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에 관한 이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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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종교에 관한 이론들은 종교 현상을 설명하려는 다양한 시도들을 포괄한다.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종교 이론은 시대와 학자들의 관점에 따라 발전해 왔다. 초창기에는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과 헤로도토스 등이 종교에 대한 전과학적 이론을 제시했고, 18~19세기에는 비교사회학적 방법론을 통해 과학적 연구가 시작되었다.
종교 이론은 크게 실질적, 기능적, 사회 관계적 이론으로 분류된다. 실질적 이론은 종교의 내용과 의미에 초점을 맞추며, 기능적 이론은 종교가 사회나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에 주목한다. 사회 관계적 이론은 신념과 관습의 사회적 형태를 강조한다. 이러한 이론들은 '내부자'와 '외부자' 관점, 개인주의와 사회적 관점, 진화론과 상대주의적 관점 등 다양한 기준으로도 구분될 수 있다.
종교 연구의 방법론은 초기 본질주의자들의 자료 수집 방식에서부터, 기능주의자들의 과학적 접근, 그리고 현장 연구를 중시하는 민족지학적 연구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발전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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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에 관한 이론들 | |
---|---|
종교 이론 | |
일반 정보 | |
학문 분야 | 종교학 |
연구 대상 | 종교의 기원 기능 영향 |
2. 역사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 시대부터 고대의 저자들은 종교에 대한 전과학적 이론들을 발전시켰다.[63] 헤로도토스(기원전 484년 – 425년)는 그리스의 신들을 이집트의 신들과 동일하게 보았다.[64] 유헤메로스(기원전 약 330년 – 264년)는 신을 존경하는 사람들이 결국 예배에 참석한 훌륭한 역사적 인물로 간주했다.[3]
18세기와 19세기에는 전 세계 부족과 민족의 데이터가 입수되면서 비교 방법으로 추론하고 시험한 과학적 이론이 등장했다. 막스 뮐러(1823–1900)는 비교종교학으로 발전한 비교 방법을 옹호하여 종교에 대한 과학적 연구를 창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4]
이후, 클리퍼드 기어츠(1926–2006) 등은 모든 종교에 대한 일반 이론을 추상화하는 것의 타당성에 의문을 제기했다.[5]
2. 1. 고대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 시대부터 고대의 저자들은 종교에 대한 전과학적 이론들을 발전시켰다.[63] 헤로도토스(기원전 484년 – 425년)는 그리스의 신들을 이집트의 신들과 동일하게 보았다.[64] 유헤메로스(기원전 약 330년 – 264년)는 신을 존경하는 사람들이 결국 예배에 참석한 훌륭한 역사적 인물로 간주했다.[3]2. 2. 18-19세기: 과학적 종교 연구의 시작
소크라테스 이전 시대부터 고대 저술가들은 종교에 대한 전과학적 이론을 발전시켰다.[2] 헤로도토스(기원전 484–425년)는 그리스의 신들을 이집트의 신들과 동일하게 보았다.[3] 유헤메로스(기원전 330–264년경)는 신들을 숭배자들이 결국 숭배하게 된 뛰어난 역사적 인물로 여겼다.[3]18세기와 19세기에는 전 세계 부족과 민족의 데이터가 입수되면서 비교 방법으로 추론하고 시험한 과학적 이론이 등장했다. 막스 뮐러(1823–1900)는 비교종교학으로 발전한 비교 방법을 옹호하여 종교에 대한 과학적 연구를 창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4]
이후, 클리퍼드 기어츠(1926–2006) 등은 모든 종교에 대한 일반 이론을 추상화하는 것의 타당성에 의문을 제기했다.[5]
2. 3. 20세기 이후: 다양한 이론의 등장
헤로도토스(기원전 484–425년)는 그리스의 신들을 이집트의 신들과 동일하게 보았고, 유헤메로스(기원전 330–264년경)는 신들을 숭배자들이 결국 숭배하게 된 뛰어난 역사적 인물로 여겼다.[3]비교 방법으로 추론하고 시험한 과학적 이론은 18세기와 19세기에 전 세계 부족과 민족의 데이터가 입수된 후에 등장했다. 막스 뮐러(1823–1900)는 종교에 대한 과학적 연구를 창시한 것으로 명성이 높으며, 비교종교학으로 발전한 비교 방법을 옹호했다.[4]
이후, 클리퍼드 기어츠(1926–2006) 등은 모든 종교에 대한 일반 이론을 추상화하는 것의 타당성에 의문을 제기했다.[5]
3. 종교 이론의 분류
종교 이론은 크게 실질적 이론, 기능적 이론, 사회 관계적 이론으로 분류할 수 있다.[6]
실질적 이론은 종교의 내용과 사람들이 그 내용에 부여하는 의미에 초점을 맞춘다. 이 접근 방식은 신념이 가치를 지니고 이해 가능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믿음을 갖는다고 주장한다.[6] 타일러와 프레이저는 종교가 신봉자들에게 설명적 가치를 지닌다고 보았고, 루돌프 오토는 종교적 경험의 중요성을, 미르체아 엘리아데는 초월적 완벽에 대한 갈망과 의미 탐구에 초점을 맞췄다.
