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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디칼리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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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생디칼리슴은 프랑스어 "생디카"(노동조합)에서 유래한 용어로, 노동조합을 통해 자본주의 사회를 변혁하려는 사상 및 운동을 의미한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전반에 걸쳐 프랑스, 이탈리아 등에서 지지를 받았으며, '이론'보다 '실천'을 중시하며, 자유지상주의적 사회주의, 반권위주의, 반자본주의 등을 이론적 배경으로 한다. 총파업을 주요 혁명 수단으로 여기고, 국가를 노동자 조직으로 대체하려는 목표를 가졌으나, 제1차 세계 대전, 공산주의의 부상, 국가의 탄압 등으로 쇠퇴했다. 현재는 아나르코생디칼리슴 형태로 명맥을 유지하며, 일부 국가에서 노동 운동의 유산으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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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디칼리슴
개요
세계산업노동자연맹 로고
세계산업노동자연맹의 로고
다른 이름조합주의
이념노동조합주의
사회주의
아나키즘
정치적 입장좌익 정치
역사적 배경
기원19세기 후반, 프랑스
주요 이론가조르주 소렐
에밀 푸제
페르낭 펠루티에
주요 국가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
아르헨티나
멕시코
이론 및 특징
핵심 원칙노동자 자주 관리
직접 행동
계급 투쟁
총파업
목표자본주의 철폐
노동자 계급에 의한 사회 조직
조직 형태노동 조합
산업별 연맹
주요 전술파업
사보타주
보이콧
주요 조직
국제 조직국제 노동자 협회 (IWA)
노동자 총연맹 (CNT, 스페인)
세계산업노동자연맹 (IWW)
역사적 조직노동총동맹 (CGT, 프랑스)
이탈리아 노동 조합 (USI, 이탈리아)
비판 및 논쟁
주요 비판관료주의 위험
엘리트주의 가능성
실용주의적 전략 부재
주요 논쟁정치와의 관계
폭력 사용 여부
관련 개념
관련 개념아나키즘
사회주의
노동 운동
자동주의
길드 사회주의
혁명적 조합주의
기타
영향스페인 내전
멕시코 혁명
현재소규모로 존속, 대안 운동에 영향

2. 어원 및 용어

“생디칼리슴”이라는 말은 프랑스어에서 왔다. 프랑스어에서 “생디카(syndicat프랑스어)”는 노동조합을 의미하는데, 이 때문에 정작 프랑스에서는 “생디칼리슴”이라는 말이 특정 이념보다는 일반적인 의미의 노조운동(trade unionism) 전반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된다.[2]

오늘날 특정 사회운동 이념을 가리키는 “생디칼리슴”은 1903년 프랑스 사회주의 언론에서 처음 사용된 '''혁명적 생디칼리슴'''(syndicalisme révolutionnaire프랑스어)이라는 개념에서 유래했다.[3] 프랑스 일반노동총연맹(CGT)이 이 표현을 자신들의 노선을 설명하는 데 사용하면서 널리 알려졌고, 이후 프랑스 밖의 다른 나라 노동운동계에서 이 노선을 받아들이면서 점차 “혁명적”이라는 말이 생략되고 “생디칼리슴” 자체가 혁명적 생디칼리슴을 의미하는 용어로 자리 잡게 되었다.[4]

이 용어의 정의와 범위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에 다양한 견해가 있으며, 이는 하위 문단에서 더 자세히 다룬다.

2. 1. 용어의 기원과 의미 변화

“생디칼리슴”이라는 용어는 프랑스어에서 유래했다. 프랑스어에서 “생디카(syndicat프랑스어)”는 노동조합을 의미하며, 따라서 프랑스 내에서 “생디칼리슴”(syndicalisme프랑스어)은 본래 특정 이념을 가리키기보다는 일반적인 의미의 노동조합 운동(노동조합주의) 전반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2]

오늘날 특정 사회운동 이념을 지칭하는 “생디칼리슴”이라는 용어는 1903년 프랑스의 사회주의 언론에서 '''혁명적 생디칼리슴'''(syndicalisme révolutionnaire프랑스어)이라는 개념으로 처음 등장했다.[3] 프랑스의 주요 노동조합 연맹인 일반노동총연맹(CGT)이 이 “혁명적 생디칼리슴”을 자신들의 노선을 설명하는 공식적인 표현으로 채택하면서 이 용어는 널리 퍼지게 되었다. 이후 프랑스 외부의 노동운동계에서 이 노선을 받아들이면서, 다른 언어권에서는 “혁명적”이라는 수식어를 생략하고 “생디칼리슴”이라는 단어 자체가 곧 혁명적 생디칼리슴을 의미하는 것으로 굳어졌다.[4]

각 언어에서 노동조합을 의미하는 단어로 번역하는 대신 프랑스어 용어를 그대로 들여와 사용한 것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특히 북유럽과 중부 유럽에서 생디칼리슴에 반대하는 이들은 이 점을 이용하여 생디칼리슴을 토착적이지 않고 심지어 위험한 외래 사상으로 보이게 하려고 시도했다. 예를 들어, 1908년 독일노동조합자유협회(FVdG)는 생디칼리슴 노선을 받아들였음에도 불구하고, “외국 이름”을 사용하는 것에 대한 내부적인 반발을 우려하여 처음에는 이 용어를 공식적으로 사용하기를 주저하기도 했다.[5]

한편, 랠프 달링턴, 마르셀 판 데어 린덴, 웨인 소프 등 현대의 많은 노동사 연구자들은 “생디칼리슴”이라는 개념의 적용 범위를 넓게 해석하기도 한다. 이들은 스스로를 생디칼리스트라고 칭하지 않았던 조직이나 운동에 대해서도 이 용어를 적용하는데, 대표적인 예가 미국의 세계산업노동자연맹(IWW)이다. IWW는 자신들의 산별노조주의가 “생디칼리스트들이 제안하는 것보다 더 높은 형태의 혁명적 노동조직화”라고 주장했으나, 이들 연구자들은 IWW 역시 생디칼리스트 조직의 범주에 포함시킨다.[6] 판 데어 린덴과 소프는 “생디칼리슴”을 “모든 혁명적 직접행동 지향의 조직”을 포괄하는 용어로 사용하며, 달링턴은 생디칼리슴을 공산당이나 사회주의 정당의 지도를 받지 않는 혁명적 노동조합운동(revolutionary trade unionism)으로 재정의할 것을 제안한다.[6] 이들은 이러한 넓은 의미의 생디칼리슴 범주에 속하는 여러 운동과 조직들 사이에 존재하는 이념적 차이점보다는 공통적인 실천 방식이나 지향점이 더 중요하다고 주장한다.[7]

그러나 래리 피터슨, 에릭 올센과 같은 다른 학자들은 이러한 광범위한 정의에 동의하지 않는다. 올센은 이러한 포괄적인 이해가 “산별노조주의, 생디칼리슴, 그리고 혁명적 사회주의 사이의 구분을 모호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한다.[8] 피터슨은 “생디칼리슴”을 보다 엄격하게 정의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기준을 제시했다.[9]

# 중앙집권보다 연방주의를 선호한다.

# 정당 정치를 반대한다.

# 총파업을 최고의 혁명 무기로 간주한다.

# 국가를 “연방적, 경제적 조직으로서의 사회”로 대체하고자 한다.

# 노동조합을 포스트 자본주의 사회의 기본 사회 구성 단위로 본다.

이 정의에 따르면, 모든 노동자를 하나의 거대한 일반 조직으로 통합하고자 했던 IWW나 캐나다의 하나의 거대한 노동조합(One Big Union, OBU) 같은 조직들은 엄밀한 의미의 생디칼리스트 조직으로 분류되기 어렵다. 피터슨은 이러한 협의의 생디칼리슴(프랑스 모델)과 IWW, OBU 같은 조직들을 모두 아우를 수 있는 더 넓은 범주로서 “혁명적 산별노조주의(revolutionary industrial unionism)”라는 용어를 사용할 것을 제안했다. 이 집단들의 공통점은 모든 노동자들을 산업별로 하나의 거대한 조직으로 단결시키려 했다는 점이다.[9]

2. 2. 다양한 정의와 논쟁

“생디칼리슴”이라는 용어는 프랑스어에서 유래했으며, 프랑스어에서 ‘생디카’(syndicat프랑스어)는 노동조합을 의미한다. 따라서 프랑스 내에서는 ‘생디칼리슴’이 특정 이념을 지칭하기보다는 일반적인 노조운동(trade unionism)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2] 오늘날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생디칼리슴’의 의미는 1903년 프랑스 사회주의 언론에서 처음 사용된 ‘혁명적 생디칼리슴’(syndicalisme révolutionnaire프랑스어)이라는 개념에서 비롯되었다.[3] 프랑스 일반노동총연맹(CGT)이 이 용어를 자신들의 노선을 설명하기 위해 채택했고, 이후 다른 나라의 노동운동이 이를 받아들이면서 ‘혁명적’이라는 수식어가 생략된 채 ‘생디칼리슴’이 곧 혁명적 생디칼리슴을 의미하게 되었다.[4]

각국의 언어로 번역하지 않고 프랑스어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는 것에 대한 비판도 존재했다. 특히 북유럽과 중부 유럽에서는 생디칼리슴 반대자들이 이 용어가 외래적이고 위험하다는 인상을 주기 위해 이 점을 이용하기도 했다. 1908년 독일노동조합자유협회가 생디칼리슴 노선을 채택했을 때도, ‘외국 이름’ 사용에 대한 반발을 우려하여 처음에는 이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다.[5]

랠프 달링턴, 마르셀 판 데어 린덴, 웨인 소프와 같은 많은 역사학자들은 스스로를 생디칼리스트로 규정하지 않은 조직이나 운동에도 ‘생디칼리슴’이라는 용어를 적용한다. 예를 들어, 미국의 세계산업노동자연맹(IWW)은 자신들의 산별노조주의가 “생디칼리스트들이 제안하는 것보다 더 높은 형태의 혁명적 노동조직화”라고 주장했지만, 이들 역사학자들은 IWW를 생디칼리스트 조직으로 분류한다. 판 데어 린덴과 소프는 ‘생디칼리슴’을 “모든 혁명적 직접행동 지향의 조직”을 포괄하는 용어로 사용한다. 달링턴은 생디칼리슴을 공산당이나 다른 사회주의 정당의 지도를 받지 않는 혁명적 노동조합운동(revolutionary trade unionism)으로 재정의할 것을 제안한다.[6] 달링턴과 판 데어 린덴은 이러한 광의의 생디칼리슴 범주에 속하는 운동과 조직들 사이의 공통점이 차이점보다 크기 때문에 이러한 분류가 타당하다고 주장한다.[7]

반면, 래리 피터슨, 에릭 올센과 같은 학자들은 이러한 넓은 정의에 동의하지 않는다. 올센에 따르면, 이러한 해석은 “산별노조주의, 생디칼리슴, 혁명적 사회주의 사이의 구분을 흐리는 경향”이 있다.[8] 피터슨은 ‘생디칼리슴’을 정의하는 다섯 가지 기준을 제시하며 보다 제한적인 정의를 주장했다.

# 중앙집권제보다 연방주의(분권화)를 선호한다.

# 정당 정치를 반대한다.

# 총파업을 최고의 혁명 무기로 간주한다.

# 국가를 “분권화된 경제조직으로서의 사회”로 대체하고자 한다.

# 노동조합을 자본제 이후 새로운 사회의 기본 구성 단위로 간주한다.

이 정의에 따르면, IWW나 캐나다의 하나의 거대한 노동조합(One Big Union, OBU) 같은 조직은 생디칼리스트 조직으로 분류되지 않는다. 피터슨은 프랑스의 혁명적 생디칼리슴(협의의 생디칼리슴)과 IWW, OBU 등 협의의 정의에 포함되지 않는 조직들을 모두 포괄하는 더 넓은 범주로 ‘혁명적 산별노조주의(revolutionary industrial unionism)’를 제안했다. 이들 집단을 묶는 공통점은 모든 노동자를 하나의 일반 조직으로 단결시키려 했다는 점이다.[9]

3. 이론

생디칼리슴은 19세기 말 산업화 시대 노동자들의 현실적인 투쟁 속에서 탄생했으며, 정교한 이론 체계보다는 '실천''행동'을 우선시하는 사상이다.[10] 프랑스 노동총동맹(CGT)의 지도자였던 에밀 푸제는 생디칼리슴이 다른 사회주의 학파와 구별되는 점으로 교리의 간결함을 들며 "노동조합 내부에서는 철학적인 논의가 거의 없다. 그들은 그것보다 더 잘한다. 행동한다!"고 강조했다. 스페인 전국노동자연맹(CNT)의 안드레우 닌 역시 1919년 "나는 행동, 혁명의 광신자다. 나는 먼 이념과 추상적인 문제보다 행동을 더 믿는다"고 선언하며 실천 중심의 성격을 분명히 했다.

이러한 실천 중심적 성격 때문에 생디칼리스트들은 이론 형성에 몰두하는 지식인 중심의 좌파나 실제 행동에 나서지 않는 사회주의자들을 비판적으로 보았으며[10], 부르주아 지식인들을 불신하고 운동에 대한 노동자 통제를 유지하려 했다. 생디칼리스트 사상은 주로 팸플릿, 전단, 연설, 기사, 그리고 운동 자체의 신문 등을 통해 구체화되었으며, 내용은 주로 계급 투쟁에서의 전술 논의와 행동 촉구로 이루어졌다. 철학자 조르주 소렐의 저작 ''폭력에 대한 성찰''이 생디칼리즘 사상을 널리 알리는 데 기여했지만, 소렐 자신은 운동의 외부자였고 실제 운동에 미친 영향은 제한적이었다는 평가도 있다.

