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도 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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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암도 지구는 티베트 북동부를 포함하며, 칭하이호와 황하 상류를 아우르는 지역이다. 지리적으로는 바람이 강하고 나무가 적으며 초원이 넓게 펼쳐져 있고, 야크, 조, 양, 말 등 가축을 기르며 티베트인, 몽골인 등이 거주한다. 역사적으로 토번 왕조, 몽골 제국, 청나라의 지배를 받았으며, 중화민국 시기를 거쳐 중화인민공화국에 편입되었다. 현재는 칭하이성, 간쑤성, 쓰촨성 일부에 걸쳐 있으며, 티베트 자치주, 자치현 등으로 행정 구역이 구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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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도 지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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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지리
암도는 티베트 북동부 전체를 포함하며, 마추강(황하) 상류와 칭하이호를 포함한다. 남쪽 경계는 바얀하르산맥이다.[6] 이 지역은 바람이 많이 불고 나무가 거의 없으며, 풀이 많다. 이 지역의 동물로는 들소와 키앙이 있다. 이 지역의 가축으로는 야크, 조, 염소, 양, 몽골 말이 있다.[7]
중화인민공화국의 행정 구분에 따르면, 다음 지역을 합한 영역에 거의 상당한다.[62]
성 | 지급 행정구역 | 현급 행정구역 |
---|---|---|
칭하이성 | ||
간쑤성 | ||
쓰촨성 | 아바 티베트족 창족 자치주 |
역사적으로 암도 지역에는 몽골인과 같은 비(非) 티베트인이나, 호르인과 같이 티베트 기원이 아닌 티베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거주했다. 암도 지역의 거주민은 암도와(ཨ་མདོ་པ།|a mdo pabo)라고 불리며, 캄(ཁམས་པ།|khams pabo)과 Ü-Tsang 지역의 티베트인과는 구분되지만, 민족적으로는 모두 티베트인으로 간주된다.
3. 인구
3. 1. 주요 거주 지역
역사 시대에 이 지역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몽골인과 같은 비(非) 티베트인이거나, 호르인과 같이 티베트 기원이 아닌 티베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었다.[22] 암도 지역의 거주민은 캄(ཁམས་པ།|khams pabo)과 Ü-Tsang 지역의 티베트인과 구별하기 위해 암도와(ཨ་མདོ་པ།|a mdo pabo)라고 불리지만, 모두 민족적으로 티베트인으로 간주된다.
오늘날 암도의 서부와 남부 지역에는 민족 티베트인이 우세하며, 이곳은 현재 다양한 티베트족, 티베트-창족, 또는 몽골-티베트족 자치주로 관리되고 있다. 한족은 칭하이성 북부(하이시 몽골족 및 티베트족 자치주)와 동부(시닝시 및 하이둥시)에서 다수를 차지한다. 시닝시와 하이둥시는 칭하이성의 다른 지역에 비해 지리적으로 작지만, 인구 밀도가 가장 높아 칭하이성 전체에서 한족이 다른 민족보다 많다.
대다수의 암도 티베트인은 Mtshobyang(མཚོ་བྱང་།, 중국어: 하이베이), Mtsholho(མཚོ་ལྷོ་།, 중국어: 하이난), Rmalho(རྨ་ལྷོ་།, 중국어: 황난), Mgolog(མགོ་ལོག།, 중국어: 구뤄)을 포함한 칭하이성의 더 넓은 지역,[8] 뿐만 아니라 간쑤성 남서부의 Kanlho(ཀན་ལྷོ།, 중국어: 간난)와 쓰촨성 북서부의 Rngaba(རྔ་བ།, 아바)의 일부 지역에 거주한다. 또한, 많은 수의 암도 티베트인이 칭하이호(མཚོ་སྔོན།, Wylie: ''mtsho sngon'') 동쪽에 위치하고 시닝시(ཟི་ལིང།, ''zi ling'')시 주변에 있는 칭하이성의 하이둥시(མཚོ་ཤར།, Wylie: ''mtsho shar'') 안에 살고 있지만, 이 지역 전체 인구의 소수(약 8.5%)만을 차지하므로 자치주 지위를 얻지 못했다. 하이시(མཚོ་ནུབ།, ''mtsho nub'')는 칭하이 호수의 서쪽에 위치하며, 티베트인 소수(약 10%)가 거주하며, 이 자치주 동부 지역의 티베트인만이 암도 거주민이다.[9]
몽골족 또한 암도 지역에 오랫동안 정착해 왔으며, 처음에는 칭기즈 칸 시대에 왔지만, 특히 명나라 시대에 일련의 정착 물결을 겪었다. 수세기에 걸쳐, 대부분의 암도 몽골족은 매우 티베트화되었고, 표면적으로는 그들의 원래 비티베트 민족성을 구별하기 어렵다.[9] 암도는 서사시와 역사에서 훌륭한 말이 길러지고 야생에서 뛰노는 땅으로 유명하다.[10]
4. 언어
암도 지역은 많은 집단이 지리적으로 고립되어 있어 다양한 티베트어 방언이 사용된다. 문자 티베트어는 티베트어를 사용하는 모든 지역에서 동일하며, 고전 티베트어를 기반으로 한다.
