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존 브라운의 시체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존 브라운의 시체"는 18세기 후반과 19세기 미국의 야외 집회에서 불리던 찬송가에서 유래된 곡조로, 존 브라운의 시신을 기리는 노래로 널리 알려졌다. 이 곡은 "공화국의 찬가"와 같은 다른 노래에도 영향을 미쳤으며, 남북 전쟁 중 북군 병사들 사이에서 애창되었다. 다양한 가사와 함께 여러 차례 개작되었으며, 미국 외에도 러시아, 프랑스, 스리랑카 등 여러 지역에서 각기 다른 형태로 불렸다. 특히, 한국과 일본에서도 개사되어 불리는 등, 시대와 문화를 초월하여 널리 사용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기독교의 찬가 - 영광송
    영광송은 기독교에서 삼위일체를 기리는 찬양으로, 다양한 형태가 존재하며 예배 의식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글로리아 파트리와 개신교 찬송가, 성찬례나 주기도에 덧붙여지는 형태 등 교파별로 고유하게 사용된다.
  • 기독교의 찬가 - 어메이징 그레이스
    어메이징 그레이스는 존 뉴턴이 작사하고 작곡가는 불명인 찬송가로, 죄에서 구원받은 감격, 과거 회한, 신의 사랑에 대한 감사를 담고 있으며, 다양한 설과 함께 전 세계적으로 알려져 있다.
존 브라운의 시체
노래 정보
1861년 조지 킴볼의
1861년 "존 브라운의 노래" 텍스트 원본 출판물
종류행진곡
국가미국
작곡가미국 민요
작곡 연도1856년
작사가제임스 E. 그린리프, C. S. 홀, C. B. 마시 외
작사 연도1861년

2. 곡의 역사

"친구들이여, 우리를 만날 건가요"는 18세기 후반과 19세기 미국 야외 집회에서 불려진 찬송가로, 공화국의 찬가와 "존 브라운의 시체"와 관련된 곡조이다.[2] 야외 집회는 정기적인 교회 참석이 어려운 사람들이 순회 설교자 앞에서 예배를 드리기 위해 모이는 변경 지역에서 주로 열렸다.[3] 이러한 모임은 사회적으로 중요했지만, 격렬한 종교적 열정과 더불어 난폭함으로도 알려졌다.[4]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찬송가는 즉흥적인 요소가 중요하게 작용하며 가르쳐지고 암기되었다. 곡조와 가사는 민속 음악처럼 변화하고 적응했다. 19세기 미국 종교 역사가들은 야외 집회 음악이 특정 설교나 기도에 감동받은 참가자들이 설교자의 텍스트에서 짧고 단순한 멜로디를 시작점으로 삼아 창작한 결과물이라고 설명한다. 멜로디는 기존 곡조에서 차용하거나 즉석에서 만들어졌으며, 반복해서 불려지며 매번 조금씩 바뀌면서 다른 사람들이 쉽게 배우고 암기할 수 있는 형태로 발전했다.[5]

"친구들이여"의 초기 버전은 콜앤드리 응답 찬송가 전통의 일부로 개발된 변형을 포함했다.

:오! 친구들이여, 나를 만날 건가요

:오! 자매들이여, 나를 만날 건가요

:오! 조문객들이여, 나를 만날 건가요

:오! 죄인들이여, 나를 만날 건가요

:오! 기독교인들이여, 나를 만날 건가요

이 구절은 세 번 반복되고 "가나안의 행복한 해안에서"라는 구절로 마무리되었다.[6] 초기 합창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었다.

:우리는 외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리라 (3×)

:영광은 그의 것이니[7]

"존 브라운의 노래", "공화국의 찬가" 등 이 곡조를 사용한 다른 많은 텍스트의 특징인 "영광, 영광, 할렐루야" 합창은 1808년에서 1850년 사이에 구전 야외 집회 전통에서 발전했다.

"친구들이여"와 같은 민요 찬송가는 인쇄물보다는 구전 전통을 통해 주로 유포되고 진화했다.[8] 인쇄물에서는 1806~1808년 사우스캐롤라이나, 버지니아, 매사추세츠에서 야외 집회 노래 모음집에 실린 것을 통해 그 기원을 확인할 수 있다.[9]

"친구들이여" 찬송가 텍스트의 곡조와 변형은 1800년대 초반 남부 야외 집회에서 흑인과 백인 신도들에게 인기가 있었으며, 주로 감리교와 침례교 야외 집회 순회를 통해 퍼져나갔다.[10] 1800년대 중반 남부 야외 집회가 쇠퇴하면서 "친구들이여" 곡조는 찬송가와 곡조집에 포함되었고, 이 경로를 통해 1800년대 중반 북부 미국 전역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861년까지 "침례교, 몰몬교, 밀러교, 미국 주일학교 연합 및 절제단과 같은 다양한 단체"가 "친구들이여"를 자신들의 것이라고 주장했다.[11]

1858년에는 찰스 던바가 선정하고 편곡한 "나의 형제여, 우리를 만날 건가요"라는 노래의 가사와 음악이 ''연합 하프와 부흥 코러스''에 출판되었다. 이 책에는 "영광 할렐루야" 합창의 음악은 있지만 가사는 없었고, "내 형제여, 우리를 만날 건가요"라는 첫 구절이 있었다. 같은 해 12월 브루클린의 한 주일학교에서 "형제들이여, 우리를 만날 건가요"라는 찬송가가 출판되었는데, 여기에는 "영광 할렐루야" 합창의 가사와 음악, 그리고 "친구들이여, 우리를 만날 건가요"라는 첫 구절이 포함되어 있었다.[12]

존 브라운의 노래의 1861년 악보 표지


일부 연구자들은 이 곡조의 기원이 "흑인 민요",[13] 조지아의 아프리카계 미국인 결혼식 노래,[14] 또는 스웨덴의 술집 노래에서 시작된 영국의 바다 노래라고 주장한다.[15] "친구들이여"의 버전이 아프리카계 미국인 링 슉의 일부로 불려졌다는 일화도 있다.[16] 노래, 박수, 발 구르기, 춤, 확장된 황홀경의 합창과 함께 이러한 콜앤드리 응답 설정에서 찬송가가 나타난 것은 "영광 할렐루야" 합창의 발전에 영향을 주었을 수 있다. 이 곡조가 구전 전통에서 발전했기 때문에, 이러한 영향 중 어느 것이 곡조 창작에 구체적인 역할을 했는지 확실히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다양한 문화의 민속적 영향이 야외 집회의 음악 문화에서 두드러졌고, 부흥 운동에서 일어난 음악 제작에서 이러한 영향이 자유롭게 결합되었다는 것은 확실하다.[5]

"용감한 맥클레란은 이제 우리의 지도자입니다"의 악보, M.A. 키더 부인의 가사, 영광 할렐루야 곡조에 맞춰졌으며, "유명한 존 브라운의 노래"도 포함, 1862


남부 흑인들 사이에서 인기가 있었던 "친구들이여, 우리를 만날 건가요"는 "가나안의 행복한 해안"에 대한 언급을 통해 더 행복한 곳으로 강을 건너는 아이디어를 암시하며 반노예 제도적인 하위 텍스트를 가지고 있었다는 주장이 있다.[17][18] 이러한 하위 텍스트는 다양한 "존 브라운" 가사가 유명한 폐지론자와 미국 남북 전쟁과 관련된 주제를 취하면서 더욱 강화되고 확장되었다.

