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애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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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존 애슐리는 미국의 배우, 가수, 프로듀서이다. 1950년대 후반부터 영화와 TV에서 활동했으며, 특히 비치 파티 영화와 TV 시리즈 《A 특공대》의 제작 및 내레이션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영화 《지옥의 묵시록》 제작에도 참여했으며, 1997년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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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애슐리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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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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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존 애칠리 |
출생일 | 1934년 12월 25일 |
사망일 | 1997년 10월 3일 |
사망 장소 | 미국 뉴욕 시 |
국적 | 미국 |
직업 | 배우 |
활동 기간 | 1957년–1997년 |
배우자 | 데보라 월리 (1964년 결혼, 1966년 이혼) 낸시 무어 (1966년 결혼, 연도 미상) 얀 애슐리 (결혼 연도 미상) |
자녀 | 2명 |
모교 | 오클라호마 주립 대학교 |
2. 초기 생애
애슐리는 생부모를 알지 못한 채 의사인 로저 애츨리와 아내 루실 부부에게 입양되어 오클라호마주 털사에서 자랐다. 그에게는 여동생 캐서린이 있었다.[1][2]
대학에 재학 중이던 애슐리는 캘리포니아에서 휴가를 보내던 중 우연한 기회에 연예계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는 같은 시그마 카이 동문이자 딕 파월과 존 웨인의 홍보 담당자였던 지인을 방문했다. 이 지인을 통해 영화 ''정복자''(1956) 촬영장에서 존 웨인을 만났고, 웨인은 애슐리의 외모에 깊은 인상을 받아 윌리엄 캐슬 감독과의 면접을 주선해주었다.
털사에 있는 윌 로저스 고등학교 재학 시절 레슬링 챔피언이었으며, 졸업 후 레슬링 장학금을 받고 스틸워터의 오클라호마 주립 대학교에 진학하여 경제학 학사 학위를 취득했다.[3]
3. 배우 경력
당시 캐슬 감독은 TV 앤솔로지 시리즈 ''애나폴리스의 남자들''을 제작 중이었고, 레슬링 경험이 있는 배우를 찾고 있었다. 애슐리의 레슬링 경력은 배역을 얻는 데 도움이 되었고, 그는 이 시리즈의 두 편의 에피소드에 출연하며 에이전트를 얻게 되었다. 이는 그의 본격적인 배우 경력의 시작점이 되었다.[4][5]
3. 1. 초기 활동 (1950년대 후반)
애슐리는 여자친구를 따라 아메리칸 인터내셔널 픽처스(AIP)에서 에드워드 L. 칸 감독의 영화 드래그스트립 걸(1957) 오디션에 갔다가 우연히 영화계에 발을 들였다. 그는 당시 상황을 "오후 6시에 데이트 약속이 있었는데, 그 전에 여자친구가 영화 배역 오디션을 봐야 했다. AIP 대기실에 앉아 있는데 어떤 남자가 나와서 '여기 젊은이는 오디션 안 보나?'라고 물었다. 전형적인 옛날 할리우드 이야기처럼, 나는 배역을 얻었고 여자친구는 얻지 못했다"고 회상했다. 오디션에서 엘비스 프레슬리 모창을 선보인 그는 결국 악당 역할을 맡게 되었다. AIP는 애슐리와 4편의 영화에 출연하는 비독점 계약을 맺었다.
`드래그스트립 걸`은 저예산 영화였지만 흥행에 성공했다. 특히 AIP의 주요 인물 중 한 명인 제임스 H. 니콜슨의 딸들이 애슐리를 좋아했고, 니콜슨은 애슐리가 큰 스타가 되기를 기대했다. 애슐리는 나는 십대 늑대인간이었다(1957)의 주연 오디션에는 떨어졌지만, AIP의 다른 영화들에 계속 출연할 기회를 얻었다.
그의 두 번째 AIP 영화는 오토바이 갱(1957)으로, 역시 칸 감독이 연출했으며 `드래그스트립 걸`과 비슷한 내용이었다. 그러나 영화 제작은 애슐리가 징병되어 기초 군사 훈련을 마치고 휴가를 나올 때까지 지연되었다.
애슐리는 미국 육군에 입대하여 프레시디오 기지에서 6개월간 복무했다. AIP는 그가 칸 감독의 전쟁 영화 자살 특공대(1958)에 출연할 수 있도록 조기 제대를 주선했다.
AIP 영화 외에도 애슐리는 파라마운트 픽처스의 제로 아워!(1957)에서 가수로 작은 역할을 맡았고, 프랑켄슈타인의 딸(1958)에서는 주연을 맡았다. 또한 텔레비전 시리즈 제퍼슨 드럼(1958)의 한 에피소드("Arrival")에 게스트로 출연하기도 했다.
3. 2. 음악 활동 (1950년대 후반 - 1960년대 초)
애슐리는 연기 활동 외에 가수로서도 활동했다. 그의 매니저는 에디 코크란의 매니저이기도 했던 제리 케이프하트였다. 1957년 7월, 애슐리의 첫 싱글이 Intro Records에서 발매되었는데, 이는 영화 ''드래그스트립 걸''의 개봉 시기에 맞춰 이루어졌다.[11] 이 싱글에는 스탠더드 곡 "Bermuda"와 애슐리가 영화 ''제로 아워!''에서 직접 부른 "Let Yourself Go Go Go"가 수록되었다.[11]
이후 애슐리는 여러 음반을 발표했다. 대표적인 싱글로는 "Seriously in Love"(1958), "Let the Good Times Roll"(1958), "Born to Rock"(1958), "Little Lou"(1961) 등이 있다.[4][12][13] 1959년에는 유명 작곡가 콤비인 버트 바카라와 할 데이비드의 초기 협업 작품인 "The Net"과 "The Hangman"을 양면 싱글로 녹음하기도 했다.[14]
애슐리는 때때로 콘서트를 열었으며, 한때 그의 밴드에는 훗날 유명 가수가 되는 글렌 캠벨이 기타리스트로 참여하기도 했다.[15] 애슐리는 Dot Records와도 작업했지만, 레이블 사장 랜디 우드가 자신에게 맞지 않는 부드러운 스타일의 음악을 원했다고 회고했다. 그는 "랜디 우드는 훌륭했지만... 그가 나에게 부르게 하려는 음악은 내가 정말 잘 부른다고 느끼지 못하는 종류의 곡이었다. 그는 매우 깔끔한 이미지를 가진 사람이었고, 꼭 하드 로커를 원하지는 않았다"고 말했다.[16]
영화에서도 그의 음악적 재능이 활용되었다. 잭 니콜슨의 요청으로 AIP 영화 ''How to Make a Monster''(1958)에 가수로 카메오 출연했다.[17] 애슐리는 이 역할이 당시 자신이 주로 맡던 불량배 역할과는 상반된 캐스팅이었다고 언급했다.[18] 또한, AIP는 애슐리를 주연으로 내세운 영화 ''Hot Rod Gang''(1958, 다른 제목 ''Fury Unleashed'')을 제작했다. 이 영화에서 애슐리는 처음으로 호감 가는 주연 역할을 맡았으며, 진 빈센트와 함께 여러 곡을 불렀다.
