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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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2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는 1978년 5월 18일에 실시되었으며, 1972년 12월에 선출된 대의원의 임기 만료에 따라 치러졌다. 이 선거는 박정희 대통령을 선출하기 위한 조직의 성격이 강했으며, 반체제 인사들의 보이콧 시도에도 불구하고 정부의 투표 독려로 투표율이 상승했다. 총 5,577명이 입후보하여 2,583명이 선출되었으며, 이후 국민회의는 제9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를 재선하고, 제10대 국회 유신정우회 의원을 선출하는 등 주요 활동을 수행했다. 또한, 최규하와 전두환을 각각 제10대와 제11대 대통령으로 선출하는 데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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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10대 국회의원 선거는 1978년 12월 유신 체제 하에서 중선거구제와 간선제가 병행된 국회의원 선거로, 민주공화당이 의석수에서 제1당이 되었으나 신민당이 득표율에서 앞서 유신 체제에 대한 불만을 드러냈으며, 유신 체제 종말의 전환점이 되었다.
제2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 | |
---|---|
선거 정보 | |
국가 | 대한민국 |
선거명 | 제2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 |
선거일 | 1978년 5월 18일 |
선거전 | 박정희 |
선거후 | 박정희 |
유형 | 의회 |
이전 선거 | 초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 |
이전 선거 연도 | 1972 |
직책 | 대통령 |
투표율 | 78.9% |
선출 의석 | 2,583석 |
정당 1 | 무소속 |
의석 1 | 2,583석 |
2. 제2대 통일주체국민회의 구성
1978년 5월 18일에 실시된 제2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에서는 현직 대의원의 68%가 낙선하고, 전체 의석의 72%가 새로운 인물로 채워졌다. 특히 중소기업 출신 대의원들의 진출이 두드러졌다.[1] 이는 박정희 대통령을 확실하게 선출하기 위한 조직이라는 비판 속에서도, 국민회의 구성에 변화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2. 1. 선거 개요
1978년 5월 18일, 국민회의 대의원의 임기 만료(1972년 12월 선출)에 따라 제2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가 실시되었다. 헌법상으로는 통일에 관한 중요 정책을 결정하는 기관으로 규정되었지만, 대의원의 정당 가입이 금지되고 선거 운동 중 정치 발언이 제한되는 등, 국민회의는 사실상 박정희 대통령을 확실하게 선출하기 위한 조직에 불과했다.[2]윤보선 전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반체제 인사들과 학생들은 대의원 선거 보이콧을 주장했기 때문에, 선거의 주요 관심사는 투표율이었다. 정부는 국민들의 기권 방지를 위해 관헌의 압력 등 여러 수단을 동원했고, 그 결과 78.95%의 투표율을 기록했다.[1]
- '''투표일''': 1978년 5월 18일
- '''입후보자''': 5,577명[1] (332명 무투표 당선)
- '''정원''': 2,583명
- '''선거구''': 1,665선거구 (무투표 선거구 236선거구)
이번 선거의 입후보 경쟁률은 2.16대 1로, 6년 전보다 낮아졌다. 초대 대의원 중에서는 67%만이 재선에 도전했고, 기업인 대의원들은 상당수가 재출마했다.[3] 조중훈 전경련 부회장, 김인득 한국스레트 사장, 구자경 럭키화학 사장, 김종희 한국화약 사장, 남궁련 극동해운 사장, 곽상훈 전 민의원의장, 강대진 영화감독, 김일환 전 교통부 장관, 김한수 한일합섬 사장, 이춘기 전 의원, 기세풍 전 의원, 박영수 전 부산시장, 이창근 전 강원도지사, 이기세 전 충청남도지사, 박윤종 전 광주시장, 김연주 전 남북적십자회담 수석대표, 배우 이대엽, 배우 이수련, 가수 김상규, 아나운서 강영숙 등이 출마하거나 재출마하여 당선되었다. 반면, 신중목 전 농림부 장관, 엄대섭 전 의원, 김윤기 전 건설부 장관 등은 낙선했다.