2. 1. 야외 집회 찬송가

"친구들이여, 우리를 만날 건가요"는 18세기 후반과 19세기 미국 야외 집회에서 불려진 찬송가로, 공화국의 찬가와 "존 브라운의 시체"와 관련된 곡조이다.[2] 야외 집회는 정기적인 교회 참석이 어려운 사람들이 순회 설교자 앞에서 예배를 드리기 위해 모이는 변경 지역에서 주로 열렸다.[3] 이러한 모임은 사회적으로 중요했지만, 격렬한 종교적 열정과 더불어 난폭함으로도 알려졌다.[4]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찬송가는 즉흥적인 요소가 중요하게 작용하며 가르쳐지고 암기되었다. 곡조와 가사는 민속 음악처럼 변화하고 적응했다. 19세기 미국 종교 역사가들은 야외 집회 음악이 특정 설교나 기도에 감동받은 참가자들이 설교자의 텍스트에서 짧고 단순한 멜로디를 시작점으로 삼아 창작한 결과물이라고 설명한다. 멜로디는 기존 곡조에서 차용하거나 즉석에서 만들어졌으며, 반복해서 불려지며 매번 조금씩 바뀌면서 다른 사람들이 쉽게 배우고 암기할 수 있는 형태로 발전했다.[5]

"친구들이여"의 초기 버전은 콜앤드리 응답 찬송가 전통의 일부로 개발된 변형을 포함했다.

:오! 친구들이여, 나를 만날 건가요

:오! 자매들이여, 나를 만날 건가요

:오! 조문객들이여, 나를 만날 건가요

:오! 죄인들이여, 나를 만날 건가요

:오! 기독교인들이여, 나를 만날 건가요

이 구절은 세 번 반복되고 "가나안의 행복한 해안에서"라는 구절로 마무리되었다.[6] 초기 합창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었다.

:우리는 외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리라 (3×)

:영광은 그의 것이니[7]

"존 브라운의 노래", "공화국의 찬가" 등 이 곡조를 사용한 다른 많은 텍스트의 특징인 "영광, 영광, 할렐루야" 합창은 1808년에서 1850년 사이에 구전 야외 집회 전통에서 발전했다.

"친구들이여"와 같은 민요 찬송가는 인쇄물보다는 구전 전통을 통해 주로 유포되고 진화했다.[8] 인쇄물에서는 1806~1808년 사우스캐롤라이나, 버지니아, 매사추세츠에서 야외 집회 노래 모음집에 실린 것을 통해 그 기원을 확인할 수 있다.[9]

"친구들이여" 찬송가 텍스트의 곡조와 변형은 1800년대 초반 남부 야외 집회에서 흑인과 백인 신도들에게 인기가 있었으며, 주로 감리교와 침례교 야외 집회 순회를 통해 퍼져나갔다.[10] 1800년대 중반 남부 야외 집회가 쇠퇴하면서 "친구들이여" 곡조는 찬송가와 곡조집에 포함되었고, 이 경로를 통해 1800년대 중반 북부 미국 전역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861년까지 "침례교, 몰몬교, 밀러교, 미국 주일학교 연합 및 절제단과 같은 다양한 단체"가 "친구들이여"를 자신들의 것이라고 주장했다.[11]

1858년에는 찰스 던바가 선정하고 편곡한 "나의 형제여, 우리를 만날 건가요"라는 노래의 가사와 음악이 ''연합 하프와 부흥 코러스''에 출판되었다. 이 책에는 "영광 할렐루야" 합창의 음악은 있지만 가사는 없었고, "내 형제여, 우리를 만날 건가요"라는 첫 구절이 있었다. 같은 해 12월 브루클린의 한 주일학교에서 "형제들이여, 우리를 만날 건가요"라는 찬송가가 출판되었는데, 여기에는 "영광 할렐루야" 합창의 가사와 음악, 그리고 "친구들이여, 우리를 만날 건가요"라는 첫 구절이 포함되어 있었다.[12]

일부 연구자들은 이 곡조의 기원이 "흑인 민요",[13] 조지아의 아프리카계 미국인 결혼식 노래,[14] 또는 스웨덴의 술집 노래에서 시작된 영국의 바다 노래라고 주장한다.[15] "친구들이여"의 버전이 아프리카계 미국인 링 슉의 일부로 불려졌다는 일화도 있다.[16] 노래, 박수, 발 구르기, 춤, 확장된 황홀경의 합창과 함께 이러한 콜앤드리 응답 설정에서 찬송가가 나타난 것은 "영광 할렐루야" 합창의 발전에 영향을 주었을 수 있다. 이 곡조가 구전 전통에서 발전했기 때문에, 이러한 영향 중 어느 것이 곡조 창작에 구체적인 역할을 했는지 확실히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다양한 문화의 민속적 영향이 야외 집회의 음악 문화에서 두드러졌고, 부흥 운동에서 일어난 음악 제작에서 이러한 영향이 자유롭게 결합되었다는 것은 확실하다.[5]

남부 흑인들 사이에서 인기가 있었던 "친구들이여, 우리를 만날 건가요"는 "가나안의 행복한 해안"에 대한 언급을 통해 더 행복한 곳으로 강을 건너는 아이디어를 암시하며 반노예 제도적인 하위 텍스트를 가지고 있었다는 주장이 있다.[17][18] 이러한 하위 텍스트는 다양한 "존 브라운" 가사가 유명한 폐지론자와 미국 남북 전쟁과 관련된 주제를 취하면서 더욱 강화되고 확장되었다.

2. 2. "영광, 영광, 할렐루야" 후렴구

"존 브라운의 노래", "공화국의 찬가" 등에 사용된 "영광, 영광, 할렐루야" 후렴구는 1808년에서 1850년 사이에 구전 야외 집회 전통에서 발전했다.[2][5] 이 후렴구는 19세기 미국의 야외 집회에서 불리던 "친구들이여, 우리를 만날 건가요"라는 곡조에서 유래되었다.

초기 합창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포함되었다.

