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프리 하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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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프리 하우는 1926년 웨일스에서 태어난 영국의 변호사이자 정치인이다. 그는 윈체스터 칼리지와 케임브리지 트리니티 홀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변호사로 활동하다가 1964년 국회의원으로 선출되었다. 하우는 에드워드 히스 정부에서 법무차관을, 마가렛 대처 정부에서는 재무장관과 외무장관을 역임했다. 재무장관으로서 그는 대처리즘 경제 정책의 핵심 설계자였으며, 외무장관으로서는 홍콩 반환 협상과 유럽 공동체와의 관계 개선에 기여했다. 1989년 부총리로 임명되었으나 이듬해 사임했으며, 이후 종신 귀족 작위를 받아 상원 의원으로 활동했다. 하우는 2015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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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프리 하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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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 | |
존칭 접두사 | The Right Honourable |
이름 | 제프리 하우 경 |
출생 이름 | 리처드 에드워드 제프리 하우 |
출생일 | 1926년 12월 20일 |
출생지 | 포트탤벗, 글러모건, 웨일스 |
사망일 | 2015년 10월 9일 |
사망지 | 아이들리코트, 워릭셔, 잉글랜드 |
국적 | 영국 |
정당 | 보수당 |
배우자 | 엘스페스 섄드 (1953년 8월 28일 결혼) |
자녀 | 3명 |
직업 | 법정 변호사 정치인 |
교육 | 애벌리 홀 학교 윈체스터 칼리지 |
모교 | 케임브리지 대학교 |
군 복무 | 계급: 중위 군종: 영국 육군 부대: 왕립 통신대 |
서명 | [[파일:Geoffrey Howe signature.svg|서명]] |
칭호 및 훈장 | |
칭호 | 하우 남작 |
훈장 | 컴패니언 오브 아너 훈장(CH) 추밀 고문관(PC) |
정치 경력 | |
부총리 | 총리: 마거릿 대처 임기 시작: 1989년 7월 24일 임기 종료: 1990년 11월 1일 이전: 화이트로 남작 (사실상, 1988년) 다음: 마이클 헤셀틴 (1995년) |
하원 원내총무 / 추밀원 의장 | 총리: 마거릿 대처 임기 시작: 1989년 7월 24일 임기 종료: 1990년 11월 1일 이전: 존 웨이크햄 다음: 존 맥그리거 |
외무·영연방부 장관 | 총리: 마거릿 대처 임기 시작: 1983년 6월 11일 임기 종료: 1989년 7월 24일 이전: 프랜시스 핌 다음: 존 메이저 |
재무장관 | 총리: 마거릿 대처 임기 시작: 1979년 5월 4일 임기 종료: 1983년 6월 11일 이전: 데니스 힐리 다음: 나이젤 로손 |
그림자 내각 | |
예비 재무장관 | 당대표: 마거릿 대처 임기 시작: 1975년 2월 18일 임기 종료: 1979년 5월 4일 이전: 로버트 카 다음: 데니스 힐리 |
예비 보건사회부 장관 | 당대표: 에드워드 히스 임기 시작: 1974년 3월 11일 임기 종료: 1975년 2월 18일 이전: 키스 조셉 다음: 노먼 파울러 |
하급 장관직 (1970년-1974년) | |
