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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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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유염은 촉한의 인물로, 유비가 예주 자사였을 때 등용되어 유비의 측근으로 활동했다. 유선 시대에는 요직을 두루 거쳤으나 국정에는 참여하지 않고 제갈량의 측근으로 활동했으며, 사치스러운 생활을 했다. 위연과의 불화로 해임된 후 아내와의 불화로 처형당했다. 그의 죽음 이후 촉에서는 중신의 아내나 어머니의 정월 인사가 금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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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염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류염
원어 이름劉琰
로마자 표기Liu Yan
위숴 (威碩)
출생지산둥성 취푸시
사망일234년 4월 (추정)
사망지청두시, 쓰촨성
배우자호부인
작위도향후 (都鄉侯)
관직 및 직책
고릉태수 (固陵太守)214년 – 223년
후장군 (後將軍)223년 – ?
중군사 (中軍師)223년 – ?
위위 (衛尉)223년 – ?
거기장군 (車騎將軍)230년 – 234년
군사 경력
소속촉한
상관유비, 유선
주요 전투불명
기타
관련 인물제갈량

2. 생애

유비익주를 평정한 후, 유염은 고릉 태수를 거쳐 유선 즉위 후 도향후(都鄕侯)에 봉해졌다. 위장군·중군사(中軍師), 후장군을 거쳐 거기장군으로 승진했으나, 국정에 직접 참여하지 않고 제갈량에게 조언하는 역할에 머물렀다.[20] 그는 사치스러운 생활을 즐겼으며, 수십 명의 하녀를 거느리고 왕연수인 "노령광전부"(魯靈光殿賦)를 가르치기도 했다.[10]

건흥 9년(231년), 기산의 싸움에서 이엄의 직무 태만과 은폐 행위를 탄핵하는 제갈량의 표문에 연명했다.[21] 이듬해(232년)에는 위연과 불화하여 제갈량에게 질책을 받고 성도로 돌아갔다.[20]

건흥 12년(234년) 정월, 유염은 아내 호씨(胡氏)가 황제 유선과 사통했다고 의심하여 폭행하고 쫓아냈다. 호씨의 고발로 유염은 하옥되었고, "사졸은 아내를 때리는 자가 아니며, 얼굴은 신발이 디딜 땅이 아니다."라는 판결과 함께 기시되었다.[20] 이 사건 이후 촉에서는 대신의 부인이나 어머니가 궁에 들어가 새해 인사를 하는 풍습이 사라졌다.[20]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이 사건이 제115회에 등장하며, 유선의 어리석음을 강조하고 촉 멸망을 암시하는 사건으로 묘사된다.

2. 1. 초기 활동

유비가 예주 자사였을 때 유염을 종사(從事)로 등용했다.[19] 유염은 종씨이며 풍류를 즐기고 언변에 능숙하여 유비와 친했고, 유비는 그를 빈객으로 대우했다. 유비의 입촉 이후 유비가 익주를 평정하고서 유염을 고릉 태수로 임명했다.[20]

2. 2. 유비의 익주 평정 이후

유비익주를 평정한 후, 유염을 고릉태수(固陵太守)로 임명했다.[20] 유비는 유염이 풍류를 즐기고 언변이 뛰어나며, 같은 유씨 성이라는 점 때문에 빈객으로 대우했다.

유선이 황제가 된 후에는 도향후(都鄕侯)에 봉해졌고, 위장군·중군사(中軍師)를 거쳐 후장군으로, 나아가 거기장군으로 승진했다.[20] 그러나 국정에 참여하지는 않고 제갈량을 따라 풍자하거나 건의하는 역할을 맡았다.[20] 또한 매우 사치스러운 생활을 했다고 한다.[20]

건흥 9년(231년), 이엄을 탄핵하는 제갈량의 표문에 연명했다.[21] 이듬해인 건흥 10년(232년)에는 전군사 위연과 불화하여 제갈량에게 질책을 받았으나, 사죄하여 관위를 유지한 채 성도로 보내지는 처분을 받았다.[20]