3. 3. TV 활동 (1950년대 후반 - 1990년대 후반)
AIP와의 계약이 끝난 후, 존 애슐리는 텔레비전 분야에서 꾸준히 활동했다. 그는 렉스 앨런이 주연을 맡고 윌리엄 위트니가 연출한 신디케이트 서부극 텔레비전 시리즈 ''프론티어 닥터''의 "엘크턴 호수 갈등" 에피소드에 출연했다. 또한 헨리 폰다가 주연한 ''더 데퓨티''("와일드 윈드" 에피소드), ''더 밀리어네어''("수잔 존슨 이야기" 에피소드, 가수 지망생 역할), 그리고 ''웨건 트레인''("아모스 기벤 이야기" 에피소드)에 게스트로 출연했다. 애슐리는 자신이 서부극에 자주 캐스팅된 이유에 대해 "저는 오클라호마 출신이고, 말을 탈 수 있으며, 처음 이 곳에 왔을 때 약간의 억양이 있었습니다. 항상 젊은 빌리 더 키드 타입의 건슬링어처럼 보였죠." 라고 설명했다.[21]
잠시 영화계로 돌아가 고등학교 폭군 역을 맡은 ''하이 스쿨 시저''(1960)에 출연한 후, 그는 다시 TV로 돌아와 ''데스 밸리 데이즈''("홀드업 방지 판매" 에피소드)에 게스트로 출연했다. 애슐리는 나중에 자신의 경력 초기에는 제작에 전혀 관심이 없었으며 "그냥 재밌게 지내고 있었다"고 회상했다.[22]
1961년부터 1962년까지 애슐리는 브라이언 켈리와 함께 ABC의 모험 시리즈 ''스트레이트어웨이''에 공동 주연으로 출연했다. 이 시리즈는 자동차 정비소를 배경으로 드래그 레이싱을 자주 다루었으며, 총 26개의 에피소드로 방영되었다. 애슐리는 이 시리즈에서 가끔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스트레이트어웨이'' 출연 중이던 1961년, 그는 신디케이트 서부 앤솔로지 시리즈 ''데스 밸리 데이즈''의 "강도 방지 금고" 에피소드에 다시 출연했다. 이 에피소드에서 그는 보안관이 되어 연인 케이티 다운스(수잔 크레인 분)와 결혼하고 싶어하는 젊은 로데오 공연자 샌디 역을 맡았으나, 상인 거스 래머슨(레지스 투미 분)의 건물 금고에서 돈을 훔쳤다는 누명을 쓴다. 케이티의 도움으로 샌디는 감옥에서 탈출하여 진짜 도둑을 찾아낸다.
이후 애슐리는 ''웨건 트레인''("아벨 웨더리 이야기" 에피소드), ''로하이드''("에덴 동산에서의 사건" 에피소드), ''비벌리 힐빌리즈''("엘리가 비서가 되다" 에피소드), ''페티코트 정션''("셰이디 레스트로 가는 지선" 에피소드) 등 다수의 인기 TV 시리즈에 게스트로 출연하며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다.[23] 또한 그는 비평가들의 호평을 받은 영화 ''허드''(1963)에도 출연했으나, 그의 출연 장면 일부는 최종 편집 과정에서 삭제되었다.
1980년대에 들어서 애슐리는 배우 로버트 콘래드의 제작사에서 프로듀서로 일하기 시작했다. 그는 콘래드가 주연한 TV 영화 ''올해의 코치''(1980)와 ''윌: G. 고든 리디''(1982)를 제작했다.
이후 애슐리는 스티븐 J. 캐넬 프로덕션에 합류하여 1982년 TV 시리즈 ''더 퀘스트'' 제작에 참여했다. 프랑스에서 에피소드를 촬영하던 중 심장마비를 겪었으나 회복했다. ''더 퀘스트''가 저조한 시청률로 종영되자, 캐넬은 애슐리에게 ''A 특공대''의 제작을 제안했다. 애슐리는 프랭크 루포와 함께 총 98개의 에피소드로 방영된 이 히트 시리즈의 슈퍼바이징 프로듀서(후반 시즌에는 총괄 프로듀서)로 활동했다. 또한 그는 쇼의 첫 네 시즌 동안 오프닝 타이틀 시퀀스의 내레이션을 담당했으며, 첫 시즌에는 카메오로 출연하기도 했다.
프랭크 루포의 설득으로, 애슐리는 더크 베네딕트가 제안한 가짜 공포 영화 제작 이야기를 다룬 두 번째 2시간 스페셜 에피소드에 영화 후원자 역으로 카메오 출연했다. 베네딕트가 애슐리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있는 이 장면의 일부는 시리즈 오프닝 크레딧 시퀀스에 잠시 등장하기도 했다. 애슐리는 당시를 회상하며 "히트를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미스터 T와 같은 인물을 만나 그와 쇼가 그런 현상이 되는 것을 보는 것은 인생에 한 번 올까 말까 한 경험"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1985년에 "이 시리즈에서 제가 좋아하는 것 중 하나는 오디션을 보러 오는 젊은 배우들과 함께 일하는 것입니다... 저도 그 경험을 해봤기 때문에 그게 어떤지 압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애슐리는 프랭크 루포와 함께 28개의 에피소드로 방영된 드라마 ''늑대인간''(1987)도 제작했다. 그는 또한 짧게 방영된 시리즈로 이어진 미니시리즈 ''Something Is Out There''(1988)를 제작했다.
그는 로버트 콘래드와 다시 협력하여 TV 영화 ''경찰 이야기: 검투사 학교''(1988)를 제작했으며, 이후 TV 시리즈 ''하드볼''(1989), TV 영화 ''다크 어벤저''(1990), TV 시리즈 ''레이븐 (1992년 드라마)''(1992), TV 영화 ''지구 속 여행''(1993) 등의 제작에 참여했다.