통상소비자부 장관 | 총리: 에드워드 히스 임기 시작: 1972년 11월 5일 임기 종료: 1974년 3월 4일 이전: 마이클 노블 다음: 에릭 디킨스 |
잉글랜드 웨일스 법무차관 | 총리: 에드워드 히스 임기 시작: 1970년 6월 23일 임기 종료: 1972년 11월 5일 이전: 아서 어빈 다음: 마이클 하버스 |
의회 경력 | |
상원 의원 | 직위: 세속 영주 임기 시작: 1992년 6월 30일 임기 종료: 2015년 5월 19일 |
하원 의원 | 선거구: 이스트서리 임기 시작: 1974년 2월 28일 임기 종료: 1992년 3월 16일 이전: 윌리엄 클라크 다음: 피터 에인스워스 |
하원 의원 | 선거구: 레이게이트 임기 시작: 1970년 6월 18일 임기 종료: 1974년 2월 8일 이전: 존 본-모건 다음: 조지 가디너 |
하원 의원 | 선거구: 베빙턴 임기 시작: 1964년 10월 15일 임기 종료: 1966년 3월 10일 이전: 헨드리 오크숏 다음: 에드윈 브룩스 |
2. 초기 생애 및 교육
하우는 1926년 웨일스의 포트털봇에서 변호사이자 검시관이었던 아버지 베냐민 에드워드 하우와 어머니 엘리자 플로렌스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스스로를 1/4 스코틀랜드인, 1/4 콘월인, 그리고 1/2 웨일스인이라고 묘사했다.[1]
하우는 1950년대 보수당 내 싱크탱크인 보우 그룹에서 활동하며 자유 시장 경제 정책 발전에 기여했다. 1955년과 1959년 영국 총선에서 애버라본 선거구에 보수당 후보로 출마했으나, 노동당 지지세가 강한 지역구 특성상 낙선했다.[45] 1958년에는 법원 여관 보수당 협회가 발표한 보고서 ''거인의 힘''을 공동 집필하여 노동 조합의 권한이 너무 커졌으며 법적 특권을 축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74년 이스트 서리 선거구에서 하원의원으로 당선된 하우는 1975년 보수당 당수 선거에서 마가렛 대처가 당수로 선출되는데 기여했다. 대처는 하우를 자신의 이념과 비슷한 우익 인사로 여겨 그림자 내각의 재무장관으로 임명했다. 하우는 ''The Right Approach to the Economy''(경제에 대한 올바른 접근 방식)라는 야당 소책자를 통해 새로운 경제 정책 개발을 주도했다.[1]
그는 브린티리온의 브리지엔드 예비학교, 워스터셔의 애버리 홀 스쿨, 햄프셔의 윈체스터 칼리지 등 세 곳의 사립학교에서 교육받았다.[2]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영국 육군 왕립 통신대에서 소위로 동아프리카에서 복무하며 통신 장교 역할을 수행했다.
군 복무를 마친 후, 1948년 케임브리지 대학교 트리니티 홀에 입학하여 법학을 전공했다.[3] 그는 케임브리지 대학교 보수당 협회 회장과 케임브리지 유니온 소사이어티 위원회 위원을 역임했다. 1952년 중등 사원에서 변호사 자격 취득을 하고 웨일스에서 변호사로 활동했다.[3] 1965년에는 왕실 고문 변호사(QC)가 되었다.[4]
3. 초기 정치 경력
1964년 영국 총선에서 베빙턴 선거구에서 당선되어 하원 의원이 되었으나,[45][46] 1966년 영국 총선에서 낙선했다.[45]
1970년 영국 총선에서 라이게이트 선거구에서 당선되어 하원에 복귀했고,[45] 에드워드 히스 내각에서 법무차관으로 임명되어 기사 작위를 받았다.[7] 1972년에는 무역산업부 장관으로 승진했다.[45][46] 1974년 2월 총선부터는 서레이이스트 선거구에서 하원 의원직을 수행했다.[46]
