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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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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곽상훈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제헌 국회의원, 국회 부의장, 국회의장 등을 역임한 정치인이다. 1896년 부산에서 태어나 3.1 운동에 참여하고, 상하이 등에서 항일 운동을 했다. 광복 후 한국민주당을 거쳐 제헌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며, 반민족행위자처벌법 제정 과정에서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제2대 국회에서 국회 전원위원장, 제3대 국회에서 부의장을 지냈으며, 4.19 혁명 이후 개헌 국회 의장과 대통령 권한대행을 역임했다. 5.16 군사정변 이후 정계에서 물러났으며, 말년에는 친정부적인 행보를 보였다. 1980년 사망하여 사회장으로 장례가 치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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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상훈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곽상훈
이름곽상훈
한자 표기郭尙勳
출생일1896년 10월 21일
출생지조선 경상남도 동래군
사망일1980년 1월 19일
사망지서울특별시
본관현풍(玄風)
배우자장혜경(張慧卿)
자녀장남 곽헌태(郭憲泰)
차남 곽원배(郭源培)
삼남 곽성태(郭盛泰)
사남 곽용태(郭容泰)
종교유교(성리학) → 개신교
학력
학력경성고등공업학교 중퇴
정치 경력
소속 정당무소속
의원 선수5
의원 대수1·2·3·4·5
주요 경력민주당 대표최고위원 겸 당무위원
대한민국 국회의장
대한민국 국회 민의원 의장
대한민국 대통령 권한대행
국회 의장
직책국회의장
임기 시작1960년 5월 2일
임기 종료1961년 5월 16일
전임자이기붕
후임자'직책 폐지'
대통령 권한대행
직책대통령 권한대행
임기 시작1960년 6월 16일
임기 종료1960년 6월 23일
전임자허정
후임자허정

2. 생애

곽상훈은 1896년 10월 21일 경상남도 동래군(현 부산광역시 동래구)에서 군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는 여주군에서 중령을 지냈고, 중군(中軍)과 중군영(中軍營)의 수장을 역임했다.[4]

동래사립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성고등공업전문학교를 중퇴했다. 3·1 운동의 일부인 동래기장독립운동에 참여했다가 8개월간 투옥되었다. 이후 중국으로 건너가 상해한인청년동맹 간부, 신간회 중앙간부 등으로 활동했다. 관동대지진 당시에는 조선인 희생자 명부를 입수하여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사건의 기록을 수집했다.[5][7] 광복 직전 일본의 예방검속에 걸려 대구경찰서 유치장에서 광복을 맞았다.

해방 후 한국민주당 결성에 참여했지만, 1948년 제1대 총선 공천에서 탈락하자 탈당, 무소속으로 인천시 선거구에 출마해 당선된 후 5선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1949년 반민족행위처벌법에 따라 설치된 반민특위 검찰차장을 역임했다. 1950년 제2대 국회 전원위원장을 지냈으나, 1952년 대통령 선거를 전후하여 친이승만에서 반독재·반이승만으로 전향, 부산정치파동에서 122명의 국회의원들과 연서로 책임내각제 개헌안을 제출했다.[8] 1954년 제3대 국회 부의장, 1955년 민주당 최고위원을 역임했다.

1960년 4·19 혁명으로 이승만이 하야하고 자유당이 다수를 차지하는 국회가 기능 불능에 빠지자 보궐선거에서 개헌 국회의장으로 선출되었다. 6월 16일 허정 과도정부가 들어섰지만, 법률에 따라 6월 22일까지 1주일 동안 대통령 권한대행을 역임했다. 같은 해 7월 제5대 총선에서 재선되어 민의원 의장을 지냈고, 민주당 신구파의 정쟁에서는 신파의 장면을 지지했다. 국회의장으로서 해외 방문 중 5·16 군사 쿠데타가 발생하여 국회가 해산되자 귀국 후 곧바로 민주당을 탈당하고 정계에서 은퇴했다.

