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위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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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위총은 1174년 무신정변으로 혼란한 틈을 타 서경유수로서 반란을 일으킨 고려 시대의 인물이다. 그는 무신 세력에 대항한다는 명분으로 서북 지역의 여러 성을 규합하여 세력을 확장했으나, 관군과의 전투에서 패배하여 서경으로 후퇴했다. 이후 금나라에 지원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하고, 결국 1176년 서경이 함락되면서 체포되어 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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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의 서경유수 - 유방 (고려)
유방은 고려 시대 문신이자 무신으로, 거란 침입 격퇴에 공을 세워 병부상서, 참지정사 서경유수 겸 서북면행영도병마사 등 주요 관직을 역임하고 문하시중에 이르렀으며 천승현개국남에 봉해졌다. - 고려의 서경유수 - 최사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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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민첨은 고려 전기의 문신이자 무신으로, 1018년 고려-거란 전쟁 당시 원수로서 귀주대첩에서 거란군을 격파하는 데 공을 세웠으며, 사후 태자태부, 문하시랑평장사로 추증되고 은렬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 고려의 병부상서 - 한언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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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청은 고려 시대 서경 출신 승려이자 정치가로, 풍수지리에 능통하여 인종에게 서경 천도를 주장하고 금나라 정벌을 역설했으나, 김부식 등 개경 귀족 세력의 반발로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당했다. - 고려의 반란자 - 이자겸
고려 중기 문신 이자겸은 문종부터 인종까지 왕실 외척으로서 막강한 권력을 누리며 문하시중에 올라 국정을 농단하고 왕위를 넘보았으나, 이자겸의 난을 일으켰다가 실패하여 유배지에서 사망했다.
조위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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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한글 표기 | 조위총 |
한자 표기 | 趙位寵 |
개정 로마자 표기 | Jo Wichong |
매큔-라이샤워 표기 | Cho Wich'ong |
예일 표기 | Co Wichong |
2. 배경
조위총은 병졸(행오)에서 시작하여 상서(팔좌)의 지위에 오른 인물로, 가계는 전해지지 않는다.[1] 의종 치세 말 병부상서로서 서경유수로 부임했다. 1170년 정중부, 이의방 등이 주도한 경인의 난으로 의종이 폐위되고, 문신들에 대한 살육이 자행되면서 무신 정권이 성립되었다. 3년 후, 의종이 김보당의 난에 휘말려 살해되자, 조위총은 서경을 근거로 거병을 꾀했다.
2. 1. 무신정변과 혼란
1170년(의종 24) 정중부(鄭中夫) 등이 무신의 난을 일으켜 전국이 혼란에 빠졌다. 1174년 병부상서와 서경유수(西京留守)를 겸하고 있던 조위총은 무신 세력들이 의종을 시해하고 많은 문신들을 죽이니 이를 토벌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군사를 일으켰다. 서북의 여러 성에 격문을 보내 선동하자, 절령(岊嶺) 이북의 40여 성이 이에 호응하였다.[4]이에 조정(朝廷)에서 윤인첨(尹鱗瞻)이 이끄는 토벌군을 파견하였다. 조위총은 이를 대파하고 개경 근처까지 진출하였으나, 이의방(李義方) 군대에게 패하여 서경으로 후퇴하였다.[5]
이후에도 관군의 공격이 계속되자 금나라에 사신을 보내 구원병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이 일을 맡은 김존심(金存心)이 배반하여 윤인첨에게 항복함으로써 실패하였다. 다시 서언(徐彦)을 보내 절령 이북의 40여 성을 금나라에 할양하기로 하고 원병을 요청하였으나, 금나라 황제는 이를 거부하고 서언을 잡아 고려 조정으로 보내 버렸다.[4]
명종 4년(1174년) 9월, 조위총은 의종 살해의 죄를 추궁한다는 명분으로 거병하여 각지에 격문을 보내 중앙 정부에 대항하여 반란에 참여할 것을 제안했고, 이에 북계의 40여 개 성이 호응했다. 고려 조정은 평장사 윤린첨을 보내 서경의 반란을 토벌하게 했지만, 윤린첨이 이끄는 관군은 절령(자비령)에서 대패했고, 역습에 나선 반란군의 선봉대가 개경 부근까지 접근했다. 전황이 긴박해지자, 조정의 실권자인 이의방이 출전하여 대동강가에 이르러 서경을 공략했고, 조위총은 농성을 하며 버텼다.