하우의 초기 정치 경력을 나타내는 선거 결과는 다음과 같다.선거명 직책명 대수 정당 득표율 득표수 결과 당락 1955년 선거 하원의원 (애버라본 선거구) 41대 보수당 30.46% 12,706표 2위 낙선 1959년 선거 하원의원 (애버라본 선거구) 42대 보수당 27.60% 12,759표 2위 낙선 1964년 선거 하원의원 (베빙톤 선거구) 43대 보수당 45.33% 26,943표 1위 1966년 선거 하원의원 (베빙톤 선거구) 44대 보수당 48.01% 28,208표 2위 낙선 1970년 선거 하원의원 (라이게이트 선거구) 45대 보수당 53.86% 28,462표 1위 1974년 선거 하원의원 (서레이이스트 선거구) 46대 보수당 51.17% 23,563표 1위 1974년 선거 하원의원 (서레이이스트 선거구) 47대 보수당 52.42% 22,227표 1위 1979년 선거 하원의원 (서레이이스트 선거구) 48대 보수당 62.84% 28,266표 1위 1983년 선거 하원의원 (서레이이스트 선거구) 49대 보수당 62.90% 27,272표 1위 1987년 선거 하원의원 (서레이이스트 선거구) 50대 보수당 63.39% 29,126표 1위
4. 대처 정부
1976년 파운드화 위기 당시 노동당 재무장관 데니스 힐리는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39억 달러의 대출을 요청했는데, 이는 당시 IMF 최대 규모의 대출 요청이었다. 1978년 힐리는 하우의 비판에 대해 "죽은 양에게 찢기는 것과 같다"고 표현했다.[8]
1979년 총선에서 보수당이 승리하면서 하우는 재무장관으로 임명되었다.[9]
4. 1. 재무장관 (1979-1983)
1979년 총선에서 보수당이 승리하면서 하우는 재무장관이 되었다.[9] 그의 재임 기간은 공공 재정을 회복하고, 인플레이션을 줄이며, 경제를 자유화하려는 야심찬 급진적 정책 프로그램으로 특징지어진다.[9]
하우는 대처리즘 경제 정책의 핵심 설계자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인플레이션 억제를 최우선 목표로 삼고, 긴축 재정 정책과 통화주의 정책을 추진했다. 직접세에서 간접세로의 전환, 외환 규제 폐지, 기업 특별구역 설치 등 과감한 경제 자유화 조치를 단행했다.[9]
대처의 첫 임기 동안 정부의 여론 조사 지지율은 포클랜드 전쟁 효과가 나타날 때까지 급락했다. 하우의 1981년 예산은 경기 침체 중에도 인플레이션율을 낮춤으로써 기존의 경제적 상식에 도전했다. 당시 그의 결정은 "타임스"지에 보낸 편지에서 364명의 경제학자들에 의해 격렬하게 비판을 받았는데, 나중에 영국 중앙은행 총재가 된 머빈 킹도 포함되어 있었다.[11] 그들은 당시 경제 상황에서 침체적 정책을 쓸 자리가 없다고 주장하며, 그 예산은 "경제 이론이나 뒷받침하는 증거가 없다"고 말했다.[11]
그의 제안의 논리는 당시 93억 파운드(GDP의 3.6%)였던 적자를 줄이고 인플레이션을 통제함으로써 장기 금리가 하락하여 경제를 다시 활성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 예산은 1981년 초 11.9%였던 인플레이션을 1983년 2월 3.8%로 낮추었다. 장기 금리는 1981년 14%에서 1983년 10%로 하락했다.[12] 경제는 서서히 불황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이미 매우 높았던 실업률은 1984년 12%라는 50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하며 대공황 당시 13.5%에 근접했다.[13]
레이거노믹스와 달리 그의 거시경제 정책은 일방적인 감세가 아닌 예산 적자 축소의 필요성을 강조했다.[4] 그의 거시경제 정책은 경제를 자유화하고 공급 측면 개혁을 촉진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정책의 조합은 집권 중인 대처리즘의 특징 중 하나가 되었다.[4]
4. 2. 외무장관 (1983-1989)
1983년 영국 총선 이후, 마거릿 대처 수상은 하우를 외무장관으로 임명했다. 하우는 6년간 외무장관직을 수행하며 1905년부터 1916년까지 재임한 에드워드 그레이 경 이후 최장수 외무장관이 되었다.
