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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대 랭커스터 백작 에드먼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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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1대 랭커스터 백작 에드먼드(1245년 1월 16일 ~ 1296년 6월 5일)는 잉글랜드 왕 헨리 3세의 아들이자 에드워드 1세의 동생으로, 시칠리아 왕위를 제안받았으나 실현되지 못했다. 제2차 남작 전쟁 이후 레스터 백작과 랭커스터 백작을 거쳐 랭커스터 가문을 창시했으며, 웨일스 침공과 십자군 원정에 참여했다. 프랑스와의 갈등 속에서 가스코뉴 원정을 이끌었으나 바욘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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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대 랭커스터 백작 에드먼드
기본 정보
에드먼드 꼽추백의 모형과 기념물, 웨스트민스터 사원
작위랭커스터 백작
레스터
더비
출생일1245년 1월 16일
출생지잉글랜드 런던
사망일1296년 6월 5일 (51세)
사망지아키텐 공국 바이욘
매장일1301년 3월 24일
매장지웨스트민스터 사원
가문출생: 플랜태저넷 가
설립: 랭커스터 가
아버지헨리 3세
어머니엘레오노르 드 프로방스
계승자없음 (지위 확립)
후계자토머스 오브 랭커스터
결혼과 자녀
배우자결혼: 아벨린 드 포르즈 (1269년 결혼, 1274년 사망)
결혼: 블랑슈 다르투아 (1275년 결혼)
자녀토머스, 제2대 랭커스터 백작
헨리, 제3대 랭커스터 백작
이름
영어Edmund, 1st Earl of Lancaster
일본어エドマンド (初代ランカスター伯)
한국어제1대 랭커스터 백작 에드먼드

2. 초기 생애 (1245–1265)

1245년 1월 16일 잉글랜드 왕 헨리 3세와 프로방스의 엘레노어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형으로는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1세가 있다.[45][46]

1254년 부왕 헨리 3세는 로마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의 뜻에 따라 에드먼드를 시칠리아 왕으로 즉위시키려 했지만, 이를 위해서는 시칠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 막대한 자금을 투입해야 했다. 그 부담에 대한 불만이 1258년 옥스퍼드 의회에서 개혁파 제후들이 국왕에게 옥스퍼드 조항을 들이미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결국 에드먼드는 실제로 시칠리아 왕으로 군림할 수 없었고, 1263년 시칠리아 왕 퇴위를 선언했다.[47]

에드먼드가 "시칠리아 사업" 동안 시칠리아 왕으로 임명되었을 때의 에드먼드 인장 조각

2. 1. 출생과 유년기

에드먼드는 1245년 1월 16일 런던에서 잉글랜드 왕 헨리 3세와 프로방스의 엘레노어 사이에서 태어났다.[1] 헨리는 아들을 얻기 위해 기도했던 성인 에드먼드의 이름을 따서 에드먼드의 이름을 지었다.[1] 그는 에드워드 1세와 마가렛, 베아트리체의 남동생이자, 캐서린의 형이었다.[2] 에드먼드는 형제들과 함께 대부분의 어린 시절을 윈저 성에서 보냈으며, 아버지 헨리에게 정서적으로 의지하였다.[3]

에드먼드의 탄생, 1245년. 매튜 파리가 기록함

2. 2. 시칠리아 왕위 문제

1254년, 헨리 3세는 교황 인노첸시오 4세로부터 에드먼드를 시칠리아 왕국의 차기 왕으로 임명하겠다는 제안을 수락했다.[4] 시칠리아는 인노첸시오 4세의 오랜 경쟁자였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가 통치하고 있었으며,[5] 교황청은 1250년 프리드리히 2세가 사망한 후 그를 계승할 보다 우호적인 통치자를 원했다.[6] 헨리 3세에게 시칠리아는 아들 에드먼드를 위한 가치 있는 보상이자 동방에서 계획된 십자군 전쟁을 시작할 기지를 제공할 것이었다.[7] 인노첸시오 4세는 헨리 3세에게 에드먼드와 군대를 보내 프리드리히 2세의 아들인 만프레드로부터 시칠리아를 탈환하고, 총 £135,000까지의 비용과 부채를 충당하도록 지시했으며, 교황청은 자금 지원에 도움을 줄 것이었다.[8]

9살의 에드먼드는 왕이 되기 위한 준비를 했으며, 1254년 5월에 어머니인 프로방스의 엘레노어와 함께 가스코뉴로 항해했다. 보르도에서 에드먼드는 10월 3일에 그의 큰아버지인 플랑드르 백작 토마스에게 카푸아 공국을 하사했고, 그해 12월에 귀국했다. 1255년 10월 18일, 에드먼드는 시칠리아에서 공식적인 서임을 받았고, 그의 아버지 헨리 3세는 그를 왕으로 칭하며 반지를 수여했다.