기능적 이론은 종교가 집단 또는 개인에게 갖는 사회적 또는 심리적 기능에 초점을 맞춘다.[7] 종교가 "사회를 위해 특정한 기능을 수행한다"고 본다.[7] 칼 마르크스는 종교를 민중의 아편으로 보았고,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종교를 심리적 억압의 결과로, 에밀 뒤르켐은 종교의 사회적 기능, 막스 베버는 종교가 사회 변화의 원동력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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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관계적 이론은 신념과 관습의 '본질' 또는 사회적 형태에 초점을 맞춘다. 찰스 테일러의 《세속 시대》[10]와 클리퍼드 기어츠의 연구가 대표적이다. 폴 제임스는 종교를 "다른 사람 및 타자와의 교류를 통해 존재의 본질을 다루는 상대적으로 경계가 정해진 신념, 상징 및 관습의 체계"라고 정의한다.[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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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학자 E. E. 에반스-프리처드는 아잔데와 누에르 연구를 통해 종교가 사회적 맥락과 기능을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32] 클리퍼드 기어츠는 종교를 문화 시스템 중 하나로 보고, ''두터운 기술''을 옹호했다. 막스 베버는 종교가 사회 변화의 원동력이 될 수 있다고 보았으며, 교회-분파 유형론, 이상형, 카리스마적 권위 등의 개념을 도입했다.[8]
그 외에도 종교 이론은 "내부자" 대 "외부자" 관점, 개인주의적 관점 대 사회적 관점, 진화론적 관점 대 상대주의적 관점으로 분류할 수 있다.[12]
3. 1. 실질적 이론 (Substantive theories)
실질적 이론은 종교의 내용과 사람들이 그 내용에 부여하는 의미에 초점을 맞춘다. 이 접근 방식은 신념이 가치를 지니고 이해 가능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믿음을 갖는다고 주장한다.[6] 타일러와 프레이저의 이론은 신봉자들에게 종교의 설명적 가치에 초점을 맞추었고, 루돌프 오토의 이론은 매혹적이면서도 끔찍한 종교적 경험의 중요성에, 미르체아 엘리아데의 이론은 초월적 완벽에 대한 갈망, 의미 탐구, 다양한 종교의 신화에서 패턴 탐색에 초점을 맞추었다.
인류학자 에드워드 버넷 타일러(1832–1917)는 종교를 영적인 존재에 대한 믿음으로 정의하고, 이러한 믿음이 자연 현상에 대한 설명에서 기원했다고 주장했다. 정령에 대한 믿음은 삶과 죽음을 설명하려는 시도에서 비롯되었다. 원시 사회의 사람들은 인간의 꿈에서 정령이 나타나는 것을 보고, 인간의 정신이 육체와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이것을 확장하여 삶과 죽음, 그리고 사후 세계에 대한 믿음을 설명했다. 자연 현상을 설명하기 위한 신화와 신들은 유추와 이러한 설명의 확장을 통해 기원했다. 그의 이론은 모든 시대, 모든 민족의 정신이 거의 동일하며, 문화와 종교의 설명은 일신교 종교, 예를 들어 기독교를 거쳐 결국 과학으로 갈수록 정교해지는 경향이 있다고 가정했다. 타일러는 현대 사회의 관행과 믿음이 원시 사회의 그것과 유사한 것을 '생존'으로 보았지만, 그것들이 왜 생존했는지는 설명하지 않았다.[6]
제임스 조지 프레이저(1854–1941)는 그의 저서 『황금 가지』에서 테일러의 이론을 상당 부분 따랐지만, 마술과 종교를 구별했다. 마술은 원시인이 생존을 위해 자연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데 사용되었다. 그는 마술이 원시인의 접촉과 모방에 대한 비판 없는 믿음에 의존한다고 주장했다. 예를 들어, 원시인은 땅에 물을 뿌려 강수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그는 마술이 그들에게 법칙을 통해 작용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종교는 자연 세계가 법이 아닌, 간청할 수 있는 개인적 특성을 가진 하나 이상의 신에 의해 지배된다는 믿음이다.[6]
신학자 루돌프 오토(1869–1937)는 종교적 경험에 초점을 맞췄으며, 특히 그가 "전적으로 다른" 것을 의미하는 누미노스라고 부른 순간에 집중했다. 그는 이를 ''경외로운 신비''(mysterium tremendum)와 ''매혹적인 신비''(mysterium fascinans)로 묘사했다. 그는 종교가 이러한 경험에서 비롯된다고 보았다.[8] 그는 이러한 경험이 인간 정신의 특별하고 비합리적인 능력에서 비롯되며, 다른 능력과는 대체로 관련이 없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종교는 문화나 사회로 환원될 수 없다. 그가 누미노스 경험이 초월적인 현실에 의해 야기된다는 점을 포함한 그의 견해 중 일부는 검증할 수 없으므로 비과학적이다.[12] 그의 사상은 종교 현상학자와 미르체아 엘리아데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22]