현직으로 입후보한 1,489명 중 68%가 낙선했으며, 전체 의석의 72%를 신인이 차지했다. 특히 중소기업 출신 대의원들의 진출이 두드러졌다.
2. 2. 선거 결과
지역 | 의석수 | 투표수(율) | 유효 투표수 |
---|---|---|---|
서울 | 391 | 2,754,086 (67.8%) | 2,665,140 (96.8%) |
부산 | 145 | 942,148 (77.1%) | 919,727 (97.6%) |
경기도 | 319 | 1,634,742 (78.2%) | 1,593,630 (97.5%) |
강원도 | 151 | 764,857 (86.9%) | 746,432 (97.6%) |
충청북도 | 131 | 577,877 (87.0%) | 562,148 (97.3%) |
충청남도 | 235 | 1,068,658 (83.4%) | 1,038,174 (97.1%) |
전라북도 | 203 | 905,394 (84.9%) | 876,166 (96.8%) |
전라남도 | 312 | 1,402,831 (81.5%) | 1,356,531 (96.7%) |
경상북도 | 379 | 1,833,990 (84.4%) | 1,790,763 (97.6%) |
경상남도 | 290 | 1,255,860 (83.0%) | 1,223,490 (97.4%) |
제주도 | 27 | 178,633 (86.9%) | 173,977 (97.4%) |
계 | 2,583 | 13,319,076 (78.9%) | 12,946,178 (97.2%) |
입후보 경쟁률은 2.16대 1로 6년 전보다 하락했으며, 초대 대의원 중 67%만이 재선에 도전했다. 다만 기업인 대의원들은 상당수가 재출마했다.[3]
조중훈 전경련 부회장, 김인득 한국스레트 사장, 구자경 럭키화학 사장, 김종희 한국화약 사장, 남궁련 극동해운 사장, 곽상훈 전 민의원의장, 강대진 영화감독, 김일환 전 교통부 장관, 김한수 한일합섬 사장, 이춘기 전 의원, 기세풍 전 의원, 박영수 전 부산시장, 이창근 전 강원도지사, 이기세 전 충청남도지사, 박윤종 전 광주시장, 김연주 전 남북적십자회담 수석대표, 배우 이대엽, 배우 이수련, 가수 김상규, 아나운서 강영숙 등이 출마 혹은 재출마해 당선되었다. 신중목 전 농림부 장관과 엄대섭 전 의원, 김윤기 전 건설부 장관 등은 낙선했다.
2. 3. 당선인
제2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의 입후보 경쟁률은 2.16대 1로 6년 전보다 하락했다. 초대 대의원 중 67%만이 재선에 도전했다. 다만 기업인 대의원들은 상당수가 재출마했다.[3]조중훈 전경련 부회장, 김인득 한국스레트 사장, 구자경 럭키화학 사장, 김종희 한국화약 사장, 남궁련 극동해운 사장, 곽상훈 전 민의원의장, 강대진 영화감독, 김일환 전 교통부 장관, 김한수 한일합섬 사장, 이춘기 전 의원, 기세풍 전 의원, 박영수 전 부산시장, 이창근 전 강원도지사, 이기세 전 충청남도지사, 박윤종 전 광주시장, 김연주 전 남북적십자회담 수석대표, 배우 이대엽, 배우 이수련, 가수 김상규, 아나운서 강영숙 등이 출마 혹은 재출마해 당선되었다.
3. 주요 활동
제2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들의 임기는 1978년 7월 11일에 시작되었으나, 실제 개회 및 취임 선서는 7월 6일에 이루어졌다. 제2대 통일주체국민회의는 다음과 같은 주요 활동을 하였다.