교황 알렉산데르 4세가 인노첸시오 4세의 뒤를 잇고 신성 로마 제국의 군사적 압력에 직면하면서 전망은 암울해졌다.[9] 알렉산데르 4세는 더 이상 헨리 3세의 비용을 지원할 수 없게 되었고, 대신 헨리 3세에게 전쟁 보상으로 교황청에 £90,000의 부채를 지불하라고 요구했다.[10] 헨리 3세는 의회의 도움을 요청했지만, 그의 요청은 거부되었다. 추가 시도에도 불구하고 의회는 헨리 3세에게 부분적인 자금만을 지원했다.[11] 알렉산데르 4세는 점점 인내심을 잃고 1258년에 사절을 헨리 3세에게 보내 부채를 지불하고 시칠리아에 군대를 보내지 않으면 파문하겠다고 위협했다.[12] 헨리 3세는 고위 성직자로부터 돈을 갈취하여 약 £40,000을 모았다.[14]

결국 1258년에서 1263년 사이, 알렉산데르 4세 또는 교황 우르바노 4세 치하에서, 교황청은 에드먼드에게 시칠리아 왕국의 하사를 취소하고 대신 에드먼드의 삼촌인 앙주의 샤를 1세에게 그 칭호를 부여했다.

1245년 1월 16일잉글랜드 왕 헨리 3세와 왕비 엘레노어 오브 프로방스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형으로는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1세가 있다[45][46]

1254년에 부왕 헨리 3세는 로마 교황그레고리우스 9세의 뜻에 따라 에드먼드를 시칠리아 왕으로 즉위시키려 했지만, 이를 위해서는 시칠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 막대한 자금을 투입해야 했고, 그 부담에 대한 불만이 1258년의 에서 개혁파 제후들이 국왕에게 옥스퍼드 조항을 들이미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결국 에드먼드는 실제로 시칠리아 왕으로 군림할 수 없었고,1263년에는 시칠리아 왕 퇴위를 선언했다[47]

3. 레스터 백작 및 랭커스터 백작 (1265–1293)

1265년 제2차 남작 전쟁에서 패배한 제6대 레스터 백작시몽 드 몽포르의 레스터 백작령을 받아 레스터 백작이 되었다.[47][46] 1267년 6월 30일에는 잉글랜드 북서부 랭커스터 지역에 막대한 영지를 하사받아 랭커스터 백작에 서임되었다. 이것이 랭커스터 가문의 시작이었다.[46]

더불어 프랑스의 샹파뉴 백작령도 획득했다.[46] 그 영지는 더비, 스태퍼드, 레스터, 노샘프턴, 트렌트 협곡 일대를 중심으로, 랭커셔에서 요크셔 연안, 남웨일스에서 스코틀랜드 국경 지대에까지 이르는 광대한 것이었다.

1254년 부왕 헨리 3세는 로마 교황의 뜻에 따라 에드먼드를 시칠리아 왕으로 즉위시키려 했으나, 1263년 시칠리아 왕위에서 물러났다.[47]

1277년과 1282년에는 형 에드워드 1세를 따라 웨일스 침공에 참전했다.[46] 1286년부터 1289년까지는 형이 잉글랜드에 없는 동안 섭정으로서 웨일스의 반란을 진압했다.[46] 가스코뉴에서의 종군 중[46] 1296년 6월 5일바욘에서 사망했다.[47]

"크라우치백"(Crouchback)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제8차 십자군에 참가했을 때 등에 십자가를 짊어진 데서 유래한 별명이라고 한다.

3. 1. 레스터 백작

에드먼드는 1265년 10월 26일, 아버지 잉글랜드 국왕 헨리 3세가 백작령을 재창설한 후 그에게 작위와 관련 영지를 수여하면서 레스터 백작이 되었다. 또한 반역 남작이었던 니콜라스 세그레이브, 초대 세그레이브 남작의 모든 영지를 받았다. 왕이 남작들을 상대로 승리한 것이 확실해지자 에드먼드는 1265년 10월 30일 잉글랜드로 돌아왔다. 정치적 망명자였던 그는 남작들에 대한 복수심을 품고 있었다. 그의 형 에드워드와 함께 에드먼드는 왕실 정부에 의해 영지를 몰수당한 "재산 몰수자"라고 알려진 반역 남작들을 진압하는 데 집중했다.

