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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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종예는 촉한의 관료로, 장비, 제갈량 등을 섬기며 외교와 군사 분야에서 활약했다. 그는 오나라와의 외교에서 촉한의 입장을 옹호하며 손권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고, 등지의 질문에 유연하게 대처하는 등 강직한 면모를 보였다. 말년에는 진군대장군을 역임했으나, 촉한 멸망 후 낙양으로 호송되던 중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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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예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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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종예 |
본관 | 형주남양군 안중현 |
자 | 덕염 (德艶, Deokyeom) |
작위 | 관내후 (關內侯, Gwannaehu) |
사망 | 264년 |
활동 시기 | 삼국 시대 |
국가 | 촉한 |
직업 | 장군, 외교관 |
관직 | |
전기 관직 | 시중 (侍中) 상서 (尙書) 둔기교위 (屯騎校尉) 후장군 (後將軍) 정서대장군 (征西大將軍) |
최종 관직 | 진군대장군 (鎮軍大將軍) 연주자사 (兗州刺史, Yeonju Jasa) (명목상) |
2. 초기 생애 및 관직 진출
종예는 후한 말기 안중현(安眾縣), 남양군(南陽郡)에서 태어났으며, 현재의 덩저우 시, 허난성 일대에 해당한다.[2]
214년, 종예는 장군 장비를 따라 익주 (현재의 쓰촨성과 충칭시를 포함)로 들어가, 당시 익주를 놓고 익주목 유장과 싸움을 벌이던 군벌 유비의 지원군으로 복무했다.
후한 멸망 후, 종예는 유비가 221년에 건국하여 220년에 후한을 대체한 조위의 정통성에 도전한 촉한에서 활동했다. 유선 치세 초 건흥 연간(223-237)에 제갈량은 종예를 주부로 임명하고, 이후 참군과 우중랑장으로 임명했다.[4]
2. 1. 제갈량의 신임
건안 연간[24]에 장비를 따라 촉으로 들어갔으며, 건흥[25] 연간에 제갈량이 주부로 삼았고 이후 참군, 우중랑장으로 관직이 올랐다.[4]234년, 제갈량이 오장원에서 병사하자 오나라는 위나라가 촉이 쇠약해진 틈을 타 촉을 공격할까 우려해 파구의 수비병 1만 명을 늘렸으며, 촉이 이 소식을 듣고 영안의 수비를 강화했다.
종예가 오나라의 사신으로 파견되어 손권에게 찾아가자 손권이 정색하며 촉한에서 백제성의 수비를 강화한 것에 대해 추궁하자 종예는 '''동오와 촉한 모두 수비병을 늘린 것은 사세상 당연한 일이니 추궁하실 만한 일이 아닙니다!'''라고 반박했으며, 손권이 강직함을 칭찬해 등지와 비의에 견주었다고 한다.
3. 오나라와의 외교 활동
223년부터 237년까지 지속된 건흥 연간 초, 종예는 승상부의 주부가 되었고, 이후 참군, 우중랑장으로 승진했다.