미르체아 엘리아데(1907–1986)의 접근 방식은 종교 현상학에서 비롯되었다. 오토처럼 그는 종교를 특별하고 자율적인 것으로 보았으며, 사회적, 경제적 또는 심리적인 것으로만 환원주의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23][24] 뒤르켐처럼 그는 성스러운 것을 종교의 중심이라고 보았지만, 뒤르켐과 달리 그는 성스러운 것이 씨족이나 사회가 아닌, 종종 초자연적인 것과 관련이 있다고 보았다.[25] 평범한 사람의 일상생활은 성스러운 것의 현현, 즉 성현현상의 출현을 통해 성스러운 것과 연결된다. 신현현상 (신의 출현)은 그 특별한 경우이다.[26] 엘리아데는 ''영원한 귀환의 신화''에서, 고대인들은 성스러운 것에 참여하고 싶어하며, 의미 상실에서 벗어나 역사적 시간 밖의 잃어버린 낙원으로 돌아가기를 갈망한다고 썼다.[27] 원시인은 생존을 위한 자신의 투쟁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견딜 수 없었다.[28] 엘리아데에 따르면, 인간은 초월적인 완벽함에 대한 향수 (갈망)를 가지고 있었다. 고대인은 "시간의 공포"에서 벗어나기를 원했고, 순환적 시간을 보았다.[28] 기독교와 유대교와 같은 역사적 종교는 이러한 오래된 순환적 시간 개념에 반발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신을 통해 역사 ''안''에서 성스러운 것과의 의미와 접촉을 제공했다.[29] 엘리아데는 다양한 문화에서 신화의 패턴을 찾고 발견했다. 예를 들어, 제우스와 같은 하늘 신.[30][31] 엘리아데의 방법론은 다양한 문화와 사회의 비교 종교를 연구하는 것이었으며, 종종 이러한 사회의 다른 측면과는 관계없이 간접 보고서에 의존했다. 그는 또한 힌두교 민간 종교에 대한 지식을 포함하여, 자신의 이론을 위해 다른 사회와 문화에 대한 개인적인 지식을 사용했다. 그는 자신의 핵심 개념을 정의하는 데 모호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프레이저와 타일러처럼 그는 또한 매우 다른 사회와 문화의 종교적 믿음을 맥락에서 벗어나 비교한다는 비난을 받았다. 그는 또한 친종교적 편향 (기독교와 힌두교)을 가지고 있다는 비난을 받았지만, 이러한 편향은 그의 이론에 필수적인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인류학자 E. E. 에반스-프리처드(1902–1973)는 사회와 이전 학자들에 의해 "원시적"이라고 여겨졌던 아잔데와 누에르를 대상으로 광범위한 민족지 연구를 수행했다. 에반스-프리처드는 이들을 다르다고 보았지만, 원시적이라고 보지는 않았다. 이전의 학자들과 달리, 에반스-프리처드는 거대한 보편적인 이론을 제안하지 않았으며, "원시적" 민족들을 대상으로 광범위하고 장기간의 현장 조사를 수행하여 그들의 문화와 종교 등을 연구했다. 이는 엘리아데와 같은 일시적인 접촉과는 달랐다. 그는 아잔데의 종교(마법과 신탁)는 사회적 맥락과 사회적 기능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이해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마법과 신탁은 아잔데 사이의 분쟁 해결에 큰 역할을 했다. 이 점에서 그는 뒤르켐과 의견을 같이 했지만, 프레이저와 타일러가 그들의 종교에도 지적인 설명 측면이 있다는 점을 옳게 지적했다고 인정했다. 아잔데가 마법과 신탁에 대한 믿음은 일단 몇 가지 근본적인 원리가 받아들여지면 매우 논리적이고 일관성이 있었다. 근본적인 원리에 대한 믿음의 상실은 사회적 중요성 때문에 견딜 수 없었으며, 따라서 반증 증거에 대한 정교한 설명 시스템(또는 변명)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대체적인 용어 체계나 사상 학파는 존재하지 않았다.[32] 그는 원시 종교에 대한 이전의 이론가들에 대해 비판적이었으며, 뤼시앙 레비-브륄을 제외하고는, 그들이 충분한 내부 지식 없이 추측에 불과한 주장을 했다고 단정했다. 브륄의 저술을 칭찬했음에도 불구하고, 에반스-프리처드는 "원시" 부족의 구성원이 "나는 달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전논리적이라는 브륄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았으며, 이러한 진술은 그들의 문화 내에서 은유적으로 이해된다면 완벽하게 타당하다고 보았다.[33][34] 아잔데 외에도, 에반스-프리처드는 인접해 있지만 매우 다른 누에르를 연구했다. 누에르는 기독교와 유대교와 다소 유사한 추상적인 일신교 신앙을 가지고 있었지만, 작은 영들을 포함했다. 그들은 또한 토테미즘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는 그들의 종교의 부차적인 측면이었으므로 뒤르켐의 일반화에 대한 수정이 이루어져야 했다. 에반스-프리처드는 '종교'에 대한 이론이 아니라 누에르 종교에 대한 이론만을 제안했다.
