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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슈 정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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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슈 정벌은 에도 막부가 존왕양이 운동의 중심지였던 조슈 번을 토벌하기 위해 두 차례에 걸쳐 시도한 군사 작전이다. 1864년의 제1차 조슈 정벌은 막부의 칙명으로 시작되었으며, 사쓰마 번의 중재와 조슈 번의 항복으로 마무리되었다. 1866년의 제2차 조슈 정벌은 막부의 함대 공격으로 시작되었으나, 조슈 번의 저항과 잇키의 발생,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의 사망 등으로 막부의 패배로 끝났다. 조슈 정벌의 실패는 막부의 권위 실추를 가져왔고, 결국 대정봉환과 메이지 유신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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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막부육군 - 고슈·가시오 전투
    고슈·가시오 전투는 1868년 보신 전쟁 중 신정부군과 구 막부군이 혼슈 중부에서 벌인 전투로, 신정부군의 승리로 끝나 에도 막부 지지자들의 사기를 저하시키고 에도성의 무혈 항복에 영향을 미쳤다.
조슈 정벌
조슈 정벌
보신 전쟁과 조슈 정벌의 경로를 나타낸 지도 (일본어)
보신 전쟁과 조슈 정벌의 경로 (일본어)
개요
명칭조슈 정벌 (長州征討)
다른 명칭제1차 조슈 정벌 (第一次長州征討)
제2차 조슈 정벌 (第二次長州征討)
시기에도 시대 말기
장소주로 조슈 번 (현재의 야마구치현)
원인분큐의 역
금문의 변
교전 세력
제1차 조슈 정벌에도 막부
조슈 번
제2차 조슈 정벌에도 막부
조슈 번
사쓰마 번
오구라 번
구루메 번
후쿠오카 번
주요 인물
에도 막부도쿠가와 이에모치
마쓰다이라 모치나가
이나바 마사미치
도쿠가와 요시노부
마쓰다이라 사다아키
조슈 번모리 다카치카
모리 모토노리
기도 다카요시
다카스기 신사쿠
이토 히로부미
야마가타 아리토모
이노우에 가오루
결과
제1차 조슈 정벌막부 측의 승리 (조슈 번의 굴복)
제2차 조슈 정벌막부 측의 패배 (막부의 권위 실추)
관련 전투
제1차 조슈 정벌사카이 사건
게이호쿠 전투
제2차 조슈 정벌오시마구치 전투
게이호쿠 전투
시오야하마구치 전투
요시다가와구치 전투
고쿠라 성 전투
영향
영향보신 전쟁 발발의 주요 원인

2. 배경

조슈 번은 존왕양이 운동의 중심지였으며, 나마무기 사건, 금문의 변 등 막부 권위에 도전하는 사건들에 연루되었다. 이에 막부는 조슈 번을 제압하고 자신의 권위를 회복하고자 했다.

3. 제1차 조슈 정벌 (1864년)

1864년 7월 23일, 조정은 막부에 조슈 정벌 칙명을 내렸다. 막부는 조슈번 번주 모리 다카치카와 그의 아들 모리 모토노리에게 금문의 변 책임을 물어 오와리번, 에치젠 번 등과 함께 정벌군을 편성해 조슈번을 압박했다.[6]

10월 24일, 오사카에서 사이고 다카모리는 정벌군 총독 도쿠가와 요시카쓰에게 조슈 번 항복 과정에 대한 복안을 말했다. 요시카쓰는 사이고에게 와키자시를 주며 신임했고, 사이고는 정벌군 전권을 위임받은 참모가 되었다.[1] 요시카쓰와 사이고는 막부 통제를 벗어나 조기 병력 해체를 추진했다.[1]

결국 막부의 군사적 압박과 사쓰마 번의 중재로 조슈 번은 항복을 결정했다.

