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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곡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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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춘추곡량전》은 공자의 제자 자하에게서 곡량자에게 전해졌다고 전해지는, 《춘추》를 해설한 책이다. 전한 시대에 현재 형태를 갖춘 것으로 보이며, 《춘추공양전》의 영향을 받아 성립되었고 노나라를 중심으로 번성했다.

《춘추》는 노나라 은공 원년부터 애공 14년까지 242년간의 역사를 기록한 가장 오래된 편년체 사서로, 맹자에 의해 공자의 뜻을 담은 경전으로 추존되었다. 조선 시대에는 정치적 명분과 사회 기풍을 세우는 데 영향을 미쳤다. 《춘추곡량전》은 《춘추》의 간략한 기록에 대한 해설서 중 하나로, 《춘추공양전》, 《좌씨전》과 함께 춘추삼전으로 불린다.

《곡량전》은 존왕설과 일월의 예를 특징으로 하며, 법가 사상의 영향 논란이 있다. 주석서로는 범녕의 《춘추곡량전집해》가 가장 오래되었으며, 양사훈의 《곡량전주소》가 널리 읽혔다. 청나라 시대에는 한학 부흥으로 재조명되었으나, 《좌씨전》이나 《공양전》에 비해 주목도는 낮았다. 한국에서는 조선 시대에 춘추대의를 강조하는 유학자들에게 영향을 미쳤고, 현대에는 학술 연구 대상으로 다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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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곡량전
개요
춘추곡량전
원어穀梁傳
한자春秋穀梁傳
병음Chūnqiū Gǔliángzhuàn
한국어 음독춘추곡량전
관련 정보
관련 문서춘추
좌전
공양전
특징
내용춘추에 대한 주석
특징공양전과 좌전에 비해 간결하고 실용적인 해석을 제공
역사적 의의
중요성유교 경전 연구에 중요한 자료
영향후대 역사학과 정치사상에 영향

2. 성립 배경 및 역사

곡량전은 춘추의 해석서인 춘추삼전 중 하나로, 그 성립 시기와 과정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춘추≫는 중국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편년체(編年體) 사서(史書)다. 약 1만 6000여 자의 분량으로 노나라 은공 원년(元年, 기원전 722년)부터 애공 14년(기원전 481년)까지 242년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이 기간을 역사에서는 춘추 시대라고 한다. ≪춘추≫는 ≪춘추경≫이라고도 불린다. 맹자에 따르면 춘추 말기 공자가 기존의 노나라 역사 기록을 근거로 정리해 ≪춘추≫를 편찬했다고 한다. 때문에 후세 유가에 의해서 경(經)으로 높여졌다.

맹자 이후 ≪춘추≫는 공자의 뜻이 담긴 지고한 경전으로 추존되었다. 중국뿐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춘추대의(春秋大義)’에 대한 존중은 선유들의 정신에 스며들었고 그에 부합하는 삶을 지향하게 만들었다. 조선의 경우, 친명배원 정책으로부터 북벌론 및 위정척사론에 이르기까지 역사의 고비마다 ≪춘추≫는 정치적 명분의 기준점이 되었고, 사회의 기풍을 선도했으며, 선비의 정신을 대변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춘추≫는 연도순으로 사건을 기록하며, 해마다 춘하추동의 사시(四時)가 먼저 제시되고 사시에는 월(月)과 일(日)이 배속되며 날짜는 간지(干支)로 표시한다. 사건은 조목(條目)으로 나누어 기록되어 있으며 긴 것은 47자, 짧은 것은 1자다. ≪춘추≫의 내용은 대부분 정치 사건인데 전쟁 및 그와 관련한 회맹(會盟) 기록이 특히 많다. 그 외에 제사나 혼상(婚喪) 그리고 일식, 월식, 지진 등 자연 현상을 기록했다. 다만 ≪춘추≫의 기록은 지나치게 소략하여, 시대가 흐르면서 해독하기 어려워졌다. 공자 후학들이 ≪춘추≫에 대한 해설을 전수해야 했던 이유다. ≪한서·예문지(漢書藝文志)≫에는 당시 ≪춘추≫를 해설한 대표적 학파로 좌씨(左氏), 공양(公羊), 곡량(穀梁), 추씨(鄒氏), 협씨(夾氏)를 수록했다. 추씨와 협씨는 사라졌고 현재는 좌씨, 공양, 곡량 세 학파만이 전승된다. 이들 세 학파의 해설서인 ≪좌씨전≫, ≪공양전≫, ≪곡량전≫을 ‘춘추삼전’이라 한다.

