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진
1. 개요
어진은 왕의 초상화를 의미하며, 한국의 삼국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제작되어 왔다. 삼국시대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에서 왕과 왕족의 초상을 제작했다는 기록과 유물이 전해진다. 고려 시대에는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어진이 남아있고, 조선 시대에는 어진 제작이 활발하게 이루어져 태조, 원종, 영조, 순조, 문조, 철종, 고종, 순종의 어진이 전해진다. 어진은 제작 방식에 따라 도사, 모사, 추사로 구분되며, 임진왜란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많은 어진이 소실되었으나, 현재는 국보 및 보물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으며, 복원 노력도 이루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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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군주 -
궁예
궁예는 신라 왕족의 서자로 추정되며 후삼국시대에 후고구려를 건국하고 태봉으로 국호를 변경한 인물이며, 말년에 폭정을 일삼다 신하들에게 축출되어 사망했다. -
한국의 군주 -
비류
비류는 백제 건국 설화에 등장하는 인물로, 온조와 함께 백제의 시조로 기록되었으나 미추홀 정착 실패 후 자결했고, 왕실 계보에는 오르지 못했지만 그의 이름은 백제 역사 속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
회화 -
추상 미술
추상 미술은 20세기 초 사물의 재현을 벗어나 순수한 조형 요소로 표현하는 미술 양식이며, 바실리 칸딘스키 등에 의해 시작되어 다양한 운동을 거쳐 발전했고 기하학적 추상과 서정적 추상으로 분류된다. -
회화 -
현판
현판은 건축물이나 장소의 이름, 의미를 나타내는 표지판으로 건물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권위와 상징성을 부여하며 역사와 문화를 전달하는 매개체 역할을 한다.
2. 삼국시대의 어진
신라 경순왕과 흥무왕 (김유신)의 어진만 전해지지만, 고구려와 백제에도 어진 제작 전통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자료들이 존재한다. 고구려 안악 3호분에는 미천왕 또는 고국원왕을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벽화가 있고, 백제 성왕의 모습을 본따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일본 호류지의 구세관음상이 전해진다. 경주 남산 불곡 마애여래좌상은 선덕여왕의 모습을 본따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2.2. 백제
일본 호류지에 소장된 구세관음상은 백제 성왕의 모습을 본떠 만들었다고 전해져, 백제의 어진 제작 기술을 짐작하게 한다.
2.3. 신라
신라 경순왕과 추존왕인 흥무왕(김유신)의 어진만 전해진다. 초상화라고 하기에는 애매하지만 진덕여왕 하반신 석상이 전해진다. 경주 남산 불곡 마애여래좌상이 선덕여왕의 모습을 본따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3. 고려시대의 어진
고려시대에는 태조 왕건을 비롯한 여러 왕들의 어진이 제작되었으나, 조선 세종 때 대부분 불태워지거나 묻혔다. 태조 왕건과 혜종 어진의 경우 그들의 묘 곁에 묻었고, 고려 왕들의 어진 18점이 발견되자 마진의 정갈한 땅에 묻었다는 기록이 있다.
3.1. 현존하는 고려 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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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어진만 전해진다. 태조 왕건의 어진이 한 점 전해지기는 하나, 복식이 고려 초기의 복식과 달라 후대에 그려진 상상화로 추측되고 있다. 다만 초상화라고 하기에는 애매하지만 동상까지 포함하면 태조 왕건 청동상이 현재까지 남아있다. 원래 고려시대 때 어진은 상당수 남아있었으나 조선 세종 때 대부분 불태우거나 묻어버렸다.
4. 조선시대의 어진
조선시대에는 어진 제작이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며, 도사(圖寫), 모사(模寫), 추사(追寫) 등 다양한 방식으로 제작되었다. 도사는 왕의 얼굴을 직접 보고 그리는 방식, 모사는 원본을 밑에 받치고 그리는 방식, 추사는 왕을 생전에 가까이했던 사람들의 증언을 토대로 그리는 방식이었다.
조선시대 초상화는 주로 배채법이라는 기법을 사용했다. 배채법은 천이나 종이 뒷면에 물감을 발라 색이 은은하게 비쳐 나오도록 하는 방식이다.
4.1. 어진 제작 방식
어진의 제작 방식에는 도사(圖寫), 모사(模寫), 추사(追寫) 등이 있었다. 도사는 왕의 모습을 직접 보고 그리는 방식이었다. 모사는 원본을 보고 베껴 그리는 방식이었다. 추사는 왕을 직접 보지 못하고, 왕을 생전에 가까이했던 사람들의 증언을 토대로 그리는 방식이었다.