이후 박정희에 대한 접근이 두드러졌고, 1969년 통일원 고문, 육영재단 이사장, 1971년 한국장학재단 이사장, 1973년 유신헌법 발족과 함께 통일주체국민회의에 들어가 통일주체국민회의 운영위원장을 역임했다.[5][7]

그 외에도 인천사회사업협회 회장, 인천체육회 회장, 조선청년단 경기도연합회 위원장, 탄핵재판소 심판관, 대한민국헌정회 초대 회장을 역임했다. 1980년 1월 서울특별시 자택에서 85세로 사망했다.[5][7]

2. 1. 초기 생애 및 학창 시절

곽상훈은 1896년 10월 21일 경상남도 동래군(현 부산광역시 동래구) 금정산 근처에서 무관 가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는 무관으로 여주군수와 오위장을 지냈고, 마을에서는 중군(中軍)영감, 중군댁으로 불렸다.

1910년 10월 조부가 한일 합방 조서가 붙은 것을 보고 통곡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고 반일감정을 키워갔다. 이후 그의 조부는 홧병으로 얼마 뒤 세상을 떠났다. 오위장과 여주군수를 지낸 그의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그의 아버지는 당시 군청으로 사용했던 건물을 뜯어다 인천으로 가져와 상공회의소의 전신인 근업소를 지을 만큼 위세가 컸다.[10]

1910년 동래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다가 2학년 때 동명학교(東明學敎)로 전학했다. 신설된 동명학교는 학생 수가 17명이었다. 재학 중 동명학교가 동래사립고등보통학교(동래고등학교의 전신)로 승격되자 동래사립고보 제1회 입학생 중 한 명이 되었고, 학창시절의 곽상훈은 독서를 즐겨했고, 글을 잘 지었다.

1917년 동래사립고등보통학교를 수료하고 그해 경성으로 유학, 경성의 경성고등공업학교에 입학하였다. 경성공업학교(서울공업고등학교의 전신)를 다니면서 경기도 인천부로 이주했다.[10] 그 뒤 미곡상을 하던 형 밑에서 자랐다.

2. 2. 독립운동

1919년 3·1 운동에 참가하였다.[12] 경성고등공업전문학교 재학 중[11] 탑골 공원에서 만세 시위에 참여했던 그는 인천으로 내려가 형을 보고, 다시 동래로 내려갔다. 소년기의 그는 평소 성격이 활달하고 도전적이었다는 평가가 있다. 그는 '경인기차통핵생 친목회'를 주도했으며, 인천과 부산에서 학생만세운동을 조종했다.[10]

3·1만세운동이 전개되자 곽상훈은 독립선언서를 품고 고향인 경상남도 부산으로 내려와, 동래읍 장날인 3월 13일 만세운동을 조종한다.[10] 독립선언서의 양이 많아 일부 독립 선언문은 노끈으로 만들어 축구화 끈으로 묶어 운동선수처럼 가장하고 내려갔다. 동래고등보통학교 재학 당시의 수학 선생인 이환을 찾아가 그의 집에 은신하며 3주일간 밤새워 독립 선언서를 복사기로 여러 장 등사하였다.

