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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왕 랍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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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체왕 랍탄은 1665년 준가르 부족의 족장 센게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아버지의 사망 이후 숙부 갈단 칸과의 권력 투쟁을 벌였으며, 갈단의 횡포에 반발하여 세력을 키워 준가르를 통일했다. 이후 티베트를 침략하고 청나라와 충돌했으나, 1727년 독살당했다. 그는 준가르부의 지도자로서, 티베트 원정과 청나라와의 갈등 등 17~18세기 중앙아시아 정세에 큰 영향을 미쳤다.

2. 출생 및 배경

체왕 랍탄은 1665년(청나라 강희제 4년) 준가르 부족장 셍게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러나 1670년에서 1671년 사이에 아버지 셍게가 이복 형제들에게 암살당했다.[3] 셍게의 친동생이자 체왕 랍탄의 숙부인 갈단은 달라이 라마 5세 밑에서 수행 중이었으나, 형의 죽음을 듣고 환속하여 준가르로 돌아와 복수했다.[1]

로마노프 왕조(러시아 제국) 측 사료에는 1671년 10월 러시아 사절을 호송한 칼미크족 추장으로 "타이샤 가간"과 "아라브타리"라는 두 사람이 나타나는데, 이들을 각각 갈단과 체왕 랍탄으로 보기도 한다. 당시 갈단은 홍타이지로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에, 선대 부족장 셍게의 아들로서 당시 불과 7세였던 어린 조카 체왕 랍탄의 이름을 내세웠다고 여겨진다.[1]

1676년[4], 갈단은 호쇼트 부족의 오치르트 체첸 칸을 토벌했는데, 이 토벌전에 체왕 랍탄과 그의 동생 소놈도 종군했다는 주장이 있다.[1]

2. 1. 출생년도에 관한 논란

교토부립대 강사 와카마츠 히로시에 따르면, 체왕 랍탄의 출생 연도에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독일 학자 뮐러(G. F. Müller)와 동시대의 팔라스(P. S. Pallas)가 주장하는 1665년( 강희 4년) 설이다. 다른 하나는 부찰푸차 부항이 건륭 연간에 편찬한 『흠정평정준갈이방략』[2]의 「갈단체린갈단·체린」 조항에 나오는 1643년(청 숭덕 8년) 설이다.[1]

와카마츠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1665년 설을 채택하고 있다.[1]

  • 체왕의 숙부 갈단이 1644-45년에 태어난 것으로 여겨지므로, 1643년 설은 성립하지 않는다.
  • 아버지 셍게는 1630년에 태어난 것으로 여겨지므로, 1643년 설에 따르면 체왕은 셍게가 14세 때 태어난 것이 된다.
  • 체왕은 1727년에 사망한 것으로 여겨지는데, 1643년 설에 따르면 85세의 고령으로 사망한 것이 된다. 그러나 1722-23년에 체왕 본영에 체류했던 러시아 사절 이반 운코프스키(Ivan Unkovsky)[18]에 따르면, 당시 체왕은 60세였다고 한다. 1643년 설은 이와 일치하지 않지만, 1665년 설은 대체로 일치한다.
  • 이반에 따르면, 1671년 셍게 살해 당시 체왕은 어린아이였다고 한다. 1665년 설이라면 7세로 타당하지만, 1643년 설이라면 29세로 어린아이라고 할 수 없다.


미야와키 준코는 셍게 살해를 1670년(강희 9년)으로 보고, 당시 체왕이 7세였다고 주장한다.[3] 중국과 그 주변 제국에서는 오랫동안 세는나이가 일반적이었기 때문에, 만 나이로 환산하면 5-6세가 되어, 1664-65년으로 1665년 설과 거의 일치한다.

따라서, 본 문서에서는 체왕 랍탄의 출생을 1665년( 강희 4년)으로 한다.