인류학자 클리포드 기어츠(1926–2006)는 자바 마을에서 여러 연구를 진행했다. 그는 루스 베네딕트가 사용한 집단 태도라는 주관적이고 모호한 개념을 피하고, 탈코트 파슨스가 제안한 사회 분석을 사용했는데, 파슨스는 다시 막스 베버의 영향을 받아 이를 적용했다.[56] 파슨스의 적응 방식은 모든 인간 집단을 세 가지 수준으로 구분했는데, 즉 ''1.'' 개별적 수준은 ''2.'' 사회 시스템에 의해 제어되며, 이는 다시 ''3.'' 문화 시스템에 의해 제어된다.[56] 기어츠는 "인간은 스스로가 짜낸 의미의 거미줄에 매달린 동물이며, 따라서 그것을 분석하는 것은 법칙을 찾는 실험 과학이 아니라 의미를 찾는 해석학적 과학이다."라고 쓴 베버를 따랐다.[35] 기어츠는 종교와 문화를 설명하는 단순한 설명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해석 또한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는 기호를 사용하면서 관찰하여 해석하는 이른바 ''두터운 기술''을 옹호했으며, 이 작업으로 그는 상징 인류학의 창시자로 알려지게 되었다. 기어츠는 종교를 사회의 문화 시스템 중 하나로 보았다. 그는 종교를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1) 상징 체계
:(2) 인간에게 강력하고, 널리 퍼지며, 오래 지속되는 기분과 동기를 확립하는 역할을 하며
:(3) 일반적인 존재 질서에 대한 개념을 공식화하고
:(4) 이러한 개념에 사실성이라는 아우라를 부여하여
:(5) 기분과 동기가 유일하게 현실적인 것처럼 보이게 한다.[36]
기어츠는 상징을 종교와 문화를 소통의 시스템으로 보았기에, 개념을 구현하는 전달자라는 의미로 사용했다.[36] 이 정의는 세계관과 에토스 사이의 상호 강화를 강조한다. 그는 에번스-프리처드와 거의 동일한 방법론을 사용했지만, 종교에 대한 이론을 찾을 수 있으리라는 에번스-프리처드의 희망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기어츠가 제안한 방법론은 자연과학의 과학적 방법이 아니라, 역사적 방법이었다.
3. 2. 기능주의 이론 (Functional theories)
에밀 더크 하임, 칼 마르크스, 지그문트 프로이트, 맥스 웨버등의 이론은 기능적 이론의 예시이다.[8] 기능주의 이론은 종교가 집단 또는 개인에게 갖는 사회적 또는 심리적 기능을 중점으로 다룬다.[7] 간단히 말하면, 종교는 "사회를 위해 특정한 기능을 수행한다".[7]사회 철학자 카를 마르크스(1818–1883)는 유물론적 세계관을 견지했다.[37]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의 사상을 발전시켜 종교를 소외(마르크스의 소외 이론)의 산물로 보았으며, 민중의 아편으로서 사람들의 즉각적인 고통을 완화하는 기능을 하고, 사회 관계의 본질을 가리는 이데올로기였다고 주장했다.[38] 그는 이를 계급 사회가 폐지된 후 사라질 인간 문화의 우발적인 부분으로 여겼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마르크스의 종교 분석은 종교의 평화로운 측면뿐만 아니라 파괴적인 측면도 진지하게 고려하는 변증법적 설명의 한 측면일 뿐이라고 한다.[39]
|thumb|200px|지그문트 프로이트, 1885]]
지그문트 프로이트(1856–1939)는 종교를 사람들이 매우 진실로 믿고 싶어 하는 환상으로 보았다. 프로이트는 종교가 주로 무의식적인 신경증적 반응이며, 이는 심리적 억압의 결과라고 주장했다. 종교적 신념을 가진 사람에게 합리적인 주장을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신경증적 반응을 바꾸지 못할 것이라고 보았다. 1913년 저서 ''토템과 터부''에서 그는 모든 일신교가 아들들이 아버지 살해 사건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했다.[40] ''모세와 일신교''에서 프로이트는 모세가 아크나톤의 사제였으며, 파라오가 죽은 후 이집트를 탈출하여 다른 종교를 통해 일신교를 영속시켰다고 제안했다.[41] 프로이트의 종교에 대한 관점은 비과학적이라는 비판을 받아왔다.[42]
에밀 뒤르켐 (1858–1917)은 성스러운 개념을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믿음이 아닌 종교의 특징을 정의하는 것으로 보았다.[43] 그는 종교를 사회에 대한 관심의 반영으로 보았으며, 토테미즘에 대한 호주 원주민 연구에 자신의 관점을 기반을 두었다. 뒤르켐은 토테미즘을 종교의 가장 원시적이고 단순한 형태로 보았다.[44] 그는 도덕주의는 종교와 분리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뒤르켐은 종교의 기능이 집단 응집력이며, 이는 종종 집단적으로 참여하는 의식을 통해 수행된다는 견해를 가졌다. 그는 이러한 집단 모임이 집단적 흥분이라고 불리는 특별한 종류의 에너지[45]를 제공한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집단 구성원들이 개성을 잃고 신들과, 그리고 집단과 연대감을 느끼게 했다.