{{poemquote|우리는 외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리라 (3×)

영광은 그의 것이니[7]}}

"친구들이여"와 같은 민요 찬송가는 인쇄물보다는 구전 전통을 통해 주로 유포되고 진화했다.[8] 인쇄물에서는 야외 집회 노래가 1806~1808년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데, 이는 사우스캐롤라이나, 버지니아, 매사추세츠에서 야외 집회 노래 모음집에 실렸기 때문이다.[9]

"친구들이여" 찬송가 텍스트의 곡조와 변형은 1800년대 초반 남부 야외 집회에서 흑인과 백인 신도들에게 인기가 있었으며, 주로 감리교와 침례교 야외 집회 순회를 통해 퍼져나갔다.[10] 1800년대 중반 남부 야외 집회가 쇠퇴하면서 "친구들이여" 곡조는 찬송가와 곡조집에 포함되었고, 이 경로를 통해 1800년대 중반 북부 미국 전역에 이 곡조가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861년까지 "침례교, 몰몬교, 밀러교, 미국 주일학교 연합 및 절제단과 같은 다양한 단체"가 "친구들이여"를 자신들의 것으로 주장했다.[11]

예를 들어, 1858년에는 찰스 던바가 선정하고 편곡한 단어와 곡조가 ''연합 하프와 부흥 코러스''에 출판되었으며, 신시내티에서 출판되었다. 이 책에는 "나의 형제여, 우리를 만날 건가요"라는 노래의 가사와 음악이 포함되어 있으며, "영광 할렐루야" 합창의 음악은 있지만 가사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리고 "내 형제여, 우리를 만날 건가요"라는 첫 구절이 있다. 1858년 12월 브루클린의 한 주일학교에서 "형제들이여, 우리를 만날 건가요"라는 찬송가를 출판했는데, 여기에는 "영광 할렐루야" 합창의 가사와 음악, 그리고 "친구들이여, 우리를 만날 건가요"라는 첫 구절이 포함되어 있다.[12]

일부 연구자들은 이 곡조의 기원이 "흑인 민요",[13] 조지아의 아프리카계 미국인 결혼식 노래,[14] 또는 스웨덴의 술집 노래로 시작된 영국의 바다 노래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주장해 왔다.[15] 일화에 따르면 "친구들이여"의 버전이 아프리카계 미국인 링 슉의 일부로 불려졌다고 한다.[16]

2. 3. 곡조의 기원 논란

"친구들이여, 우리를 만날 건가요"는 18세기 후반과 19세기 미국의 야외 집회 순회에서 형성되어, "존 브라운의 시체"와 "공화국의 찬가"와 연관된 곡조이다.[2] 이러한 집회는 변경 지역에서 순회 설교자 앞에서 예배를 드리기 위해 모이는 사람들이 참석했으며, 중요한 사회적 행사였지만 난폭함으로 명성을 얻었다.[3][4]

19세기 미국 종교 역사의 전문가들은 야외 집회 음악을 특정 설교나 기도에 감동받은 참가자들이 설교자의 텍스트에서 짧고 단순한 멜로디를 시작점으로 삼아 창작한 결과물로 묘사한다. 멜로디는 기존의 곡조에서 차용되거나 즉석에서 만들어졌고, 반복해서 불려지며 매번 약간씩 바뀌었고, 다른 사람들이 쉽게 배우고 빠르게 암기할 수 있는 연으로 점차 형성되었다.[5]

"친구들이여"의 초기 버전에는 콜앤드리 응답 찬송가 전통의 일부로 개발된 변형이 포함되었다.[6] 초기 합창에는 "우리는 외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리라"라는 구절이 포함되었다.[7] 친숙한 "영광, 영광, 할렐루야" 합창은 1808년에서 1850년 사이에 구전 야외 집회 전통에서 발전했다.

"친구들이여"와 같은 민요 찬송가는 인쇄물보다는 구전 전통을 통해 주로 유포되고 진화했다.[8] "친구들이여" 찬송가 텍스트의 곡조와 변형은 1800년대 초반 남부 야외 집회에서 흑인과 백인 신도들에게 인기가 있었으며, 주로 감리교와 침례교 야외 집회 순회를 통해 퍼져나갔다.[10] 1861년까지 "침례교, 몰몬교, 밀러교, 미국 주일학교 연합 및 절제단과 같은 다양한 단체"가 "친구들이여"를 자신들의 것으로 주장했다.[11]

일부 연구자들은 이 곡조의 기원이 "흑인 민요",[13] 조지아의 아프리카계 미국인 결혼식 노래,[14] 또는 스웨덴의 술집 노래로 시작된 영국의 바다 노래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주장해 왔다.[15] 일화에 따르면 "친구들이여"의 버전이 아프리카계 미국인 링 슉의 일부로 불려졌다고 한다.[16]

이 곡조가 구전 전통에서 발전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러한 영향 중 어느 것이 이 곡조의 창작에 구체적인 역할을 했을지 확실히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러한 다양한 문화의 수많은 민속적 영향이 야외 집회의 음악 문화에서 두드러졌고 부흥 운동에서 일어난 음악 제작에서 이러한 영향이 자유롭게 결합되었다는 것은 확실하다.[5]

남부 흑인들 사이에서 인기가 있었던 "친구들이여, 우리를 만날 건가요"는 이미 "가나안의 행복한 해안"에 대한 언급으로 더 행복한 곳으로 강을 건너는 아이디어를 암시하며 반노예 제도적인 하위 텍스트를 가지고 있었다는 제안이 있었다.[17][18]

3. 가사의 역사

"존 브라운의 시체" 가사는 1861년 매사추세츠 민병대의 제2 보병 대대("타이거" 대대) 병사들이 공동으로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25] 이들은 존 브라운과 동명이인인 대대원을 놀리면서 가사를 붙였으며, 이후 여러 사람을 거쳐 다듬어졌다.[25][26]

;최초의 공개 공연

1861년 5월 12일 일요일, 보스턴 근처의 포트 워렌에서 열린 국기 게양식에서 "존 브라운" 노래가 "아마도 처음으로" 공개적으로 연주되었다.[12] 미국 남북 전쟁은 그 전 달에 시작되었다.

신문들은 1861년 7월 18일 보스턴 거리에서 행진하는 병사들이 이 노래를 불렀다고 보도했으며, 킴볼이 최초의 출판본이라고 언급한 연대 미상의 "존 브라운 송!" 전단과 1861년 7월 16일에 저작권 등록된 C. S. 마쉬의 악보가 포함된 전단, 또한 C.S. 홀이 발행한 전단과 거의 동일한 가사의 노래 전단이 "급증"했다.[24] 다른 출판사들도 "존 브라운 송" 버전을 내놓고 저작권을 주장했다.

