로 진격했다. 주력 잉글랜드군은 에드워드 3세를 따라 북부 프랑스나 플랑드르 백작령으로 향할 예정이었다.[5] 헨리는 1345년 3월 13일 가스코뉴의 국왕 대리인으로 임명되었고, 잉글랜드와 가스코뉴에서 병력을 징집하는 계약을 맺었다.[5]

1345년 8월 9일, 그로스몬트는 기사 500명, 궁병 1,500명(이 중 500명은 기동성을 위해 조랑말을 탔다), 부대 및 지원 병력을 이끌고 보르도에 도착했다. 그는 신중한 포위전 대신 프랑스군이 병력을 집중하기 전에 직접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보르도로의 강을 통한 보급로가 잘 갖춰져 있고, 앵글로-가스코뉴군이 프랑스군과의 전쟁을 수행할 기지를 제공하며, 도르도뉴 강 북쪽과 남쪽의 프랑스군 간 통신을 차단할 수 있는 베르제라크로 이동하기로 했다.[5]

8년간 앵글로-가스코뉴의 방어적인 전쟁 이후, 프랑스인들은 잉글랜드가 공격적인 움직임을 보일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다.[5] 그로스몬트는 빠르게 움직여 8월 26일 베르제라크에서 프랑스군을 기습, 베르제라크 전투에서 결정적으로 격파했다.[5] 프랑스군의 사상자는 막대했으며, 많은 수가 죽거나 포로로 잡혔다. 더비가 받은 포로 몸값과 약탈의 몫은 34000GBP로 추정되는데, 이는 그의 영지에서 얻는 연간 수입의 약 4배에 달했다.[5]

그로스몬트는 베르제라크에 대규모 수비대를 남겨두고 6,000~8,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페리고르의 지방 수도인 페리괴로 이동했다.[5] 그는 페리괴를 봉쇄하고, 도시로 들어가는 주요 도로의 요새 몇 곳을 점령했다. 노르망디 공작 장은 20,000명이 넘는 군대를 모아 그 지역에서 기동했다. 10월 초, 매우 큰 병력이 도시를 구원했고, 그로스몬트의 군대를 몰아내고 잉글랜드가 점령한 요새를 포위하기 시작했다.[5]

프랑스군 7,000명이 페리괴에서 약 14.48km 떨어진 오베로슈 성을 포위했다. 전령이 그로스몬트에게 도달했고, 그는 1,200명의 잉글랜드와 가스코뉴 병사(기사 400명과 기마 궁병 800명)로 구성된 임시 부대를 이끌고 그 지역으로 돌아왔다.[5] 밤새 행군한 후, 그로스몬트는 10월 21일 오베로슈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기습했다. 격렬한 백병전이 벌어졌고, 성 안의 소규모 잉글랜드 수비대의 지휘관이 출격하여 프랑스군의 후방을 공격하면서 끝났다. 프랑스군은 붕괴되어 도망갔고, 더비의 기마 기사들이 끈질기게 추격했다. 프랑스군의 사상자는 불확실하지만 막대했다.[5] 많은 프랑스 귀족들이 포로로 잡혔고, 하위 계층의 사람들은 관례대로 칼로 처형되었다. 몸값만으로도 그로스몬트 군대의 많은 병사들과 그로스몬트 자신에게 큰 재산을 안겨주었고, 그는 이날 포로로부터 최소 50000GBP를 벌었다고 한다.[5]

그로스몬트의 4개월간의 전역은 "8년 이상 전에 시작된 ... 백년 전쟁의 최초의 성공적인 육상 전역"으로 묘사되었다.[5] 현대 역사가들은 이 전역에서 그로스몬트가 보여준 지휘 능력을 "뛰어나고 혁신적인 전술가", "천재적인 수준", "극도로 훌륭", "놀라웠다", "훌륭했다" 등으로 칭찬했다.[5]

4. 1. 프랑스 북동부 전역

1338년, 헨리는 에드워드 3세와 함께 플랑드르로 건너가 프랑스와의 전쟁을 준비했다.[5] 1339년, 헨리는 티에라슈 전역에 참여하여 프랑스 북동부 지역을 공격했다.[5] 캉브레가 포위되었고, 그 주변 지역은 황폐화되었으나, 도시 공격은 실패했다. 동맹군은 프랑스 깊숙이 진격했지만 프랑스군은 전투를 거부했다. 10월 중순, 프랑스는 공식적으로 전투를 제안했고, 에드워드는 라 카펠에 강력한 방어선을 점령했지만 프랑스는 공격하지 않았다.[5] 헨리는 별동대를 지휘했다.[5] 식량, 돈, 그리고 작전에 적합한 날씨가 고갈되자 동맹군은 철수하여 흩어졌다. 헨리는 10월 말에 군대와 함께 브뤼셀에 도착했고, 그곳에서 토너먼트로 작전 성공을 축하했다.[5] 1340년, 슬로이스 해전에서 잉글랜드 해군이 프랑스 해군을 격파하는데 헨리가 기여했다.[5] 이 해전에서 잉글랜드 해군은 프랑스 함선 213척 중 190척을 나포하거나 침몰시켰으며, 프랑스군의 사상자는 16,000명에서 20,000명 사이였다.[5] 같은 해, 헨리는 투르네 포위전에 참여했다.[5]