명종 5년(1175년) 정월, 반란군이 동계의 요덕을 공격하자, 조정은 이의방이 주살된 것을 기회로 조위총에게 투항을 권했다. 조위총은 처음에는 항복 의사를 밝혔지만, 곧 철회하고 군사 행동을 멈추지 않았다. 한편, 동계에서 진격한 두경승이 이끄는 관군의 별동대가 서경 이북의 요지인 연주를 함락시키고, 개경에서는 의종의 국상이 거행되면서 거병의 명분과 군세를 잃은 조위총의 입장은 급격히 위축되기 시작했다. 궁지에 몰린 조위총은 금나라에 북계를 바치는 조건으로 지원을 요청했지만, 이미 명종을 고려 국왕으로 책봉한 금의 세종은 이 요청을 거부하고, 조위총이 보낸 사자도 고려로 압송시켰다.[2][3]
2. 2. 조위총의 출세
『고려사』에 따르면, 조위총의 가계는 멸실되어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행오(兵卒)에서 시작하여 팔좌(尙書)의 지위에 올랐다"[1]라는 기록을 보면, 낮은 신분에서 출세한 무신이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의종 치세 말에는 병부상서로서 서경유수로 부임했다. 1170년, 정중부, 이의방 등이 주도한 경인의 난으로 의종은 폐위되고, 문신들에 대한 살육이 자행됨에 따라 무신 정권이 성립되었다. 3년 후, 의종이 김보당의 난에 휘말려 살해되자, 조위총은 서경을 근거로 거병을 꾀했다.3. 전개
1174년(명종 4년) 9월, 조위총은 의종을 살해한 죄를 묻는다는 명분으로 군사를 일으켰다. 그는 각지에 격문을 보내 중앙 정부에 대항하여 반란에 참여할 것을 제안했고, 이에 북계의 40여 개 성이 호응했다.[4]
이에 고려 조정은 평장사 윤인첨을 보내 서경의 반란을 토벌하게 했다. 그러나 윤인첨이 이끄는 관군은 절령(자비령)에서 크게 패했고, 역습에 나선 반란군의 선봉대가 개경 부근까지 접근했다. 전황이 긴박해지자, 조정의 실권자인 이의방이 출전하여 대동강가에 이르러 서경을 공격했지만, 조위총은 성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버텼다. 서경 함락에 실패한 이의방은 조위총의 아들 조경 등을 붙잡아 참수하고 개경으로 돌아왔다.[5]
1175년(명종 5년) 정월, 반란군이 동계의 요덕을 공격하자, 조정은 이의방이 죽은 것을 기회로 조위총에게 항복을 권유했다. 조위총은 처음에는 항복 의사를 밝혔지만, 곧 철회하고 군사 행동을 멈추지 않았다. 한편, 동계에서 진격한 두경승이 이끄는 관군의 별동대가 서경 이북의 요지인 연주를 함락시켰다. 개경에서는 의종의 국상이 거행되면서 거병의 명분과 군세를 잃은 조위총의 입장은 급격히 위축되기 시작했다. 궁지에 몰린 조위총은 금나라에 북계를 바치는 조건으로 지원을 요청했지만, 이미 명종을 고려 국왕으로 책봉한 금의 세종은 이 요청을 거부하고, 조위총이 보낸 사신도 고려로 압송시켰다.[2][3]
3. 1. 반란의 시작
