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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롱스트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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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임스 롱스트리트는 남북전쟁 당시 남부 연합의 장군으로, 어린 시절 미국 육군사관학교에서 수학했으며, 미-멕시코 전쟁에도 참전했다. 남북전쟁 초기에는 여러 전투에서 활약했으며, 특히 반도 작전, 제2차 불런 전투, 메릴랜드 전역, 프레데릭스버그 전투 등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게티스버그 전투에서 리 장군과의 전략적 이견으로 인해 논란의 중심에 섰으며, 이후 서부 전선, 녹스빌 작전을 거쳐 전쟁 말기까지 활동했다. 전후에는 공화당에 가입하고 여러 공직을 역임했지만, 남부 출신이라는 이유로 비난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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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롱스트리트
기본 정보
회색 남부 연합 군복을 입고 턱수염을 기른 롱스트리트의 초상 사진
제임스 롱스트리트
출생일1821년 1월 8일
출생지사우스캐롤라이나주 에지필드군
사망일1904년 1월 2일
사망지조지아주 게인즈빌
안장 장소게인즈빌 알타 비스타 묘지
별명올드 피트
서명James Longstreet signature.svg
정치
소속 정당공화당
미국 특명전권공사오스만 제국 주재 미국 공사
대통령러더퍼드 B. 헤이스, 제임스 A. 가필드
임기 시작1880년 12월 14일
임기 종료1881년 4월 29일
이전호레이스 메이나드
이후루 월리스
군사 복무
충성미국
남부 연합
군종미국 육군 (USA)
남부 연합군 (CSA)
루이지애나 주 방위군
복무 기간1842–1861 (미국)
1861–1865 (남부 연합)
최종 계급소령 (미국)
중장 (남부 연합)
소장 (루이지애나 주 방위군)
부대제4 미국 보병연대
제8 미국 보병연대
지휘롱스트리트 여단
롱스트리트 사단
북버지니아군 제1군단
동테네시 방면군
주요 참전 전투미국-멕시코 전쟁
팔로알토 전투
레사카 데 라 팔마 전투
몬테레이 전투
추루부스코 전투
몰리노 델 레이 전투
차풀테펙 전투
미국 남북 전쟁
블랙번스 포드 전투
제1차 불런 전투
윌리엄스버그 전투
세븐파인스 전투
7일 전투
게인즈 밀 전투
글렌데일 전투
말번 힐 전투
제1차 래퍼해녹 스테이션 전투
제2차 불런 전투
소로페어 갭 전투
앤티텀 전투
프레더릭스버그 전투
서퍽 포위전
게티즈버그 전투
치카모가 전투
채터누가 전역
녹스빌 전역
캠벨 스테이션 전투
포트 샌더스 전투
빈스 스테이션 전투
황무지 전투
피터즈버그 포위전
애퍼매톡스 전역
세일러스 크릭 전투
애퍼매톡스 코트하우스 전투
자유의 광장 전투
개인 정보
배우자마리아 루이자 갈런드 (1848년 결혼, 1889년 사망)
헬렌 도치 롱스트리트 (1897년 결혼)
자녀10명
기타 이력
직업뉴올리언스 세관 감독관
오스만 제국 주재 미국 대사
철도청장
연방 보안관
종교로마 가톨릭교회
학력
모교미국 육군사관학교 (이학사)

2. 어린 시절

롱스트리트는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에지필드 카운티에서 제임스 롱스트리트와 메리 앤 롱스트리트 부부의 다섯 아이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뉴저지주, 어머니는 메릴랜드주 출신으로, 조지아주 북동부 게인즈빌 근처에서 면화 플렌테이션을 운영했다. 롱스트리트의 조상은 1657년 네덜란드 식민지 뉴네덜란드로 이주한 Dirck Stoffels Langestraet였으나, 세대를 거치면서 성을 영어식으로 바꾸었다.[83] 아버지 제임스는 아들의 "굳건한" 성격에 주목하여 성 베드로에서 따온 피터(Peter)라는 별명을 지어주었고, 이후 롱스트리트는 피터 혹은 올드 피터라고 불렸다.[84]

아버지 제임스는 아들에게 군 경력을 쌓게 해주고 싶었지만, 농장에서 받는 교육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느꼈다. 9살 때 롱스트리트는 오거스타에 사는 숙부 오거스터스 볼드윈 롱스트리트에게 보내졌다. 숙부는 신문 편집자, 교육자, 감리교 목사였다. 롱스트리트는 오거스타 교외에 있는 숙부의 농장 웨스트 오버에서 8년간 지내며 리치먼드군 부문 학교에 다녔다. 1833년 아버지 제임스가 오거스타를 방문했다가 콜레라로 사망했지만, 롱스트리트는 숙부 곁에 남았다.[85]

1837년 숙부 오거스터스는 롱스트리트를 미합중국 육군사관학교에 보내려 했으나 실패했고, 1838년 앨라배마 주의 친척 루벤 처먼의 도움으로 입학 허가를 받았다. 롱스트리트는 웨스트포인트에서 학업 성적이 좋지 않았고 규율 문제도 있었지만, 1842년 졸업 당시 56명의 사관후보생 중 54등으로 졸업했다. 그러나 동급생들 사이에서는 인기가 많았다.[86]

롱스트리트는 처음 2년간 미주리주 제퍼슨 막사에서 근무했고, 이곳에서 그랜트 중위를 만났다. 롱스트리트는 그랜트에게 먼 친척인 줄리아 덴트를 소개했고, 두 사람은 훗날 결혼했다. 그 직후 롱스트리트는 마리아 루이자 갈랜드(Maria Louisa Garland)를 만났는데, 그녀는 롱스트리트 소속 연대 지휘관 존 갈랜드 중령의 딸이었다. 롱스트리트와 마리아는 미국-멕시코 전쟁 이후 1848년에 결혼했다. 두 사람은 40년간 결혼 생활을 유지하며 10명의 아이를 두었으나, 롱스트리트의 회고록에는 마리아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고,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한 일화는 두 번째 부인이 쓴 책을 통해 알려졌다.[87]

2. 1. 출생과 가계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에지필드에서 제임스 롱스트리트와 메리 앤 롱스트리트 사이의 다섯 아이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제임스는 뉴저지주 출신, 어머니는 메릴랜드주 출신으로, 조지아주 북동부 게인즈빌 근처에 목화 농장을 소유했다. 롱스트리트의 조상은 1657년 네덜란드 식민지 뉴네덜란트로 이주한 데르크 스토펠스 랑게스트라테였으나, 세대를 거치면서 성을 영어식 발음으로 바꾸었다.[25]

아버지 제임스는 농장에서 자란 아들 제임스의 "굳건한" 성격에 주목하여, 그에게 피터(성 베드로)라는 별명을 지어 주었고, 이후 그는 피트 또는 올드 피트로 불렸다.[26]

아버지 제임스는 아들에게 군대 경험을 쌓게 하려 했지만, 농촌에서 받는 교육으로는 충분한 준비가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9살이 된 제임스는 오거스타에 있는 삼촌 부부에게 보내졌다. 삼촌 오거스터스 볼드윈 롱스트리트는 신문 편집자, 교육자, 감리교 목사였다. 제임스는 오거스타 외곽에 있는 삼촌의 농장 웨스트오버에서 8년을 보내며 리치먼드군 전문학교에 다녔다. 1833년 아버지 제임스는 오거스타를 방문하던 중 콜레라로 사망했다. 어머니와 가족은 앨라배마주 서머빌로 이주했지만, 제임스는 삼촌 오거스터스 곁에 남았다.[27]

