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레멘트 애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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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클레멘트 애틀리는 1883년 런던에서 태어나 1967년 사망한 영국의 정치가이다. 1922년 국회의원으로 선출된 후, 1935년부터 1955년까지 노동당 대표를 역임하며 당을 이끌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윈스턴 처칠의 전시 내각에서 활동했으며, 1945년 총선에서 노동당이 압승을 거두면서 총리 자리에 올랐다. 애틀리 내각은 주요 산업 국유화, 국민건강보험 서비스(NHS) 설립, 복지 국가 건설 등 사회 개혁을 추진했다. 외교적으로는 냉전 시기 미국과 동맹을 강화하고, 인도를 비롯한 식민지 국가들의 독립을 지원했다. 퇴임 후에는 귀족 작위를 받았으며, 그의 리더십 스타일과 정책은 오늘날까지도 영국 정치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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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멘트 애틀리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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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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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칭 접두사 | 각하 |
이름 | 애틀리 백작 |
출생 이름 | 클레멘트 리처드 애틀리 |
출생일 | 1883년 1월 3일 |
출생지 | 퍼트니, 잉글랜드 |
사망일 | 1967년 10월 8일 |
사망지 | 웨스트민스터, 런던, 잉글랜드 |
안장 장소 | 웨스트민스터 사원 |
정당 | 노동당 |
배우자 | 바이올렛 밀러 (1922년 1월 10일 결혼, 1964년 6월 7일 사망) |
자녀 | 4명, 마틴, 제2대 애틀리 백작 포함 |
직업 | 정치인 변호사 강사 사회복지사 군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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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 복무 | |
충성 | 영국 |
군종 | 영국 육군 국토방위군 |
복무 기간 | 1914년–1931년 |
계급 | 소령 |
부대 | 사우스 랭커셔 연대 전차 군단 |
전투 | 제1차 세계 대전 갈리폴리 전투 메소포타미아 전역 서부 전선 |
훈장 | 국토방위 훈장 1914–15성 영국 전쟁 훈장 승리 훈장 |
학력 | |
학교 | 옥스퍼드 대학교 유니버시티 칼리지 |
수상 경력 | |
칭호와 훈장 | 가터 훈장 메리트 훈장 컴패니언 오브 아너 훈장 영국 추밀원 |
총리직 | |
직책 | 영국 총리 |
국왕 | 조지 6세 |
부총리 | 허버트 모리슨 |
임기 시작 | 1945년 7월 26일 |
임기 종료 | 1951년 10월 26일 |
이전 총리 | 윈스턴 처칠 |
다음 총리 | 윈스턴 처칠 |
야당 대표 | |
직책 | 야당 대표 |
국왕 | 조지 6세 엘리자베스 2세 |
총리 | 윈스턴 처칠 앤서니 이든 |
임기 시작 | 1951년 10월 26일 |
임기 종료 | 1955년 11월 25일 |
이전 야당 대표 | 윈스턴 처칠 |
다음 야당 대표 | 허버트 모리슨 |
국왕 (2) | 조지 6세 |
총리 (2) | 윈스턴 처칠 |
임기 시작 (2) | 1945년 5월 23일 |
임기 종료 (2) | 1945년 7월 26일 |
이전 야당 대표 (2) | 아서 그린우드 |
다음 야당 대표 (2) | 윈스턴 처칠 |
국왕 (3) | 조지 5세 에드워드 8세 조지 6세 |
총리 (3) | 스탠리 볼드윈 네빌 체임벌린 |
임기 시작 (3) | 1935년 10월 25일 |
임기 종료 (3) | 1940년 5월 11일 |
이전 야당 대표 (3) | 조지 랜즈베리 |
다음 야당 대표 (3) | 헤이스팅스 리스 스미스 |
노동당 대표 | |
직책 | 노동당 대표 |
부대표 | 아서 그린우드 허버트 모리슨 |
임기 시작 | 1935년 10월 25일 |
임기 종료 | 1955년 12월 7일 |
이전 노동당 대표 | 조지 랜즈베리 |
다음 노동당 대표 | 휴 게이츠컬 |
노동당 부대표 | |
직책 | 노동당 부대표 |
대표 | 조지 랜즈베리 |
임기 시작 | 1932년 10월 25일 |
임기 종료 | 1935년 10월 25일 |
이전 노동당 부대표 | J. R. 클라인스 |
다음 노동당 부대표 | 아서 그린우드 |
전시 정부 직책 | |
직책 | 영국 부총리 |
임기 시작 (사실상) | 1942년 2월 19일 |
임기 종료 | 1945년 5월 23일 |
총리 | 윈스턴 처칠 |
이전 부총리 | 직책 신설 |
다음 부총리 | 허버트 모리슨 (사실상) |
직책 (2) | 추밀원 의장 |
임기 시작 (2) | 1943년 9월 28일 |
임기 종료 (2) | 1945년 5월 23일 |
총리 (2) | 윈스턴 처칠 |
이전 추밀원 의장 (2) | 존 앤더슨 경 |
다음 추밀원 의장 (2) | 울턴 경 |
직책 (3) | 자치령 사무 장관 |
임기 시작 (3) | 1942년 2월 15일 |
임기 종료 (3) | 1943년 9월 24일 |
총리 (3) | 윈스턴 처칠 |
이전 자치령 사무 장관 (3) | 크랜본 자작 |
다음 자치령 사무 장관 (3) | 크랜본 자작 |
직책 (4) | 왕새보관 |
임기 시작 (4) | 1940년 5월 12일 |
임기 종료 (4) | 1942년 2월 15일 |
총리 (4) | 윈스턴 처칠 |
이전 왕새보관 (4) | 킹슬리 우드 |
다음 왕새보관 (4) | 스태퍼드 크립스 |
전간기 정부 직책 | |
직책 | 우정청장 |
임기 시작 | 1931년 3월 13일 |
임기 종료 | 1931년 8월 25일 |
총리 | 램지 맥도널드 |
이전 우정청장 | 헤이스팅스 리스 스미스 |
다음 우정청장 | 윌리엄 오름즈비 고어 |
직책 (2) | 랭커스터 공국 장관 |
임기 시작 (2) | 1930년 5월 23일 |
임기 종료 (2) | 1931년 3월 13일 |
총리 (2) | 램지 맥도널드 |
이전 랭커스터 공국 장관 (2) | 오스왈드 모슬리 |
다음 랭커스터 공국 장관 (2) | 폰선비 경 |
직책 (3) | 육군 차관 |
임기 시작 (3) | 1924년 1월 23일 |
임기 종료 (3) | 1924년 11월 4일 |
총리 (3) | 램지 맥도널드 |
이전 육군 차관 (3) | 윌프리드 애슐리 |
다음 육군 차관 (3) | 리처드 온슬로 |
의회 직책 | |
직책 | 상원 의원 |
신분 | 세속 귀족 |
작위 | 세습 귀족 |
임기 시작 | 1956년 1월 25일 |
임기 종료 | 1967년 10월 8일 |
이전 상원 의원 | 백작 작위 신설 |
다음 상원 의원 | 제2대 애틀리 백작 |
직책 (2) | 하원 의원 |
지역구 (2) | 월섬스토 서부 |
임기 시작 (2) | 1950년 2월 23일 |
임기 종료 (2) | 1955년 12월 16일 |
이전 하원 의원 (2) | 밸런타인 맥엔티 |
다음 하원 의원 (2) | 에드워드 레드헤드 |
직책 (3) | 하원 의원 |
지역구 (3) | 라임하우스 |
임기 시작 (3) | 1922년 11월 15일 |
임기 종료 (3) | 1950년 2월 3일 |
이전 하원 의원 (3) | 윌리엄 피어스 |
다음 하원 의원 (3) | 선거구 폐지 |
2. 생애
애틀리는 1921년 친구들과 이탈리아로 긴 여행을 가는 동안 바이올렛 밀러를 만났다.[115] 두 사람은 사랑에 빠졌고 곧 약혼하여 1922년 1월 10일 햄프스테드의 크라이스트 처치(햄프스테드의 크라이스트 처치)에서 결혼했다. 그들의 결혼 생활은 매우 헌신적이었으며, 애틀리는 보호를 제공하고 바이올렛은 정치적 혼란으로부터 애틀리가 벗어날 수 있는 안식처를 제공했다. 그녀는 1964년에 사망했다.[116][117][118] 그들에게는 네 명의 자녀가 있었다.
- 제넷 헬렌 레이디(1923~2019),[176] 1947년 엘레스버러 교구 교회(엘레스버러)에서 과학자 해롤드 쉬프턴(1920~2007)과 결혼했다.[177][178]
- 펠리시티 앤 레이디(1925~2007), 1955년 리틀 햄프든(리틀 햄프든)에서 사업 임원 존 키스 하우드(J. Keith Harwood)(1926~1989)와 결혼했다.[179][180]
- 마틴 리처드, 프레스트우드 자작, 후일 제2대 애틀리 백작(Martin Richard, Viscount Prestwood, later 2nd Earl Attlee)(1927~1991), 1955년 2월 16일 앤 헨더슨과 결혼했다.
- 앨리슨 엘리자베스 레이디(1930~2016),[181] 1952년 그레이트 미센든(그레이트 미센든)에서 리처드 데이비스와 결혼했다.[182]
어틀리의 부모는 독실한 성공회 신자였고, 그의 형제 중 한 명은 성직자가 되었고 자매 중 한 명은 선교사가 되었지만, 어틀리 자신은 일반적으로 불가지론자로 여겨진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자신을 "종교적 감정을 느낄 수 없는" 사람으로 묘사하며, "기독교 윤리"는 믿지만 "허튼소리"는 믿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가 불가지론자인지 묻자 어틀리는 "모르겠다"라고 답했다.[183]
2. 1. 출생과 성장 배경
클레멘트 애틀리는 1883년 1월 3일 런던 퍼트니에서 상류 중산층 가정의 8남매 중 일곱 번째 자녀로 태어났다.[2] 아버지 헨리 애틀리는 변호사였으며, 잉글랜드 웨일스 법률협회/Law Society of England and Wales영어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헨리는 자유당 지지자였고 윌리엄 글래드스톤을 존경하여 아일랜드 자치에 찬성했다. 반면 보수당의 정책과 보어 전쟁에 반대했다. 어머니 엘렌 브레이버리 왓슨은 보수적인 집안 출신으로, 런던 예술 연합의 서기였던 토마스 시몬스 왓슨의 딸이었다.[2] 애틀리의 부모는 독실한 성공회 신자였다.[3]애틀리는 하인 3명과 정원사가 있는 넓은 정원과 테니스 코트가 있는 2층 빌라에서 성장했다.[2] 아홉 살 때 허트퍼드셔의 노스호 플레이스 예비학교에 기숙하며 다녔고, 1896년 헤일리베리 칼리지에 입학했다.[3] 헤일리베리 칼리지에서 평범한 학생이었지만, 기숙사 사감 프레더릭 웹 헤들리의 다윈주의적 견해에 영향을 받았다.[3] 1901년 옥스퍼드 대학교 유니버시티 칼리지에 입학하여 근대사를 전공했고, 1904년 2등급 명예 학위를 받았다.[3] 대학 시절 애틀리는 정치나 경제에 큰 관심이 없었고, 당시 자신의 견해를 "구식 제국주의적 보수주의"라고 묘사했다.[3]
대학 졸업 후 잉너 템플에서 변호사 수습 과정을 밟았고, 1906년 3월 변호사 자격을 취득했다.[3] 아버지의 법률 회사인 드루시스 앤 애틀리에서 일했지만, 법조계에서 큰 성공을 거두려는 야망은 없었다.[3] 1908년 아버지 헨리 애틀리가 사망하여 상당한 재산을 상속받았다.[155]
1905년 형 톰의 권유로 런던 슬럼가 스텝니의 헤일리베리 클럽(일종의 세틀먼트 기관) 운영에 참여하면서 빈곤층의 실태를 알게 되었고, 1907년부터는 헤일리베리 클럽의 전속 운영자가 되었다. 이후 웹 부부가 설립한 패비안 협회를 방문하고, 독립 노동당에 입당하며 사회주의 사상에 경도되었다.