애슐리는 인기 시리즈 ''텍사스 레인저 워커''의 여러 시즌 제작에도 참여했다. 그는 캐넬 프로덕션을 위해 또 다른 TV 시리즈 ''마커''(1995)와 브라이언 보즈워스가 주연한 시리즈 ''무법자''(1997)를 제작했으나, ''무법자''는 한 에피소드 방영 후 취소되었다.
말년에 그는 친구 프레드 올렌 레이가 감독한 영화 ''인비저블 맘''(1996)에 작은 역할로 잠시 배우로 복귀했다. 그의 마지막 프로듀서 크레딧은 영화 ''스카 시티''(1998)였다.
3. 4. 비치 파티 영화 (1960년대 중반)
애슐리는 청소년 비행 영화에서 비치 파티 영화로 전환한 몇 안 되는 AIP 주연 배우 중 한 명이었다. 1963년, 스튜디오는 그를 다시 불러 영화 ''비치 파티''에서 프랭키 아발론의 가장 친한 친구 '켄' 역을 맡겼다. 애슐리는 나중에 이 시기에 대해 "상처가 아물었다"고 회고했다. 영화 평론가 필링크는 애슐리 역할의 주요 기능이 프랭키 아발론 캐릭터를 "보호"하는 것이었다고 분석하기도 했다.[24] ''비치 파티''가 성공하자 AIP는 애슐리와 두 편의 영화 계약을 추가로 맺었다.[25]
그는 속편인 ''머슬 비치 파티''(1964)와 ''비키니 비치''(1964)에 '조니' 역으로 출연했는데, 이는 ''비치 파티''의 '켄'과 본질적으로 같은 역할이었다. 1964년에는 TV 시리즈 ''닥터 킬데어''의 "야수의 밤" 에피소드에 게스트로 출연하기도 했다.
애슐리는 ''파자마 파티''(1964)에는 출연하지 않았지만, ''서전트 데드헤드''(1965)에서는 다시 아발론의 가장 친한 친구 역으로 등장했다. ''비치 블랭킷 빙고''(1965)에서는 아발론의 라이벌 역을 맡아, 당시 아내였던 데보라 월리와 함께 출연했다. (두 사람은 1962년에 결혼했다.)
애슐리는 당시를 회상하며 아발론과 나눈 대화를 전했다. "우리는 물 카메라를 등지고 걷고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프랭키가 '이봐, 우리 믿을 수 있겠어? 30살 먹은 두 남자가 바디 메이크업과 빨간색 트렁크를 입고 여기 있다니'라고 말했어."[26] 애슐리는 ''비치 블랭킷 빙고''가 자신이 맡은 역할 중 유일하게 비중이 있었던 비치 영화였다고 평가했다. "그것이 정말 캐릭터가 있었던 유일한 영화였다"며, "그 외에는 기본적으로 '프랭키의 친구가 서 있다 - 빨간 수영복을 입은 남자'였다"고 덧붙였다.[27]
이 시기 애슐리는 다른 영화에도 출연했다. 아젤리아 필름스가 제작하고 래리 뷰캐넌이 AIP의 ''Invasion of the Saucer Men''(1957)을 리메이크한 저예산 영화 ''더 아이 크리처스''(1965)에서 주연을 맡았다. 애슐리는 자신의 출연료가 이 영화 예산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또한 얼라이드 아티스트에서 제작한 ''영 딜린저''(1965)에서는 닉 애덤스, 로버트 콘래드와 함께 베이비 페이스 넬슨을 연기했다. 리처드 바칼리안 각본, 콘래드 공동 주연의 스릴러 ''쓰리 투 메이크 제로''와 제임스 스테이시 각본, 프랭크 파리 연출로 애슐리와 월리가 출연 예정이었던 ''런어웨이 스키스''는 발표되었으나 제작되지는 못했다.
애슐리가 마지막으로 출연한 비치 파티 영화는 ''하우 투 스터프 어 와일드 비키니''(1965)였다. 그는 다시 '조니' 역을 맡았고, 영화 사운드트랙에 참여해 몇 곡을 불렀다. 비치 파티 시리즈의 마지막 영화인 ''보이지 않는 비키니의 유령''(1966)에는 출연하지 않았다. 원래 출연이 예정되어 있었고 전 부인 월리는 출연했지만, 애슐리는 최종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다. 그는 이 외에도 로버트 콘래드가 주연한 TV 시리즈 ''더 와일드 와일드 웨스트''와 시트콤 ''더 베벌리 힐빌리즈'' 등에 게스트로 출연하며 활동을 이어갔다.
3. 5. 필리핀 활동 (1960년대 후반 - 1970년대)
1968년, 애슐리는 필리핀에서 영화를 제작하자는 제안을 받았다. 당시 첫 번째 부인 왈리와의 결혼 생활이 끝나가고 있었기에, 그는 미국을 떠나고 싶어 했고 이 제안을 수락했다.[28] 그는 제작자 에디 로메로를 위해 로메로 감독의 "피의 섬" 호러 영화 시리즈 중 두 번째 작품인 《피의 신부》(1968)를 제작했다. 또한 애슐리는 로메로가 감독하고 제임스 시게타가 주연을 맡은 전쟁 영화 《개방된 도시, 마닐라》(1968)에 조연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이후 잠시 미국 오클라호마로 돌아가 영화관을 운영하던 애슐리는, 배급사 친구로부터 《피의 신부》가 상업적으로 성공했다는 소식과 함께 필리핀에서 다시 영화를 제작해보라는 제안을 받았다. 애슐리는 이를 받아들여 1969년, 로메로가 공동 감독한 《피의 섬의 광적인 의사》에 출연하기 위해 필리핀으로 돌아갔다. 이 영화는 흥행에 성공했고,[29] 이를 계기로 애슐리는 필리핀 및 로메로와 오랜 협력 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는 《광적인 의사》의 속편인 《피의 야수》(1970)를 제작하기 위해 다시 필리핀으로 갔으며, 이 영화 역시 로메로가 감독하고 헤미스피어 픽처스가 제작했다.
애슐리는 필리핀에서의 활동에 대해 "1년에 석 달 동안 필리핀에서 사는 것은 나에게 해방감을 주었다. 거기에 콘도를 샀고, 마치 휴가 같았다"라고 회상했다. 로메로 감독은 애슐리를 "매우 쉽게 어울리고, 매우 사교적인 사람"이라고 기억했다.[30]
4. 프로듀서 경력
존 애슐리는 배우 활동 외에도 영화 및 텔레비전 프로듀서로서 활발히 활동하며 경력을 쌓았다. 그의 프로듀서 경력은 초기에 필리핀에서 저예산 영화를 제작한 시기와 이후 미국으로 돌아와 TV 시리즈 제작에 집중한 시기로 나눌 수 있다.