≪춘추≫의 기록은 간략하고 뜻은 감추어져 있다. ≪공양전≫이 원칙을 중시했다면 ≪곡량전≫은 사람의 마음을 바로잡는 것을 중시해 그로써 후세에 표준을 드리우고자 했다. ≪춘추≫를 바르게 읽으려면 우선 사실 관계를 ≪좌전≫에서 확인하고, 곡량, 공양을 통해 그 대의를 찾아보는 것이 좋다. 각 방면에 대한 비교 대조 분석 없이 하나를 맹종한다면 ≪춘추≫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2]

2. 1. 전승 및 기원

전승에 따르면 곡량전은 공자의 제자 자하로부터 곡량자(穀梁子, 이름은 적(赤)이라고도 하지만 정확하지 않음)에게 전수되었고, 곡량자가 저술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전승은 공양전과 마찬가지로 사실로 인정하기에 무리가 있다. 적어도 전한 선제 시대에 현재 전해지는 형태로 완성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정설이지만, 그 이전의 성립 경위는 분명하지 않다.[1]

공양전처럼 곡량전에도 여러 명의 경사(經師)가 존재했으며, 여러 가지 전승이 존재했던 것은 사실로 여겨진다. 하지만 곡량전은 분명히 공양전의 영향을 받아 성립된 것으로 보이는 점이 존재하기 때문에, 현행본 곡량전의 모습이 된 것은 적어도 공양전 성립 이후라고 여겨진다. 또한, 공양전이 제나라 학자를 중심으로 번성한 데 비해, 곡량전은 노나라를 중심으로 번성했다고 전해진다.[1]

2. 2. 한나라 시대의 전개

전한 선제는 곡량전에 호의적이었다. 당시 전승자인 '''채천추'''에게 명하여 낭관 10명에게 곡량전을 전수하게 하였다. 유향 등 유명 학자들도 곡량전을 배웠다. 선제는 '''석거각'''(도서관)에서 공양학과 곡량학의 우열을 논하게 하였고, 곡량학이 승리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곡량전의 최성기였고, 이후에는 쇠퇴하여 남북조 시대에는 서적만 존재하고 전의 사상을 전하는 스승은 끊이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3. 사상 및 특징

《춘추곡량전》은 《춘추공양전》과 유사하게 존왕양이(尊王攘夷) 사상을 강조하며, 왕권 강화를 옹호하는 특징을 보인다. 춘추경(春秋經)의 간략한 기록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사상적 특징이 드러난다.

《곡량전》은 원칙을 중시하는 《공양전》과 달리 사람의 마음을 바로잡는 것을 중시하여 후세의 표준을 제시하고자 했다. 《춘추》의 바른 독법은 우선 사실 관계를 《좌전》에서 확인하고, 《곡량전》과 《공양전》을 통해 그 대의를 찾아보는 것이 무난하다고 여겨진다.

일월의 예(日月의 例)는 《곡량전》의 특징 중 하나인데, 경문에 해, 달, 시(사시, 즉 춘하추동)를 쓰는지 여부에 따라 성인의 포폄과 경문의 의미가 변화한다는 것이다. 이는 《공양전》에도 이미 존재하며, 《좌씨전》에도 일부 나타나지만, 《곡량전》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특징이다.

3. 1. 공양전과의 비교

곡량전은 공양전의 영향을 받아 성립되었으며, 공양전보다 더 체계적으로 정리된 학설을 제시한다. 전승에 따르면, 『곡량전』은 『공양전』과 마찬가지로 공자의 제자 자하로부터 곡량자(이름은 적이라고도 하지만 여러 설이 있어 정해지지 않았다)에게 전해졌다고 한다. 하지만 그 전승은 『공양전』 이상으로 무리가 있으며, 적어도 전한 선제 시기에는 현재의 형태로 정리된 것이 밝혀졌지만, 그 이전의 경위는 명확하지 않다.[2]