5. 역사
역사 시대에 암도 지역 사람들은 주로 몽골인과 같이 티베트인이 아니거나, 호르인처럼 티베트족 출신은 아니지만 티베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었다.[22] 암도 지역 거주민은 캄(ཁམས་པ།)과 Ü-Tsang 지역의 티베트인과 구별하기 위해 암도와(ཨ་མདོ་པ།)라고 불리지만, 모두 민족적으로는 티베트인으로 간주된다.
오늘날 암도의 서부와 남부 지역은 티베트인이 다수를 차지하며, 이 지역은 현재 다양한 티베트족, 티베트-창족, 또는 몽골-티베트족 자치주로 관리되고 있다. 한족은 칭하이성 북부(하이시 몽골족 및 티베트족 자치주)와 동부(시닝 시 및 하이둥 시)에서 다수를 차지한다. 시닝 시와 하이둥 시는 칭하이 성의 다른 지역에 비해 면적은 작지만, 인구 밀도가 높아 칭하이 성 전체적으로는 한족이 다른 민족보다 많다.
대부분의 암도 티베트인은 므초뱡(མཚོ་བྱང་།), 므초료(མཚོ་ལྷོ་།), 마료(རྨ་ལྷོ་།), 고록(མགོ་ལོག།)을 포함한 칭하이 성의 넓은 지역,[8] 간쑤 성 남서부의 칸료(ཀན་ལྷོ།), 쓰촨 성 북서부의 응아바(རྔ་བ།) 등지에 거주한다. 또한 많은 암도 티베트인이 칭하이호(མཚོ་སྔོན།) 동쪽, 시닝(ཟི་ལིང།) 시 주변의 칭하이 성 하이둥(མཚོ་ཤར།) 주에 살고 있지만, 이 지역 전체 인구의 약 8.5%만을 차지하여 자치주 지위를 얻지 못했다. 하이시(མཚོ་ནུབ།)는 칭하이 호 서쪽에 위치하며, 약 10%의 티베트인이 거주하고, 이 자치주 동부 지역의 티베트인만이 암도 주민으로 간주된다.[9]
몽골족 또한 암도 지역에 오랫동안 정착해 왔는데, 처음에는 칭기즈 칸 시대에 왔지만, 특히 명나라 시대에 여러 차례 이주해 왔다. 수 세기에 걸쳐 대부분의 암도 몽골족은 티베트화되어, 겉으로는 원래의 비(非)티베트 민족 정체성을 구별하기 어렵게 되었다.[9] 암도는 서사시와 역사에서 훌륭한 말이 길러지고 야생에서 뛰노는 땅으로 유명하다.[10]
암도의 역사는 초기 역사, 토번 왕조 시대, 중세 시대, 몽골과 청나라 시대, 중화민국 시대, 중화인민공화국 시대로 구분할 수 있으며, 자세한 내용은 하위 섹션을 참고하면 된다.
5. 1. 초기 역사 (7세기 이전)
강족은 철을 일찍 사용했으며, 철 갑옷과 철 검을 착용한 그들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11] 강족은 숨파와 접촉했고, 이후 토욕혼과 접촉했다. 1032년경, 강족의 후예로 추정되는 탕구트족은 서하를 건국하여 13세기까지 존속했다.토번 왕조에 의한 티베트 건국에 앞서 이 지역에는 선비모용부의 지류인 토욕혼(투위훈/아샤)이 세력을 떨치고 있었다. 토번 왕조에 의한 티베트 고원의 통일과 실질적인 건국(7세기) 이후 토욕혼은 티베트와 중국 사이에서 쟁탈의 대상이 되었다. 토번 정권과 중국의 수·당 왕조의 항쟁은 티베트 측의 승리로 끝나고 토욕혼의 군주는 '아샤 왕'의 칭호와 왕국 조직을 유지한 채 토번 왕가에 신종했다.