조선시대 초상화에는 주로 배채법이라는 기법이 사용되었다. 배채법은 천이나 종이 뒷면에 물감을 발라 색이 은은하게 비쳐 나오도록 하는 방식이다.
4.2. 현존하는 조선시대 어진
현재 남아있는 어진은 태조, 원종, 영조 2점, 순조, 문조, 철종, 고종, 순종의 어진 등이다. 이 중 영조의 어린 시절을 그린 연잉군 시절의 어진과 철종의 어진만 원형을 그대로 옮겨 그린 것이고, 나머지는 원본을 베껴서 그린 그림이다. 원래는 세조, 숙종, 정조 등의 어진도 더 있었으나, 한국 전쟁 중이던 1954년 12월 10일 임시로 부산으로 옮겨 보관하던 중 화재로 인해 대부분 불에 타 없어지고 현존하는 어진만 남은 것이다. 한편 현존하는 어진 중에서도 문조의 어진은 얼굴 부분 대부분이 불에 타 버렸다.
어진은 사진도 찍을 수 없게 하였기 때문에 현재 남아있는 어진의 사진은 대부분 현대에 찍은 것이다. 현재 전해지는 한국 전쟁 이전의 어진 사진은 태조가 젊을 때 그린 어진을 찍은 사진으로, 한 일본 순사가 함흥에서 찍었다고 전해진다.
2016년 11월에는 세조 어진을 모사했던 이당 김은호의 유작들이 경매에 나왔는데, 이 중 세조 어진의 초본도 함께 출품되었다.
4.3. 주요 사건
현재 남아있는 어진은 태조, 원종, 영조 2점, 순조, 문조, 철종, 고종, 순종의 어진 등이다. 이 중 영조의 어린 시절을 그린 연잉군의 어진과 철종의 어진만 도사본이고, 나머지는 원본을 베껴서 그린 그림이다. 원래는 세조, 숙종, 정조 등의 어진도 더 있었으나, 대부분 화재로 소실되었다. 현존하는 어진 중 문조의 어진은 얼굴 부분 대부분이 불에 타 버렸다.
어진은 사진 촬영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현재 남아있는 어진의 사진은 대부분 현대에 찍은 것이다. 한국 전쟁 이전의 어진 사진은 태조가 젊을 때 그린 어진을 함흥에서 한 일본 순사가 찍은 것이라고 전해진다.
2016년 11월, 세조 어진을 모사했던 이당 김은호의 유작들이 경매에 나왔는데, 이 중 세조 어진의 초본도 함께 출품되었다.
선원보략에 등장한 일부 어진과, 1926년에 하응달이 선원보략 및 다른 책을 보고 모사한 어진들도 있으나, 대강의 형태만 묘사되어 정밀성이 떨어진다. 김은호가 궁궐에서 모사한 세조 어진과 선원보의 세조 어진은 수염과 얼굴 길이 등에서 차이가 있다.
4.3.1. 임진왜란과 어진
임진왜란 당시 궁궐이 모두 불타면서 문종의 어진은 얼굴만 간신히 남았고, 태조와 세조의 어진만이 불길 속에서 구해져 전해졌다.
1974년 윤탁연의 집안에서 소장하던 조선 선조의 어진이 공개되었다. 윤탁연은 임진왜란 초기에 누군가 그린 전립(戰笠)과 군복 차림의 조선 선조 어진을 입수하여 가문에 소장하고 있었다.
4.3.2. 한국전쟁과 어진
6.25 전쟁 당시 전국의 어진은 부산 광복동의 약품 보관 창고인 관재청에 보관되었다. 그러나 휴전협정이 체결된 1년 뒤인 1954년 12월 26일 아침 6시 20분경, 부산 광복동에서 전기공사청부업을 경영하던 정수홍의 집에서 식모로 일하던 안순자가 마룻바닥에 촛불을 켜놓고 잠들었다가 촛불이 주위에 인화되어 불길이 삽시간에 퍼졌고, 용두산 일대를 전소시켰다. 이 화재로 국보 3,400여 점이 불에 타 재로 변했다. 간신히 반쪽만 불에 탄 영조의 연잉군 시절, 노년기, 철종, 익종의 어진만 구할 수 있었다.
5. 어진의 문화재 지정 및 보존
태조의 어진은 1987년 12월 26일 보물 제931호로 지정되었다가 2012년 6월 29일 국보 제317호로 승격되었으며, 전주 경기전에 보관되어 있다. 영조의 노년기 어진은 보물 제932호, 영조가 어린 시절을 보낸 연잉군 시절의 어진은 보물 제1491호, 철종 어진은 보물 제1492호로 각각 지정되었으며, 모두 국립고궁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6. 현대의 어진 복원 노력
다음은 현대에 복원한 어진으로, 기존에 화재로 소실된 부분을 보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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