2. 2. 사회주의자로의 전향
클레멘트 애틀리는 옥스퍼드 대학교 졸업 후 링컨 법률학교에서 공부해 1906년 법정 변호사 자격을 얻었다. 그러나 사회 활동과 정치 활동에 전념하면서 법조 관련 일에 종사한 기간은 짧았고, 변호사로서 법정에 선 것은 4번뿐이었다.1906년, 애틀리는 런던 동부 스텝니에 있는 노동계급 소년들을 위한 자선 클럽인 헤일리베리 하우스에서 자원봉사를 시작했고, 1907년부터 1909년까지 클럽 매니저로 일했다. 그때까지 그의 정치적 견해는 보수적이었으나, 빈민가 아이들과 함께 일하면서 목격한 빈곤과 궁핍에 충격을 받아 사회주의로 전향하게 되었다. 그는 사적 자선으로는 빈곤을 완화하기에 절대 불충분하며, 국가의 직접적인 조치와 소득 재분배만이 어느 정도 효과를 낼 수 있다는 견해를 갖게 되었다.
1908년 독립 노동당(ILP)에 가입하여 지역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09년, 스텝니 자치구 의회 ILP 후보로 첫 선거에 출마했으나 실패했다. 같은 해 비아트리스 웹의 비서로 잠시 일한 후 토인비 홀의 비서가 되었다. 그는 패비안 협회에서 활동하며 소수 보고서의 대중화 캠페인에서 웹을 도왔다. 1911년, 영국 정부에 고용되어 재무장관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의 국민보험법을 설명하는 "공식 설명자"로 전국을 돌았다. 1년 후, 런던 정치경제대학교에서 사회과학과 공공행정을 가르치는 강사가 되었다.
2. 3.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1914년 8월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애틀리는 영국 육군에 입대 지원을 했다. 당시 31세로 군 복무 적령기를 지났지만, 인맥을 이용하여 1914년 9월 30일 사우스 랭커셔 연대 제6대대(현역)에 임시 소위로 임관되었다.[5] 1915년 2월 9일에는 대위로 진급했고,[6] 3월 14일에는 대대 부관으로 임명되었다.[7] 그의 형 톰은 양심적 병역 거부로 제1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감옥에서 지냈으며, 형제간의 입장 차이는 잠시 불화를 야기했다.
애틀리는 허버트 헨리 애스퀴스 내각 해군장관 윈스턴 처칠이 기획한 갈리폴리 전투에 참전했다. 이 전투에서 애틀리는 이질에 걸려 치료를 위해 전선을 이탈했다. 회복 후 복귀했을 때, 그의 중대가 수블라 만 철수 작전 중 최후 방어선을 사수하게 되어 스탠리 모드 장군 다음으로 수블라 만에서 마지막으로 철수한 사람이 되었다. 갈리폴리 상륙 작전은 영국군에 큰 피해를 주고 실패했지만, 애틀리는 처칠의 전략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이후 애틀리는 수에즈 운하와 페르시아 만의 영국의 석유 이권 보호를 위한 메소포타미아 전역/Mesopotamian campaign영어에 참전했다. 한나 전투에서 적 참호를 공격하던 중 아군의 낙탄으로 다리에 파편이 박히는 중상을 입고 인도를 거쳐 영국으로 후송되었다. 1916년 12월 18일 기관총 부대 중장갑 부대로 전속되었고,[8] 1917년 3월 1일에는 임시 소령으로 진급했다.[9] 1917년 대부분을 영국에서 병사들을 훈련시키며 보냈고,[10][11] 같은 해 프랑스 전선에 배치되었다. 1918년 6월, 전쟁 마지막 몇 달 동안 서부 전선에 참전하기 위해 프랑스로 파병되었다.
1919년 1월 육군에서 제대하고 스텝니로 돌아와 런던정경대학에서 파트타임 강의를 재개했다. 제1차 세계 대전 군 경력으로 애틀리는 "애틀리 소령"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2. 4. 정계 입문
애틀리는 전후 곧바로 지방 정치에 복귀하여 1919년 런던에서 가장 낙후된 도심 자치구 중 하나인 스텝니 대도시 자치구의 시장이 되었다. 시장 재직 당시, 의회는 높은 임대료를 받으면서도 주택을 거주 가능한 상태로 유지하는 데 돈을 쓰기를 거부하는 빈민가 집주인들과 맞서 싸우기 위한 조치를 취했다. 의회는 주택 소유주들에게 재산을 수리하라는 법적 명령을 내리고 집행했다. 또한 보건 방문 간호사와 위생 검사관을 임명하여 유아 사망률을 낮추고 실직한 전역 군인들에게 일자리를 찾아주기 위한 조치를 취했다.1920년 시장 재직 중에 그는 첫 번째 책인 ''사회복지사(The Social Worker)''를 썼는데, 이 책에서는 그의 정치 철학을 이루는 많은 원칙들과 나중에 그의 정부 행동의 기반이 될 원칙들을 제시했다. 이 책은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일이 자발적인 행동에 맡겨질 수 있다는 생각을 공격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문명화된 공동체에서는 자립적인 개인들로 구성되어 있을지라도, 어떤 시기에 자신을 돌볼 수 없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며, 그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에 대한 문제는 세 가지 방법으로 해결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방치될 수도 있고, 마땅히 조직된 공동체에 의해 돌봄을 받을 수도 있고, 공동체 내 개인들의 호의에 맡겨질 수도 있습니다. [...] 자선은 동등한 자들 사이에서만 존엄성의 손실 없이 가능합니다. 노령 연금과 같은 법으로 확립된 권리는 수혜자의 성격에 대한 그의 견해에 따라 달라지고 그의 변덕에 따라 종료될 수 있는 부유한 사람이 가난한 사람에게 하는 지원금보다 덜 불쾌합니다.
1921년, 이웃 자치구인 포플러의 노동당 시장이자 미래의 노동당 지도자인 조지 랜스베리는 모든 런던 자치구에 걸쳐 빈민 구제 부담을 평등하게 하려는 불복종 운동인 포플러 세율 반란을 시작했다.[12] 랜스베리의 개인적인 친구였던 애틀리는 이를 강력히 지지했다.[12] 그러나 인근 해크니의 노동당 시장이자 런던 노동당의 주요 인물 중 한 명인 허버트 모리슨은 랜스베리와 반란을 강력히 비난했다.[12] 이 기간 동안 애틀리는 모리슨에 대한 평생의 반감을 키웠다.[12]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이 종전되자, 애틀리는 1919년 1월 군에서 제대하고 런던정경대학교 강사직에 복귀했다. 스텝니에서 노동당의 유력 인사들의 지원을 받아 애틀리는 정계 진출을 희망하게 되었고, 1919년 11월 스텝니 시장에 취임했다. 애틀리는 시장으로서 유아 사망률을 낮추기 위해 임산부와 유아를 진찰하는 진료소 설치, 의료·공중위생을 담당하는 공무원 배치, 시 차원의 산업폐기물 수거 제도화, 시의 전력 사업 참여 등의 사회 개혁 정책을 실시했다. 시장직을 역임하며 명성을 얻은 후 애틀리는 중앙 정계로 진출했는데, 다른 시장직에 취임하여 사회 개혁 정책을 실시하고 명성을 얻어 중앙 정계에 진출한 유명한 인물로는 조지프 체임벌린(체임벌린 총리의 아버지)이 있다. 보수파들 사이에서도 애틀리는 국왕과 국가를 위해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신사로서 호의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1922년 애틀리는 바이올렛 애틀리(Violet Attlee)와 결혼했다. 당시 애틀리는 39세, 바이올렛 밀러는 26세였다.
1922년 영국 총선에서 애틀리는 스텝니의 라임하우스 선거구의 하원 의원(Member of Parliament, MP)이 되었다. 당시 그는 램지 맥도널드를 존경했고, 1922년 노동당 지도자 선거에서 그가 당 대표로 선출되는 것을 도왔다. 그는 1922년 단명한 의회에서 맥도널드의 의회 사무차관(Parliamentary Private Secretary)으로 일했다. 그의 첫 장관직 경험은 1924년 맥도널드가 이끈 단명한 제1차 노동당 정부에서 육군성 차관으로 재직했을 때였다.

총선거 후 노동당 당수 선거가 실시되어, 현 당수인 존 로버트 클라인스(John Robert Clynes)를 누르고 램지 맥도널드(Ramsay MacDonald)가 당수에 취임했다. 맥도널드는 이른바 카리스마형 지도자로, 주변의 반대를 받더라도 자신의 정치 신조를 강행으로 관철하려는 인물이었다. 맥도널드는 후에 수상의 자리에 올라 제1차 내각, 제2차 내각, 국론통일내각을 구성하여 지휘하지만, 그 정권 운영에 대해 베아트리스 웹(Beatrice Webb)은 “정권은 맥도널드의 독무대(이른바 극장형 정치)였다”고 말하고 있다. 맥도널드는 평화주의자로, 군축이 평화를 가져온다고 생각했다.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당시에도 그는 노동당 당수를 역임했지만, 반전을 주장하여 당수 자리에서 물러났다. 맥도널드는 “우리는 전쟁을 수행하는 위험을 감수할 바에는 평화를 획득하는 위험을 감수해서는 안 되는가”라는 주장을 되풀이했다. 맥도널드는 평화를 추구한 고상한 인물이라는 평가가 있는 한편, 단순한 인기 얻기 위한 퍼포먼스에 불과했다는 신랄한 평가도 있다. 애틀리는 당수 맥도널드의 눈에 띄어 그의 의원 비서 중 한 명으로 임명되었다.
애틀리는 중산층 출신의 노동당 의원이었기 때문에, 노동당 내 급진 좌파 세력인 클라이드사이더/Red Clydeside영어로부터 경멸을 받았다. 클라이드사이더는 사회 모순을 조기에 해소해야 한다고 하여, 하원에서 과격한 주장을 하고, 정적에 대해 욕설에 가까운 야유를 자주 날렸지만, 당수 맥도널드는 그들을 씁쓸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맥도널드는 다른 노동당 당수와 달리, 노동조합과의 거리를 두고 있었다.
하원 개원 첫날 애틀리는 처녀 연설을 했다. “전시 중에는 실업자가 없었다. 왜 그랬을까? 정부가 과세와 대출을 통해 생산 활동과 국민의 구매력을 통제했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며, 자유 방임주의를 개혁하고, 정부가 적극적으로 경제에 개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개원 첫날에 처녀 연설을 할 수 있는 신인 의원은 매우 적지만, 애틀리가 그것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특별히 뛰어났기 때문이 아니라, 클라이드사이더가 어떤 심의를 둘러싸고 의사진행 방해를 했기 때문에, 화제를 바꾸려고 생각한 하원 의장과 노동당의 원내 간사가, 우연히 눈에 띈 신인 의원 애틀리에게 연설을 하도록 지시했기 때문이다. 애틀리의 연설에 대해 클라이드사이더는, 실업 문제를 다룬 내용이었기 때문에 그것에 만족했고, 일부 보수당 의원들도 연설에 이해를 보였다.