1837년, 오거스터스는 롱스트리트를 미합중국 육군사관학교에 보내려 했으나, 하원 선거구에 빈자리가 없었다. 1838년, 어머니 메리가 살던 앨라배마주 제1선거구를 대표하는 친척 루벤 채프먼의 도움으로 입학했다. 롱스트리트는 웨스트포인트에서 학업 성적이 좋지 않았고 규율 문제도 있어, 1842년 졸업 당시 56명의 사관후보생 중 54등이었다. 하지만 동기들 사이에서는 인기가 많았고, 조지 헨리 토마스, 윌리엄 로즈크랜스, 존 팝, D. H. 힐, 라파예트 맥로스, 조지 피켓, 존 벨 후드 등 남북전쟁에서 이름을 날린 많은 사람들과 친분을 쌓았다. 1년 후배인 율리시스 그랜트와도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 롱스트리트는 미국 육군 제4보병대 명예 소위로 임명되었다.[28]

롱스트리트는 처음 2년 동안 미주리주 제퍼슨 막사에서 근무했고, 이후 그랜트 중위가 합류했다. 롱스트리트는 그랜트에게 먼 친척인 줄리아 덴트를 소개했고, 두 사람은 결혼했다. 그 직후, 롱스트리트는 마리아 루이자 걸랜드를 만났다. 마리아는 롱스트리트 소속 연대 지휘관 존 걸랜드 중령의 딸이었다. 롱스트리트와 마리아는 미멕시코 전쟁 이후 1848년에 결혼했다.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은 40년 동안 지속되었고, 10명의 자녀를 두었지만, 롱스트리트의 회고록에는 마리아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으며,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한 일화는 두 번째 부인이 쓴 글에서 전해졌다.[29]

2. 2. 유년기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에지필드 카운티에서 태어난 롱스트리트는 뉴저지주 출신 아버지와 메릴랜드주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다섯 명의 아이들 중 셋째 아들이었다. 그의 가족은 조지아주 북동부 게인즈빌 근처에서 면화 농장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의 조상은 1657년 네덜란드 식민지 뉴네덜란드로 이주한 사람이었으나, 세대를 거치면서 성을 영어식으로 바꾸었다.[25] 그의 아버지는 아들의 "굳건한" 성격에 주목하여 그를 피터(성 베드로)라고 불렀고, 이후 그는 피트 또는 올드 피트로 불렸다.[26]

9살 때, 롱스트리트는 오거스타에 있는 숙부 오거스터스 볼드윈 롱스트리트에게 보내졌다. 숙부는 신문 편집자, 교육자, 감리교 목사였다. 롱스트리트는 오거스타 외곽에 있는 숙부의 농장에서 8년간 성장하며 리치먼드군 전문학교에 다녔다. 1833년 부친이 콜레라로 사망한 후에도 롱스트리트는 숙부 곁에 머물렀다.[27]

2. 3. 웨스트포인트 시절

1837년 롱스트리트의 숙부 오거스터스는 롱스트리트를 미합중국 육군사관학교에 보내려 했으나 자리가 없어 실패했다. 1년 후 1838년 앨라배마 주의 친척 루벤 채프먼의 도움으로 입학 허가를 받았다.[86] 롱스트리트는 웨스트포인트에서 학업 성적이 좋지 않았고, 규율 문제도 있었다. 1842년 졸업 당시 56명의 사관후보생 중 54등이었다.[86] 그러나 동기들 사이에서는 인기가 많았으며, 조지 헨리 토마스, 윌리엄 로즈크랜스, 존 팝, D. H. 힐, 라파예트 맥로스, 조지 피켓, 존 벨 후드 등 훗날 남북전쟁에서 이름을 알린 많은 인물들과 친분을 쌓았다. 또한 1학년 아래였던 율리시스 그랜트와도 친구가 되었다.[86]

3. 군 경력

1863년 이른봄, 롱스트리트는 장군에게 북버지니아군에서 잠시 떠나 블랙스턴 브래그 장군이 지휘하는 테네시군을 지원하도록 요청했다. 테네시군은 테네시주 중부에서 롱스트리트의 웨스트포인트 시절 룸메이트였던 북군의 윌리엄 로즈크랜스 소장의 도전을 받고 있었다. 롱스트리트는 리의 휘하에서 제1군단을 지휘하는 것보다 서부전선에서 독립적으로 지휘하는 것이 승진에 더 유리할 것이라고 생각했을 수 있다. 리 장군은 제1군단에서 2개 사단을 파견했지만, 테네시가 아닌 리치먼드로 보냈다. 북군 제9군단이 해안을 따라 진격하여 대서양 연안 중부의 주요 항구를 위협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2월 중순, 피켓의 사단이 수도를 향해 출발했고, 후드의 사단이 그 뒤를 따랐다. 롱스트리트는 이 2개 사단과 노스캐롤라이나 및 남부 버지니아 전역군을 통괄하는 지휘를 명령받았다.[101]

4월, 롱스트리트는 서포크시에서 북군을 포위했다. 이것은 작은 작전이었지만, 전쟁으로 황폐해진 버지니아 중부에 주둔하던 리 장군의 군대에게는 매우 중요했다. 이 작전이 성공하면 남군은 북군의 지배하에 있던 많은 물자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작전으로 인해 5월에 벌어진 챈슬러즈빌 전투에서 롱스트리트의 제1군단 15,000명이 전장에 배치될 수 없게 되었다. 챈슬러즈빌 전투는 리 장군이 빛나는 승리를 거두었지만, 롱스트리트는 서포크에서 부대와 함께 돌아와 리 장군의 군대에 참여하지 않은 것에 대해 비판을 받았다.[102]

3. 1. 미국-멕시코 전쟁

롱스트리트는 미국-멕시코 전쟁에서 제8보병사단 소속으로 참전하여 많은 공을 세웠다. 콘트레라스 전투와 추루부스코 전투에서 대위로 명예 진급하였고, 몰리노 델 레이 전투에서는 소령으로 명예 진급했다. 1847년 9월 12일 차풀테펙 전투에서 연대 깃발을 들고 언덕을 달려 올라가다 허벅지에 큰 부상을 입었다. 롱스트리트는 쓰러지면서 깃발을 친구인 피켓 중위에게 넘겨주었고, 피켓은 언덕 정상까지 도달하는 데 성공했다.[30]

3. 2. 남북전쟁 이전

롱스트리트는 미국-멕시코 전쟁에 제8보병사단 소속으로 참전하여 공을 세웠다. 콘트레라스 전투와 추루부스코 전투에서 대위로 명예 진급했고, 몰리노 델 레이 전투에서 소령으로 진급했다. 1847년 9월 12일 차풀테펙 전투에서 연대 깃발을 들고 언덕을 오르다 허벅지에 큰 부상을 입었다. 롱스트리트는 쓰러지면서 깃발을 친구 피켓 중위에게 넘겼고, 피켓은 언덕 정상에 깃발을 꽂았다.[88]

전쟁 후, 롱스트리트는 부상에서 회복한 뒤 아내와 텍사스주 변경에서 복무했다. 브리스 요새에서 정찰 임무를 수행했고, 1858년 7월부터 제8보병사단 소령 겸 급여 지급 담당관을 맡았다.