; "타이거" 대대의 가사 창작

조지 킴볼의 기록에 따르면, 매사추세츠 민병대 제2 보병 대대, 일명 "타이거" 대대원들은 하퍼스 페리의 영웅과 이름이 같은 대대원 존 브라운을 놀리면서 "존 브라운의 시체" 가사를 공동으로 창작했다. 대원들은 존 브라운이 작업에 늦거나 대열에 늦게 합류하면 "이봐, 영감, 우리를 도와 노예를 해방하려면 당신도 나서야지" 또는 "이 사람은 존 브라운이 아니야—존 브라운은 죽었어."와 같은 말을 했다. 어떤 익살꾼은 "그래, 그래, 불쌍한 늙은 존 브라운은 죽었어. 그의 시체는 무덤에서 썩어가고 있지."라고 덧붙였다.

이 말들은 병사들 사이에서 유행어가 되었고, "Say, Brothers" 곡조에 맞춰 "존 브라운의 시체는 무덤에서 썩어가고, 그의 영혼은 행진하고 있다."와 같은 가사가 만들어졌다. 또한 "그는 주의 군대에서 군인이 되기 위해 갔네, 그의 영혼은 행진하고 있다."라는 구절도 불려졌다. "Glory hallelujah" 후렴구와 함께 불려진 이 구절들은 브라운의 영혼이 "행진하고 있다"는 영감을 주었다.

대대의 일부 지도자들은 가사가 거칠고 불경스럽다고 여겨 더 적절한 가사를 채택하려 했으나 소용없었다. 가사는 곧 대대 구성원들과 출판인 C. S. 홀에 의해 출판될 준비가 되었으며, 그들은 적절한 구절을 선택하고 다듬었다. 지역 시인의 도움을 받아 가사를 다듬었을 수도 있다. 구 제1 포병대와 제55 포병대(1918)의 공식 역사에도 존 브라운 노래를 만드는 데 타이거 대대의 역할이 기록되어 있으며, 킴볼의 버전을 대체로 확인하고 있다.

; 다른 작사가 주장

윌리엄 스테페는 찬송가집과 민요집에서 "Say, Brothers(세이 브라더스)"의 찬송가 곡조의 작곡가로 종종 언급된다.[11] 로버트 W. 앨런에 따르면, 스테페는 1855년이나 56년에 필라델피아의 굿윌 엔진 컴퍼니를 위해 이 곡을 썼으며, 원래 가사는 "Say, Bummers, Will You Meet Us?(세이, 범머스, 우리 만날래?)"였다.[11] 그러나 스테페가 "Say, Bummers" 버전의 노래를 만드는 데 역할을 했을 수는 있지만, "Glory Hallelujah(글로리 할렐루야)" 곡조나 "Say, Brothers" 가사는 그가 태어나기 수십 년 전에 이미 유행했기 때문에 그가 작곡했을 가능성은 낮다.[11]

토머스 브리검 비숍은 메인주의 작곡가, 음악가, 밴드 리더이자 연방 군인으로, 1916년 책과 1935년 인터뷰에서 존 브라운 송의 창시자로 인정받기도 했다.[30][31] 그러나 1800년대 후반, 이 노래가 인기를 끌던 시기에 여러 다른 작가들이 이 노래의 기원에 관여했다고 주장했다.[32]

일부 자료는 스테페, 비숍, 프랭크 E. 제롬 등을 이 곡의 작곡가로 꼽기도 하지만,[33] 이 곡이 최초로 출판된 것은 1806~1808년으로, 이들 주장자들이 태어나기도 전이므로 이들 중 누구도 "Say, Brothers"와 "존 브라운"의 기초가 된 곡을 작곡하지 않았음이 분명하다.[34][11]

애니 J. 랜달은 "여러 작가들, 대부분 익명으로, 'Say, Brothers'에서 곡조를 차용하여 새로운 가사를 붙였고, 이 곡을 사용하여 수세기 동안 지속된 미국의 노예 제도를 폐지하기 위한 브라운의 전쟁을 찬양했다"고 썼다.[35]

《남부 감리교회 찬송가 및 곡집, 둥근 음표 판》에서 "Say, Brothers" (1889년, 테네시주 내슈빌, 재판 1903년).


《Bummers, Come and Meet Us》, 뉴욕, H. De Marsan 출판, 발행일 미상.

3. 1. 최초의 공개 공연

1861년 5월 12일 일요일, 보스턴 근처의 포트 워렌에서 열린 국기 게양식에서 "존 브라운" 노래가 "아마도 처음으로" 공개적으로 연주되었다.[12] 미국 남북 전쟁은 그 전 달에 시작되었다.

신문들은 1861년 7월 18일 보스턴 거리에서 행진하는 병사들이 이 노래를 불렀다고 보도했으며, 킴볼이 최초의 출판본이라고 언급한 연대 미상의 "존 브라운 송!" 전단과 1861년 7월 16일에 저작권 등록된 C. S. 마쉬의 악보가 포함된 전단, 또한 C.S. 홀이 발행한 전단과 거의 동일한 가사의 노래 전단이 "급증"했다.[24] 다른 출판사들도 "존 브라운 송" 버전을 내놓고 저작권을 주장했다.

3. 2. "타이거" 대대의 가사 창작

조지 킴볼의 기록에 따르면, 매사추세츠 민병대 제2 보병 대대, 일명 "타이거" 대대원들은 하퍼스 페리의 영웅과 이름이 같은 대대원 존 브라운을 놀리면서 "존 브라운의 시체" 가사를 공동으로 창작했다. 대원들은 존 브라운이 작업에 늦거나 대열에 늦게 합류하면 "이봐, 영감, 우리를 도와 노예를 해방하려면 당신도 나서야지" 또는 "이 사람은 존 브라운이 아니야—존 브라운은 죽었어."와 같은 말을 했다. 어떤 익살꾼은 "그래, 그래, 불쌍한 늙은 존 브라운은 죽었어. 그의 시체는 무덤에서 썩어가고 있지."라고 덧붙였다.

이 말들은 병사들 사이에서 유행어가 되었고, "Say, Brothers" 곡조에 맞춰 "존 브라운의 시체는 무덤에서 썩어가고, 그의 영혼은 행진하고 있다."와 같은 가사가 만들어졌다. 또한 "그는 주의 군대에서 군인이 되기 위해 갔네, 그의 영혼은 행진하고 있다."라는 구절도 불려졌다. "Glory hallelujah" 후렴구와 함께 불려진 이 구절들은 브라운의 영혼이 "행진하고 있다"는 영감을 주었다.

대대의 일부 지도자들은 가사가 거칠고 불경스럽다고 여겨 더 적절한 가사를 채택하려 했으나 소용없었다. 가사는 곧 대대 구성원들과 출판인 C. S. 홀에 의해 출판될 준비가 되었으며, 그들은 적절한 구절을 선택하고 다듬었다. 지역 시인의 도움을 받아 가사를 다듬었을 수도 있다. 구 제1 포병대와 제55 포병대(1918)의 공식 역사에도 존 브라운 노래를 만드는 데 타이거 대대의 역할이 기록되어 있으며, 킴볼의 버전을 대체로 확인하고 있다.