하우는 외무장관으로서 바르샤바 조약 기구 국가들을 방문하여 공산당 지도자들과 회담하고 반체제 인사들의 의견을 청취했다. 이러한 노력은 미하일 고르바초프와의 대화로 이어졌고, 하우는 대처 수상과 고르바초프 사이에 "비범한 케미"가 있다고 평가했다. 그는 이 시기(1983~1985년)를 자신의 경력에서 가장 행복하고 생산적이었던 때로 회고하며, 세계 정상들과 교류하고 대처 수상과 함께 결정을 내렸던 경험을 강조했다. 특히 1982년 9월 6일 캐스퍼 웨인버거와의 만남을 언급하며, 미국과의 성공적인 협력이 유럽 공산주의 종식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
하우는 1984년 중영 공동선언(홍콩 반환 협상)을 성공적으로 이끌었으며,[16] 조지 슐츠 미국 국무장관과 긴밀한 관계를 발전시켜 대처 수상과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간의 긴밀한 협력을 지원했다.[16]
그러나 하우의 외무장관 임기는 대처 수상과의 갈등으로 점철되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문제, 영국의 유럽 공동체와의 관계, 1985년 영아일랜드 협정 등 여러 사안에서 이견을 보였다. 하우는 온화하고 정중하며 세심한 성격으로 참모들에게 존경받는 상사였지만, 남아프리카 공화국 제재와 무역 금수 조치에 대한 인권 문제, 유럽 문제에 대한 대처 수상의 강경한 태도에 깊은 우려를 표명하면서 총리 관저(10번가)와 외무장관 관저(11번가) 사이에 긴장이 고조되었다. 정책 목표에 대한 근본적인 의견 차이는 대처 수상의 정치적 입지에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대처 수상의 지배적인 스타일은 하우의 온화함, 인내심, 협상 능력과 대조를 이루었다. 1986년 웨스트랜드 사건 당시 고위 장관들은 대처 수상의 사임을 거의 강요할 뻔했다.
1989년 6월, 하우와 당시 재무장관이었던 나이젤 로슨은 대처 수상이 유럽 환율 메커니즘(ERM) 가입에 반대하는 것에 대해 사임을 암시하며 압박했다. 하우는 유럽 통합을 지지하고 환율 안정의 필요성을 확신했기 때문에 ERM 가입을 강력히 주장했다.[3] 그러나 대처 수상은 외교관 출신인 찰스 파월 총리 비서실장의 조언에 더 의존했고, 이는 하우의 관료적인 스타일과 대조를 이루었다. 하우는 "그녀는 종종 나의 완고하고 조용한 옹호 방식에 짜증을 냈다"고 회고했다.
4. 3. 부총리 및 사임 (1989-1990)
1989년 7월, 당시 무명에 가까웠던 존 메이저가 예상치 못하게 하우의 뒤를 이어 외무장관에 임명되었다. 하우는 하원 원내대표, 추밀원 의장, 그리고 부총리가 되었다. 이 개각에서 하우는 내무장관직도 제안받았지만 거절했다.[17] 이 부분을 축소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하우의 국내 정치 복귀는 특히 대처의 언론 비서관 버나드 잉햄이 다음날 아침 기자회견에서 부총리직 임명의 중요성을 축소하며, 그 직책이 헌법적 의미가 없다고 말한 후로는 강등으로 여겨졌다.[18]
하우는 그 후 외무장관 관저인 체브닝을 포기해야 했다. 10번가(내각)에서 하우를 바라보는 회의적인 태도는 그를 정치적으로 약화시켰다. 비록 그가 후계자로서의 가능성 때문에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같은 해 말 그의 주요 동맹인 나이젤 로손이 재무부 장관직에서 사임한 것 또한 문제를 악화시켰다. 부총리 재직 중 하우는 인기 하락으로 고통받고 있던 대처 정부에 "경청하는 정부"로서 행정부를 재편성할 것을 암시적으로 요구하는 일련의 발언을 했다.[3]