5. 2. 토번 왕조 시대 (7세기 - 9세기)
7세기부터 9세기까지 토번 제국은 크게 확장하여 북쪽으로는 투르판, 남쪽으로는 인도와 네팔, 동쪽으로는 장안, 서쪽으로는 사마르칸트까지 이르렀다.[12] 이 시기 암도의 지배권은 송첸 감포와 그 후계자들로부터 왕족 대신 가르에게 넘어갔다. 이들은 황제처럼 부모로부터 직위를 물려받았다. 투송 왕은 통제권을 되찾으려 했으나 실패했다.821년, 토번 제국과 당나라는 조약을 맺고 경계를 정했으며, 세 개의 비석이 국경, 라싸, 장안에 각각 세워졌다. 토번 군대는 동쪽 변경에 정착했다.
838년, 토번의 왕 랑다르마가 그의 형제를 살해한 후, 토번 제국은 여러 독립된 공국으로 분열되었다. 암도는 세습 군주와 왕국으로 이루어진 독립적인 정치 체제를 유지했으며, 몽골인과 중국인 인구는 토착 민족과 토번인 사이에서 변동했다. 이 시기 중앙 토번 출신 불교 승려들이 암도 지역으로 추방되었다.
9세기 암도에는 세금을 징수하기 위해 파견된 관리가 있었는데, 그는 봉토를 얻게 되었다. 그는 그 땅의 10가지 미덕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자원 | 미덕 1 | 미덕 2 |
---|---|---|
풀 | 집 근처 목초지 | 멀리 떨어진 목초지 |
흙 | 집을 짓는 데 사용 | 좋은 밭 |
물 | 식수 | 관개 |
돌 | 건축 | 제분 |
나무 | 건축 | 장작 |
암도 지역의 원래 거주민은 숲 거주자, 산 거주자, 평원 거주자, 풀 사람, 나무꾼이었다. 풀 사람들은 특히 말로 유명했다.
토번 왕조에 의한 티베트 건국 이전에는 선비족 모용부의 지류인 토욕혼이 이 지역에서 세력을 떨치고 있었다.
토번 왕조가 티베트 고원을 통일하고 건국(7세기)한 이후, 토욕혼은 티베트와 중국 사이의 쟁탈 대상이 되었다. 토번과 중국의 수, 당나라 간의 항쟁은 티베트의 승리로 끝났고, 토욕혼 군주는 '아샤 왕' 칭호와 왕국 조직을 유지한 채 토번 왕가에 신종했다.
9세기, 토번 왕조가 붕괴한 후 토번 왕실의 황자가 이 땅으로 도망쳐 소정권을 수립했다.[56]
5. 3. 중세 시대 (9세기 - 17세기)
9세기, 토번 왕조가 붕괴된 후 토번 왕실의 황자가 이 땅으로 도망쳐 소정권을 수립했다.[56] 토번 제국은 독립된 여러 공국으로 분열되었고, 도캄(암도와 캄)은 문화적, 종교적으로 토번을 유지했다. 암도 내에서는 세습 군주와 왕국으로 이루어진 역사적인 독립 정치체가 유지되었으며, 몽골인과 중국인의 인구는 토착 민족과 토번인 사이에서 변동했다. 이 기간 동안 중앙 토번 출신의 불교 승려들이 암도 지역으로 추방되었다.9세기 암도로 세금을 징수하기 위해 파견된 관리에 대한 역사적 기록이 있다. 그는 그 땅의 10가지 미덕(풀, 흙, 물, 돌, 목재)에 대해 이야기한다. 암도 지역의 원래 거주민은 숲 거주자, 산 거주자, 평원 거주자, 풀 사람, 그리고 나무꾼이었다. 풀 사람들은 그들의 말로 유명했다.
게와셀은 티베트 불교를 부흥시키는 데 기여한 승려이다. 그는 어릴 때부터 가르침을 받았고 종교에 대한 놀라운 열정을 보였다. 서품을 받은 후 가르침을 찾아 나섰다. 율장을 얻은 후 중앙 티베트로 여행을 떠나려 했으나, 가뭄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대신 그는 암도로 혼자 여행하기로 결정했다. 현지인들은 그에 대한 소문을 들었고, 그는 곧 많은 사람들의 추앙을 받으며 고독한 생활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시간이 흘러 그는 암도에 망명한 승려들을 모았고, 그가 얻은 재산으로 사찰과 탑을 세웠다.[16]
강족은 숨파와 접촉했고, 이후 토욕혼과 접촉했다. 1032년경, 강족의 후예로 추정되는 탕구트족은 서하를 건국하여 13세기까지 존속했다.