애틀리는 1926년 총파업에 반대하며 파업 행동을 정치적 무기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믿었다. 그러나 파업이 발생했을 때 그는 파업을 약화시키려고 하지 않았다. 파업 당시 그는 스텝니 자치구 전기위원회 위원장이었다. 그는 전기 노동조합과 협상하여 병원에는 계속 전력을 공급하지만 공장에는 공급을 중단하기로 합의했다. 스캐멀과 네퓨(Scammell and Nephew Ltd)라는 한 회사는 애틀리와 위원회의 다른 노동당원들(보수당원들에 대해서는 제소하지 않음)을 상대로 민사소송을 제기했다. 법원은 애틀리와 그의 동료 위원들에게 불리한 판결을 내렸고, 그들은 300파운드의 손해배상금을 지불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 판결은 항소심에서 뒤집혔지만, 이 사건으로 인한 재정적 어려움으로 인해 애틀리는 정계를 떠날 뻔했다.
1927년, 그는 인도에 대한 자치 부여 가능성을 조사하기 위해 설립된 다당제 사이먼 위원회(Simon Commission)의 왕립 위원회(Royal Commission)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위원회에 쏟아야 할 시간 때문에, 그리고 맥도널드가 위원회에 참여하도록 설득하기 위해 애틀리에게 한 약속과 달리, 그는 1929년 영국 총선 이후 출범한 제2차 노동당 정부에서 처음에는 장관직을 제안받지 못했다. 사이먼 위원회에서의 활동은 애틀리에게 인도와 많은 정치 지도자들을 폭넓게 접할 기회를 제공했다.[13] 1933년까지 그는 영국 통치가 인도에 이질적이며 인도의 발전에 필요한 사회적, 경제적 개혁을 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13] 그는 인도의 자치령으로서의 독립에 가장 공감하는 영국 지도자가 되었고, 이는 1947년 독립 결정에서 그의 역할을 위한 준비가 되었다.[13]
1930년 5월, 노동당 의원인 오스왈드 모즐리(Oswald Mosley)는 실업 문제 해결을 위한 그의 제안이 거부된 후 당을 탈당했고, 애틀리는 모즐리가 맡았던 란캐스터 공국 공작의 관직(Chancellor of the Duchy of Lancaster)을 맡게 되었다. 1931년 3월, 그는 영국 우정청장(Postmaster General)이 되었고, 대공황의 재정 위기에 대한 대처 방안에 합의하지 못한 후 노동당 정부가 붕괴한 8월까지 5개월 동안 그 직책을 유지했다. 그 달 맥도널드와 그의 몇몇 동맹들은 보수당과 자유당과 함께 연립정부(National Government)를 구성했고, 이로 인해 노동당에서 축출되었다. 맥도널드는 애틀리에게 연립정부에서 일자리를 제안했지만, 그는 그 제안을 거절하고 주요 노동당에 충성하기로 했다.
램지 맥도널드가 연립정부를 구성한 후, 노동당은 심각하게 분열되었다. 애틀리는 오랫동안 맥도널드와 가까웠고, 이제는 대부분의 노동당 정치인들과 마찬가지로 배신감을 느꼈다. 제2차 노동당 정부 기간 동안 애틀리는 점점 맥도널드에게 환멸을 느꼈고, 그를 허영심 많고 무능한 사람으로 여기게 되었으며, 나중에 그의 자서전에서 그에 대해 신랄하게 썼다.[14]
>옛날에는 맥도널드를 위대한 지도자로 존경했습니다. 그는 훌륭한 풍모와 뛰어난 연설 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가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취했던 인기 없는 입장은 그를 성격이 강한 사람으로 보이게 했습니다. 지노비예프 편지 사건을 잘못 처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두 번째로 집권하기 전까지는 그의 결점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그때 저는 그의 적극적인 행동을 취하려는 주저함을 깨닫고, 그의 허영심과 속물근성이 증가하는 것을 불안하게 지켜보았습니다. 또한 저에게, 한 하급 장관에게, 그의 모든 내각 동료들에 대해 얼마나 낮은 평가를 하고 있는지 말하는 그의 습관은 불쾌한 인상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이 나라 정치 역사상 가장 큰 배신 행위를 저지를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당에 대한 충격은 매우 컸습니다. 특히 이 사람들을 위해 큰 희생을 치른 당원들의 충실한 노동자들에게 그러했습니다.
2. 5. 노동당 부당수 및 당수
1922년 영국 총선에서 애틀리는 스텝니의 라임하우스 선거구의 하원 의원으로 당선되었다.[13] 그는 램지 맥도널드를 존경하여 1922년 노동당 지도자 선거에서 그가 당 대표로 선출되는 것을 도왔다.[14] 1924년 맥도널드가 이끈 제1차 노동당 정부에서 육군성 차관으로 재직하며 첫 장관직 경험을 쌓았다.[15]애틀리는 1926년 총파업에 반대했지만, 파업을 약화시키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다. 그는 스텝니 자치구 전기위원회 위원장으로서 전기 노동조합과 협상하여 병원에는 전력을 계속 공급하고 공장에는 공급을 중단하기로 합의했다. 이로 인해 한 회사로부터 소송을 당해 손해배상금을 지불하라는 판결을 받았으나 항소심에서 뒤집혔다. 이 사건으로 인한 재정적 어려움으로 정계를 떠날 뻔했다.[16]
1927년, 애틀리는 인도의 자치 부여 가능성을 조사하기 위해 설립된 사이먼 위원회의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이 위원회 활동으로 인해 1929년 영국 총선 이후 출범한 제2차 노동당 정부에서 처음에는 장관직을 제안받지 못했다.[17] 그러나 1930년 오스왈드 모즐리가 당을 탈당하자 란캐스터 공국 공작의 관직을, 1931년에는 영국 우정청장을 맡았다.[18]
램지 맥도널드가 보수당, 자유당과 함께 연립정부를 구성하자 노동당은 심각하게 분열되었다. 애틀리는 맥도널드의 제안을 거절하고 노동당에 충성하기로 했다. 그는 맥도널드를 배신자로 여기고, 자서전에서 신랄하게 비판했다.[19]
1931년 영국 총선에서 노동당은 참패했지만, 애틀리는 자신의 지역구를 간신히 유지했다. 그는 조지 랜스버리 당수 밑에서 부당수가 되었다.[20] 1931년부터 1935년까지 국민정부에 대한 반대의 짐을 많이 떠맡았고, 이 과정에서 재정 및 외교에 대한 지식을 넓혔다.[21]
랜스버리가 사고로 대퇴골 골절을 당한 후, 애틀리는 1933년 12월부터 9개월 동안 사실상 노동당 당수 역할을 했다. 이 기간 동안 그의 대중적 인지도가 높아졌다. 개인적인 재정 문제로 정계 은퇴를 고려했으나, 스태포드 크립스의 설득과 재정 지원으로 정계에 남게 되었다.[22]
1932년부터 1933년 사이에 애틀리는 급진주의와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가 다시 물러섰다. 스태포드 크립스의 영향을 받아 1932년 영국 사회주의 동맹의 회원이 되기도 했으나, 히틀러, 무솔리니, 스탈린 등을 자세히 살펴본 후 급진주의에서 물러서고 헌법적 방법을 고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23] 그는 항상 왕실을 지지했으며, 총리 시절에는 조지 6세 국왕과 가까운 사이였다.[24]
1935년, 조지 랜스버리는 이탈리아의 아비시니아 침략에 대한 제재에 찬성하는 투표 이후 노동당 대표직에서 사퇴했다. 애틀리는 임시 대표로 1935년 영국 총선을 이끌었고, 노동당은 1931년의 참패에서 부분적으로 회복했다.[25] 그 후 당 대표 선거에서 허버트 모리슨과 아서 그린우드를 꺾고 1935년 12월 3일 공식적으로 노동당 대표로 선출되었다.[26]
1920년대와 1930년대 대부분 동안 노동당의 공식 정책은 재군비에 반대하고 국제연맹 하의 국제주의와 집단 안보를 지지하는 것이었다.[27] 1934년 노동당 대회에서 애틀리는 "세계 질서를 우선시"한다고 선언했다.[28] 그러나 나치 독일의 위협이 증가하고 국제연맹의 효과가 없어짐에 따라, 1937년까지 노동당은 재군비를 지지하고 유화 정책에 반대하게 되었다.[29]
1937년 말, 애틀리는 스페인 내전에서 싸우고 있던 국제여단의 영국 대대를 방문했다. 한 중대는 그의 명예를 기리기 위해 "애틀리 중대"로 명명되었다.[30] 애틀리는 비간섭 위원회를 "익살극"으로 간주하고 스페인 공화정부를 지지했다.[31]
1938년, 애틀리는 뮌헨 협정에 반대하며, "폭력의 승리"이자 "가장 큰 외교적 패배"라고 비판했다.[32] 1937년, 애틀리는 "노동당의 관점"이라는 책을 썼는데, 이 책에서 그는 사회주의 원칙에 타협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33]
1930년대 후반, 애틀리는 유대인 어머니와 두 자녀를 후원하여 1939년에 독일을 떠나 영국으로 이주할 수 있도록 했다.[34]
1933년 말, 랜즈베리(Landsbury)는 대퇴골 골절로 인해 일정 기간 요양해야 했다 . 당수 부재 기간 동안 애틀리(Attlee)가 당수 대행을 맡게 되었다 . 하지만 당수직 수행에는 많은 정치 자금이 필요했기 때문에, 애틀리는 당수 대행직을 기꺼이 맡고 싶어하지 않았고, 그러한 뜻을 당내 유력자였던 클립스에게 상담했다 . 부유한 클립스는 당수 대행직에 필요한 정치 자금을 애틀리에게 제공하겠다고 제안했고, 그로 인해 애틀리는 당수 대행직을 수행할 수 있었다 . 클립스는 의원 활동과 더불어 부업으로 변호사로 활동하며 막대한 수입을 얻었고, "당신에게 필요한 정치 자금 정도는 금방 벌 수 있다"고 큰소리쳤다 . 이후 회복된 랜즈베리가 당수로 복귀하고, 애틀리는 부당수로 돌아왔다 .
클립스는 여러 차례 급진 좌파적 주장을 반복하여 애틀리를 화나게 했지만, 두 사람의 개인적인 친분은 평생 이어졌다 .
세계 대공황 이후 독일, 이탈리아, 일본 등에서 파시즘이 대두하였고, 독일에서는 아돌프 히틀러가, 이탈리아에서는 베니토 무솔리니가 각각 정권을 잡았다. 애틀리와 베빈은 유럽 각국의 사회주의 정당 지도자들을 자주 방문하였지만, 현지에서 파시즘의 위협을 직접 느끼게 되었다. 노동당은 좌익 이데올로기의 관점에서 파시즘에 반대하였지만, 그것에 대항하기 위한 자국의 군비 확장에도 반대하였다. 이에 대해 베빈은 "파시스트들은 노동조합원을 가장 먼저 죽인다"라며 파시즘 세력에 대항하기 위해 자국의 군비 확장이 필요하다고 노동당원 및 좌파 세력에 강력히 주장하였다. 여당에서는 처칠 등 일부는 파시즘 세력에 대항하기 위해 군비 확장을 주장하였지만, 거국일치 내각·여당 및 여론은 군비 확장이 오히려 전쟁을 초래한다고 생각하여 소극적이었다. 1931년 만주 사변이 발생하자 애틀리는 국제 연맹에 의한 일본에 대한 제재를 주장하였다.