하우는 1990년 11월 1일 사임 의사를 표명했다. 때로는 잘 알려진 수면제인 모가돈(Mogadon)을 언급하며 "모가돈맨"이라고 조롱받기도 했던 하우는 11월 13일, 총리 질의 시간(Prime Minister's Questions)과 의원들이 가득 찬 하원에서 대놓고 대처 정부에 타격을 가했다. 하우는 나중에 커뮤니티 차지(Community Charge)가 무능하게 시행되었다고 주장했지만, 국내 폭동보다는 유럽 정책의 방향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와 대처의 갈등은 스타일보다는 실질적인 문제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조세와 유럽 통합과 같은 헌법 및 행정 문제에 있어서 보다 중도적인 입장으로 회귀할 것을 주장했다. 하우는 교육받고 변호사 자격을 갖춘 성실한 인물로서 당 내에서 온건한 입장을 대변했다. 직설적이었지만, 화해적이고 동료애적인 태도를 보였다.[4]
하우는 신중한 어조의 사임 서한을 작성하여 영국과 유럽 공동체(European Community) 관계 전반에 대한 총리의 처리 방식을 비판했다. 유럽 문제에 대한 하우와 대처의 의견 불일치가 실질적인 문제가 아닌 스타일의 차이에 불과하다는 10 다우닝가(10 Downing Street)의 주장이 대체로 성공을 거둔 후, 하우는 강력한 반대 의사를 전달하기로 했다. 그는 1990년 11월 13일 하원에서의 사임 연설에서 대처가 국가의 미래에 점점 더 심각한 위험을 초래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그는 그녀가 재무장관과 영란은행 총재가 제안한 EMU(유럽통화연합) 정책을 약화시켰다고 비판했다.[22]
하우는 유럽 EMU에 대한 영국의 협상에 대해 크리켓에 비유하며 이렇게 말했다. "이는 마치 우리의 선발 타자들을 크리즈(타석)에 보낸 것과 같지만, 첫 공이 던져지기 전에 그들의 배트가 주장에 의해 부러진 것을 발견하는 것과 같습니다."[23] 그는 연설을 마무리하며 내각 동료들에게 호소했다. "이제 저 자신도 너무 오랫동안 씨름해 온 충성심의 비극적인 갈등에 대한 자신의 반응을 고려할 때가 왔습니다."[24]
5. 은퇴 이후
1992년 하원에서 은퇴했으며, 같은 해 6월 30일 서리주 탠드리지(Tandridge)의 아베라본(Aberavon) 남작으로 종신 귀족 작위를 받아 상원 의원이 되었다.[27][46] 그 직후 회고록 ''Conflict of Loyalty''|한국어 번역영어 (1994)을 출판했다.[45] 상원에서 하우는 외교 정책 및 유럽 문제에 대해 계속 발언했으며, 1997년부터 노동당 정부의 상원 개혁에 반대했다.[28] 2015년 5월 19일 상원 의원에서 은퇴했다.[30][31][45]
하원 은퇴 후, 하우는 미국 법률회사 존스데이(Jones Day)의 국제 정치 고문, 글락소스미스클라인(GlaxoSmithKline)과 J. P. 모건의 이사, 런던대학교 동양 및 아프리카 연구 학교(School of Oriental and African Studies, SOAS) 방문 교수를 포함하여 기업, 법률 및 학계에서 여러 직책을 맡았다.