3. 3. 다른 작사가 주장

윌리엄 스테페는 찬송가집과 민요집에서 "Say, Brothers(세이 브라더스)"의 찬송가 곡조의 작곡가로 종종 언급된다.[11] 로버트 W. 앨런에 따르면, 스테페는 1855년이나 56년에 필라델피아의 굿윌 엔진 컴퍼니를 위해 이 곡을 썼으며, 원래 가사는 "Say, Bummers, Will You Meet Us?(세이, 범머스, 우리 만날래?)"였다.[11] 그러나 스테페가 "Say, Bummers" 버전의 노래를 만드는 데 역할을 했을 수는 있지만, "Glory Hallelujah(글로리 할렐루야)" 곡조나 "Say, Brothers" 가사는 그가 태어나기 수십 년 전에 이미 유행했기 때문에 그가 작곡했을 가능성은 낮다.[11]

토머스 브리검 비숍은 메인주의 작곡가, 음악가, 밴드 리더이자 연방 군인으로, 1916년 책과 1935년 인터뷰에서 존 브라운 송의 창시자로 인정받기도 했다.[30][31] 그러나 1800년대 후반, 이 노래가 인기를 끌던 시기에 여러 다른 작가들이 이 노래의 기원에 관여했다고 주장했다.[32]

일부 자료는 스테페, 비숍, 프랭크 E. 제롬 등을 이 곡의 작곡가로 꼽기도 하지만,[33] 이 곡이 최초로 출판된 것은 1806~1808년으로, 이들 주장자들이 태어나기도 전이므로 이들 중 누구도 "Say, Brothers"와 "존 브라운"의 기초가 된 곡을 작곡하지 않았음이 분명하다.[34][11]

애니 J. 랜달은 "여러 작가들, 대부분 익명으로, 'Say, Brothers'에서 곡조를 차용하여 새로운 가사를 붙였고, 이 곡을 사용하여 수세기 동안 지속된 미국의 노예 제도를 폐지하기 위한 브라운의 전쟁을 찬양했다"고 썼다.[35]

4. 남북 전쟁 중의 사용

흑인 병사들이 백인 장교의 지휘를 받으며 1865년 2월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찰스턴으로 진군하며 "존 브라운의 시체"를 부르고 있다.


"존 브라운의 시체"는 남북 전쟁 기간 동안 북군 병사들 사이에서 널리 불렸다. 특히, 존 브라운이 처형된 버지니아주 찰스 타운(1863년부터는 웨스트버지니아)에 주둔했던 제29 뉴욕 보병 연대는 매일 존 브라운의 교수형 장소를 방문하여 이 노래를 불렀다.[19] 당시 폐지론 신문인 ''리버레이터''는 부대 병사 수백 명이 매일 존 브라운의 교수형 장소를 방문하여 다음과 같은 후렴구를 불렀다고 보도했다.

브라운의 친구이자 팬이었던 프레데릭 더글러스는 1874년 신문 기사에서 이렇게 썼다.

4. 1. 앤더슨빌 포로 수용소



앤더슨빌 포로 수용소에 수감되었던 북군 포로들도 이 노래를 불렀다.[21] 한 남부군 병사는 이 노래를 "인간 헌신의 절정을 나타내는 찬가"라고 묘사했다.[21] 그는 "그가 사람을 거룩하게 하려고 죽었으니, 우리도 사람을 자유롭게 하려고 죽으세!" 라는 가사를 인용하며, 이 노래가 자기 희생의 정신을 담고 있다고 평가했다.[21]

4. 2. 데코레이션 데이

1865년 5월 1일,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찰스턴에서 최근 해방된 아프리카계 미국인들과 일부 백인 선교사들이 10,000명이 참가하는 행진을 열었고, 3,000명의 흑인 어린이들이 "존 브라운의 시체"를 불렀다. 이 행진은 남부군 포로 수용소의 공동 묘지에서 재매장된 257명의 사망한 연방군 병사들을 기렸으며, 현재 현충일로 알려진 데코레이션 데이의 첫 번째 기념 행사로 여겨진다.[22]

5. 다른 지역에서의 사용

1865년 5월 1일,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찰스턴에서 최근 해방된 아프리카계 미국인들과 일부 백인 선교사들이 10,000명이 참가하는 행진을 열었고, 3,000명의 흑인 어린이들이 "존 브라운의 시체"를 불렀다. 이 행진은 남부군 포로 수용소의 공동 묘지에서 재매장된 257명의 사망한 연방군 병사들을 기렸다. 이는 현재 현충일로 알려진 데코레이션 데이의 첫 번째 기념 행사로 여겨진다.[22]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주재 미국 영사 리처드 T. 그리너는 1906년에 러시아 군인들이 이 노래를 부르고 있다고 보고했다. 이 상황은 1905년 러시아 혁명과 관련된 것이었다.[23]

5. 1. 러시아

1905년 러시아 혁명 당시 러시아 군인들이 이 노래를 불렀다는 기록이 있다.[23] 리처드 T. 그리너는 블라디보스토크 주재 미국 영사였다.[23]

5. 2. 프랑스

프랑스 공수부대원들은 이 곡조에 맞춰 "Oui nous reviendrons vainqueurs / Car nous sommes les gars des paras / Et nous n'avons pas peur de mourir / Oui nous reviendrons vainqueurs" (예, 우리는 합창단에서 두개골이 부서질 것입니다 / 그러나 우리는 승리하여 돌아올 것입니다)라는 가사를 붙여 불렀다.

5. 3. 스리랑카

스리랑카에서는 크리켓 경기 응원가로 개사되어 불렸다.[22]

6. 한국과 일본에서의 개사

미타니 타네키치 목사는 "마귀들과 싸울지라(あくまとたゝかへ)"라는 제목으로 <존 브라운의 시체>를 개사하여 1898년 기독교복음창가(基督敎福音唱歌)에 수록했다. 이를 통해 원곡이 더 유명해지도록 도왔으며, 1905년 무렵에는 개사된 곡이 조선에 전파되기도 했다.

일본에서 개사된 찬송가가 1905년 무렵 조선에 전파되었다. 미타니 타네키치(三谷種吉) 목사가 1898년 기독교복음창가(基督敎福音唱歌)에 수록해 원곡이 더 유명해지도록 도움을 주었다.

6. 1. 일본

미타니 타네키치 목사는 "마귀들과 싸울지라(あくまとたゝかへ)"라는 제목으로 <존 브라운의 시체>를 개사하여 1898년 기독교복음창가(基督敎福音唱歌)에 수록했다. 이를 통해 원곡이 더 유명해지도록 도왔으며, 1905년 무렵에는 개사된 곡이 조선에 전파되기도 했다.