생디칼리슴의 핵심 사상은 자유지상주의적 사회주의, 반권위주의, 반자본주의, 반국가주의, 탈민족주의, 계급혁명, 민주주의, 산업 민주화, 국제주의 등을 포함하며[10], 프루동주의와 마르크스주의의 철학적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생디칼리즘 이론이 특정 지도자들의 견해만을 반영하는지, 아니면 일반 조합원들의 생각까지 반영하는지에 대해서는 역사가들 사이에 논쟁이 존재한다.

초기 생디칼리슴은 노동조합을 통한 총파업으로 자본주의를 전복하고 사회주의 과도기 없이 직접 공산주의적 공동 생산 체제를 구축하려는 급진적 목표를 가졌으나[11], 정당과의 연대 부재와 각국 정부의 대응 등으로 세력이 약화되면서 현실적인 한계에 부딪혔다.[10] 이에 따라 시대 변화에 맞춰 이론적 수정이 이루어졌다. 현대 생디칼리슴은 시장경제의 필요성을 일부 인정하며, 자본가의 권위를 약화시키고 노사 간 양극화를 축소하며 합리적인 노사 관계를 지향하는 방향으로 변화했다. 다만, 이러한 목표 달성을 위한 수단으로서 적극적인 파업과 노동 운동의 중요성은 여전히 강조된다.

'생디칼리즘'과 '아나코생디칼리슴' 용어는 때로 혼용되기도 한다. 아나코생디칼리슴은 아나키즘과 결합하여 국가 폐지까지 주장하는 보다 급진적인 분파로 여겨진다. 생디칼리즘은 전통적으로 아나키즘의 한 흐름으로 간주되기도 하지만, 일부 국가에서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운동을 주도하기도 했으며, 두 사상과의 관계 및 영향력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

3. 1. 핵심 가치와 특징

생디칼리슴은 19세기 말 산업화 과정에서 심화된 노동자 착취에 맞서,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자본주의 사회를 변혁하고자 등장한 사상이다. 생디칼리슴은 이론보다는 '실천'을 중시하며, 이론 구축에 몰두하는 지식인 중심의 좌파나 실제 행동에 나서지 않는 사회주의자들을 비판적으로 바라본다.[10] 진정한 노동 해방은 혁명적 노동 운동이 사회 전체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 때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핵심 이념은 자유지상주의적 사회주의, 반권위주의, 반자본주의, 반국가주의, 탈민족주의, 계급혁명, 민주주의, 산업 민주화, 국제주의 등을 포함한다.[10] 철학적으로는 프루동주의와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을 받았으며, 기본적으로 무신론적 입장을 취했으나 현대에는 사회 내 종교의 영향력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또한 동성애자 권리, 무종교 여성 권리, 낙태 자유 등을 지지하는 경향을 보인다.

1911년의 ''자본주의 시스템의 피라미드''는 IWW의 자본주의 비판을 보여준다.


생디칼리스트들은 사회가 본질적으로 노동 계급과 부르주아지로 나뉘며, 이들의 이해관계는 상충하여 끊임없는 계급 투쟁 상태에 놓인다고 보았다. 영국의 생디칼리스트 톰 만은 "노동조합의 목적은 계급 전쟁을 수행하는 것"이라고 선언했으며, 이 투쟁은 임금 인상이나 노동 시간 단축 같은 단기적 목표뿐 아니라 궁극적으로 자본주의 체제의 혁명적 전복을 목표로 했다.

생디칼리스트들은 칼 마르크스가 국가를 "지배 계급의 집행 위원회"로 특징지은 것에 동의했다. 그들은 사회의 경제 질서가 정치 질서를 결정하며, 전자는 후자를 변화시켜 전복될 수 없다고 결론 내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주요 생디칼리스트 인물들은 정당에서 활동했으며 선출직에 출마하기도 했다. 라킨은 아일랜드 노동당에서 활동했으며, 헤이우드미국 사회당의 일원이었다. 그들은 모두 경제 영역을 혁명 투쟁의 주요 무대로 보았고, 정치 참여는 기껏해야 산업 투쟁의 부차적인 요소로 여겼다. 그들은 의회 정치에 회의적이었다. 토마스 해거티, 가톨릭 사제이자 IWW 지도자는 "상자에 구멍에 종이 조각을 떨어뜨리는 것은 노동 계급의 해방을 결코 달성하지 못했으며, 내 생각에는 결코 달성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생디칼리스트 노동조합은 정치적 중립성과 정당으로부터의 자율성을 선언했다. 생디칼리스트들은 정당이 정치적 견해에 따라 사람들을 묶어 다른 계급의 구성원을 통합하는 반면, 노동조합은 순수하게 노동 계급 조직이 되어 전체 계급을 통합하고 따라서 정치적 이유로 분열될 수 없다고 추론했다. 프랑스 생디칼리스트 에밀 푸제는 "CGT는 모든 정치 학파 외에도 임금 노예 제도와 고용주 계급을 제거하기 위한 투쟁을 인식하는 모든 노동자를 포괄한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이러한 중립성은 더 모호했다. 예를 들어, CGT는 징병 기간을 연장한 1913년 3년 법에 반대하는 투쟁에서 노동자 인터내셔널 프랑스 지부와 협력했다. 스페인 내전 동안, 정치직 후보였거나 정치적 노력을 한 모든 사람이 대표하는 것을 금지하는 정책을 가진 CNT는 Federación Anarquista Ibérica|페데라시온 아나르키스타 이베리카es(FAI)와 밀접하게 연결되었다.

정치에 대한 불신은 여러 요인에서 비롯되었다. 노동 운동을 발판으로 삼아 출세한 정치인들에 대한 배신감(미예랑, 브리앙 사건 등), 프랑스 제3공화국 시기의 정치적 부패(그레비 스캔들, 파나마 운하 스캔들 등), 그리고 정부의 소극적인 사회 입법 등이 생디칼리즘의 반정치적 성향을 강화시켰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생디칼리슴은 반의회, 반정부, 나아가 군대에 대한 반감(반군부주의)과 국가 자체를 부정하는 반애국주의로까지 나아갔다. 군대는 고용주를 보호하는 수단으로, 국가는 자본주의의 도구로 인식되었으며, 전시에는 총파업으로 국가 동원에 저항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노동거래소 앞에서 1906년 파리 8시간 노동제를 요구하며 파업하는 모습


생디칼리슴의 개념에서 노동조합은 이중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노동조합은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더 나은 노동 조건을 위한 투쟁의 기관이었으며, 자본주의를 전복하기 위한 혁명에서도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해야 했다. 빅토르 그리퓔예스는 1906년 CGT 회의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생디칼리슴은 일상적인 요구 속에서 노동자들의 노력을 조정하고, 노동 시간 단축, 임금 인상 등과 같은 즉각적인 개선을 통해 노동자들의 복지를 증진시키려 한다. 그러나 이 과제는 생디칼리슴의 한 측면에 불과하며, 자본가 계급의 몰수를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는 완전한 해방을 준비한다." 노동조합이 이러한 역할을 수행하려면, 노동자들의 투쟁적인 열정을 억누르는 관료들, 즉 "삶의 유일한 목적이 자본주의 착취 체제를 옹호하고 변호하는 것처럼 보이는" 관료들(라킨에 따르면)을 막아야 했다. 노동 운동 내의 관료주의와 개량주의에 맞서는 것은 생디칼리스트들에게 주요한 주제였다. 이러한 입장의 한 표현은 많은 생디칼리스트들이 단체 교섭 협약을 거부한 것이었는데, 이는 노동자들에게 노동 평화를 강요하고 연대를 깨뜨린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웝블리(IWW)의 빈센트 세인트 존은 이렇게 선언했다. "세계산업노동자들이 고용주 계급과 맺을 협상은 단 하나뿐이다. 즉, 생산 수단의 완전한 항복이다." 아르헨티나 지역 노동자 연맹( Federación Obrera Regional Argentina|페데라시온 오브레라 레히오날 아르헨티나es, FORA)과 OBU(One Big Union)는 이러한 거래를 수용했고, 다른 단체들도 결국 이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마찬가지로, 생디칼리스트 노동조합은 대규모 파업 기금을 조성하지 않았는데, 이는 기금이 일반 조합원과 분리된 관료주의를 만들고, 노동자들에게 계급 투쟁을 노동조합이 아닌 자신들이 수행해야 한다는 기대를 심어줄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웝블리가 사보타주의 상징으로 사용한 검은 고양이


생디칼리스트들은 선거 정치와 같은 간접적인 행동 대신 규정대로 일하기, 소극적 저항, 사보타주, 파업, 특히 총파업과 같은 직접 행동을 계급 투쟁의 전술로 옹호했다. IWW는 30건 정도의 시민 불복종 운동을 벌였는데, 대부분 성공적이었고, 이를 언론의 자유 투쟁으로 간주했다. 웝블리는 공공 연설을 제한하는 법에 저항하여 수백 명의 체포로 인해 감옥과 법원 시스템을 마비시키고, 결국 공무원들이 그러한 법을 철회하도록 강요했다. 사보타주는 느리거나 비효율적인 작업에서 기계 파괴 및 신체적 폭력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1909년과 1910년 파업 기간 동안 프랑스 철도 및 우체국 노동자들은 전신 및 신호선을 끊었다.

생디칼리스트들에 따르면 혁명으로 가는 마지막 단계는 총파업이 될 것이다. 그리퓔예스에 따르면, 그것은 "수 세기의 피로한 낡은 장면에 대한 막이 내려지고, 다른 장면에 대한 막이 올라가는 것"이 될 것이다. 생디칼리스트들은 자본주의를 대체할 사회에 대해 자세히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밝히며, 모호한 입장을 유지했다. 노동조합은 낡은 사회 내에서의 투쟁 수단일 뿐만 아니라 새로운 사회의 씨앗으로 여겨졌다. 생디칼리스트들은 일반적으로 자유 사회에서 생산은 노동자들이 관리할 것이라는 데 동의했다. 국가 기구는 노동자 조직의 지배로 대체될 것이다. 이러한 사회에서 개인은 경제적 영역뿐만 아니라 사생활과 사회생활에서도 해방될 것이다.

생디칼리슴 안에서는 보다 급진적이고 혁명적인 아나코생디칼리슴이 유명하며, 온건한 입장의 생디칼리슴은 그 뒤에 가려져 있다. 아나코생디칼리슴은 아나키즘(무정부주의)과 생디칼리슴이 결합된 것으로, 자본주의뿐만 아니라 국가마저 폐지하고 그 자리를 노동조합이 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나코생디칼리슴은 스페인에서 세력이 강했으며, 특히 스페인 내전 시기에 전성기를 맞이했지만, 미국에 본거지를 둔 세계 산업 노동자 연맹(IWW) 등 스페인 외에도 유력한 지지자가 있었다.

생디칼리슴은 협동조합 경제론 안에서 사회주의공산주의와 함께 중요한 이데올로기이다. 생디칼리슴에서 윤리적인 측면에서는 조직된 노동조합에 참여하는 자는 그 생산물에 대해 동등한 소유권을 가지며, 따라서 지위나 임무에 관계없이 동등한 수입과 동등한 혜택을 얻는다. 이에 반해 사회주의에서는 각 기업이 요구하는 대로 생산물을 기업 간에 배분하는 것이 강조되며, 각 기업이 내부에서 어떻게 조직되어 있는지는 반드시 고려되지 않는다. 공산주의와는 달리, 생디칼리슴은 사유 재산과도 양립할 수 있다. 공산주의의 경우 정부에 의해 인정된 사적 소유 및 사적 수입을 부정하고, 모든 자산을 법적으로 공유로 하여, 사람들 스스로가 직접 이를 관리하게 된다고 한다.

또한 생디칼리슴에서 경제를 운영하는 노동조합은 정치를 하는 정부와 독립적으로 존재하며, 정부에 의한 계획 경제 등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자본주의에서의 기업과 마찬가지로, 생디칼리슴에서의 노동조합은 서로 복잡한 협력 관계를 공유하며, 정부와 대립할 수도 있다.

생디칼리슴은 마르크스주의사회주의에 그랬던 것처럼 이론이나 체계적으로 정교하게 발전된 이념에 의해 형성되지 않았다. 에밀 푸제는 프랑스 노동총동맹(CGT)의 지도자였으며,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생디칼리슴이 다양한 사회주의 학파와 구별되고 우월한 점은 그 교리의 절제성에 있다. 노동조합 내부에서는 철학적인 논의가 거의 없다. 그들은 그것보다 더 잘한다. 행동한다!" 마찬가지로, 스페인 전국노동자연맹(CNT)의 안드레우 닌은 1919년에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나는 행동, 혁명의 광신자다. 나는 먼 이념과 추상적인 문제보다 행동을 더 믿는다." 최소한 헌신적인 활동가들에게 노동자 교육이 중요했지만, 생디칼리스트들은 부르주아 지식인들을 불신했고, 운동에 대한 노동자 통제를 유지하려 했다. 생디칼리스트적 사고는 팸플릿, 전단, 연설, 기사, 그리고 운동 자체의 신문에서 구체화되었다. 이러한 글들은 주로 계급 투쟁에서의 전술에 대한 논의와 행동 촉구로 구성되었다. 철학자 조르주 소렐의 ''폭력에 대한 성찰''은 더 넓은 대중에게 생디칼리스트적 사상을 소개했다. 소렐은 스스로를 생디칼리즘의 주요 이론가로 내세웠고, 자주 그렇게 여겨졌지만 운동의 일원이 아니었고, 이탈리아와 폴란드를 제외하고는 생디칼리즘에 미미한 영향을 미쳤다.