1170년(의종 24) 정중부(鄭中夫) 등이 무신의 난을 일으켜 전국이 혼란에 빠졌다. 1174년 병부상서와 서경유수(西京留守)를 겸하고 있던 조위총은 무신 세력들이 의종을 시해하고 많은 문신들을 죽이니 이를 토벌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군사를 일으켰다. 서북의 여러 성에 격문을 보내 선동하자, 절령(岊嶺) 이북의 40여 성이 이에 호응하였다.[4]이에 조정(朝廷)에서 윤인첨(尹鱗瞻)이 이끄는 토벌군을 파견하였다. 조위총은 이를 대파하고 개경 근처까지 진출하였으나, 이의방(李義方) 군대에게 패하여 서경으로 후퇴하였다.[5]
이후에도 관군의 공격이 계속되자 금나라에 사신을 보내 구원병을 요청하였으나 실패했다. 이 일을 맡은 김존심(金存心)이 배반하여 윤인첨에게 항복하였기 때문이다. 다시 서언(徐彦)을 보내 절령 이북의 40여 성을 금나라에 할양하기로 하고 원병을 요청하였으나, 금나라 황제는 이를 거부하고 서언을 잡아 고려 조정으로 보내 버렸다.[4]
명종 4년(1174년) 9월, 의종 살해의 죄를 추궁한다는 명분으로 거병한 조위총은 각지에 격문을 보내 중앙 정부에 대항하여 반란에 참여할 것을 제안했고, 이에 북계의 40여 개의 성이 호응했다. 고려 조정은 평장사 윤린첨을 보내 서경의 반란을 토벌하게 했지만, 윤린첨이 이끄는 관군은 절령(자비령)에서 대패했고, 역습에 나선 반란군의 선봉대가 개경 부근까지 접근했다.
3. 2. 초기 승리와 위기
1170년(고려 의종) 정중부 등이 무신의 난을 일으켜 전국이 혼란에 빠졌다. 1174년 병부상서와 서경유수(西京留守)를 겸하고 있던 조위총은 무신 세력들이 고려 의종을 시해하고 많은 문신들을 죽이니 이를 토벌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군사를 일으켰다. 서북의 여러 성에 격문을 보내 선동하자, 절령(岊嶺) 이북의 40여 성이 이에 호응하였다.[4]이에 조정(朝廷)에서 윤인첨이 이끄는 토벌군을 파견하였다. 조위총은 이를 대파하고 개경 근처까지 진출하였으나, 이의방 군대에게 패하여 서경으로 후퇴하였다.[5]
이후에도 관군의 공격이 계속되자 금나라에 사신을 보내 구원병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이 일을 맡은 김존심(金存心)이 배반하여 윤인첨에게 항복함으로써 실패하였다. 다시 서언(徐彦)을 보내 절령 이북의 40여 성을 금나라에 할양하기로 하고 원병을 요청하였으나, 금나라 황제는 이를 거부하고 서언을 잡아 고려 조정으로 보내 버렸다.[4]
명종 4년(1174년) 9월, 조위총은 의종 살해의 죄를 추궁한다는 명분으로 거병하여 각지에 격문을 보내 중앙 정부에 대항하여 반란에 참여할 것을 제안했고, 이에 북계의 40여 개 성이 호응했다. 고려 조정은 평장사 윤인첨을 보내 서경의 반란을 토벌하게 했지만, 윤인첨이 이끄는 관군은 절령(자비령)에서 대패했고, 역습에 나선 반란군의 선봉대가 개경 부근까지 접근했다. 전황이 긴박해지자, 조정의 실권자인 이의방이 출전하여 대동강가에 이르러 서경을 공략했고, 조위총은 농성을 하며 버텼다. 서경 함락에 실패한 이의방은 조위총의 아들 조경 등을 붙잡아 참수하고, 개경으로 귀환하여 재출전을 준비했으나, 같은 해 12월 정중부에 의해 살해되었다.