건흥 12년(234년) 정월, 유염의 아내 호씨(胡氏)가 태후에게 새해 인사를 하러 갔는데, 태후의 명으로 한 달 넘게 궁에 머물렀다. 유염은 호씨가 미녀이므로 황제와 사통했을 것이라 의심하여, 병사를 시켜 매질하고 신발로 얼굴을 때린 후 쫓아냈다. 호씨는 이를 분하게 여겨 유염을 고발했고, 유염은 하옥되었다. 담당 관리는 "병졸은 아내를 때리는 자가 아니며, 얼굴은 신발이 디딜 땅이 아니다."라고 논하며 유염을 기시했다.[20] 이 사건 이후로 대신의 어머니나 아내가 경조하는 풍습은 사라졌다.[20]

2. 3. 유선 시대

유선이 황제가 되자 도향후(都鄕侯)가 되었으며, 이엄 다음가는 반열로 대우받았다. 위장군·중군사(中軍師)가 되었으며, 또 후장군이 되었고, 거기장군으로 승진했으나 국정에 참여하지 않고 제갈량을 따라 풍자하거나 건의할 뿐이었다.[20] 또한 매우 사치스러운 생활을 했다.[20]

건흥 9년(231년), 이엄을 탄핵하는 제갈량의 표문에 연명했다.[21] 이듬해 전군사 위연과 불화한 일로 제갈량에게 질책을 당하여, 사죄하고 관위를 유지한 채 성도로 보내지는 처분을 받았다.[20]

건흥 12년(234년) 정월, 유염의 아내 호씨(胡氏)가 태후에게 새해 인사를 하러 갔다. 태후는 특별히 명령을 내려 호씨를 머무르게 했다가 한 달을 넘겨서 내보냈는데, 유염은 호씨가 미녀이므로 황제와 사통했으리라고 의심하였다. 곧 사졸을 시켜 호씨를 매질하였고, 몸소 신발로 호씨의 얼굴을 때리고 쫓아냈다.

호씨는 이를 분하게 여겨 유염을 고발하였고, 유염은 하옥되었다. 담당 관리는 논의를 거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결국 유염은 기시되었다. 이로부터 대신의 어머니나 아내가 경조하는 풍습이 사라졌다.[20]

223년, 유비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유선촉한의 황제가 된 후, 유염을 도향후(都鄕侯)에 봉하고 이엄에 버금가는 영예와 특권을 부여했다. 또한 위위(衛尉), 중군사(中軍師), 후장군(後將軍)으로 임명했다. 이후 거기장군(車騎將軍)의 지위로 승진했다.[8]

유염은 중요한 직책을 맡았음에도 불구하고, 국가와 군사 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고, 재능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단 천 명의 군대만 지휘했던 그는, 승상 제갈량으로부터 관전평론가라는 비난을 받았다.[9] 그는 직장 밖에서 사치스럽고 허세 가득한 생활 방식을 이끌었다. 또한 수십 명의 하녀를 거느렸는데, 그들 중 많은 수가 노래하고 악기를 연주할 수 있었다. 그는 심지어 그들에게 왕연수인 "노령광전부"(魯靈光殿賦)를 암송하도록 가르쳤다.[10]

건흥 10년(232년), 한중에서 위연과 불화하여 제갈량에 의해 해임되었고, 관위는 그대로 성도로 돌아갔다.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이 사건은 제115회, 촉 멸망 직전의 이야기로, 유선의 혼군적인 면모를 강조하고, 망국을 암시하는 에피소드로 다루어지고 있다.

2. 4. 이엄 탄핵

건흥 9년(231년), 이엄을 탄핵하는 제갈량의 표문에 연명했다.[21] 이 탄핵장은 기산의 싸움에서 발생한 이엄의 직무 태만과 은폐 행위에 대한 것으로, 유염은 "중군사·거기장군·도향후"로서 여러 신하들 가운데 으뜸으로 이름이 올라 있다. 『촉지』 유염전에 따르면 조정에서의 서열은 항상 이엄 다음이었다고 한다.

2. 5. 위연과의 불화

건흥 10년(232년), 한중에서 위연과 불화하여 근거 없는 비난을 하였다. 제갈량은 유염의 직위를 박탈하고 그를 질책했다.[11] 유염은 제갈량에게 다음과 같이 사과했다.

제갈량은 이후 유염을 촉한의 수도인 성도로 돌려보내고, 그의 이전 지위를 회복시켜 주었다.[13] 그 결과 유염은 삶의 희망을 잃고 몽롱해졌다.

