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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필산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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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주필산 전투는 645년 당나라의 고구려 침략 과정에서 벌어진 전투로, 당 태종 이세민이 고구려군을 안시성에서 유인하여 벌였다. 고구려군 15만 명이 동원되었으나, 당나라 군대의 포위 공격으로 고연수와 고혜진이 이끄는 부대가 괴멸되었고, 3만 6천여 명이 항복했다. 이 전투는 안시성을 고립시키는 결과를 낳았으며, 고구려-당 전쟁의 중요한 전환점 중 하나로 평가된다. 그러나 전투 기록의 불충분함과 지휘관, 병력 규모에 대한 논란이 존재하며, 2018년 영화 "안시성"에서 주필산 전투를 다루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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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필산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전투 개요
전투명주필산 전투
일부제1차 여당 전쟁
시기645년 6월 23일
장소고구려 안시성(현재 중화인민공화국 랴오닝성 하이청) 근처
결과당나라의 승리, 고구려 지원군의 괴멸
교전 세력
교전국 1당나라
교전국 2고구려
지휘관 및 지도자
당나라당 태종 (황제), 이도종 (황족), 장손무기 (조국공), 계필하력 (양국공), 이세적, 울지경덕, 설인귀, 아사나사 (아시나 셰어), 기리비 칸
고구려연개소문 (고구려 대장군), 고혜진 (포로), 고연수 (포로)
병력 규모
당나라30,000명
고구려150,000명
사상자 및 피해
당나라불명, 경미한 피해
고구려전 병력 궤멸, 36,800명 항복

2. 배경

당 태종은 644년 고구려를 침략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군사 독재자 연개소문이 전 고구려 국왕 영류왕과 다른 관리들을 살해한 사건을 구실로 삼았다. 해당 관리들은 당 태종에게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이는 군사 강경파인 연개소문이 결코 용납하지 않았던 것이었다.[5]

645년 4월 1일, 당 태종의 명령에 따라 장군 이세적이 이끄는 당나라 군대가 고구려 영토로 진입하면서 침략이 시작되었다.[13] 이 공격은 압록강 북쪽의 고구려 영토에 대한 해상 및 육상 합동 공격이었으며, 요동과 백암 등 고구려 지역이 당나라의 지배하에 놓일 위험에 처했다.

2. 1. 고구려-당 전쟁의 발발

644년 6월, 당 태종고구려 침략을 명령했다. 이는 군사 독재자 연개소문이 이전 국왕 영류왕과 조정 신하들을 살해한 사건을 구실로 삼은 것이었다. 당 태종은 11월에 수륙 양면으로 약 50만 명에 달하는 대규모 원정군을 편성하여 공격을 시작했고, 이듬해 2월에는 낙양을 출발하여 직접 원정길에 올랐다.[5]

당나라 군대는 돌궐거란으로 구성된 이민족 군대를 포함하여, 수나라의 원정군과는 질적으로 다른 정예병으로 구성되었다. 또한, 각종 공성용(攻城用) 기구를 총동원했다.[5]

이세적이 이끄는 선발대, 당 태종 이세민이 직접 지휘하는 친정군, 그리고 장량이 지휘하는 수군이 세 갈래로 침입해 왔다. 당군은 효과적인 기만전술과 기습으로 고구려의 현도성, 개모성, 비사성, 요동성, 백암성 등을 차례로 함락시켰다. 당시 요동 방면에서는 가장 북쪽의 신성, 남쪽의 안시성, 건안성 등이 격렬히 저항하고 있었다. 당 태종의 대군은 요동성에서 집결한 후, 안시성 방면으로 진격했다.

2. 2. 고구려의 대응

연개소문은 645년 6월 고현진과 고연수 장군에게 15만 명의 군대를 주어 왕국의 북쪽 방어를 강화하게 했다.[6] 이 군대의 규모는 당시 왕국의 작은 인구와 취약한 경제 상황에 비해 매우 컸다. 당나라 군대가 고구려 영토 동쪽으로 진격하여 도시들을 하나씩 점령하는 동안, 고구려는 대규모 군대를 동원했으며, 6월 11일 당나라 군대는 요동성으로 알려진 요동 지역의 수도이자 10만 명의 주민이 거주하는 고구려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인 안시성에 도착했다. 안시성은 북쪽 육상 고구려 방어 시스템의 중심지였기에, 만약 이 도시가 함락된다면 압록강 남쪽의 고구려는 침략에 무방비 상태가 될 것이었다. 따라서 평양에 집결한 대규모 구원 군대가 포위된 안시성을 돕기 위해 북쪽으로 이동했다.