그의 아내 엘스페스는 방송 표준 위원회(Broadcasting Standards Commission)의 전 회장으로 2001년 종신 귀족이 되었다.[32] 아이들리코트(Idlicote)의 하우 여남작과 그녀의 남편은 자신의 권리로 작위를 가진 몇 안 되는 부부 중 하나였다. 하우 경은 영국 미터법 협회(UK Metric Association)와 보수당 외교 및 연방부 위원회의 후원자였다.[33] 1996년 생일 기념 훈장에서 명예 동반자 훈장(Member of the Order of the Companions of Honour, CH)을 받았다.[34] 그는 SOAS 명예 연구원이었다.[35] 1996년부터 2006년까지 그는 전문가 아카데미의 회장을 지냈고, 2014년 11월 분쟁 해결 방법 개발에 대한 공헌을 인정받아 명예 연구원이 되었다.[36]
하우는 전 국회의원이자 마거릿 대처의 의회 사무차관이자 측근이었던 이언 고우(Ian Gow)의 절친한 친구였다. 그는 1990년 7월 IRA가 고우를 살해한 후 그의 추모식에서 고우에 대한 주요 추도 연설을 했다.[37]
하우는 2015년 10월 9일 워릭셔주 아이들리코트(Idlicote)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8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1][43][45]
6. 정치적 유산
제프리 하우는 대처리즘 경제 정책의 핵심 설계자이자 추진자로서 영국 경제의 자유화와 경쟁력 강화에 기여했다. 외무장관으로서 냉전 종식과 유럽 통합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으며, 홍콩 반환 협상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4] 그러나 유럽 통합 문제를 둘러싼 대처 총리와의 갈등은 결국 그의 사임과 대처 총리의 실각으로 이어졌다.
1990년 11월 13일, 하우는 하원에서 사임 연설을 통해 대처가 국가의 미래에 심각한 위험을 초래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대처의 유럽통화연합(EMU) 관련 협상 방식을 크리켓 경기에 비유하며 "이는 마치 우리의 선발 타자들을 크리즈(타석)에 보낸 것과 같지만, 첫 공이 던져지기 전에 그들의 배트가 주장에 의해 부러진 것을 발견하는 것과 같습니다."라고 말했다.[23] 그는 연설을 마무리하며 내각 동료들에게 "이제 저 자신도 너무 오랫동안 씨름해 온 충성심의 비극적인 갈등에 대한 자신의 반응을 고려할 때가 왔습니다."라고 호소했다.[24]
하우의 사임 연설은 1990년 보수당 대표 선거에서 마이클 헤셀타인이 대처에게 도전하는 계기가 되었고, 결국 대처는 사임했다.[26] 이후 존 메이저가 총리직을 이어받아 1992년 영국 총선에서 보수당의 승리를 이끌었다.[26] 그의 사임 연설은 영국 정치사에서 중요한 순간 중 하나로 기록되고 있다.
7. 역대 선거 결과
선거명 | 직책명 | 대수 | 정당 | 득표율 | 득표수 | 결과 | 당락 |
---|---|---|---|---|---|---|---|
1955년 선거 | 하원의원 (애버라본 선거구) | 41대 | 보수당 | 30.46% | 12,706표 | 2위 | 낙선 |
1959년 선거 | 하원의원 (애버라본 선거구) | 42대 | 보수당 | 27.60% | 12,759표 | 2위 | 낙선 |
1964년 선거 | 하원의원 (베빙톤 선거구) | 43대 | 보수당 | 45.33% | 26,943표 | 1위 | |
1966년 선거 | 하원의원 (베빙톤 선거구) | 44대 | 보수당 | 48.01% | 28,208표 | 2위 | 낙선 |
1970년 선거 | 하원의원 (라이게이트 선거구) | 45대 | 보수당 | 53.86% | 28,462표 | 1위 | |
1974년 2월 선거 | 하원의원 (서레이이스트 선거구) | 46대 | 보수당 | 51.17% | 23,563표 | 1위 | |
1974년 10월 선거 | 하원의원 (서레이이스트 선거구) | 47대 | 보수당 | 52.42% | 22,227표 | 1위 | |
1979년 선거 | 하원의원 (서레이이스트 선거구) | 48대 | 보수당 | 62.84% | 28,266표 | 1위 | |
1983년 선거 | 하원의원 (서레이이스트 선거구) | 49대 | 보수당 | 62.90% | 27,272표 | 1위 | |
1987년 선거 | 하원의원 (서레이이스트 선거구) | 50대 | 보수당 | 63.39% | 29,126표 | 1위 |
참조
[1]
웹사이트
Devolution (Time) Bill [HL] – Second Reading
https://www.theywork[...]
2019-03-11
[2]
웹사이트
Howe, Geoffrey (b.1926)
http://www.historyof[...]
2015-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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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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