4. 1. Four Associates
에디 로메로가 《비스트 오브 블러드》를 마친 후 애슐리에게 공동으로 영화 제작 자금을 지원하자고 제안했다. 이를 계기로 두 사람은 자체 제작사인 Four Associates Ltd를 설립했다.[31] 이 회사의 첫 번째 작품은 《비스트 오브 더 옐로우 나이트(1971)》였다.[31] 이 영화의 추가 자금은 로저 코먼과 그의 회사 뉴 월드 픽처스로부터 나왔다. 코먼은 애슐리에게 푸에르토리코에서 제작하려던 《빅 돌 하우스(1971)》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애슐리는 필리핀에서 제작할 것을 제안했고 코먼은 이를 받아들였다. 애슐리는 이 영화의 제작 이사로 참여하며 상위 비용(above-the-line)을 관리했다. 《빅 돌 하우스》는 큰 성공을 거두며 여성 수감 영화 장르의 유행을 이끌었다.Four Associates는 이후 여러 영화를 제작했다. 애슐리는 로메로, 코먼과 함께 《가장 위험한 게임》을 리메이크한 《더 우먼 헌트(1972)》에 출연하고 제작했다. 또한 로메로와 함께 디멘션 픽처스를 위해 《닥터 모로의 섬》을 각색한 《트와일라잇 피플(1972)》을 만들었는데, 애슐리는 이 영화를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작품 중 하나로 꼽았다.[32]
애슐리와 로메로는 AIP를 위해 《디파이언트 원스》를 각색한 《블랙 마마 화이트 마마(1973)》를 제작했다. 애슐리가 출연하지는 않았지만, 이 영화는 그가 제작자로서 가장 큰 재정적 성공을 거둔 작품이 되었다.[33] 이어서 로메로가 감독하고 패트릭 웨인이 주연한 《시에라 마드레의 보물》의 변형인 《비욘드 아틀란티스(1973)》에 출연하고 제작했다. 이 영화는 가족 관객을 겨냥하여 폭력성을 줄였으나 흥행에는 실패했다. 애슐리는 이 영화가 자신이 자금을 댄 작품 중 유일하게 성공하지 못했다고 언급했다.
그는 《블랙 맘바(1974)》를 제작하고 출연했지만, 이 영화는 그가 사망한 후인 1997년에야 개봉되었다.[34] 또한 AIP를 위해 《세비지 시스터스(1974)》(다른 제목: 《에보니 아이보리 앤 제이드》)에도 출연하고 제작했는데, 《로스앤젤레스 타임스》는 그가 이 영화에서 "놀라운 재능"을 보여주었다고 평가했다.[35]
1974년 4월, 애슐리는 필리핀 영화 산업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필리핀 영화 예술 과학 아카데미로부터 특별상을 받았다. 그는 필리핀에서 총 11편의 영화를 제작했다.[36] 이후 로메로가 감독하고 로버트 콘래드가 주연한 《서든 데스(1977)》를 제작하고 조연으로 출연했다.
4. 2. 《지옥의 묵시록》
1975년부터 1976년까지 애슐리는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영화 《지옥의 묵시록》(1979년 개봉) 제작에 참여하여 필리핀 현지 연락 담당자 역할을 수행했다. 이 영화는 베트남 전쟁을 배경으로 한다. 애슐리의 참여는 제작자 프레드 루스의 요청으로 이루어졌으며, 그는 "프레드 루스가 목록을 만들었습니다. '다음 사항을 제공할 수 있습니까?' 그는 새로운 회사를 설립하는 세금 문제를 처리할 필요가 없도록 내 회사를 대여 형식으로 사용했습니다. 우리가 제공할 수 있었던 것 중 하나는 베트남에서 사용되었던 종류인 휴이 헬리콥터를 약 6대였습니다."라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6]애슐리는 코폴라 및 루스와 함께 1년 동안 이 영화 작업에 참여했으나, 오클라호마의 극장 사업 관리 문제로 인해 프로젝트에서 하차했다. 그는 "프랜시스에게 1년은 극장 사업에서 너무 오래 떨어져 있는 것이라고 말했고, 오클라호마로 돌아갔습니다."라고 밝혔다.[6] 이후 1970년대 후반 필리핀이 영화 촬영지로서 매력을 잃어가면서, 애슐리는 더 이상 필리핀에서 영화를 제작하지 않았다.
4. 3. TV 프로듀서
1970년대 후반, 애슐리는 오클라호마에서 약 40개의 스크린을 소유한 극장 사업을 운영했으나, 대형 극장 체인과의 경쟁으로 인해 이를 매각했다. 이후 약 1년간 휴식을 취하며 가족과 시간을 보낸 뒤, TV 프로듀서로서의 경력을 쌓기 위해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했다.[6]애슐리는 배우 로버트 콘래드의 제작사에서 프로듀서로 일하게 되었다. 그는 콘래드가 주연을 맡은 TV 영화 올해의 코치(1980)와 윌: G. 고든 리디(1982)를 제작했다. 이후 유명 프로듀서 스티븐 J. 캐널에게 발탁되어 1982년 TV 시리즈 더 퀘스트 제작에 참여했다. 프랑스에서 에피소드를 촬영하던 중, 애슐리는 다이어트 약 부작용으로 심장마비를 겪기도 했으나 회복했다.
''더 퀘스트''가 낮은 시청률로 종영된 후, 캐널은 애슐리에게 A 특공대의 제작을 제안했다. 애슐리는 프랭크 루포와 함께 이 시리즈의 슈퍼바이징 프로듀서(나중에는 총괄 프로듀서)로 참여했으며, 총 98개의 에피소드를 제작하는 데 기여했다. 그는 또한 시리즈 첫 4시즌 동안 오프닝 타이틀 시퀀스의 내레이션을 담당했고, 첫 시즌에는 카메오로 출연하기도 했다. ''A 특공대''는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애슐리는 훗날 "이와 같은 성공은 마치 번개를 잡는 것과 같아서 인생에 한 번밖에 오지 않는 경험"이라고 회상하며 미스터 T와 같은 스타의 탄생을 언급했다. 그는 또한 시리즈의 두 번째 2시간짜리 스페셜 에피소드에서 더크 베네딕트의 제안으로 카메오 출연을 했는데, 이 장면의 일부는 시리즈 오프닝 크레딧에도 잠시 등장한다.