영국의 보수·우익 세력은 나치를 공산주의 방지라는 필요악으로 간주하였다. 그들은 나치를 정권에서 끌어내리면 공산당이 독일의 정권을 장악하여 적화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나치의 베르사유 조약 파기에 대해서도 독일을 동정하는 마음에서 조약 파기에 이해를 보였다. 보수당 내에도 나치즘에 공명·심취하는 자나 히틀러를 강력한 애국적 지도자로 칭찬하는 자가 많았다. 반독의 대표격으로 여겨지는 처칠도 "나치 정체를 싫어하는 사람이라도 히틀러의 애국적 위업에는 찬사를 아끼지 않을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그런 강력한 지도자가 나타나 우리를 강국으로 이끌어주었으면 좋겠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러한 언행으로 보아 나치 독일의 존재가 영국에 위협을 주고 있었기에 처칠은 반독적 태도를 취한 것이고, 나치 독일이 영국에 위협이 되지 않았다면 처칠은 반나치즘의 입장을 취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히틀러는 저서 『나의 투쟁』에서 "동방 생존권"이라는 구상을 내세워 동유럽 국가들에 대한 침략 야망을 표명하였지만, 영국의 보수·우익 세력은 소련에 대한 군사적 견제가 된다고 호의적으로 평가하였다. 볼드윈은 수상 재임 시절 "독일이 동쪽으로 진출하는 것을 바란다. 나는 볼셰비키와 나치가 전쟁을 하는 것을 보고 싶다."라고 말하며 독소가 군사적 충돌을 하는 것을 바랐다. 다음 수상인 체임벌린도 같은 생각이었다. 나치 독일에 대한 견해에 대해 이웃 국가 프랑스의 보수·우익 세력도 영국 국내의 그것과 거의 같았으며, 공산주의가 더 큰 위협으로 여겨졌다.
1935년 6월, 맥도널드가 병으로 사임하고 보수당의 볼드윈이 전국 연립 내각의 수상이 되었다(제3차 볼드윈 내각). 명목상으로는 연립 내각이었지만 실제로는 보수당 단독 내각이었다. 야당 노동당 당수 랜즈베리는 평화주의자로, 군비 확장에 반대하는 것을 당의 강령으로 내걸고 당수로서 노동당을 이끌었다. 그는 상비군의 존재가 전쟁을 유발한다고 생각했으며, 영국군을 해체하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다. 또한 랜즈베리는 무저항 비전론도 주장했다. 애틀리는 랜즈베리에 대해 "그는 마치 간디와 같다"고 평가했다.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정권은 식민지화되지 않고 독립을 유지하고 있던 에티오피아 제국의 침략을 기도했고, 영국과 프랑스와의 긴장이 고조되었다(). 전국 노동 조합 회의는 이 위기에 대해 "필요하다면 무력으로 이탈리아의 침략을 저지해야 한다"고 결의했다. 평화주의적 입장에서 군사 행동을 꺼렸던 당수 랜즈베리는 이 결의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표명했고, 같은 생각을 가진 크립스는 이 결의에 항의했다. 이어 1935년 10월 노동당 당대회에서도 이 안건이 논의되었지만, 당대회 도중 이탈리아의 군사 침략이 시작되었다(제2차 에티오피아 전쟁). "국제 연맹 규약에 따라 영국 정부에 이탈리아에 모든 수단의 제재를 가할 것을 요구하는" 결의안이 제시되자, 애틀리는 이를 지지했지만, 랜즈베리와 크립스는 지지하지 않았다. 노동당 우파의 베빈은 "지식인들의 무책임함에 격분하고 있다", "무저항주의가 오히려 침략을 초래한다"고 하며, 결의를 지지하려 하지 않는 당수 랜즈베리를 강하게 공격했다. 랜즈베리는 10월 8일에 당수직을 사퇴했다. 이 소동의 결과에 대해 모리슨은 "베빈 개인의 공격의 압력"과 "베빈이 가지고 있는(영향 아래 있는) 50만 명의 노동 조합원 표"에서, 베빈이 행동을 취한 단계에서 결과는 이미 결정되었다고 적고 있다.
이때 베빈은 영국 최대 노동 조합 (TGWU)의 서기장이자 노동당원이었지만, 하원 의원은 아니었다(의원에 입후보한 적은 있었지만 낙선했다). 하원 의원이 아닌 자가 의회 노동당 당수를 사퇴하게 한 것은, 노동당은 결당 이래 의회 외 세력인 노동 조합의 강한 영향 아래 있었기 때문이다. 베빈은 노동 조합이 당정에 참여하는 것을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전 당수 맥도널드 제명 소동의 원인에 대해, 노동 조합과 거리를 두는 맥도널드가 당수에 취임하고, 그가 노동 조합(노동 계급)의 의향을 헤아리지 않고 독자 행동을 취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또한 노동당 당수에게 권한이 집중되어 있는 것이 맥도널드와 같은 카리스마 지도자를 낳았다고도 보았다. 맥도널드 제명 후, 베빈이 이끄는 노동 조합은 적극적으로 노동당의 당정에 참여하게 되었다. 보수당의 처칠은 1945년 영국 총선거에서 노동당의 이러한 의회 외 세력이 의회 노동당 집행부의 권세를 능가할 정도로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체질에 대해 "의회 정치 경시의 체질"이라고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단 비판 대상 인물은 베빈이 아니라 래스키였다).
수상 볼드윈은 1935년 11월 14일에 하원 총선거를 실시하기로 결정했다(1935년 영국 총선). 이 시기 결정에 대해 야당 노동당의 혼란을 이용했다는 지적도 있다. 노동당은 당수 부재로 인해 아틀리가 임시로 선거 운동을 지휘하게 되었다.
선거에서는 군비 확장 여부도 쟁점이 되었다. 볼드윈은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침략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국제연맹의 집단 안보를 강화할 필요가 있으며, 그러기 위해서는 자국의 군비 확장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반대로 노동당은 군비 확장에 소극적이었지만, 아틀리는 “노동당은 국제연맹의 의무를 이행하기 위한 군비 확장은 지지한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이러한 방침 전환에도 불구하고, 이 선거에서 노동당이 승리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여겨졌다. 아틀리는 후년에 “노동당은 1935년까지 안보 문제(국방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한 적이 거의 없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이 선거 결과 예상대로 보수당이 하원 과반수를 차지했다. 한편 노동당은 154석을 획득하여 일정 부분 의석을 회복했다. 자유당은 당내 내분의 영향으로 여전히 소수 정당으로 남았다. 일반적으로 영국 하원 의원의 임기는 해산이 없다면 5년이지만, 제2차 세계 대전 발발로 총선거가 계속 연기된 결과, 이후 1945년까지 약 10년 동안 영국에서는 총선거가 실시되지 않았다.
하원 총선거 후 노동당 당수 선거가 실시되었다(). 당수 후보에는 아틀리, 허버트 모리슨, 가 있었다. 처음에는 모리슨이 유력 후보로 여겨졌지만, 노동당 우파의 유력자 어니스트 베빈은 자신의 랜즈베리 비판에 즉시 동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모리슨을 싫어했고, 그린우드를 추천했다. 그러나 다른 당원들은 그린우드가 알코올 중독이라는 점 때문에 당수의 중책을 수행할 수 있을지 의문을 품었다. 영국 최대 노동조합의 서기장으로 노동조합원들에게 절대적인 영향력을 가진 베빈이 모리슨 불지지를 표명함으로써, 모리슨은 노동조합원들의 표를 잃었다.
당수 선거 결과 아틀리가 승리했다. 이는 원로 의원 대부분이 아틀리를 지지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아틀리는 1935년에 노동당 당수에 취임하여, 이후 1955년에 당수직을 사임할 때까지 약 20년간 노동당 당수를 역임했다. 아틀리가 당수에 취임한 이후로는 아틀리, 어니스트 베빈, 허버트 모리슨의 트로이카 체제로 당의 정책 결정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베빈은 당 운영을 통해 점차 아틀리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었고, 베빈은 친근하게 아틀리를 “리틀 클렘”이라고 불렀다(“클렘”은 아틀리의 이름 “클레멘트”의 약칭)[196]. 베빈과 모리슨은 사이가 좋지 않았고, 아틀리와 모리슨은 당수 자리를 놓고 긴장 관계에 있었다.
참고로 아틀리의 당수 취임이나 이전의 부당수 취임에 대해 “다른 적임자가 없었다” 등의 소극적인 이유로 결정된 측면이 있으며, 세간에서도 아틀리는 특히 주목받는 인물은 아니었다. 후년, 노동당이 처음으로 하원 과반수를 차지한 1945년 영국 총선 당시 노동당 승리 시 수상 후보를 묻는 여론 조사에서도, 당수임에도 불구하고 아틀리의 인지도는 낮았고, 베빈이 더 높은 인지도를 가지고 있었다.
주영 소련 대사 이반 마이스키(Иван Майский)의 권유로, 1936년 의회 휴회 기간 중에 애틀리는 소련을 방문했다 소련에서는 소비에트 의장 니콜라이 불가닌(Николай Булганин)과 붉은 군대 원수 미하일 투하체프스키(Михаил Тухачевский) 등을 만났다(스탈린과는 만나지 않았다) 애틀리는 소련 측 안내로 혁명 박물관과 모스크바 시가지 등을 둘러보았다. 애틀리는 행복해 보이는 소련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모든 것을 고려해도 러시아 혁명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는 편지를 형 톰에게 썼다 그러나 애틀리가 본 광경이 소련의 실제 모습이었는지, 외국인을 위한 선전용 연출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방문한 곳곳에서 스탈린의 초상화가 곳곳에 걸려 있는 것을 목격하고 애틀리는 소련에서는 스탈린의 개인숭배가 진행되고 있을 것이라고 느꼈다 붉은 군대 원수 투하체프스키는 애틀리와 만난 지 몇 달 후 붉은 군대 대숙청으로 처형되었다 애틀리는 몇 년 후 소련에서 대숙청이 있었던 것을 알게 되었다
스페인에서 좌파인 스페인 인민전선(Republic派)이 정권을 잡자, 군부를 중심으로 한 우파는 반발하여 프란시스코 프랑코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로써 스페인 내 좌우 양파의 대립에서 스페인 내전이 발발했다. 파시스트 세력이 정권을 잡고 있던 독일과 이탈리아는 우파인 프랑코를 지지하며 무기 원조를 제공했다. 소련은 공화파를 지지했다.
영국은 스페인 내전에 대해 불개입 정책을 취했다. 맥밀런 수상은 스페인 내전이 사실상 파시즘 세력과 공산주의 세력의 대리 전쟁이라고 판단하고, 서유럽 국가들로 전화가 번지지 않도록 분쟁을 스페인 국내에만 억제해야 한다고 봤다. 프랑스도 이 내전에 불개입 정책을 취했지만, 독일군은 영국과 프랑스를 조롱하듯 공화파를 억제하기 위해 게르니카에 대규모 공습을 가했다(게르니카 폭격).
애틀리는 반파시즘의 입장에서 공화파를 지지했다. 1937년 애틀리는 스페인 공화국(공화파)의 초청을 받아 엘렌 윌킨슨 등 다른 노동당 의원들과 함께 스페인을 방문했다. 애틀리는 공화파 정부 각료들과 회견하고 전선도 시찰했다. 공화파 군에는 각국의 의용군도 참가했는데, 애틀리에 대한 예우로 그 중 한 부대가 "애틀리 소좌 대대"로 개칭되었다. 시찰을 통해 애틀리는 공화파가 코민테른의 지원을 받아 공산주의 세력의 강한 영향 하에 있다는 현실도 목격했다.
이 방문을 통해 애틀리는 스페인 내전에 개입하려 하지 않는 정부에 불만을 가진 국내 좌파 세력(반파시즘의 관점에서 공화파 지지자가 많았다) 사이에서 인지도가 높아졌다. 반면 하원에서는 정부의 불개입 정책에 반해 애틀리가 공화파 의용군에 경례한 것이 문제시되어, 보수당 의원들로부터 애틀리에 대한 비난 동의가 제출되었다.