- 제1차 회의 (1978년 7월 6일 ~ 7일): 박정희를 제9대 대통령으로 선출하고, 안보·외교 정세와 통일 정책에 대한 정부 보고를 들었다. 정부의 평화통일 노력을 지지하는 결의문을 채택했다.[4]
- 제2차 회의 (1978년 12월 21일): 제10대 국회 전반기 유신정우회 의원들을 선출했다.[7][8]
- 제3차 회의 (1979년 12월 6일): 10·26 사건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한 후, 최규하를 제10대 대통령으로 선출했다.[9]
- 제4차 회의 (1980년 8월 27일): 최규하 대통령의 하야로 공석이 된 자리에 전두환을 제11대 대통령으로 선출했다.[10]
3. 1. 제1차 회의 (1978년 7월 6일 ~ 7일)
제2대 통일주체국민회의는 1978년 7월 6일과 7일 이틀 간 제1차 회의를 열었다. 첫째 날인 6일에는 개회식과 대통령 선거를 진행하였고, 둘째 날인 7일에는 박동진 외무부 장관과 이용희 통일원 장관으로부터 안보·외교 정세와 통일 정책에 대한 정부 측 보고를 듣고 대의원 49명의 발의로 정부의 평화통일 노력을 지지하고 뒷받침한다는 내용의 결의문을 채택했다.[4]박정희 대통령은 대통령 선거에 앞서 국민회의 운영위원 50명을 지명하였는데, 초대 국민회의에서 운영위원장을 맡았던 곽상훈 대의원은 이번에도 운영위원 및 운영위원장에 임명되었다.[5][6]
3. 1. 1. 제9대 대통령 선거
제2대 통일주체국민회의는 1978년 7월 6일과 7일 이틀 간 제1차 회의를 열고 첫째 날인 6일 개회식과 대통령 선거를 진행하였으며, 둘째 날인 7일에는 박동진 외무부 장관과 이용희 통일원 장관으로부터 안보·외교 정세와 통일 정책에 대한 정부 측 보고를 청취하고 대의원 49명의 발의로 정부의 평화통일 노력을 지지하고 뒷받침한다는 내용의 결의문을 채택했다.[4]대의원 정원 2,583석 중 2석이 공석이 되어 당시 재적 대의원 수는 2,581명이었으며, 당선 요건은 1,291표였다. 대의원 507명의 추천으로 단독 입후보한 박정희 대통령은 2,577표를 득표해 제9대 대통령에 재선되었다.[4]
대통령 선거에 앞서 박정희 대통령은 국민회의 운영위원 50명을 지명하였는데, 초대 국민회의 내내 운영위원장을 맡은 곽상훈 대의원은 이번에도 운영위원 및 운영위원장에 임명되었다.[5][6]
후보 | 표수 | % | 비고 |
---|---|---|---|
박정희 | 2,577 | 99.8 | 당선 |
무효 | 1 | 0.0 | |
기권 | 3 | 0.1 | |
재적 | 2,581 | 100 |
7월 6일부터 시작된 국민회의 제1차 회의에서 대의원에 의한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어, 5일에 후보 등록을 마친 박정희가 압도적인 득표로 제9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항목 | 득표수 |
---|---|
총투표수 | 2,578 |
박정희 | 2,577 |
무효 | 1 |
반대 | 0 |
3. 1. 2. 지역별 결과
지역 | 박정희 | 무효 | 기권 | 재적 |
---|---|---|---|---|
서울 | 389 | 0 | 2 | 391 |
부산 | 145 | 0 | 0 | 145 |
경기 | 319 | 0 | 0 | 319 |
강원 | 151 | 0 | 0 | 151 |
충북 | 131 | 0 | 0 | 131 |
충남 | 234 | 0 | 0 | 234 |
전북 | 203 | 0 | 0 | 203 |
전남 | 312 | 0 | 0 | 312 |
경북 | 377 | 1 | 0 | 378 |
경남 | 289 | 0 | 1 | 290 |
제주 | 27 | 0 | 0 | 27 |
계 | 2,577 | 1 | 3 | 2,581 |
3. 2. 제2차 회의 (1978년 12월 21일)
1978년 12월 21일, 통일주체국민회의는 제10대 국회 전반기 유신정우회 의원들을 선출하였다. 2,581명 중 2,573명의 대의원이 출석하였고, 통과에 필요한 득표수는 출석 대의원의 과반인 1,287표였다. 서울에서 남궁연, 조덕현 등 2명, 전북에서 소계영, 강덕원 등 2명, 경북에서 김용환, 박용돌, 강영진 등 3명, 경남의 황상두 등 총 8명의 대의원이 불참했다.[7][8]찬성 | 반대 | 무효 | 투표수 | 불참 | 재적 대의원수 | |