생디칼리스트의 입장이 지도자들의 견해만을 반영하는 정도와, 그러한 입장이 생디칼리스트 조직의 일반 당원들에 의해 공유되는 정도는 논쟁의 대상이다. 프랑스 생디칼리즘에 대해 논평하면서, 역사가 피터 스턴스는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생디칼리즘의 장기적인 목표에 동의하지 않았고, 생디칼리스트 헤게모니가 프랑스 노동 운동 전체의 상대적으로 느린 성장을 설명한다고 결론 내린다. 그는 생디칼리스트 운동에 가입한 노동자들은 전체적으로 교리적 문제에 무관심했고, 생디칼리스트 조직에 가입한 것은 부분적으로 우연이었으며, 지도자들은 노동자들을 생디칼리스트적 사상으로 개종시킬 수 없었다고 말한다. 정치학자 프레데릭 리들리는 더 모호하다. 그에 따르면, 지도자들은 생디칼리스트적 사상을 구성하는 데 매우 영향력이 있었다. 생디칼리즘은 단지 몇몇 지도자들의 도구 이상이었으며, 프랑스 노동 운동의 진정한 산물이었다. 달링턴은 대부분의 아일랜드 ITGWU 회원들이 직접 행동이라는 노조의 철학에 설득되었다고 덧붙인다. 알테나는 일반 노동자들의 신념에 대한 증거가 부족하지만, 그들이 노동 운동의 다양한 흐름 사이의 교리적 차이점을 인식하고 자신의 견해를 옹호할 수 있었음을 시사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그들이 생디칼리스트 신문을 이해하고 정치적 문제를 토론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관찰한다.

''생디칼리즘''은 일부 사람들에게 ''아나코생디칼리슴''과 상호 교환적으로 사용된다. 이 용어는 1907년에 CGT의 정치적 중립성을 비판하는 사회주의자들에 의해 처음 사용되었지만, 1920년대 초 공산주의자들이 경멸적으로 사용하기 전까지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1922년부터 자칭 아나코생디칼리스트들이 이 용어를 사용했다. 생디칼리즘은 전통적으로 아나키즘 내의 흐름으로 여겨져 왔지만, 일부 국가에서는 아나키스트보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지배했다. 이는 이탈리아와 아일랜드를 포함한 대부분의 영어권 세계의 경우였는데, 아일랜드에서는 아나키스트가 생디칼리즘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생디칼리스트 교리가 아나키즘의 산물인 정도에 대한 논쟁이 있다. 아나키스트 이안 맥케이는 ''생디칼리즘''이 바쿠닌과 제1인터내셔널의 아나키스트 분파가 개발한 사상과 전술의 새로운 이름일 뿐이며,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취한 입장과 전적으로 일치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많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생디칼리즘을 받아들인다는 사실은 그들이 마르크스의 견해를 버리고 바쿠닌의 견해로 개종했음을 시사할 뿐이다. 알테나 역시 생디칼리즘을 더 넓은 아나키스트 운동의 일부로 보지만, 이것이 또한 노동 운동이라는 사실과의 긴장이 있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는 또한 페르디난트 도멜라 니우벤후이스와 크리스티안 코르넬리센과 같은 주요 생디칼리스트들과 호주 생디칼리스트 운동의 상당 부분이 마르크스주의적 사상의 영향을 받았고, 오래된 사회주의적 개념의 영향을 받았다는 점에서 운동에 반영된 마르크스주의적 사상을 본다. 달링턴에 따르면, 블랑키주의, 반성직주의, 공화주의, 농업 급진주의를 포함하여 특정 국가의 다양한 영향 외에도, 아나키즘, 마르크스주의, 혁명적 노동조합주의가 생디칼리즘에 똑같이 기여했다.

3. 2. 변화와 수정

초기 생디칼리슴은 노동조합을 통해 자본주의 사회를 전복시키고, 사회주의라는 과도기 없이 바로 완전 공동 생산 체제, 즉 공산주의 사회를 만들려는 급진적인 목표를 가졌다. 이는 스탈린주의프롤레타리아 독재와 같은 과도기적 단계를 권위주의적이라고 비판하며 거부하는 입장이었다.[11] 또한 이론보다는 '실천'을 중시하여, 이론 중심의 좌파나 비실천적 사회주의자들을 비판적으로 보았다. 생디칼리슴의 기초 이론은 자유지상주의적 사회주의, 반권위주의, 반자본주의, 반국가주의, 탈민족주의, 계급혁명, 민주주의, 산업 민주화, 국제주의 등이었다.

그러나 정당과의 연대 없이 순수한 노동조합 운동만으로는 점차 세력이 약화되었다.[10] 여러 국가에서는 생디칼리슴의 총파업 위협에 대응하여 중요 산업을 국유화하거나 특정 직종의 근무 환경을 개선하는 등 집산주의 정책을 펴면서 노동자들이 생디칼리슴 운동에 참여할 필요성을 줄였다.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전함에 따라 이러한 경향은 심화되었고, 생디칼리슴의 사회적 영향력은 점차 미미해졌다.

이러한 현실적 한계에 부딪히면서 생디칼리슴은 이론과 실천 노선에서 변화를 겪게 되었다. 현대 생디칼리슴은 과거와 달리 시장경제의 필요성을 일부 인정하며, 자유지상주의적 사회주의 노선을 따르는 운동으로 변화했다. 오늘날 대부분의 생디칼리스트들은 아나키스트사회주의자들과 연대하여 활동한다. 국제적인 연대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많은 생디칼리스트 조직들은 국제주의적 운동을 지속하고 있다. 이는 초기부터 국제 노동조합들과 연대해 온 역사적 경험과, 고립된 운동으로는 생존하기 어렵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정치사회적 측면에서도 변화가 나타났다. 초기에는 무신론에 기반하여 종교 자체를 부정했지만, 현대에는 종교를 민주적으로 완전히 없애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보고, 사회적으로 종교의 영향력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운동을 전개한다. 또한 성소수자 권리, 종교를 믿지 않는 여성의 권리, 낙태의 자유 등을 지지하는 입장을 보인다.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변화가 있었다. 과거에는 노동자들로 구성된 완전 협동 생산 체제를 지향했지만, 현대 생디칼리슴은 자본가의 권위를 약화시키고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의 양극화를 최대한 줄이는 것을 목표로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노동자들이 제공하는 노동력에 대한 정당한 분배가 자본가로부터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비판하며, 필요에 따른 정확한 분배를 통해 합리적인 노사 관계를 만들고자 한다. 다만, 이러한 합리적 관계를 위해서는 노동자와 자본가 간의 '권위' 차이를 해소해야 하므로, 여전히 적극적인 파업과 노동 운동을 중요한 수단으로 여긴다.

4. 역사

표지 "Was will der Syndikalismus?" ("생디칼리슴은 무엇을 원하는가?"), 막스 바긴스키가 쓰고 독일 생디칼리스트들이 발행한 팸플릿


생디칼리슴은 프랑스어노동조합을 뜻하는 '생디카'(Syndicatfra)에서 유래한 사상으로,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전반까지 주로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등에서 강력한 노동 운동 조류를 형성했으며 영국, 미국 등에도 영향을 미쳤다. 생디칼리슴은 산업별 노동조합 중심의 조직화를 통해 총파업과 같은 노동자의 직접 행동으로 자본주의 체제를 전복하고, 노동자가 생산 수단을 직접 통제하는 사회를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이는 국가 권력 장악을 우선시했던 당시 사회주의 정당들과는 다른 길이었다. 생디칼리스트들은 일반적으로 정당 정치와 의회 활동을 불신하고 노동조합 중심의 경제 투쟁을 강조했지만, 드 레온주의자들처럼 정치 투쟁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정치 조직과 산업 조직의 병행을 주장하는 흐름도 존재했다.

생디칼리슴의 가장 급진적이고 널리 알려진 형태는 아나키즘(무정부주의)과 결합한 아나코생디칼리슴이다. 이들은 자본주의뿐 아니라 국가 자체의 폐지를 주장하며, 그 역할을 노동조합 연맹체가 대신해야 한다고 보았다. 아나코생디칼리슴은 특히 스페인의 전국노동연맹(CNT)을 통해 강력한 세력을 구축했고, 스페인 내전 시기에 그 영향력이 절정에 달했다. 미국의 세계산업노동조합(IWW) 역시 아나코생디칼리슴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대표적인 조직이다.

경제 운영 방식에 있어서 생디칼리슴은 협동조합주의적 성격을 띠며, 사회주의공산주의와는 구별된다. 생디칼리슴은 조직된 노동조합 구성원 모두가 생산물에 대한 동등한 소유권을 가지며, 지위나 역할에 관계없이 동등한 분배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기업 간 생산물 분배를 중시하는 사회주의나, 사유 재산을 부정하고 자산 공유를 내세우는 공산주의와 다르다. 또한, 생디칼리슴 사회에서는 경제를 운영하는 노동조합이 정치 권력(정부)으로부터 독립적이며, 국가 주도의 계획 경제를 상정하지 않는다.

다만, 이탈리아에서는 일부 생디칼리스트들이 변절하여 베니토 무솔리니파시즘 정권이 주창한 코포라티즘(협동체주의)에 영향을 주거나 동조하는 사례도 있었다.

엘리자베스 걸리 플린, IWW 조직가


성(性) 문제에 대한 생디칼리슴의 입장은 일관되지 않았다. 스페인의 CNT는 1918년까지 여성의 조합 가입을 허용하지 않았고, 프랑스의 총노동연맹(CGT)은 페미니즘을 부르주아 운동으로 치부했다. 여성 참정권 문제에도 대체로 무관심했으며, IWW의 여성 조직가 엘리자베스 걸리 플린조차 여성은 투표가 아닌 생산 현장에서 힘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캐나다의 원 빅 유니언 창립 대회에서는 여성 대표가 소수였고, 남성 중심적 분위기에 대한 비판은 계급 문제 우선 논리에 묻혔다. IWW의 사보타주 강조나 "군인이 되지 마라! 남자가 되어라!" 같은 구호는 '남자다움'을 내세우며 노동계급의 연대를 꾀하려는 남성 중심적 경향을 보여주기도 했다. 이러한 경향은 여성을 '자연에 묶인 존재'로 보며 가부장제를 옹호했던 아나키스트 피에르조제프 프루동의 영향으로 분석되기도 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변화의 모습도 나타났다. 프랑스 남부의 CGT 농업 연합은 초기 여성에 대한 적대적 태도를 바꾸었고, CNT는 스페인 내전 중 여성 해방 조직인 무헤레스 리브레스와 긴밀히 협력했다.

4. 1. 생디칼리슴의 시초 (프랑스)

프랑스의 구체제 노동 조합에서 보여준 노동자들의 결집력은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비해 상당히 높은 수준이었다. 초기에는 노동 해방이라는 경제 문제가 민주주의 실현이라는 정치 문제와 분리되지 않았고, 노동자들은 계급 갈등의 의미를 명확히 인식하지 못했다. 그러나 제2 제정기에 자본주의가 발전하고 노동 계급의 수가 증가하면서, 프롤레타리아 해방을 위한 조직 결성의 열망이 커졌다. 이는 제1인터내셔널(1864) 창립 등으로 구체화되었다.

1864년 정부가 노동자들의 단결권과 파업권을 인정하는 법령을 통과시키면서 노동 조합 운동이 본격화되었다. 파리 제화공들이 최초로 조합을 결성했으며, 1867년에는 파리 식자공 조합이 2,131명의 조합원을 확보했다. 하지만 이들 초기 조합은 숙련공 중심의 온건한 상호 부조 형태에 머물렀다. 파리 코뮌 진압으로 지도부가 큰 타격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조합들은 재정비되어 노동 조합 운동을 이어갔다.

코뮌 이후 첫 조직화 시도는 1872년 공화파 언론인 바르브레(Barberet)의 '노동자 친목 연합' 내 조합 결성 노력이었으나, 정부에 의해 저지되었다. 대신 1876년 전국 노동자 대회가 허용되었는데, 이 대회에서는 코뮌 이후 정치 상황과 부르주아 지식인에 대한 불만이 표출되었다. 1878년 리옹에서 열린 두 번째 대회 즈음, 쥘 게드(Jules Guesde)와 같은 망명 사회주의자들이 귀국했다. 정부가 이 대회를 중지시키자, 게드는 이에 대한 투쟁을 통해 1879년 마르세유 전국 노동자 대회에서 마르크스주의를 표방하는 게드주의자들이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게드는 사회주의 정당을 결성하고 노동 조합을 정당 활동의 보조적 역할로 삼으려 했다.

이 시기 수공업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직능별 노동 조합 결성이 활발했으며, 1881년까지 약 500개의 지방 노동 조합이 설립되었고, 이 중 150개(조합원 6만 명)가 파리에 집중되었다.

1884년 발데크 루소법(fr)이 제정되어 노조 조직인 syndicat|생디카프랑스어가 합법화되면서 프랑스 노동 운동은 더욱 발전했다. 다만 이 법은 노조 간부 명단과 강령 등록을 요구하는 등 제한적인 측면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법에 근거하여 1886년 생디카 전국 연맹(Fédération nationale des syndicats, FNCS)이 결성되었다. 이 연맹은 게드주의자들의 영향력 아래 있었으며, 정치 세력 강화를 위한 도구라는 비판도 받았다.