2. 2. 아버지의 죽음과 갈단의 등장

1665년(청나라 강희제 4년) 준가르 부족 족장 센게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러나 1670년부터 1671년 사이에 아버지 센게가 종족을 둘러싼 갈등 끝에 이복 형제들에게 암살당했다.[3] 센게의 친동생이자 체왕 랍탄의 숙부인 갈단은 당시 출가하여 달라이 라마 5세 밑에서 수행 중이었으나, 형의 죽음을 듣고 환속하여 준가르로 돌아와 이복 형 체첸을 잡아 죽이고, 또 다른 이복 형 조트바 바토르를 칭하이로 몰아내며 복수했다.[1]

체왕 랍탄의 유년기 기록은 청나라 측 사료에는 없지만, 로마노프 왕조(러시아 제국) 측 사료에는 1671년 10월 러시아 사절을 호송한 칼미크족 추장으로 "타이샤 가간"과 "아라브타리"라는 두 사람이 나타나는데, 이들을 각각 갈단과 '''체왕 랍탄'''으로 보기도 한다. "타이샤"는 "타이시"의 러시아어 발음으로, 중국어 "태사"에서 음역된 칭호이다. 당시 갈단은 아직 홍타이지로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에, 선대 부족장 센게의 아들로서 당시 불과 7세였던 어린 조카 체왕 랍탄의 이름을 내세웠다고 여겨진다. 준가르를 평정한 갈단이 "홍타이지"를 칭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1672년이며, 그 전후로 형수 아누를 취했다.[1]

1676년[4], 갈단은 오이라트 연합의 일원인 호쇼트 부족의 오치르트 체첸 칸을 토벌했다. 프랑스 동양사학자 쿠랑(Maurice Courant)은 이 토벌전에 체왕 랍탄과 그의 동생 소놈도 종군했다고 주장한다.[1]

3. 권력 투쟁과 준가르 통일

체왕 랍탄은 1714년 딸 보이탈락을 라상 칸의 장남 단중과 결혼시켜[10] 티베트 침공을 준비했다. 1715년까지 준가르의 세력을 강화했고, 1717년 암도에 군대 300명을 보내 7대 달라이 라마를 라사로 데려와 티베트의 지지를 얻으려 했다. 또한 형제 체렌 돈두브가 이끄는 6,000명의 군대로 호쇼트로부터 라사를 점령하고 라상 칸을 살해했다.

그러나 쿰붐 사원에서 청나라 군대에 패하여 달라이 라마를 확보하지 못했다. 준가르 군대는 라사 일대에서 약탈, 강간, 살인을 저질렀고, 티베트인들은 강희제에게 준가르족을 몰아내 달라고 호소했다. 1718년 살윈강 전투에서 청나라 군대를 격퇴했지만, 1720년 두 번째 원정 때 청나라에 라사를 점령당했다.

1717년경 단중이 체왕 랍탄에게 살해된 후, 보이탈락은 코이드의 왕자와 결혼하여 아무르사나(1723–1757)를 낳았다. 아무르사나는 건륭제 치세에 준가리아의 칸이 되었다.[10]

3. 1. 갈단과의 갈등

체왕 랍탄은 1714년 딸 보이탈락을 라상 칸의 장남 단중과 결혼시켰다. 그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티베트 침공을 준비하기 위해 라상의 군대를 파괴했다. 1715년까지 준가르의 세력을 강화했고, 1717년 암도에 군대 300명을 보내 7대 달라이 라마를 데려와 라사로 데려와 티베트의 지지를 얻으려 했으며, 그의 형제 체렌 돈두브가 이끄는 다른 군대 6,000명은 라사를 호쇼트로부터 성공적으로 점령하고 라상 칸을 살해했다.

그러나 첫 번째 군대는 쿰붐 사원에서 청나라 군대에 패하여 달라이 라마를 확보하는 데 실패했다. 준가르 군대는 라사와 그 주변 지역에서 약탈, 강간, 살인을 저지르며 난동을 부렸다. 곧 티베트인들은 강희제에게 준가르족을 몰아내 달라고 호소했다. 준가르의 티베트 점령은 시간이 지날수록 유지하기 어려워졌고, 그들은 1718년 살윈강 전투에서 조직력이 부족한 중국 침공을 격퇴했지만, 청나라 군대는 1720년 두 번째이자 더 큰 원정 동안 라사를 점령했다.

단중이 1717년경 체왕 랍탄의 손에 죽은 것으로 알려진 후, 보이탈락은 준가르족의 한 부분인 코이드의 ''타이샤'' 또는 왕자와 결혼하여 나중에 아무르사나(1723–1757)를 낳았는데, 그는 건륭제 치세 동안 준가리아의 칸으로 성장했다.