몽골은 1240년까지 동부 암도를 정복했으며, 원나라가 관리하는 다른 영토와 별도로 불교 및 티베트 사무국의 관리하에 두었다.[17][18][19] 후원 관계는 1253년 티베트 승려인 팍파가 쿠빌라이 칸을 방문하면서 시작되었고, 그는 인기를 얻어 쿠빌라이의 정신적 지도가 되었으며, 이후 티베트의 승왕 지위에 임명되어 (1) 13개 주를 포함하는 티베트 본토인 우-창, (2) 캄, (3) 암도를 통치하게 되었다.[3] 그는 만년에 사캬 사원에서 보냈으며, 이곳으로 가기 위해 암도를 정기적으로 통과해야 했다. 이러한 여행 중 한 번은 암도에서 무장 저항에 직면하여 몽골 왕자들의 호위를 받으며 암도를 통과해야 했다.[20] '티베트의 세 지역'이라는 개념은 티베트 제국 시대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지만, 둔황 문서에서는 그 영토의 동부 지역을 mdo-gams 및 mdo-smad로 언급했다.[21][22] 원나라는 이 구분을 확인했고, 도 캄은 우-창과 함께 두 개의 잘 정의된 지휘부로, 그 이후로 티베트의 세 지휘부로 통칭되었다. 티베트는 1368년 토착 중국인들이 원나라를 전복하기 전에 몽골로부터 독립을 되찾았지만, 원나라가 몰락할 때까지 원 조정에 직접적으로 저항하는 것은 피했다.[23] 1343년까지 암도에서의 몽골 권력은 상당히 약화되었다. 쾨덴의 봉토는 오랫동안 지도자가 없었고, 티베트인들은 량저우 근처에서 몽골인들을 괴롭혔다. 1347년, 동부 티베트의 약 200곳에서 대규모 반란이 일어났고, 이를 진압하기 위해 군대가 파견되었지만, 1355년까지 동부 티베트는 몽골의 왕조 역사에서 더 이상 언급되지 않았다.[24]
비록 다음의 명나라가 형식적으로 티베트의 몽골 분할을 일부 하위 분할과 함께 유지했지만, 그들의 권력은 약화되었고 암도에 주로 그들의 국경에서 영향을 미쳤다.[24] 몽골인들은 16세기 중반부터 다시 암도 지역의 정치적 통제권을 장악했다.[25] 그러나 명나라는 허저우와 시닝 웨이에서 통제권을 계속 유지했다.
17세기 초, 몽골의 대칸, 린단 칸에게 충실한 할하의 초크토 훈타이지가 이 땅을 제압했다. 린단 칸이 병사하고 그 적자 예제이가 아이신기오로 아이신국에 항복하자 초크토는 자신의 칭호를 칸으로 고쳐 '초크토 칸'을 칭했다.
초크토는 1637년, 오이라트 여러 부의 군세를 이끌고 원정해 온 오이라트부족 연합의 맹주 투르바이후에게 패사했다. 투르바이후는 라싸에 올라 다라이 라마 5세로부터 '호교법왕(텐진 쵸에키겔포/샤진바리크치 노문칸)'의 칭호를 하사받아 오이라트의 수장으로서는 처음으로 '칸'의 칭호를 칭했다.[57]
투르바이후는 준가르의 바토르 훈타이지 등 동맹 부족의 수장들에게 보상을 주고 오이라트 본국으로 돌려보내는 한편, 자신의 황자들과 호쇼트부의 직속 부민들을 이 땅으로 불러들여 이 땅을 본거지로 삼아 1640년~42년에 걸쳐 티베트 각지를 평정, 1642년, 함락된 지 얼마 안 된 찬토 왕의 삼둡체 궁전에서 '티베트 삼주의 왕'에 즉위했다. 동시에 다라이 라마 5세에게 찬토 왕의 구령과 거의 비슷한 '티베트 십삼만호'(=야루창포강 유역)가 기증되었고 그 찬즈파(재무 담당)에게 파크모두파 정권과 역대 찬토 왕에게 계승되어 온 칭호 '데시'가 주어져 다라이 라마 정권이 발족했다. 다라이 라마 정권에서 '데시' 직에는 '섭정'이라는 번역어가 적용되는 경우가 많다.[58]
투르바이후에 따라 티베트 정복에 종사하여 그대로 칭하이호 서방으로 뻗어 있는 샤라·타라의 땅(칭하이 초원)에 정착한 호쇼트부 및 기타 오이라트계 유목민들은 칭하이 호쇼트, 칭하이 오이라트[59]라고 불리게 되었다.