롱스트리트는 미합중국 탈퇴를 열렬히 지지하지는 않았지만, 숙부 오거스터스로부터 주권 원칙을 배워 영향을 받았다.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에서 태어나 조지아 주에서 성장했지만, 어머니가 사는 앨라배마 주에 봉사하기를 원했다. 앨라배마 주 출신 웨스트포인트 졸업생 중 가장 연장자였기 때문에 주 방위군에서 높은 지위를 얻을 가능성도 있었다. 1861년 6월, 미국 육군에서 제대하고 남북 전쟁에 참전하여 남군에 합류했다.[89]

4. 남북전쟁

게티스버그 전투 2일째


게티스버그 전투에서 롱스트리트의 행동은 1세기 이상 논쟁의 중심에 있었다. 롱스트리트는 7월 1일 오후 늦게 전장에 도착했다. 이때까지 북군 2개 군단은 리처드 이웰과 A. P. 힐에 의해 도시 안으로 몰리고, 묘지 언덕에서 방어진을 구축했다. 로버트 E. 리는 전군이 집결할 때까지 싸울 생각은 없었지만, 힐의 결정으로 첫날은 남군의 승리로 끝났다. 북군 방어진이 강력한 것을 걱정한 롱스트리트는 리를 만나 적군의 우익에 대해 전략적인 기동을 벌여 “적과 적의 수도 사이에 좋은 지점을 확보”하면 북군 조지 미드 소장에게 남군이 구축한 방어진을 공격하게 만들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리는 “적이 내일도 저기에 있다면, 공격해야 한다”고 말했다.[108]

7월 2일 리 장군의 작전은 롱스트리트의 군이 북군의 좌익을 공격하게 하고, 뒤이어 힐의 군에게 중앙에 가까운 세멘터리 리지를 공격하게 하고, 한편 이월의 군은 북군의 좌익으로 움직이도록 하는 것이었다. 롱스트리트는 그의 여단의 몇 개가 도착하길 기다리며, 적의 진지에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긴 거리를 돌아서 갔다. 롱스트리트에 대한 전후 비판에서는 리 장군의 명령은 이른 아침에 공격을 시작하는 것이었고, 이것이 늦어진 것이 전투에서 진 중대한 이유라고 주장했다.[109] 오후 4시경 공격이 시작되자, 롱스트리트는 라파예트 맥로즈와 존 벨 후드에게 공격을 가했으나(피켓의 사단은 도착하지 않았다), 북군의 격렬한 저항에도 우세를 지켰으나, 상당한 피해를 입어 거의 성공이라고는 말하기 어려웠다.[110]

7월 3일 리는 롱스트리트에게 북군의 중앙에 협동하여 총공격을 가할 것을 명령했다. 조지 피켓의 사단과 힐 군단을 동원한 공격이었으나, 롱스트리트는 성공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해 이 명령에 따를 수 없다고 강력하게 강조했다. 리 장군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보병의 공격에 앞서 포병에 의한 일제 포격이 있는 사이에 롱스트리트는 피켓의 사단을 출발시키는 책임을 포병대의 지휘관 에드워드 포터 알렉산더에게 넘기려 했다. 실제 피켓의 사단이 전진할 때, 롱스트리트는 동의를 표하기만 했을 뿐, 구두로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피켓의 돌격이라 불리는 이 총공격은 롱스트리트가 예상했던 것 이상의 피해를 입었다. 이것이 게티스버그에서 남군의 패배가 확실시된 결정적 포인트였고, 리 장군은 다음날 버지니아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112]

전후 롱스트리트에 대한 비판은 게티스버그 전투에서 그의 행동뿐만 아니라, 리 장군과 그의 전략에 대한 난폭한 발언에 근거를 두고 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4. 1. 초기 활동

1861년 6월 22일, 롱스트리트는 제퍼슨 데이비스 남부연맹 대통령과 면담 후 6월 17일부로 준장으로 임명되었음을 알게 되었고, 25일에 임명장을 받았다. 이후 마나사스에서 피에르 보우리가드 준장에게 보고하라는 임무를 받고 버지니아 3개 연대(1, 11, 17연대)로 구성된 여단을 지휘하게 되었다.[90]

롱스트리트는 부하들을 모아 끊임없이 훈련시켰다. 이 여단은 7월 18일 블랙번즈포드 전투에서 북군의 정찰부대와 첫 전투를 치렀고, 이는 제1차 불런 전투로 이어졌다. 7월 21일 주력 공격이 전열 반대편에 도달할 때까지 롱스트리트 여단은 9시간 동안 포격을 견디며 비교적 작은 역할을 수행했다. 롱스트리트는 아군 지휘관들이 패주하는 북군을 적극적으로 추격하지 않은 것에 불만을 품었다. 그의 신뢰하는 부관 몽크스리 소레빌은 롱스트리트가 "매우 화를 냈다. 모자를 벗어 땅에 내팽겨치면서 발로 밟고 더러운 욕을 퍼부었다"라고 기록했다. 소레빌은 롱스트리트가 "지옥에나 떨어져라! 북군을 밀가루처럼 분쇄해서 날려버려야지!"라고 말했다고 한다.[91]

10월 7일, 롱스트리트는 소장으로 승진하여 남군 포토맥 군의 1개 사단(햄프턴 군단의 4개 보병여단) 지휘를 맡게 되었다.[92]

4. 2. 제1차 불런 전투

롱스트리트는 부하들을 모아 끊임없이 여단을 훈련시켰다. 이 여단은 7월 18일 블랙번즈포드 전투에서 북군의 위력 정찰부대와 첫 전투를 벌였고, 이것이 제1차 불런 전투로 이어졌다.[91] 7월 21일 주력의 공격이 전열의 반대쪽까지 도달할 때까지 롱스트리트의 여단은 9시간 동안 대포의 공격을 견디면서 비교적 작은 역할을 훌륭히 해내었다.[91] 롱스트리트는 아군 지휘관들이 패주하는 북군을 적극적으로 추격하지 않은 것에 불만을 품었다. 롱스트리트가 신뢰하는 부관 몽크스리 소레빌(Moxley Sorrel)은 롱스트리트가 [매우 화를 냈다. 모자를 벗어 땅에 내팽개치면서 발로 밟고 더러운 욕을 퍼부었다]라고 기록했다. 소레빌은 롱스트리트가 [지옥에나 떨어져라! 북군을 밀가루처럼 분쇄해서 날려버려야지]라고 말했다고 한다.[91]

4. 3. 반도 작전

1862년 봄, 북군의 조지 B. 매클렐런 소장은 남군의 수도 리치먼드를 점령하기 위해 반도 작전을 시작했다. 롱스트리트는 요크타운 포위전과 윌리엄스버그 전투에서 후위를 맡아 북군의 진격을 늦췄다.[35] 윌리엄스버그 전투에서 조셉 후커의 부대가 포함된 북군 제3군단을 상대로 롱스트리트는 캐드머스 M. 윌콕스, A. P. 힐, 피켓, 롤리 E. 콜스턴 여단과 다른 두 연대를 투입하여 반격, 북군을 격퇴하고 남군 보급품 수송대의 안전한 통과를 확보했다.[33]

군대 이동을 보여주는 선과 화살표가 있는 지도
반도 원정 중 칠일 전투까지의 사건 지도


5월 31일 칠일 전투에서 롱스트리트는 존스턴의 구두 명령을 잘못 기억하여 부대를 잘못된 길로 진군시켜 혼란을 야기했고, 벤자민 휴거 소장과 선임 문제로 논쟁을 벌여 지연을 초래했다.[35] D.H. 힐이 증원을 요청했을 때 롱스트리트는 응했지만, 여단들을 제대로 조정하지 못했다.[35] 그날 늦게, 에드윈 보스 서머 소장이 치카호미니 강을 건너 롱스트리트의 부대와 교전했지만, 6시간의 전투 끝에 무승부로 끝났다.[35] 존스턴은 전투에서 롱스트리트의 활약을 칭찬했지만, 전기 작가 윌리엄 개럿 피스톤은 이를 "롱스트리트 군사 경력의 최저점"이라고 평가했다.[35] 롱스트리트는 보고서에서 휴거를 부당하게 비난했다.[35] 6월 1일, 로버트 E. 리가 북버지니아군 사령관을 맡았다.

