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영국 총선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1992년 영국 총선은 1979년부터 총리직을 지켜온 마가렛 대처의 사임 이후 존 메이저가 이끄는 보수당과 닐 키녹이 이끄는 노동당 간의 치열한 경쟁으로 치러졌다. 여론조사에서는 노동당의 우세가 예측되었으나, 보수당이 과반수 의석을 확보하여 정권을 유지했다. 주요 쟁점은 세금과 의료 서비스였으며, 선거 운동 과정에서 다양한 논란과 사건들이 발생했다. 선거 결과, 보수당은 14,093,007표를 얻어 역대 최고 득표수를 기록했지만, 과반 의석은 줄었다. 노동당은 득표율을 높였으나 정권 탈환에는 실패했다. 자유민주당은 20석을 얻으며 선전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992년 4월 - 1992년 로스앤젤레스 폭동
1992년 로스앤젤레스 폭동은 로드니 킹 사건 무죄 판결에 대한 흑인 사회의 분노와 인종 간 긴장, 경찰의 과잉 진압, 경제적 불평등, 한인-흑인 사회 갈등 등 복합적 요인으로 발생하여 6일간 로스앤젤레스 전역에서 인명 및 재산 피해를 초래하고 미국 사회의 인종 및 경찰 폭력 문제를 드러낸 사건이다. - 1992년 4월 - 과달라하라 폭발 사고
과달라하라 폭발 사고는 1992년 멕시코 과달라하라에서 발생한 가스 폭발 사건으로, 254명이 사망하고 15,000명이 집을 잃었으며, 부식된 송유관에서 누출된 휘발유가 하수관에 유입되어 폭발성 증기가 생성되면서 발생했다. - 영국의 총선 - 2001년 영국 총선
2001년 영국 총선은 노동당이 압승했으나 역대 최저 투표율을 기록했고 보수당은 참패했으며 자유민주당의 약진과 지역 정당들의 의석 변동이 나타난 선거이다. - 영국의 총선 - 2010년 영국 총선
2010년 영국 총선은 보수당이 제1당이 되었으나 과반수 확보에 실패하여 자유민주당과 연립정부를 구성, 데이비드 캐머런이 총리가 되었고 36년 만에 헝 의회 상황을 초래한 선거이다.
1992년 영국 총선 | |
---|---|
지도 정보 | |
![]() | |
![]() | |
선거 정보 | |
선거명 | 1992년 영국 총선 |
국가 | 영국 |
유형 | 의회 |
선거일 | 1992년 4월 9일 |
이전 선거 | 1987년 영국 총선 |
이전 선거 연도 | 1987년 |
다음 선거 | 1997년 영국 총선 |
다음 선거 연도 | 1997년 |
선출 의석 | 651석 |
과반 의석 | 326석 |
투표율 | 77.7% (2.4%) |
선거 결과 | |
정당 | 보수당 |
![]() | |
리더 | 존 메이저 |
리더 취임일 | 1990년 11월 27일 |
리더 선거구 | 헌팅던 |
이전 선거 결과 | 376석, 42.2% |
의석 | 336석 |
의석 증감 | 40석 |
득표수 | 14,094,116 |
득표율 | 41.9% |
득표율 증감 | 0.3% |
정당 | 노동당 |
![]() | |
리더 | 닐 키녹 |
리더 취임일 | 1983년 10월 2일 |
리더 선거구 | 이슬루인 |
이전 선거 결과 | 229석, 30.8% |
의석 | 271석 |
의석 증감 | 42석 |
득표수 | 11,557,062 |
득표율 | 34.4% |
득표율 증감 | 3.6% |
정당 | 자유민주당 |
![]() | |
리더 | 패디 애시다운 |
리더 취임일 | 1988년 7월 16일 |
리더 선거구 | 요빌 |
이전 선거 결과 | 22석, 22.6% |
의석 | 20석 |
의석 증감 | 2석 |
득표수 | 6,027,038 |
득표율 | 17.8% |
득표율 증감 | 4.8% |
총리 정보 | |
직책 | 총리 |
선거 전 총리 | 존 메이저 |
선거 전 총리 소속 정당 | 보수당 |
선거 후 총리 | 존 메이저 |
선거 후 총리 소속 정당 | 보수당 |
2. 선거 배경
1987년 영국 총선에서 마거릿 대처 총리가 이끄는 보수당은 압승을 거두며 세 번째 임기를 시작했다. 그러나 임기 말, 당내 분열과 커뮤니티 차지(일명 인두세) 도입에 대한 거센 반발, 그리고 심화되는 경기 침체로 인해 대처 정부의 지지율은 급락했다. 반면 닐 키녹이 이끄는 노동당은 지지율을 회복하며 보수당을 앞서기 시작했다.
결국 마거릿 대처는 1990년 11월 당대표 경선 이후 총리직에서 물러났고, 재무장관이었던 존 메이저가 후임 총리로 선출되었다. 메이저 총리의 등장은 보수당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으며, 걸프 전쟁에서의 성공적인 대응과 논란이 많았던 인두세 폐지 결정 등으로 초기 지지율 상승을 이끌었다.[4]
하지만 1992년 초에도 경기 침체는 계속되었고 실업자 수가 250만 명을 넘어서는 등 경제 상황은 여전히 어려웠다. 총선이 임박하면서 여론조사에서는 노동당의 근소한 우위 또는 어느 정당도 과반수를 차지하지 못하는 상황(헝 의회)이 예측되었으나, 지지율은 유동적이었다. 존 메이저 총리는 예산안 발표 다음 날인 1992년 3월 11일에 총선 실시를 발표했다. 선거 기간 동안 보수당은 더 선과 같은 일부 언론의 강력한 지지를 받았다.[5] 이처럼 보수당의 장기 집권에 대한 피로감과 경제난 속에서 노동당의 정권 교체 기대감이 높아졌으나, 선거 결과는 예측과 다르게 나타났다.