한편, 1888년 전국 노동자 대회에서는 총파업이 노동자 해방의 중요한 수단으로 거론되었고, 노동 운동이 정치가와 구분되어야 한다는 혁명적 노동 조합의 성격이 강조되었다. 이는 게드주의자들의 노선과 대립하며 새로운 연맹체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정치 조직으로부터 독립적인 노동 조직을 건설하려는 움직임은 지역별 노동자 기관인 Bourse du Travail의 발전을 통해 구체화되었다. 1887년 파리에서 처음 설립된 노동거래소는 시 당국의 지원을 받아 노동자들에게 모임 장소를 제공하는 것에서 출발하여, 직업 소개소 역할과 지역 노조 연맹 본부 기능을 수행했다. 20세기 초까지 전국적으로 50여 개로 늘어났으며, 정치 및 정당 개입을 거부하는 특징을 보였다. 1892년에는 10개의 노동거래소 대표들이 생테티엔에 모여, 생디카 전국 연맹(FNCS)과는 별도로 반정치적 성향을 강조하는 노동거래소 연맹(Fédération des Bourses du Travail, FBT)을 조직했다. FBT는 FNCS에 비해 더 적극적인 노동자들을 회원으로 확보하고 조직적으로도 더 치밀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노동거래소 연맹(FBT)과 생디카 전국 연맹(FNCS)은 1893년 합동 회의를 계획하는 등 노동 운동 통일을 모색했다. 그러나 총파업에 대한 입장 차이로 인해 통일은 쉽지 않았다. 아나키스트 계열은 총파업을 지지했지만, 게드주의자들과 일부 독립 사회주의자들은 정치 활동을 우선시하며 반대했다.

결국 1894년, 노동 운동 세력은 총파업 지지 여부를 둘러싸고 분열되었다. 게드주의자들은 트루아에서 별도의 대회를 열었고, 총파업을 지지하는 나머지 분파(1,662개 노조 대표)는 리모주에서 대회를 개최했다.

리모주 전국 노동자 대회는 프랑스 노동 운동사에서 중요한 계기가 되었는데, 이 대회에서 향후 노동 운동의 중심 세력이 될 프랑스 노동총연맹(Confédération Générale du Travail, CGT)이 1895년 창설되었기 때문이다. 리모주 대회는 CGT 창설과 더불어, 노동 운동의 주요 활동 방식으로 총파업 원칙을 재확인하고, CGT가 모든 정당으로부터 독립하여 투쟁적인 노동자들을 통합해야 한다는 목표를 설정했다.

그러나 CGT 창설 이후에도 노동 운동의 완전한 통일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CGT와 노동거래소 연맹(FBT)은 한동안 별개의 조직으로 남았다. 초기에는 실질적인 힘과 조직력 면에서 FBT가 CGT보다 우위에 있었다. 1902년 몽펠리에에서 열린 CGT 총회에서 노동거래소 연맹이 독자성을 유지하면서 CGT에 통합되는 원칙이 채택되었고, CGT는 노동거래소 분국과 연맹 분국이라는 두 개의 부서를 갖춘 형태로 재편되었다.

이렇게 통합된 CGT는 1906년 아미앵 헌장(Charte d'Amiens)을 통해 정치적 중립과 비정치적 활동 기준을 명확히 표방했다. 이후 1906년 5월 1일 총파업과 1910년 철도 총파업 등을 주도하며 프랑스 생디칼리슴 운동의 '영웅 시대'를 이끌었다.

4. 2. 생디칼리슴 운동의 전개

프랑스 노동자들은 구체제 시기부터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비해 높은 수준의 결집력을 보여주었다. 초기에는 경제 문제와 민주주의라는 정치 문제가 분리되지 않았고,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계급 갈등의 의미를 명확히 인식하지 못했다. 그러나 제2 제정기 자본주의 발전과 노동 계급의 양적 성장 속에서 프롤레타리아 해방을 위한 조직 결성 열망이 커졌고, 이는 제1인터내셔널(1864) 성립 등으로 가시화되었다. 1864년 제국 정부가 노동자들의 단결권과 파업권을 인정하면서 파리 제화공들이 최초로 조합을 결성했고, 파리 식자공 조합 등 숙련공 중심의 온건한 조합들이 생겨났다. 파리 코뮌에 대한 가혹한 진압으로 노동 운동은 큰 타격을 입었지만, 곧 조직을 재정비하며 노동 조합 운동은 명맥을 이어나갔다.

코뮌 이후, 1872년 공화파 언론인 바르브레(Barberet)가 노동 조합 결성을 시도했으나 정부에 의해 저지되었다. 1876년 열린 전국 노동자 대회에서는 코뮌 이후 정치 상황과 부르주아화된 지식인에 대한 불신이 표출되었다. 1878년 리옹에서 열린 두 번째 대회는 정부에 의해 중지되었는데, 이 시기 망명했던 사회주의자 쥘 게드(Jules Guesde) 등이 귀국했다. 게드는 정부의 탄압에 맞서 투쟁하며 1879년 마르세유 대회에서 마르크스주의를 표방하는 게드주의자들이 주도권을 잡도록 이끌었고, 이를 바탕으로 사회주의 정당을 결성하여 노동 조합을 정당의 하위 조직으로 만들려 시도했다.

이 시기 수공업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직능별 노동 조합이 결성되었고, 광업, 섬유, 철도 등 산업화된 부문의 노동자들도 조합을 조직했다. 1881년까지 프랑스 전역에 약 500개의 지방 노동 조합이 설립되었으며, 파리에만 150개, 6만 명의 조합원이 활동했다.

1884년 발데크 루소법 제정으로 노동 조합 조직인 '생디카'가 합법적으로 인정되면서 노동 운동은 더욱 활발해졌다. 그러나 이 법은 노조 간부 명단과 강령 등록을 요구하는 등 완전한 노조 활동 보장과는 거리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886년 이 법에 따라 '생디카 전국 연맹'이 결성되었으나, 게드주의자들이 장악하여 정치적 영향력 확대의 도구로 활용되었다. 한편, 1888년 르부스카 전국 노동자 대회에서는 총파업이 프롤레타리아 해방의 수단이며, 노동자와 정치가는 구분되어야 한다는 혁명적 노동 조합의 성격이 결의되었다. 이는 게드주의자들의 노선과 대립하며 별도의 '생디카 연맹' 결성으로 이어졌다.

정치 조직으로부터 독립적인 노동 조직 건설 움직임은 지역 노동 조합의 연합체인 '노동거래소(Bourse du Travail)'의 발전에서 두드러졌다. 1887년 파리에서 처음 설립된 노동 거래소는 시 당국의 지원으로 노동자들의 모임 장소, 직업 소개소, 지역 노조 연맹 본부 역할을 수행했다. 20세기 초까지 전국적으로 50여 개로 늘어났으며, 정치 개입을 거부하는 특징을 보였다. 1892년에는 10개 노동 거래소 대표들이 모여 생디카 연맹과는 별개로 반정치적 성향을 강조하는 '노동 거래소 연맹'을 조직했다. 이 연맹은 더 적극적인 노동자들을 회원으로 확보하고 조직을 더 치밀하게 구성할 수 있다는 이점을 가졌다.

1893년, 두 연맹은 합동 회의를 계획했으나, 내무부 장관이 파리 노동 거래소를 폐쇄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는 노동자들이 정부에 대해 더욱 조직적으로 항의하고 노동 운동의 통일 필요성을 절감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총파업에 대한 입장 차이(아나키스트 알르만파 지지 vs. 게드주의자/독립 사회주의자 반대)로 인해 통일은 쉽지 않았다. 게드주의자들은 정치 활동만이 해방의 길이라는 입장을 고수했고, 결국 1894년 노동 운동은 게드주의자들(트루아 대회)과 총파업 지지파(리모주 대회)로 분열되었다. 리모주 대회는 1,662개 노동 조합을 대표하며 더 큰 세력을 형성했다.

1895년 리모주 대회에서는 향후 프랑스 노동 운동의 주축이 될 프랑스 노동 총동맹(Confédération Générale du Travail, C.G.T.)이 창설되었다. C.G.T.는 총파업 원칙을 재확인하고, 모든 투쟁적 노동자들을 통합하며 정당과 거리를 둘 것을 목표로 삼았다. 이로써 노동 운동은 정치가들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시작했지만, C.G.T.와 노동 거래소 연맹은 여전히 별개 조직으로 남아 있었고 실질적인 힘은 노동 거래소 연맹이 더 컸다. 1902년 몽펠리에 C.G.T. 총회에서 노동 거래소 연맹의 통합이 결정되어, C.G.T.는 '노동 거래소 분국'과 '연맹 분국'이라는 두 부서를 갖춘 통일된 조직으로 거듭났다.

1906년 C.G.T.는 아미앵 헌장을 채택하여 비정치적 활동 노선을 명확히 했다. 같은 해 5월 1일, 1일 8시간 노동을 요구하는 대규모 총파업을 계획했으나, 총리 클레망소 정부는 파업 지도부를 대거 체포하며 이를 사전에 무력화시켰다. 이러한 상황에서 C.G.T.의 반의회, 반정부 성향은 더욱 강화되었다. 이후 C.G.T.는 1910년 철도 총파업 등을 주도하며 생디칼리슴의 '영웅 시대'를 열었다.

미하일 바쿠닌, 생디칼리스트들이 지적 선구자로 여겼던 아나키스트


프랑스 생디칼리스트 지도자 에밀 푸제


생디칼리스트들은 정당 정치가 노동 운동을 대변할 수 없다고 보았다. 투표를 통한 간접적인 의사 표현이나 정치적 중개자에 대한 의존은 노동자 해방 목표 달성에 부적합하다고 여겼다. 따라서 노동 조합의 '비정치성'은 조합 내에서 정치적 중립을 요구하는 것이었으며, C.G.T.와 노동 거래소 연맹은 정치 조직과의 중립을 강조했고, 아미앵 헌장 역시 노조 내 정치 논의나 선전을 금지했다. 이는 노동 운동이 경제 활동에 국한되어야 한다는 의미를 내포하며, 정부, 의회, 정당 등 기존 정치 체제에 대한 불신을 반영했다.

한편, 생디칼리슴이 표방하는 경제 활동으로서의 노동 운동은 직접 행동을 통해 고용주로부터 노동자를 위한 양보를 얻어내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고용주로부터 양보를 얻어내는 과정은 정부의 방해에 봉착하거나 아니면 정부, 의회를 거친 입법 조치를 통해 획득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노동 운동의 목표 달성을 위해서는 생디칼리스트들이 체제 외부에 머물러 있으려 하면서 동시에 정부에 투쟁하거나 그 힘을 이용해야 하는 모순적인 상황에 놓이기도 했다. 예를 들어, 사설 직업 소개소 폐쇄 요구는 1881년 의회에 탄원된 후 오랜 투쟁 끝에 1904년에야 법제화되었다. 이 과정에서 1903년 파리 노동 거래소와 경찰 간 충돌로 사상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C.G.T.는 또한 반군부 운동과 반애국 운동으로까지 나아갔다. 정부가 파업 진압에 군대를 동원하는 것을 보며 노동자들은 군대를 고용주 보호 수단으로 여겼고, 애국심은 부르주아 계급이 노동자들을 전쟁 등에 동원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는 도구라고 생각했다. 즉, 국가는 자본주의 기구로서 프롤레타리아는 애국심을 통해 부르주아에 이용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C.G.T.의 반애국주의 표방은 노동자주의를 강조하는 생디칼리슴 극단의 발현이기도 하였으며 노동 계급의 직접적 이익을 보호한다는 명분과 세계 평화를 위한다는 타당성을 갖기도 했다. 이를 바탕으로 1911년 10월 노동 거래소부와 연맹부에서는 전시에 동원령을 부정하고 혁명적 총파업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결의를 했다.

전시에는 반애국주의, 평시에는 탈정치를 강조하는 생디칼리슴의 비정치성은 배신감에서 비롯된 측면이 크다. 특히 지식인 출신 정치인들의 배반이 큰 영향을 미쳤다. 노동 운동을 발판 삼아 의회에 진출한 이들이 변절하는 모습은 반의회 감정을 키웠다. 생디칼리슴의 반정치 성향 강화에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은 미예랑 사건이었다. 사회주의자였던 알렉상드르 미예랑(Alexandre Millerand)은 발데크 루소 정부에 입각했지만, 노동 운동의 실질적 여건 개선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로 인해 노동 조합 내에서는 미예랑과 그를 지지하는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적대감이 커졌다. 이는 정치 전반에 대한 불신을 심화시켰고, 1906년 아미앵 헌장을 통한 정치와의 완전한 분리 선언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배신감은 1910년 브리앙의 전향으로 극에 달했다. 1910년 철도 총파업 당시, 과거 총파업 원칙을 강력히 지지했던 아리스티드 브리앙(Aristide Briand)이 내무상으로서 진압을 주도했다. 브리앙은 즉시 계엄령을 선포하고 동원령을 발동했으며, 군법 회의를 통해 작업을 강요했다. 과거 사회주의자 모임에서 총파업 원칙 채택을 주도했던 브리앙이 이제는 '조국에 대한 의무'를 내세운 것이다.

지식인과 정치인에 대한 배신감 외에도, 제3공화국의 도덕적 타락 역시 생디칼리슴의 비정치성 강화에 영향을 미쳤다. 제1공화국과 달리 제3공화국에서는 공공 도덕성이 경시되었다. 1887년에는 재판 기록 조작 스캔들로 인해 대통령 그레비(J. Grevy)가 사임하는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에 연루된 그레비의 사위 윌송(D. Wilson) 의원은 의원직을 유지했다.) 1889년 이후에는 파나마 운하 건설 회사의 실패와 관련된 대규모 스캔들이 정치 불신을 더욱 깊게 만들었다. 회사가 자금난 해결을 위해 의원들을 매수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고, 관련 수사 과정에서 전직 장관을 포함한 다수의 의원들이 유죄 판결을 받았다.

이러한 정치권에 대한 배신감과 도덕적 타락에 더해, 제3공화국 정부의 소극적인 사회 입법 역시 생디칼리슴의 비정치적 태도를 심화시키는 데 기여했다.