3. 전투의 전개

고구려 북부를 수색하던 첩자들과 기마 정찰병들은 당 태종에게 평양에서 안시성이 당나라에 함락되는 것을 막기 위해 상당한 규모의 구원군이 오고 있다고 보고했다. 이는 연개소문이 안시성을 구원하기 위해 고연수고혜진 두 장군과 함께 보낸 군대였다. 황제를 수장으로 하는 군사 회의가 소집되었고, 황제는 장군들에게 안시성을 둘러싼 가파른 언덕에 토목 공사를 하여 성의 수비대가 탈출할 기회를 막고, 한편으로 군대는 구원군과 대결하고, 이도종 황자가 이끄는 소규모 기병 부대를 언덕에 숨겨 구원군의 후방을 측면 공격하게 할 계획이었다. 황제가 계획한 대로 전투는 망치와 모루 전술로 결정될 것이었다.[4]

두 군대는 6월 21일에 주필산 기슭 평원에서 마주쳤으며, 고구려군은 평원의 남쪽 끝 강 건너편에 있었다.

23일에 고구려 장수 고연수가 당나라 군대가 작아 보이고 방어선이 얇게 쳐진 것을 확인하면서 전투가 시작되었다. 고연수는 기병을 이끌고 공격하여 그의 군대 앞에 있는 대규모 당나라 군대를 몰아내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이것은 당 태종이 고구려 군대를 함정으로 유인하기 위한 책략이었다. 고연수가 이끄는 고구려 기병대는 안시 남쪽에 있는 주필산 기슭의 전장을 장악하고 있던 평원을 가로질러 방패 방어벽 대형으로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당나라 보병을 향해 돌격했다. 고혜진도 뒤따라 공격에 가담했다. 당나라 진형 내에서 궁수, 쇠뇌병, 투석기에서 쏟아지는 대량의 투사에도 불구하고 기병 돌격은 그 기세를 유지하며 마침내 방패 방어벽에 충돌하여 많은 당나라 사상자를 냈다. 그러나 곧 당나라 군대의 긴 방패 방어벽 뒤에는 당 태종과 그의 수행원들이 멀리 뒤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 거대하고 밀집된 보병들이 있다는 사실이 두 장군에게 충격을 안겨주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당나라 군대에 대한 공격을 계속했다. 그리하여 대규모 당나라 전투 대열은 직선에서 U자형으로 천천히 전개되어 고구려에게 승리에 대한 그릇된 인식을 심어주었다.

당 태종은 장손무기와 다른 장군들이 주필산 북쪽 언덕에 숨어 있던 11,000명의 기병대를 이끌고 측면 공격을 시작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칸나이 전투와 유사하게 당나라 기병대는 고구려 기병대의 후방으로 쇄도하여 후방을 공격했다. 두 고구려 장군은 병사들을 모아 계속 싸우려 했지만 당나라 군대는 포위를 강화하며 밀어붙이기 시작했고, 일방적인 대량 학살은 계속되었다. 상황을 구제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두 고구려 장군은 포위망에서 군대의 잔존 병력을 이끌고 남쪽 강을 건너 본대로 복귀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그 과정에서 30,000명의 병력이 죽었다. 더욱 심각한 것은, 그들이 본대로 돌아가는 강에 놓인 다리가 당 태종의 명령에 따라 장손무기에 의해 이미 파괴되었다는 사실이었다. 두 장군은 본대로 복귀할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고 남은 병력을 이끌고 주필산 정상을 향해 북쪽으로 진격했고, 당나라 군대는 맹렬하게 추격하여 마침내 주필산 정상에서 남은 고구려 군대를 다시 포위했다.[4]

주필산 정상에 고립된 동료들을 구출하기 위해 고구려 군의 주력 부대가 마침내 강을 건너 전투에 합류하여 당나라 군대를 공격했으나, 곧 당나라 군대의 삼면 공격을 받아 산 정상에 있는 동료들에게 도달하는 데 실패했다.