5. 4. 몽골과 청나라 시대 (17세기 - 20세기 초)
몽골은 1240년까지 동부 암도를 정복했으며, 원나라가 관리하는 다른 영토와 별도로 불교 및 티베트 사무국의 관리하에 두었다.[17][18][19] 1253년 티베트 승려인 팍파가 쿠빌라이 칸을 방문하면서 후원 관계가 시작되었고, 그는 인기를 얻어 쿠빌라이의 정신적 지도가 되었으며, 이후 티베트의 승왕 지위에 임명되어 (1) 13개 주를 포함하는 티베트 본토인 우-창, (2) 캄, (3) 암도를 통치하게 되었다.[3] 그는 만년에 사캬 사원에서 보냈으며, 이곳으로 가기 위해 암도를 정기적으로 통과해야 했다. 이러한 여행 중 한 번은 암도에서 무장 저항에 직면하여 몽골 왕자들의 호위를 받으며 암도를 통과해야 했다.[20]''티베트의 세 지역''이라는 개념은 티베트 제국 시대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지만, 둔황 문서에서는 그 영토의 동부 지역을 mdo-gams 및 mdo-smad 로 언급했다.[21][22] 원나라는 이 구분을 확인했고, 도 캄은 우-창과 함께 두 개의 잘 정의된 지휘부로, 그 이후로 티베트의 세 지휘부로 통칭되었다. 티베트는 1368년 토착 중국인들이 원나라를 전복하기 전에 몽골로부터 독립을 되찾았지만, 원나라가 몰락할 때까지 원 조정에 직접적으로 저항하는 것은 피했다.[23] 1343년까지 암도에서의 몽골 권력은 상당히 약화되었다. 쾨덴의 봉토는 오랫동안 지도자가 없었고, 티베트인들은 량저우(byang ngos) 근처에서 몽골인들을 괴롭혔다. 1347년, 동부 티베트의 약 200곳에서 대규모 반란이 일어났고, 이를 진압하기 위해 군대가 파견되었지만, 1355년까지 동부 티베트는 몽골의 왕조 역사에서 더 이상 언급되지 않았다.[24]
명나라는 형식적으로 티베트의 몽골 분할을 일부 하위 분할과 함께 유지했지만, 그들의 권력은 약화되었고 암도에 주로 국경에서 영향을 미쳤다.[24] 몽골인들은 16세기 중반부터 다시 암도 지역의 정치적 통제권을 장악했다.[25] 그러나 명나라는 허저우와 시닝 웨이에서 통제권을 계속 유지했다.
16세기와 17세기에 신장의 북부의 상(코코노르) 몽골인과 할하 몽골이 이곳에 왔다.[26] 티베트와 암도에서 몽골 여러 세력 간의 권력 투쟁은 달라이 라마(명목상)와 몽골 지배자 사이를 오가는 시기를 초래했다. 1642년, 티베트는 몽골 왕 구시 칸의 노력으로 정신적, 세속적 권위를 얻어 제5대 달라이 라마 치하에서 재통일되었다. 이는 겔룩 종파와 그들의 환생한 영적 지도자인 달라이 라마가 오늘날까지 지속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지원을 얻도록 했다.[27] 구시 칸은 또한 동티베트(캄)의 일부를 티베트로 반환했지만, 암도의 코코노르 지역에 있는 그의 근거지는 몽골의 통제하에 남아 있었다.[27]
17세기 초, 몽골의 대칸, 린단 칸에게 충실한 할하의 초크토 훈타이지가 이 땅을 제압했다. 린단 칸이 병사하고 그 적자 예제이가 아이신기오로 아이신국에 항복하자 초크토는 자신의 칭호를 칸으로 고쳐 '초크토 칸'을 칭했다. 1637년, 오이라트 여러 부의 군세를 이끌고 원정해 온 오이라트부족 연합의 맹주 투르바이후에게 초크토는 패사했다. 투르바이후는 라싸에 올라 다라이 라마 5세로부터 '호교법왕(텐진 쵸에키겔포/샤진바리크치 노문칸)'의 칭호를 하사받아 오이라트의 수장으로서는 처음으로 '칸'의 칭호를 칭했다.[57]
투르바이후는 준가르의 바토르 훈타이지 등 동맹 부족의 수장들에게 보상을 주고 오이라트 본국으로 돌려보내는 한편, 자신의 황자들과 호쇼트부의 직속 부민들을 이 땅으로 불러들여 이 땅을 본거지로 삼아 1640년~42년에 걸쳐 티베트 각지를 평정했다. 1642년, 함락된 지 얼마 안 된 찬토 왕의 삼둡체 궁전에서 '티베트 삼주의 왕'에 즉위했다. 동시에 다라이 라마 5세에게 찬토 왕의 구령과 거의 비슷한 '티베트 십삼만호'(=야루창포강 유역)가 기증되었고 그 찬즈파(재무 담당)에게 파크모두파 정권과 역대 찬토 왕에게 계승되어 온 칭호 '데시'가 주어져 다라이 라마 정권이 발족했다. 다라이 라마 정권에서 '데시' 직에는 '섭정'이라는 번역어가 적용되는 경우가 많다.[58]
투르바이후에 따라 티베트 정복에 종사하여 그대로 칭하이호 서방으로 뻗어 있는 샤라·타라의 땅(칭하이 초원)에 정착한 호쇼트부 및 기타 오이라트계 유목민들은 칭하이 호쇼트, 칭하이 오이라트[59]라고 불리게 되었다.