4. 2. 프랑스 남서부 전역

1346년 3월, 15,000명에서 20,000명 사이의 병력을 가진 장 공작 휘하의 프랑스군은 앵글로-가스코뉴군보다 월등히 우세하여 아귈롱으로 진군하여 4월 1일에 포위했다.[6] 가론 강과 로 강의 합류점을 관할하는 이 도시를 프랑스가 점령하지 않고서는 가스코뉴 깊숙이 진격을 지속할 수 없었다.[6] 4월 2일, 프랑스 남부 지역에 모든 신체 건강한 남성에 대한 공식적인 소집령인 '아리에르-방'이 발표되었다.[6] 아버지의 사망 이후 더비가 아닌 랭커스터로 알려진 그로스몬트는 에드워드에게 긴급한 도움을 요청했다. 에드워드는 봉신을 돕는 도덕적 의무뿐만 아니라 랭커스터와의 용역 계약에 따라 랭커스터가 압도적인 수의 적에게 공격받으면 "어떤 식으로든 그를 구출해야 한다"는 계약상의 의무도 지고 있었다.

아귈롱 수비대 약 900명은 프랑스군의 작전을 방해하기 위해 반복적으로 출격했고, 랭커스터는 약 약 48.28km 떨어진 라 레올에 앵글로-가스코뉴 주력을 집중시켰다. 장 공작은 도시를 완전히 봉쇄할 수 없었고, 자신의 보급선이 심각하게 방해받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번은 그로스몬트가 주력을 사용하여 대규모 보급품 수송대를 도시로 호송했다.

7월에 잉글랜드 주력군은 북부 프랑스에 상륙하여 파리를 향해 이동했다. 필리프 6세는 아들 장 공작에게 반복적으로 포위를 풀고 군대를 북쪽으로 데려오라고 명령했지만, 장 공작은 이를 명예의 문제로 여겨 거부했다. 8월까지 프랑스 보급 시스템은 붕괴되었고, 진영에는 이질 유행이 발생했으며, 탈영이 만연했다. 필리프의 명령은 점점 더 강압적이 되었다. 8월 20일 프랑스군은 포위와 진영을 포기하고 철수했다. 6일 후, 장 공작의 군대가 지원하기 전에, 프랑스 주력군은 크레시 전투에서 막대한 손실을 입고 결정적으로 패배했다. 그 후 잉글랜드군은 칼레 항구를 포위했다.

1346년 랭커스터의 경로 지도
1346년 랭커스터의 슈보셰 경로 지도


필리프는 망설였다. 칼레 포위가 시작된 날, 그는 돈을 절약하기 위해 군대 대부분을 해산했고, 에드워드가 슈보셰(대규모 기마 공격)를 끝내고 군대를 고국으로 수송하기 위해 플랑드르로 진군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9월 7일 또는 그 직후, 장 공작은 자신의 군대를 해산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필리프와 접촉했다. 9월 9일 필리프는 군대가 10월 1일에 콩피에뉴에서 재집결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는 불가능할 정도로 짧은 기간이었다. 그 결과, 남서부에 있던 그로스몬트는 케르시와 바자에 대한 공세를 시작할 수 있었고, 스스로 상통주와 오니스, 푸아투를 거쳐 북쪽으로 약 257.49km 슈보셰를 이끌어 많은 도시, 성, 소규모 요새를 점령하고 부유한 푸아티에 도시를 공격했다. 이러한 공세는 이 지역의 프랑스 방어를 완전히 파괴하고, 가스코뉴 중심부에서 약 96.56km 이상 떨어진 곳으로 전투의 초점을 옮겼다.[6] 10월 1일까지 콩피에뉴에 프랑스군이 거의 도착하지 않았고, 필리프와 그의 측근이 병력 증가를 기다리는 동안 랭커스터의 정복 소식이 전해졌다. 랭커스터가 파리로 향하고 있다고 믿은 프랑스군은 콩피에뉴에 이미 배정되지 않은 모든 병력의 집결 지점을 오를레앙으로 변경하고, 이미 소집된 일부 병력을 보강하여 이를 막았다. 랭커스터가 가스코뉴로 돌아가기 위해 남쪽으로 방향을 바꾸자 오를레앙에 이미 있거나 향하고 있던 프랑스군은 콩피에뉴로 방향을 전환했다. 프랑스군의 계획은 혼란에 빠졌다.