모든 것을 잃었다고 판단한 고연수와 고혜진은 산 정상에 고립된 지휘관의 잔여 병력을 항복시켰는데, 이들은 이제 부상병과 굶주린 병사 3,800명으로 줄어들었다. 아직 항복하지 않은 고구려 군대, 즉 주필산 정상에 있는 동료들을 구출하려다 실패한 병력은 당나라 군대의 삼면 공격을 받아 짓뭉개지다가 마침내 남쪽으로 후퇴하여 흩어졌고,[2] 추격하는 당나라 군대에 의해 대부분이 추격 중에 사망하고 33,000명의 고구려 병사가 포로로 잡혔다.[4]

3. 1. 당 태종의 전략

당태종은 고구려군을 안시성에서 끌어내기 위해 유인 전술을 사용했다. 우선 돌궐 출신 좌위대장군 아사나두이에게 기병 1천 명을 주어 고구려군을 공격하게 했다. 첫 교전에서 당나라 군사가 패하자, 고구려군 지휘관 고연수는 "다루기가 쉽구나"라고 말하며 안시성 동남방 8리 지점까지 진격했다.[4]

당태종은 고구려군을 더 깊숙이 유인하기 위해 사신을 보내 고연수에게 거짓으로 항복 의사를 전했다.

> "나는 너희 나라의 권력 있는 신하가 임금을 시해한 죄를 물으러 온 것이니, 우리가 서로 전투를 하게 된 것은 나의 본심이 아니다. 너희 나라 경내에 들어오니 마초와 양식이 충분하지 않아 몇 개 성을 빼앗기는 하였으나, 너희 나라가 신하의 예절을 지킨다면 잃었던 성은 반드시 돌려 줄 것이다."

이에 속은 고연수는 방심하여 제대로 된 수비 태세를 갖추지 않았다.

당태종은 이세적에게 보병과 기병 1만 5천 명을 주어 서쪽 고개에 진을 치게 하고, 장손무기에게 정예군 1만 1천 명으로 기습병을 조직하여 고구려군 후방을 공격하게 했다. 자신은 직접 보병과 기병 4천 명을 이끌고 산에 올랐다. 당나라 군대는 북과 나팔 소리를 신호로 일제히 고구려군을 공격했다.[4]

고연수는 당군의 수가 적은 것을 보고 공격을 시도했으나, 장손무기 부대의 먼지를 신호로 당나라 군대가 사방에서 공격해오자 혼란에 빠졌다. 칸나에 전투처럼 삼면이 포위된 고구려군은 큰 피해를 입었다.

당태종은 망치와 모루 전술을 사용하여, 장손무기가 이끄는 11,000명의 기병대로 고구려군의 후방을 공격하여 전세를 뒤집었다.[4]

3. 2. 주필산 회전

당 태종은 고구려군을 안시성에서 끌어내기 위해 계략을 썼다. 고구려군 선봉장 고연수고혜진은 당군의 유인책에 속아 안시성에서 멀리 떨어진 주필산까지 진격했다.[4]

6월 21일 밤, 당 태종은 이세적에게 보병과 기병 1만 5천 명을 주어 서쪽 고개에 매복시키고, 장손무기에게는 정예병 1만 1천 명을 이끌고 산 북쪽에서 고구려군 후방을 공격하게 했다. 당 태종 자신은 4천 명의 병력을 이끌고 산에 올랐다.

6월 22일 아침, 고연수는 당군의 수가 적은 것을 보고 공격을 시작했다. 당 태종은 장손무기 부대의 움직임을 신호로 삼아 공격 명령을 내렸다. 사방에서 당군이 공격해 오자 고구려군은 혼란에 빠졌다.