6. 2. 한국

일본에서 개사된 찬송가가 1905년 무렵 조선에 전파되었다. 미타니 타네키치(三谷種吉) 목사가 1898년 기독교복음창가(基督敎福音唱歌)에 수록해 원곡이 더 유명해지도록 도움을 주었다.

7. 다양한 파생 버전

"존 브라운의 시체"는 공화국의 찬가, 영원한 연대 등 다양한 노래에 영향을 미쳤다. 이 곡조는 이후 "공화국의 찬가"(1861년 11월 작, 1862년 2월 출판, 이 노래는 "존 브라운의 시체"에서 직접 영감을 받음), "제1 아칸소의 행진곡", "협동의 찬가", "버머스, 우리를 만나러 오세요"와 미국 남북 전쟁 기간 및 직후의 다른 많은 관련 텍스트 및 패러디에 사용되었다.

"존 브라운의 시체"가 행진곡으로 인기를 얻게 되자, "존 브라운" 곡조에 맞춰 "존 브라운" 가사의 문학적인 버전들이 더 많이 만들어졌다.[36] 윌리엄 웨스턴 패튼은 1861년 10월에 그의 영향력 있는 버전을 썼으며, 그해 12월 16일 ''시카고 트리뷴''에 게재되었다. "제1 아칸소의 노래"는 1864년 린들리 밀러 대위에 의해 쓰여졌거나 기록되었지만,[37] (변형과 버전 간의 저작권 혼란의 전형적인 예로) "용감한 병사들"이라는 제목의 유사한 텍스트가 소저너 트루스에게도 귀속된다.[38] "대통령의 선언"은 1863년 노예 해방 선언을 기념하여 에드나 딘 프로크터가 썼다. 다른 버전으로는 "제4 소총 대대, 제13 연대, 매사추세츠 의용군 행진곡"과 블렌커 사단을 위해 쓰여진 "Kriegslied der Division Blenker"가 있는데, 이 부대는 1848/49년 유럽 혁명에 참여하고 미국 남북 전쟁에서 연방을 위해 싸운 독일 군인 그룹이었다.[39]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미국 공수부대 노래 "Blood on the Risers"는 이 곡조를 사용하며, "영광, 영광(또는 고리, 고리), 죽을 끔찍한 방식이네/그는 더 이상 점프하지 않을 거야!"라는 후렴구를 포함한다.[40] 그 이후 민간 스카이다이빙에도 적용되었다.

이 곡조는 아마도 미국에서 가장 잘 알려진 노동조합 노래인 "영원한 연대"에 사용되었다. 이 노래는 세계 산업 노동자 연합과 직장 양보 그 이상을 추구하는 모든 노동조합의 찬가가 되었으며, 노동자들이 운영하는 세상이 되었다.

선원들은 "존 브라운의 시체"를 바다 노래로, 특히 닻을 올릴 때 사용되는 "켑스턴 셔티"로 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41]

"존 브라운" 곡조는 민속적으로 만들어진 텍스트에 인기가 있었으며, 수년에 걸쳐 많은 불경스러운 버전이 만들어졌다. "학교의 화재"는 학교 아이들이 부르는 잘 알려진 패러디이며, "존 브라운의 아기는 감기에 걸렸다"로 시작하는 또 다른 버전은 종종 여름 캠프에서 아이들이 부른다.

아프리카계 미국인 버전은 "우리는 제프 데이비스를 썩은 사과 나무에 매달 것이다"로 녹음되었다.[42] 마찬가지로,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의 응원가도 같은 멜로디를 사용하여 "썩은 사과 나무에 제프 데이비스를 매달아라"로 시작한다.[43]

일반적인 축구 응원가로서, 일반적으로 "Glory Glory"라고 불린다.

유명한 독일 어린이 노래 알레 킨더 레르넨 레젠/Alle Kinder lernen lesende ("모든 아이들이 읽는 법을 배운다") 또한 이 멜로디를 기반으로 한다.

이 노래의 버전은 또한 프랑스 공수부대원이 불렀다: 우이 누 지롱 투 누 페르 카세 라 괼 엉 쾨르 / 메 누 르비앵드롱 뱅쾨르/oui nous irons tous nous faire casser la gueule en coeur / mais nous reviendrons vainqueurs프랑스어는 "예, 우리는 합창단에서 두개골이 부서질 것입니다 / 그러나 우리는 승리하여 돌아올 것입니다"를 의미한다.

스리랑카에서는 이 곡이 크리켓 경기, 특히 로열-토미안에서 불리는 이중 언어(영어 및 싱할라어) 노래로 개작되었으며, 가사는 "우리는 모든 토미안들을 카듀-푸랑 나무에 매달 것이다"였다. 콜롬보 법대와 의대 간의 연례 경기에서 불리는 또 다른 개작은 "술 무기고와 인디카 대마"였다. 이것은 Sooty Banda에 의해 삼중 언어 노래로 개작되었다.[44]

이 음악은 "모든 아이들이 읽는 법을 배운다"로 번역되는 Frank und seine Freunde의 독일어 어린이 노래 알레 킨더 레르넨 레젠/Alle Kinder lernen lesende에 사용된다.

렌 챈들러는 피트 시거의 ''레인보우 퀘스트'' TV 쇼에서 이 곡조에 맞춰 "Move on over"라는 노래를 불렀다.

7. 1. "공화국의 찬가"

"존 브라운의 시체"가 행진곡으로 인기를 얻으면서, "존 브라운" 곡조에 맞춰 "존 브라운" 가사의 문학적인 버전들이 더 많이 만들어졌다.[36] 예를 들어, 윌리엄 웨스턴 패튼은 1861년 10월에 그의 영향력 있는 버전을 썼으며, 그해 12월 16일 ''시카고 트리뷴''에 게재되었다.[36] "제1 아칸소의 노래"는 1864년 린들리 밀러 대위에 의해 쓰여졌거나 기록되었지만,[37] "용감한 병사들"이라는 제목의 유사한 텍스트가 소저너 트루스에게도 귀속된다.[38] "대통령의 선언"은 1863년 노예 해방 선언을 기념하여 에드나 딘 프로크터가 썼다. 다른 버전으로는 "제4 소총 대대, 제13 연대, 매사추세츠 의용군 행진곡"과 블렌커 사단을 위해 쓰여진 "Kriegslied der Division Blenker"가 있는데, 이 부대는 1848/49년 유럽 혁명에 참여하고 미국 남북 전쟁에서 연방을 위해 싸운 독일 군인 그룹이었다.[39]

7. 2. "영원한 연대"

"존 브라운의 시체"가 행진곡으로 인기를 얻으면서, "존 브라운" 곡조에 맞춰 "존 브라운" 가사의 문학적인 버전들이 더 많이 만들어졌다.[36] 예를 들어, 윌리엄 웨스턴 패튼은 1861년 10월에 그의 영향력 있는 버전을 썼으며, 그해 12월 16일 ''시카고 트리뷴''에 게재되었다. "제1 아칸소의 노래"는 1864년 린들리 밀러 대위에 의해 쓰여졌거나 기록되었지만,[37] (변형과 버전 간의 저작권 혼란의 전형적인 예로) "용감한 병사들"이라는 제목의 유사한 텍스트가 소저너 트루스에게도 귀속된다.[38] "대통령의 선언"은 1863년 노예 해방 선언을 기념하여 에드나 딘 프로크터가 썼다. 다른 버전으로는 "제4 소총 대대, 제13 연대, 매사추세츠 의용군 행진곡"과 블렌커 사단을 위해 쓰여진 "Kriegslied der Division Blenker"가 있는데, 이 부대는 1848/49년 유럽 혁명에 참여하고 미국 남북 전쟁에서 연방을 위해 싸운 독일 군인 그룹이었다.[39] 세계 산업 노동자 연합(IWW)의 찬가로 노동 운동에서 널리 불렸다.