''A 특공대''의 성공 이후, 애슐리는 프랭크 루포가 제작한 드라마 늑대인간(1987)을 제작했으며, 이 시리즈는 28개의 에피소드로 방영되었다. 그는 또한 미니시리즈로 시작해 짧게 방영된 시리즈로 이어진 Something Is Out There(1988)를 제작했다.
이후에도 애슐리는 여러 TV 프로젝트 제작에 참여했다. 로버트 콘래드와 다시 협력하여 ''경찰 이야기: 검투사 학교''(1988)를 제작했으며, ''하드볼''(1989), TV 영화 ''다크 어벤저''(1990), ''더 레이븐''(1992), TV 영화 ''지구 속 여행''(1993) 등의 제작에도 참여했다.
1990년대에는 인기 시리즈 텍사스 레인저의 여러 시즌 제작에 참여했으며, 스티븐 J. 캐널을 위해 TV 시리즈 ''마커''(1995)와 브라이언 보스워스 주연의 ''무법자''(1997)를 제작했다. 하지만 ''무법자''는 단 한 편의 에피소드만 방영되고 취소되었다.
프로듀서로 활동하는 중에도 그는 친구인 프레드 올렌 레이 감독의 영화 ''인비저블 맘''(1996)에 작은 역할로 출연하며 잠시 배우로 복귀하기도 했다. 이는 1987년 영화 ''백 투 더 비치''의 출연 제의를 거절했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그의 마지막 프로듀서 작품은 영화 ''스카 시티''(1998)였다.
5. 개인사
애슐리는 1962년 배우 데보라 왈리와 결혼했다.[37] 그들은 1966년 이혼하기 전 아들 앤서니 애슐리를 낳았다.[38]
6. 사망
1997년 10월 3일, 애슐리는 62세의 나이로 뉴욕에서 심장 마비로 사망했다. 그는 영화 스카 시티 촬영장을 막 떠난 후였으며, 스튜디오 밖 주차장에 있던 자신의 차 안에서 사망한 채 발견되었다.[39]
7. 작품 목록
존 애슐리는 영화 배우, 영화 제작자, 텔레비전 프로듀서, 그리고 가수로서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며 많은 작품을 남겼다. 1950년대 후반 아메리칸 인터내셔널 픽처스(AIP)의 영화를 통해 배우로 데뷔했으며, 특히 해변 파티 영화 시리즈 등에 출연하며 인기를 얻었다.
1960년대 후반부터는 활동 무대를 필리핀으로 옮겨 여러 편의 저예산 B급 영화 제작에 참여하며 제작자로서의 경력을 쌓았다. 그는 에디 로메로 감독 등과 협력하여 다수의 영화를 제작했으며, 이 시기 필리핀 영화 산업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기도 했다.
1970년대 후반 미국으로 돌아온 후에는 텔레비전 프로그램 제작에 집중했다. 특히 스티븐 J. 캐넬과 협력하여 A 특공대, 늑대인간, 텍사스 레인저 등 다수의 인기 TV 시리즈를 제작하며 성공적인 TV 프로듀서로 자리매김했다.
배우 활동 초기에는 음반을 발매하며 가수로서 활동하기도 했다. 그의 상세한 작품 목록은 아래 영화, TV, 음반 목록 섹션에서 확인할 수 있다.
7. 1. 영화
애슐리는 여자친구를 따라 아메리칸 인터내셔널 픽처스(AIP)의 영화 오디션에 동행했다가 우연히 영화계에 입문했다. 그는 에드워드 L. 칸 감독의 영화 《드래그스트립 걸》(1957) 오디션에서 엘비스 프레슬리 모창을 선보여 역할을 따냈고, AIP와 계약을 맺었다. 그는 당시 상황을 "옛날 할리우드 이야기였죠. 저는 영화 배역을 얻었고, 그녀는 그러지 못했습니다."라고 회상했다.《드래그스트립 걸》의 성공 이후, 애슐리는 AIP의 주요 인물 중 한 명인 제임스 H. 니콜슨의 지원을 받으며 여러 AIP 영화에 출연했다. 중간에 징병되어 미국 육군에서 복무하기도 했으나, AIP의 도움으로 영화 《자살 특공대》(1958) 출연을 위해 조기 제대했다. AIP 외에도 파라마운트 픽처스 영화에 출연하고, 《프랑켄슈타인의 딸》(1958)에서는 주연을 맡는 등 활동을 이어갔다.
AIP 계약 종료 후에는 주로 텔레비전에서 활동했으며, 특히 서부극에 자주 출연했다. 그는 오클라호마 출신 배경과 외모 때문에 서부극 캐스팅이 많았다고 설명했다.[21] 1960년대에는 다시 영화로 복귀하여 《하이 스쿨 시저》(1960)와 해변 파티 영화 시리즈 등에 출연하며 배우 경력을 쌓았다.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1968)에 잠시 출연하기도 했으나, 일부 버전에서는 해당 장면이 편집되었다.
1968년, 애슐리는 필리핀에서 영화를 제작하자는 제안을 받으면서 경력의 전환점을 맞았다.[28] 그는 필리핀으로 건너가 영화 제작에 참여하기 시작했으며, 이는 배우 활동과 병행하여 제작자로서의 길을 걷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그는 제작 자체보다는 즐기는 데 더 중점을 두었다고 회상했다.[22] 이후 필리핀에서의 활동은 그의 후기 경력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게 된다.