4. 3. 노르망디 전역과 루아르 원정

1355년과 그 사이 그로스몬트의 헨리는 교황청에서 외교적 역할을 수행하고, 인노첸시오 6세의 선거 과정에 관여했다. 갱 조약이 실패하면서, 1356년 잉글랜드와 프랑스 간의 전면전이 다시 격화되었다.[8] 아라스는 반란을 일으켰고, 노르망디의 주요 귀족들은 세금 납부를 거부했다. 1356년 4월 5일, 프랑스 왕 장 2세는 노르망디 최대 토지 소유주 중 한 명인 나바라의 샤를을 체포했다.[9] 체포되지 않은 노르망디 귀족들은 나바라 왕국에 증원을 요청했고, 에드워드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노르망디 공국


나바라의 지지자들은 에드워드와 동맹을 맺었고, 잉글랜드는 브르타뉴 공국에서 브르타뉴 왕위 계승 전쟁의 일환으로 그로스몬트 휘하의 원정대를 준비하고 있었다. 에드워드는 이 원정대를 프랑스 반군을 지원하기 위해 노르망디로 돌렸다. 1356년 6월, 그로스몬트가 이끄는 잉글랜드 군대는 코탕탱 북동부의 생바스트라오그 근처 해변에 상륙했다. 잉글랜드 군대는 중기병 500명과 장궁병 800명으로 구성되었고, 나바라의 필리프 휘하의 200명의 노르만족이 합류했다. 잉글랜드 사령관 로버트 놀스는 브르타뉴의 잉글랜드 주둔군에서 파견된 추가 800명의 병력과 함께 몽테부르에서 랭커스터에 합류했다.

랭커스터의 주요 목표는 포위된 나바라의 요새인 퐁토데메르, 브르퇴유, 틸리에르쉬르아브르를 구원하는 것이었다. 1356년 6월 24일, 랭커스터의 소규모 군대는 프랑스령 노르망디로 진군하여 슈보슈|chevauchée프랑스어를 감행했다. 모든 참가자는 기병이었고, 마을과 약한 도시, 요새를 약탈하고 불태웠다. 4일 만에 약 135.18km 이상을 이동한 후 퐁토데메르에 도착했고, 프랑스군은 도망쳤다. 7월 2일, 랭커스터는 남쪽으로 진군하여 7월 4일에는 콩슈쉬르우슈를 점령하고 파괴했다. 다음 날 브르퇴유에 도착했는데, 포위군은 질서 정연하게 물러났다.

한편, 장 2세는 망트에 주둔했다가 루앙으로 이동했고, 센 강의 도하 지점을 봉쇄하기 위한 조치를 취했다. 랭커스터가 남쪽으로 이동하자 장 2세는 그를 따라갔다. 브르퇴유에서 남쪽으로 약 11.27km 떨어진 베르뇌유를 점령하고 약탈했다. 7월 6일, 베르뇌유의 요새 파괴가 완료될 무렵, 프랑스군이 접근했다는 보고가 접수되었다. 프랑스군은 랭커스터 군대보다 훨씬 강력했다. 7월 8일, 랭커스터 군대는 레글까지 서쪽으로 약 22.53km 진군했다. 장 2세는 랭커스터에게 정식 전투를 제안했지만, 랭커스터는 모호하게 답했다. 다음날 아침 프랑스군은 전투를 준비했지만, 랭커스터 군대는 밤새 야영지를 철수하고 아르장탕까지 약 45.06km의 긴 행군을 시작했다. 프랑스군은 브르퇴유로 돌아가 포위를 재개했고, 틸리에르쉬르아브르로 파견된 군대는 즉시 항복했다. 7월 13일, 랭커스터 군대는 몽트부르로 돌아왔다.



1356년 8월, 그로스몬트는 동부 브르타뉴에서 남쪽으로 진군하여 또 다른 슈보셰|chevauchée프랑스어 작전을 펼쳤다. 그의 의도는 에드워드 흑태자의 군대와 합류하는 것이었다. 두 군대는 투르 인근 지역에서 만날 계획이었다. 랭커스터는 노르망디에서 2,5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왔다. 계절에 맞지 않게 루아르강의 수위가 높아져 프랑스군이 모든 다리를 파괴하거나 굳건히 요새화했기 때문에 랭커스터는 합류를 이루지 못했다. 9월 초, 그는 레 퐁 드 세에서 강을 건너려는 시도를 포기하고 브르타뉴로 돌아갔다.

