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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태조 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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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태조 어진은 조선 태조 이성계의 초상화로, 현재 전주 경기전 어진박물관에 보관된 것이 유일하게 남아있다. 태조 어진은 총 26점이 제작되었으나, 임진왜란, 정유재란, 병자호란, 전주성 화재, 동학 농민 운동 등 여러 차례의 수난을 겪었다. 2005년 훼손 사실이 드러나 2008년 보존 처리를 거쳐 2010년부터 어진박물관에 보관되었으며, 2012년 국보로 승격되었다. 국보로 지정된 이유는 희소성, 원본적 성격, 완전한 보존 상태, 관련 기록의 존재 등 예술적, 학술적 가치를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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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태조 어진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조선 태조 어진
조선 태조 어진
이름조선 태조 어진
문화재 정보
국가대한민국
유형국보
번호317
지정일2012년 6월 29일
해지해당사항 없음
주소전북특별자치도 전주시 완산구 태조로 44 어진박물관
소유자국유
수량1폭
시대조선 시대(1872년)
문화재청 지정 번호12,09310000,35

2. 역사

조선 태조 어진은 여러 점이 제작되었으나, 현재 전해지는 것은 전주 경기전의 어진이 유일하다. 1763년(영조 39년)에 수리하였고, 2005년 문화재청 국정감사에서 훼손 사실이 드러나 2008년에 보존 처리를 완료하였다.[3] 2012년 보물에서 국보로 승격 지정되었다.[4]

2. 1. 제작 및 봉안

조선시대에 태조 이성계의 어진은 총 26점이 제작되었지만, 현재 전주시 경기전 경내의 어진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어진이 유일하게 현존한다. 조선 왕조는 태조의 어진을 봉안할 진전(眞殿)으로 경복궁 선원전, 함경도 영흥 준원전, 전주 경기전, 개성 목청전, 평양 영숭전, 경주 집경전을 세웠다. 경기전의 어진은 태조 재위 당시에 제작된 집경전의 어진을 1410년(태종 11년)에 모사하여 봉안하였으며,[1] 1872년(고종 9년) 어진도사(御眞圖寫) 화사(畵師) 조중묵이 다시 모사하였다.[2]

경기전 태조 어진은 1592년 임진왜란 때 의주를 거쳐 묘향산으로, 1597년 정유재란 때 경기전 소실 후 1614년(광해군 6년) 경기전 중건 후 전주로 환안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무주 적상산으로 피난 후 이듬해 환안되었고, 1767년(영조 43년) 전주성 화재로 전주향교로 옮겨졌으며, 동학 농민 운동 당시 위봉사 법당으로 이안 후 다시 환안되었다.[3]

2. 2. 수난과 보존

조선시대 태조의 어진은 총 26점이 제작되었지만, 현재 전주시 경기전 경내의 어진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어진이 현존하는 유일본이다. 경기전의 태조 어진은 1592년 임진왜란의주를 거쳐 묘향산으로 옮겨졌고, 1597년 정유재란 때 경기전이 불타 없어지자 1614년(광해군 6년)에 경기전을 다시 지은 후에야 전주로 돌아왔다. 1636년 병자호란 때는 무주 적상산으로 피난을 갔다가 이듬해 돌아왔다. 1767년(영조 43년)에는 전주성에 화재가 발생하여 전주향교로 옮겨졌으며, 동학 농민 운동 당시에는 위봉사 법당으로 옮겨졌다가 다시 돌아왔다.[3]

2005년 문화재청 국정감사에서 태조 어진이 훼손된 사실이 드러났고, 2008년 보존 처리를 완료하여 전주시로 반환되었다.[3] 2010년부터는 경기전 경내 어진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2. 3. 국보 승격

2005년 문화재청 국정감사에서 태조 어진의 훼손 사실이 드러났다. 2008년 보존 처리를 완료하고 전주시로 반환되었으며,[3] 2010년부터는 경기전 경내 어진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2012년 보물에서 국보 제317호로 승격 지정되었다.[4]

3. 국보 지정 사유

조선 태조 어진은 현존하는 유일한 조선 시대 왕의 전신상으로 희소성이 매우 높다.[1] 1872년(고종 9년)에 제작되었지만, 조선 초기 어진의 원본적 성격을 잘 간직하고 있다.[1]

경기전의, 어진이모도감의궤 등 어진 제작 관련 기록들이 함께 전해져 학술적 가치도 높다.[1] 이 기록들에는 어진 제작에 참여한 화가, 사용된 물품, 봉안 절차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 어진이 단순한 초상화를 넘어 국가와 왕실을 상징하는 중요한 의미를 지녔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예술성, 희소성, 상징성, 학술적 가치를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국보로 지정되었다.[1]

3. 1. 세부 특징

태조는 임금의 상복인 익선관청색 곤룡포를 입고 용상에 앉아 있는 모습이다.[1] 대규모 화면, 표제, 장황, 금실로 용문이 직조된 홍색 낙영, 유소 등이 온전하게 갖춰져 진전 봉안용으로서의 격식을 잘 갖추고 있다.[1]

참조

[1] 뉴스 서동철 전문기자의 비뚜로 보는 문화재 (58) https://news.naver.c[...] 서울신문 2008-03-06
[2] 뉴스 600년 조선왕조 위엄 지킨 태조 어진 https://news.naver.c[...] 국민일보 2010-11-14
[3] 뉴스 숱한 곡절과 시련의 역사 품은 태조어진 https://news.naver.c[...] 뉴시스 2008-10-23
[4] 뉴스 조선 태조 이성계 어진 국보 승격 https://news.v.daum.[...] 연합뉴스 2012-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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