그는 이환과 함께 등사한 독립 선언서를 살포하였고, 3월 하순 경남 부산과 마산에서 기독교조직들을 통해 독립선언서가 전달되자 학생대표 자격으로 부산상업학교와 동래고등보통학교 학생들에게 궐기에 참여해줄 것을 당부하였다.[13] 그러나 일본 경찰에 체포돼 수감, 8개월간 미결수로 옥고를 치렀다.[10] 동래경찰서에 수감되었다가 다시 대구서, 영등포 경찰서로 이감되었다가 미결수로 경성지검과 종로경찰서로 이송되었으며, 일본경찰은 연루자를 불라고 고문을 가하였으나 그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의 수감을 듣고 달려온 일본인 수원고농 도미나가 학교장 선생의 보증으로 풀려났다.[10] 이후에도 경인기차통학생 모임을 중심으로 일본인 학생과의 싸움을 주동하다 고향인 동래지역으로 주거제한 조치를 받기도 했다.[10] 이후 그는 요시찰 인물로 분류되어 미성년자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뒤에는 형사가 항상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3.1 운동 이후 여행과 활동 시 일본 경찰의 동행으로 활동의 제한을 받아오다가 겨우 경성고등공업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졸업 후 불우한 나날을 보내다가 교육청 장학사로 있던 유진태의 주선으로 안동 오산학교의 교사로 임용, 교사로 교편을 잡으면서 급사 대신 학교의 행정 서무일도 맡게 되었다. 교사 재직 중에도 조선총독부 경찰국에서는 사람을 보내 그의 동태를 미행했는데, 한번은 그의 하숙방에 몰래 들어와 있던 총독부 경찰국 형사 김태규를 가장한 지인 김영주의 설득으로 일본 유학을 결심하였다.

신간회가 결성되자 1920년 신간회에 가입하여 중앙간부로도 활약하였다.[14] 이후 신간회 검찰위원을 지냈다.[12] 1920년 6월 16일 경성부 명월관에서 열린 조선체육회발기인회에 발기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15] 1920년 8월 한용단 단장으로 활동하며 이우구락부와 공동으로 열린 음악회를 후원하였다.[16] 1921년 원산의 부두노동자들이 원산총파업을 강행하자 신간회 인천지부에서 활동하며 국민들을 상대로 원산의 인부모집에 응하지 말라며 설득, 호소하였다.[17]

1923년 도쿄로 건너가 세이소쿠 영어학교에 입학, 세이소쿠영어학교 재학 중 9월 1일 동경 대지진을 만났으나 목숨을 건졌다. 그러나 동경 대지진이 조선인들의 음모라는 낭설이 퍼지면서 조선인들은 처형당하거나 구제받지 못했고, 그는 1년만에 자퇴하고 다시 귀국했다. 부산에서 김영주와 헤어진 뒤 다시 안동 오산학교를 찾아가 이사장 유인원이 그를 받아주어 다시 교사 생활을 하였다. 이후 동경 대지진 당시 조선인들의 참상을 호소하는 호소문을 작성, 대구 오산학교 명의로 등사판을 주문하여 자신의 집에서 동경대지진 참상을 호소하는 격문을 인쇄하여 배포하다가 대구 경찰서 형사에게 체포되었다. 가택 압수수색 후 베이징에서 김영주가 보낸 편지가 발견, '베이징의 일은 다 끝나가니 바로 오라'는 김영주의 편지가 화근이 되어 의열단원으로 몰려 고문당하였다. 대구형무소 7개월 수감 후 시말서를 내고 석방되었다.

1924년 일본 관동대지진 당시, 일본인에 의해 희생된 한국인 희생자 명단을 입수하고 한국인 학살사건의 진상기록을 수집, 보존하는 활동을 하였다.[10] 1925년 '이우구락부'를 조직, 결성하여 하상훈, 서병훈, 이범진, 최선경 등과 항일운동을 전개하다 조선총독부 경찰의 추적을 받고 중국으로 망명, 상하이로 건너가 '상해한국인청년동맹'의 간부로 활동했다.

1925년 중국의 상하이 한인 교포들을 통해 동경대지진 당시 조선인이 대량학살당한 소식을 전달하고, 같은 해 8월 동경대지진 조선인학살자 2주기 추도식을 주관했다. 1927년 6월 6일 계급과 파벌을 타파하고 전인천적 집단체로 인천의 유지들이 창립한 신정회 창립에 참여, 신정회의 창립멤버가 되었다.[16]

1928년 만보산사건이 터지자 재만동포보호연맹 인천특파원으로 활약했으며, 한 때 언론인으로도 활동하여 동아일보 인천지국장을 맡기도 했다.[10] 1929년 9월 17일 신간회 경기도 수원지부 회원후보로 선출되었다.[18]