3. 1. 막부군의 편성 및 진군

1864년 7월 23일, 조정은 막부에 조슈 정벌 칙명을 발표했다. 막부는 조슈번모리 다카치카와 그의 양자인 모리 모토노리에게 금문의 변을 일으킨 책임을 물어 오와리번, 에치젠 번 등 서쪽 지방의 여러 번을 동원하여 정벌군을 편성했다. 동원된 번은 모두 35개 번, 총 15만 명에 달하는 대규모 병력이었다.[6]

8월 13일, 여러 번의 공격 방향이 결정되어 다섯 갈래(게이슈, 세키슈, 오시마, 고쿠라, 하기) 길을 통해 하기성이 아닌 영주 부자가 있는 야마구치로 진군하기로 했다.

조슈 정벌 사령관은 오와리번의 전 영주 도쿠가와 요시카쓰(기슈번도쿠가와 모치쓰구로부터 변경)가 맡았고, 부사령관은 에치젠 번주 마쓰다이라 모치아키가 임명되었다. 사령관은 쇼군으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아 조슈 정벌에 대한 군권을 장악했다.

10월 22일, 오사카성에서 조슈 정벌군은 군사 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에서 11월 11일까지 각자 공격을 시작하고, 1주일 뒤인 18일에 공격을 개시하기로 결정했다. 히로시마의 고쿠타이지에는 총사령관부를, 부젠의 고쿠라성에는 부사령관부를 설치했다. 쇼군은 최종적으로 조슈번에 처벌(공개재판)을 원했지만, 총사령관은 조슈번에 대한 항복 조건 결정과 조슈 정벌군의 해산 시기에 대한 권한을 가졌다.

3. 2. 사쓰마 번의 중재

1864년 10월 24일, 오사카에서 사이고 다카모리는 조슈 정벌군 총독 도쿠가와 요시카쓰에게 조슈 번의 항복 과정에 대한 복안을 말했다. 요시카쓰는 그 자리에서 신임의 증거로 사이고에게 와키자시 한 자루를 주었고, 사이고는 조슈 정벌군 전권을 위임받은 참모 격이 되었다.[1] 요시카쓰와 사이고는 총독부를 막부의 통제로부터 격리하여 관전론에 근거한 조기 병력 해체 노선으로 '독주'했다.[1]

이에 앞서, 조슈 정벌군에 참여하여 하기 원정로의 선봉을 맡았던 사쓰마 번은 독자적인 움직임을 보였다. 후쿠오카 번사인 기타오카 유헤이, 사쓰마 번사인 다카사키 고주로쿠가 9월 30일에 이와쿠니 번 산나나토에 들어가 깃카와 쓰네모토와 협상을 시작했다.[1] 10월 21일, 다카사키는 이와쿠니 앞으로 편지를 보냈는데,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1]

  • 사쓰마 번은 조슈 번을 위해 노력한다.
  • 폭도를 처벌하고 흑백을 가려 회개하는 마음을 분명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
  • 산조 사네토미 등 5경을 추방해야 한다.
  • 경우에 따라서는 영주 부자가 총독부의 군문으로 스스로 나올 필요가 있다.
  • 사이고 다카모리가 조슈 정벌군에서 협상을 담당하기 때문에 머지않아 이와쿠니에 들어갈 것이다.


11월 4일, 정장 총독의 명령으로 사이고는 친구인 제쇼 아쓰시, 기이 요시자네를 동반하여 이와쿠니에 들어가 깃카와 쓰네모토와 회담했다.[1] 이틀 전, 쓰네모토는 총독부에 금문의 변으로 상경한 삼가로(구니시 지카아키, 마스다 지카요시, 후쿠하라 모토쓰구)의 할복과 사참모(시시도 마사아키, 다케우치 쇼헤이, 나카무라 구로, 사쿠마 사헤에)의 참수, 오경(산조 사네토미, 산조니시 스에치카, 시조 다카우타, 히가시쿠제 미치토미, 미부 모토오사무)의 추방을 항복 조건으로 제시하며 개전 유예를 청원했다.[1]

3. 3. 조슈 번의 항복

1864년 7월 23일, 조정은 막부에 조슈 토벌 칙명을 내렸다. 막부는 조슈 번 번주 모리 다카치카와 그의 아들 모리 모토노리에게 금문의 변 책임을 물어 오와리 번, 에치젠 번 등과 함께 정벌군을 편성했다. 35개 번, 총 15만 명이 동원되었다.