1705년, 강희제의 승인을 받은 호쇼트 칸국의 라쌍 칸은 섭정을 폐위시키고 6대 달라이 라마를 살해했다. 준가르 몽골족은 혼란 속에서 티베트 침공을 감행하여, 1720년 청나라 황실 군대의 원정에 최종적으로 패배할 때까지 이 지역 전체를 점령했다.[28][29]
18세기 초 만주족의 청나라가 권력을 잡으면서 암도 북쪽의 도시인 시닝을 이 지역의 행정 기지로 삼았다. 암도는 칭하이 지역에 편입되었다.[30] 이 기간 동안 그들은 암반의 통치를 받았으며, 암반은 수도원과 다른 지역 지도자들에게 거의 완전한 자율성을 허용했다.[31] 18세기에 청나라의 내몽골 지배는 암도를 포함한 동티베트를 삼키면서 티베트로 계속해서 확장되었고 심지어 청의 티베트 지배하에 중앙 티베트를 장악했다.[32]
옹정제는 1720년대에 칭하이(암도)에 대한 완전한 통제권을 장악했다. 이후 암도의 대부분을 포함하는 시닝 부와 쓰촨성 및 정통 티베트의 경계가 확립되었다. 시닝 부와 시짱 자치구, 즉 중앙 티베트의 경계는 탕굴라 산맥이었다. 이는 대략적으로 칭하이성과 티베트 자치구의 현대적인 경계와 일치한다. 시닝 부와 쓰촨성의 경계도 이 시기에 설정되어, 이전 암도의 아바 지역을 쓰촨성으로 분할했다. 이 경계 또한 칭하이성과 쓰촨성의 현대적인 경계와 대략 일치한다. 닝칭 산맥을 따라 쓰촨성과 티베트 사이에는 새로운 경계가 설정되었다. 이 산맥 동쪽에서는 지역 족장들이 쓰촨성 지방 정부의 명목상의 권한 아래 통치했고, 라싸는 서쪽 지역을 관리했다. 따라서 1720년대에 티베트는 수세기 만에 처음으로 영토가 크게 축소되었다.[33] 티베트와 접경한 간쑤 지역은 황실 총독이 관리했다. 이 나라의 일부는 중국법의 적용을 받았고 티베트인들은 황실 정부로부터 보조금이나 임무를 받은 티베트 족장들의 통치를 받으며 거의 완전한 독립을 누렸다.[34]
구시 칸의 자손들은 1723~24년에 청나라의 옹정제로부터 공격을 받아 굴복하여 다라이 라마의 후계자를 결정할 권리, 티베트 왕권, 티베트 각지의 직할지 및 제후에 대한 지배권 등을 모두 박탈당했다.[60] 칭하이 오이라트는 청나라에 의해 맹기제 하에 30기로 재편성되어 칭하이 초원과 그 위에 사는 오이라트계 유목민을 30가로 나누는 소규모 영주가 되었으며, 이판원을 통해 청나라로부터 소유의 안도를 받게 되었다.
그 외, 토사로서 병부를 통해 청나라로부터 소유의 안도를 받는 암도 지방의 제후에는 초네 왕(줘니 토사)이 있다. 칭하이 오이라트 30기와 그 남방[61]을 영유하는 난첸 왕의 소유는 청나라 하에서 묶여 '번부의 칭하이 지방'으로 위치 지어졌으며 간쑤성의 시닝에 주찰하는 시닝 변사 대신을 통해 청나라의 지배를 받았다.