[46] 뒤르켐의 접근 방식은 사회학 및 인류학의 기능주의 학파를 낳았다.[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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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스 베버(1864–1920)는 종교 운동의 진리 주장은 그 운동에 대한 과학적 연구와는 관련이 없다고 생각했다.[8] 그는 각 종교가 해당 사회에서 합리적이고 일관성이 있다고 묘사했다.[53] 베버는 종교가 사회 변화의 원동력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며 뒤르켐과는 다른 입장을 보였다.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베버는 현대 자본주의가 부분적으로 프로테스탄트의 세속적 금욕주의적 도덕관 때문에 빠르게 확산되었다고 썼다.[8] 베버는 분파와 교회를 구별하며, 분파의 구성원은 개인적인 선택에 의한 것이고 교회의 구성원은 출생에 의해 결정된다고 언급했다. 이 유형론에 따르면, 교회, 교회, 교단, 분파는 사회에 대한 영향력이 감소하는 연속체를 형성한다. 분파는 항의에서 비롯된 이탈 집단이며, 사회와 갈등을 겪는 경향이 있다.[54] 카리스마적 권위 베버는 카리스마를 이 사람의 추종자들이 그 사람의 독특한 자질을 받아들이는 데 달려있는 불안정한 형태의 권위로 보았다. 카리스마는 혁명적인 힘이 될 수 있으며, 일상화되거나(다른 형태의 권위로 변경) 카리스마적 인물의 죽음과 함께 사라질 수 있다.[8] 신분 집단에서 주요 동기는 위신과 사회적 결속이다.[55] 1920년 중국의 종교에 대한 그의 연구에서 그는 유교가 교육받은 엘리트와 같은 특정 신분 집단이 위신과 권력에 접근하는 것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보았다. 그는 유교가 사치와 절약 모두에 반대했기 때문에 자본주의가 중국에서 기원했을 가능성이 낮다고 주장했다. 그는 인간 행동의 의도와 맥락에 대한 자신의 해석 방법을 설명하기 위해 ''베르슈테헨(Verstehen)'' (독일어로 "이해") 개념을 사용했다.[56]
3. 3. 사회 관계적 이론 (Social relational theories)
에밀 뒤르켐의 이론(종교의 사회적 기능)과 스타크와 베인브리지의 이론은 사회 관계적 이론의 예시이다.[8] 종교의 사회 관계적 이론은 신념과 관습의 '본질' 또는 사회적 형태에 초점을 맞춘다. 찰스 테일러의 저서 《세속 시대》[10]와 클리퍼드 기어츠의 연구가 대표적이다. 폴 제임스는 종교를 "다른 사람 및 타자와의 교류를 통해 존재의 본질을 다루는 상대적으로 경계가 정해진 신념, 상징 및 관습의 체계이며, 시간, 공간, 육화 및 앎의 사회적 기반 존재론을 받아들이고 영적으로 초월하는 방식으로 경험된다"고 주장한다.[11] 이는 내재적 관점과 초월적 관점 사이의 이분법을 피한다.인류학자 에드워드 에반스-프리처드(1902–1973)는 아잔데와 누에르를 대상으로 광범위한 민족지 연구를 수행했다.[32] 그는 아잔데의 종교(마법과 신탁)는 사회적 맥락과 사회적 기능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이해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마법과 신탁은 아잔데 사이의 분쟁 해결에 큰 역할을 했다. 그는 뒤르켐과 의견을 같이 했지만, 프레이저와 타일러가 그들의 종교에도 지적인 설명 측면이 있다는 점을 옳게 지적했다고 인정했다. 아잔데가 마법과 신탁에 대한 믿음은 일단 몇 가지 근본적인 원리가 받아들여지면 매우 논리적이고 일관성이 있었다.[32] 근본적인 원리에 대한 믿음의 상실은 사회적 중요성 때문에 견딜 수 없었으며, 따라서 반증 증거에 대한 정교한 설명 시스템(또는 변명)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대체적인 용어 체계나 사상 학파는 존재하지 않았다.[32]
그는 원시 종교에 대한 이전의 이론가들에 대해 비판적이었으며, 뤼시앙 레비-브륄을 제외하고는, 그들이 충분한 내부 지식 없이 추측에 불과한 주장을 했다고 단정했다.[33][34] 에반스-프리처드는 "원시" 부족의 구성원이 "나는 달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전논리적이라는 브륄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았으며, 이러한 진술은 그들의 문화 내에서 은유적으로 이해된다면 완벽하게 타당하다고 보았다.[33][34] 아잔데 외에도, 에반스-프리처드는 인접해 있지만 매우 다른 누에르를 연구했다. 누에르는 기독교와 유대교와 다소 유사한 추상적인 일신교 신앙을 가지고 있었지만, 작은 영들을 포함했다. 그들은 또한 토테미즘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는 그들의 종교의 부차적인 측면이었다.