6월 27일 게인스 밀에서 롱스트리트의 부대는 존 벨 후드와 에반더 M. 로의 여단과 함께 북군 방어선을 돌파하여 북군을 치카호미니 강 너머로 후퇴하게 만들었다.[36] 6월 30일 글렌데일에서 롱스트리트는 약 2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교전했지만, 다른 남군 지휘관들의 느린 행동으로 인해 매클렐런은 군대를 말번 힐로 철수시킬 수 있었다.[36] 말번 힐 전투에서 롱스트리트 부대는 매클렐런 부대의 측면 사격에 노출되어 철수해야 했다.[36]

칠일 전투 동안 롱스트리트는 리 군대의 거의 절반인 15개 여단을 지휘하며 매클렐런을 반도 아래로 몰아냈다.[36] 특히 게인스 밀과 글렌데일에서 뛰어난 지휘를 보였다.[36] 리는 "롱스트리트는 나의 오른손의 지팡이였다"고 말하며 그를 주요 부관으로 삼았다.[36]

4. 4. 제2차 불런 전투, 메릴랜드 전역, 프레데릭스버그 전투

1862년 8월 북버지니아 작전에서 롱스트리트는 전군의 우익을 맡아 잭슨의 좌익과 협력했다. 제2차 불런 전투에서 잭슨군이 북군의 공격을 받는 동안, 롱스트리트군은 24시간 만에 48km를 행군하여 전장에 도착했지만, 느린 행군으로 비판받았다. 그러나 장군은 롱스트리트군을 변호했다.[38] 8월 30일, 롱스트리트는 25,000명 이상의 부대로 북군의 좌익에 총공격을 가해 승리에 기여했다. 그는 포병대의 포격을 지휘하고 여단을 투입하는 등 활발한 활약을 펼쳤다.[40]

앤티텀 전투에서 롱스트리트는 방어적인 배치를 준비하고 2배에 달하는 북군의 공격을 견뎌냈다. 전투 후, 리는 롱스트리트를 '늙은 군마(Old War Horse)'라고 칭찬했다.[42] 1862년 10월 9일, 롱스트리트는 중장으로 승진하여 남군 최상위 장군이 되었다.[42]

프레더릭스버그 전투에서 롱스트리트는 메어리즈하인츠(Marye's Heights) 돌벽 뒤에 부대를 배치하여 북군의 공격을 14번이나 물리치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북군은 약 1만 명의 사상자를 낸 반면, 롱스트리트군은 500명만을 잃었다. 롱스트리트는 참호, 교착목 및 요새를 구축하여 방어를 강화했는데, 이는 이후 북버지니아군의 방어 전술에 중요한 전례가 되었다.[43]

4. 5. 서포크

1863년 초봄, 롱스트리트는 리에게 북버지니아군을 떠나 브랙스턴 브래그 장군이 지휘하는 테네시군을 지원하는 제안을 했다. 테네시군은 테네시 주 중부에서 롱스트리트의 웨스트포인트 시절 룸메이트였던 북군의 윌리엄 로즈크랜스 소장의 도전을 받고 있었다. 롱스트리트는 리의 휘하에서 1군단을 지휘하는 것보다 서부 전선에서 독립적인 지휘를 하는 것이 승진에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있다.[44] 리는 제1군단에서 2개 사단을 파병했지만, 테네시가 아닌 리치먼드를 향했다. 북군 제9군단의 해상 진군이 대서양 연안 중부의 중요한 항구를 잠재적으로 위협하고 있었다. 2월 중순, 피켓의 사단이 수도를 향해 출발했고, 후드의 사단이 그 뒤를 이었다. 롱스트리트는 이 두 사단과 노스캐롤라이나 및 남버지니아군을 총괄하는 지휘를 명령받았다.[44]

4월, 롱스트리트는 서퍽에서 북군을 포위했다(서퍽 포위전). 이것은 작은 작전이었지만, 전쟁으로 황폐해진 버지니아 중부에 주둔하는 리 군에게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이것이 성공하면 남군은 북군의 지배하에 있는 많은 물자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작전으로 인해 5월에 발생한 챈슬러스빌 전투 당시 롱스트리트의 제1군단 15,000명이 전장에 없게 되었다. 챈슬러스빌에서 리는 빛나는 승리를 거두었지만, 롱스트리트는 서퍽에서 부대와 함께 돌아와 리 군에 합류할 수 있었어야 한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45]

4. 6. 게티스버그

게티스버그 전투에서 롱스트리트의 행동은 1세기 이상 논쟁의 중심에 있었다. 롱스트리트는 7월 1일 오후 늦게 전장에 도착했다. 이때까지 북군 2개 군단은 리처드 이웰과 A. P. 힐에 의해 도시 안으로 몰리고, 묘지 언덕에서 방어진을 구축한 상태였다. 로버트 E. 리는 전군이 집결할 때까지 싸울 생각은 없었지만, 힐의 결정으로 첫날은 남군의 승리로 끝났다. 북군 방어진의 강력함을 우려했던 롱스트리트는 리를 만나 적군의 좌익에 대한 전략적인 우회 공격을 제안하며, “적과 적의 수도 사이에 좋은 지점을 확보하여” 북군 조지 미드 소장에게 남군이 구축한 방어진을 공격하게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리는 “적이 내일도 저기에 있다면, 공격해야 한다”고 외쳤다.[51]

전후 롱스트리트에 대한 비판은 게티스버그 전투에서의 그의 행동뿐만 아니라, 리와 그의 전략에 대한 발언에 근거하고 있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다.

남북전쟁의 패인을 쓴 저작가들의 비판 때문에 롱스트리트의 군 경력은 그의 사후에도 오랫동안 비난받았다. 주발 얼리는 리 장군 사후 2년 뒤인 1872년 1월 19일, 워싱턴 컬리지 연설에서 게티스버그에서 리 장군은 잘못하지 않았고, 롱스트리트의 2일째 공격 지연과 3일째 패주에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다음 해, 리 장군의 포병지휘관이었던 윌리엄 펜들턴은 같은 장소에서 롱스트리트가 7월 2일 해가 뜨는 즉시 공격하라는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고 말했다. 남부 간행물 은 "게티즈버그에서 리를 무찌른 것은 미드가 아니라 롱스트리트였다"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롱스트리트는 1875년까지 이들의 항의에 반론하지 않았으나, 결국 평판이 손상되었다. 20세기에 들어서 더글러스 사우스올 브리만이 리 장군의 전기를 집필하면서 롱스트리트를 비판하는 태도를 계속했다[124]。. 버지니아의 신문기자이자 작가인 그리포드 도티는 1950년대와 1960년대에 롱스트리트에 대한 엄격한 비판으로 알려져 있다.