제임스 라킨, 아일랜드 라키니즘의 중심 인물


생디칼리슴 운동은 프랑스를 넘어 국제적으로 확산되었다. 프랑스 C.G.T.와 더불어 1905년 미국에서 결성된 세계산업노동조합(Industrial Workers of the World, IWW)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IWW는 미국 서부의 격렬한 노동 분쟁 속에서 성장했으며, 스스로를 미국적 노동 조직 형태로 규정했지만 넓은 의미에서 생디칼리즘의 한 형태로 평가받는다. IWW는 캐나다, 멕시코 등 북미 지역으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생디칼리즘 사상은 다양한 경로를 통해 전파되었다. 프랑스를 방문했던 활동가들이 자국(헝가리, 스페인, 이탈리아 등)에 돌아가 조직을 결성하거나, 에밀 푸제의 팜플렛 등 관련 출판물이 여러 언어로 번역되어 읽혔다. 이주 노동자들의 역할도 컸는데, 아르헨티나 지역 노동자 연맹( Federación Obrera Regional Argentinaes, FORA)은 이탈리아와 스페인 이민자들이 주도했으며, IWW 지도자 중에도 유럽 이민자들이 많았다. 선원과 같은 국제적인 직업군은 전 세계 항구 도시에 생디칼리즘 사상을 퍼뜨리는 데 기여했다.

각국의 생디칼리스트들은 다양한 조직 전략을 취했다. 기존 노동 조합 내에서 활동하며 혁명적 정신을 불어넣으려 하거나(프랑스 일부, 윌리엄 Z. 포스터의 SLNA), 기존 조직이 부적합하다고 판단하여 별도의 연맹을 건설하기도 했다(미국 IWW, 아일랜드 ITGWU, 이탈리아 USI, 스페인 CNT). 노르웨이처럼 기존 노총 내 생디칼리스트 분파(Norske Fagoppositionno, NFO)와 독립적인 생디칼리스트 조직(Norsk Syndikalistik Federationno, NSF)이 공존하는 경우도 있었다.

4. 3. 쇠퇴

생디칼리슴은 1880년대부터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전까지 절정을 이루었으나, 전쟁 이후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했다.[1] 생디칼리스트들은 국가와 정부를 자본주의 지배 계급의 도구로 보고, 전쟁에 반대하며 총파업을 결의했었다.[1] 이는 노동자들의 국제주의적 계급 의식과 반군부주의, 반애국주의에 기반한 것이었다.[1] 그러나 제1차 세계 대전은 이러한 생디칼리슴의 이념 구조를 근본적으로 흔들었다.[1]

전쟁이 발발하고 독일이 프랑스를 침공하자, 프랑스에는 총동원령이 내려졌다.[1] 생디칼리스트들에게는 이론적으로 총파업을 실행할 순간이었지만, 현실은 달랐다. 프랑스 노동자들은 총파업보다는 장 조레스 암살에 대한 슬픔을 먼저 표출했다.[1] 당시 총노동연맹 (CGT) 서기장이었던 레옹 주오(Léon Jouhaux)를 포함한 많은 생디칼리스트들과 노동자들이 동원령에 응했고, 독일 제국주의에 대한 적개심으로 전쟁에 참여했다.[1] 이는 1914년 8월 노동 운동 지도자들이 전쟁 반대 총파업 결의보다 노동자 대중의 감정을 더 정확히 반영했음을 보여준다.[1]

크리스티안 코르넬리센, 제1차 세계 대전을 지지한 네덜란드 아나코생디칼리스트


제1차 세계 대전 발발은 전 세계 사회주의 및 노동 운동 진영에 큰 충격을 주었다. 많은 사회주의 정당과 노동조합이 기존의 국제주의 및 반전 약속을 저버리고 자국의 전쟁 노력을 지지했다. 이러한 국가와의 협력은 프랑스에서는 신성 동맹(union sacrée프랑스어), 독일에서는 성내 평화(Burgfriedende) 등으로 불렸다. 심지어 페테르 크로포트킨과 같은 저명한 아나키스트와 일부 생디칼리스트(크리스티안 코르넬리센 등)도 연합국 지지를 선언하는 ''16인 선언''에 참여했다.

그러나 대다수 생디칼리스트들은 국제주의와 반군국주의 원칙을 지키며 전쟁과 자국의 참전을 반대했다. 프랑스 CGT 내에서는 온건 개혁파가 우위를 점하면서 전쟁 지지 입장을 채택했고, 이는 CGT가 더 이상 혁명적인 생디칼리스트 조직이 아니었다는 평가도 있다. CGT는 파업 금지 서약을 받아들이고 프랑스의 전쟁 노력에 적극 참여했다. 이탈리아의 이탈리아 생디칼리스트 연합(USI) 내에서도 알체스테 데 암브리스 등이 이끄는 소수파가 좌익 개입주의를 내세우며 참전을 주장했으나, 다수파는 이를 거부하고 반전 입장을 고수했다. USI의 친전쟁파는 1914년 9월 축출되었고, 아르만도 보기(Armando Borghi)가 이끄는 반전파는 정부의 탄압을 받았다. CGT 내 반전 소수파는 피에르 모나테, 알퐁스 메르임 등이 이끌었으며, 짐머발트 회의에 참여하는 등 국제적 반전 운동과 연대하려 했지만 정부의 탄압 등으로 큰 어려움을 겪었다.

다른 국가의 생디칼리스트 조직들은 거의 만장일치로 전쟁에 반대했다. 스페인의 전국노동연맹(CNT)은 전쟁을 제국주의 분쟁으로 규정하고 어느 편도 지지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아일랜드의 아일랜드 운수일반노동조합(ITGWU) 역시 전쟁에 반대했으나, 친영국 정서 확산과 더블린 직장 폐쇄로 약화된 상황에서 제임스 코놀리는 아일랜드 시민군과 함께 부활절 봉기를 일으켰다가 처형되었다. 독일의 작은 독일 자유 노동 조합 연합(FVdG)은 전쟁 반대 입장을 고수하다 탄압받았다. 미국 산업노동자연맹(IWW)은 전쟁을 비난했지만, 정부 탄압을 우려해 적극적인 반전 캠페인을 벌이지는 못했다. 중립국이었던 네덜란드와 스웨덴의 생디칼리스트들도 자국 정부의 국방력 강화 움직임을 비판했다.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생활고와 사상자 증가로 초기 애국심은 약화되었고, 유럽 전역에서 파업과 반전 시위, 군인 반란이 증가했다. 국제주의 원칙을 지킨 생디칼리스트 조직들은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다시 영향력을 회복하며 전쟁 말기에 세력을 확장하는 모습을 보였다.

4. 4. 발전

20세기 초반에 생디칼리슴은 점차 쇠퇴했지만, 그 이론은 다양한 좌익 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 조합주의와 전통 마르크스주의가 혼합되고 길드 사회주의 원칙을 따르는 이 노동 운동 전략은 주로 이론보다는 실천을 중시하는 좌익 활동가들이 따르던 사상이었다. 그러나 때로는 이 이론이 왜곡되어 파시즘과 같은 형태로 나타나기도 했다.

우익적 성향을 보이는 생디칼리슴의 대표적인 예는 과거 사회주의자였던 베니토 무솔리니가 형성한 파시즘이다. 그는 조르주 소렐의 국민 생디칼리슴에 영향을 받아 국가주의와 민족주의를 혼합하여 파시즘을 만들었다. 초기 파시즘은 민족주의애국주의를 강조하며 생디칼리슴의 반애국주의, 반국가주의 가치와는 다른 길을 걸었지만, 노동 복지, 노동권 주장, 협동 경제 지향 등 일부 생디칼리슴의 특징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1930년대 중반부터 무솔리니 지지층이 우익으로 기울면서 초기 파시즘 이론은 점차 우경화되었고, 오늘날 우리가 아는 '후기 파시즘'과 같은 모습으로 변모했다. 이로 인해 파시즘은 더 이상 생디칼리슴과 유사한 면모를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고, 오히려 정반대의 속성을 지니게 되었다.

한편, 아나키스트들은 생디칼리슴을 받아들여 아나르코생디칼리슴이라는 이론을 형성했다. 아나르코생디칼리슴은 정당 활동을 배제하는 사회적 아나키즘 운동의 주요 이론으로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 외 다니엘 드 레온과 같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생디칼리슴, 공산주의, 반레닌주의 등을 혼합하여 좌파 공산주의의 시초가 되는 '레온주의'를 형성하기도 했다.

제1차 세계 대전에 대한 불만은 1917년 러시아 혁명을 시작으로 전후 혁명 물결로 이어졌다.[1] 1917년 2월, 페트로그라드에서 파업, 폭동, 군대 반란이 일어나 니콜라이 2세는 3월 2일 퇴위하고 러시아 임시 정부가 들어섰다. 이후 아나키스트 단체들이 등장했고, 러시아 생디칼리스트들은 약 25,000부를 발행하던 Голос Труда|골로스 트루다rus(노동의 목소리) 저널과 아나코-생디칼리스트 선전 연맹을 중심으로 조직되었다.[2][3]

1917년 9월 14일, (노동의 목소리) 호. 머리 기사 제목은 "세계의 노동자들에게"였다.


아나키스트들은 4월에 러시아로 돌아온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와 초기에는 뜻을 같이했다. 둘 다 임시 정부 타도를 목표로 했기 때문이다. 레닌은 소비에트의 권력 장악, 국회 설립 거부, 경찰, 군대, 관료제, 국가 폐지를 주장했는데, 이는 생디칼리스트들의 생각과 일치하는 부분이 많았다.[4] 생디칼리스트들은 소비에트를 환영했지만, 2월 혁명 과정에서 등장한 공장 위원회와 노동자 평의회에 더 큰 기대를 걸었다. 이 위원회들은 임금 인상과 노동 시간 단축뿐 아니라 생산에 대한 노동자 통제를 위해 싸웠으며, 이는 생디칼리스트와 볼셰비키 모두 지지하는 바였다. 생디칼리스트들은 공장 위원회를 노조보다 더 진정한 생디칼리스트 조직 형태로 보았다. 그러나 조직력이 뛰어난 볼셰비키는 위원회에서 더 많은 지지를 얻었고, 9월에는 페트로그라드와 모스크바 소비에트에서 다수를 차지하며 영향력을 키워나갔다. 이는 생디칼리스트들에게 불안감을 주었다.[2][3]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는 페트로그라드 군사 혁명 위원회를 설립했고, 10월 25일 이 위원회는 10월 혁명을 이끌었다. 아나키스트들은 임시 정부 타도를 기뻐했지만, 볼셰비키가 자신들만으로 구성된 인민 위원회 소비에트를 만들고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추구하자 우려를 표했다. 레닌은 노동자 통제를 지지했지만, 경제 혼란이 발생하자 12월부터 경제를 국가 통제하에 두고 공장 규율과 경제 질서를 회복하려 했다.[2][3] 1918년 1월 제1차 전러시아 노동 조합 회의에서 볼셰비키는 압도적인 수적 우위를 바탕으로 생디칼리스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지방 위원회를 노조에 종속시켜 권한을 약화시키고, 노조를 국가 기관으로 만들었다. 볼셰비키는 노동자 통제가 중앙 집중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2][3] 생디칼리스트들은 볼셰비키 정권을 국가 자본주의라고 비판하며 공장에 대한 국가 통제를 비난하고 권력 분산과 산업의 생디칼리제이션을 주장했다.[2][3] 러시아 내전이 발발하자 아나키스트들은 분열되었고, 생디칼리스트들은 볼셰비키 정책을 비판하면서도 백군의 승리를 막기 위해 볼셰비키 정권을 지지했다.[2][3]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디칼리스트들은 체카에 의해 1919년부터 탄압받았다. 볼셰비키 지도부는 그들을 가장 위험한 반대 세력으로 간주했다.[2][3] 내전이 끝난 후 1921년 크론슈타트 반란이 일어나자 정부는 전국적으로 아나키스트들을 체포했고, 이로 인해 러시아 생디칼리스트 운동은 사실상 와해되었다.[4]

제1차 세계 대전에 반대했던 서방의 생디칼리스트들은 러시아 혁명에 큰 기대를 걸었다. 그들은 러시아에서 의회 정치를 거부하고 노동자 평의회 중심의 혁명이 일어났다고 보았지만, 러시아의 실상에 대해서는 제한적인 정보만 가지고 있었다. 독일 아나코-생디칼리스트 오귀스틴 소치는 이를 "자유의 태양이 떠올랐다"고 칭송했고, 스페인 CNT는 "볼셰비즘은 이름일 뿐, 그 사상은 경제적 자유"라고 선언했으며, 이탈리아의 보르기는 "러시아에서 한 것처럼 하라"고 촉구했다.[3][5][6] 러시아 혁명의 영향으로 이후 몇 년간 유럽 전역에서 혁명적 분위기가 고조되었다.[7][1]

독일에서는 1918–1919년 독일 혁명이 일어났다.[1] 전쟁 전 6,000명의 회원을 가졌으나 전쟁 중 억압받았던 생디칼리스트 FVdG는 1918년 12월 재결성하여 혁명 과정, 특히 루르 지역에서 활발히 활동했다.[3][8] FVdG는 직접 행동과 사보타주를 옹호하며 급진적인 노동자들 사이에서 지지를 얻었다.[8] 1919년 12월, 독일 자유 노동자 연맹 (생디칼리스트) (Freie Arbeiter-Union Deutschlands (Syndikalisten)deu, FAUD)가 결성되어 11만 명 이상의 회원을 확보했으며, 아나키스트 루돌프 로커가 강령을 작성했다.[8][9]

이탈리아에서는 1919–1920년 노동 급진주의 물결인 biennio rosso|비엔니오 로소ita(적색 2년) 시기에 생디칼리스트들이 아나키스트들과 함께 가장 혁명적인 세력을 형성했다.[10] 전쟁 중 분열되었던 이탈리아 생디칼리스트 운동은 개입주의자들이 USI를 떠나 1918년 Unione Italiana del Lavoroita (UIL)를 결성하면서 나뉘었다. UIL은 민족 생디칼리즘을 내세웠다.[11] USI와 UIL 모두 비엔니오 로소 시기에 크게 성장했다.[10] 1919년 7월 전국적인 파업 운동이 총파업으로 절정에 달했을 때, USI는 이를 지지했지만 UIL과 사회주의자들은 반대하여 결국 파업은 하루 만에 붕괴되었다.[10]

포르투갈에서는 1919년 생디칼리스트 포르투갈 일반 노동 연맹 (Confederação Geral do Trabalhopor, CGT)이 국가 최초의 전국 노동 조합 연맹으로 결성되었다.