2. 1. 대처 총리의 사임과 메이저 총리의 등장
보수당은 1987년 영국 총선에서 마거릿 대처의 지휘 아래 압승을 거두며 재집권에 성공했다. 대처는 1979년 집권 이후 1983년 총선에서도 압도적인 다수 의석을 확보했지만, 보수당 내 분열과 많은 비판을 받았던 커뮤니티 차지(인두세) 도입, 그리고 심화되는 영국 경기 침체로 인해 1990년 11월 사임 직전까지 인기와 정부 지지율이 급격히 하락했다.당시 노동당은 여론 조사에서 보수당을 최대 20%p 차이로 앞서기도 했다. 결국 대처는 마이클 헤셀타인이 촉발한 1990년 보수당 당대표 선거 이후 1990년 11월에 수상직에서 물러났고, 재무장관이었던 존 메이저가 그 뒤를 이었다. 메이저의 등장은 대중들에게 비교적 호의적으로 받아들여졌고, 이는 노동당이 내세운 "변화의 시간"이라는 구호의 영향력을 다소 약화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4]
1991년 1월 16일, 사막의 폭풍 작전이 시작되며 걸프 전쟁이 발발했다. 이는 메이저 정부의 첫 번째 주요 외교적 시험대였다. 전쟁은 비교적 신속하고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고, 이는 심화되는 경기 침체와 실업 증가에도 불구하고 메이저 수상의 지지율을 끌어올리는 요인이 되었다. 또한, 논란이 많았던 커뮤니티 차지(인두세)를 주민세로 대체하겠다는 메이저의 발표 역시 지지율 상승에 기여했다. 노동당은 1991년 총선 실시를 거듭 요구했지만, 메이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1992년 초가 되자 경기 침체는 여전히 해소되지 않았고, 실업자 수는 250만 명을 넘어섰으며, 총선이 임박했다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대부분의 여론 조사는 연립 정부 구성이나 근소한 차이의 노동당 과반수 확보를 예측했지만, 1990년 11월 대처 사임 이후 여론 조사에서 보수당과 노동당의 지지율 선두는 여러 차례 뒤바뀌었다.
의회는 법적으로 1992년 6월 16일까지 해산되어야 했다. 예상대로 메이저는 재무장관 노먼 라몬트가 1992년 영국 예산을 발표한 다음 날인 3월 11일에 총선 실시를 발표했다. 보수당은 많은 신문, 특히 타블로이드 신문인 "더 선"으로부터 강력한 지지를 받았다. "더 선"은 노동당에 반대하는 일련의 기사를 실었으며, 선거 당일에는 노동당이 승리할 경우 "영국을 떠나는 마지막 사람은 불을 꺼달라"는 도발적인 문구를 1면에 싣기도 했다.[5] 이처럼 존 메이저가 이끄는 보수당과 닐 키녹 대표가 이끄는 노동당 간의 치열한 경쟁이 예상되었으며, 투표일까지 여론조사에서는 노동당의 우세가 점쳐졌으나 실제 결과는 보수당의 과반수 의석 확보 및 정권 유지로 나타났다.
2. 2. 노동당의 변화와 기대
1979년부터 마가렛 대처 총리가 이끌던 보수당 정권은 존 메이저 총리로 이어지며 장기 집권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닐 키녹이 이끄는 노동당은 지지율을 점차 회복하며 변화에 대한 기대를 모았다. 투표일까지 실시된 각종 여론조사에서는 노동당이 꾸준히 우세를 보였으나, 실제 선거 결과는 보수당이 과반수 의석을 지켜 정권을 유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2. 3. 걸프전과 경제 침체
1987년 영국 총선에서 마거릿 대처가 이끄는 보수당은 압승을 거두며 재집권에 성공했다. 그러나 대처 정부는 임기 말 당 내 분열, 인기 없던 커뮤니티 차지(인두세) 도입, 그리고 심화되는 영국 경제 침체로 인해 1990년 11월 사임 직전까지 지지율이 급격히 하락했다. 당시 노동당은 여론 조사에서 보수당을 최대 20%p 차이로 앞서기 시작했다. 대처는 마이클 헤셀타인이 촉발한 1990년 11월 당대표 선거 이후 사임했고, 재무장관이었던 존 메이저가 그 뒤를 이었다. 이는 대중에게 호의적으로 받아들여졌고, 노동당이 내세웠던 "변화의 시간"이라는 구호의 영향력을 약화시켰다.[4]1991년 1월 16일, 사막의 폭풍 작전이 시작되며 걸프 전쟁이 발발했다. 이는 메이저 정부의 첫 번째 외교 위기였다. 이 갈등은 신속하고 성공적으로 해결되었고, 계속되는 경제 침체와 실업 증가에도 불구하고 메이저 총리의 지지율을 끌어올리는 요인이 되었다. 또한, 메이저 총리가 논란이 많았던 커뮤니티 차지(인두세)를 폐지하고 주민세로 대체하겠다고 발표한 것도 지지율 상승에 기여했다. 노동당은 1991년에 조기 총선을 실시할 것을 거듭 요구했지만, 메이저 총리는 이를 거부했다.
1992년 초에도 경제 침체는 여전히 끝나지 않았고, 실업자 수는 250만 명을 넘어섰으며, 총선이 임박했다. 대부분의 여론 조사는 과반수 정당 없는 의회(헝 의회)가 구성되거나 노동당이 근소한 차이로 승리할 것으로 예측했지만, 1990년 11월 메이저 총리 취임 이후 여론 조사에서 보수당과 노동당의 지지율 선두는 여러 차례 뒤바뀌었다.