8월 13일, 여러 번의 공격 방향이 정해졌고, 하기 성이 아닌 야마구치를 공격하기로 결정되었다. 조슈 정벌 사령관은 도쿠가와 요시카쓰가, 부사령관은 마쓰다이라 모치아키가 맡았다.

10월 22일, 오사카 성에서 열린 군사 회의에서 11월 11일부터 공격을 시작하기로 결정했다. 히로시마의 고쿠타이지(国泰寺)에 총사령부, 부젠의 고쿠라 성에 부사령관부를 설치했다. 막부는 조슈 번에 대한 처벌을 원했지만, 총사령관은 항복 조건 결정과 군 해체 시기에 대한 권한을 가졌다.

이때 조슈 정벌군에 참여한 사쓰마 번은 독자적인 움직임을 보였다. 9월 30일 사쓰마 번은 이와쿠니 번과 협상을 시작했다. 10월 21일, 다카사키 고주로쿠는 사쓰마 번이 조슈 번을 위해 폭도를 처벌하고 회개하는 마음을 분명히 할 것을 요구하는 편지를 보냈다.

10월 24일, 사이고 다카모리도쿠가와 요시카쓰에게 조슈 번 항복 과정에 대한 복안을 말했고, 요시카쓰는 사이고에게 와키자시를 주며 조슈 정벌군 전권을 위임했다. 요시카쓰와 사이고는 막부의 통제에서 벗어나 조기 병력 해체를 추진했다.

막부의 군사적 압박과 사쓰마 번의 중재 속에 조슈 번은 결국 항복을 결정했다.[8]

4. 제2차 조슈 정벌 (1866년)

1866년 6월 7일 막부 함대가 스오오시마(현 야시로섬)에 포격을 시작하면서 제2차 조슈 정벌이 시작되었다.[10] 6월 13일 게이슈 방면과 오제카와 방면, 6월 16일 세키슈 방면, 6월 17일 오구라 방면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조슈는 야마구치 번 정부와 협력하여 작전을 지휘했다.[5]

전투 장기화로 쌀값이 폭등하고 전국 각지에서 잇키(민중 봉기)가 일어나 막부군 철수의 한 원인이 되었다.

7월 20일 도쿠가와 이에모치각기병으로 사망하고,[23] 7월 27일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쇼군직을 계승하기로 결정되었으나(정식 상속은 29일부터), 막부의 패배를 인식하고 사퇴하려 했다.

1867년 5월 사후 회의에서 요시노부가 조슈 관전론을 주장하여 메이지 천황의 칙허를 받았다. 12월 8일 니조 나리유키 주최 조정 회의에서 모리 다카치카, 모리 사다히로 부자가 관위를 회복하며 조슈 번은 조정의 적으로 여겨졌던 혐의를 벗었다.

4. 1. 조슈 번의 군사 개혁

조슈 번은 오무라 마스지로를 등용하여 군제 개혁을 단행했다. 오무라는 서양식 군제를 도입하고, 신분에 관계없이 능력 위주로 인재를 등용하여 군사력을 강화했다.[7] 이러한 군사력 강화는 이후 조슈 번이 막부와의 전투에서 승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4. 2. 막부군의 재침과 전투

1866년 6월 7일 막부 함대가 스오오시마(현 야시로섬)에 포격을 시작하면서 전투가 시작되었다.[10] 6월 13일에는 게이슈 방면과 오제카와 방면, 6월 16일에는 세키슈 방면, 6월 17일에는 오구라 방면에서도 전투가 시작되었다. 조슈 번은 야마구치 번 정부와 합의하여 작전을 지휘했다.