1917년 브라질 상파울루 총파업


브라질에서는 리우데자네이루와 상파울루 모두에서 생디칼리스트들은 아나키스트와 사회주의자들과 함께 1917–1919 브라질 파업 운동과 노동 투쟁의 주역이었다. 이 운동은 정부의 탄압으로 진압되었다. 아르헨티나에서 FORA는 아나코-공산주의 FORA V와 생디칼리스트 FORA IX로 분열되었다. 1919년 1월, 파업 진압 과정에서 노동자들이 살해되면서 비극의 주간이라 불리는 유혈 사태가 발생했다. 미국에서는 제1차 적색 공포와 정부 탄압으로 세계산업노동조합(IWW)이 약화되었고,[6] 캐나다에서는 캐나다 노동 반란이 일어났다.

한국에서는 해방 직후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가 대표적인 생디칼리슴 단체로 활동했다. 전평은 공산당 계열인 남조선로동당과 연대했지만, 기본적으로 생디칼리슴 성향이 강했다. 1946년 9월 전국적인 9월 총파업을 주도하며 위세를 떨쳤으나, 미군정과 우익 단체의 탄압으로 큰 타격을 입고 세력이 약화되었다. 1947년에도 파업을 시도했지만 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고, 결국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불법 이적 단체로 규정되어 해산되었다.

5. 국제적 확산과 영향

20세기 초 프랑스에서 시작된 생디칼리슴은 국경을 넘어 여러 나라로 확산되었다. 스페인(CNT), 이탈리아(USI), 미국(IWW), 독일(FVdG, 이후 FAUD), 아일랜드(ITGWU), 캐나다(OBU), 포르투갈(CGT), 아르헨티나(FORA]) 등 다양한 국가에서 생디칼리슴 조직이 결성되어 활동했다. 아시아에서는

5. 1. 제1차 세계 대전 이전



생디칼리슴의 성 관련 정책은 엇갈렸다. 스페인의 전국노동연맹(CNT)은 1918년까지 여성의 조합원 가입을 허용하지 않았으며, 프랑스의 총노동연맹(CGT)은 페미니즘을 부르주아 운동으로 일축했다. 생디칼리스트들은 대체로 여성 참정권 문제에 무관심했다. 산업노동자연맹(IWW)의 조직가였던 엘리자베스 걸리 플린은 여성들이 투표함이 아닌 "자신이 일하는 생산 현장에서 힘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캐나다의 원 빅 유니언(OBU) 창립 회의에 참석한 230명의 대표 중 여성은 단 3명이었다. 한 여성 급진주의자가 회의의 남성 중심적인 분위기를 비판하자, 노동 문제는 성별이 아닌 계급 문제에만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남성들에 의해 그녀의 의견은 거부되었다. 역사학자 토드 매컬럼은 OBU의 생디칼리스트들이 "급진적 남성다움"의 가치를 옹호했다고 결론 내린다.

프랜시스 쇼어는 "IWW의 사보타주 장려는 산업 자본주의가 동원한 개인화 기술에 직접적으로 도전하는 일종의 남성적 과시"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IWW의 남성적 정체성은 '남자다운' 생디칼리슴을 통해 노동계급의 연대와 저항의 특징을 포함했다." 예를 들어, 루이지애나의 한 IWW 조직가는 인종차별적인 모욕에 맞서 흑인 동료 노동자를 변호하면서 "그는 남자고, 노조원이고, IWW—남자다! ... 그리고 그는 행동으로 그것을 증명했다"고 주장했다.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IWW의 반전 구호 중 하나는 "군인이 되지 마라! 남자가 되어라!"였다. 어떤 경우, 생디칼리스트의 여성에 대한 태도는 변화했다. 1901년, 프랑스 남부의 CGT 농업 연합은 여성에게 적대적이었지만, 1909년에는 이러한 태도가 바뀌었다. 역사학자 샤리프 게미에 따르면, 생디칼리스트 노동 운동의 일부가 남성 중심적인 것은 여성은 스스로 "자연에 묶여 있다"며 가부장제를 옹호한 아나키스트 피에르조제프 프루동의 사상을 반영한 것이다.

생디칼리슴은 오랫동안 개입주의에 반대해 왔다. 빌 헤이우드는 "계급에 반역하는 것보다 조국에 반역하는 것이 낫다"고 주장했다. 프랑스 생디칼리스트들은 프랑스 육군을 자본주의 질서의 주요 수호자로 여겼다. 1901년, CGT는 탈영을 장려하는 군인을 위한 매뉴얼을 출판했다. 1911년, 영국 생디칼리스트들은 파업 노동자를 향해 총을 쏘지 말고 자본에 맞선 노동 계급의 투쟁에 동참하라고 간청하는 "영국 군인에게 보내는 공개 서한"을 배포했다. 생디칼리스트들은 애국심이 진정한 계급적 이익에서 노동자들의 주의를 돌려 자본주의 사회에 통합시키는 수단이라고 주장했다. 1908년, CGT의 의회는 제1인터내셔널의 슬로건을 인용하며 "노동자에게는 조국이 없다"고 선언했다.

5. 2. 제1차 세계 대전과 러시아 혁명

생디칼리슴은 오랫동안 개입주의에 반대하는 입장을 견지해왔다. 빌 헤이우드는 "계급에 반역하는 것보다 조국에 반역하는 것이 낫다"고 주장했으며, 프랑스 생디칼리스트들은 프랑스 육군을 자본주의 질서의 주요 수호자로 간주했다. 1901년, CGT는 탈영을 장려하는 군인 매뉴얼을 출판하기도 했다. 1911년 영국 생디칼리스트들은 파업 노동자에게 총을 쏘지 말고 자본에 맞선 노동계급 투쟁에 동참하라는 내용의 "영국 군인에게 보내는 공개 서한"을 배포했다. 생디칼리스트들은 애국심이 노동자들의 진정한 계급적 이해관계로부터 주의를 돌려 자본주의 사회에 통합시키는 수단이라고 보았다. 1908년 CGT 총회는 제1인터내셔널의 슬로건을 인용하며 "노동자에게는 조국이 없다"고 선언했다.[1]

1914년 7월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중립국과 교전국 모두의 사회주의 정당과 노동조합은 이전의 국제주의적 약속과는 달리 각국의 전쟁 노력이나 국가 방위를 지지하는 방향으로 돌아섰다. 러시아, 세르비아, 이탈리아 사회주의자들은 예외였다.[2] 이들은 계급 갈등을 잠시 접어두고 전쟁 채권 발행에 찬성했다. 독일 사회주의자들은 러시아의 "야만적인 차르주의"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전쟁이 필요하다고 주장했고, 프랑스 사회주의자들은 프로이센 군국주의와 독일의 "지배와 훈련 본능"에 맞서 방어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사회주의 운동과 국가 간의 이러한 협력은 프랑스에서는 union sacrée|위니옹 사크레프랑스어, 독일에서는 Burgfriedenspolitik|부르크프리덴스폴리티크de, 네덜란드에서는 godsvrede|호츠프레더nl로 알려졌다.[3][4][5] 또한 영향력 있는 생디칼리스트 크리스티안 코르넬리센을 포함한 표트르 크로포트킨 주도의 일부 아나키스트들은 전쟁에서 연합국을 지지하는 ''16인 선언''을 발표하기도 했다.[6][7]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생디칼리스트들은 전쟁과 각국의 참전에 반대하며 국제주의와 반군국주의 원칙을 고수했다.[8]

프랑스 CGT의 다수파와 이탈리아 USI의 상당수 소수파는 예외였다.[9] CGT 내 온건 개혁파가 우위를 점하면서, 역사가 달링턴(Darlington), 판데르린던(van der Linden), 소프(Thorpe) 등에 따르면 CGT는 전쟁 발발 후 더 이상 혁명적인 생디칼리스트 조직으로 보기 어려워졌다.[10][11] CGT는 파업 금지 서약을 받아들이고 중재를 통해 노동 분쟁을 해결하며 프랑스의 전쟁 노력에 적극 참여했다. 대부분의 조합원들은 저항 없이 징집되었고, 회원 수는 1913년 35만 명에서 1915년 4만 9천 명으로 급감했다. CGT 지도부는 프랑스의 대독일 전쟁이 민주주의와 공화주의 대 야만적 군국주의의 싸움이라고 주장하며 이를 정당화했다. 이탈리아는 전쟁 발발 초기 참전하지 않았으며, 참전은 국내에서 인기가 없었다. 이탈리아 사회당과 개혁주의적인 이탈리아 노동 총연맹은 참전에 반대했다. 이탈리아가 참전한 후에도 사회주의자들은 전쟁 노력을 지지하지 않았지만 적극적인 반대 활동도 삼갔다. 전쟁이 시작되자, 이탈리아의 가장 유명한 생디칼리스트 중 한 명인 알체스테 데 암브리스가 이끄는 USI 내 소수파는 이탈리아가 연합국 편에 참전할 것을 촉구했다. 이들 친전쟁 생디칼리스트들은 좌익 개입주의의 일환으로 참전을 민족 완성의 과정으로 보았고, 사회주의자들의 중립에 반대하며 전쟁을 지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한 프랑스 CGT의 선례를 따라 "독일의 숨 막힐 듯한 제국주의"의 위험을 경고했다.

1914년 8월판 (독일 생디칼리스트 신문) 전쟁 발발에 항의


USI의 친전쟁 분파는 조직원 1/3 미만의 지지를 얻어 1914년 9월 축출되었다. 아르만도 보르기가 이끄는 아나키스트 분파는 전쟁이 노동자 국제주의와 양립할 수 없으며 엘리트와 정부에게만 이익이 될 것이라며 단호히 반대했다. 이들의 반대는 정부 탄압에 직면했고, 보르기 등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구금되었다. 반면, CGT 내 반전 분파는 소수였으며 피에르 모나테, 알퐁스 메르하임 등이 이끌었다. 이들은 1915년 짐머발트 회의에서 유럽의 다른 반전 사회주의자들과 연대했지만, 전쟁에 대한 의미 있는 저항에는 어려움을 겪었다. 정부는 모나테를 포함한 활동가들을 군대에 징집했다. 다른 국가의 생디칼리스트 조직들은 거의 만장일치로 전쟁에 반대했다. 중립국 스페인의 CNT 지도자 호세 네그레는 "독일이 이기든 프랑스가 이기든 노동자에게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선언하며, 생디칼리스트는 제국주의 분쟁의 어느 편도 지지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아일랜드에서는 ITGWU와 노동 운동 전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친영국 정서가 확산되어 ITGWU 회원 절반 가량이 영국군에 입대했다. ITGWU는 1913년 더블린 직장 폐쇄로 이미 약화된 상태였다. 1914년 짐 라킨이 아일랜드를 떠난 후 제임스 코놀리가 지도자가 되었다. 코놀리는 약화된 조직력 때문에 자신의 준군사 조직인 아일랜드 시민군과 함께 아일랜드 공화주의 형제단과 연합하여 부활절 봉기를 일으켰다. 이는 영국 제국을 약화시키고 봉기가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기를 기대한 것이었으나, 영국군에 의해 신속히 진압되었고 코놀리는 처형되었다. 독일의 소규모 독일 자유 노동 조합 연합(FVdG)은 사회주의자들의 Burgfrieden|부르크프리덴de과 독일의 참전에 반대하며, 독일이 방어 전쟁을 벌이고 있다는 주장에 이의를 제기했다. 이들의 저널은 압수되었고 많은 회원들이 체포되었다. 미국은 1917년 봄까지 참전하지 않았다. 전쟁 초기 경제 호황으로 노동 시장이 긴축되면서 IWW는 회원 수가 두 배 이상 증가했다. 동시에 IWW는 전쟁을 격렬히 비난하고 반전 총파업을 고려했다. 미국이 참전하자 IWW는 반전 입장을 유지했지만, 정부 탄압을 우려하여 적극적인 반전 캠페인을 벌이지는 않고 경제 투쟁에 집중했다. IWW의 전쟁 반대는 제한적이어서, 징집 대상 회원의 95%가 등록했고 대부분 복무했다. 중립국인 네덜란드와 스웨덴의 생디칼리스트들은 사회주의자들이 국가 방위 강화를 위해 정부와 맺은 휴전을 비판했다. 네덜란드 NAS는 전쟁 지지를 이유로 창립자 중 한 명인 코르넬리센을 제명했다.