인류학자 클리포드 기어츠(1926–2006)는 자바 마을에서 여러 연구를 진행했다. 그는 탈코트 파슨스가 제안한 사회 분석을 사용했는데, 파슨스는 막스 베버의 영향을 받았다.[56] 기어츠는 종교와 문화를 설명하는 단순한 설명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해석 또한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는 기호를 사용하면서 관찰하여 해석하는 ''두터운 기술''을 옹호했으며, 이 작업으로 그는 상징 인류학의 창시자로 알려지게 되었다.
기어츠는 종교를 사회의 문화 시스템 중 하나로 보았다. 그는 종교를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36]
:(1) 상징 체계
:(2) 인간에게 강력하고, 널리 퍼지며, 오래 지속되는 기분과 동기를 확립하는 역할을 하며
:(3) 일반적인 존재 질서에 대한 개념을 공식화하고
:(4) 이러한 개념에 사실성이라는 아우라를 부여하여
:(5) 기분과 동기가 유일하게 현실적인 것처럼 보이게 한다.[36]
기어츠는 상징을 종교와 문화를 소통의 시스템으로 보았기에, 개념을 구현하는 전달자라는 의미로 사용했다.[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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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스 베버(1864–1920)는 종교 운동의 진리 주장은 그 운동에 대한 과학적 연구와는 관련이 없다고 생각했다.[8] 그는 각 종교가 해당 사회에서 합리적이고 일관성이 있다고 묘사했다.[53] 베버는 종교가 강력한 사회적 구성 요소를 가지고 있음을 인정했지만, 그의 저서인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종교가 사회 변화의 원동력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며 뒤르켐과는 다른 입장을 보였다.[8] 베버는 현대 자본주의가 부분적으로 프로테스탄트의 세속적 금욕주의적 도덕관 때문에 빠르게 확산되었다고 썼다.[8]
베버의 주된 관심사는 종교 이론을 개발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와 종교 사이의 상호 작용에 있었으며, 이는 여전히 종교 사회학에서 널리 사용되는 개념을 도입했다. 이러한 개념에는 다음이 포함된다.[8]
- 교회-분파 유형론, 베버는 분파와 교회를 구별하며, 분파의 구성원은 개인적인 선택에 의한 것이고 교회의 구성원은 출생에 의해 결정된다고 언급했다. 이 유형론은 나중에 에른스트 뢸츠와 다른 사람들에 의해 더욱 발전되었다.[54]
- 이상형, 유형화에 사용되는 가설적인 "순수한" 또는 "명확한" 형태
- 카리스마적 권위 베버는 카리스마를 이 사람의 추종자들이 그 사람의 독특한 자질을 받아들이는 데 달려있는 불안정한 형태의 권위로 보았다.
신분 집단에서 주요 동기는 위신과 사회적 결속이다.[55] 신분 집단은 권력과 위신, 그리고 간접적으로 경제적 자원에 대한 접근 수준이 다르다. 1920년 중국의 종교에 대한 그의 연구에서 그는 유교가 교육받은 엘리트와 같은 특정 신분 집단이 위신과 권력에 접근하는 것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보았다. 그는 유교가 사치와 절약 모두에 반대했기 때문에 자본주의가 중국에서 기원했을 가능성이 낮다고 주장했다. 그는 인간 행동의 의도와 맥락에 대한 자신의 해석 방법을 설명하기 위해 ''베르슈테헨(Verstehen)'' (독일어로 "이해") 개념을 사용했다.[56]
3. 4. 기타 분류
종교에 관한 이론들은 다음과 같이 분류될 수 있다.[6]- 실질적(또는 본질주의) 이론: 종교의 내용과 사람들이 그 내용에 부여하는 의미에 초점을 맞춘다. 이 접근 방식은 신념이 가치를 지니고 이해 가능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믿음을 갖는다고 주장한다. 타일러와 프레이저의 이론(신봉자들에게 종교의 설명적 가치에 초점), 루돌프 오토의 이론(매혹적이면서도 끔찍한 종교적 경험의 중요성에 초점) 그리고 미르체아 엘리아데의 이론(초월적 완벽에 대한 갈망, 의미 탐구, 다양한 종교의 신화에서 패턴 탐색에 초점)은 실질적 이론의 예시를 제공한다.