의회는 법적으로 1992년 6월 16일까지 해산되어야 했다. 예상대로 메이저 총리는 재무장관 노먼 라몬트가 예산안을 발표한 다음 날인 3월 11일에 총선 실시를 발표했다. 보수당은 선거 운동 기간 동안 많은 신문, 특히 타블로이드 신문인 더 선으로부터 강력한 지지를 받았다. "더 선"은 노동당에 반대하는 일련의 기사를 실었고, 선거 당일에는 노동당이 승리할 경우 "영국을 떠나는 마지막 사람은 불을 꺼달라"는 내용의 자극적인 1면 기사를 게재했다.[5]
3. 선거 운동
제50대 영국 의회는 1992년 3월 16일 월요일 마지막 회의를 열고 같은 날 해산되었다.[6]
닐 키녹 대표가 이끄는 노동당은 1987년 총선 패배 이후 변화를 거듭하며 선거 운동에 자신감을 보였다. 당시 대부분의 여론조사에서 노동당이 근소하게 앞서, 어느 정당도 과반수를 확보하지 못하는 연립정부 구성 가능성이 점쳐졌다.
선거 운동은 전통적인 쟁점인 세금과 의료 서비스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존 메이저 총리는 뒤집힌 연단 위에서 연설하는 소탈한 모습으로 유세를 펼쳤다. 이민 문제 또한 쟁점화되었는데, 보수당 소속 케네스 베이커 내무장관은 노동당 집권 시 이민자 급증 가능성을 언급하며 논란을 일으켰다. 보수당은 또한 "노동당의 이중 타격"이라는 이름의 포스터를 통해 노동당의 세금 정책을 공격했다.
노동당은 선거 초반 국민보건 서비스(NHS) 대기자 명단 관련 선거 방송의 진실성 논란, 이른바 "제니퍼의 귀 전쟁"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다. 이후 지지율을 회복하는 듯했으나, 셰필드 아레나에서 열린 대규모 유세("셰필드 집회") 이후 다시 지지율이 하락하는 모습을 보였다. 일부에서는 이 집회에서 닐 키녹 대표가 보인 지나친 낙관론이 영향을 미쳤다고 분석했으나[7], 실제 영향은 미미했다는 반론도 존재한다.[8]
한편, 1987년 총선 이후 사민당-자유당 연합이 합당하여 창당된 자유민주당에게는 이번이 첫 총선이었다. 패디 애슈다운 대표의 지도 아래, 자유민주당은 교육 문제와 선거 제도 개혁을 주요 공약으로 내세우며 선거 운동을 펼쳤다.[9]
선거 운동 기간 대부분 날씨가 좋지 않았으나, 투표일인 4월 9일에는 맑은 날씨를 보여 높은 투표율에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10][11][12]
3. 1. 주요 쟁점
닐 키녹의 지도 아래 노동당은 1987년 총선 패배 이후 더욱 발전하고 변화를 거듭했다. 노동당은 대부분의 여론조사에서 근소한 우위를 보이며 자신감에 차서 선거 운동에 돌입했다. 이러한 추세가 유지된다면 어떤 단일 정당도 과반수 의석을 확보하지 못하는 연립정부가 될 것으로 예상되었다.각 정당은 세금과 의료 서비스라는 익숙한 주제를 가지고 선거 운동을 벌였다. 메이저 총리는 공개 집회에서 뒤집힌 연단 위에 서서 연설하는 소박한 이미지를 연출하는 것으로 유명해졌다.
보수당은 이민 문제를 주요 쟁점으로 부각시키려 했다. 내무장관 케네스 베이커는 노동당이 집권하면 개발도상국 이민자 유입이 급증할 것이라는 논란성 발언을 하여, 일각에서는 이를 백인 노동 계급 유권자를 겨냥한 인종차별적 전략이라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 또한 보수당은 "노동당의 이중 타격(Labour's Double Whammy)"이라는 포스터를 통해, 노동당 집권 시 세금 인상과 물가 상승이 동시에 발생할 것이라고 공격했다. 이 포스터는 권투 글러브로 세금 인상과 인플레이션을 형상화하여 유권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한편, 노동당은 선거 운동 초반 "제니퍼의 귀 전쟁(War of Jennifer's Ear)" 논란에 휩싸였다. 이는 국민보건 서비스(NHS)의 긴 대기자 명단 문제를 다룬 노동당의 선거 방송 내용의 진위 여부에 대한 의혹이 제기된 사건이었다.