스페인, 포르투갈, 영국, 프랑스, 브라질, 아르헨티나, 이탈리아, 쿠바의 생디칼리스트들은 1915년 4월 스페인 엘 페롤에서 반전 회의를 가졌다. 계획 미흡과 스페인 당국의 금지에도 불구하고, 대표들은 전쟁 저항과 생디칼리스트 단체 간 국제 협력 확대를 논의했다. 아르헨티나, 브라질, 스페인, 포르투갈 대표들은 10월 리우데자네이루에서 다시 만나 남미 생디칼리스트 간 협력 강화를 결의했다. 생디칼리스트들의 실제적인 반전 투쟁은 제한적이었지만, 이념적, 문화적 차원에서 전쟁에 도전하려 했다. 그들은 전쟁의 참상을 지적하고 이를 미화하려는 시도를 비판했다. 독일 생디칼리스트들은 전쟁이 초래하는 죽음, 부상, 파괴, 불행을 강조했다. 독일, 스웨덴, 네덜란드, 스페인 생디칼리스트들은 바르셀로나의 Tierra y Libertad|티에라 이 리베르타드es 저널을 통해 민족주의를 "그로테스크한 사고방식"이라고 비난했다. 네덜란드 신문 De Arbeid|더 아르베이트nl는 민족주의가 "국가에 구현되어 있고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사이의 계급 대립을 부정하기 때문"이라고 비판했다. 독일과 스페인 생디칼리스트들은 민족 개념 자체를 사회적 구성물로 일축하며, 다언어 국가에서는 공통 언어 주장이 불가능하고 동일 민족 구성원이라도 가치나 경험을 공유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또한 전쟁이 문화 간 충돌이라거나 문명 수호로 정당화될 수 있다는 생각에도 반대했다. 다양한 문화는 상호 적대적이지 않으며, 국가는 소수 이익을 대변할 뿐 문화 전체를 구현하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만약 문화를 고급 문화로 이해한다 해도, 전쟁에서 죽어가는 노동자들은 자본주의적 조건 때문에 그 문화에 접근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마지막으로, 생디칼리스트들은 전쟁에 대한 종교적 정당화를 비난했다. 가톨릭과 개신교 성직자 모두의 전쟁 지지는 그들의 위선을 드러내고 기독교 원칙을 훼손한다고 보았다.

전쟁이 길어지면서 국내 생활 여건 악화와 전선 사상자 증가로 초기 애국심은 약화되었다. 물가 상승, 식량 부족이 심화되었고 전쟁이 단기간에 끝나지 않을 것이 분명해졌다. 독일에서는 1916년 여름 식량 부족으로 여러 도시에서 시위와 폭동이 발생했고, 반전 시위도 시작되었다. 1916-1917년경부터 유럽 전역에서 파업이 증가하고 군인들의 반란도 발생했다. 노동자들은 전쟁에 참여한 사회주의 지도자들을 불신하게 되었다. 국제주의 원칙을 고수한 생디칼리스트 조직들은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세력을 확장하여 전쟁 말기에는 더욱 성장했다.

전쟁에 대한 불만은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시작된 제1차 세계 대전 후 혁명으로 폭발했다. 1917년 2월, 페트로그라드에서 파업, 폭동, 군대 반란이 일어나 니콜라이 2세는 3월 2일 퇴위하고 러시아 임시 정부가 수립되었다. 즉시 아나키스트 단체들이 등장했고, 러시아 생디칼리스트들은 약 25,000부 발행 부수를 가진 Голос Труда|골로스 트루다ru (노동의 목소리) 저널과 아나코-생디칼리스트 선전 연맹을 중심으로 조직되었다. 대부분의 생디칼리스트들은 혁명 전에 서유럽이나 미국으로 망명했다가 여름에 돌아오기 시작했다. 러시아로 돌아온 가장 저명한 생디칼리스트들은 막심 라예프스키, 블라디미르 샤토프, 1913년 런던 생디칼리스트 회의 참가자였던 알렉산더 샤피로, 그리고 볼린으로 알려진 브세볼로드 미하일로비치 아이헨바움이었다. 그들은 젊은 현지인 그리고리 막시모프와 합류했다. 뉴욕 망명 시절 라예프스키, 샤토프, 볼린은 당시 러시아 노동자 연맹의 기관지였던 생디칼리스트 저널 Голос Труда|골로스 트루다ru에서 활동했다. 그들은 페트로그라드로 건너가 프랑스 운동과 총파업을 소개하여 노동자들에게 생디칼리스트 사상을 전파하려 했다. 페트로그라드 외에도 생디칼리즘은 비보르크, 모스크바, 그리고 남부의 도네츠 분지의 광부들과 예카테리노다르 및 노보로시스크의 시멘트 노동자 및 부두 노동자들 사이에서도 지지자를 얻었다. 아나키스트들은 4월에 귀국한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와 임시 정부 타도라는 공동 목표를 가졌다. 레닌은 역사적 궤적 이론을 포기하고 소비에트의 권력 장악, 국회 설립 거부, 국가 기구 폐지를 주장했는데, 이는 생디칼리스트들의 생각과 일치하는 부분이 많았다. 생디칼리스트들은 소비에트를 환영했지만, 2월 혁명 과정에서 등장한 공장 위원회와 노동자 평의회에 더 큰 기대를 걸었다. 이 위원회들은 임금 인상과 노동 시간 단축뿐 아니라 생산에 대한 노동자 통제를 위해 싸웠으며, 이는 생디칼리스트와 볼셰비키 모두 지지하는 바였다. 생디칼리스트들은 공장 위원회를 노조가 아닌 진정한 생디칼리스트 조직 형태로 보았다. 볼린은 멘셰비키가 지배하는 노조를 "노동과 자본 사이의 중재자"이자 "개량주의자"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조직력에서 앞선 볼셰비키는 위원회 내에서 더 많은 지지를 확보했고, 9월 페트로그라드와 모스크바 소비에트에서 다수파가 되면서 생디칼리스트들은 볼셰비키의 영향력 증가에 불안감을 느꼈다.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는 66명으로 구성된 페트로그라드 군사 혁명 위원회를 설립했는데, 여기에는 생디칼리스트 샤토프를 포함한 4명의 아나키스트가 포함되었다. 10월 25일, 이 위원회는 10월 혁명을 주도했다. 2월의 대규모 봉기와 비교했을 때, 이는 일종의 쿠데타였으며 사령관 레온 트로츠키에 따르면 3만 명 미만이 참여했다. 겨울 궁전 등을 장악한 후 소비에트 정부가 선포되었다. 아나키스트들은 임시 정부 전복을 환영했지만, 새로운 정부 수립, 특히 볼셰비키 당원만으로 구성된 중앙 인민 위원회 소비에트 창설에 우려하며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경계했다. 그들은 권력 분산을 요구했지만, 모든 기업에서 노동자 통제를 지지하는 레닌의 초기 노동 프로그램에는 동의했다. 그러나 노동자 통제 도입은 경제적 혼란을 야기했다. 레닌은 12월 경제를 국가 통제하에 두어 질서를 회복하려 했다. 1월에 열린 제1차 전러시아 노동조합 회의에서 생디칼리스트들은 6명의 대표만 있었던 반면, 볼셰비키는 273명이었다. 볼셰비키는 이제 생디칼리스트의 반대를 무시할 수 있는 위치에서 지방 위원회를 노조에 종속시켜 권한을 약화시키고, 노조를 다시 국가 기관으로 만들었다. 볼셰비키는 노동자 통제가 지역 수준의 공장 통제가 아니라 중앙 집중화된 경제 계획에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생디칼리스트들은 볼셰비키 정권을 국가 자본주의라고 격렬히 비판하며, 공장에 대한 국가 통제를 비난하고 정치와 경제에서의 권력 분산과 산업의 생디칼리제이션(syndicalization)을 주장했다. Голос Труда|골로스 트루다ru는 폐지되었고, 새로운 저널로 대체되었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Вольный Голос Труда|볼니 골로스 트루다ru (노동의 자유로운 목소리)가 그것이다. 1918년 8월에는 제1차 전러시아 아나코-생디칼리스트 회의가 열렸고, 11월에는 제2차 회의가 열려 전러시아 아나코-생디칼리스트 연맹이 설립되었다. 이 연맹이 생디칼리스트 활동을 조정하는 데 효과적이었다는 증거는 없다. 백군과의 러시아 내전은 아나키스트들을 분열시켰다. 생디칼리스트들은 볼셰비키 정책을 비난하면서도 전쟁에서는 볼셰비키 정권을 지지했기 때문에 심하게 비판받았다. 그들은 백군의 승리가 더 나쁠 것이며 세 번째 혁명이 볼셰비키를 전복하기 전에 백군을 패배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샤피로는 헌신적인 생디칼리스트이자 정권에 대한 온건한 비평가로 외무 인민 위원회에서 근무했다. 샤토프는 적군에서 싸웠고 결국 생디칼리즘을 포기했다. 많은 아나키스트들이 러시아 내전에서 사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디칼리스트들은 특히 체카에 의해 1919년부터 괴롭힘을 당하고 반복적으로 체포되었다. 그들의 요구는 볼셰비키 당 내의 노동자들과 반체제 인사들에게 어느 정도 영향력을 미쳤으며 볼셰비키 지도부는 그들을 자유주의 운동의 가장 위험한 부분으로 간주했다. 러시아 내전이 끝난 후, 아나키스트와 볼셰비키를 포함한 노동자와 선원들이 1921년 크론슈타트 반란으로 알려진 봉기를 일으켰는데, 크론슈타트는 1905년부터 급진주의의 요새였으며, 소수의 관료들의 통치로 보았던 것에 반대했다. 아나키스트들은 반란을 제3의 혁명의 시작으로 환영했다. 정부는 전국 아나키스트를 체포하는 것으로 대응했고, 여기에는 많은 생디칼리스트 지도자들도 포함되었다. 그로 인해 러시아 생디칼리스트 운동은 패배했다.

제1차 세계 대전에 반대했던 서방의 생디칼리스트들은 러시아 혁명에 격렬하게 반응했다. CGT의 친전쟁 생디칼리스트들은 대신 볼셰비키가 러시아를 전쟁에서 철수시켰기 때문에 혁명을 반역으로 간주했다. 이탈리아의 드 아브리스와 전쟁 지지 생디칼리스트들도 민족주의에 대한 도전으로 혼란을 비난했다. 그들은 여전히 진화하는 볼셰비키 이데올로기와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전통적인 아나키스트의 의심과 씨름하고 있었지만, 러시아에서 의회 정치에 반대하고 노동자 평의회의 영향을 받은 혁명이 일어났다고 보았다. 이 시점에서 그들은 또한 러시아의 현실에 대해 제한된 지식만 가지고 있었다. 독일 아나코-생디칼리스트 아우구스틴 조히는 그것을 "우리 모두를 사로잡은 위대한 열정. 동쪽에서, 우리가 믿었던 것처럼, 자유의 태양이 떠올랐다"고 칭송했다. 스페인 CNT는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볼셰비즘은 이름이지만, 그 사상은 모든 혁명의 사상, 즉 경제적 자유입니다. ... 볼셰비즘은 우리가 투쟁하는 새로운 삶이며, 자유, 조화, 정의이며, 우리가 세상에서 원하고 시행할 삶입니다." 보르기는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우리는 그들의 승리에 기뻐했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위험에 떨었습니다. ... 우리는 그들의 이름, 죽은 자, 살아있는 자, 영웅들을 상징과 제단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는 이탈리아인들에게 "러시아에서 한 것처럼 하라"고 촉구했다. 실제로 러시아에 의해 부분적으로 영감을 받은 혁명적 물결이 그 후 몇 년 동안 유럽을 휩쓸었다.

독일에서는 식량 부족에 대한 파업과 항의가 주로 여성들에 의해 격화되었고 1917년까지 정부에 대한 대중의 신뢰를 약화시켰다. 1918년 11월 빌헬름 2세의 퇴위는 킬 반란 이후 전국적으로 반란 운동을 촉발하여 1918–1919년 독일 혁명으로 이어졌다. 전쟁 전에 6,000명의 회원을 가지고 있었고 전쟁 중에 국가에 의해 거의 완전히 억압되었던 생디칼리스트 FVdG는 1918년 12월 베를린에서 회의를 열어 재결성했다. 그것은 다음 해의 혁명적 사건, 특히 루르 지역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그것은 자발적인 파업을 지지하고 직접 행동과 사보타주를 옹호했다. FVdG는 노동자, 특히 광부들이 그들의 투쟁을 이론화하는 능력과 직접 행동 방법에 대한 경험을 높이 평가하면서 급진주의로 높은 평가를 받기 시작했다. 1919년 하반기부터 전쟁을 지지하는 사회주의 정당과 노조에 실망한 노동자들과 전쟁 중에 급진화된 이전의 비노조 숙련 노동자들이 FVdG에 몰려들었다. 혁명은 또한 미국의 지원을 받아 일부 독일 공산당의 좌파와 연계된 IWW의 산업 조합주의를 독일에 도입했다. 1919년 12월, 독일 자유 노동자 연합 (생디칼리스트) (Freie Arbeiter-Union Deutschlands (Syndikalisten)|프라이에 아르바이터-우니온 도이칠란츠 (쥔디칼리스텐)de, FAUD)가 결성되어 FVdG의 전전 회원보다 18배 이상인 11만 명 이상의 노동자를 대표한다고 주장했다. 새로운 조직의 대부분은 FVdG에서 나왔지만, 영향력이 줄어들고 있는 산업 조합주의자들도 참여했다. 런던에서 몇 년을 보낸 후 최근 독일에 돌아온 아나키스트 루돌프 로커가 FAUD의 프로그램을 썼다.