2. 3. 광복 이후 정치 활동

1945년 10월 하상훈, 이범진, 전두영(全斗榮) 등과 함께 한국민주당 인천지부에 가입하였다.[16]

1948년 5월 10일 제헌국회의원 선거한민당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공천 탈락에 불만을 품고 탈당, 무소속으로 출마해 인천지역 청년모임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당선되었다.[10] 1948년 5월 제헌국회에서 헌법기초위원을 선출할 때 한민당에서 무기명투표방식을 주장하며 다수득표자 순으로 선출하자고 제안하자, 당파나 정당 단체의 성질을 떠나야 하며 어떤 정당이나 단체가 암암리에 모략으로 의원을 선출하려 한다며 이의를 제기하기도 했다.[24]

제헌의회 등원 이후 1949년 반민족행위처벌법 제정과정에서는 소극적이었으며 친일파 처벌 완화와 특별검찰부 설립을 반대하였다.[25] 반민특위가 설치되자 반민특위 위원이 되었으며, 곧 반민특위 검찰차장에 선출되어 활동했으나, 반민특위가 강제로 해산당하면서 실패하였다.

반민특위 활동 당시 신익희, 이청천, 유진산, 이철승 등과 함께 백민태 등의 암살표적으로 선정되기도 했다.[26] 반민특위가 와해되자 국회에 나가 공소시효를 중단해도 좋다고 발언하였는데,[27] 이 발언에 대해 반민특위 간부들과 상의 없이 독자적으로 발표했다 하여 일부로부터 반역자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27]

1950년 5월 제2대 총선때 인천을 지역구에서 출마해 제2대 민의원에 당선돼 국회 전원위원장을 지냈다. 한국 전쟁이 터지자 정부를 따라 대전과 부산으로 피난갔다가, 휴전 이후 서울로 귀경하였다.

1952년 4월 17일 대통령에게 국회해산권을, 국회에는 내각불신임 권한을 주는 개헌안을 제출했다.[28]

1952년 내각책임제 개헌에도 참여하였다. 장건상, 김동성, 오위영 등 자유당원 48명, 민국당의 신익희, 소선규, 지청천 등 39명, 민우회의 윤길중, 권중돈, 김의준 등 21명, 무소속의 박순천, 서민호 등 15명과 함께 내각제 개헌에 찬성표를 던졌다.[29] 1952년 4월 17일 국회에 제출된 내각제 개헌안은 '곽상훈 외 123명'의 명의로 제출되었다.[29]

대통령 간선제 개헌안에 분노한 이승만 정권은 5월 25일 부산 시내 전역에 계엄령을 내리고 출근 중인 국회 버스를 강제로 연행했다. 이때 서민호, 정헌주, 임흥순, 이석기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30] 자유당 정권은 체포된 국회의원들이 국제공산당의 정치 자금을 받았다고 발표하였으나, 국민들은 그들이 국제공산당의 자금을 받았는가에 의문을 표시하였고[30] 그는 곧 석방될 수 있었다. 1954년 제3대 민의원에 당선되고, 민의원 부의장으로 선출됐다.

2. 4. 제2공화국과 5.16 군사정변

1960년 윤보선 등과 함께 김구 선생 기념비 제막식에 참석하였다. 그해 5월 30일, 국회는 전날 이승만을 비밀리에 망명시킨 대통령 권한대행 겸 내각수반 허정(許政)을 소환하여 이승만 망명의 책임을 추궁했다. 곽상훈은 민의원 의장 자격으로 임석하였다.

허정이 설명을 마치고 하단하자 곽상훈 의장과 그 밖의 많은 간부들은 '영감 잘 내보냈소.'라며 오히려 허정을 격려해 주었다.[40] 이후 이승만의 하와이 행은 논란이 되었고, 부정선거의 책임자라는 민주당 신파 일부의 주장과 함께 음모를 꾸며서 이승만 박사를 축출했다는 윤치영, 장택상 등의 비난 등 양면 공격에 시달리는 허정을 변호해주고 감싸주었다.