---|---|---|---|---|---|---|
서울 | 376 | 9 | 4 | 389 | 2 | 391 |
부산 | 143 | 1 | 1 | 145 | 0 | 145 |
경기 | 319 | 0 | 0 | 319 | 0 | 319 |
강원 | 149 | 2 | 0 | 151 | 0 | 151 |
충북 | 130 | 1 | 0 | 131 | 0 | 131 |
충남 | 229 | 4 | 1 | 234 | 0 | 234 |
전북 | 200 | 1 | 0 | 201 | 2 | 203 |
전남 | 310 | 1 | 1 | 312 | 0 | 312 |
경북 | 373 | 2 | 1 | 376 | 3 | 379 |
경남 | 284 | 2 | 2 | 288 | 1 | 289 |
제주 | 26 | 0 | 1 | 27 | 0 | 27 |
합계 | 2,539 | 23 | 11 | 2,573 | 8 | 2,581 |
대한민국 제10대 총선 이후인 1978년 12월 20일, 박정희 대통령은 국민회의 의장 자격으로 제3기 국회의원 후보 77명을 추천하여 국민회의 사무국에 등록시켰다. 이에 따라 국민회의는 12월 21일 시·도별 회의를 개최하고, 유신정우회 제3기 국회의원 77명에 대한 일괄 투표를 실시하여 전원 선출하였다.
항목 | 표수 |
---|---|
투표 참가자 | 2,573 |
찬성 | 2,539 |
반대 | 23 |
무효 | 11 |
지지율 | 98.6% |
3. 3. 제3차 회의 (1979년 12월 6일)
최규하 국무총리 및 대통령 권한대행이 대의원 827인의 추천을 받아 단독으로 입후보하였다. 당시 재적 대의원은 2,560명이었으며, 당선 요건은 1,281표였다.[9]후보 | 표수 | % | 비고 |
---|---|---|---|
최규하 | 2,465 | 96.3 | 당선 |
무효 | 84 | 3.3 | |
기권 | 11 | 0.4 | |
재적 | 2,560 | 100 |
3. 4. 제4차 회의 (1980년 8월 27일)
최규하 대통령의 하야로 궐위된 제10대 대통령의 잔여 임기를 채우기 위한 대통령 보궐 선거가 1980년 8월 27일 실시되었다. 후보로는 대의원 737인의 추천을 받은 전두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장이 단독으로 입후보하였다. 당시 재적 대의원 수는 2,540명으로, 당선 요건은 1,271표였다.[10]후보 | 표수 | % | 비고 |
---|---|---|---|
전두환 | 2,524 | 99.4 | 당선 |
무효 | 1 | 0.0 | |
기권 | 15 | 0.6 | |
재적 | 2,540 | 100 |
참조
[1]
뉴스
「統代」選挙投票 全国一斉に進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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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亜日報
1978-05-18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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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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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19
[8]
뉴스
중앙일보
https://www.joongang[...]
2018-10-09
[9]
뉴스
10대대통령에 최규하후보 당선{{!}}통일주체국민회의서
https://www.joongang[...]
2018-10-10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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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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