제갈량 사후, 오나라는 위나라가 촉을 공격할 것을 우려하여 파구에 1만 명의 병사를 증원했다. 이에 촉 또한 백제성의 병사를 증원하면서 오나라와 촉나라 사이에 군사적 긴장이 발생했다. 종예는 오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양국 간의 긴장을 완화하는 역할을 수행했고, 손권으로부터 등지와 비의에 버금가는 높은 평가를 받았다.[7]
3. 1. 촉한-오나라 관계 개선
234년, 제갈량이 오장원에서 병사하자 동오는 위나라가 촉이 쇠약해진 틈을 타 촉을 공격할까 우려해 파구(현재의 후난성 웨양)의 수비병 1만 명을 늘렸으며, 촉이 이 소식을 듣고 영안(현재의 충칭시 펑제현)의 수비를 강화했다.[5]종예가 오나라의 사신으로 파견되어 손권에게 찾아가자 손권이 정색하며 촉한에서 백제성의 수비를 강화한 것에 대해 추궁하자 종예는 '''동오와 촉한 모두 수비병을 늘린 것은 사세상 당연한 일이니 추궁하실 만한 일이 아닙니다!'''라고 반박했으며, 손권이 강직함을 칭찬해 등지와 비의에 견주었다고 한다.[7]
이후[10] 다시 동오를 방문했다가 헤어질 때 손권이 '''군[12]이 매번 명을 받아 양국의 우호를 다져왔지만 둘다 나이가 많아 이후에 다시 만나지 못할까 두렵소'''라며 종예에게 큰 진주 1곡(斛)을 선물했다고 한다.[12]
3. 2. 손권과의 이별
234년, 제갈량이 오장원에서 병사하자 동오는 위나라가 촉이 쇠약해진 틈을 타 촉을 공격할까 우려해 파구(현재의 후난성 웨양)에 수비병 1만 명을 늘렸으며, 촉은 이 소식을 듣고 영안(현재의 충칭시 펑제현)의 수비를 강화했다.[24]종예는 촉한의 사신으로 파견되어 손권을 만났는데, 손권이 정색하며 백제성의 수비를 강화한 것에 대해 추궁하자 '''동오와 촉한 모두 수비병을 늘린 것은 사세상 당연한 일이니 추궁하실 만한 일이 아닙니다!'''라고 반박했다.[7] 손권은 종예의 대담하고 솔직한 답변에 웃으며 칭찬했다. 종예는 동오를 방문한 촉의 외교관들 중 등지, 비의 다음으로 손권에게 높은 호감을 얻고 존경을 받았다.[8]
이후[26] 종예는 다시 동오를 방문했다가 헤어질 때 손권이 '''군[27]이 매번 명을 받아 양국의 우호를 다져왔지만 둘다 나이가 많아 이후에 다시 만나지 못할까 두렵소'''라며 큰 진주 1곡을 선물로 주었다.[12]
4. 등지와의 일화
234년, 제갈량이 오장원에서 사망하자 동오는 위나라가 촉이 쇠약해진 틈을 타 공격할까 우려하여 파구에 수비병 1만 명을 늘렸다. 촉이 이 소식을 듣고 영안의 수비를 강화하자, 종예는 오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손권이 촉한에서 백제성 수비를 강화한 것에 대해 추궁하자 종예는 '''동오와 촉한 모두 수비병을 늘린 것은 사세상 당연한 일이니 추궁하실 만한 일이 아닙니다!'''라고 반박했다. 손권은 그의 강직함을 칭찬하며 등지와 비의에 견주었다.[24][25]
이후[26] 다시 동오를 방문했을 때 손권은 '''군[27]이 매번 명을 받아 양국의 우호를 다져왔지만 둘 다 나이가 많아 이후에 다시 만나지 못할까 두렵소'''라며 종예에게 큰 진주 한 덩이를 선물했다.
4. 1. 등지의 질문에 대한 답변
247년, 둔기교위에 임명된 종예는 같은 해, 거기장군 등지가 강주에서 돌아와 '''예기에서 나이 60세이면 군역을 지지 않는다면서 병권을 받았으니 어찌된 것입니까?'''라고 묻자, '''공께서는 나이 70세에도 병권을 물리지 않는데 나라고 60세에 받지 못하겠습니까?'''라고 답했다.[14]등지는 성정이 교만하여 대장군 비의를 포함해 모두가 피했지만, 종예는 홀로 굽히지 않았다.[15]
4. 2. 등지에 대한 태도
247년, 촉한의 거기장군 등지가 강주에서 돌아와 종예에게 '''예법에 따르면 나이 60세가 되면 군역을 지지 않는다는데, 어찌하여 병권을 받았습니까?'''라고 물었다. 이에 종예는 '''공께서는 나이 70세에도 병권을 물리지 않으시는데, 나라고 60세에 받지 못하겠습니까?'''라고 응수했다.[14]등지는 성정이 교만하여 비의 등을 포함해 모두가 그를 피했지만, 종예는 홀로 굽히지 않고 맞섰다.[15]
5. 후기 생애 및 죽음
234년, 제갈량이 오장원에서 병사하자 오나라는 위나라가 촉한이 쇠약해진 틈을 타 촉을 공격할까 우려해 파구의 수비병 1만 명을 늘렸으며, 촉이 이 소식을 듣고 영안의 수비를 강화했다.