장면 총리 인준 직후 곽상훈 민의원 의장, 장면 국무총리, 윤보선 대통령


1960년 7월 7.29 총선거에서 곽상훈은 전라북도 김제군갑구에 출마한 조한백을 지원하는 연설을 했다. 이때 곽상훈은 상대방 후보인 정화암을 사상으로 공격하였다. "정화암은 무정부주의자입니다. 공산주의의 사촌쯤인 무정부주의자에게 이 나라 정치를 어떻게 맡기겠습니까" 라고 비판했다.[41] 그러자 정화암은 '나는 곽상훈 씨를 위대한 정치가인 줄로 여겨왔다. 그런데 그 위대한 정치가가 무정부주의는 공산주의의 사촌쯤 된다고 말했다니 그동안의 이 나라의 정치 작태를 가히 짐작할 만하다. 무정부주의와 공산주의도 구별 못하는 사람이 위대한 정치가로 대접받아 왔으니 참으로 한심하다. 그런 소리는 이불 속에서 자기 마누라하고나 하시오. 유권자 앞에서 그런 소리를 하면 곽상훈이라도 꽤 무식한 사람이구나 하는 말을 들을 뿐입니다.'라고 반박하였다.[41]

곽상훈(왼쪽에서 첫 번째), 백낙준, 윤보선, 장면과 함께(1960년 8월)


7월 29일 옹진군 유세 때 군용기를 동원하고 전투기의 호위를 받았는데, 이때 장면이 금천역에서 무허가 강연을 하면서 열차를 지연시켰던 일과 함께 관권선거로 비판을 받기도 했다.[42] 9월 보도연맹원 희생자의 유족 송모 씨 등이 찾아와 피해 사실에 대한 청원서를 제출하자, 그들과 장면 총리와의 만남을 주선해주기도 했다.[43]

1960년 8월 당시 국회 민의원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1961년 3월 29일 국무총리 장면강원도 원주-춘천간 도로포장 기공식에 참석하였다.

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국회의원직을 사퇴하고 물러났다. 한편 그는 장면 내각의 우유부단함을 질타하여 야당 인사들을 경악케 하기도 했다. 이후 민주당을 탈당하였으며, 1963년 민주당 재건 때 불참하였다. 한때 군사정변 세력과의 내통을 의심받았으나 그는 군사정권에도 참여하지 않았고, 박정희가 주는 어떠한 명예직에도 취임하지 않았다.

2. 5. 박정희 정권과의 관계 및 사망

1960년 4·19 혁명 이후 자유당 관련자 처벌에 대해 정치 보복의 악순환에 반대했다. 송건호박정희에게 협력한 것을 비판했다.[44]

1966년 12월 19일 매헌 윤봉길 기념사업회 회장에 선출되었고,[45] 1967년 12월 다시 윤봉길기념사업회 회장에 유임되었다. 1972년 제4공화국 출범과 함께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으로 당선, 1·2대 통일주체국민회의 운영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했다.[12] 이 일로 야당 동지들의 규탄을 받기도 했다. 1973년 12월 15일 윤봉길을 추모하는 매헌장학재단이 설립되자 회장에 선출되었다.[45] 송건호는 곽상훈과 박순천의 협력을 변절이라며 비판하였다.

1979년 정계를 은퇴하였다. 1979년 10·26 사태 이후 통일주체국민회의 운영위원장 재직 당시인 1980년 1월 19일 서울특별시 도봉구 우이동 자택에서 노환으로 별세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장례를 사회장으로 치렀고, 서울특별시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치되었다.[9] 1969년에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

말년에 박정희 정권에 협력한 점 때문에 야당 인사들로부터도 평가받지 못하고 잊혀졌다.