- 기능적 이론: 종교가 집단 또는 개인에게 갖는 사회적 또는 심리적 기능에 초점을 맞춘다. 간단히 말해서, 기능적 접근 방식은 종교가 "사회를 위해 특정한 기능을 수행한다"고 본다.[7] 칼 마르크스의 이론(자본주의 사회와 자본주의 이전 사회에서 종교의 역할), 지그문트 프로이트(심리적 종교적 신념의 기원), 에밀 뒤르켐의 이론(종교의 사회적 기능)과 스타크와 베인브리지의 이론은 기능적 이론의 예시이다.[8] 이 접근 방식은 마르크스의 이론을 제외하고는 정적 경향이 있으며, 종교와 사회의 나머지 부분 사이의 상호 작용과 역동적 과정을 다루는 막스 베버의 접근 방식과는 다르다.[9]
- 종교의 사회 관계적 이론: 신념과 관습의 '본질' 또는 사회적 형태에 초점을 맞춘다. 여기서 찰스 테일러의 저서 《세속 시대》는 전형적이며,[10] 클리퍼드 기어츠의 연구도 마찬가지이다. 이 접근 방식은 폴 제임스의 주장, 즉 종교는 "다른 사람 및 타자와의 교류를 통해 존재의 본질을 다루는 상대적으로 경계가 정해진 신념, 상징 및 관습의 체계이며, 시간, 공간, 육화 및 앎의 사회적 기반 존재론을 받아들이고 영적으로 초월하는 방식으로 경험된다"는 주장으로 표현된다.[11] 이는 내재적 관점과 초월적 관점 사이의 이분법을 피한다.
종교의 이론이나 설명을 분류할 수 있는 다른 이분법에는 다음이 포함된다:[12]
4. 방법론
초기 '''본질주의자'''인 타일러와 프레이저 등은 시간과 장소를 거의 고려하지 않고 모든 사회, 특히 더 원시적인 사회에서 유사한 믿음과 관행을 찾으려 했다.[13] 그들은 선교사, 탐험가, 식민지 공무원들이 작성한 보고서에 크게 의존했다. 이들은 모두 종교적 배경을 가진 조사관들이었으므로 종교를 내부에서 바라보았다. 일반적으로 그들은 조사 현장 연구를 수행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우연한 보고서를 사용했다. 이 방법은 보편성이 결여되어 비판을 받았으며, 많은 사람들이 이를 기꺼이 인정했다. 그러나 로버트 라눌프 매럿이 타일러의 종교 진화 이론을 위해 한 것처럼, 새로운 보고서를 고려하여 이론을 업데이트할 수 있었다.
대학교 및 기타 기관에서 특정 문화 데이터를 수집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파견된 현장 연구자들은 무작위 보고서보다 훨씬 더 큰 데이터베이스를 제공했다. 예를 들어, 인류학자 E. E. 에반스-프리처드는 부족 종교에 대한 상세한 민족지학적 연구를 더 신뢰할 수 있는 것으로 선호했다. 그는 자신의 선배인 뮐러, 타일러, 뒤르켐의 연구를 검증할 수 없는 추측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그들을 "안락의자 인류학자"라고 불렀다.[14][15]
두 번째 방법론인 '''기능주의'''는 종교 외부에 있는 종교에 대한 설명을 찾는다. 즉, 이론가들은 일반적으로 (반드시 그렇지는 않지만) 무신론자 또는 불가지론자이다. 본질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기능주의자들은 보고서에서 조사 연구로 나아갔다. 그러나 그들의 근본적인 가정은 매우 다르다. 특히 방법론적 자연주의를 적용한다. 종교를 설명할 때, 그들은 종교의 지위나 기원에 대한 신성하거나 초자연적인 설명을 거부하는데, 이는 과학적으로 검증할 수 없기 때문이다.[16] 실제로 매럿(성공회 신자)과 같은 이론가들은 과학적 결과를 완전히 배제하고 종교를 예측할 수 없고 설명할 수 없는 영역으로 정의했다. 즉, 비교 종교는 비합리적인 것에 대한 합리적(그리고 과학적) 연구이다.