같은 해 6월 28일 에드먼드는 로버트 드 페러스, 6대 더비 백작의 몰수된 영지를 얻었는데, 그의 가문은 잉글랜드 국왕 스티븐 시대부터 중요한 봉건 영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제2차 남작 전쟁 동안 로버트는 루이스 전투에 즉시 나타나지 못했기 때문에 남작들에게 신뢰할 수 없고 폭력적인 동맹으로 여겨졌다. 또한 로버트는 그의 라이벌인 에드워드의 영지를 무차별적으로 습격했다. 그 결과 레스터의 시몬 드 몽포르 6세 백작은 그의 과도한 권력을 두려워하여 그를 투옥했다. 헨리로부터 사면을 받은 후 로버트는 다시 반란을 일으켰고 그 해 5월 15일 체스터필드 전투에서 패배한 후 체포되었다. 에드먼드는 로버트가 엄청난 액수의 돈을 지불해야 영지를 되찾을 수 있다는 데 동의하도록 강요했는데, 그는 로버트가 그러한 벌금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를 통해 에드먼드는 로버트의 영지에 대한 통제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에드워드가 왕위에 오르자 그는 1276년 7월 26일 로버트의 이전 영지인 Chartley Castle을 에드먼트에게 수여했고, 1277년 5월 5일 로버트와 그의 조상들이 빚진 부채로부터 에드먼트를 면제했다.

Staffordshire의 Chartley Castle, 에드먼드가 몰락한 남작 로버트 드 페러스, 6대 더비 백작으로부터 물려받은 재산 중 하나


1266년 여름 동안 에드먼드는 케닐워스 성을 점령한 반역자들의 습격에 맞서기 위해 워릭에서 군대를 이끌었다. 케닐워스 수비대는 워릭을 공격하려 했지만 에드먼드의 군대는 그들을 성으로 성공적으로 격퇴했다. 그 후 왕실군은 에드먼드가 헨리, 에드워드와 함께 4개 사단 중 하나를 지휘하며 케닐워스 성 포위전을 벌였다. 포위는 12월 13일 케닐워스 칙령이 시행되면서 종료되었고, 이는 10월 31일까지 왕과 남작 군대 사이에 평화를 가져왔다. 같은 달 또는 이듬해 에드먼드는 케닐워스 성을 획득했다.

워릭셔의 케닐워스 성의 대저택. 에드먼드는 형 에드워드, 아버지 잉글랜드 국왕 헨리 3세와 함께 케닐워스 성에 대한 6개월간의 포위를 돌파하기 위해 서명된 케닐워스 칙령에 따라 케닐워스 성을 받았다.


웨일스의 기네스 왕국의 왕자인 를웰린 압 그리피드가 남작들의 동맹이었기 때문에 헨리는 1267년 2월 21일 사법관 로버트 왈레란드와 함께 에드먼드를 파견하여 왕자와의 평화를 협상하는 외교 임무를 수행했다. 그러나 를웰린은 헨리가 기네스를 침략하겠다고 위협할 때까지 9월까지 잉글랜드와 평화를 이루는 것을 거부했다.

1267년 6월 30일, 헨리 3세는 에드먼드에게 랭커스터 백작 작위를 수여하고, 랭커셔의 왕실 영지, 랭커스터, 뉴캐슬언더라인, 피커링의 영지를 수여했다. 에드먼드는 또한 레스터 백작이었고 나중에는 더비 백작이었지만, 그는 주로 랭커스터 백작과 관련이 있다.

제2차 남작 전쟁의 종결은 에드먼드의 삶의 중요한 전환점을 의미했다. 그는 삼촌 앙주의 샤를 1세에게 시칠리아 왕국을 잃은 것에 실망했지만, 이제 플랜태저넷 왕조의 랭커스터 가문 지부를 설립한 강력한 백작령을 받았다. 이때 에드먼드는 무자비하고 강력한 전사로서 명성을 얻었다. 이러한 획득을 통해 그는 잉글랜드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귀족이 되었다.

3. 2. 랭커스터 백작

1265년 10월 26일, 에드먼드는 아버지 잉글랜드 국왕 헨리 3세가 백작령을 재창설한 후 그에게 작위와 관련 영지를 수여하면서 레스터 백작이 되었다. 반역 남작이었던 니콜라스 세그레이브, 초대 세그레이브 남작의 모든 영지도 받았다. 1267년 6월 30일에는 헨리 3세가 그 작위를 창설한 후 랭커스터 백작이 되었고, 랭커셔의 왕실 영지, 랭커스터, 뉴캐슬언더라인, 피커링의 영지를 수여받았다. 에드먼드는 레스터 백작이자 더비 백작이었지만, 주로 랭커스터 백작과 관련이 있다.

같은 날, 에드워드는 에드먼드에게 세 개의 성과 웨일스의 몬머스 성을 수여했다.[31] 1266년 6월 28일 에드먼드는 로버트 드 페러스, 6대 더비 백작의 몰수된 영지를 얻었다. 에드워드가 왕위에 오르자 그는 1276년 7월 26일 로버트의 이전 영지인 Chartley Castle을 에드먼트에게 수여했고, 1265년 12월 6일에는 카디건 성과 카마던 성의 지배권을, 1266년 1월 8일에는 딜윈, 러그워딘, 마든, 민스터워스, 로드리의 영지를 획득했다.