명종 5년(1175년) 정월, 반란군이 동계의 요덕을 공격하자, 조정은 이의방이 주살된 것을 기회로 조위총에게 투항을 권했다. 조위총은 처음에는 항복 의사를 밝혔지만, 곧 철회하고 군사 행동을 멈추지 않았다. 한편, 동계에서 진격한 두경승이 이끄는 관군의 별동대가 서경 이북의 요지인 연주를 함락시키고, 개경에서는 의종의 국상이 거행되면서 거병의 명분과 군세를 잃은 조위총의 입장은 급격히 위축되기 시작했다. 궁지에 몰린 조위총은 금나라에 북계를 바치는 조건으로 지원을 요청했지만, 이미 명종을 고려 국왕으로 책봉한 금의 세종은 이 요청을 거부하고, 조위총이 보낸 사자도 고려로 압송시켰다.[2][3]
3. 3. 금나라에 대한 지원 요청과 실패
1174년 관군의 공격이 계속되자 조위총은 금나라에 사신을 보내 구원병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이 일을 맡은 김존심(金存心)이 배반하여 윤인첨에게 항복함으로써 실패하였다.[4] 조위총은 다시 서언(徐彦)을 보내 절령 이북의 40여 성을 금나라에 할양하기로 하고 원병을 요청하였으나, 금나라 황제는 이를 거부하고 서언을 잡아 고려 조정으로 보내 버렸다.[4]궁지에 몰린 조위총은 금나라에 북계를 바치는 조건으로 지원을 요청했지만, 이미 명종을 고려 국왕으로 책봉한 금의 세종은 이 요청을 거부하고, 조위총이 보낸 사신도 고려로 압송시켰다.[2][3]
3. 4. 반란 진압
1174년 조위총은 무신 세력이 의종을 시해하고 많은 문신들을 죽였다는 명분으로 군사를 일으켰다. 서북 지역 여러 성에 격문을 보내자 절령(岊嶺) 이북의 40여 성이 호응하였다.[4]조정에서는 윤인첨이 이끄는 토벌군을 파견했으나, 조위총은 이들을 대파하고 개경 근처까지 진출했다. 그러나 이의방 군대에게 패하여 서경으로 후퇴하였다.[5]
이후 관군의 공격이 계속되자 금나라에 사신을 보내 구원병을 요청했다. 하지만 이 일을 맡은 김존심(金存心)이 배반하여 윤인첨에게 항복하면서 실패했다. 다시 서언(徐彦)을 보내 절령 이북의 40여 성을 금나라에 할양하기로 하고 원병을 요청했으나, 금나라 황제는 이를 거부하고 서언을 고려 조정으로 보냈다.[4]
1176년 관군의 공격으로 서경이 함락되자 조위총은 사로잡혀 살해당했다.
4. 결과 및 영향
조위총의 난은 고려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1170년 (고려 의종) 정중부 등이 일으킨 무신의 난으로 전국이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1174년 조위총은 고려 의종 시해와 문신 살해에 대한 복수를 명분으로 군사를 일으켰다. 조위총은 서북 지역의 여러 성에 격문을 보내 지지를 호소했고, 절령(岊嶺) 이북의 40여 성이 이에 호응했다.[4]
조위총은 금나라에 지원을 요청했으나, 사신 김존심(金存心)의 배반으로 실패했다. 이후 서언(徐彦)을 보내 절령 이북 40여 성을 할양하는 조건으로 다시 원병을 요청했지만, 금나라 황제는 이를 거부하고 서언을 고려 조정에 넘겼다.[4]
4. 1. 고려-금 관계
1170년 (고려 의종) 정중부 등이 무신의 난을 일으켜 전국이 혼란에 빠졌다. 1174년 조위총은 고려 의종을 시해하고 많은 문신들을 죽인 무신 세력을 토벌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군사를 일으켰다. 서북의 여러 성에 격문을 보내 선동하자, 절령(岊嶺) 이북의 40여 성이 이에 호응하였다.[4]관군의 공격이 계속되자 조위총은 금나라에 사신을 보내 구원병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이 일을 맡은 김존심(金存心)이 배반하여 윤인첨에게 항복함으로써 실패하였다. 다시 서언(徐彦)을 보내 절령 이북의 40여 성을 금나라에 할양하기로 하고 원병을 요청하였으나, 금나라 황제는 이를 거부하고 서언을 잡아 고려 조정으로 보내 버렸다.[4]
5.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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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대중문화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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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高麗史
[2]
서적
金史
[3]
서적
金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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