오시마 방면에서는 6월 8일 이요 마쓰야마 번 군이 오시마에 상륙하여 현지 주민에게 난폭한 행동을 했다. 막부군은 오시마 북쪽의 구가 마을에 상륙하고, 마쓰야마 번 군은 섬 남쪽의 야스다쇼에서 상륙했다. 조슈 번군은 혼슈로 철수했으나, 이후 다카스기 신사쿠의 지휘 하에 오시마를 탈환했다.[10]

게이슈 방면에서는 조슈 번, 이와쿠니 번과 막부 보병대, 기슈 번 병사 등이 격돌했다. 히로시마 번은 막부의 출병 명령을 거부했다. 이 전투에는 피차별민 부대도 참여하여 용맹함을 보였다.[11][12]

세키슈 방면에서는 오무라 마스지로가 지휘하여 하마다 번을 공격, 하마다 성을 함락시켰다.

고쿠라 방면에서는 간몬 해협을 사이에 두고 조슈 번과 규슈 여러 번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다. 조슈 번은 다노우라와 오사토 상륙에 성공하며 전투의 주도권을 잡았다.[14] 고쿠라 번은 고쿠라 성에 불을 지르고 가와라마치로 퇴각했다.[17]

전투가 장기화되면서 쌀값이 폭등하여 전국 각지에서 잇키와 타치코와시가 일어났다. 7월 20일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가 사망하고,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쇼군직을 계승했으나, 조정에 휴전을 요청하여 정전 합의가 성립되었다. 그러나 고쿠라 방면에서는 전투가 계속되었고, 1867년 1월에야 조슈 번과 고쿠라 번 사이에 화약이 성립되었다.

4. 3. 막부군의 패배와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의 죽음

1866년 6월 7일 막부 함대가 스오오시마에 포격을 시작하면서 전투가 시작되었다. 이후 6월 13일 게이슈 방면과 오제카와 방면, 6월 16일 세키슈 방면, 6월 17일 오구라 방면에서 전투가 이어졌다. 야마구치 번 정부와 합의하여 작전을 지휘한 조슈 번은 각 방면에서 막부군에 맞서 싸웠다.[5]

전투가 장기화되면서 쌀값이 폭등했고, 전국 각지에서 민중 봉기(잇키)가 발생하여 막부의 통치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막부군이 철수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7월 20일에는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각기병으로 사망하였다.[23] 이후 7월 27일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쇼군직을 계승하기로 결정하였으나(정식 상속은 29일부터), 막부 정권의 패배를 깨닫고 사퇴하고자 하였다.

이에모치의 미다이도코로였던 가즈노미야 사치코 내친왕은 12월 9일 출가했다. 이에모치는 조슈 정벌에 즈음하여 만약의 사태가 발생하면 다야스 가메노스케를 상속자로 삼겠다는 뜻을 가즈노미야와 덴쇼인에게 전하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에도의 가즈노미야는 가메노스케가 어리다는 이유로 반대하며, 요시노부 외에는 상속자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1867년 5월의 사후 회의에서 주도권을 쥔 요시노부가 조슈 관전론을 주청하여 메이지 천황의 칙허를 얻었고, 그해 12월 8일 니조 나리유키가 주최한 조정 회의에서 모리 다카치카, 모리 사다히로 부자가 관위를 복권받으며 조슈 번은 조정의 적으로 여겨졌던 혐의에서 사면받았다.

5. 정벌 이후

1866년 6월 7일 막부 함대가 스오오시마를 포격하면서 시작된 조슈 정벌은 전투 장기화로 쌀값이 폭등하고 전국 각지에서 잇키(민중 봉기)가 일어나 막부군은 도중에 철수해야 했다. 이 전투 와중에 7월 20일 도쿠가와 이에모치가 각기병으로 사망했다. 7월 27일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도쿠가와 종가를 계승하기로 결정했지만(정식 상속은 7월 29일), 막부 정권의 패배를 확신하고 쇼군직을 사퇴하고자 했다.