몬머스셔의 그로스몬트 성


1266년 여름, 에드먼드는 케닐워스 성을 점령한 반역자들의 습격에 맞서기 위해 워릭에서 군대를 이끌었다. 왕실군은 에드먼드가 헨리, 에드워드와 함께 4개 사단 중 하나를 지휘하며 케닐워스 성 포위전을 벌였다. 포위는 12월 13일 케닐워스 칙령이 시행되면서 종료되었고, 같은 달 또는 이듬해 에드먼드는 케닐워스 성을 획득했다.

웨일스의 기네스 왕국의 왕자인 를웰린 압 그리피드가 남작들의 동맹이었기 때문에, 헨리는 1267년 2월 21일 에드먼드를 파견하여 왕자와의 평화를 협상하는 외교 임무를 수행했다. 에드먼드는 6월 4일 파리에서 그의 삼촌 프랑스 국왕 루이 9세가 수행한 그의 사촌 필리프의 기사 임명식에 참석하여 외교 활동을 계속했다. 방문하는 동안 그는 아르투아 백작 로베르 2세와 로베르의 누이 아르투아의 블랑슈의 환대를 받았다.

제2차 남작 전쟁의 종결은 에드먼드의 삶의 중요한 전환점을 의미했다. 그는 플랜태저넷 왕조의 랭커스터 가문 지부를 설립한 강력한 백작령을 받았다. 이때 에드먼드는 무자비하고 강력한 전사로서 명성을 얻었다. 이러한 획득을 통해 그는 잉글랜드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귀족이 되었다.

1254년에 부왕 헨리 3세는 에드먼드를 시칠리아 왕으로 즉위시키려 했지만, 1263년에는 시칠리아 왕 퇴위를 선언했다[47]1265년에는 제2차 남작 전쟁에서 패배한 제6대 레스터 백작시몽 드 몽포르의 레스터 백작령을 받았다,레스터 백작위를 받았다[47][46]1267년 6월 30일에 잉글랜드 북서부 랭커스터 지역에 막대한 영지를 하사받아 랭커스터 백작에 서임되었다. 이것이 랭커스터 가문의 시작이 되었다。

1277년과 1282년에는 형왕 에드워드 1세를 따라 웨일스 침공에 참전。1286년부터 1289년 형왕 부재 시에는 섭정으로서 웨일스의 반란 진압에 나섰다。가스코뉴에서의 종군 중 1296년 6월 5일바욘에서 사망했다[47]

3. 3. 제2차 남작 전쟁

헨리 3세(왼쪽)와 시몽 드 몽포르 (오른쪽) 사이의 제2차 남작 전쟁


에드먼드의 삼촌인 레스터 백작 시몽 드 몽포르가 이끄는 남작들은 에드먼드의 아버지인 잉글랜드 왕 헨리 3세에 대한 불만 사항 중 하나로 '시칠리아 문제'를 제기했다.[15][16] 이로 인해 헨리는 1258년 옥스퍼드 조항에 서명하게 되었고, 이는 그의 권력과 주요 남작들의 권력을 제한했다.[17] 그러나 에드먼드는 1262년 한여름에 헨리와 그의 형제 에드워드와 협력하여 이 조항을 뒤집었다. 잉글랜드의 권력은 헨리와 남작들 사이를 오갔고,[18] 결국 킹스턴 조약으로 이어졌는데, 이 조약에 따라 분쟁은 에드먼드의 삼촌인 콘월 백작 리처드와 프랑스 왕 루이 9세에 의해 해결될 예정이었다.[19][20]

1263년 여름, 왕실 정부와 시몽이 이끄는 급진적인 남작들 사이에 공개적인 내전이 발발했고, 에드먼드는 런던탑에서 도버 성으로 도망쳤다. 7월 10일, 헨리는 에드먼드와 도버 성의 치안 판사 로버트 드 글래스턴에게 편지를 써서, 평화 협상을 준비하기 위해 남작들을 대표하는 런던 주교 헨리 오브 샌드위치에게 성을 넘겨줄 것을 촉구했다. 그러나 7월 28일자 편지에서 에드먼드와 로버트는 성을 넘겨주는 것이 평화가 확립될 때까지 그들의 의무에 어긋난다고 주장하며 이에 불응했다. 그 결과 헨리는 직접 그들에게 성을 포기하라고 명령해야 했다.