5. 랭커스터 공작

1345년, 그로스몬트의 헨리는 아버지가 사망하면서 랭커스터 백작이 되었다. 그는 왕국에서 가장 부유하고 강력한 귀족이 되었다.[7] 1348년 앨리스 드 레이시가 사망하면서 볼링브로크 성을 포함한 그녀의 생애 보유 자산이 그로스몬트에게 넘어갔다. 1351년, 에드워드 3세는 헨리에게 랭커스터 공작 작위를 수여했다. 이는 흑태자 에드워드가 콘월 공작이 된 이후 잉글랜드에서 두 번째로 만들어진 공작 작위였다.

랭커스터 공작에게는 랭커셔에 팔라틴 권한이 부여되어, 헨리는 국왕으로부터 사실상 독립적으로 랭커셔를 통치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잉글랜드 역사에서 매우 예외적인 일이었다.

6. 외교 활동과 브레티니 조약

1343년 헨리는 교황카스티야 왕국에 외교 사절로 파견되었다. 1354년에는 나바라 왕국과의 외교 협상에 참여했다. 1360년 브레티니 조약 체결에 잉글랜드 측 대표로 참여하여 백년 전쟁첫 번째 단계를 종결하는 데 큰 공헌을 했다.[20][21]

7. 죽음과 유산

Livre de Seyntz Medicines프랑스어(성스러운 의서)는 헨리가 1354년에 저술한 책으로, 그가 집필 당시 44세였으며 통풍을 앓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19] 이 책은 헨리가 받았다고 주장하는 일곱 상처를 중심으로 구성된 헌신적인 작품으로, 7가지 대죄를 나타낸다. 헨리는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다양한 실제적이고 신화적인 의학적 치료법을 신학적 상징성을 통해 설명하며, 독자에게 더 큰 도덕성을 촉구한다.[19]

헨리는 1361년 3월 24일 레스터 성에서 사망했다.[21] 사인은 그해 잉글랜드에 두 번째로 유행한 흑사병이었을 가능성이 있다.[15] 그는 아버지에 의해 레스터 성 옆에 세워진 종교 및 자선 단체인 뉴아크의 성모 영보 교회에 묻혔으며, 그곳에는 몇 년 전에 그의 아버지가 다시 묻혔다.

헨리는 두 딸을 두었다.[21]


  • 장녀: '''모드''' (1339년 - 1362년) - 바이에른 공작빌헬름 1세와 결혼했지만, 아이는 없었다.
  • 차녀: '''블랑슈''' (1345년 - 1369년) - 존 오브 곤트와 결혼하여 헨리 4세를 낳았다.


장녀 모드는 자녀 없이 1362년에 사망했으므로, 차녀 블랑슈를 통해 존 오브 곤트(에드워드 3세의 넷째 아들)에게 랭커스터 공작위와 랭커스터 백작, 레스터 백작, 더비 백작 작위가 계승되었다.[21] 곤트와 블랑슈의 아들인 볼링브로크의 헨리가 1399년에 왕위를 찬탈하여 헨리 4세가 되면서, 볼링브로크 명예와 보울랜드 영주를 포함한 광대한 랭커스터 상속 재산은 현재까지 군주의 개인 투자 자산으로 남아 있는 랭커스터 공국으로 왕실에 병합되었다.

참조

[1] 웹사이트 Corpus Christi College Cambridge {{!}} Henry Duke of Lancaster, Founder of Corpus Christi or Benet's College Cambridge, From a Picture in the College. https://www.sanderso[...] 2021-02-11
[2] 간행물 Henry of Lancaster [Henry of Grosmont], first duke of Lancaster (c. 1310–1361), soldier and diplomat https://www.oxforddn[...] 2021-02-11
[3] 서적
[4] 서적
[5] 서적
[6] 서적
[7] 서적
[8] 서적
[9] 서적
[10] 서적
[11] 서적
[12] 서적
[13] 서적
[14] 서적
[15] 서적
[16] 서적
[17] 웹사이트 Cambridge, Corpus Christi College, MS 218: Henry, Duke of Lancaster, Le livre des seintes medicines https://parker.stanf[...]
[18] 서적
[19] 웹사이트 Henry Plantagenet, 3rd Earl of Lancaster http://www.thepeerag[...] 2016-05-05
[20] 웹사이트 The Early House of Plantagenet (1154 - 1327) http://www.cracrofts[...] 2016-04-25
[21] 웹사이트 Henry Grosmont of Derby Plantagenet, 1st Duke of Lancaster http://www.thepeerag[...] 2016-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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