1937년 보덜윈이 사임하고 보수당의 네빌 챔벌린을 수반으로 하는 이 출범했다. 전임 총리 보덜윈은 (노동 운동을 단속하면서도) 노동당의 정책에 어느 정도 이해를 보였지만 챔벌린은 노동당에 대해 거만하고 오만한 태도를 취했다
독일에서는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 정권이 독일 재군비 선언·라인란트 진주·오스트리아 합병·수데텐 지방 할양 요구 등의 대군비·대외 팽창 정책을 추진하고 있었다. 총리 챔벌린은 대독 외교로 宥和政策을 채택하여 이를 묵인했다. 챔벌린은 전임 총리 보덜윈과 마찬가지로 나치를 공산주의 방지의 필요악으로 보고 나치가 동쪽으로 진출하여 독소가 군사 충돌하는 것을 바랐다. 애틀리와 (보수당 소속이지만) 대독 강경파 처칠은 나치를 방치하면 주변국을 침략하여 강대화되어 영국과 유럽 전체에 위협을 미칠 것이라고 하며 챔벌린의 宥和政策을 비판했다
1938년 히틀러가 체코슬로바키아 수데텐 지방의 영토 할양을 요구하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군사 행동도 서슴지 않겠다고 각국을 위협하자 애틀리와 처칠은 전화로 회담하여 애틀리는 "당신(처칠)이 정부에 반기를 든다면 당신을 지지하겠다"고 전했다 영국 총리 챔벌린은 히틀러·무솔리니와 회담하기로 하고, 같은 해 9월 뮌헨 회담에서는 프랑스 수뇌부와 함께 히틀러의 영토 할양 요구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영국 여론은 평화가 지켜졌다며 환희에 찬 분위기였고, 애틀리와 처칠 등 宥和政策 비판론자가 챔벌린 내각의 퇴각을 기도할 수 있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애틀리는 수데텐 할양 요구 수용에 대해 "이는 영국과 프랑스가 입은 최악의 외교적 패배다", "민주적인 체코슬로바키아 국민은 배신당해 무자비한 전제 지배자에게 넘겨졌다"고 하원에서 말했다
히틀러는 뮌헨 회담의 협정을 깨고 체코슬로바키아를 해체하여 보호국화하는 등 宥和政策의 실패가 드러나게 되었다. 1939년 5월 애틀리는 하원에서 나치 독일과 소련의 동맹은 피할 수 없으며 영불소의 연대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애틀리는 이 연설에서 몸을 떨면서 연설했기 때문에 신문은 "애틀리 씨는 분노해서 몸을 떨고 있는 것 같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전립선 비대에 의한 방광 통증 때문에 몸을 떨고 있었고, 애틀리는 치료를 위해 입원해야 했다 총리 챔벌린은 공산주의 국가 소련과 연대하는 것에 난색을 표하며 이를 거부했다. 처칠은 반공주의자였지만, 독일에 대항하기 위한 세력 균형이라는 관점에서 노동당의 제안에 이해를 보였다
같은 해 8월에는 독소 불가침 조약이 체결되어 애틀리가 우려했던 독소 동맹이 성립하게 되었다. 애틀리는 소련과의 연대를 주장했지만, 소련을 무조건 찬양했던 것은 아니고, 소련의 핀란드 침공과 발트 3국 점령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 또한 애틀리는 스탈린에 의해 적군 대숙청이 행해졌다는 정보를 입수했기 때문에 소련의 군사력에 별로 기대하지 않았다
허버트 모리슨(Herbert Morrison)은 당시 당수였던 애틀리(Clement Attlee)를 제치고 자신이 수상이 되는 야망을 품고 있었다. 모리슨이 작성한 선거 강령인 "미래를 향해 나아가자"에는 선거에서 승리했을 경우 누가 수상이 되는지를 고의적으로 명시하지 않았다. 또한 모리슨은 애틀리에게 "노동당은 전통적으로 새 의회 개회 전에 신임 의원들에 의한 새 당수 선출을 실시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새 수상은 당내 선거를 통해 결정되어야 한다는 의미). 애틀리는 "그 내용을 유념하고 있다"는 답장만 모리슨에게 편지로 보냈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개표는 투표일로부터 3주 후인 7월 26일에 이루어졌고, 그 결과 노동당의 승리가 확실해지자 모리슨은 다른 노동당 의원들에게 "내일 아침 노동당 새 당수를 뽑는 선거가 치러진다. 현 당수인 애틀리는 그때까지 국왕을 알현하여 수상으로 임명되어서는 안 된다"라고 설득하고 다녔다. 모리슨은 베빈(Ernest Bevin)에게 "당수 선거에 입후보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권유했지만, 애틀리 지지자인 베빈은 모리슨에게 정치 공작을 중단하라고 엄중히 경고했다. 참고로 이때 애틀리는 이미 국왕 조지 6세를 알
2. 6. 제2차 세계 대전과 전시 내각

1939년 9월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을 때 애틀리는 계속해서 야당 대표를 지냈다. 그 후 이어진 재앙적인 노르웨이 전역은 불신임 투표를 초래했고, 이는 네빌 체임벌린에게 영향을 미쳤다.[30] 체임벌린은 이를 극복했지만, 그의 정부의 평판은 너무나도 심각하고 공개적으로 손상되어 연립 정부가 필요하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애틀리가 비상 연립 정부에서 체임벌린 밑에서 봉직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해도 노동당을 설득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결국 체임벌린은 사임했고, 노동당과 보수당은 1940년 5월 10일 윈스턴 처칠이 이끄는 연립 정부를 구성했으며, 애틀리는 5월 12일 비밀 인장관으로 내각에 합류했다.[31]
애틀리와 처칠은 전시 내각이 보수당 3명(처음에는 처칠, 체임벌린, 할리팩스 경)과 노동당 2명(처음에는 애틀리 자신과 아서 그린우드)으로 구성되고, 노동당이 연립 정부 직책의 3분의 1보다 약간 더 많은 수를 차지해야 한다는 데 신속히 합의했다. 애틀리와 그린우드는 1940년 5월 프랑스 함락 후 히틀러와 평화 협상을 할 것인지에 대한 일련의 전시 내각 논쟁에서 처칠을 지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두 사람 모두 처칠을 지지했고, 그에게 영국의 저항을 계속할 수 있도록 전시 내각에서 필요한 다수를 제공했다.
1940년 5월 국민 연합 정부 수립부터 1945년 5월 선거까지 전시 내각에 남은 사람은 애틀리와 처칠뿐이었다. 애틀리는 처음에 비밀 인장관이었지만, 1942년 영국 최초의 부총리가 되었고, 1943년 9월 28일에는 식민지 장관[32]과 국무원 의장이 되었다.

애틀리 자신은 전시 정부에서 일반적으로 저조하지만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여 정부의 원활한 운영을 위해 막후와 위원회에서 일했다. 연립 정부에서는 세 개의 상호 연결된 위원회가 사실상 국가를 운영했다. 처칠은 전시 내각과 국방 위원회의 두 위원회를 주재했고, 애틀리는 그를 대신하여 이러한 위원회에 참여했으며, 처칠이 부재중일 때 의회에서 정부를 대변했다. 애틀리 자신은 세 번째 기구인 국무원 의장 위원회를 설립하고 나중에 주재했는데, 이 위원회는 국내 문제를 감독하는 책임이 있었다. 처칠은 전쟁 수행 감독에 가장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이러한 방식은 두 사람 모두에게 적합했다. 애틀리 자신은 처칠의 지원을 받아 이러한 계획을 세우고 정부 기구를 간소화하며 많은 위원회를 폐지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는 또한 정부에서 노동당과 보수당 장관 사이에 자주 발생하는 긴장을 완화하는 조정자 역할을 했다.[33]
1941년 나치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여 독소전쟁이 발발하자, 소련은 영국에 “제2전선(서부 전선)”을 열고 동서 양면에서 독일을 공격하도록 요구했다. 영국 내에서는 좌익 세력이 반전에서 전쟁 지지로 전환하여 “제2전선(서부 전선)”을 열 것을 요구했다. 처칠은 “제2전선”을 열기 위한 군사 행동을 당장은 하지 않았고, 애틀리도 처칠의 방침을 옹호했다.
처칠 내각은 사회보장제도의 방향을 검토하기 위해, 경제학자 윌리엄 베버리지(William Beveridge)를 위원장으로 하는 위원회를 발족시켰다. 베버리지는 검토 결과를 보고서 「사회보험과 관련된 여러 보장(Social Insurance and Allied Services)」에 정리하여 1942년 12월에 제시했는데, 오늘날에는 베버리지 보고서라고 불린다. 보고서에서는 국민 최저생활 보장(일본국 헌법에서 말하는 “건강하고 문화적인 최저한도의 생활”과 동의어)의 필요성과 구체적인 사회보장제도의 방향에 대한 제언이 제시되었다. 베버리지 보고서 제시를 받은 수상 처칠은 그 제언을 즉시 실행하려 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이 보고서에서 제안하고 있는 사회보장제도를 실현하려면 막대한 재정 지출이 필요하므로, 하원 총선거에서 국민의 동의를 얻은 후에 실행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애틀리, 베번, 모리슨 등 노동당 지도부는 연립이 해소될 것을 우려하여 처칠에 따르기로 했다.
3. 총리 재임 (1945년 ~ 1951년)
1945년 영국 총선에서 노동당은 47.7%의 득표율로 보수당(36%)을 크게 앞서며 압승을 거두었다.[40] 하원에서 393석을 확보하여 146석의 과반수를 차지했으며, 이는 역사상 노동당이 의회에서 과반수를 차지한 첫 번째 사례였다.[41] 버킹엄 궁전에서 조지 6세 국왕을 만나 총리로 임명되었다. 애틀리가 "선거에서 이겼습니다"라고 말하자, 국왕은 "압니다. 6시 뉴스에서 들었습니다"라고 대답했다.[42]
애틀리는 즉시 포츠담 회담에 참석해야 했기 때문에, 본격적인 내각 구성은 미루고 허버트 모리슨(Herbert Morrison)을 부총리에, 어니스트 베빈(Ernest Bevin)을 외무장관에 임명하는 등 주요 각료 인사만 단행했다. 8월 3일, 조지 6세에게 미결 각료 후보자 명단을 제출하여 내각 구성을 완료했다.
해럴드 라스키(Harold Laski)는 주미 대사직을 요구했지만, 애틀리는 그의 정치 경험 부족을 이유로 거절했다. 라스키는 과거 폭력 혁명을 용인하는 듯한 발언으로 논란이 되었고, 애틀리는 그에게 "당신은 노동당을 대표하여 발언할 권리가 없다"고 질책했다.[197] 결국 할리팩스 경(Edward Wood)이 주미 대사직에 유임되었다.
애틀리 내각은 처칠 전시 내각의 경험이 있는 의원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었으며, 아네린 베반(Aneurin Bevan)의 입각이 주목받았다. 베반은 국민보건서비스(National Health Service)(NHS)를 창설하는 업적을 남겼다. 문부장관에는 엘렌 윌킨슨(Ellen Wilkinson)이 임명되어, 애틀리 내각의 유일한 여성 각료가 되었다.
1946년부터 47년 의회 회기 동안 애틀리 내각은 노동당이 준비해 온 법안들을 통과시켰으며, 이는 현재까지도 깨지지 않는 기록이다. 1947년 10월과 1950년 3월에는 내각 개조가 이루어졌으며, 후자의 개조에서는 1950년 영국 총선거 이후 여성 각료 2명이 추가로 입각했다.