7. 1. 1. 출연
wikitext- 드래그스트립 걸 (1957년)
- 오토바이 갱 (1957년)
- 제로 아워! (1957년) - 가수 역
- 자살 특공대 (1958년)
- 괴물을 만드는 법 (1958년)
- 핫 로드 갱 (1958년)
- 프랑켄슈타인의 딸 (1958년) - 주연
- 제퍼슨 드럼 (1958년) - TV 시리즈, "Arrival" 에피소드
- 허드 (1963년)
- 해변 파티 (1963년) - 켄 역
- 머슬 비치 파티 (1964년) - 조니 역
- 비키니 비치 (1964년) - 조니 역
- 닥터 킬데어 (1964년) - TV 시리즈, "야수의 밤" 에피소드
- 비치 블랭킷 빙고 (1965년) - 아발론의 라이벌 역
- 영 딜린저 (1965년) - 베이비 페이스 넬슨 역
- 하우 투 스터프 어 와일드 비키니 (1965년) - 조니 역
- 사전트 데드 헤드 (1965년) - 아발론의 친구 역
- 더 아이 크리처스 (1965년) - 주연
- 더 와일드 와일드 웨스트 (1965년) - TV 시리즈, "물의 죽음의 밤" 에피소드
- 더 베벌리 힐빌리즈 (1965년) - TV 시리즈, "고양이 강도", "미스터 유니버스 머슬스 인" 에피소드
- 지옥의 바퀴 (1967년) - 마티 로빈스의 형 역
- 피의 신부 (1968년)
- 마닐라, 오픈 시티 (1968년) - 조연
- 피의 섬의 매드 닥터 (1968년)
-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1968년) - 우주 비행사 역 (일부 버전 편집됨)
- 피의 야수 (1970년)
- 빅 돌 하우스 (1971년)
- 노란 밤의 야수 (1971년)
- 트와일라잇 피플 (1972년)
- 우먼 헌트 (1972년)
- 비욘드 아틀란티스 (1973년)
- 사비지 시스터스 (1974년) (일명 《에보니 아이보리 앤 제이드》)
- 블랙 맘바 (1974년)
- 바람 속의 연기 (1975년 개봉)
- 서든 데스 (1977년) - 조연
- 지옥의 묵시록 (1979년)
- A 특공대 (1983년) - TV 시리즈, 나레이터 역
- 마그마 탐험대 (1993년)
- 시티 레인저 (1993년) - TV 시리즈
- 보이지 않는 엄마 (1995년)
- 스카 시티 (1998년)
7. 1. 2. 제작
존 애슐리는 AIP와의 계약이 끝난 후, 배우 활동과 병행하며 영화 제작 분야에서도 활동 영역을 넓혔다. 특히 1960년대 후반부터는 필리핀을 거점으로 여러 편의 저예산 B급 영화 제작에 깊이 관여했다.=== 필리핀에서의 영화 제작 ===
1968년, 애슐리는 필리핀에서 영화를 제작하자는 제안을 받고 활동 무대를 옮겼다.[28] 그는 필리핀의 영화 제작자이자 감독인 에디 로메로와 손잡고 여러 편의 영화를 만들었다. 첫 작품은 로메로의 "피의 섬" 시리즈 중 하나인 《피의 신부》(1968)였으며, 이어서 로메로가 감독하고 제임스 시게타가 주연한 전쟁 영화 《개방된 도시, 마닐라》(1968)에 조연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오클라호마에서 잠시 영화관을 운영하던 애슐리는 《피의 신부》의 배급 성공에 힘입어 다시 필리핀으로 돌아왔다. 그는 로메로가 공동 연출한 《피의 섬의 광적인 의사》(1969)에 출연했고, 이 영화의 흥행 성공은[29] 애슐리와 로메로의 장기적인 협력 관계의 시작을 알렸다. 애슐리는 이 영화의 속편 격인 《피의 야수》(1970)를 제작하며 본격적으로 제작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 영화 역시 로메로가 감독하고 헤미스피어 픽처스가 제작했다.
애슐리는 "1년에 석 달 동안 필리핀에서 사는 것은 나에게 해방감을 주었다. 거기에 콘도를 샀고, 마치 휴가 같았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로메로는 애슐리를 "매우 쉽게 어울리고, 매우 사교적인 사람"이라고 기억했다.[30]
로메로의 제안으로 두 사람은 자체 제작사인 Four Associates Ltd를 설립했고, 첫 작품으로 《비스트 오브 더 옐로우 나이트》(1971)를 제작했다.[31] 이 영화의 추가 자금은 로저 코먼과 그의 회사 뉴 월드 픽처스에서 나왔다. 코먼은 애슐리에게 푸에르토리코에서 제작하려던 여성 교도소 영화 《빅 돌 하우스》(1971)에 대해 이야기했고, 애슐리는 제작지를 필리핀으로 옮기도록 설득했다. 애슐리는 이 영화의 제작 이사(above-the-line producer)를 맡았으며, 영화는 큰 성공을 거두며 여성 수감 영화 장르의 유행을 이끌었다.
이후 애슐리는 로메로, 코먼 등과 협력하며 여러 편의 영화를 제작하거나 제작에 참여했다.
- 《더 우먼 헌트》(1972): 가장 위험한 게임을 리메이크한 작품으로, 제작과 출연을 겸했다.
- 《트와일라잇 피플》(1972): H. G. 웰스의 소설 《닥터 모로의 섬》을 각색한 작품으로, 디멘션 픽처스를 위해 제작했으며 애슐리 본인이 가장 좋아하는 작품 중 하나로 꼽았다.[32]
- 《블랙 마마 화이트 마마》(1973): 스탠리 크레이머 감독의 《디파이언트 원스》를 변형한 작품으로, AIP를 위해 제작했으며 애슐리가 제작자로서 가장 큰 재정적 성공을 거둔 작품이다.[33] 애슐리는 이 영화에 출연하지 않았다.
- 《비욘드 아틀란티스》(1973): 존 휴스턴 감독의 《시에라 마드레의 보물》을 변형한 작품으로, 패트릭 웨인이 주연을 맡고 애슐리는 제작과 출연을 겸했다. 가족 관객을 대상으로 폭력성을 줄였으나 흥행에는 실패했다. 애슐리는 이 영화가 자신이 자금을 댄 영화 중 유일하게 성공하지 못한 작품이라고 언급했다.
- 《블랙 맘바》(1974): 제작과 출연을 겸했으나, 애슐리 사후인 1997년에야 개봉되었다.[34]
- 《세비지 시스터스(1974)》 (일명 《에보니 아이보리 앤 제이드》): AIP를 위해 제작하고 출연했다. 로스앤젤레스 타임스는 그가 이 영화에서 "놀라운 재능"으로 역할을 소화했다고 평했다.[35]
- 《서든 데스(1977)》: 로메로가 감독하고 로버트 콘래드가 주연한 영화로, 제작과 조연 출연을 맡았다.
1974년 4월, 애슐리는 필리핀 영화 예술 과학 아카데미로부터 필리핀 영화 산업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특별상을 수상했다. 당시까지 그는 필리핀에서 11편의 영화를 제작했다.[36]
=== 지옥의 묵시록 참여 ===
1975년부터 1976년까지 약 1년간 애슐리는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대작 《지옥의 묵시록》(1979) 제작 과정에서 필리핀 현지 연락 담당자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프로듀서 프레드 루스의 요청에 따라 자신의 회사를 통해 제작에 필요한 현지 지원을 제공했으며, 특히 베트남 전쟁 당시 사용된 휴이 헬리콥터 약 6대를 조달하는 데 기여했다.[6] 애슐리는 코폴라 및 루스와 1년간 협력한 후, 극장 사업 관리 문제로 프로젝트에서 하차하고 오클라호마로 돌아갔다.[6]
=== 텔레비전 시리즈 제작 ===
1970년대 후반 필리핀의 촬영지로서의 매력이 감소하면서 애슐리는 미국으로 돌아와 텔레비전 프로그램 제작에 집중했다. 오클라호마에서 운영하던 약 40개의 영화관 스크린을 매각한 후,[6] 그는 배우 로버트 콘래드의 제작사에서 프로듀서로 일하며 콘래드가 주연한 TV 영화 《올해의 코치》(1980)와 《윌: G. 고든 리디》(1982)를 제작했다.