『공양전』과 마찬가지로, 『곡량전』에도 여러 명의 경사가 존재했으며, 어떤 전승이 존재했던 것은 사실이라고 여겨진다. 하지만 『곡량전』은 분명히 『공양전』의 영향을 받아 성립된 것으로 보이는 점이 존재하기 때문에, 현행본 『곡량전』의 모습이 된 것은 적어도 『공양전』 성립 이후라고 여겨진다. 또한 『공양전』이 제나라 학자를 중심으로 번성한 데 비해, 『곡량전』은 노나라를 중심으로 번성했다고 전해진다.[2]

『곡량전』의 사상 내용은 『공양전』과 마찬가지로 존왕설, 내노설 등에 특징이 있다. 이러한 주장은 『공양전』보다 정리된 것으로 제시되었으며, 특히 존왕설은 강력하게 주장된다. 이처럼 정리된 학설은 『곡량전』이 『공양전』의 성립을 전제로, 이에 대항하기 위해 생겨났기 때문이라고도 한다.[2]

3. 2. 법가 사상의 영향

『곡량전』에는 법가적 사상이 혼재되어 있다는 평가가 있으며, 이는 유학자들에게 배척받는 요인 중 하나로 작용하기도 했다.[2] 다만, 이에 대한 반론도 존재한다.[2]

3. 3. 일월의 예(日月의 例)

일월의 예란 경문에 해, 달, 시(사시, 즉 춘하추동을 의미)를 쓰는지 여부에 따라 성인의 포폄과 경문의 의미가 변화한다는 것이다.[1] 공양전에 이미 존재하며, 좌씨전에도 일례만 일월의 예가 존재하지만, 곡량전에 이르러서는 가장 심하여 일월의 예를 경해의 무기로 삼고 있다.[1] 이 때문에 북송의 유창이 말한 것처럼, 일월의 예의 모순점을 곡량전 전문가 이외의 사람들에게서 지적받았다.[1] 이러한 특징은 청나라의 곡량전 연구에도 계승되어, 일월의 예를 중심으로 학설이 정리되는 경우가 많다.[1]

4. 주석서 및 연구

《춘추곡량전》의 주석서는 《춘추공양전》이나 《춘추좌씨전》에 비해 많지 않다.

4. 1. 주요 주석서

진(晉) 범녕의 『'''춘추곡량전집해(春秋穀梁傳集解)'''』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춘추곡량전』 주석서이다. 두예의 『춘추경전집해』, 하휴의 『춘추경전해고』와 함께 삼전(三傳) 주석서 중 최고 권위를 갖는다.

당(唐) 양사훈은 범녕의 『집해』에 소(疏, 주석에 대한 주석)를 붙여 『'''곡량전주소(穀梁傳注疏)'''』를 완성했다. 이는 『춘추곡량전』의 고주(古注)를 완성한 것으로, 십삼경주소에 포함된다.

4. 2. 비판적 연구

중당(中唐)의 담조, 조광, 육순의 『춘추집전변의(春秋集傳辨疑)』, 북송(北宋) 유창의 『춘추권형(春秋權衡)』, 남송(南宋) 엽몽득의 『춘추예(春秋곡량전예)』, 원(元)나라 정단학의 『춘추삼전변의(春秋三傳辨疑)』는 모두 탁월한 곡량전(穀梁傳) 연구(비판)를 전개했다.[1] 청(淸)나라 종문증의 『춘추곡량경전보주(春秋穀梁經傳補注)』, 요평의 『곡량춘추경전고의소(穀梁春秋經傳古義疏)』도 유명하다.[1]

5. 한국에의 영향

조선 시대에는 춘추대의(春秋大義)를 강조하는 유학자들이 곡량전을 중시하였다. 특히, 친명배원(親明排元), 북벌론(北伐論), 위정척사론(衛正斥邪論) 등 정치적 명분을 세우는 데 영향을 미쳤다.[2] 현대 대한민국에서는 주로 학술적 연구 대상으로 다루어지며, 이와모토 겐지(岩本憲司)의 번역서 등이 출판되었다.

참조

[1] 서적 The Oxford Handbook of Classical Chinese Literature (1000 BCE-900CE) Oxford University Press 2017
[2] 서적 춘추곡량전 지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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