NHS 논란에도 불구하고 노동당은 4월 1일 여론조사에서 확실한 우위를 점하는 듯 보였으나, 다음 날 발표된 조사에서는 지지율 격차가 크게 줄어들었다. 일부 관측통들은 셰필드 아레나에서 열린 노동당의 대규모 유세, 이른바 "셰필드 집회"에서의 닐 키녹 대표의 과도하게 낙관적인 태도, 특히 "우리는 괜찮아!(We're all right!)"를 연호한 것이 오히려 유권자들에게 불안감을 주어 지지율 하락의 원인이 되었다고 분석했다.[7] 그러나 다른 분석가들과 선거 운동 관계자들은 이 집회의 영향이 미미했으며, 선거 패배 이후에 과장된 해석이 덧붙여졌다고 주장하기도 한다.[8]
이번 총선은 1987년 총선 이후 사민당-자유당 연합이 공식적으로 합당하여 창당된 자유민주당이 처음으로 치르는 선거였다. 합당 과정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솔직하고 호감 가는 이미지의 패디 애슈다운 대표의 지도 아래 자유민주당은 지지율 상승을 기대하며 선거에 임했다. 자유민주당은 선거 운동 기간 동안 교육 문제 해결과 선거 제도 개혁을 핵심 공약으로 내세웠다.[9]
3. 2. 셰필드 집회 논란
노동당은 선거 운동 초반 "제니퍼의 귀 전쟁"이라는 논란에 휩싸였다. 이는 국민보건 서비스(NHS) 대기자 명단에 관한 노동당의 선거 방송 내용의 진실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된 사건이었다.이후 노동당은 NHS 관련 논란에서 어느 정도 회복하는 듯 보였고, 4월 1일(소위 "붉은 수요일") 발표된 여론조사에서는 확실한 우위를 나타냈다. 그러나 바로 다음 날 나온 여론조사에서는 노동당의 지지율 우위가 상당히 줄어들었다. 많은 관측통들은 이러한 변화의 원인으로 4월 1일 셰필드 아레나에서 열린 노동당의 대규모 정치 집회, 이른바 '셰필드 집회'를 지목했다. 이 집회는 열광적인 분위기의 미국식 정치 컨벤션 형태로 진행되었는데, 특히 닐 키녹 대표가 연설 도중 We're all right!|위 아 올 라이트!eng라고 세 번 외친 장면이 문제가 되었다.[7] 지나치게 승리에 도취된 듯한 모습이 일부 유권자들에게 부정적인 인상을 주었다는 분석이 제기되었다.
하지만 일부 분석가들과 선거 운동에 참여했던 관계자들은 셰필드 집회가 실제 선거 결과에 미친 영향은 미미했으며, 선거가 끝난 후에야 언론 등에서 과도하게 주목받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8]
3. 3. 자유민주당의 참여
이번 선거는 1987년 총선 이후 사민당-자유당 연합의 공식 합병으로 새롭게 결성된 자유민주당이 처음으로 참여한 총선이었다. 합당 과정이 순탄치 않았지만, 호감 가는 솔직한 인물로 평가받던 패디 애슈다운의 강력한 지도력 아래 자유민주당은 지지율과 의석 확보를 기대하며 선거에 임했다. 선거 운동 기간 동안 자유민주당은 교육 문제와 투표 제도 개혁 공약에 집중했다.[9]4. 정당별 공약
각 정당은 선거 운동 기간 동안 익숙한 주제인 세금과 국민보건 서비스(NHS)를 중심으로 공약을 내세웠다.
보수당은 존 메이저 총리 아래 커뮤니티 차지(인두세)를 주민세로 대체하겠다고 발표하며 지지율 반등을 꾀하였다. 선거 운동 과정에서는 세금 문제를 집중적으로 부각하며, "노동당의 이중 타격"이라는 포스터를 통해 노동당 집권 시 세금 인상과 인플레이션이 심화될 것이라고 공격했다. 또한, 내무장관 케네스 베이커는 노동당이 집권하면 개발도상국 이민자 유입이 급증할 것이라는 논란이 많은 연설을 했는데, 이는 백인 노동 계급 유권자의 지지를 얻으려는 시도였다는 분석도 제기되었다. 보수당의 1992년 강령 제목은 "The Best Future For Britain|영국을 위한 최고의 미래eng"였다.
노동당은 닐 키녹 대표의 지도 아래 변화된 모습을 보이며 선거에 임했다. 노동당 역시 세금과 NHS 문제를 주요 공약으로 내세웠다. 특히 NHS 대기 환자 문제를 다룬 "제니퍼의 귀 전쟁"이라는 선거 방송을 통해 의료 서비스 개선을 강조했으나, 해당 방송의 진실성 여부가 논란이 되기도 했다. 일부에서는 셰필드 집회에서의 닐 키녹의 발언이 지지율 하락에 영향을 미쳤다고 분석하기도 하지만, 실제 영향은 미미했다는 반론도 있다.[7][8] 노동당의 1992년 강령 제목은 "It's time to get Britain working again|다시 일하는 영국을 만들 시간입니다eng"였다.
자유민주당은 1987년 영국 총선 이후 사민당-자유당 연합이 공식 합당하여 창당된 후 처음으로 총선을 치렀다. 패디 애슈다운 대표의 지도 아래 교육 문제와 투표 제도 개혁을 핵심 공약으로 내세우며 지지를 호소했다.[9] 자유민주당의 1992년 강령 제목은 "Changing Britain for good|영국을 영원히 바꾸다eng"였다.
아래는 각 정당의 1992년 총선 강령 링크이다.
- https://web.archive.org/web/20130619201834/http://www.politicsresources.net/area/uk/man/con92.htm 영국을 위한 최고의 미래 (The Best Future For Britain) – 1992년 보수당 강령.
- https://web.archive.org/web/20131209110043/http://www.politicsresources.net/area/uk/man/lab92.htm 다시 일하는 영국을 만들 시간입니다 (It's time to get Britain working again) – 1992년 노동당 강령.
- https://web.archive.org/web/20130603195707/http://www.politicsresources.net/area/uk/man/libdem92.htm 영국을 영원히 바꾸다 (Changing Britain for good) – 1992년 자유민주당 강령.
5. 여론조사
보수당은 1987년 영국 총선에서 마거릿 대처의 지휘 아래 압승을 거두며 재집권에 성공했다. 대처는 1979년 집권 이후 1983년에도 압도적인 다수 의석을 확보했지만, 당내 분열과 인기 없던 커뮤니티 차지(인두세), 그리고 심화되는 영국 경기 침체로 인해 1990년 11월 사임 직전까지 인기와 정부 지지율이 급격히 하락했다.