롱스트리트의 사후, 아내인 헬렌은 반론을 위해 [하이 다이드 및 롱스트리트]를 자비출판했다. 그중에는 "남부에서는 북군의 생각하지 않은 승리가 롱스트리트 장군의 죄로 심어진 불복종의 결과라고 믿게 만드는 선동적으로 가르치고 있다"라고 술회했다[126].

1974년 마이켈 샤라의 소설 『The Killer Angels』은 롱스트리트의 비망록에서 일부를 기초로 하였고, 1993년 영화 『게티스버그』는 롱스트리트의 장군으로써의 평판을 재평가하여 대중의 인지도를 극적으로 올렸다고 말할 수 있다[127].

챠타프치강을 가로지르는 롱스트리트 다리는 게인즈빌 근교의 아메리카 국도 129호선의 일부로 있고, 롱스트리트 장군에 유래한 명칭이 붙여졌다[128]. 노스캐롤라이나주 포드브락크를 통해 주요도로에 롱스트리트 도로가 있다[129]. 제2차 세계 대전때 리버티선으로 SS제임스 롱스트리트가 있다.

1998년 게티스버그 전사공원에 건립된 최후의 기념비 중 하나는 뒤늦었지만, 롱스트리트가 지휘봉을 지닌 승마 모습의 동상이 있다. 제작은 조각가 게리 캬스틸이었다. 피츠아 숲의 나무들 속에 지면에 바로 만들어진 동상이지만, 애마 히로는 불균형하게 작아, 이것을 과장하는 모습이다. 전장을 내려다보는 높은 대좌에 있던 많은 장군들의 동상과는 달리 그를 둘러싼 논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130].

겟티스버그의 롱스트리트(약 1900년)

4. 6. 1. 작전 계획

챈슬러즈빌 전투와 스톤월 잭슨의 죽음 이후, 롱스트리트와 리는 5월 중순에 군대의 여름 작전에 대해 논의했다. 롱스트리트는 다시 한번 그의 군단 전부 또는 일부를 테네시로 파병하는 것을 촉구했다. 이러한 행동의 정당성은 율리시스 S. 그랜트 연합군 중장이 중요한 남부 연합 요새인 미시시피 강의 비크스버그를 향해 진격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절박해지고 있었다. 롱스트리트는 브래그 휘하의 증원된 군대가 로제크랜스를 물리치고 오하이오 강을 향해 진격할 수 있으며, 그렇게 되면 그랜트가 비크스버그에 대한 장악을 풀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46] 그는 세던과의 회의에서 이러한 견해를 제시했고, 세던은 그 아이디어를 승인했지만 리가 승인할지 의심했으며, 데이비스가 리의 의견에 반대할 가능성이 적다고 말했다. 롱스트리트는 브래그의 지휘 능력을 비판했으며 그를 대체하기를 바랐을 수도 있지만, 조셉 존스턴이 지휘권을 잡는 것을 바랐을 수도 있으며, 군단 사령관으로 그 휘하에서 복무하는 데 만족할 것이라고 밝혔다. 리는 많은 수의 군대를 내보내면 리치먼드에 더 가까이 군대를 이동시켜야 하기 때문에 데이비스에게 이를 막았고, 대신 펜실베이니아 침공 계획을 진행했다.

그의 회고록에서 롱스트리트는 리의 제안에 대한 그의 반응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이 글은 작전이 수행된 수년 후에 쓰여진 것이며, 전투 결과와 전후 패전 원인 비판이라는 후견지명의 영향을 받고 있다. 당시 롱스트리트가 쓴 편지에는 그러한 리와의 거래가 적혀 있지 않다. 1868년 4월, 리는 "그러한 약속을 한 적이 없다. 그러한 것을 생각한 적도 없다."라고 말했다. 더욱이 리의 전투 후 보고서에는 "우리의 근거지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적에게 공격받지 않는다면 회전을 할 생각이 없었다."라고 적혀 있다.[48]

북버지니아 군대는 잭슨의 죽음으로 재편되었다. 두 명의 사단 지휘관 리차드 이웰과 A. P. 힐이 중장으로 승진하여 제2군단과 제3군단을 지휘하게 되었다. 롱스트리트의 제1군단은 리차드 H. 앤더슨 소장의 사단을 잃고, 라파예트 맥로즈, 조지 피켓 및 존 후드의 사단이 남았다.[49]

이 여름의 작전 개시 시점에서, 롱스트리트의 군단은 셰넌도어 계곡을 통해 이웰의 군단을 추격했다. 롱스트리트가 고용한 스파이 헨리 토마스 해리슨이 북군의 포토맥 군이 예상보다 빠르게 북쪽으로 이동하여 남군과 접촉하려 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이 때문에 리는 즉시 전군을 게티스버그 근처에 집결시키려 했다.[50]

4. 6. 2. 게티스버그 전투

챈슬러스빌 전투와 스톤월 잭슨의 죽음 이후, 롱스트리트와 로버트 E. 리는 1863년 5월 중순 회담을 통해 여름 작전에 대해 논의했다. 롱스트리트는 다시 한번 그의 전군 또는 일부를 테네시로 파병하는 것을 주장했다. 당시 북군의 율리시스 S. 그랜트 장군이 남군이 굳건히 방어하는 미시시피강 연안의 도시 비크스버그를 압박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는 시급한 과제였다. 롱스트리트는 브랙스턴 브래그 휘하에 증원군을 보내면 윌리엄 로즈크랜스의 부대를 오하이오강 방면으로 몰아내고, 이어서 그랜트의 비크스버그 포위를 돌파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4]

롱스트리트의 회고록에는 리의 제안에 대한 그의 반응이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이 글은 작전이 수행된 수년 후에 쓰여진 것이며, 전투 결과와 전후 패전 원인 비판이라는 영향을 받고 있다. 당시 롱스트리트가 쓴 편지에는 그러한 리와의 거래가 적혀 있지 않다. 1868년 4월, 리는 "그러한 약속을 한 적이 없다. 그러한 것을 생각한 적도 없다."라고 말했다. 더욱이 리의 전투 후 보고서에는 "우리의 근거지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적에게 공격받지 않는다면 회전을 할 생각이 없었다."라고 적혀 있다.[48]

북버지니아군은 잭슨의 죽음으로 재편되었다. 두 명의 사단 지휘관 리처드 이웰과 A. P. 힐이 중장으로 승진하여 제2군단과 제3군단을 지휘하게 되었다. 롱스트리트의 제1군단은 리처드 H. 앤더슨 소장의 사단을 잃고, 라파예트 맥로즈, 조지 피켓 및 존 벨 후드의 사단이 남았다.[49]

이 여름의 작전 개시 시점에서, 롱스트리트의 군단은 셰넌도어 계곡을 통해 이웰의 군단을 추격했다. 롱스트리트가 고용한 스파이, 헨리 토마스 해리슨이 북군의 포토맥군이 예상보다 빠르게 북쪽으로 이동하여 남군과 접촉하려 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이 때문에 리는 즉시 전군을 게티스버그 근처에 집결시키려 했다.[50]