고구려군은 당군의 포위망에 갇혀 큰 피해를 입었다. 특히, 당나라군에서 사병 설인귀가 고구려 진영으로 깊숙히 들어왔다고 기록되어 있다.[4] 고연수와 고혜진은 남은 병력을 이끌고 강을 건너려 했으나, 이미 장손무기가 다리를 파괴한 후였다. 결국, 고구려군은 주필산에서 포위되었고, 3만여 명이 전사했다.[4]

고연수와 고혜진은 3만 6천 8백 명의 병력을 이끌고 항복했다. 당 태종은 고구려 장수 3천 5백 명을 당나라로 보내고, 말갈인 3천 3백 명은 생매장했다. 나머지 고구려 병사들은 풀어주었다. 당나라는 이 전투에서 말 5만 필, 소 5만 마리, 금속 갑옷 1만 벌 등 많은 전리품을 획득했다.[4]

주필산 전투는 고구려가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여 당나라와 평원에서 맞붙은 드문 전투였다. 그러나 고구려군은 당군의 계략에 빠져 대패했고, 이는 안시성 전투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3. 3. 전투의 결과

주필산 전투의 패배로 안시성은 고구려 본토와 고립되었고, 고구려의 병력은 크게 소모되었다.[7] 이는 전쟁 기간 동안 고구려의 전쟁 수행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고구려 장수 고혜진과 고연수는 당나라에 투항하여 당 태종으로부터 황제의 작위를 받았으며, 이후 고구려 정벌에 대한 조언을 했다.[15]

이후 당 태종은 안시성을 포위했지만, 악천후와 보급 부족으로 3개월 만에 포위를 풀었다. 안시성은 함락을 면했지만, 주필산 전투의 참패는 고구려의 병력 소모를 가져왔다. 결국 고구려는 668년, 수도 평양을 포함한 대부분의 영토를 당나라에 정복당하고, 나머지 영토는 신라에게 넘어가면서 멸망했다.

4. 전투 기록에 관한 의문

주필산 전투에 대한 기록은 주로 중국 측 사서와 《삼국사기》에 의존하고 있다. 이 때문에 전투 초기 당나라 군대가 고연수, 고혜진의 부대에게 승리한 부분만 기록되어 있고, 그 이후 고구려 본군과의 전투 전개와 결과는 생략되어 있어 전투 전체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어렵다.[1]

현대 역사학자들은 주필산 전투의 총사령관이 고연수, 고혜진이었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주필산 전투에 동원된 고구려군 15만 명은 당시 고구려 인구와 각 지역에 배치된 병력을 고려할 때 단일 전투에 동원된 병력으로는 매우 큰 규모이다. 이러한 대규모 부대를 지휘하기에는 당시 북부 욕살과 남부 욕살이었던 고연수고혜진의 직급이 너무 낮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1]

주필산 전투에 대한 기록이 당나라 측 자료에만 의존하고 있고, 시기적으로 이어지는 안시성 전투와의 과정에 공백이 있으며, 이후 전투에 대한 구체적인 상황 설명이 없다는 점도 이러한 의문을 뒷받침한다.[1]

4. 1. 사료 부족과 해석의 어려움

주필산 전투에 대한 기록은 주로 중국 측 사서와 《삼국사기》에 의존하고 있다. 이 때문에 전투 초기 당나라 군대가 고연수, 고혜진의 부대에게 승리한 부분만 기록되어 있고, 그 이후 고구려 본군과의 전투 전개와 결과는 생략되어 있어 전투 전체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어렵다.[1]

현대 역사학자들은 당시 주필산 전투의 총사령관이 고연수, 고혜진이었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주필산 전투에 동원된 고구려군 15만 명은 당시 고구려 인구와 각 지역에 배치된 병력을 고려할 때, 단일 전투에 동원된 병력으로는 고구려와 이후 한국 역사상 최대 규모에 가깝다. 이러한 대규모 부대를 지휘하기에는 당시 북부 욕살과 남부 욕살이었던 고연수고혜진의 직급이 너무 낮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고연수고혜진의 기록이 자세히 전해지는 이유는 이들이 당나라에 항복했기 때문이며, 항복하지 않은 다른 고구려 측 인물들의 이름은 자세히 남아있지 않다.[1]

주필산 전투에 대한 기록이 당나라 측 자료인 《구당서》, 《신당서》 등에만 의존하고 있고, 시기적으로 이어지는 안시성 전투와의 과정에 공백이 있으며, 이후 전투에 대한 구체적인 상황 설명이 없다는 점도 이러한 의문을 뒷받침한다.[1]

따라서 일부 사학자들은 북부 욕살 고연수와 남부 욕살 고혜진은 고구려 15만 군대의 선봉이었고, 총사령관은 당시 사서에 등장하여 전략을 세웠던 대대로 고정의였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사서에 기록된 것처럼 고정의대대로라는 높은 직급과 많은 나이, 풍부한 경험을 가진 인물로 묘사되어 과거 고구려-수 전쟁 때도 참전했을 것으로 추정된다.[1]