5. 5. 중화민국 시대 (1912년 - 1949년)
1912년 청나라가 멸망하고, 달라이 라마가 중앙 티베트를 통치하게 되면서, 암도와 캄을 포함한 동부 티베트는 지방 군벌과 족장들이 다스리게 되었다.[36] 이 지역 북부와 동부의 농업 지역은 회족 무슬림들이 관리했다.[54] 암도에는 세속 지도자와 종교 지도자를 포함한 많은 권력자들이 있었는데, 라브랑 사원, 레브콩 사원, 탁창 라모 사원과 같은 사원들은 지역 지도자나 촌장 선출을 감독했다.[54] 소크워, 응아와, 류린에는 세속 지도자가 임명되었고, 일부는 왕조를 세우기도 했다.[37]무슬림 군벌 마 치는 중화민국의 이름으로 라브랑 사원과 골록족을 상대로 전쟁을 벌였다.[38] 1918년 민족 폭동 이후, 마 치는 티베트인들을 격파하고 8년 동안 과도한 세금을 부과했다.[38] 1925년 티베트 반란이 일어나 마치는 3,000명의 군대를 동원해 라브랑을 탈환하고 도망치는 티베트 승려들에게 기관총을 난사했다.[38][39] 1927년까지 티베트인과 몽골족은 마 치의 군대와 싸워 라브랑을 장악했다.[40] 그러나 무슬림 군대는 다시 사원을 약탈하고 파괴했다.[40]
1928년, 마 가벌은 국민당과 동맹을 맺었다. 1930년대에 무슬림 군벌 마 부팡은 장제스의 중앙 정부를 명분으로 암도의 북동쪽 구석을 점령하여 칭하이성에 편입시켰다.[42] 1949년까지 암도의 대부분은 점차 국민당 중국 지방 체제에 동화되었으며, 주요 부분은 칭하이성의 일부가 되었고, 작은 부분은 간쑤성의 일부가 되었다.[43] 그러나 중국 행정력이 부재했기 때문에, 암도와 캄의 농촌 지역 대부분은 1950년대까지 자체적인 지역 티베트 지도자 아래에 있었다.[44]
14대 달라이 라마는 1935년 암도 지역에서 태어났는데, 마 부팡은 그가 티베트로 가는 것을 막으려 30만 달러의 몸값을 요구하기도 했다.[45]
1949년 5월, 마 부팡은 서북 중국의 군사 지사가 되어 암도 지역의 최고위 행정관이 되었다. 그러나 1949년 8월, 중국 인민 해방군이 마 부팡의 군대를 전멸시켰다.[46] 1952년까지 암도의 주요 도시들은 중화인민공화국의 통제하에 있었지만, 많은 농촌 지역은 수년간 자치를 누렸다.[47]
5. 6. 중화인민공화국 시대 (1949년 이후)
1949년 중국 인민해방군이 국민당으로부터 암도의 많은 부분을 점령했다.[46] 1952년까지 주요 도시들은 중화인민공화국에 완전히 통제되었지만, 많은 농촌 지역은 수년간 사실상 자치를 누렸다.[47] 1956년 암도에서 티베트 게릴라 부대가 등장하여 1970년대까지 인민해방군과 싸웠다.[48]베이징 올림픽을 앞둔 2008년, 암도 등지에서 시위가 발생했다. 일부는 폭력적이었지만, 대부분 평화적이었다.[51]
5. 6. 1. 암도의 학살 (1950년대)
1958년, 중국 공산당은 캄과 암도의 티베트 지역에 대한 공식적인 통제를 장악했다.[49] 암도의 많은 유목민이 반란을 일으켰다. 일부 지역에서는 남자가 거의 남아 있지 않다고 보고되었는데, 이들은 살해당하거나 투옥되었거나 도망쳤다.[49] 암도에서 가장 큰 사원은 폐쇄되었고, 3,000명의 승려 중 2,000명이 체포되었다.[49]1958년 3월부터 8월까지, 간쑤에서 칭하이성에 걸쳐 42만 제곱킬로미터에 티베트인 130,000명이 '반란'을 일으켰다.[63] 중국군은 이 중 116,000명을 섬멸하고, 무기 70,000정을 압수하여 평정했다.[63] 또한, '칭하이성'의 티베트인·몽골인 유목민 50,000명을 체포했는데, 이는 칭하이성 티베트·몽골인 유목민 총인구의 10%에 해당한다.[63] 체포자의 84%인 45,000명이 오인 체포였다. 구류 중에 23,260명이 사망했고, 잘못 살해된 사람이 173명, 종교·민족 분자 259명, 민족 간부 480명이 사망했다.[63][64]
1958년 7월, 대약진 운동의 혁명적 열기가 중화인민공화국 전역을 휩쓸면서, 문화 티베트 암도 지역의 저쿠 현에서는 중국 공산당이 초원의 목축 공동체에 급격한 집단화를 강요하려는 노력에 반대하는 폭력이 발생했다.[50]
이러한 가혹한 살육 행위에 대해, 1980년에 중국 공산당은 '칭하이에서의 극좌의 오류'라고 했다.[63] 1981년 3월에는 '칭하이성에서의 극좌 정책 재검토'를 결정했다.[63]
6. 종교
게와셀은 티베트 불교를 부흥시키는 데 기여한 승려이다. 그는 어릴 때부터 가르침을 받았고 종교에 대한 놀라운 열정을 보였다. 서품을 받은 후 그는 가르침을 찾아 나섰다. 율장을 얻은 후 그는 중앙 티베트로 여행을 떠나려 했으나, 가뭄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대신 그는 암도로 혼자 여행하기로 결정했다. 현지인들은 그에 대한 소문을 들었고, 그는 곧 많은 사람들의 추앙을 받으며 고독한 생활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시간이 흘러 그는 암도에 망명한 승려들을 모았고, 그가 얻은 재산으로 사찰과 탑을 세웠다.[16]
암도는 전통적으로 훌륭한 학문과 연구의 장소였으며, 시닝 근처의 쿰붐 사원, 레공의 롱워 사원, 란저우 남쪽의 라브랑 사원, 아바 티베트족 창족 자치주의 키르티 곰파와 조게 현의 탁상 라모 등 많은 훌륭한 사원을 포함하고 있다.