체왕 랍탄은 결국 갈단과 결별하게 된다. 이 갈등은 1679년 (청나라강희 18년) 체왕의 약혼녀 아카이를 갈단이 가로챈 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간다.[6] 아카이는 갈단에 의해 토벌된 호쇼트 부 오치르트 체첸 칸의 손녀로, 체왕의 아버지 셍게의 아내 아누의 여동생에 해당한다.[5] 아누는 셍게의 적을 처치한 갈단에게 재가했기 때문에, 갈단은 자매 두 사람을 손에 넣게 되었다.[6] 또한 이 무렵, 갈단은 달라이 라마 5세 (로상 갸초)로부터 보쇼크트 칸博碩克図・汗의 칭호를 부여받아, 같은 해에 사신을 파견하여 강희조에 통고했다.[7] 그때까지 타이치台吉의 칭호를 인정했던 청나라는 칸의 칭호를 승인했다.[7][8]

1688년 (강희 27년)에는 체왕의 동생 소놈이 살해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갈단 칸이 할하 부를 정벌하고, 호브드의 본영으로 귀환한 것이 같은 해 10월 17일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9] 소놈은 아마도 같은 해 말에 살해된 것으로 보인다. 교살 혹은 독살이라고도 하지만, 어느 쪽이든 주모자가 갈단 칸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으며, 나충 오목보라는 인물이 그 협력자라고 한다. 일설에는 갈단 칸이 장로 라마 (나충 오목보)의 교사에 의해, 체왕, 소놈 형제에 대한 경계심을 품기 시작했고, 선대 부족장 셍게의 아들로서 체왕이 왕위 찬탈과 영토 회복을 꾀하고 있다고 의심했기 때문에, 세력이 확대되기 전에 제거하려 했다고 한다. 소놈이 살해된 날 밤, 체왕은 우연히 외출했기 때문에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지만, 미수에 그쳤지만 갈단 칸이 체왕 살해를 꾀하고 있었음은 명백했다.[6]

갈단 칸은 당시 달라이 라마 5세 (로상 갸초) 아래에서 권세를 떨친 디바 (간덴 포당, 즉 서장 정부의 집정자)의 상기에 의해 지지를 받아, 티베트 불교를 신봉하는 준가르 제국의 건설에 열정을 쏟은 나머지, 부중의 이익과 상반되는 행동을 했다. 임종에 즈음하여 갈단 칸 자신이, 달라이 라마에 의해 선동되어 부중을 소홀히 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러한 정세는 서서히 부내의 사람들에게 갈단 칸으로부터의 이반을 초래했고, 은밀히 체왕을 옹립하는 세력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체왕의 갈단 칸에 대한 개인적인 원한과, 부내에 끓어오르는 갈단 칸에 대한 불만이, 서서히 공통의 이해관계를 낳으면서, 갈단 칸 파와 체왕 파의 결렬로 이어졌다.[10]

3. 2. 준가르 분열과 도주

체왕 랍탄과 갈단의 갈등은 1679년(청나라 강희 18년) 체왕의 약혼녀 아카이를 갈단에게 빼앗기면서 시작되었다.[6] 아카이는 갈단에게 토벌된 호쇼트 부 오치르트 체첸 칸의 손녀이자, 체왕의 아버지 셍게의 아내 아누의 여동생이었다.[5] 아누는 셍게의 적을 처치한 갈단에게 재가했기 때문에, 갈단은 두 자매를 모두 차지하게 되었다.[6]

1688년(강희 27년), 체왕의 동생 소놈이 살해되었다. 갈단 칸이 할하 부를 정벌하고 호브드 본영으로 돌아온 것이 같은 해 10월 17일이므로,[9] 소놈은 그해 말에 살해된 것으로 추정된다. 사인은 교살 또는 독살로 추정되며, 주모자는 갈단 칸, 협력자는 나충 오목보이다.[6] 갈단 칸은 라마 (나충 오목보)의 교사로 체왕, 소놈 형제를 경계하게 되었고, 이들이 왕위를 찬탈하고 영토를 회복하려 한다고 의심하여 제거하려 했다.[6] 소놈이 살해되던 날 밤, 체왕은 외출하여 목숨을 건졌지만, 갈단 칸의 체왕 암살 시도는 명백했다.[6]