3. 1. 1945년 총선 승리와 애틀리 내각 출범
1945년 5월, 제2차 세계 대전 유럽 전선에서 나치 독일이 패배한 후, 클레멘트 애틀리와 윈스턴 처칠은 일본 제국이 항복할 때까지 연립 정부를 유지하려 했다.[35] 그러나 허버트 모리슨은 노동당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고, 처칠은 총리직에서 사임하고 즉각적인 총선을 실시해야 했다.[35]전쟁은 영국 사회에 큰 변화를 가져왔고, 사회 개혁에 대한 대중적 열망으로 이어졌다. 1942년 자유주의 경제학자 윌리엄 베버리지의 베버리지 보고서는 전후 정부의 목표가 완전 고용을 유지하고 복지 국가의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라고 제시했다.[35][36] 모든 주요 정당이 이 목표에 동의했지만, 대부분의 유권자들은 애틀리의 노동당이 이를 실현할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판단했다.[35][36]
노동당은 "미래를 향한 우리의 선택(Let Us Face the Future)"이라는 주제로 선거운동을 벌이며 전후 영국의 재건에 가장 적합한 정당임을 강조했다.[37] 또한, 강력하고 긍정적인 선거운동을 펼친 반면, 보수당의 선거운동은 처칠 개인에게만 집중되었다.[36] 여론조사에서 노동당의 압도적인 우세가 나타났지만, 당시 여론조사는 신뢰성이 낮았고, 대부분의 해설가들은 처칠의 명성과 "전쟁 영웅"으로서의 지위가 보수당의 승리를 보장할 것이라고 예상했다.[36] 맨체스터 가디언은 노동당의 승리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보도했고,[38] 뉴스 오브 더 월드는 보수당의 근소한 승리를, 글래스고의 한 전문가는 보수당 360석, 노동당 220석, 기타 60석을 예측했다.[39] 그러나 처칠은 선거운동 중 "어떤 형태의 게슈타포" 발언과 같은 실수를 저질러 큰 역효과를 낳았다.[35]
1945년 총선에서 노동당은 게슈타포가 필요하다는 등의 네거티브 캠페인을 전개 했지만, 마거릿 대처가 "지나쳤다고 느꼈다"고 회상할 정도로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1945년 7월 26일, 선거 결과 노동당은 47.7%의 득표율로 보수당(36%)을 크게 앞서며 압승을 거두었다.[40] 하원에서 393석을 확보하여 146석의 과반수를 차지했으며, 이는 역사상 노동당이 의회에서 과반수를 차지한 첫 번째 사례였다.[41] 애틀리는 버킹엄 궁전에서 조지 6세 국왕을 만나 총리로 임명되었다. 애틀리가 "선거에서 이겼습니다"라고 말하자, 국왕은 "압니다. 6시 뉴스에서 들었습니다"라고 대답했다.[42]
애틀리는 즉시 포츠담 회담에 참석해야 했기 때문에, 본격적인 내각 구성은 미루고 허버트 모리슨(Herbert Morrison)을 부총리에, 어니스트 베빈(Ernest Bevin)을 외무장관에 임명하는 등 주요 각료 인사만 단행했다. 8월 3일, 조지 6세에게 미결 각료 후보자 명단을 제출하여 내각 구성을 완료했다.
해럴드 라스키(Harold Laski)는 주미 대사직을 요구했지만, 애틀리는 그의 정치 경험 부족을 이유로 거절했다. 라스키는 과거 폭력 혁명을 용인하는 듯한 발언으로 논란이 되었고, 애틀리는 그에게 "당신은 노동당을 대표하여 발언할 권리가 없다"고 질책했다.[197] 결국 할리팩스 경(Edward Wood)이 주미 대사직에 유임되었다.
애틀리 내각은 처칠 전시 내각의 경험이 있는 의원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었으며, 아네린 베반(Aneurin Bevan)의 입각이 주목받았다. 베반은 국민보건서비스(National Health Service)(NHS)를 창설하는 업적을 남겼다. 문부장관에는 엘렌 윌킨슨(Ellen Wilkinson)이 임명되어, 애틀리 내각의 유일한 여성 각료가 되었다.
1946년부터 47년 의회 회기 동안 애틀리 내각은 노동당이 준비해 온 법안들을 통과시켰으며, 이는 현재까지도 깨지지 않는 기록이다. 1947년 10월과 1950년 3월에는 내각 개조가 이루어졌으며, 후자의 개조에서는 1950년 영국 총선거 이후 여성 각료 2명이 추가로 입각했다.
3. 2. 국내 정책
애틀리 정부는 기본 산업과 공공 시설의 국유화 공약을 이행했다. 1946년에는 잉글랜드 은행과 민간 항공이 국유화되었고, 1947년에는 석탄 광산, 철도, 도로 운송, 운하, 케이블 앤드 와이어리스가 국유화되었으며, 1948년에는 전력과 가스가 국유화되었다.[62] 1951년에는 철강 산업이 국유화되어, 1951년까지 영국 경제의 약 20%가 국영으로 이전되었다.[62]국유화는 노동자들에게 산업 운영에 대한 발언권을 크게 제공하지는 못했지만, 임금 인상, 근무 시간 단축,[46] 안전 측면에서의 근무 조건 개선[47] 등 실질적인 이득을 가져다주었다. 전력 및 가스 공급 회사는 효율성 측면에서 "인상적인 공기업 모델"이 되었고,[48] 국립 석탄위원회는 수익성을 확보했을 뿐만 아니라 광부들의 근무 조건도 크게 개선했다.[48] 국유화 이후 몇 년 동안 광산의 환경을 개선하는 여러 조치들이 시행되었는데, 더 나은 임금, 5일 근무제, 전국 안전 계획, 16세 미만 소년의 지하 작업 금지, 신규 채용자를 위한 교육 도입, 갱구 욕실 설치 등이 포함되었다.[49] 국립 석탄위원회는 광부들에게 병가 및 휴가비를 제공했다.[50]

애틀리의 보건 장관 아뉴린 비반(Aneurin Bevan)은 영국 의사 협회(British Medical Association)를 비롯한 의료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948년 국민건강보험 서비스(NHS)를 만들었다.[54] 이는 소득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에게 무료로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공공 의료 서비스 시스템이었다. NHS는 운영 첫해에 약 850만 명의 치과 환자를 진료하고 500만 개가 넘는 안경을 제공했다. 컨설턴트들은 새로운 시스템을 통해 사적인 진료에 의존할 필요 없이 생활 수준을 유지할 수 있는 급여를 받게 되어 혜택을 보았다.[52] NHS는 노동 계급 사람들의 건강을 크게 향상시켰으며, 디프테리아, 폐렴 및 결핵으로 인한 사망률이 크게 감소했다.[53]
애틀리 정부는 보건 분야의 행정 효율성 향상을 위한 현대화 및 확장 계획에 자금을 할당했다. 더 많은 간호사를 채용하고 병상 부족을 줄이기 위해 간호사 숙소를 개선했으며,[55] 결핵 환자 접촉자, 간호사, 조산사, 의대생을 보호하기 위해 BCG 백신 접종이 도입되었다.[56] 1948년 방사성 물질법은 방사성 물질 통제를 위한 일반 조항을 규정했다.[59] 1948년부터 1951년까지 애틀리 정부는 보건에 대한 지출을 80% 이상 증가시켰다.[61]
애틀리 정부는 '요람에서 무덤까지' 복지 국가 건설 계획을 실행하여 사회 보장 시스템을 마련했다. 1946년 국민보험법에 따라 근로자는 일정액의 국민보험료를 납부하고, 그 대가로 연금, 질병 수당, 실업 수당 및 장례 수당을 받을 자격이 주어졌다.[62] 1946년 국민보험법에는 실업 및 질병 수당, 출산 지원금 및 간병 수당, 출산 수당, 과부 연금, 후견인 수당, 퇴직 연금 및 사망 보조금 등 다양한 규정이 포함되었다.[63] 아동 수당과 다른 소득원이 없는 사람들에 대한 지원도 제공되었다.[62] 1949년에는 실업, 질병 및 출산 수당이 과세 대상에서 제외되었다.[64] 1948년에 도입된 일괄 지원금은 지방 당국이 제공하는 사회 서비스에 도움이 되었다.[65]
애틀리 정부는 연금과 다른 수당을 인상하여 연금이 생활비에 더 가까워지도록 했다. 전쟁 연금과 수당이 인상되었고,[67] 상시 간병 수당은 3배, 실업 수당은 3배 증가했으며, 특별 어려움 수당이 도입되었다.[68] 1951년 예산은 많은 전쟁 연금 수급자에 대한 보충 수당을 더욱 개선했다. 1948년 연금(기타 조항)법에 따라 지방 당국 또는 지방 당국 공무원을 대표하는 기관의 직원은 "적절한 조건으로 지방 당국의 연금 기금에 가입"할 수 있었다.[69] 1947년 개인 상해(민간인) 계획에는 상시 간병 수당과 의족 및 보조 기구 사용으로 인한 의류 마모 수당과 같은 다양한 혜택이 포함되었다.[71]
애틀리 정부에 의해 확립된 사회 복지 시스템은 심각한 사회적 빈곤을 크게 줄였다.[65] 학교 의료 또는 치과 의사 또는 보건 의료 담당관의 통계와 같은 모든 건강 지표가 개선되었고, 유아 사망률이 개선되고 노인의 기대 수명이 증가했다.[65]
애틀리 정부는 1944년 교육법의 조항들이 완전히 시행되도록 하였고, 중등 교육이 처음으로 권리로 자리 잡게 되었다. 주립 문법학교의 수업료가 폐지되었고, 새로운 현대식 중등학교가 건설되었다.[72] 1947년에는 취학 연령이 15세로 상향되었고,[73] 대학 장학금이 도입되었으며,[74] 대규모 학교 건설 프로그램이 조직되었다.[75] 훈련된 교사 수가 급증했고, 새로운 학교 자리가 증가했다.[76] 조립식 교실이 건설되었고, 1945년부터 1950년 사이에 928개의 새로운 초등학교가 건설되었다. 무료 급식 제공이 확대되었고, 대학 입학 기회가 증가했다.[78] 대학 장학금이 증가했고,[79] 정부는 수업료와 생활비를 충당할 수 있을 만큼 대학 장학금을 보충하는 정책을 채택했다.[73] 모든 학생들에게 처음으로 무료 우유가 제공되기도 했다.[80] 1947년에는 영국 예술위원회(Arts Council of Great Britain)가 설립되어 예술을 장려했다.[83] 1945년부터 1951년까지 2만 5천 명의 추가 교사를 배출한 긴급 교육 계획도 도입되었다.[85] 그러나 애틀리 정부는 포괄적 교육을 도입하는 데는 실패했다.
애틀리와 그의 장관들이 직면한 가장 심각한 문제는 경제였다. 전시 노력으로 인해 영국은 거의 파산 직전에 놓였고,[88] 해외 투자가 전쟁 비용으로 소진되었다. 평화 시대로의 전환과 해외 전략적 군사적 책임 유지로 무역수지에 지속적이고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 전후에도 식량과 기타 필수품에 대한 엄격한 배급이 계속되어 수입을 제한하고 수출을 증대시키며 파운드화를 안정시키려 했다.[89] 1945년 8월 미국의 렌드리스 프로그램의 갑작스러운 종료는 거의 위기를 초래했다. 1945년 12월에 체결된 영미 차관이 어느 정도 구제책을 제공했지만, 차관 조건에는 파운드화를 미 달러에 대해 완전히 환전 가능하도록 하는 것이 포함되었다. 1947년 7월에 이 조치가 시행되었을 때 통화 위기가 발생했고, 단 5주 만에 환전 가능성이 중단되어야 했다.[62] 영국은 1948년 미국의 마셜 플랜 프로그램의 혜택을 받았고, 경제 상황이 크게 개선되었다. 1949년의 또 다른 국제수지 위기는 재무장관 스태퍼드 크립스를 파운드화 평가절하로 몰아넣었다.[62]
이러한 문제에도 불구하고 애틀리 정부는 거의 완전 고용을 유지했다. 정부는 전시 경제 통제의 대부분을 유지했으며, 실업률은 50만 명을 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62] 노동력 부족이 더 빈번한 문제로 나타났다. 인플레이션율도 낮게 유지되었다.[48] 애틀리 집권 기간 동안 실업률은 2%를 넘는 경우가 거의 없었고, 장기 실업자의 핵심층도 없었다. 생산량과 생산성이 모두 증가했고, 평균 근무 시간은 단축되었다.[90]
정부는 주택 문제에서 성공적이지 못했다. 연간 40만 채의 신규 주택을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지만, 자재 및 인력 부족으로 목표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수준의 주택이 건설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틀리 정부의 주택 정책으로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재정착되었다. 1945년 8월부터 1951년 12월까지 1,016,349채의 신규 주택이 완공되었다.