1867년 5월 사후 회의에서 요시노부는 조슈에 대한 관대한 처분을 주장하여 메이지 천황의 칙허를 얻었다. 그해 12월 8일 니조 나리유키가 주최한 조정 회의에서 모리 다카치카, 모리 사다히로 부자가 관위를 복권받으며 조슈는 조정의 적으로 몰린 혐의에서 벗어났다.[24]

5. 1. 막부 권위의 실추

조슈 정벌의 실패는 막부의 군사적 무능을 명백히 드러냈다. 전투가 장기화되면서 쌀값이 폭등했고, 전국 각지에서 잇키(민중 봉기)가 일어나 막부군은 도중에 철수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1866년 7월 20일, 도쿠가와 이에모치가 각기병으로 사망하고,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쇼군 직을 계승하게 되었지만, 막부 정권의 패배를 확신하고 사퇴하고자 했다.[23]

시마즈 히사미쓰·다다요시 부자는 니조 나리유키에게 조슈 정벌 반대 건백서를 제출하고, 천하의 공의를 모아 정치 개혁을 단행할 것을 건의했다. 조정 회의는 분란을 겪었지만, 고메이 천황은 전쟁 지속을 결정했다. 그러나 규슈 전선이 붕괴되면서 조슈 정벌 중지 칙명이 내려졌고, 여러 다이묘들을 소집하여 "천하 공론"으로 국사를 결정하기로 했다.[24]

이러한 상황에서 막부는 영국의 오리엔탈 뱅크와 600만달러의 차관 계약을 체결하여 재정 확보를 시도했다. 한편, 이와쿠라 도모미를 중심으로 조정 개혁 운동이 추진되었으나, 고메이 천황의 반발로 실패하고, 오히려 요시노부의 쇼군 취임 환경이 조성되었다.

1866년 12월 5일, 요시노부는 쇼군에 취임했지만, 25일에 고메이 천황이 사망했다. 1867년 5월의 사후 회의에서 요시노부는 조슈에 대한 관대한 처분을 주장하여 메이지 천황의 칙허를 얻었고, 결국 조슈는 사면받았다.

이처럼 조슈 정벌의 실패는 막부의 권위 실추를 가속화시켰고, 각 번은 막부로부터 이탈하는 결과를 낳았다.

5. 2. 대정봉환과 메이지 유신

1866년 조슈 정벌이 장기화되면서 쌀값이 폭등하고 전국 각지에서 민중 봉기(잇키)가 일어나 막부군은 철수하게 되었다. 이 전투 도중 1866년 7월 20일 도쿠가와 이에모치가 각기병으로 사망하고,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쇼군직을 계승하려 했으나(정식 상속은 7월 29일) 막부 정권의 패배를 깨닫고 사퇴하려 했다.

1867년 5월, 사후 회의에서 요시노부는 조슈에 대한 관대한 처분을 주장하며 메이지 천황의 허가를 얻었다. 같은 해 12월 8일, 니조 나리유키가 주최한 조정 회의에서 모리 다카치카, 모리 사다히로 부자의 관위가 복구되어 조슈는 조정의 적으로 몰린 혐의에서 벗어났다.[24]

6. 역사적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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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1] 서적 日本史Ⓑ用語集 山川出版社 1998
[2] 서적 日本史Ⓑ用語集 山川出版社
[3] 서적 日本史Ⓑ用語集 山川出版社
[4] 서적 歴史と旅 新・藩史事典 秋田書店 1993
[5] 서적 忠正公勤王事蹟 訂正補修 防長史談会 1911-05
[6] 서적 幕府衰亡論
[7] 문서 3월 16일 부대 재편
[8] 문서 징벌 내용
[9] 서적 幕末・維新期長州藩の政治構造
[10] 문서 제2기병대 상륙
[11] 논문 幕末長州藩の奇兵隊と部落民軍隊 http://archives.pref[...] 山口県公文書館 1987-03
[12] 서적 修訂防長回天史 末松春彦 1921-03
[13] 웹사이트 旧幕府、長吏弾左衛門を編して平人と為す。弾左衛門、乃ち内記と改名す。 https://clioimg.hi.u[...] 2023-07-13
[14] 서적 北九州市史 近世
[15] 서적 北九州市史 近世
[16] 서적 北九州市史 近世
[17] 서적 北九州市史 近世
[18] 서적 北九州市史 近世
[19] 서적 北九州市史 近世
[20] 서적 北九州市史 近世
[21] 서적 北九州市史 近世
[22] 간행물 史談会速記録
[23] 문서 관산
[24] 서적 原口清著作集2 孝明天皇と岩倉具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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