노동당은 여론 조사에서 보수당을 최대 20%p 차이로 앞서기 시작했다. 대처는 1990년 11월 당대표 경선 이후 사임했고, 당시 재무장관이었던 존 메이저가 그 뒤를 이었다. 이는 대중들에게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져 노동당의 "변화의 시간"이라는 주장의 영향력은 다소 줄어들었다.[4]
1991년 1월 16일, 사막의 폭풍 작전이 시작되며 걸프 전쟁이 발발했다. 이는 메이저 정부의 첫 번째 주요 외교적 시험대였다. 이 갈등은 비교적 신속하고 성공적으로 해결되었고, 이는 심화되는 경기 침체와 실업 증가에도 불구하고 메이저의 지지율을 끌어올리는 요인이 되었다. 또 다른 지지율 상승 요인은 논란이 많았던 커뮤니티 차지 (인두세)를 주민세로 대체하겠다는 메이저의 발표였다. 노동당은 1991년 총선 실시를 거듭 요구했지만, 메이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1992년이 시작될 무렵, 경기 침체는 여전히 끝나지 않았고 실업자 수는 250만 명을 넘어섰으며, 총선이 임박했다. 대부분의 여론 조사는 총선 결과가 연립 정부 구성이나 근소한 노동당의 과반수 정부가 될 것으로 예측했지만, 1990년 11월 이후 여론 조사에서 보수당과 노동당의 선두는 여러 차례 바뀌었다.
의회는 1992년 6월 16일 이후 해산될 예정이었다. 예상대로 메이저는 재무장관 노먼 라몬트가 예산을 발표한 다음 날인 3월 11일에 총선을 실시하기로 결정했다. 보수당은 많은 신문, 특히 "더 선"으로부터 강력한 지지를 받았다. "더 선"은 노동당에 반대하는 기사를 연이어 실었으며, 선거일에는 "영국을 떠나는 마지막 사람"이 노동당 승리 시 "불을 끄라"고 촉구하는 자극적인 1면 기사를 게재하기도 했다.[5]
투표일 전까지 거의 모든 여론조사는 연립정부가 구성되고 노동당이 가장 큰 정당이 되거나, 노동당이 약 19~23석 정도의 근소한 과반수 의석을 차지할 것으로 예측했다. 투표일 직전 며칠 동안 실시된 여론조사 역시 노동당이 아주 근소한 차이로 과반수 의석을 차지할 것이라고 예측했다.[16] 선거 운동 기간 동안 발표된 50개의 여론조사 중 38개는 노동당이 근소하지만 명확한 우세를 보이고 있다고 제시했다.[17] 투표가 마감된 후 BBC와 ITV의 출구조사는 여전히 연립정부가 구성될 것이며 "보수당이 노동당보다 아주 근소하게 더 많은 의석을 확보할 것"이라고 예측했다.[18]
선거 운동 막바지 여론조사에서 노동당과 보수당이 접전을 벌였기에, 실제 선거 결과는 언론과 여론조사 기관 관계자들에게 큰 놀라움으로 다가왔다. 여론조사가 실제 결과를 예측하는 데 실패한 것으로 드러나자, ''시장조사협회(Market Research Society)'' 차원의 조사가 이루어졌고, 이는 10년 후 영국여론조사위원회(British Polling Council) 설립의 계기가 되었다. 선거 후 대부분의 여론조사 기관은 소위 '수줍은 보수당 지지자 효과 (Shy Tory factor)'가 여론조사 결과에 영향을 미쳤다고 보고 조사 방법론을 수정했다.
6. 선거 결과
1992년 4월 9일 치러진 총선 결과, 존 메이저가 이끄는 보수당이 여론조사의 예상을 뒤엎고 승리하여 4연속 집권에 성공했다. 그러나 하원에서의 과반수 의석은 이전 선거의 102석에서 21석으로 크게 줄어들었다. 보수당은 14,093,007표를 얻었는데,[23] 이는 영국 총선 역사상 단일 정당 최다 득표 기록이다.
닐 키녹이 이끄는 노동당은 득표율과 의석수(42석 순증) 모두 이전 선거보다 증가하며 선전했지만, 정권 교체에는 실패했다. 패디 애슈다운이 이끄는 자유민주당은 20석을 확보했으나, 이전 사회민주당-자유당 연합 시절에 비해서는 득표율과 의석수가 감소했다.
이번 선거의 투표율은 77.7%[23]로, 1974년 이후 18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선거 패배의 결과로 노동당의 닐 키녹 당수와 로이 해터슬리 부당수가 사임했다. 보수당에서는 당 의장 크리스 패튼을 포함한 9명의 장관급 인사가 낙선하는 이변이 있었다.
6. 1. 총괄


1992년 영국 총선은 1979년부터 집권해 온 보수당과 지지율을 회복하던 노동당 간의 치열한 경쟁 속에서 치러졌다. 마가렛 대처의 뒤를 이어 수상이 된 존 메이저가 보수당을 이끌었고, 닐 키녹이 노동당을 이끌었다. 선거일인 1992년 4월 9일까지 발표된 여론조사에서는 꾸준히 노동당의 우세가 점쳐졌으나, 실제 결과는 보수당이 예상을 뒤엎고 승리하여 정권을 유지했다.
투표율은 77.67%[23]로 18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보수당은 1987년 대비 득표율이 0.3% 감소하는 데 그쳤지만, 하원에서의 전체 과반수는 102석에서 21석으로 크게 줄었다. 보수당은 14,093,007표를 얻었는데,[23] 이는 영국 총선 역사상 단일 정당 최다 득표 기록으로, 1951년 노동당이 기록했던 1,398만 표를 넘어선 수치다. 하지만 줄어든 과반수로 인해 메이저 정부는 이후 불안정한 운영을 이어갔다. 다른 정당으로의 의원 이탈, 보궐선거 패배, 유럽 정책 관련 당내 반란 등으로 보수당의 과반수는 점차 줄어들어 1996년에는 단 1석으로 감소했고, 1997년 총선까지 소수 정부 상태에 놓이게 된다. 이번 선거에서는 당 의장 크리스 패튼을 포함해 9명의 보수당 장관이 지역구에서 패배하는 이변도 있었다.