2. 6. 최후

건흥 12년(234년) 정월, 유염의 아내 호씨(胡氏)가 태후에게 새해 인사를 하러 갔다. 태후는 특별히 명령을 내려 호씨를 머무르게 했다가 한 달을 넘겨서 내보냈는데, 유염은 호씨가 미녀이므로 황제 유선과 사통했을 것이라고 의심하였다. 곧 사졸을 시켜 호씨를 매질하였고, 몸소 신발로 호씨의 얼굴을 때리고 쫓아냈다.[20]

호씨는 이를 분하게 여겨 유염을 고발하였고, 유염은 하옥되었다. 담당 관리는 "사졸은 아내를 때리는 자가 아니며, 얼굴은 신발이 디딜 땅이 아니다."라고 논평했다.[17]

결국 유염은 기시되었다.[20] 이로부터 대신의 어머니나 아내가 경조하는 풍습이 사라졌다.[20] 유염은 자신의 과오를 고치고 음주를 자제하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고, 그의 사고는 혼란스러워졌으며, 레이프 드 크레스피니는 유염이 정신적으로 쇠약해졌을 것이라고 추측한다.[4]

3. 삼국지연의에서의 유염

유비가 예주 자사였을 때 등용되어 종사관이 되었다. 유비는 유염이 풍류를 즐기고 언변에 능숙하며, 같은 유씨 성이라는 점 때문에 빈객으로 대우했다. 유비의 입촉 이후에는 고릉 태수로 임명되었다.[4]

유선 시대에는 도향후에 봉해졌다. 이후 위위, 중군사, 후장군을 거쳐 거기장군으로 승진했다. 건흥 9년(231년) 기산의 싸움에서 이엄의 직무 태만과 은폐 행위에 대해 제갈량이 탄핵할 때, 유염은 "중군사·거기장군·도향후"로서 여러 신하들 가운데 으뜸으로 이름이 올라 있다. 『촉지』 유염전에 따르면 조정에서의 서열(반위)은 항상 이엄 다음이었다.[4]

그러나 국정에는 참여하지 않고 항상 병사 천 명을 거느리는 데 그쳤으며, 제갈량 곁에서 비평이나 건의 등을 했다. 중군사 지위를 받은 것은 제갈량의 측근, 상담역으로서의 입장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또한, 사치스러운 생활을 했다고 한다.[4]

건흥 10년(232년), 한중에서 위연과 불화하여 제갈량에게 해임되었고, 관직은 그대로 성도로 돌아갔다. 그 결과 유염|중국어은 삶의 희망을 잃고 몽롱해졌다.[4]

건흥 12년(234년), 아내 호씨가 황태후 오씨에게 정월 인사를 갔을 때, 황태후는 호씨에게 명하여 1개월 동안 궁중에 머물게 했다. 유염|중국어은 호씨와 유선의 간통을 의심하여 호씨를 채찍질하고 신발로 얼굴을 때린 후 이혼했다. 이 때문에 호씨는 남편에게 받은 학대를 고소했고, 칙명으로 유염|중국어은 체포되어 기시(대중 앞에서 참수하고 시체를 시중에 내거는 형벌)되었다.[4]

이후 촉에서는 중신의 아내나 어머니에 의한 정월 인사는 행해지지 않게 되었다.[4]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이 사건이 제115회, 촉 멸망 직전의 이야기로, 유선의 혼군적인 면모를 강조하고 망국을 암시하는 에피소드로 다루어진다.[4]

참조

[1] 문서
[2] 문서
[3] 서적 Sanguozhi
[4] 서적 A Biographical Dictionary of Later Han to the Three Kingdoms (23–220 AD) Brill
[5] 서적 Sanguozhi
[6] 서적 Sanguozhi
[7] 서적 Sanguozhi
[8] 서적 Sanguozhi
[9] 서적 Sanguozhi
[10] 서적 Sanguozhi
[11] 서적 Sanguozhi
[12] 서적 Sanguozhi
[13] 서적 Sanguozhi
[14] 서적 Sanguozhi
[15] 서적 Sanguozhi
[16] 서적 Sanguozhi
[17] 서적 Sanguozhi
[18] 서적 Sanguozhi
[19] 문서
[20] 서적 삼국지
[21] 서적 삼국지
[22]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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