시몽의 남작 연합이 분열 조짐을 보이자,[21] 헨리는 킹스턴 조약에 명시된 대로 분쟁에 대한 중재를 루이에게 요청했다.[22] 처음에는 이에 저항했지만, 시몽은 결국 프랑스의 중재에 동의했고, 헨리와 시몽의 대표가 파리로 갔다.[22][23] 1264년 1월 23일, 루이는 아미앵의 판결에서 헨리가 남작을 다스릴 권리가 있다고 선언하여 옥스퍼드 조항을 무효화했다. 그러나 프랑스의 결정은 인기가 없었고; 헨리가 잉글랜드로 돌아오자 불안이 싹트고 폭력이 임박했다.[24]

제2차 남작 전쟁은 1264년 4월에 헨리의 군대가 미들랜즈에 있는 시몽의 영토를 점령하고 동남부에서 프랑스로 가는 길을 다시 점령하기 위해 진격하면서 마침내 발발했다.[25] 에드먼드는 그의 어머니 프로방스의 엘레오노르와 함께 프랑스로 가서 삼촌 루이의 재정적 지원을 받아 아버지인 헨리를 지원하기 위해 용병 부대를 모집하는 것을 도왔다.[26] 5월 14일 루이스 전투에서 시몽이 헨리, 리처드, 에드워드를 사로잡았음에도 불구하고,[27] 그는 잉글랜드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는 데 실패했고 에드워드는 탈출에 성공했다.[28][29] 1265년 8월 4일 이브샴 전투에서 남작이 패배한 후, 시몽은 왕실 군대에 의해 살해되어 사지가 절단되었고, 그의 땅과 레스터 백작의 지위는 몰수되었다.[30]

3. 4. 웨일스 원정

1276년 11월, 잉글랜드와 웨일스 그위네드 왕국 간의 관계 악화로 에드먼드의 형인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1세가 전쟁을 선포했다. 1277년 초, 에드먼드는 에드워드 1세의 소환을 받아 잉글랜드로 돌아와 리웰린 압 그리피드를 치기 위한 원정에 참여했다. 4월에 에드먼드는 페인 드 차워스를 대신하여 남 웨일스 왕실 군대의 ''사령관''이 되었고, 로저 모티머 제1대 모티머 남작과 윌리엄 드 보챔프 제9대 워릭 백작과 함께 웨일스에 대한 군사 작전을 시작했다.

에드먼드의 상파뉴 백작 문장 묘사


페인은 토위 강 계곡에서 드라이슬윈 성, 디네보르 성, 카레그 케넌 성 및 란도버리 성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었다. 그의 지휘를 맡은 에드먼드는 더 북쪽으로 진격하여 웨일스 귀족 리스 압 매엘귄의 영토를 점령하고 1277년 7월 말에 아베리스트위스를 점령했다. 에드먼드는 아베리스트위스 성(당시 란바던 성)을 재건하고, 9월 20일에 잉글랜드로 돌아와 로저 마일스를 성의 치안관으로 임명했다. 이 전쟁은 1277년 11월 아베르코누이 조약으로 끝났으며, 그위네드는 항복하고 그의 봉신들과 정복한 영토에 대한 지배권을 포기했다.

1277년과 1282년, 에드먼드는 형 에드워드 1세를 따라 웨일스 침공에 참전했다. 1286년부터 1289년까지 형이 부재했을 때는 섭정으로서 웨일스의 반란을 진압했다.

3. 5. 결혼과 십자군 원정

에드먼드의 시칠리아 왕 인장:Eadmundus Dei gracia Siciliae rex
에드먼드의 인장(앙리 다르부아 드 쥐뱅빌의 19세기 복제본)


1265년 제2차 남작 전쟁에서 패배한 레스터 백작시몽 드 몽포르의 레스터 백작령을 받아 레스터 백작위를 받았다.[47][46] 1267년 6월 30일에는 잉글랜드 북서부 랭커스터 지역에 막대한 영지를 하사받아 랭커스터 백작에 서임되었다.[46]

성지에서 바이바르스의 지도 하에 맘루크는 공국의 마지막 잔재인 안티오크 시를 점령했다.[32] 이 도시의 함락은 잉글랜드의 교황 특사 오토부오노(미래의 교황 아드리아노 5세)가 새로운 십자군을 설교하도록 이끌었다.[33] 1268년 6월 24일, 에드먼드는 형인 에드워드와 사촌 헨리 오브 알메인과 함께 십자군에 참여할 것을 서약했다.[34] 그러나 수년간의 내전 끝에 잉글랜드 왕실은 자금이 고갈되어 십자군을 지원할 수 없었다. 에드워드는 삼촌인 프랑스의 루이 9세 왕에게 돈을 빌려야 했다. 그는 대규모 십자군 병력을 조직하여 튀니스를 침공할 의사를 가지고 있었다. 에드먼드는 십자군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부유한 여인과 결혼하는 데 서둘렀다.