갈단 칸은 달라이 라마 5세의 지지를 받아 티베트 불교를 신봉하는 준가르 제국 건설에 몰두하면서 부중의 이익과 상반되는 행동을 했다. 그는 임종 직전에 달라이 라마에게 선동되어 부중을 소홀히 했다고 말했다.[10] 이러한 상황은 부내 사람들의 이반을 초래했고, 체왕을 옹립하는 세력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체왕의 개인적인 원한과 부내의 불만이 결합되어 갈단 칸 파와 체왕 파의 결렬로 이어졌다.[10]

1689년(강희 28년) 봄, 체왕은 아버지 셍게의 옛 신하 7명과 갈단 칸 반대파 부대 5,000명을 이끌고 도주했다. 체왕 일행이 카라 아자라가 언덕을 넘으려 할 때, 갈단 칸은 호브드에서 전군을 이끌고 추격했다.[9] 카라 아자라가는 레나트의 "칼무크 지도"[13]에 나오는 문 카라 아질가로 비정되며, 호브드와 울리야스타이 사이를 가로지르는 자브한 강 서남쪽(현 몽골 고비알타이 주)에 해당한다.[6]

레나트는 스웨덴 군인으로, 준가르에서 포로 생활을 한 후 체왕과 그의 아들 갈단체린을 섬겼다. 1733년(옹정 11년) 풀려난 후 포로 기간 동안 얻은 준가리아 (중앙 아시아) 지도(스웨덴 웁살라 대학교 도서관 소장[13])를 가지고 1734년에 귀국했다.[6]

"옛 신하 7명"은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다르자 자먕,[11] 갈단 칸의 동생 온춘 타이치의 차남,[6] 등이 도주에 참여했다. 온춘의 장남 단질라는 갈단 칸의 충신이었다.[10] 이 외에 돌베트 부의 여러 타이치들이 체왕을 따랐다.[11] 돌베트 부는 체왕 집권 이후 준가르 부와 함께 오이라트팔부족 연합의 일각을 담당했다.[6] 체왕의 막내 동생 단진 옴부는 갈단 칸 사후 합류했으나, 형 소노마 람부탄 암살에 관여한 혐의로 체왕에게 구금되었다가 석방되었다.[10]

카라 아자라가 언덕을 넘은 체왕 일행은 "어린하필얼가"[11] (에렌 하빌가)에 도착했다. 이곳은 일리강 지류 하슈 강의 발원지 부근(현 신장 위구르 자치구일리 카자흐 자치주닐카 현 동쪽 경계)에 위치한 톈산산맥 동부 지맥 중 하나이다.[6]

에렌 하빌가에 도착한 직후 갈단 칸 군이 들이닥쳤다. 갈단 칸의 군세는 2천 명, 체왕 세력은 5천 명이었다. 갈단 칸은 체왕에게 도망치는 이유를 물었고, 체왕 암살 계획이 실패했음을 깨닫고 세력 차이 때문에 일시적으로 물러났다.

갈단 칸 군이 철수하자 체왕 등은 울란 우순으로 이동하여 갈단 칸 군과 교전했다.[11] 울란 우순은 현 신장 위구르 자치구일리 카자흐 자치주타르바가타이 지구사완 시 울란우스 진으로 비정된다.[15] 갈단 칸 측에서 투항자가 나타나면서 갈단 칸은 패배하여 후퇴했고,[9] 체왕은 다시 한번 위기에서 벗어났다. 이 상황은 『성조인황제실록』에도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다.[16]

3. 3. 청나라와의 관계

체왕 랍탄은 1714년 그의 딸 보이타라크(博託洛克)를 라상 칸의 장남 단중(丹衷)과 결혼시켰다.[10] 이 결혼은 체왕 랍탄이 티베트 침략에 대비하여 라상 칸의 군대 일부를 해산시키는 기회가 되었다.

1715년, 체왕 랍탄은 준가르부를 통합했다. 1717년에는 300명의 군대를 암도 지역으로 보내 제7대 달라이 라마를 탈환하고 라싸로 데려와 티베트의 지원을 통합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또한 그의 형제 체렌 돈두브가 이끄는 6,000명의 군대를 보내 호쇼트로부터 라싸를 빼앗고 라상 칸을 죽였다. 그러나 쿰붐에 주둔하던 청나라 군대에 패배하여 달라이 라마를 데려오는 데는 실패했다.