노동당은 득표율과 의석수 모두 이전 선거보다 증가(득표율 3.6%p 증가, 의석 42석 순증)했지만, 여론조사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하고 정권 교체에 실패했다. 많은 분석가들은 노동당의 패배 원인으로 중산층 유권자들 사이에 남아있는 "증세", "노동조합당", "파업 찬양", "과도한 복지" 등의 부정적 이미지를 지적했다. 특히 교외 지역에 자가를 소유한 화이트칼라와 숙련 노동자층이 많은 잉글랜드 남부에서의 부진이 뼈아팠다. 이 지역 177석 중 노동당은 12석을 얻는 데 그쳤고, 비교적 선전한 런던을 포함해도 261석 중 45석 확보에 머물렀다. 바실던 지역구 결과는 신흥 부자 계층의 노동 계층 유권자, 소위 에섹스 맨이 보수당을 강력하게 지지하는 경향을 보여주는 사례로 여겨졌다. 또한 이 선거는 보수당이 노동당보다 런던에서 더 많은 의석(48석 대 35석)[23]을 차지한 마지막 총선이기도 하다. (1997년 선거에서 보수당은 런던에서 11석만 얻었다.[21])
자유민주당에게는 창당 후 첫 총선이었으며, 어려운 창당 과정을 겪은 것에 비하면 비교적 성공적인 선거 운동을 치렀다는 평가를 받았다.[22] 하지만 이전 자유당-SDP 연합 시절에 비해 득표율과 의석수는 감소했다 (득표율 4.8%p 감소, 의석 2석 순감).
선거 패배의 책임을 지고 노동당 당수 닐 키녹과 부당수 로이 해터슬리는 선거 직후 사임했다. 후임 당수로는 존 스미스, 부당수로는 마가렛 베켓이 선출되었다. 스미스는 정권 탈환을 위한 노력을 시작했으나 1994년 5월 심장마비로 급사했고, 그의 뒤를 이은 토니 블레어는 노동당을 광범위한 국민의 지지를 받는 정당으로 개혁하는 작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게 된다.
언론의 영향력, 특히 타블로이드 신문 ''더 선''의 역할에 대한 논란도 있었다. ''더 선''은 선거 다음 날 "선거는 더 선이 이겼다" (It's The Sun Wot Won It)라는 유명한 헤드라인을 1면에 실었다. 훗날 루퍼트 머독은 리버슨 조사에서 이 헤드라인이 "악명 높고", "취향이 없고 잘못되었다"고 증언했지만,[19] 당시에는 ''더 선''의 노골적인 반(反)노동당 캠페인이 선거 결과에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 많았다. 토니 블레어 역시 이러한 분석을 받아들여, 야당 당수 시절과 총리 시절 모두 ''더 선''의 지지를 얻기 위해 노력했다.
노동당 패배의 또 다른 원인으로 셰필드에서 열린 노동당 선거 집회가 거론되기도 한다. 일부에서는 키녹이 이 집회에서 승리에 도취되어 "자신감이 과하고 건방졌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정치 평론가 스티브 리차즈는 이 집회가 패배 후 "치명적인 사건으로 신화적인 지위를 얻었다"고 주장하며, 실제로는 선거 결과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은 "허위 정보"라고 평가했다. 그는 선거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는 이 집회가 실수였다는 인식이 없었으며, 오히려 BBC의 존 콜과 같은 베테랑 기자도 당시에는 긍정적으로 평가했다고 지적했다.[20]
지역적으로 노동당은 1979년 이후 처음으로 많은 의석을 탈환하며 영국 북부에서 보수당의 하락세를 이어갔다. 웨일스에서도 노동당과 플라이드 컴리가 강세를 보이며 보수당 지지율이 하락했다. 반면 보수당은 미들랜즈 지역에서도 지지율 하락세를 보이기 시작했지만, 스코틀랜드에서는 의석을 한 석 순증하며 약간의 지지율 증가를 이뤘다. 남동부, 남서부, 런던, 동부 잉글랜드에서는 보수당의 득표율이 유지되어 큰 손실은 없었다.
한편, 노동당에서 제명되거나 공천이 취소되어 무소속으로 출마했던 데이브 넬리스트, 테리 필즈, 론 브라운, 존 휴스, 시드 비드웰 등은 모두 낙선했다. 교도소에서 선거 운동을 벌인 스코틀랜드 밀리턴트 노동당의 토미 셰리던은 글래스고 폴록에서 19%라는 비교적 높은 득표율을 기록했다.