1269년 4월 8일 또는 9일, 에드먼드는 10살의 오말 백작부인 아벨린 드 포르즈와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결혼했다. 그녀가 14살이 될 때까지 결혼을 완성할 수 없었다. 1269년 동안 에드먼드와 그의 형제 에드워드는 십자군을 준비했지만, 1269년 10월 13일 헨리가 교회의 재건을 부분적으로 완료한 후 참회왕 에드워드의 유해를 웨스트민스터 사원으로 옮기는 데 참여했다. 또한 에드먼드는 더비 백작 칭호를 얻었는데, 더비 백작 로버트 드 페러가 자신의 의무를 다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에드먼드는 백작령의 칭호와 영지를 레스터와 랭커스터 백작령과 합병했다.

1270년 여름, 에드먼드와 에드워드는 아버지의 십자군 참여에 대한 우유부단함 때문에 루이와 합류하는 것이 지연되었다. 그의 고문들의 조언에 따라 헨리는 잉글랜드에 머물기로 결정했고, 에드워드는 잉글랜드 십자군의 첫 번째 그룹을 이끌고 그해 8월 20일 도버에서 출항했다. 십자군의 계획은 야영지에 전염병이 발생하여 8월 25일 루이를 죽이면서 실패했다. 에드워드는 1270년 11월 10일 튀니스에 도착했지만, 10월 30일에 서명된 튀니스 조약 때문에 전투에 참여하기에는 너무 늦었다. 결과적으로 대부분의 십자군들이 집으로 돌아갔다.

1271년 2월 25일에서 3월 4일 사이에 에드먼드는 자신의 영지를 어머니 엘레노어에게 맡기고 성지로 떠났다. 에드워드는 이미 십자군을 팔레스타인으로 떠나 안티오크의 보에몽 6세를 지원했고, 1271년 5월 9일 아크레에 도착했다. 1271년 9월, 에드먼드는 그의 형제를 돕기 위해 키프로스의 휴 3세 왕의 지원을 받아 더 많은 군대를 이끌고 도착했다. 카쿤에 대한 습격(십자군은 1,000명의 투르크멘을 죽였다고 한다)과 수많은 가축을 점령한 것과 여러 맘루크의 공격을 격퇴하는 등 몇 가지 성공을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십자군의 제한된 규모로 인해 휴는 에드워드의 불만을 샀지만, 1272년 5월 바이바르스와 10년 휴전을 맺게 되었다. 십자군이 끝나면서 에드먼드는 1272년 12월 6일경 잉글랜드로 돌아왔고, 런던에서 환호하는 군중들의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에드먼드의 십자군은 헛된 것으로 판명되었고 상당한 비용이 발생했다.

역사학자 피터 헤일린과 사이먼 로이드는 에드먼드가 십자군 중에 '크라우치백'이라는 별명을 받았다고 믿고 있으며, 에드먼드가 십자군에 있는 동안 옷 뒤에 십자가를 꿰매었기 때문에 '크로스백'의 변형이라고 주장한다.

4. 프랑스와의 관계 및 말년 (1293–1296)

1293년 5월 15일, 잉글랜드의 친퀘 포트 선원들이 브르타뉴 앞바다에서 노르만 함대를 격파하고 바요네스가 푸아티에의 라 로셸 항구를 약탈하면서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우호 관계는 악화되었다. 에드먼드의 의붓 사위이자 사촌인 필리프 4세((프랑스)왕)는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1세에게 범죄자 인도 및 피해 배상을 요구하며, 가스코뉴 몰수와 영향력 있는 시민들을 투옥하겠다고 위협했다. 1293년 10월 27일, 필리프 4세는 에드워드에게 1294년 1월에 파리에서 혐의에 대한 답변을 하도록 소환했다. 발루아 백작 샤를을 포함한 프랑스인들은 에드워드가 전쟁을 원하며 아키텐 공국을 프랑스에 병합하길 원한다고 믿었다.

필리프 4세((프랑스)왕), 에드먼드의 의붓딸 조안을 통한 의붓 사위이자, 사촌인 필리프 3세((프랑스)왕)의 사촌


에드워드는 전쟁을 원하지 않았고, 에드먼드와 대사들을 파리로 보내 필리프와 협상하게 했다. 1293년 말에서 1294년 초, 에드먼드는 아내 블랑슈와 함께 프랑스로 갔다. 에드먼드는 필리프와의 타협을 성사시키지 못했지만, 필리프의 아내이자 에드먼드의 의붓딸인 나바라의 조안 1세와 사촌인 브라반트의 마리가 중재를 제안했다. 여왕들과 잉글랜드 사절들 간의 사적인 대화는 원만하게 진행되었고, 여왕들은 필리프에게 확신을 주었다.