1958년부터 1962년까지 암도의 정치적 분위기는 견딜 수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1958년, 쳇텐 사원의 켄포 지메 릭페이 닝포가 시닝의 난탄 감옥에 수감되어 살해된 사건은 이 시기의 시작을 알렸다.[52]
- 쫑카파 (티베트 불교 겔룩파의 개창자)
- 제10대 판첸 라마
- 제14대 달라이 라마
7. 전통 경제
암도 티베트인의 전통적인 생활 방식과 경제는 농업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암도 티베트인들은 지역과 환경에 따라 유목민(드로 파, Drog pa) 또는 농부(셩 파, Sheng pa)로 생활한다.[53] 암도의 경제는 역사적으로 변함없이 유지되어 왔으며 현대에도 큰 변화가 없다.[53] 일반적인 가족은 두 개의 집 또는 거점을 가지고 있는데, 하나는 여름에 더 나은 방목을 위해 동물들과 함께 산으로 이동할 때 사용하고, 다른 하나는 혹독한 겨울을 나고 작은 농지에서 가축의 사료를 재배하는 계곡에 위치한다.[53] 일부 마을의 가족들은 목초지가 가까이에 있어 계절별로 짧은 거리를 이동할 수 있으며, 심지어 매일 집 사이를 이동하기도 한다.[53]
8. 지방 행정
암도와 캄처럼, 독립적인 지역 정치는 전통적인 통치 체제였다. 암도에서 유목민, 농부, 말 상인, 수도원 공동체는 이러한 정치 체제로 조직되었으며, 이는 티베트 제국 시대부터 이어져 왔다. 작은 규모부터 큰 규모까지 다양한 형태를 보였으며, 일부는 세습되었고 다른 일부는 그렇지 않았으며, 여성과 남성 모두 이러한 정치체의 개별 지도자였다.[54]
가족 집단으로 구성된 ''초와''는 기본적인 사회-정치 조직이다. 골록족, 고메 및 루창족은 스스로를 ''초와''로 구성했다. 더 큰 조직은 '야영지'로 번역되는 ''스가르''이며, 더 큰 조직은 '집정관'으로 번역되는 ''낭소''이다. 초네 왕국과 같은 왕국도 있었다.[54] 예를 들어, 1624년 드로창 낭소는 드로창 사르곤이라는 수도원을 후원했으며, 데차 낭소의 수도원은 데차 곰파라고 불렸다. 그 이전인 1376년에는 초네에 말-차 무역소가 있었다.[54]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된 후, 공산주의 행정부는 티베트인이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지역에 기존의 현(縣) 시스템 위에 더 큰 일련의 티베트 자치주(TAP)를 겹쳐 놓았다. 자국 내 "소수 민족"으로 간주되는 티베트인에 대한 이러한 정책은 중화인민공화국 헌법에 명시되었다.[55]
중화인민공화국의 행정 구분에 따르면, 암도는 다음 지역을 합한 영역에 거의 상당한다.[62]
성 | 지급 행정 구역 |
---|---|
칭하이성 (위수 티베트족 자치주 일부 제외한 전역) | 시닝시 |
하이둥시 | |
하이시 몽골족 티베트족 자치주 | |
하이베이 티베트족 자치주 | |
하이난 티베트족 자치주 | |
황난 티베트족 자치주 | |
궈뤄 티베트족 자치주 | |
위수 티베트족 자치주 | |
칭둬 현 | |
자둬 현 | |
즈둬 현 | |
취마라이 현 | |
간쑤성 | 간난 티베트족 자치주 |
우웨이시 (톈주 티베트족 자치현) | |
쓰촨성 | 아바 티베트족 창족 자치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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