또한 항복한 고구려군 대다수를 평양성으로 돌려보냈다는 기록, 주필산 전투 후 50여 일간 안시성으로 진격하지 못하고 주필산 지역에서 공격을 받으며 진지를 옮긴 기록, 안시성 전투 당시에 안시성에 10만여 명의 군대가 있었다는 기록 등으로 미루어 볼 때, 고구려군이 실제로 전멸하지 않았다는 추측도 제기되고 있다.[1]

4. 2. 지휘관 및 병력 규모 논란

高延壽중국어와 高惠眞중국어이 이끌었던 고구려군의 규모는 15만 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당시 고구려의 인구와 각 지역에 배치된 병력을 고려할 때, 단일 전투에 이렇게 많은 병력이 동원된 것은 이례적이다. 이 때문에 역사학자들은 실제 병력 규모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1]

일부 학자들은 주필산 전투의 총사령관이 高延壽중국어와 高惠眞중국어이 아니라 고정의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고정의는 당시 대대로의 높은 직급에 있었고, 나이가 많고 경험이 풍부한 인물로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할 때, 15만 명에 달하는 대규모 병력을 지휘하기에는 욕살이었던 高延壽중국어나 高惠眞중국어보다 고정의가 더 적합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1]

高延壽중국어와 高惠眞중국어에 대한 기록이 자세히 남아있는 이유는 이들이 당나라에 항복했기 때문이며, 항복하지 않은 다른 고구려 측 지휘관들의 이름은 기록되지 않았다. 주필산 전투에 대한 기록은 주로 당나라 측 자료인 《구당서》, 《신당서》 등에 의존하고 있으며, 안시성 전투와의 연결 과정에 공백이 있고, 이후 전투에 대한 구체적인 상황 설명이 부족하다.[1]

항복한 고구려군 대다수를 평양성으로 돌려보냈다는 기록, 주필산 전투 후 50여 일간 안시성으로 진격하지 못하고 주필산 지역에서 공격을 받으며 진지를 옮긴 기록, 안시성 전투 당시에 안시성에 10만여 명의 군대가 있었다는 기록 등으로 미루어 보아 고구려군이 실제로 전멸하지 않았다는 추측도 제기되고 있다.[1]

5. 대중 문화

2018년 대한민국 영화 《안시성》은 이 전투를 첫 장면으로 다루었다.[8]

참조

[1] 웹사이트 资治通鉴·唐纪·唐纪十四_古诗文网 https://m.gushiwen.o[...] 2018-08-23
[2] 서적
[3] 웹사이트 안시성싸움[安市城─] - 두피디아 http://www.doopedia.[...] 2016-11-11
[4] 서적 Medieval Chinese Warfare 300–900 https://books.google[...] Routledge 2003-09-02
[5] 웹사이트 안시성전투 http://encykorea.aks[...] 2016-11-11
[6] 웹사이트 안시성싸움[安市城─] - 두피디아 http://www.doopedia.[...] 2016-11-11
[7] 서적 Medieval Chinese Warfare 300–900 https://books.google[...] Routledge 2003-09-02
[8] 웹사이트 Yonhap News Agency https://en.yna.co.kr[...] 2020-02-06
[9] 웹사이트 資治通鑑・唐紀・唐紀十四_古詩文网 https://m.gushiwen.o[...] 2018-08-23
[10] 서적
[11] 웹사이트 안시성싸움[安市城─] - 두피디아 http://www.doopedia.[...] 2016-11-11
[12] 서적 Medieval Chinese Warfare 300–900 https://books.google[...] Routledge 2003-09-02
[13] 웹사이트 민족문화대백과사전- 안시성전투 http://encykorea.aks[...] 2016-11-11
[14] 웹사이트 안시성싸움[安市城─] - 두피디아 http://www.doopedia.[...] 2016-11-11
[15] 서적 Medieval Chinese Warfare 300–900 https://books.google[...] Routledge 2003-09-02
[16] 웹사이트 Yonhap News Agency https://en.yna.co.kr[...] 2020-02-06
[17] 문서 능연각훈신
[18] 문서 위두대형
[19] 문서 대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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