계급 투쟁은 1919–1920년에 이탈리아에서 절정에 달했으며, 이는 Biennio Rosso|비엔니오 로소it 또는 적색 2년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 노동 급진주의 물결 전반에 걸쳐 생디칼리스트들은 아나키스트들과 함께 좌파에서 가장 일관되게 혁명적인 파벌을 형성했으며, 사회주의자들은 노동자들을 억제하고 불안을 막으려 했다. 이탈리아 생디칼리스트 운동은 전쟁 중에 분열되었는데, 이탈리아 개입을 지지하는 생디칼리스트들이 USI를 떠났기 때문이다. 알체스테 데 암브리스와 에드몬도 로소니가 이끄는 개입주의자들은 1918년에 Unione Italiana del Lavoro|우니오네 이탈리아나 델 라보로it (UIL)를 결성했다. UIL의 민족 생디칼리즘은 반자본주의 계급 투쟁보다는 노동에 대한 노동자들의 사랑, 자기 희생, 국가를 강조했다. USI와 UIL 모두 Biennio Rosso|비엔니오 로소it 동안 크게 성장했다. Biennio|비엔니오it의 첫 번째 공장 점거는 1919년 2월 달미네의 철강 공장에서 UIL에 의해 수행되었고, 군대가 이를 종식시키기 전에 이루어졌다. 7월에는 이탈리아 전역으로 파업 운동이 확산되어 7월 20일에는 총파업으로 절정에 달했다. USI는 이를 지지했고 노동자들의 열정으로 혁명이 가능하다고 확신했지만, UIL과 사회주의자들은 반대했다. 사회주의자들은 총파업을 억제하는 데 성공했고 하루 만에 붕괴되었다. 과격함에 당황한 정부는 극좌에 대한 탄압과 노동자 및 농민에 대한 양보로 대응했다.

포르투갈에서는 제1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면서 노동자들의 불안이 커졌다. 1917년에는 전쟁, 그 해에 수립

5. 3. 전후 혼란과 쇠퇴

제1차 세계 대전에 반대했던 서방의 생디칼리스트들은 1917년 러시아 혁명에 열광적인 반응을 보였다.[1][2] 그들은 러시아에서 의회 정치에 반대하고 노동자 평의회의 영향을 받은 혁명이 일어났다고 보았으며, 독일의 아나코-생디칼리스트 오귀스텐 수쉬는 "동쪽에서, 우리가 믿었던 것처럼, 자유의 태양이 떠올랐다"고 칭송했다.[1] 스페인의 전국노동연맹(CNT)은 "볼셰비즘은 이름이지만, 그 사상은 모든 혁명의 사상, 즉 경제적 자유"라고 선언했으며[1], 이탈리아의 아르만도 보르기는 "우리는 그들의 승리에 기뻐했습니다. [...] 우리는 그들의 이름 [...]을 상징과 제단으로 만들었습니다"라고 회상하며 이탈리아인들에게 "러시아에서 한 것처럼 하라"고 촉구했다.[1]

러시아 혁명에 부분적으로 영감을 받은 혁명적 물결이 종전 후 몇 년 동안 유럽을 휩쓸었다.

  • 독일: 1918년~1919년 독일 혁명 속에서 독일 자유 노동 조합 연합(FVdG)이 재결성되었고, 루르 지역 등에서 활발히 활동하며 급진주의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3][4] 1919년 12월, FVdG를 중심으로 Freie Arbeiter-Union Deutschlands (Syndikalisten)|프라이에 아르바이터-우니온 도이칠란츠 (쥔디칼리스텐)deu (FAUD)이 결성되어 11만 명 이상의 노동자를 대표한다고 주장했다.[4]
  • 이탈리아: 1919-1920년의 Biennio Rosso|비에니오 로소ita (적색 2년) 동안 생디칼리스트들은 아나키스트들과 함께 가장 일관되게 혁명적인 파벌을 형성했다.[5] 이탈리아 생디칼리스트 연합(USI)은 크게 성장했고[6], 1920년 공장 점거 운동이 절정에 달했다. 전쟁 중 USI에서 분리되어 민족 생디칼리즘을 표방한 Unione Italiana del Lavoro|우니오네 이탈리아나 델 라보로ita (UIL) 역시 성장했다.[8][6]
  • 포르투갈: 1919년 생디칼리스트 Confederação Geral do Trabalho|콘페데라상 제랄 두 트라발류por (CGT)가 국가 최초의 전국 노동 조합 연맹으로 결성되었다.[9]
  • 브라질: 생디칼리스트들은 1917-1919년 파업 운동과 노동 투쟁에서 주도적 역할을 했으나, 정부의 강력한 탄압으로 진압되었다.[10][11]
  • 아르헨티나: 아르헨티나 지역 노동자 연맹(FORA)은 분열되었고, 1919년 비극의 주간으로 알려진 유혈 탄압을 겪었음에도 파업은 계속 증가하고 FORA 조직은 성장했다.
  • 미국: 세계산업노동자연맹(IWW)은 전후 노동 투쟁 증가에도 불구하고, 이미 전쟁 중의 탄압과 제1차 적색 공포로 인해 거의 파괴되어 중요한 역할을 하지 못했다.
  • 캐나다: 1919년 캐나다 노동 반란 이후 원 빅 유니언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1920년대 초부터 대부분의 국가에서 전통적인 생디칼리슴 운동은 쇠퇴하기 시작했다. 생디칼리슴 조직들은 혁명적 원칙을 고수하며 주변화되거나, 새로운 조건에 적응하기 위해 원칙을 포기하거나, 해산 또는 비생디칼리슴 조직으로 합병되는 길을 걸었다.

생디칼리슴의 마지막 주요 활동은 1936년 스페인 혁명에서 나타났다. 주로 카탈루냐, 아라곤, 안달루시아, 레반테 지역에서 아나코생디칼리슴 원칙이 널리 시행되었고, 공화파의 주요 노동조합인 CNT의 주도로 스페인 경제의 상당 부분이 노동자 통제하에 놓였다. 그러나 스페인 내전에서 국가파가 승리하고 이들을 탄압하면서 혁명은 좌절되었다. 1930년대 말까지 실질적인 합법적 생디칼리슴 조직은 볼리비아, 칠레, 스웨덴, 우루과이 등 소수 국가에만 존재하게 되었다.

생디칼리슴 쇠퇴의 원인은 복합적이다.

  • 국가의 탄압: 러시아, 이탈리아, 포르투갈, 독일, 스페인 등 권위주의 정부의 직접적인 탄압과 미국의 IWW처럼 국가 폭력에 의해 운동이 크게 약화되었다.
  • 자본주의 체제로의 통합: 노동 계급의 생활 수준 향상과 소비 패턴 변화, 복지 국가의 등장과 사회 개혁, 참정권 확대는 의회주의적 개혁주의의 매력을 높였다. 또한 국가 정책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중앙집권적 노동조합과 전국 단위 정치가 노동자들에게 더 중요하게 인식되었다.
  • 생산 구조의 변화: 자본주의 생산 방식의 발전과 분업의 변화가 생디칼리슴의 전통적인 지지 기반을 약화시켰다는 분석도 있다. 일부 학자들은 생디칼리슴을 특정 기술 기반 노동자들의 과도기적 저항 형태로 보기도 한다.
  • 노동자 의식 변화: 일부에서는 노동자들이 혁명적 목표보다 즉각적인 물질적 이익을 우선시하는 실용주의적 태도를 보였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지만, 노동자들의 계급 의식 발전 가능성을 간과한 분석이라는 비판도 있다.
  • 공산주의의 부상: 에릭 홉스봄 등에 따르면, 러시아 혁명 이후 부상한 공산주의는 생디칼리슴 쇠퇴의 가장 중요한 요인이었다. 공산당은 생디칼리스트 간부들을 흡수했으며, 당시 급진적인 노동자들에게 볼셰비즘의 성공은 더욱 강력한 혁명적 대안으로 비춰졌다. 공산주의는 생디칼리슴이 가진 조직적 약점(혁명 조직과 대중 노조의 모순, 경제 투쟁 중심, 지역주의)을 극복할 수 있는 모델로 여겨졌고, 이는 생디칼리스트 진영 내 분열을 심화시키고 많은 활동가와 지지자들이 공산주의로 이동하는 결과를 낳았다.

6. 현대적 의의와 유산



스페인 내전에서 민족주의 세력이 승리하면서 생디칼리슴은 대중 운동으로서 종말을 고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직후, 독일에서 아나코생디칼리슴을 재점화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냉전 반공주의, 스탈린주의, 그리고 더 젊은 활동가들을 끌어들이는 데 실패하면서 좌절되었다. 생디칼리스트들은 1970년대까지 라틴 아메리카 노동 운동에서 어느 정도 영향력을 유지했다.

1960년대 후반의 시위 운동은 독일, 미국, 그리고 영국의 활동가들 사이에서 생디칼리슴에 대한 관심을 새롭게 불러일으켰다. 폴란드 인민 공화국에서 1980년대 동안, 비록 엄격한 의미의 생디칼리스트는 아니었지만, 노동 조합 연대( Solidarność|솔리다르노시치pl)는 많은 생디칼리스트의 아이디어와 관행을 부활시켜 수많은 반체제 노동자들을 끌어들였다. 유럽 아나코 생디칼리스트 노조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쇠퇴했다. 스웨덴의 SAC 생디칼리스테나는 몇 안 되는 활동적인 IWA(국제 노동자 연맹) 가맹 단체 중 하나로 남아 있었다.

IWA는 오늘날까지 존재하지만, 영향력은 매우 미미하다. 웨인 소프에 따르면, 기껏해야 "역사의 불꽃, 교리의 수호자"일 뿐이다. IWA의 회원 단체 중에는 1950년에 결성된 영국의 연대 연맹이 있는데, 원래 이름은 생디칼리스트 노동자 연맹이었다. 독일의 자유 노동자 연맹( Freie Arbeiterinnen- und Arbeiter-Union|프라이에 아르바이터리넨 운트 아르바이터-우니온de, FAU)은 1977년에 FAUD의 전통을 이어가기 위해 결성되었으며, 2011년 현재 회원 수는 350명에 불과하다. 2018년에 IWA를 탈퇴하여 국제 노동 연맹(ICL)을 결성했다. 스페인에는 CNT를 포함한 여러 생디칼리스트 연맹이 있으며, CNT는 2018년 현재 약 5만 명의 회원을 보유하고 있다. 내전에서 패배한 후 수만 명의 CNT 활동가들이 망명했는데, 대부분은 프랑스였다. 망명 생활에서 이 조직은 위축되어 1960년에는 주로 고령의 회원 5,000명만 남았다. 스페인의 민주주의 전환 동안 CNT는 1978년에 30만 명 이상의 최고 회원 수를 기록하며 부활했지만, 곧 약화되었다. 먼저 스칼라 사건 (나이트클럽 폭탄 테러) 연루 혐의로, 그 다음 분열로 약화되었다. CNT 역시 2018년까지 IWA의 회원이었으며, ICL을 결성하기 위해 FAU에 합류했다. 국가가 후원하는 노조 선거 참여를 지지하는 회원들은 탈퇴하여 결국 노동총동맹( Confederación General del Trabajo|콘페데라시온 헤네랄 델 트라바호es, CGT)으로 명명할 단체를 결성했다. 이러한 양보에도 불구하고, CGT는 여전히 자신을 아나코 생디칼리스트 조직으로 간주하며 2018년 현재 약 10만 명의 회원을 보유하고 있다.

달링턴에 따르면, 생디칼리슴은 여러 국가의 노동 및 정치 활동가들에게 널리 존경받는 유산을 남겼다. 예를 들어, IWW의 노래 "연대여 영원하라"는 미국 노동 운동의 정전의 일부가 되었다. 산업별 노조 회의에 의한 숙련되지 않은 노동자와 외국인 노동자의 가입을 포함한 1930년대 미국의 파업 물결은 IWW의 발자취를 따랐다. 플린트 점거 파업에서 전미 자동차 노조에 의해 유명해진 점거 파업 전술은 1906년 우블리(IWW의 구성원)에 의해 개척되었다.

프랑스 생디칼리슴에 대한 연구에서, 스턴스는 그것이 처참한 실패였다고 결론 내렸다. 그는 생디칼리스트 노동 지도자들의 급진주의가 프랑스 노동자들과 정부를 충격에 빠뜨렸고, 그로 인해 노동 운동 전체가 약화되었다고 주장한다. 생디칼리슴은 아직 현대 자본주의 산업에 완전히 통합되지 않은 노동자들에게 가장 인기가 있었지만, 대부분의 프랑스 노동자들은 이 시스템에 적응하고 받아들였기 때문에, 지배적인 상황에 심각하게 도전하거나, 심지어 정치인과 고용주들을 겁줄 수 없었다.

6. 1. 주요 쟁점과 비판

생디칼리슴은 경제를 운영하는 노동조합이 정치를 하는 정부와 독립적으로 존재하며, 정부에 의한 계획 경제 등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특징을 가진다.[1] 이는 노동조합이 정부와 때로는 협력하고 때로는 대립할 수 있는 독립적인 주체임을 의미한다.[1] 그러나 국가와 정치의 역할을 축소하거나 부정적으로 보는 이러한 관점은 복잡한 현대 사회를 운영하는 데 있어 현실적인 한계에 부딪힐 수 있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사회 전체의 다양한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공공 서비스를 제공하는 국가의 기능을 노동조합만으로 완전히 대체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또한, 생디칼리슴 내부에는 아나키즘(무정부주의)과 결합하여 더욱 급진적인 형태를 띠는 아나코생디칼리슴도 존재한다. 아나코생디칼리슴은 자본주의 체제뿐만 아니라 국가 기구 자체를 완전히 폐지하고, 그 자리를 노동조합이 대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1] 이러한 주장은 스페인 내전 시기 스페인 등지에서 강한 영향력을 보이기도 했으나[1], 국가의 완전한 부재가 가져올 혼란과 비효율성에 대한 우려를 낳기도 한다. 생디칼리슴이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사회 변혁을 추구하는 전략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지만, 다양한 사회 구성원과 세력의 참여를 어떻게 보장할 것인지에 대한 과제를 안고 있다.

7. 관련 인물

참조

[1] 서적 Corporatism and comparative politics M.E. Sharpe 1996
[2] 기타 2008
[3] 기타 2006
[4] 기타 2008
[5] 기타 2010
[6] 기타 2008
[7] 기타 1990
[8] 기타 1992
[9] 기타 1981
[10] 웹사이트 Principles of Syndicalism http://libcom.org/li[...]
[11] 웹사이트 Syndicalism Introduction http://libcom.org/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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