이후 애슐리는 유명 TV 프로듀서 스티븐 J. 캐넬과 손잡고 여러 편의 인기 시리즈를 제작했다. 1982년 캐넬의 시리즈 《더 퀘스트》 제작에 참여했으나, 프랑스 로케이션 촬영 중 심장마비를 겪기도 했다. 《더 퀘스트》 종영 후 캐넬은 애슐리에게 《A 특공대》 제작을 제안했다. 애슐리는 프랭크 루포와 함께 이 시리즈의 슈퍼바이징 프로듀서(이후 총괄 프로듀서로 승진)를 맡아 5시즌 동안 총 98개의 에피소드를 제작했다. 그는 또한 시리즈 첫 4시즌 동안 오프닝 타이틀 시퀀스의 내레이션을 담당했으며, 시즌 1 에피소드에 카메오로 출연하기도 했다. 《A 특공대》의 성공에 대해 애슐리는 "번개를 잡는 것과 같아서 인생에 한 번밖에 오지 않는 경험"이라고 회상했다.
《A 특공대》 이후에도 애슐리는 루포, 캐넬 등과 협력하며 다수의 TV 시리즈 및 영화 제작에 참여했다.
- 《늑대인간》(1987): 프랭크 루포가 제작한 TV 시리즈.
- 《Something Is Out There》(1988): 미니시리즈 및 이후 방영된 단명 시리즈.
- 《경찰 이야기: 검투사 학교》(1988): TV 영화.
- 《하드볼》(1989): TV 시리즈.
- 《다크 어벤저》(1990): TV 영화.
- 《더 레이븐》(1992): TV 시리즈.
- 《지구 속 여행》(1993): TV 영화.
- 《텍사스 레인저》(1993-): 일부 시즌 제작 참여.
- 《마커》(1995): 스티븐 J. 캐넬 제작 TV 시리즈.
- 《무법자》(1997): 스티븐 J. 캐넬 제작 TV 시리즈.
애슐리의 마지막 제작 작품은 1998년에 개봉한 영화 《스카 시티》이다.
=== 주요 제작 작품 목록 ===
연도 | 제목 | 구분 | 역할 | 비고 |
---|---|---|---|---|
1968 | 피의 신부 | 영화 | 제작 | 에디 로메로 감독 |
1970 | 피의 야수 | 영화 | 제작 | 에디 로메로 감독, 헤미스피어 픽처스 제작 |
1971 | 비스트 오브 더 옐로우 나이트 | 영화 | 제작 | Four Associates Ltd 첫 작품 |
1971 | 빅 돌 하우스 | 영화 | 제작 이사 | 로저 코먼 (뉴 월드 픽처스) 자금 지원 |
1972 | 더 우먼 헌트 | 영화 | 제작, 출연 | 에디 로메로, 로저 코먼 협력 |
1972 | 트와일라잇 피플 | 영화 | 제작 | 에디 로메로 감독, 디멘션 픽처스 배급 |
1973 | 블랙 마마 화이트 마마 | 영화 | 제작 | 에디 로메로 감독, AIP 배급 |
1973 | 비욘드 아틀란티스 | 영화 | 제작, 출연 | 에디 로메로 감독 |
1974 | 블랙 맘바 | 영화 | 제작, 출연 | 1997년 사후 개봉 |
1974 | 세비지 시스터스 | 영화 | 제작, 출연 | AIP 배급 |
1977 | 서든 데스 | 영화 | 제작, 조연 | 에디 로메로 감독 |
1979 | 지옥의 묵시록 | 영화 | 필리핀 연락 담당자 |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 |
1980 | 올해의 코치 | TV 영화 | 제작 | 로버트 콘래드 주연 |
1982 | 윌: G. 고든 리디 | TV 영화 | 제작 | 로버트 콘래드 주연 |
1982 | 더 퀘스트 | TV 시리즈 | 제작 | 스티븐 J. 캐넬 제작 |
1983-1987 | A 특공대 | TV 시리즈 | 슈퍼바이징/총괄 프로듀서 | 스티븐 J. 캐넬 제작, 오프닝 내레이션 담당 |
1987 | 늑대인간 | TV 시리즈 | 제작 | 프랭크 루포 제작 |
1988 | Something Is Out There | 미니시리즈/TV 시리즈 | 제작 | |
1988 | 경찰 이야기: 검투사 학교 | TV 영화 | 제작 | 로버트 콘래드 참여 |
1989 | 하드볼 | TV 시리즈 | 제작 | 로버트 콘래드 참여 |
1990 | 다크 어벤저 | TV 영화 | 제작 | 로버트 콘래드 참여 |
1992 | 더 레이븐 | TV 시리즈 | 제작 | 로버트 콘래드 참여 |
1993 | 지구 속 여행 | TV 영화 | 제작 | 로버트 콘래드 참여 |
1993-? | 텍사스 레인저 | TV 시리즈 | 제작 | 일부 시즌 참여 |
1995 | 마커 | TV 시리즈 | 제작 | 스티븐 J. 캐넬 제작 |
1997 | 무법자 | TV 시리즈 | 제작 | 스티븐 J. 캐넬 제작 |
1998 | 스카 시티 | 영화 | 제작 | 마지막 제작 영화 |
7. 2. TV
존 애슐리는 배우와 제작자로서 텔레비전 분야에서도 활발히 활동했다. 배우로서는 여러 TV 시리즈에 출연했으며, 특히 1980년대 인기 시리즈였던 A 특공대에서 나레이션을 맡아 목소리로도 잘 알려졌다. 그러나 마티니 극장 출연 제안을 당시 소속사였던 AIP의 새뮤얼 아코프가 거절하면서 TV 출연이 금지되는 등[19][20] 초기에는 TV 활동에 제약을 받기도 했다. 애슐리는 이 결정에 크게 반발했으며, 이는 AIP와의 계약을 갱신하지 않는 계기가 되었다.[19][20] 이후 애슐리는 제작자로 변신하여 A 특공대, 늑대인간, 워커, 텍사스 레인저 등 다수의 성공적인 TV 시리즈를 제작하며 역량을 발휘했다.7. 2. 1. 출연
존 애슐리는 다수의 영화와 TV 시리즈에 출연했다.연도 | 제목 | 역할 및 비고 |
---|---|---|
1957 | 드랙스트립 걸 | |
1957 | 제로 아워! | 영화 내에서 "Let Yourself Go Go Go" 노래[11] |
1958 | 프랑켄슈타인의 딸 | |
1958 | 핫 로드 갱 (Fury Unleashed) | 첫 호감형 주연. 진 빈센트와 함께 출연 및 노래. |
1958 | 몬스터 만드는 법 | 가수 역 (카메오 출연). 당시 주로 맡던 불량배 역할과 반대되는 캐스팅.[17][18] |
1963 | 해변 파티 | |
1963 | 허드 | |
1964 | 해변 파티 2 - 육체미 해변 파티 | |
1964 | 해변 파티 3 - 비키니 비치 | 자니 역 |