게티스버그 전투에서 롱스트리트의 행동은 1세기 이상 논쟁의 중심에 있었다. 롱스트리트는 첫째 날(7월 1일) 오후 늦게 전장에 도착했다. 이때까지 북군 2개 군단이 이웰과 힐에 의해 도시 안으로 몰리고, 묘지 언덕(Cemetery Hill)에서 방어진을 구축했다. 리는 전군이 집결할 때까지 싸울 생각은 없었지만, 힐의 다소 의문스러운 결정으로 첫날은 인상적인 남군의 승리였다. 북군 방어진의 강력함을 우려했던 롱스트리트는 리를 만나 적군의 좌익에 대한 전략적인 우회 공격을 제안하며, “적과 적의 수도 사이에 좋은 지점을 확보하여” 북군 조지 미드 소장에게 남군이 구축한 방어진을 공격하게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리는 “적이 내일도 저기에 있다면, 공격해야 한다”고 외쳤다.[51]

7월 2일 리의 작전은 먼저 롱스트리트 군에게 북군의 좌익을 공격하게 하고, 이어서 힐의 군대가 중앙에 가까운 세메터리 리지(Cemetery Ridge)를 공격하는 한편, 이웰 군은 북군의 좌익을 향하는 움직임을 보이는 것이었다. 롱스트리트는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하여 여러 여단이 도착하기를 기다리며, 적진에 접근하면서 긴 우회로를 사용했다. 전후 롱스트리트에 대한 비판에서는 리의 명령은 새벽에 공격하는 것이었고, 그 지연이 이 전투에서 패배하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고 주장한다.[52] 그러나 리는 이 군단의 도착 지연을 인정하고, 오전 11시까지 공식적인 공격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53] 오후 4시경 공격이 시작되자 롱스트리트는 맥로즈와 후드에게 공격을 명령했고(피켓 사단은 도착하지 않았다), 북군의 격렬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우세했지만, 상당한 손실을 입어 거의 성공적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54]

7월 3일, 리는 롱스트리트에게 북군 중앙에 대해 합동으로 총공격을 가하라고 명령했다. 여기에는 피켓 사단과 힐 군단의 여러 여단을 배치할 계획이었다. 롱스트리트는 성공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 명령에 따르기를 매우 주저했다. 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보병의 공격에 앞선 포병의 일제 사격 중에, 롱스트리트는 피켓 사단을 발진시킬 책임을 포병대장 에드워드 포터 알렉산더(Edward Porter Alexander)에게 넘기려고 시도했다. 실제로 피켓 사단이 전진할 때 롱스트리트는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시했을 뿐, 말로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피켓의 돌격이라고 불리는 이 총공격은 롱스트리트가 예상했던 것 이상의 손실을 초래했다. 이것이 게티스버그에서 남군의 패배를 결정짓는 지점이었고, 리는 다음 날 버지니아로 후퇴 명령을 내렸다.[56]

4. 7. 테네시

1863년 초봄, 롱스트리트는 리에게 북버지니아군을 떠나 브랙스턴 브래그 장군이 지휘하는 테네시군을 지원하겠다고 제안했다. 테네시군은 테네시주 중부에서 롱스트리트의 웨스트포인트 시절 룸메이트였던 북군의 윌리엄 로즈크랜스 소장의 도전을 받고 있었다. 롱스트리트는 리의 휘하에서 1군단을 지휘하는 것보다 서부 전선에서 독립적으로 지휘하는 것이 승진에 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있다.[44]

1863년 8월 중순, 롱스트리트는 서부 전선으로 이동하려는 시도를 재개했다. 그는 미합중국 연합군 육군 장관 제임스 세든에게 사적인 편지를 보내 오랜 친구인 조셉 존스턴 휘하에서 근무하고 싶다고 요청했다. 또한 의회의 동조자였던 루이스 위그폴 상원의원과의 대화에서 그러한 생각을 강조했다. 위그폴은 이미 롱스트리트를 브랙스턴 브래그의 후임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브래그 군은 채터누가 외곽에서 로즈크랜스 군의 압력을 날마다 받게 되었으므로, 리와 데이비스 대통령은 9월 5일에 요청을 받아들였다. 남군에게 가장 어려운 보급 노력 중 하나를 통해, 롱스트리트는 라파예트 맥로즈와 존 후드의 사단, 조지 피켓 사단에서 1여단, 포터 알렉산더의 26문 포병대대를 이끌고 두 개의 캐롤라이나 주를 거쳐 조지아 주 북부에 있는 브래그에게 16개의 철도를 이용하여 약 1247.24km를 이동시켰다. 이 이동에는 3주 이상이 걸렸지만, 롱스트리트와 그의 군단 주력 부대는 9월 17일에 도착했다.[58]

제1군단의 베테랑들은 치카모가 전투 초기 단계에 참가했다. 브래그는 롱스트리트를 좌익 사령관으로, 레오니다스 포크 중장을 우익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9월 20일, 롱스트리트는 적의 좁은 선봉대에 대해 8개 여단을 긴 종대(縱隊)로 하여 공격을 가했다. 우연히 로즈크랜스의 잘못된 명령으로 북군 전열에 틈이 생겼고, 롱스트리트 군은 이를 이용했다. 공격 진형은 지형에 적합했고, 북군 전열에 강력한 압력을 가하는 것이었다. 북군 우익이 붕괴되었고, 브래그 군이 접근하여 적군을 격파하려 했다. 로즈크랜스와 그의 많은 부대가 채터누가 방향으로 후퇴하는 가운데, 조지 헨리 토마스 소장의 부대만이 굳건히 방어하여 총붕괴를 막았다. 브래그는 후퇴하는 북군을 강제로 추격하려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치카모가는 서부 전선에서 남군의 가장 큰 승리였으며, 롱스트리트는 그 공적을 인정받았다.[59]

롱스트리트는 곧 여러모로 악명 높은 브래그와 충돌하여, 브래그를 축출하려는 군 고참 지휘관들의 지도자가 되었다. 브래그의 부하들은 이미 그의 지휘력과 불쾌한 성격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고참 중장인 롱스트리트가 도착하여 행동을 취하기에 절호의 시기가 되었다. 롱스트리트는 세든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를 썼다.