준가르 군대는 라싸와 그 주변을 약탈하고 강간과 학살을 저질렀다. 얼마 지나지 않아 티베트인들은 강희제에게 준가르족을 몰아내 달라고 호소했다. 준가르의 티베트 점령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유지하기가 더 어려워졌다. 1718년 살윈 강 전투에서 전열이 제대로 정비되지 않은 청나라 군대를 물리쳤지만, 청나라 군대는 1720년 라싸에 대한 두 번째이자 대규모 원정에 성공하였다.

1717년에 단중이 체왕 랍탄의 손에 사망한 뒤, 보이타라크는 준가르부의 일파인 호이트부의 ''타이샤'' (왕자)와 결혼하였다. 그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무르사나(1723-1757)는 훗날 준가르 칸국의 칸이 되었으며, 이는 건륭제의 치세와 겹치는 시기였다.[10]

1690년 4월, 청나라 강희제는 체왕 랍탄 세력을 회유하기 위해 시독학사 달호를 파견하여 칙서와 은사한 단자를 선물로 주고 준가르의 내정을 정찰하게 했다. 달호는 체왕 랍탄과 아누에게 은사품을 주고 칙서를 낭독했다.[19] 강희제는 칙서를 통해 체왕 랍탄과 갈단 칸 사이의 갈등 원인을 밝히고 숨기지 말라고 지시했다.

1691년 2월, 체왕 랍탄과 아누는 달르한 낭소를 사자로 파견하여 갈단 칸과의 적대 관계 전말을 보고했다. 강희제는 달르한 낭소에게 은상을 주고 낭중 상액을 호위로 붙여 귀환시켰다.[23]

4. 티베트 원정과 청나라와의 충돌

체왕 랍탄은 신앙적인 이유로 티베트에 대한 청나라의 영향력과 구시 칸 왕조의 티베트 국왕 라상 칸에 대한 반감을 품고 있었다. 1714년, 그는 자신의 딸 보이타라크를 라상 칸의 장남 단중과 결혼시킨 뒤, 준가르에 인질로 억류했다.[24] 1715년에는 하미, 투르판에서 청나라와 충돌하여 전쟁 상태가 되었다.[24]

1717년경 단중이 체왕 랍탄에 의해 살해된 것으로 알려진 후, 보이타라크는 오이라트 부족의 일파인 호이트부의 족장과 재혼하여 아무르사나를 낳았다. 아무르사나는 훗날 건륭제 치세에 준가르의 훙타이지가 되었다.[25]

1727년, 체왕 랍탄은 토르구트 부의 사절이 도착했을 때 독살당했다. 그의 의붓아들 갈단 체링은 토르구트 출신의 두 번째 부인 세테르자부의 소행으로 간주하여 처형했고, 그 아들 로브잔 쇼노는 볼가로 도망쳤다.[25]

4. 1. 티베트 원정

1714년 체왕 랍탄은 자신의 딸 보이타라크(博託洛克)를 라상 칸의 장남 단중(丹衷)과 결혼시켰다.[24] 이 결혼을 통해 그는 티베트 침략에 대비하여 라상 칸의 군대 일부를 해산시키는 기회를 얻었다.

1715년 체왕 랍탄은 준가르부를 통합했고, 1717년 300명의 군대를 암도로 보내 제7대 달라이 라마를 탈환하여 라싸로 데려와 티베트의 지원을 통합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또한 그의 형제 체렌 돈두브가 이끄는 6,000명의 군대를 보내 호쇼트로부터 라싸를 빼앗고 라상 칸을 죽였다.[26] 그러나 쿰붐에 주둔하고 있던 의 병력에 패배하여 달라이 라마를 데려오는 데는 실패했다.

준가르 군대는 라싸와 그 주변을 약탈하고 강간과 학살을 저질렀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티베트인들은 강희제에게 준가르를 몰아내 달라고 호소했다. 준가르의 티베트 점령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유지하기가 더 어려워졌고, 1718년 살윈 강 전투에서 전열이 제대로 정비되지 않은 청의 군대를 물리치는 데 성공했지만, 1720년 청의 군대는 라싸에 대한 두 번째이자 대규모 원정에 성공하였다.[27]

4. 2. 청나라와의 충돌

1714년 체왕 랍탄은 그의 딸 보이타라크(博託洛克)를 라상 칸의 장남 단중(丹衷)과 결혼시켰다.[24] 이를 기회로 그는 티베트 침략에 대비하여 라상 칸의 일부 군대를 해산시켰다.