1965 | 비치 브랭켓 빙고 | |
1965 | 하우 투 스터프 어 와일드 비키니 | |
1965 | 더 아이 크리처스 | |
1965 | 사전트 데드 헤드 | |
1968 |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 |
1968 | 브라이드 오브 블러드 | |
1968 | 매드 닥터 오브 블러드 아일랜드 | |
1971 | 여감방 | |
1971 | 비스트 오브 블러드 | |
1979 | 지옥의 묵시록 | |
1983 | A 특공대 | 나레이터 역 (TV 시리즈) |
1993 | 마그마 탐험대 | |
1993 | 시티 레인져 | |
1995 | 엄마는 투명 인간 | |
1998 | 섹슈얼 터치 |
애슐리는 TV 시리즈 ''마티니 극장''의 "The Alleyway" 에피소드에 재니스 페이지와 함께 출연 제안을 받았으나, 당시 소속사였던 AIP의 새뮤얼 아코프가 이를 거절하며 TV 출연 금지 명령까지 받았다. 애슐리는 이 결정에 크게 반발했으며, 결국 AIP와의 계약을 갱신하지 않는 계기가 되었다.[19][20]
7. 2. 2. 제작
- 올해의 코치 (1980)
- 윌: G. 고든 리디 (1982)
- A 특공대 (1983–1986)
- 더 퀘스트 (1982)
- 늑대인간 (1987)
- 섬싱 이즈 아웃 데어 (1988)
- 하드볼 (1989)
- 레이븐 (1992)
- 지구 속 여행 (1993)
- 워커, 텍사스 레인저 (1993–1994)
- 마커 (1995)
- 무법자 (1997)
7. 3. 음반 목록
존 애슐리는 배우 활동 외에도 가수로 활동하며 여러 음반을 남겼다. 그의 가수 활동은 에디 코크란의 매니저이기도 했던 제리 케이프하트의 도움으로 시작되었으며,[11] 1957년 첫 싱글을 발매했다. 이후 "Seriously in Love"(1958), "Let the Good Times Roll"(1958), "Born to Rock"(1958), "Little Lou"(1961) 등 여러 싱글을 발표했으며,[4][12][13] 1959년에는 버트 바카라와 할 데이비드가 작곡한 곡을 녹음하기도 했다.[14]그는 AIP가 제작한 영화 ''How to Make a Monster''(1958)와 ''Hot Rod Gang''(1958) 등에 출연하여 직접 노래를 부르기도 했고,[17] 때때로 콘서트를 열기도 했는데, 한때 그의 밴드에는 글렌 캠벨도 있었다.[15] 애슐리는 Dot Records의 대표 랜디 우드와의 음악적 견해 차이를 언급하며, 우드가 자신에게 맞지 않는 스타일의 곡을 요구했다고 회상하기도 했다.[16]
7. 3. 1. 싱글
존 애슐리는 연기 활동 외에 가수로도 활동했다. 그의 매니저는 에디 코크란의 매니저이기도 한 제리 케이프하트였는데, 그의 도움으로 1957년 7월 음반사 Intro Records에서 첫 싱글을 발매했다.[11] 이 싱글에는 스탠더드 곡인 "Bermuda"와 애슐리가 영화 ''제로 아워!''에서 직접 부르기도 한 "Let Yourself Go Go Go"가 수록되었다. 이 싱글은 영화 ''드래그스트립 걸''의 개봉 시기에 맞춰 발매되었다.[11]이후 애슐리는 여러 음반을 발표했으며, 주요 싱글 목록은 다음과 같다.
애슐리는 1958년 AIP 영화 ''How to Make a Monster''에 가수 역할로 카메오 출연하기도 했다.[17] 이는 당시 그가 주로 맡았던 불량배 역할과는 다른 모습이었다.[18] 같은 해 AIP 영화 ''Hot Rod Gang''에서는 처음으로 호감 가는 주연 역할을 맡아 직접 노래를 불렀다. 이 영화에는 진 빈센트도 본인 역으로 출연했다.
애슐리는 가끔 콘서트를 열었으며, 한때 그의 밴드에는 글렌 캠벨도 있었다.[15] 그는 Dot Records의 대표 랜디 우드와의 음악적 견해 차이에 대해 언급한 바 있는데, 우드가 자신에게 맞지 않는 스타일의 곡을 부르게 하려 했다고 회상했다.[16]
2001년에는 독일의 Hydra Records 레이블에서 애슐리의 음악을 모은 CD 컬렉션 ''Born to Rock''이 발매되었다.
7. 3. 2. 컴필레이션 앨범
2001년, 독일 레이블 Hydra Records는 애슐리의 음악을 모은 CD 컬렉션인 ''Born to Rock''을 발매했다.참조
[1]
간행물
The Daring Young Men on the Flying TV
https://archive.org/[...]
1961-12
[2]
간행물
What should a husband tell a wife?
1962-04
[3]
문서
Lamont p 20
[4]
서적
Hollywood Surf and Beach Movies: The First Wave, 1959–1969
McFarland
2005
[5]
문서
Lamont p 20-21
[6]
뉴스
ASHLEY FINALLY MAKES THE TEAM
1985-03-17
[7]
서적
Faster and Furiouser: The Revised and Fattened Fable of American International Pictures
McFarland
1996
[8]
뉴스
'Calypso Joe' Exploits New Craze; Cameron, Mary Murphy to Costar
1957-01-30
[9]
웹사이트
Interview with Herman Cohen
http://www.hermancoh[...]
Herman Cohen
2012-03-08
[10]
뉴스
George Pal to Delve Into Space Again; Akim Tamiroff Aids 'Colonel'
1957-10-23
[11]
간행물
Actor Ashley Makes His Disk Debut on Int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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