잉글랜드는 필리프와 비밀 합의를 맺었다. 에드워드의 소환 철회 대가로, 에드워드는 필리프의 이복 여동생 마가렛과 결혼하고, 프랑스는 40일 동안 가스코뉴를 점령하는 것이었다. 에드먼드는 존 세인트 존에게 가스코뉴를 프랑스에 넘겨주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잉글랜드 사절, 블랑슈, 부르고뉴 공작 로베르 2세가 있는 자리에서 필리프가 합의를 지킬 것이라는 확신을 받기 전에는 아니었다. 에드워드는 프랑스의 배신과 마가렛이 그를 남편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프랑스 방문을 취소했다.

40일 후, 에드먼드는 에드워드에게 가스코뉴 반환과 소환 철회를 요청했다. 필리프는 잉글랜드가 가스코뉴를 다시 통제하는 것을 반대하는 의회 구성원들을 거부하고 싶지 않아 공개적으로 부정적인 답변을 할 것이라고 안심시켰다. 잉글랜드는 의회 회의 참석을 거절당했고, 오를레앙과 투르네의 주교들은 프랑스가 가스코뉴를 유지할 것이라고 통보했다. 4월 21일, ''팔르망'' 회의에서 에드워드는 안전 보장 없이 파리에 출두하라는 소환을 받았다. 마이클 프레스위치는 프랑스 여왕들이 에드먼드의 이익을 위해 선의로 행동했을 가능성이 높지만, 그들과 에드먼드는 필리프에 대한 그들의 영향력을 과대평가했다고 믿는다.

에드먼드는 형인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1세의 결정에 따라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에게 한 경의를 철회하고, 아내인 아르투아의 블랑슈와 함께 잉글랜드로 돌아갔다. 1294년, 에드워드 1세는 가스코뉴를 되찾기 위해 에드먼드와 링컨 백작 헨리 드 레이시를 파견했다. 에드먼드는 전쟁을 주장하는 귀족들 중 가장 목소리가 컸다.

1295년 가을, 에드먼드는 헨리 드 레이시 백작, 26명의 기사 깃발수와 1,700명의 무장병을 이끌고 가스코뉴 원정을 시작했다. 생마티외 곶에 상륙한 에드먼드의 군대는 시골을 약탈하고, 생마티외 드 핀테르 수도원을 약탈했지만, 에드먼드는 약탈품을 돌려주라고 명령했다. 이후 블레이와 카스티용라바타유를 거쳐 레스파르메도크 성을 함락하고, 베글에 야영지를 설치하여 보르도를 포위했다.

에드먼드가 포위를 시작했던 1229년의 보르도 지도


1296년 3월 28일, 보르도 수비대의 기습을 격퇴하고, 3월 30일에는 보르도의 외벽을 돌파했지만, 내벽을 뚫을 공성 무기가 없었다. 아르투아 백작 로베르 2세가 랑곤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만나러 갔지만, 찾지 못하고 생마카르 성을 포위했다. 자금 부족으로 보르도로 돌아왔으나, 용병들이 이탈하고 남은 병력과 함께 바욘으로 이동했다.

1296년 5월 13일, 에드먼드는 병에 걸렸고, 1296년 6월 5일바욘에서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장되었다.

4. 1. 프랑스와의 갈등

1293년 5월 15일, 잉글랜드의 친퀘 포트 선원들이 브르타뉴 앞바다에서 노르만 함대를 격파하고 바요네스가 푸아티에의 라 로셸 항구를 약탈하면서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우호 관계는 악화되었다. 에드먼드의 의붓 사위이자 사촌인 필리프 4세((프랑스)왕)는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1세에게 범죄자 인도 및 피해 배상을 요구하며, 가스코뉴 몰수와 영향력 있는 시민들을 투옥하겠다고 위협했다. 1293년 10월 27일, 필리프 4세는 에드워드에게 1294년 1월에 파리에서 혐의에 대한 답변을 하도록 소환했다. 발루아 백작 샤를을 포함한 프랑스인들은 에드워드가 전쟁을 원하며 아키텐 공국을 프랑스에 병합하길 원한다고 믿었다.

에드워드는 전쟁을 원하지 않았고, 에드먼드와 대사들을 파리로 보내 필리프와 협상하게 했다. 1293년 말에서 1294년 초, 에드먼드는 아내 블랑슈와 함께 프랑스로 갔다. 에드먼드는 필리프와의 타협을 성사시키지 못했지만, 필리프의 아내이자 에드먼드의 의붓딸인 나바라의 조안 1세와 사촌인 브라반트의 마리가 중재를 제안했다. 여왕들과 잉글랜드 사절들 간의 사적인 대화는 원만하게 진행되었고, 여왕들은 필리프에게 확신을 주었다.