7. 3. 기타 파생 버전

"존 브라운의 시체"가 행진곡으로 인기를 얻으면서, "존 브라운" 곡조에 맞춰 "존 브라운" 가사의 문학적인 버전들이 더 많이 만들어졌다.[36] 윌리엄 웨스턴 패튼은 1861년 10월에 그의 영향력 있는 버전을 썼으며, 그해 12월 16일 ''시카고 트리뷴''에 게재되었다. "제1 아칸소의 노래"는 1864년 린들리 밀러 대위에 의해 쓰여졌거나 기록되었지만,[37] "용감한 병사들"이라는 제목의 유사한 텍스트가 소저너 트루스에게도 귀속된다.[38] "대통령의 선언"은 1863년 노예 해방 선언을 기념하여 에드나 딘 프로크터가 썼다. 다른 버전으로는 "제4 소총 대대, 제13 연대, 매사추세츠 의용군 행진곡"과 블렌커 사단을 위해 쓰여진 "Kriegslied der Division Blenker"가 있는데, 이 부대는 1848/49년 유럽 혁명에 참여하고 미국 남북 전쟁에서 연방을 위해 싸운 독일 군인 그룹이었다.[39]

8. 가사

"존 브라운" 곡에 사용된 가사는 단순한 구전 캠프 미팅 노래에서 구전 행진곡, 더 나아가 의식적으로 문학적인 버전으로 나아가면서 일반적으로 복잡성과 음절 수가 증가하는 경향을 보인다.

음절 수의 증가는 더 많은 음절을 수용하기 위해 멜로디에 점점 더 많은 점 리듬을 사용하게 했다. 그 결과, "Say, Brothers"에서는 음악적으로 동일했던 절과 후렴구가 "John Brown's Body"에서는 리듬적으로 상당히 달라졌다. 비록 멜로디 프로파일은 여전히 동일했지만 말이다.

원래 멜로디의 더욱 정교한 리듬 변형으로의 이러한 추세는 "존 브라운 노래"의 후기 버전과 "공화국 찬가"에서 훨씬 더 두드러졌다. 이 곡들은 초기 버전보다 절당 훨씬 더 많은 단어와 음절을 가지고 있다. 추가 단어와 음절은 멜로디에 더 많은 점 리듬을 추가하고 각 절에 첫 번째 행을 세 번 반복하는 대신 네 개의 개별 행을 포함시킴으로써 맞춰졌다. 그 결과, 이러한 후기 버전에서는 절과 후렴구가 리듬적으로, 시적으로 더욱 뚜렷하게 구별되었지만, 기본 멜로디 프로파일은 여전히 동일하게 유지되었다.

8. 1. "Say, Brothers" 가사

말씀해 주오, 형제들이여, 우리를 만날 건가

가나안의 행복한 해변에서.
후렴: 영광, 영광, 할렐루야

영원히, 영원히!

하나님의 은총으로 우리는 당신을 만날 것입니다

헤어짐이 없는 곳에서.

예수는 영원히 살고 다스리시네

가나안의 행복한 해변에서.

8. 2. "John Brown's Body" 가사 (1861년 버전)

존 브라운의 시체는 무덤 속에서 썩어가네; (3×)

그의 영혼은 행진하고 있네!
:(후렴):글로리/Glory영어, 글로리/glory영어, 할렐루야! 글로리/Glory영어, 글로리/glory영어, 할렐루야/hallelujah영어!

:글로리/Glory영어, 글로리/glory영어, 할렐루야/hallelujah영어! 그의 영혼은 행진하고 있네!

그는 주님의 군대에서 군인이 되기 위해 갔네! (3×)

그의 영혼은 행진하고 있네!
:(후렴)존 브라운의 배낭이 그의 등에 묶여 있네! (3×)

그의 영혼은 행진하고 있네!
:(후렴)그의 애완 양들이 길에서 그를 만날 것이네; (3×)

그들은 행진하고 있네!
:(후렴)그들은 제퍼슨 데이비스를 시큼한 사과나무에 매달 것이네! (3×)

그들이 행진하면서!
:(후렴)자, 연합을 위해 세 번의 열렬한 환호; (3×)

우리가 행진하면서!

8. 3. 윌리엄 웨스턴 패튼 버전

윌리엄 웨스턴 패튼은 영향력 있는 폐지론자이자 목사였으며, 1861년 가을에 "새로운 존 브라운의 노래"를 작곡하여 1861년 12월 16일자 ''시카고 트리뷴''에 게재했다.[46][36]

늙은 존 브라운의 시신은 무덤 속에서 썩어가네,

그가 구원하려 모든 것을 걸었던 노예들의 아들들은 울부짖네;

그가 잠들었지만 그의 삶은 노예를 위해 투쟁하다 잃었네,

그의 영혼은 행진하네.

영광 할렐루야!

존 브라운은 용감하고 진실한 영웅이었고,

캔자스는 그가 권리를 지키기 위해 싸웠을 때 그의 용맹함을 알았네;

그리고 이제, 그의 무덤 위에 풀이 푸르게 자라나도,

그의 영혼은 행진하네.

그는 그의 열아홉 명의 부하들과 함께 하퍼스 페리를 점령했고,

"늙은 버지니아"를 두려움에 떨게 했네.

그들은 그를 반역자로 매달았지만, 그들 스스로가 반역자였네,

그러나 그의 영혼은 행진하네.

존 브라운은 우리가 보게 될 그리스도의 세례 요한이었네—

노예들의 해방자가 될 그리스도,

그리고 곧 남부 전역에서 모든 노예는 자유로워질 것이네,

그의 영혼은 행진하네.

그가 예고한 갈등을 그는 하늘에서 바라보네,

연방군의 깃발, 붉고, 하얗고, 파란색을 보며.

그리고 하늘은 그들이 하려는 행동에 대한 찬가로 울려 퍼질 것이네,

그의 영혼은 행진하네.