1951년 애틀리 정부가 실각했을 때, 경제는 1945년에 비해 개선되었다. 1946년부터 1951년까지 지속적인 완전 고용과 꾸준히 증가하는 생활 수준을 보였으며, 매년 약 10% 증가했다. 같은 기간 동안 경제는 연간 3% 성장했고, 1951년 영국은 "유럽에서 최고의 경제 성과를 거두었으며, 1인당 생산량은 미국보다 더 빠르게 증가했다".[91] 1945년 이후 신중한 계획은 경제 회복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고, 실업률을 매우 낮은 수준으로 유지하면서 동원 해제가 원활하게 이루어지도록 했다.[77] 1948년 독과점 및 제한적 관행(조사 및 통제) 법이 통과되어 제한적 관행과 독과점에 대한 조사가 가능해졌다.[69]
1947년은 정부에게 특히 어려운 해였다. 이례적으로 추운 겨울로 인해 탄광이 얼어 생산이 중단되어 광범위한 정전과 식량 부족이 발생했다. 연료 및 동력부 장관 에마누엘 신웰(Emanuel Shinwell)은 적절한 석탄 비축을 확보하지 못했다는 비난을 받고 사임했다. 보수당은 이 위기를 이용했다.[95] 이 위기는 휴 달튼(Hugh Dalton)의 실패한 음모로 이어졌다. 그 해 후반에 스태퍼드 크립스(Stafford Cripps)는 애틀리에게 물러날 것을 설득하려 했지만, 얼니스트 베빈(Ernest Bevin)이 협력을 거부하여 음모는 사라졌다. 그 해 후반, 달튼은 예산 세부 사항을 기자에게 무심코 누설한 후 재무장관직에서 사임하고 크립스로 교체되었다.[96]
프랜시스(1995)는 노동당 전국 집행위원회와 당 대회 모두에서 사회주의 정의에 대한 합의가 있었다고 주장한다. 애틀리 정부는 공공 소유와 통제를 이용하여 극심한 빈부 격차를 없애고 영국 사회를 윤리적인 공동체로 재건하는 데 전념했다. 노동당의 이념은 당시 보수당의 개인주의, 세습 특권, 소득 불평등에 대한 옹호와는 극명하게 대조되었다.[43] 1948년 7월 5일, 클레멘트 애틀리 수상은 엠파이어 윈드러시호(HMT Empire Windrush)를 타고 온 서인도 제도 사람들에 대한 우려를 제기한 의원들의 편지에 답장을 보냈다.[44] 수상 자신은 경제 정책에 별로 관심이 없었고, 다른 사람들에게 문제를 맡겼다.[45]
3. 3. 외교 정책
포츠담 회담 직후, 애틀리 정부는 전시 동맹이었던 소련과의 관계를 관리해야 했다.[97] 어니스트 베빈 외무장관은 반공주의자였으나, 소련에 대한 초기 접근은 "경계심이 많고 의심스러웠지만, 자동적으로 적대적이지는 않았다".[97] 애틀리는 유엔을 신뢰하며 소련과의 우호 관계를 추구했고, 소련의 세계 정복 야욕을 부정했지만, 1947년 1월, 베빈과 함께 강경한 반소 정책에 동의했다.[97]애틀리 정부는 1946년 영국-소련 무역 협정에 따라 롤스로이스 네네 제트 엔진을 소련에 판매했다.[98] 그러나 냉전 심화 속에서 소련은 이 엔진을 역설계하여 MiG-15에 장착, 한국 전쟁에서 사용했다.[99]
스탈린이 동유럽을 장악하고 발칸반도 정부를 전복하면서, 애틀리와 베빈의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애틀리 정부는 NATO 창설에 중요한 역할을 했고,[62] 마셜 플랜을 추진하여 전후 유럽 경제 회복에 기여했다.[100] 노동당 내 좌파 유지 그룹은 미국과 소련 사이의 "제3세력" 창설을 옹호했으나, 영국과 소련 관계 악화, 미국의 경제적 의존으로 미국 지지 정책이 이어졌다.[62] 1947년, 소련과 미국의 핵 의도에 대한 두려움으로 영국의 독립적인 핵억지력 개발이 결정되었다.[62]
1949년 7월, 런던 항만 노동자 파업은 애틀리 정부가 군대를 파견하고 특별 법안을 통과시켜 진압했다.[101] 애틀리는 이 파업이 소련의 확장주의와 관련 있다고 우려했다.[101]

포츠담 회담에서 애틀리는 처칠을 대신하여 참석했다.[102][103] 뱌체슬라프 몰로토프는 갑작스러운 교체를 의심했고, 앨런 브룩은 총선 시기를 비판했다.
애틀리는 영국 제국의 탈식민화를 주도했다.[102][103] 인도, 파키스탄, 실론, 버마 등의 독립 운동이 활발해지자, 애틀리는 독립을 승인했다. 인도와 파키스탄은 분할 독립되었고, 팔레스타인 문제는 국제연합에 맡겨졌다. 애틀리는 독립한 국가들과의 우호 유지를 위해 영국 연방의 명칭을 변경했다.
팔레스타인에서는 시온주의 운동이 활발해졌고, 트루먼은 유대인 이주 제한 완화를 요구했다. 애틀리는 반대했으나, 킹 데이비드 호텔 폭파 사건 등 시온주의자들의 테러가 발생했다. 엑소더스호 사건으로 영국은 비판받았고, 애틀리는 팔레스타인 문제를 국제연합에 위탁했다. 팔레스타인 분할 결의 후 제1차 중동 전쟁이 발발했다.



애틀리는 철의 장막 연설에 대해 중립적이었으나, 마셜 플랜 수용 등 미국 편향 외교로 변화했다. 베빈의 영향으로 반공 외교로 전환, 베를린 봉쇄에 대응하고 북대서양 조약 체결, NATO를 발족했다. 그리스 내전에는 군사 개입하지 않았고, 트루먼 독트린이 발표되었다. 한국 전쟁에는 영연방 한국 파병군을 파병했다.
1950년 1월 6일, 중화인민공화국을 국가 승인했고,[203] 애틀리는 마오쩌둥과 회담했다.[204] 홍콩 지위 유지를 도모했으며, 티베트 사절단과 면담했다.[206] 베빈은 동남아시아 방공 군사 동맹을 구상했으나, NATO 설립을 우선시했다.[207]
애틀리는 핵 공유를 제안했으나, 미국은 거부했다. 애틀리는 자국 핵무기 보유를 결정, 원자력 자문위원회를 설립했다. 베빈은 "피로 물든 유니온잭이 꽂힌 원폭"을 보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핵무기 개발은 비밀로 진행되었고, 1952년 허리케인 작전으로 핵실험이 실시되었다. 애틀리 내각은 평시 징병제를 도입했다.
로베르 슈만의 슈만 선언에 대해, 애틀리 정부는 유럽 석탄 강철 공동체 참여를 즉시 결정하지 않았다.

한국 전쟁 발발 후, 애틀리 내각은 영국군을 파병했다. 애틀리는 전쟁 확대를 우려, 트루먼에게 핵무기 사용 자제를 촉구했다.

1951년, 모사데크 정권은 앵글로-이라니안 석유회사를 국유화했다. 아브단 위기가 발생했고, 모리슨은 강경 대응했으나, 애틀리는 군사 행동에 반대했다. 이집트 문제도 발생했다.


국공내전 후, 애틀리는 대만 문제 불개입론을 주장, 대만의 중화인민공화국 합병을 용인했다. 중화인민공화국 유엔 상임이사국 지위 계승을 주장하고, 대만을 유엔 관리 하에 두어야 한다고 했다. 1954년, 애틀리는 중화인민공화국을 방문, 모택동과 회견했다. 데일리 메일 등 보수 언론은 애틀리의 친중 발언을 비판했다. 앤서니 이든은 대만 귀속 미결정 방침을 발표했다. 동남아시아 조약 기구 결성에 대해, 애틀리는 중화인민공화국을 포함한 전 아시아 기구를 주장했다.
3. 4. 1950년 총선과 정권 퇴진
1950년 영국 총선에서 노동당은 1945년 총선에 비해 크게 줄어든 5석의 근소한 과반수를 얻었다.[133] 재선되었지만, 애틀리는 이 결과에 대해 전후 긴축 정책이 중산층 유권자들에게 미치는 영향 때문이라는 해석에 실망감을 표했다.[133] 1949년 하원 의석 재분배법에 따라 소선거구 제도의 선거구 획정이 재검토되어 노동당에 불리하게 작용했다는 지적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틀리 내각은 도시 지역 산업 및 대기, 수질 오염을 제한하기 위한 규정을 포함한 주요 개혁을 통과시켰다.[134]
1951년까지 애틀리 정부는 여러 고위 장관들의 건강 악화 및 고령화, 그리고 새로운 아이디어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134] 1951년 4월, 재무장관 휴 게이츠켈이 영국의 한국 전쟁 참전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긴축 예산을 편성하면서 당내 갈등이 심화되었다.[135] 아뉴린 베반은 예산에 포함된 국민건강보험의 "치아 및 안경"에 대한 새로운 요금에 항의하며 사임했고, 해롤드 윌슨을 포함한 여러 고위 장관들이 그의 행동에 동참했다.[135] 이는 당내 좌우파 간의 갈등을 더욱 심화시켰다.[135]

애틀리는 정권 운영의 어려움이 커지자, 1951년 10월에 조기 총선을 실시하여 실용적인 과반수를 확보하고 권위를 회복하고자 했다.[136] 그러나 이 도박은 실패로 돌아갔다. 노동당은 역대 최고 득표율을 기록했음에도 불구하고 보수당에 근소한 차이로 패배했다.[137] 이는 소선거구제의 특성상 노동당의 지지 기반이 편중되어 무효표가 많았던 반면, 보수당은 전국적으로 고르게 지지층을 확보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또한 생활이 안정된 중산층이 보수화되면서 사회주의적 정책의 지속을 꺼렸기 때문이라는 지적도 있다. 결국 애틀리는 6년 3개월의 재임 기간 후 1951년 10월 26일 수상직에서 사임했다.[137]
4. 퇴임 이후
애틀리는 1951년 총선 패배 후에도 노동당 당수직을 유지했지만, 당내 분열로 어려움을 겪었다.[62] 휴 게이츠켈이 이끄는 우파와 아뉴린 비반이 이끄는 좌파 사이의 갈등이 심화되었고, 많은 의원들은 애틀리가 젊은 지도자에게 자리를 물려줘야 한다고 생각했다.[138] 비반은 공개적으로 애틀리의 사퇴를 요구하기도 했다.[138] 애틀리가 당수직을 유지한 주된 이유는 그가 정치적, 개인적으로 싫어했던 허버트 모리슨의 당수직 야망을 좌절시키기 위해서였다.[62]
1955년 총선에서 앤서니 이든이 이끄는 보수당에 패배하여 노동당은 18석을 잃었다.[62] 같은 해 12월 7일, 애틀리는 20년간 이끌었던 노동당 당수직에서 은퇴하고, 휴 게이츠켈이 후임으로 선출되었다.[140] 1955년 9월 애틀리는 ''뉴스 크로니클''과의 인터뷰에서 "노동당은 과거에 매달려 얻을 것이 없다"며 자신을 중도좌파로 규정하고, 빅토리아 시대가 아닌 현재 시대에 성장한 인물이 당수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139]
애틀리는 하원에서 은퇴하고 1955년 12월 16일 '''애틀리 백작'''과 '''프레스트우드 자작''' 작위를 받아[40] 상원으로 자리를 옮겼다.[146] 1956년에는 가터 훈장도 받았다. 그는 수에즈 사태에 대해 이든이 강경한 입장을 취하도록 압력을 받았다고 믿었다. 1958년, 애틀리는 동성애 법 개혁 협회 설립에 참여하여 동성애 비범죄화를 위한 활동을 펼쳤고, 이는 9년 후 의회에서 통과되었다.[147] 1961년에는 케네디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 워싱턴 D.C.를 방문했다.[148]
1962년, 애틀리는 영국 정부의 유럽 공동체(EC) 가입 신청에 반대하며 상원에서 두 차례 연설했다. 그는 영국이 EC 구성 국가들과는 다른 의회 전통을 가지고 있으며, EC 가입이 영국 정부의 경제 계획을 방해하고, 영국의 전통적인 정책은 대륙적이라기보다는 외향적이라고 주장했다.[149]
애틀리는 1965년 윈스턴 처칠의 장례식에 참석했다.[150] 1964년 해럴드 윌슨 하에서 노동당이 다시 집권하는 것을 보았고, 1967년 9월 자신의 옛 선거구였던 월섬스토 웨스트가 보수당에 넘어가는 것을 지켜보았다.[150] 1967년 10월 8일, 애틀리는 폐렴으로 8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치되었다.[151][152]
애틀리의 작위는 아들 마틴 리처드 애틀리, 손자 존 리처드 애틀리에게 계승되었다.[153] 그의 유산은 상속세 부과를 위해 7,295파운드로 평가되었는데,[154] 이는 그의 아버지 유산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155]
애틀리는 총리직에서 물러난 후 자서전 『As it happened』(1954)를 출판했다. 이 책은 무미건조하게 그의 생애를 기록하여 평론가들로부터 "재미없는 자서전"이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애틀리 자신도 그렇게 생각했다. 다만, 세계 대공황 당시 램지 맥도널드가 보수당과 자유당에 의해 총리직을 유지한 것에 대해서는 "우리나라 정치사상 최대의 배신"이라고 비판했다.