기능주의자들과 일부 후기 본질주의자들(E. E. 에반스-프리처드 등)은 '''실질적''' 관점이 종교의 사회적 측면을 간과한다고 비판했다.[17] 이러한 비평가들은 타일러와 프레이저의 종교 기원에 대한 견해를 검증할 수 없는 추측으로 간주할 정도이다.[18] 일신교가 다신교보다 더 진화했다는 견해는 단순한 선입견을 나타낸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일신교가 농업 사회보다 수렵 사회에서 더 널리 퍼져 있다는 증거가 있다. 민속 관습의 획일적인 진행에 대한 관점은 검증할 수 없다는 비판을 받으며, 작가 앤드루 랭과 E. E. 에반스-프리처드가 주장한다.[19][20] 후자의 비판은 초기 문화 인류학자들의 진화론적 견해가 획일적인 문화 진화를 상상했다고 추정한다. 또 다른 비판은 타일러와 프레이저가 개인주의자(비과학적)였다고 가정한다. 그러나 로빈 호턴을 비롯한 일부는 그 접근 방식이 가치 있다고 지지한다.[21]
4. 1. 본질주의적 방법론
초기 본질주의자인 타일러와 프레이저 등은 시간과 장소를 고려하지 않고 모든 사회, 특히 원시 사회에서 유사한 믿음과 관행을 찾으려 했다.[13] 이들은 선교사, 탐험가, 식민지 공무원들이 작성한 보고서에 크게 의존했는데, 이들은 모두 종교적 배경을 가진 조사관들이었으므로 종교를 내부에서 바라보았다. 일반적으로 이들은 현장 조사 연구를 수행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보고서를 사용했다. 이 방법은 보편성이 결여되어 비판을 받았지만, 로버트 라눌프 매럿이 타일러의 종교 진화 이론을 위해 한 것처럼, 새로운 보고서를 고려하여 이론을 업데이트할 수 있었다.대학교 및 기타 기관에서 특정 문화 데이터를 수집하기 위해 파견된 현장 연구자들은 무작위 보고서보다 훨씬 더 큰 데이터베이스를 제공했다. 예를 들어, 인류학자 E. E. 에반스-프리처드는 부족 종교에 대한 상세한 민족지학적 연구를 더 신뢰할 수 있는 것으로 선호했다. 그는 자신의 선배인 뮐러, 타일러, 뒤르켐의 연구를 검증할 수 없는 추측이라고 비판하며, "안락의자 인류학자"라고 불렀다.[14][15]
기능주의자들과 일부 후기 본질주의자들은 실질적 관점이 종교의 사회적 측면을 간과한다고 비판했다.[17] 이들은 타일러와 프레이저의 종교 기원에 대한 견해를 검증할 수 없는 추측으로 간주했다.[18] 일신교가 다신교보다 더 진화했다는 견해는 단순한 선입견이며, 일신교가 농업 사회보다 수렵 사회에서 더 널리 퍼져 있다는 증거가 있다고 주장한다. 민속 관습의 획일적인 진행에 대한 관점은 검증할 수 없다는 비판을 받으며, 앤드루 랭과 E. E. 에반스-프리처드가 주장한다.[19][20] 후자의 비판은 초기 문화 인류학자들의 진화론적 견해가 획일적인 문화 진화를 상상했다고 추정한다. 또 다른 비판은 타일러와 프레이저가 개인주의자였다고 가정한다. 그러나 로빈 호턴을 비롯한 일부는 그 접근 방식이 가치 있다고 지지한다.[21]
4. 2. 기능주의적 방법론
기능주의는 종교 외부에 있는 종교에 대한 설명을 찾는다. 기능주의 이론가들은 일반적으로 무신론자 또는 불가지론자이며, 종교를 설명할 때 종교의 지위나 기원에 대한 신성하거나 초자연적인 설명을 거부하는데, 이는 과학적으로 검증할 수 없기 때문이다.[16]기능주의자들과 일부 후기 본질주의자들은 실질적 관점이 종교의 사회적 측면을 간과한다고 비판했다.[17] 이러한 비평가들은 타일러와 프레이저의 종교 기원에 대한 견해를 검증할 수 없는 추측으로 간주했다.[18] 일신교가 다신교보다 더 진화했다는 견해는 단순한 선입견이며, 일신교가 농업 사회보다 수렵 사회에서 더 널리 퍼져 있다는 증거도 존재한다. 민속 관습의 획일적인 진행에 대한 관점은 검증할 수 없다는 비판을 받으며, 앤드루 랭과 E. E. 에반스-프리처드가 이를 주장한다.[19][20]
5. 현대 사회와 종교
5. 1. 세속화 논쟁
5. 2. 종교 간 대화와 협력
5. 3. 한국 사회와 종교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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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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