1715년 준가르부를 통합했고, 1717년 300명의 군대를 암도로 보내 7대 달라이 라마를 탈환하고 그를 라싸로 데려와 티베트의 지원을 통합할 계획을 세웠으며, 그의 형제 체렌 돈두브가 이끄는 6000명의 군대를 보내어 호쇼트로부터 라싸를 빼앗고 라상 칸을 죽였다.[26] 그러나 쿰붐에 주둔하고 있던 의 병력에 패배하여 달라이 라마를 데려오는 데는 실패했다.

준가르 군대는 라싸와 그 주변을 약탈하고 강간과 학살을 저질렀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티베트인들은 강희제에게 준가르를 몰아내 달라고 호소했다. 준가르의 티베트 점령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유지하기가 더 어려워졌고, 1718년 살윈 강 전투에서 전열이 제대로 정비되지 않은 청나라 군대를 물리치는 데 성공했지만, 청나라 군대는 1720년 라싸에 대한 두 번째이자 대규모 원정에 성공하였다.[27]

5. 가족 관계

구 분내 용
아버지셍게
어머니아누 카툰 (생모 미상)
숙부갈단 칸
동생소놈 아라브탄, 단진 옴부
아내
자녀


참조

[1] 학술지 〈論説〉ツェワン・アラブタンの登場
[2] 서적 欽定平定準噶爾方略 https://kotobank.jp/[...] ブリタニカ・ジャパン
[3] 서적 最後の遊牧民族 ジューンガル部の興亡 講談社選書メチエ
[4] 학술지 ガルダン以前のオイラット - 若松説再批判
[5] 서적 聖祖仁皇帝實錄 "-"
[6] 학술지 〈論説〉ツェワン・アラブタンの登場
[7] 서적 聖祖仁皇帝實錄 "-"
[8] 서적 聖祖仁皇帝實錄 "-"
[9] 서적 Rabǰamba Cay-a bandida-yin tuquǰi saran-u gerel kemekü ene metu bolai Эрдэм Шинжилгээний хэвлэх
[10] 학술지 〈論説〉ツェワン・アラブタンの登場
[11] 서적 欽定外藩蒙古回部王公表傳 武英殿 嘉慶年間
[12] 서적 聖祖仁皇帝實錄 "-"
[13] 웹사이트 Kalmuckisk karta över Dzungariet m fl områden - Renat 1/Renat A https://uub.primo.ex[...] Uppsala Universitet 2024-02-17
[14] 웹사이트 Kalmuckisk karta - Renat 2/Renat B https://uub.primo.ex[...] Uppsala Universitet 2024-02-18
[15] 학술지 〈論説〉ツェワン・アラブタンの登場
[16] 서적 聖祖仁皇帝實錄 "-"
[17] 서적 欽定平定準噶爾方略 "-" 1770
[18] 서적 Посольство къ Зюнгарскому Хунъ-Тайчжи Цэванъ-Рабтану капитана отъ артиллерии Ивана Унковского и путевой журналъ его за 1722-1724 годы. "-"
[19] 서적 聖祖仁皇帝實錄 "-"
[20] 서적 聖祖仁皇帝實錄 "-"
[21] 서적 聖祖仁皇帝實錄 "-"
[22] 서적 聖祖仁皇帝實錄 "-"
[23] 서적 聖祖仁皇帝實錄 "-"
[24] 서적 Eminent Chinese of the Ch'ing Period United States Government Printing Office 2022-03-24
[25] 서적 Eminent Chinese of the Ch'ing Period United States Government Printing Office 2022-04-01
[26] 서적 Tibetan nation: a history of Tibetan nationalism and Sino-Tibetan relations https://books.google[...] Westview Press
[27] 서적 The Fourteen Dalai Lamas: A Sacred Legacy of Reincarnation https://books.google[...] Clear Light Publishers
[28] 서적 改訂新版 世界大百科事典 https://kotobank.jp/[...] 平凡社
[29] 학술지 ガルダン以前のオイラット - 若松説再批判
[30] 서적 最後の遊牧民族 ジューンガル部の興亡 講談社選書メチ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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