잉글랜드는 필리프와 비밀 합의를 맺었다. 에드워드의 소환 철회 대가로, 에드워드는 필리프의 이복 여동생 마가렛과 결혼하고, 프랑스는 40일 동안 가스코뉴를 점령하는 것이었다. 에드먼드는 존 세인트 존에게 가스코뉴를 프랑스에 넘겨주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잉글랜드 사절, 블랑슈, 부르고뉴 공작 로베르 2세가 있는 자리에서 필리프가 합의를 지킬 것이라는 확신을 받기 전에는 아니었다. 에드워드는 프랑스의 배신과 마가렛이 그를 남편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프랑스 방문을 취소했다.

40일 후, 에드먼드는 에드워드에게 가스코뉴 반환과 소환 철회를 요청했다. 필리프는 잉글랜드가 가스코뉴를 다시 통제하는 것을 반대하는 의회 구성원들을 거부하고 싶지 않아 공개적으로 부정적인 답변을 할 것이라고 안심시켰다. 잉글랜드는 의회 회의 참석을 거절당했고, 오를레앙과 투르네의 주교들은 프랑스가 가스코뉴를 유지할 것이라고 통보했다. 4월 21일, ''팔르망'' 회의에서 에드워드는 안전 보장 없이 파리에 출두하라는 소환을 받았다. 마이클 프레스위치는 프랑스 여왕들이 에드먼드의 이익을 위해 선의로 행동했을 가능성이 높지만, 그들과 에드먼드는 필리프에 대한 그들의 영향력을 과대평가했다고 믿는다.

4. 2. 가스코뉴 원정과 죽음

에드먼드는 형인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1세의 결정에 따라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에게 한 경의를 철회하고, 아내인 아르투아의 블랑슈와 함께 잉글랜드로 돌아갔다. 1294년, 에드워드 1세는 가스코뉴를 되찾기 위해 에드먼드와 링컨 백작 헨리 드 레이시를 파견했다. 에드먼드는 전쟁을 주장하는 귀족들 중 가장 목소리가 컸다.

1295년 가을, 에드먼드는 헨리 드 레이시 백작, 26명의 기사 깃발수와 1,700명의 무장병을 이끌고 가스코뉴 원정을 시작했다. 생마티외 곶에 상륙한 에드먼드의 군대는 시골을 약탈하고, 생마티외 드 핀테르 수도원을 약탈했지만, 에드먼드는 약탈품을 돌려주라고 명령했다. 이후 블레이와 카스티용라바타유를 거쳐 레스파르메도크 성을 함락하고, 베글에 야영지를 설치하여 보르도를 포위했다.

1296년 3월 28일, 보르도 수비대의 기습을 격퇴하고, 3월 30일에는 보르도의 외벽을 돌파했지만, 내벽을 뚫을 공성 무기가 없었다. 아르투아 백작 로베르 2세가 랑곤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만나러 갔지만, 찾지 못하고 생마카르 성을 포위했다. 자금 부족으로 보르도로 돌아왔으나, 용병들이 이탈하고 남은 병력과 함께 바욘으로 이동했다.

1296년 5월 13일, 에드먼드는 병에 걸렸고, 6월 5일에 바욘에서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장되었다.

5. 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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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대 랭커스터 백작 에드먼드와 랭커스터 가문의 문장

6. 가족 관계

에드먼드는 아벨린 드 포르즈와 1269년에 결혼했지만,[47][46] 자녀를 갖기 전에 사망했다.

1276년, 에드먼드는 아르투아의 블랑슈와 재혼하여 4명의 자녀를 두었다.[47][46] 블랑슈와의 사이에서 낳은 자녀는 다음과 같다.


  • 토마스 (1278년경 출생 – 1322년 3월 22일): 보로브리지 전투를 일으켜 처형당했다.
  • 헨리 (1281년경 출생 – 1345년 9월 22일)
  • 존 (1286년 5월 이전 출생 – 1317년 6월 13일): 초대 보퍼트 남작.
  • 메리: 기록된 날짜는 없으며, 프랑스에서 어린 나이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됨


블랑슈와의 결혼을 통해 에드먼드는 나바라 여왕 조안 1세의 의붓아버지가 되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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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harvnb
[32] harvnb
[33] harvnb
[34] harvnb
[35] harvnb
[36] 서적
[37] 서적
[38] 서적
[39] 서적
[40] 서적
[41] 서적
[42] 서적
[43] 서적
[44] 서적
[45] 웹사이트 Henry III, King of England http://www.thepeerag[...] 2016-04-25
[46] 웹사이트 The Early House of Plantagenet (1154 - 1327) http://www.cracrofts[...] 2016-04-25
[47] 웹사이트 Edmund 'Crouchback' Plantagenet, Earl of Leicester http://www.thepeerag[...] 2016-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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