이번 선거에서는 전 육상 선수이자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세바스찬 코(보수당)와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수상자인 배우 글렌다 잭슨(노동당)이 당선되어 눈길을 끌었다.[34]
정당 | 당수 | 득표수 | 득표율 (%) | 증감 (%) | 의석수 | 증감 | |
---|---|---|---|---|---|---|---|
보수당 | 존 메이저 | 14,093,007 | 41.9 | -0.3 | 336 | -40 | |
노동당 | 닐 키녹 | 11,560,484 | 34.4 | +3.6 | 271 | +42 | |
자유민주당 | 패디 애슈다운 | 5,999,906 | 17.8 | -4.8 | 20 | -2 | |
스코틀랜드 국민당 (SNP) | 알렉스 샐몬드 | 629,564 | 1.9 | +0.6 | 3 | 0 | |
얼스터 연합당 (UUP) | 제임스 몰리노 | 271,049 | 0.8 | 0.0 | 9 | 0 | |
사회민주노동당 (SDLP) | 존 흄 | 184,445 | 0.5 | 0.0 | 4 | +1 | |
잉글랜드 웨일스 녹색당 | 진 램버트 & 리처드 로슨 | 170,047 | 0.5 | +0.2 | 0 | 0 | |
플라이드 컴리 (PC) | 데이피드 위글리 | 156,796 | 0.5 | +0.1 | 4 | +1 | |
민주연합당 (DUP) | 이언 페이즐리 | 103,039 | 0.3 | 0.0 | 3 | 0 | |
신페인당 | 제리 애덤스 | 78,291 | 0.2 | -0.1 | 0 | -1 | |
울스터 인민연합당 (UPUP) | 제임스 킬페더 | 19,305 | 0.1 | 0.0 | 1 | 0 | |
기타 정당 및 무소속 | 347,687 | 1.0 | - | 0 | -1 | ||
계 | 33,614,074 | 100.0 | 651 | 0 | |||
투표율 | 77.7% |
6. 2. 지역별 결과
보수당 | 노동당 | 자민당 | PC/SNP | 기타 | 합계 | |
---|---|---|---|---|---|---|
노스이스트잉글랜드 | 6 | 29 | 1 | - | - | 36 |
노스웨스트잉글랜드 | 27 | 44 | 2 | - | - | 73 |
요크셔 험버 | 20 | 34 | - | - | - | 54 |
이스트미들랜즈 | 28 | 14 | - | - | - | 42 |
웨스트미들랜즈 | 29 | 29 | - | - | - | 58 |
이스트 잉글랜드 | 17 | 3 | - | - | - | 56 |
런던 | 48 | 35 | 1 | - | - | 84 |
사우스이스트잉글랜드 | 106 | 3 | - | - | - | 109 |
사우스웨스트잉글랜드 | 38 | 4 | 6 | - | - | 48 |
웨일스 | 6 | 27 | 1 | 4 | - | 38 |
스코틀랜드 | 11 | 49 | 9 | 3 | - | 72 |
합계 | 336 | 271 | 20 | 7 | - | 634 |
이번 선거는 노동당이 1979년 이후 처음으로 많은 의석을 탈환하면서 보수당의 영국 북부 지역에서의 하락세가 이어지는 모습을 보였다. 보수당은 미들랜즈 지역에서도 지지율이 하락하기 시작했지만, 스코틀랜드에서는 의석을 한 석 순증하는 등 약간의 지지율 증가를 이루었다. 노동당과 플라이드 컴리는 웨일스에서 강세를 보였고, 보수당의 지지율은 하락했다. 그러나 남동부, 남서부, 런던, 동부 잉글랜드에서는 보수당의 득표율이 유지되어 의석 손실은 거의 없었다. 특히 바실던과 같은 지역은 신흥 부자 계층의 노동 계층 요소, 소위 에섹스 맨이 보수당을 강력하게 지지하는 경향을 보여주는 사례로 여겨졌다. 이 선거는 보수당이 노동당보다 런던에서 더 많은 의석(48석 대 35석)[23]을 차지한 마지막 총선이기도 하다. 1997년 총선에서 런던의 보수당 의석은 11석으로 크게 줄었다.[21]
6. 3. 정당별 결과
1992년 4월 9일에 치러진 총선의 투표율은 77.7%[23]로 18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존 메이저가 이끄는 보수당은 예상을 깨고 승리하여 4연속 집권에 성공했으나, 하원에서의 과반수 의석은 이전 선거의 102석에서 21석으로 크게 줄어들었다. 보수당은 14,093,007표를 얻어 영국 총선 역사상 단일 정당 최다 득표 기록을 세웠다.[23] 이는 1951년 영국 총선에서 노동당이 기록했던 1,398만 표를 넘어선 수치이다. 그러나 득표율은 1987년 대비 0.3% 감소한 41.9%에 그쳤다. 닐 키녹이 이끄는 노동당은 득표율이 3.6% 증가(34.4%)하고 의석수도 42석 늘어난 271석을 확보하며 선전했으나, 정권 교체에는 실패했다. 패디 애슈다운이 이끄는 자유민주당은 17.8%의 득표율로 20석을 얻었으나, 이전 사회민주당-자유당 연합 시절보다 득표율과 의석수가 모두 감소했다.
이번 선거 결과, 보수당 의장 크리스 패튼을 포함해 9명의 장관급 인사가 낙선했다. 노동당은 여론조사에서 꾸준히 우위를 보였으나, 실제 선거에서는 보수당이 승리했다. 이는 중산층 유권자들이 노동당 집권 시 증세나 노동조합의 영향력 강화 등을 우려하여 막판에 보수당 지지로 돌아섰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특히 교외 자가 소유 비율이 높은 잉글랜드 남부 지역에서 보수당의 강세가 두드러졌다. 런던에서는 보수당이 노동당보다 많은 48석을 얻었지만, 이는 보수당이 런던에서 우위를 점한 마지막 총선이 되었다.[23][21]
선거 패배의 책임을 지고 노동당의 닐 키녹 당수와 로이 해터슬리 부당수가 사임했으며, 후임으로 존 스미스와 마가렛 베켓이 각각 선출되었다.