> "현재의 지휘관이 있는 한, 신의 손 이외의 어떤 것도 우리를 구하거나 도와주지는 않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상황이 심각했기에, 데이비스 대통령은 직접 중재할 수밖에 없었다. 다음에 일어난 일은 이 전쟁에서도 이례적인 장면이었고, 브래그는 상관에게 질책받고 얼굴을 붉히며 앉아 있었다. 롱스트리트는 브래그가 "1군을 지휘할 능력이 없고, 즉 병사들을 전투로 향하게 할 힘이 없으며", "해야 할 일을 모른다"고 말했다. 데이비스 대통령은 브래그를 두둔하며, 이 논쟁을 해결하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60]

브래그는 자신의 지위를 유지했고, 롱스트리트에게는 버지니아에서 데려온 부대에만 한정하여 그의 지휘권 범위를 줄임으로써 보복했다. 제3차 채터누가 전투 이전에 몇몇 작은 전투에 참가한 후, 롱스트리트와 그의 부대는 동테네시로 파견되어 북군 앰브로스 번사이드 군의 진격을 저지하게 되었다(녹스빌 작전). 롱스트리트가 이 임무를 맡게 된 것은 브래그의 적의 때문이기도 했지만, 육군성이 롱스트리트 군을 리 군으로 돌리고 싶어했고, 이 이동은 그 방향에 가까워지려는 의도가 있었다.[61]

롱스트리트는 11월에 녹스빌로 향하는 행군이 느렸다는 비판을 받았고, 그의 부대 일부는 "느림보 피터"라는 별명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번사이드는 캠벨스 스테이션 전투에서 롱스트리트 군의 압력을 피하고, 도시 주변에 참호를 파고 방어를 강화했다. 롱스트리트는 포위 공격을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샌더스 요새 전투에서도 남군에게 돌파구를 열어주지 못했다. 브래그가 11월 25일에 채터누가에서 그랜트에게 패했을 때, 롱스트리트는 조지아 주 북부에서 테네시 군과 합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롱스트리트는 주저하며 버지니아로 돌아가는 움직임을 시작했지만,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12월 초에 윌리엄 셔먼 군의 추격을 받았다. 롱스트리트 군은 겨울 숙영에 들어갔고, 봄에 북버지니아 군에 다시 합류했다. 이 작은 작전의 성과라면, 채터누가에서 브래그가 필요로 했던 부대를 빼앗은 것이었다. 롱스트리트가 서포크 이후로 처음으로 단독 지휘한 작전은 실패로 끝났고,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다. 작전 실패에 대한 반응으로, 세븐 파인스 때처럼 다른 사람을 비난했다. 라파예트 맥로즈를 사령관직에서 해임하고, 제롬 로버트슨 준장과 이벤더 로 준장의 군법 회의를 요구했다. 총무국장 사무엘 쿠퍼에게는 12월 30일에 사직 의사를 전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그의 사직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62]

4. 8. 브래그와의 갈등 및 녹스빌 작전

롱스트리트는 여러모로 악명이 높았던 브랙스턴 브래그와 곧 충돌했고, 브래그를 축출하려는 군 고참 지휘관들의 지도자가 되었다. 브래그의 부하들은 이미 그의 지휘력과 불쾌한 성격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고참 중장인 롱스트리트가 도착하여 행동을 취하기에 절호의 시기가 되었다. 롱스트리트는 제임스 세든에게 편지를 썼다.

상황이 심각했기에, 제퍼슨 데이비스 대통령은 직접 중재할 수밖에 없었다. 다음에 일어난 일은 이 전쟁에서도 이례적인 장면이었고, 브래그는 상관에게 질책받고 얼굴을 붉히며 앉아 있었다. 롱스트리트는 브래그가 "1군을 지휘할 능력이 없고, 즉 병사들을 전투로 향하게 할 힘이 없으며", "해야 할 일을 모른다"고 말했다. 데이비스 대통령은 브래그를 두둔하며, 이 논쟁을 해결하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60]

브래그는 자신의 지위를 유지했고, 롱스트리트에게는 버지니아에서 데려온 부대에만 한정하여 그의 지휘권 범위를 줄임으로써 보복했다. 제3차 채터누가 전투 이전에 몇몇 작은 전투에 참가한 후, 롱스트리트와 그의 부대는 동테네시로 파견되어 북군 앰브로스 번사이드 군의 진격을 저지하게 되었다(녹스빌 작전). 롱스트리트가 이 임무를 맡게 된 것은 브래그의 적의 때문이기도 했지만, 육군성이 롱스트리트 군을 로버트 E. 리 군으로 돌리고 싶어했고, 이 이동은 그 방향에 가까워지려는 의도가 있었다.[61]

롱스트리트는 11월에 녹스빌로 향하는 행군이 느렸다는 비판을 받았고, 그의 부대 일부는 "느림보 피터"라는 별명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번사이드는 캠벨스 스테이션 전투에서 롱스트리트 군의 압력을 피하고, 도시 주변에 참호를 파고 방어를 강화했다. 롱스트리트는 포위 공격을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샌더스 요새 전투에서도 남군에게 돌파구를 열어주지 못했다. 브래그가 11월 25일에 채터누가에서 율리시스 S. 그랜트에게 패했을 때, 롱스트리트는 조지아 주 북부에서 테네시 군과 합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롱스트리트는 주저하며 버지니아로 돌아가는 움직임을 시작했지만,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12월 초에 윌리엄 셔먼 군의 추격을 받았다. 롱스트리트 군은 겨울 숙영에 들어갔고, 봄에 북버지니아 군에 다시 합류했다. 이 작은 작전의 성과라면, 채터누가에서 브래그가 필요로 했던 부대를 빼앗은 것이었다. 롱스트리트가 서포크 이후로 처음으로 단독 지휘한 작전은 실패로 끝났고,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다. 작전 실패에 대한 반응으로, 세븐 파인스 때처럼 다른 사람을 비난했다. 라파예트 맥로즈를 사령관직에서 해임하고, 제롬 로버트슨 준장과 이벤더 로 준장의 군법 회의를 요구했다. 총무국장 새뮤얼 쿠퍼에게는 12월 30일에 사직 의사를 전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그의 사직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62]

4. 9. 와일더니스 전투에서 아포마톡스 전역

1864년 5월, 와일더니스 전투에서 롱스트리트는 남군을 패배에서 구했다. 그는 오렌지 플랭크 도로에서 강력한 측면 공격을 감행해 적을 거의 전장에서 몰아내었다.[65] 이 공격에서 그는 6개 여단에게 두터운 산개 사격선으로 전진을 명령하여, 지속적인 사격을 가능하게 하고 적에게 자신들을 잡기 어렵게 만드는 독창적인 전술을 선보였다. 역사가 에드워드 스티어는 이 작전의 성공 요인을 "세력적 열세를 극복하는 이상으로 롱스트리트의 전술적 천재성을 보여준 것"으로 평가했다.[65]

그러나 공격 도중 롱스트리트는 부하의 오인 사격으로 부상을 입었다. 총알은 어깨를 관통하여 신경을 절단하고 목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67] 롱스트리트가 부상으로 전장을 이탈하면서 공격의 기세가 꺾였고, 리 장군은 부대 재배치 때까지 다음 행동을 멈추면서 북군에게 재편성할 시간을 주었다. 이후의 공격은 실패했다.[65] E.P. 알렉산더는 "나는 항상 롱스트리트가 쓰러지지 않았다면 핸콕의 제2군단에 퍼져 있던 공황이 더 커지고 그랜트 군은 래피던 강을 건너 후퇴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라고 말했다.[66]

롱스트리트는 1864년 봄과 여름 작전에 참가하지 못했다. 1864년 10월에 복귀했지만, 오른팔은 마비되어 붕대를 감고 있었다.[67] 피터스버그 포위전의 남은 기간 동안, 그는 수도 리치먼드 전선에서 제임스 강 북쪽 부대와 버뮤다 헌드레드에 있는 피켓 사단을 포함한 수비대를 지휘했다. 아포마톡스로 후퇴하여, 1865년 4월 2일 A.P. 힐이 전사한 후에는 제1군단에 더해서 제3군단도 지휘했다. 리 장군이 항복을 고려할 때, 롱스트리트는 그랜트가 공정하게 대해줄 것이라고 믿는다고 말했다.[67]