자유의 병사들이여, 그러니 칠 수 있을 때 치세,

더 나은 시기에 억압에 죽음을 안겨주세,

늙은 존 브라운의 새벽이 밝은 낮으로 빛나고 있으니,

그리고 그의 영혼은 행진하네.

8. 4. 피트 시거 버전

미국의 포크 음악가 피트 시거는 1959년에 "존 브라운의 시체" 버전을 녹음했는데, 이 버전은 이전 버전과 가사가 상당히 다르다.[47] 줄리아 워드 하우가 1862년에 쓴 "존 브라운의 시체"를 각색한 공화국 찬가의 연이 포함되어 있다.[47]

"존 브라운의 시체는 무덤 속에서 썩어가네 (x3) / 그러나 그의 영혼은 계속 행진하네."[47]

"영광, 영광, 할렐루야! (x3) / 그러나 그의 영혼은 계속 행진하네."[47]

"하늘 위의 별들이 다정하게 내려다보네 (x3) / 늙은 존 브라운의 무덤을."[47]

"영광, 영광, 할렐루야! (x3) / 그의 영혼은 계속 행진하네."[47]

"그는 진실한 19명의 사람들과 함께 하퍼스 페리를 점령했네. / 그는 늙은 버지니아를 두려워하게 만들었고, 그녀는 몸서리쳤네. / 그들은 그를 반역자로 매달았지만, 그들 자신이 반역자 집단이었네. / 그의 영혼은 계속 행진하네!"[47]

"영광, 영광, 할렐루야! (x3) / 그의 영혼은 계속 행진하네."[47]

"그는 주님의 군대의 병사가 되기 위해 갔네, / 그는 주님의 군대의 병사가 되기 위해 갔네 (x2) / 그러나 그의 영혼은 계속 행진하네!"[47]

"영광, 영광, 할렐루야! (x3) / 그의 영혼은 계속 행진하네."[47]

"내 눈은 주님의 오심의 영광을 보았네 / 그는 분노의 포도송이가 저장된 곳에서 포도를 짓밟고 있네 / 그는 그의 끔찍하고 빠른 칼의 운명적인 번개를 풀었네 / 그의 진실은 계속 행진하네!"[47]

"영광, 영광, 할렐루야! (x3) / 그의 영혼은 계속 행진하네."[47]

9. 평가

참조

[1] 간행물 Origin of the John Brown Song https://babel.hathit[...] 2021-01-15
[2] 서적 https://books.google[...] 2014-06-01
[3] 간행물 Camp Meeting Hymnody https://www.jstor.or[...] 2021-04-07
[4] 간행물 Johnson, Charles A. "The Frontier Camp Meeting: Contemporary and Historical Appraisals https://www.jstor.or[...] 2021-04-07
[5] 서적 https://books.google[...]
[6] 서적 https://books.google[...] 2014-06-01
[7] 서적 https://books.google[...] 2014-06-01
[8] 서적 https://books.google[...] 2014-06-01
[9] 서적 https://books.google[...] 2014-06-01
[10] 서적 https://books.google[...] 2014-06-01
[11] 서적 https://books.google[...] 2014-06-01
[12] 서적 The Book of World-Famous Music: Classical, Popular, and Folk Courier Dover 2000
[13] 서적 The Story of Our National Ballads Thomas Y. Crowell 1960
[14] 서적 Music of the Civil War Era Greenwood Publishing Group 2004
[15] 간행물 John Brown's Body 1958
[16] 서적 https://books.google[...] 2014-06-01
[17] 서적
[18] 서적 https://books.google[...] 2014-06-01
[19] 뉴스 The Memory of John Brown Honored https://www.newspape[...] 1861-08-02
[20] 뉴스 John Brown https://www.newspape[...] 1874-01-27
[21] 뉴스 The John Brown Song https://www.newspape[...] 1885-09-10
[22] 웹사이트 One of the Earliest Memorial Day Ceremonies Was Held by Freed African Americans https://www.history.[...] 2021-12-24
[23] 서적 Allies for freedom: Blacks and John Brown Oxford University Press
[24] 서적 The Book of World-Famous Music: Classical, Popular, and Folk Courier Dover 2000
[25] 간행물 Origin of the John Brown Song http://cdl.library.c[...] 1890
[26] 간행물 Origin of the John Brown Song http://cdl.library.c[...] 1890
[27] 서적 The old First Massachusetts coast artillery in war and peace https://archive.org/[...] Pilgrim Press 1917
[28] 서적 The 55th artillery (C.A.C.) in the American expeditionary forces, France, 1918 https://archive.org/[...] Commonwealth Press 1920
[29] 뉴스 Say, brother, who wrote this melody? Music historians still argue over the origins of one of the Union Army's most popular songs http://www.trans-vid[...] 2009-05-03
[30] 서적 Music of the Civil War Era Greenwood Publishing Group 2004
[31] 웹사이트 Music: Hymn from Maine http://www.time.com/[...] Time 1935-07-01
[32] 뉴스 Say, brother, who wrote this melody? Music mistorians still argue over the origins of one of the Union Army's most popular songs http://www.trans-vid[...] 2009-05-03
[33] 서적 The Book of World-Famous Music: Classical, Popular, and Folk Courier Dover 2000
[34] 서적 https://books.google[...] 2014-06-01
[35] 서적
[36] 웹사이트 John Brown's body lies a-mouldering in the grave http://www.law.umkc.[...] 2008-03-06
[37] 논문 Marching Song of the First Arkansas Colored Regiment: A Contested Attribution 2007
[38] 문서 Randall, n13
[39] 웹사이트 Texts Sung to the Tune of "Battle Hymn of the Republic" and "John Brown's Body", arranged in approximate chronological order http://brenthugh.com[...] 2022-11-07
[40] 서적 The Making of a Paratrooper: Airborne Training and Combat in World War II University Press of Kansas 1990
[41] 서적 Shanties from the seven seas: shipboard work-songs and songs used as work-songs from the great days of sail https://books.google[...] Routledge & Kegan Paul, London 1961
[42] 웹사이트 The Aftermath of Sorrow: White Women's Search for their Lost Cause, 1861–1917 https://web.archive.[...] 2022-11-07
[43] 웹사이트 How we came to hang Jeff Davis in song https://penntoday.up[...] 2022-10-31
[44] 서적 The golden treasury of trilingual verse https://openlibrary.[...] Associated Newspapers of Ceylon 1988
[45] 문서 "We'll Sing to Abe Our Song": Sheet Music about Lincoln, Emancipation, and the Civil War, from the Alfred Whital Stern Collection of Lincolniana http://memory.loc.go[...]
[46] 뉴스 HIS SOUL IS MARCHING ON Chicago Tribune 1887-09-10
[47] Youtube John Brown's Body https://www.youtube.[...] 2015-05-23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