한편, 전 육상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세바스찬 코(보수당)와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수상자인 배우 글렌다 잭슨(노동당)이 이번 선거를 통해 하원의원에 당선되었다.[34]
정당 | 당수 | 득표수 | 득표율 (%) | 득표율 증감 (%) | 의석수 | 의석수 증감 |
---|---|---|---|---|---|---|
보수당 | 존 메이저 | 14,093,007 | 41.9 | -0.3 | 336 | -41 |
노동당 | 닐 키녹 | 11,560,484 | 34.4 | +3.6 | 271 | +42 |
자유민주당 | 패디 애슈다운 | 5,999,906 | 17.8 | -4.8 | 20 | -2 |
스코틀랜드 국민당 | 알렉스 샐몬드 | 629,564 | 1.9 | +0.6 | 3 | 0 |
얼스터 연합당 | 제임스 몰리노 | 271,049 | 0.8 | 0.0 | 9 | 0 |
사회민주노동당 | 존 흄 | 184,445 | 0.5 | 0.0 | 4 | +1 |
플라이드 컴리 | 데이피드 위글리 | 156,796 | 0.5 | +0.1 | 4 | +1 |
민주연합당 | 이언 페이즐리 | 103,039 | 0.3 | 0.0 | 3 | 0 |
울스터 인민연합당 | 제임스 킬페더 | 19,305 | 0.1 | 0.0 | 1 | 0 |
기타 정당 및 무소속 | N/A | 596,279 | 1.8 | align="right" | | 0 | -1 |
총 유효표 | 33,614,074 | 100.0 | 651 |
7. 선거 이후
투표일까지 여론조사에서는 꾸준히 노동당(당수: 닐 키녹)이 우세한 것으로 나타났지만, 존 메이저 수상이 이끄는 보수당이 과반수 의석을 지켜 정권을 유지했다.
7. 1. 노동당 지도부 교체
(작성할 내용 없음)7. 2. 언론의 역할
다음 신문들은 선거에서 출마한 정당들을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지지했다.[14]신문 | 지지 정당 | 발행 부수 (백만 부) |
---|---|---|
더 선 | 보수당 | 3.6 |
데일리 미러 | 노동당 | 2.9 |
데일리 메일 | 보수당 | 1.7 |
데일리 익스프레스 | 보수당 | 1.5 |
데일리 텔레그래프 | 보수당 | 1.0 |
가디언 | 노동당 | 0.4 |
자유민주당 | ||
인디펜던트 | 없음 | 0.4 |
타임스 | 보수당 | 0.4 |
나중에 ''옵저버''에서 그들의 시티 독자들에게 충격적이었다고 묘사된 행보에서,[15] ''파이낸셜 타임스''는 이 총선에서 노동당을 지지했다.
참조
[1]
웹사이트
Neil Kinnock: Labour leader who lost 'unlosable' election predicts Starmer will end up in No 10
https://news.sky.com[...]
2024-07-05
[2]
뉴스
1992: Tories win again against odds
http://news.bbc.co.u[...]
2013-10-22
[3]
웹사이트
Election Statistics: UK 1918–2017
http://researchbrief[...]
House of Commons Library
2017-08-14
[4]
뉴스
Poll tracker: Interactive guide to the opinion polls
http://news.bbc.co.u[...]
2014-02-26
[5]
뉴스
Forty years of The Sun
http://news.bbc.co.u[...]
2013-10-22
[6]
웹사이트
Charities Bill [H.L.]
https://api.parliame[...]
1992-03-16
[7]
웹사이트
UK General Election 1992 – Neil "We're Alright" Kinnock at the 1992 Sheffield Rally
https://www.youtube.[...]
2019-05-15
[8]
서적
Kinnock: The Biography
Little, Brown Book Group
[9]
뉴스
1992 Personalities
http://news.bbc.co.u[...]
2013-10-22
[10]
웹사이트
Monthly Weather Report: March 1992
https://www.metoffic[...]
2021-06-03
[11]
웹사이트
Monthly Weather Report: April 1992
https://www.metoffic[...]
2021-06-03
[12]
웹사이트
BBC1 Election Day 1992 coverage
https://www.youtube.[...]
2007-12-28
[13]
뉴스
Swinney should stop his sneering at 'second best'
https://www.telegrap[...]
2009-07-30
[14]
웹사이트
Newspaper support in UK general elections
https://www.theguard[...]
2013-08-01
[15]
뉴스
FT's ebullient leader revels in the power of newsprint
https://www.theguard[...]
2020-03-28
[16]
뉴스
How did Labour lose in '92?: The most authoritative study of the last general election is published tomorrow. Here, its authors present their conclusions and explode the myths about the greatest upset since 1945
https://www.independ[...]
2016-03-24
[17]
뉴스
How political polling shapes public opinion
https://www.bbc.co.u[...]
2019-05-15
[18]
웹사이트
Exit polling explained
http://www2.warwick.[...]
2015-05-09
[19]
뉴스
Rupert Murdoch: 'Sun wot won it' headline was tasteless and wrong
https://www.theguard[...]
Guardian Newspapers
2012-04-27
[20]
서적
The Prime Ministers We Never Had; Success and Failure from Butler to Corbyn
Atlantic Books
2021
[21]
웹사이트
General Election Results, 1 May 1997
https://www.parliame[...]
2020-07-07
[22]
뉴스
1992 Results
http://news.bbc.co.u[...]
2013-10-22
[23]
웹사이트
General Election Results 9 April 1992
http://www.parliamen[...]
parliament.uk
2011-06-14
[24]
기타
[25]
기타
[26]
기타
[27]
기타
[28]
웹사이트
BBC: Election 92 (Part 1)
https://www.youtube.[...]
2017-04-09
[29]
웹사이트
BBC: Election 92 (Part 2)
https://www.youtube.[...]
2017-04-09
[30]
웹사이트
BBC One London – 9 April 1992 – BBC Genome
https://genome.ch.bb[...]
2019-05-22
[31]
웹사이트
British Elections {{!}} C-SPAN.org
https://www.c-span.o[...]
2021-02-24
[32]
웹사이트
Home · BoB
https://learningonsc[...]
2021-02-24
[33]
간행물
TV Thursday 9 April
https://pbs.twimg.co[...]
2022-04-28
[34]
뉴스
1992년 4월 11일자 아사히 신문 6면
1992-04-11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