5. 전후 활동

전후의 롱스트리트


전후 롱스트리트와 그의 가족은 뉴올리언스로 이주했다. 그곳에서 면화 중개 사업을 공동 경영했고, 그레이트 사우던 & 웨스턴 손해보험회사의 사장이 되었다.[7] 1870년에는 뉴올리언스 & 노스이스턴 철도의 사장으로 임명되었다. 앤드류 존슨 대통령에게 사면을 신청했으나, 존슨은 "남부의 세 사람만은 사면할 수 없다. 데이비스 씨, 리 장군 그리고 당신이다. 당신은 북군에게 많은 위기를 안겨주었다."라며 거부했다. 1868년 6월, 미국 의회는 롱스트리트의 시민권을 회복시켰다.[68]

롱스트리트는 남군 고위 장교 중 유일하게 스캘라웨그(남부의 재편입을 지지한 남부 백인)가 되어 공화당원이 되었다. 1868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는 율리시스 S. 그랜트를 지지했고, 취임 선서식에 참석한 후 뉴올리언스 세관 감독관으로 임명되었다. 이러한 행동으로 인해 그는 많은 남부 백인들에게 비난을 받았다. 옛 친구인 허베이 힐은 신문에 "우리의 스캘라웨그는 세상으로부터 외면받는 사람이다"라고 썼으며, 롱스트리트가 카펫배거(남북 전쟁 후 남부에 온 북부 사람)와 달리 "남부 출신이기에 더욱더 문제가 심각하다"라고 썼다.[69] 루이지애나주의 공화당 주지사는 롱스트리트를 주방위군 총무국장으로 임명했고, 1872년까지 주방위군을 지휘하는 소장과 뉴올리언스 내 주경찰 지휘관이 되었다. 1874년 선거 부정으로 폭동이 일어났을 때, 연방군의 파병이 요청되었다. 이때 롱스트리트가 흑인 부대를 사용한 것이 남부 사람들의 비난을 증폭시켰다.[69]

1875년, 롱스트리트 가족은 건강과 안전을 걱정하여 뉴올리언스를 떠나 조지아주 게인스빌로 돌아갔다. 러더퍼드 B. 헤이즈를 통해 여러 직책을 찾았고, 한때 해군 장관직도 고려 대상이었다. 짧은 기간 국세청 부담당관과 게인스빌 우체국장을 역임했다. 1880년 헤이즈의 지명으로 오스만 제국 주재 미국 대사가 되었고, 1897년부터 1904년까지 윌리엄 맥킨리, 시어도어 루스벨트 두 대통령 하에서 철도 장관을 역임했다.[70]

1877년 로마 가톨릭교회에 개종하여 죽을 때까지 헌신적으로 신앙생활을 했다.[71] 1889년 4월 9일 (애포매톡스에서 리의 항복 기념일)에 큰 화재가 발생하여 집과 소지품이 전소되었다. 그해 12월 아내 루이즈가 사망했다. 1897년, 34세의 헬렌 도치와 재혼했다. 헬렌은 헌신적인 아내가 되었고, 롱스트리트가 사망한 후에도 그의 유산을 지켰다. 헬렌은 롱스트리트 사후 58년 동안 생존하여 1962년에 사망했다.[72]

롱스트리트는 『마나사스에서 애포매톡스까지』라는 회고록을 1896년에 출판했다. 1904년 1월 2일 게인스빌에서 폐렴으로 사망했고, 알타 비스타 묘지에 매장되었다. 남북 전쟁을 경험한 장교 중 20세기까지 생존한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73]

6. 유산

남북전쟁의 패인을 쓴 저작가들의 비판 때문에, 롱스트리트의 군 경력은 그의 사후에도 오랫동안 비난받았다. 주발 얼리는 워싱턴 칼리지에서 연설할 때 게티스버그에서 리 장군은 잘못하지 않았고, 롱스트리트의 2일째 공격이 늦어진 것과 3일째 패주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다음 해 리 장군의 포병지휘관이었던 윌리엄 펜들턴은 같은 장소에서 롱스트리트는 7월 2일 해가 뜨는 동시에 공격을 개시하라는 명백한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고 말했다.[124] 롱스트리트는 1875년까지 이들의 항의에 반론하지 않았으나, 이것이 결국 평판을 상처 입게 되었다. 20세기에 들어서 더글러스 사우스올 프리먼이 리 장군의 전기를 집필하면서 남북전쟁에 관련한 연구로 롱스트리트를 முதன்மை 비판하는 태도를 계속했다.[124] 버지니아의 신문기자이자 작가인 그리포드 도티는 1950년대와 1960년대에 롱스트리트에 대한 엄격한 비판으로 알려져 있다.

롱스트리트 사후, 아내인 헬렌은 반론을 위해 [하이 다이드 및 롱스트리트]를 자비출판했다. 그중에는 [남부에서는 북군의 생각하지 않은 승리가 롱스트리트 장군의 죄로 심어진 불복종의 결과라고 믿게 만드는 선동적으로 가르치고 있다]라고 술회했다.[126]

1974년 마이켈 샤라의 소설 『The Killer Angels』은 롱스트리트의 비망록에서 일부를 기초로 하였고, 1993년 영화 『게티스버그』는 롱스트리트의 장군으로써의 평판을 재평가하여 대중의 인지도를 극적으로 올렸다고 말할 수 있다.[127]

7. 한국의 관점에서의 평가

롱스트리트는 뛰어난 군사적 능력과 전술적 통찰력을 지닌 인물이었지만, 그의 정치적 선택과 전후 행보는 복잡한 평가를 낳는다. 중도진보적 관점에서 볼 때, 롱스트리트의 군사적 업적은 인정받아야 하지만, 동시에 그의 공화당 지지와 흑인 민병대 지휘 등은 당시 남부 사회의 맥락에서 비판적으로 검토될 필요가 있다.

미국 남북 전쟁 당시 롱스트리트는 로버트 E. 리 장군 휘하에서 북버지니아군의 여러 부대를 지휘하며 제2차 불런 전투, 프레더릭스버그 전투, 치카모가 전투 등 주요 전투에서 남군의 승리에 크게 기여했다.[24] 칠일 전투, 앤티텀 전투, 와일더니스 전투에서도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24] 전기 작가이자 역사가 제프리 D. 워트는 롱스트리트를 "북버지니아군에서 가장 뛰어난 군단 지휘관"이자 "양군의 전투에서 최고의 군단 지휘관"이라고 평가했다.[24]

그러나 게티즈버그 전투에서 롱스트리트가 리 장군의 전술에 동의하지 않고 '피켓의 돌격'을 주저하며 방관한 것은 남군 패배의 주요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되기도 한다. 전후 롱스트리트는 공화당으로 당적을 옮겨 율리시스 S. 그랜트를 돕고, 리 장군의 행동을 비판하는 글을 써 옛 남군 동료들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았다. 이 때문에 롱스트리트에 대한 남부에서의 평판은 오랫동안 좋지 않았지만, 최근 들어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한국의 더불어민주당 지지 관점에서는 롱스트리트의 전후 행보가 사회 통합과 화해를 위한 노력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반면, 보수 진영의 시각에서는 그의 공화당 지지가 남부의 전통과 가치를 배신한 것으로 비춰질 수 있다. 롱스트리트의 삶은 남북전쟁의 복잡성과 미국 역사의 다양한 측면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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