애틀리는 냉전으로 얼어붙은 동구권 국가들과 영국의 관계 개선을 모색했다. 1953년 소련 최고 지도자 스탈린이 사망하자 게오르기 말렌코프와 정상 회담을 갖는 것을 처칠에게 제안했다. 또한 스탈린과 단교했던 유고슬라비아의 티토와 회담을 가졌다.
1954년에는 서독 재군비 허용 여부를 놓고 당내 논쟁이 벌어졌다. 애틀리는 소련에 대한 군사적 견제를 위해 서독 재군비를 허용하는 방침을 제시했고, 이는 서독인들로부터 환영받았다.
5. 평가 및 유산
클레멘트 애틀리는 세계 헌법 초안 작성을 위한 협약 소집에 동의한 서명자 중 한 명이었다.[141][142] 그 결과,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세계 헌법 회의가 소집되어 지구 연방 헌법을 초안 작성하고 채택하였다.[143] 국제 연맹과 국제 연합을 지지한 공로로 1954년 노벨 평화상 후보로 지명되었으며, 1955년과 1964년에도 추가로 지명되었지만, 매번 수상에는 실패했다.[144][145]
애틀리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겸손한 사람이지만, 겸손해야 할 이유가 너무 많다"라는 인용구는 윈스턴 처칠에게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처칠은 자신이 이 말을 한 적이 없다고 부인했고, 전시 내각에서 애틀리의 공헌에 대해 존경을 표했다.[156] 애틀리 자신은 비평가들에게 "그를 시작자라고 생각한 사람은 거의 없었고, 자신이 더 똑똑하다고 생각한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수상, CH 및 OM, 백작 및 가터 훈장 기사가 되었습니다."라는 라이머릭으로 응답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157]
그의 합의를 중시하는 지도력 스타일은 역사가들과 정치인들 모두에게 칭찬을 받았다. 에드워드 히스의 보수당 정부 시절 프랑스 대사였고 마가렛 대처 정부에서 내각 장관을 지낸 크리스토퍼 소옴즈는 "대처 여사는 진정으로 팀을 이끌지 않았습니다. 모든 결정을 내리고 싶어하는 수상이 있을 때마다 주로 좋지 않은 결과로 이어집니다. 애틀리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정말 훌륭했습니다."라고 평가했다.[158] 언론인이자 방송인인 앤서니 하워드는 그를 "20세기 최고의 수상"이라고 칭했다.[159]
마가렛 대처는 1995년 회고록에서 애틀리를 존경했다고 쓰면서, "그는 진지한 사람이자 애국자였습니다. 1990년대 정치인들의 일반적인 경향과는 달리, 그는 실속이 있었고 과시는 없었습니다."라고 평가했다.[160]
애틀리 정부는 전시 경제에서 평화 시대로의 성공적인 전환을 이끌었으며, 복원, 외화 부족, 무역 수지의 불리한 적자 및 정부 지출 문제를 해결했다. 국민 건강 서비스의 설립과 전후 복지 국가 구축은 전후 영국의 재건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애틀리와 그의 장관들은 재임 기간 동안 빈곤 감소와 인구의 일반적인 경제적 안보 증가를 통해 영국을 더 번영하고 평등주의적인 사회로 변화시키는 데 기여했다.[161]
외교 문제에서 그는 전후 유럽의 경제 회복에 크게 기여했으며, 냉전 초기 미국과 충실한 동맹국임을 증명했다. 그의 지도력 스타일 때문에 외교 정책을 구상한 사람은 그가 아니라 어니스트 베빈이었다. 영국이 독립적인 핵무기 프로그램을 가져야 한다고 결정한 것은 애틀리 정부였고, 1947년에 작업이 시작되었다.[162] 애틀리의 외무장관인 베빈은 "우리는 그것[핵무기]을 가져야 하고, 거기에 영국 유니온 잭이 있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최초의 작전용 영국 핵폭탄은 애틀리가 사무실을 떠난 지 약 1년 후인 1952년 10월에 폭발했다. 영국의 독자적인 원자력 연구는 부분적으로 전후 미-영 핵 연구 협력에 대한 전시 기대를 무효화하고 미국인이 동맹국에도 핵 기술을 전달하는 것을 금지한 미국의 맥머흔 법에 의해 촉진되었다. 영국 원자폭탄 연구는 충성심이나 재량이 불확실해 보이는 애틀리 자신의 내각 구성원조차도 비밀로 유지되었다.[163]
사회주의자였지만, 애틀리는 영국 제국을 세계에 좋은 힘을 가진 기관으로 생각했다. 그는 제국을 현대의 영국 연방으로 전환하여,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의 자치령을 모델로 삼아 자치해야 한다고 보았다.[164]
애틀리의 가장 큰 업적은 30년 동안 세 개의 주요 정당이 모두 지지한 영국의 통치에 대한 정치적, 경제적 합의를 확립한 것이다. 이는 1970년대 후반까지 정치 담론의 영역을 고정했다.[165] 2004년, 애틀리는 입소스 모리가 조직한 139명의 학자 설문조사에서 20세기 가장 성공적인 영국 수상으로 선출되었다.[166]
1979년에 공개된 청색 푯말은 레드브리지 런던 자치구 우드포드 그린의 몽캄 애비뉴 17번지에 있는 애틀리를 기념한다.[167] 애틀리는 1947년 왕립 학회 회원으로 선출되었으며,[168] 1948년 12월 15일 퀸 메리 칼리지 명예 회원으로 임명되었다.[169]
1988년 11월 30일, 애틀리의 전 선거구였던 라임하우스 도서관 밖에서 애틀리의 동상 제막식이 거행되었다. 동상은 청동으로 제작되었으며, 애틀리 다음의 노동당 총리였던 해럴드 윌슨이 제막식을 주관했다.[171] 당시 윌슨은 애틀리 내각의 마지막 생존자였으며,[173] 이 동상 제막식은 알츠하이머병 초기 단계였던 윌슨의 마지막 공개 행사 중 하나였다.[172] 라임하우스 도서관은 2003년 폐쇄되었고, 그 후 동상은 파손되었다. 의회는 4년 동안 보호용 가림막으로 동상을 둘러싼 후, 2009년 수리와 재주조를 위해 동상을 제거했다.[173] 복원된 동상은 2011년 4월 피터 맨델슨에 의해 제막되었으며, 1마일이 채 안 되는 거리에 있는 퀸 메리 런던대학교 마일 엔드 캠퍼스에 새롭게 설치되었다.[174] 국회 의사당에는 클레멘트 애틀리의 동상이 있으며,[175] 1979년 의회 투표를 통해 흉상 대신 동상으로 세워졌다. 조각가는 아이보어 로버츠-존스였다.
애틀리는 겸손하고 조용한 성격이었으며, 상류 중산층 신사에 해당하는 옷차림과 행동을 했다. 카리스마적인 지도자가 아니었고, 부하에게 권한을 위임하고 자신은 조정자 역할을 하는 지도자였다. 처칠은 애틀리를 "양의 탈을 쓴 양"이라고 평가했는데, 이는 두려워할 만한 인물이 아니라는 의미였다. 처칠이 애틀리를 과소평가했던 것이 1945년 영국 총선에서 보수당의 참패를 불렀다는 지적도 있다. 처칠은 하원에서 장황하게 연설하는 버릇이 있었지만, 애틀리는 "예스 예스"를 연발하며 맞장구를 쳐 처칠의 연설을 간결하게 끝내게 했다.
네빌 체임벌린을 사퇴시키고 나치 독일과의 유화 정책을 종식시킨 데 큰 공헌을 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고 유화 정책의 실패가 드러나자 여당인 보수당 내에서도 반란이 잇따랐기 때문에, 체임벌린은 야당인 노동당에 협력을 요청했다. 그러나 애틀리는 이를 거절했고, 체임벌린의 사퇴는 불가피해졌다. 파시즘에 우호적인 평가를 하는 의원이 많았던 보수당에 비해, 반파시즘을 주도했던 애틀리 등 노동당 정치인들의 공적은 과소평가되는 경향이 있다. 처칠이 저술한 『제2차 세계대전』이 제2차 세계 대전사 연구의 표준이 되었지만, 그 저서는 처칠 자신과 보수당의 관점에서 쓰여졌고, 그것이 처칠의 정치 사상과 상반되는 애틀리 등 노동당 정치인들의 과소평가로 이어졌다는 지적이 있다. 처칠은 『제2차 세계대전』 최종권에 "승리와 비극"이라는 부제를 붙였지만, 노동당 정권의 탄생을 "비극"으로 규정했다.
애틀리 내각의 여러 정책에 의해 "요람에서 무덤까지"라고 불리는 사회 보장 제도가 확립되었다. 영국은 복지 국가의 모범으로 여겨지며 여러 나라의 본보기가 되었다. 그러나 산업 국유화 등의 사회주의적 정책은 "영국병"이라고 불리는 경제 침체를 초래했고, 노동 권리 강화는 노동조합의 파업을 빈번하게 일으켜 국민의 불만을 초래했다(불만의 겨울). 후에, 애틀리 내각의 여러 정책은 보수당의 마가렛 대처 정권에 의해 수정되었다.
이전 노동당 당수 램지 맥도널드는 애틀리에 대해 "노동당 의원 중에서 상상력이 부족하고 가장 재미없지만, 그러나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카리스마적인 지도자 맥도널드는 기인을 좋아했고, 애틀리가 소박한 성격이었기 때문에 맥도널드는 애틀리를 중용하지 않았다. 거국일치 내각을 구성할 때 맥도널드는 노동당 주류에 남아 있던 모리슨이나 크립스에 대해서는 자파로 영입하려는 정치 공작을 벌였지만, 애틀리에 대해서는 그러한 정치 공작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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