3. 평가

5·16 군사 정변 이후 곽상훈이 군정에 참여한 것을 두고 변절했다는 비판이 있었다. 그러나 강준만 전북대학교 신방학과 교수는 곽상훈이 5·16 군사 정변 직후 관직을 추구하지 않았고, 박정희에게 민주당 신파 인사들을 채용할 것을 권고했다는 점에서 변절자로 보기 어렵다는 반론을 제기했다.[47]

3. 1. 긍정적 평가

5·16 군사 정변 이후 곽상훈이 군정에 참여한 것을 두고 변절했다는 비판이 있었다. 그러나 강준만 전북대학교 신방학과 교수는 곽상훈이 5·16 군사 정변 직후 관직을 추구하지 않았고, 박정희에게 민주당 신파 인사들을 채용할 것을 권고했다는 점에서 변절자로 보기 어렵다는 반론을 제기했다.[47]

3. 2. 부정적 평가

5·16 군사 정변 이후 군정에 참여하였다 하여 민주당 신파 지도자였던 곽상훈은 변절자라는 비판을 받았다.[47] 송건호박순천과 곽상훈을 박정희 정권 말기에 변절했다고 비판했다.[47] 그러나 강준만 전북대학교 신방학과 교수는 곽상훈이 5·16 군사 정변 직후 관직을 추구하지 않았고, 박정희에게 민주당 신파 인사들을 채용할 것을 권고했다는 점에서 변절자로 보기 어렵다는 반론을 제기했다.[47]

4. 상훈

1969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훈하였다.

5. 가족 관계

관계이름
부인장혜경(張慧卿)
아들곽헌태(郭憲泰)
아들곽원배(郭源培)[10]
아들곽성태(郭盛泰)[9]
아들곽용태(郭容泰)


6. 곽상훈을 연기한 배우

참조

[1] 웹사이트 Republic of Korea (South Korea) https://www.worldsta[...] 2022-03-13
[2] 웹사이트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https://newslibrary.[...] 2022-03-13
[3] 서적 The Story of Korean History 20: We will find the country with our own strength
[4] 웹사이트 인천인물 100人·7] 근·현대정치사 중심 삼연 곽상훈 http://www.kyeongin.[...] 2022-03-13
[5] 웹사이트 대한민국헌정회 https://rokps.or.kr/[...] 2022-09-08
[6] 웹사이트 현풍 곽씨 집성촌 https://www.joongang[...] 1982-05-08
[7] 웹사이트 곽상훈(郭尙勳) http://encykorea.aks[...] 2022-09-08
[8] 웹사이트 부산정치파동(釜山政治波動) http://encykorea.aks[...] 2022-09-08
[9] 뉴스 統代運營委長 郭尙勳씨 별세 http://dna.naver.com[...] 동아일보 1980-01-21
[10] 웹사이트 ▒ 경인일보 창간 50주년 '도약! 2010' ▒ http://www.kyeongin.[...]
[11] 웹사이트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시스템 -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people.aks.ac[...]
[12] 웹사이트 곽상훈 - Daum 백과사전 http://enc.daum.net/[...]
[13] 서적 한국사 이야기 20:우리 힘으로 나라를 찾겠다 한길사
[14] 웹사이트 http://news.itimes.c[...]
[15] 서적 한국체육사연구 국학자료원
[16] 뉴스 국악동호인회를 조직했던 서병훈 http://www.kihoilbo.[...] 기호일보 2008-11-16
[17] 서적 한국사 이야기 21:해방 그날이 오면 한길사
[18] 서적 일제하 수원지역의 민족운동 국학자료원
[19] 서적 한국민족운동과 종교활동 국학자료원
[20] 서적 일석 이희승 전집 7 서울대학교출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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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서적 혁명가들의 항일 회상 민음사 2007
[42] 서적 4.19와 남북관계 민연 2008
[43] 서적 끝나지 않은 전쟁 국민보도연맹 역사비평사 2006
[44] 서적 학문의 길 인생의 길 역사비평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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