종예는 오나라의 사신으로 파견되어 손권에게 찾아갔다. 손권이 정색하며 촉한에서 백제성의 수비를 강화한 것에 대해 추궁하자 종예는 '''동오와 촉한 모두 수비병을 늘린 것은 사세상 당연한 일이니 추궁하실 만한 일이 아닙니다!'''라고 반박했다. 손권은 그의 강직함을 칭찬하며 등지와 비의에 견주었다.[24]
이후 종예는 시중, 상서를 거쳐 247년에는 둔기교위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거기장군 등지가 강주에서 돌아와 '''예기에서 나이 60세이면 군역을 지지 않는다면서 병권을 받았으니 어찌된 것입니까?'''라고 묻자, 종예는 '''공께서는 나이 70세에도 병권을 물리지 않는데 나라고 60세에 받지 못겠습니까?'''라고 말했다.
등지는 성정이 교만해 비의 등을 포함해 모두가 피했지만 종예는 홀로 굽히지 않았다. 이후[26] 다시 오나라를 방문했을 때, 손권은 '''군[27]이 매번 명을 받아 양국의 우호를 다져왔지만 둘다 나이가 많아 이후에 다시 만나지 못할까 두렵소'''라며 종예에게 큰 진주 한 곡을 선물했다고 한다.
종예는 독영안, 정서대장군을 역임하고 관내후의 작위를 받았다. 258년 병으로 인해 성도로 귀환했으며,[16][17] 261년 진군대장군 겸 연주자사에 임명되었다.[18][19]
5. 1. 제갈첨과의 관계
261년, 제갈량의 아들 제갈첨이 촉나라 중앙 정부를 맡게 되자 요화는 종예에게 그와 함께 제갈첨을 방문하자고 요청했다.[20] 종예는 "우리 둘 다 이미 70세를 넘었소. 우리가 바라는 모든 것은 지나갔고, 우리에게 남은 것은 죽음뿐이오. 사소한 문제로 젊은 세대에게 인사를 하며 호의를 구할 필요가 있겠소?"라며 거절했다.[21] 종예는 '''우리 나이가 70세를 넘었으니 욕심을 부릴 나이는 이미 지났고 죽을 날도 얼마 남지 않았소이다. 어린 아이[28]에게 찾아가 구구절절 늘어놓아봐야 무엇하겠소!'''라고 말하며 끝끝내 찾아가지 않았다고 한다.5. 2. 촉한 멸망과 죽음
263년, 조위의 침공으로 유선이 항복하면서 촉한이 멸망했다. 264년, 종예는 요화와 함께 위나라의 수도인 낙양으로 이주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이동 중에 병으로 사망했다.[29]6. 평가
종예는 유비의 익주 진공 때 장비를 따라 입촉했다.[1] 제갈량 사후, 오나라는 위나라가 촉을 공격할 것을 우려하여 파구에 1만 명의 병사를 증원했고, 촉 또한 백제성의 병사를 증원하여 양국 간 군사적 긴장이 발생했다.[1] 종예는 오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긴장을 완화했고, 손권으로부터 등지, 비의에 이은 평가를 받았다.[1]
이후 시중, 상서를 거쳐 연희 10년(247년)에는 둔기교위가 되었다.[1] 60세에 처음 군사에 참여한 것에 대해 등지에게 질문을 받았으나, 등지가 70세에도 병권을 반환하지 않은 것을 들어 반박했다.[1] 등지는 차기장군, 강주도독의 지위에 있었고 교만한 성격으로 대장군 비의조차 꺼렸지만, 종예만은 거리낌없이 대했다고 한다.[1]
다시 오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손권은 "서로 고령이니, 이제 만날 일도 없을 것이다"라며 이별을 아쉬워하며 진주 한 덩이를 주었다.[1]
경요 원년(258년), 병으로 성도로 소환되었고, 후에 진군대장군, 연주자사가 되었다.[1] 제갈첨이 정치를 맡게 되자, 요화로부터 함께 갈 것을 권유받았지만 "서로 70세가 넘었는데, 이제 와서 젊은이에게 아첨할 필요는 없겠지"라며 거절했다.[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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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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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서 종예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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