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시빌레 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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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시빌레 휴전은 1943년 9월 3일, 이탈리아가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연합국에 항복하고 추축국에서 이탈하기 위해 체결된 비밀 휴전 협정이다. 북아프리카에서 추축국이 물러난 후 이탈리아의 베니토 무솔리니가 실각하고 피에트로 바돌리오 정부가 수립되면서 연합국과의 비밀 협상이 시작되었다. 이탈리아는 협상을 통해 유리한 조건을 얻으려 했으나, 독일군의 감시 속에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고, 이탈리아군은 혼란에 빠졌다. 협정 발효 후 독일군은 악세 작전을 실행하여 이탈리아를 점령했으며, 이탈리아 해군은 연합국에 항복했다. 이 휴전은 이탈리아의 파시즘 몰락과 민주주의 회복의 기회를 열었지만, 연합군의 이탈리아 전역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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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시빌레 휴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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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약 정보 | |
이름 | 카시빌레 휴전 |
종류 | 항복 |
서명일 | 1943년 9월 3일 |
서명 장소 | 이탈리아 카시빌레 |
발효일 | 1943년 9월 8일 |
발효 조건 | 9월 8일 공개 발표 |
협상가 | 피에트로 바돌리오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
서명 당사자 | 주세페 카스텔라노 케네스 스트롱 월터 베델 스미스 |
관련 국가 | |
정식 명칭 | 연합군에 대한 이탈리아국의 휴전 협정 |
비준 | 이탈리아 고위사령부 영국 미국 |
기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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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배경
1943년 5월 13일 북아프리카에서 추축국이 철수한 이후 연합군은 로마를 폭격하고 시칠리아를 침공하여 이탈리아 본토 상륙을 준비했다.[2]
1943년 봄, 베니토 무솔리니는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국왕에게 더 충성스럽다고 생각되는 여러 인물을 정부에서 제거했다.[2] 무솔리니를 해임하기 위한 계획을 위해 국왕은 디노 그란디에게 도움을 요청했다.[2] 이후 주세페 보타이와 갈레아초 치아노가 반군 세력에 참여했다.[2] 반군 세력은 파시즘 대평의회에서 국왕에게 정치에 대한 직접적인 통제권을 회복하려는 노력을 담은 "오늘의 명령"을 고안했다.[2] 1943년 7월 25일 대평의회에서 이 명령이 채택되었고, 무솔리니는 해임된 후 카라비니에리에 체포되어 폰차섬으로 유배되었다.[2] 피에트로 바돌리오가 각료의회 의장이 되었지만, 엔리코 카빌리아가 그 자리를 차지할 수도 있었다.[2]
바돌리오의 임명 이후에도 이탈리아와 독일과의 관계는 크게 바뀌지 않았지만, 여러 이탈리아 외교관들은 연합국과의 평화 조약을 모색했다.[2] 아돌프 히틀러는 알프스 남쪽의 이탈리아에 군대를 파견했지만, 실제로는 이탈리아를 통제하기 위한 것이었다.[2]
주세페 카스텔라노 장군을 포함한 3명의 이탈리아군 장교가 연합국 외교관들과 별도로 접촉하기 위해 리스본으로 파견되었다.[2] 연합국의 대표에는 포르투갈 주재 영국 대사 로널드 휴 캠벨 경과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가 파견한 미국 참모총장 월터 베델 스미스, 영국인 참모보좌관 케네스 스트롱이 있었다.[2]
8월 27일 카스텔라노 장군은 이탈리아로 돌아왔고, 3일 후 바돌리오에게 바티칸 주재 영국 대사가 제안한 시칠리아에서 회의를 개최하자는 연합국의 요청에 대해 발표했다.[2]
연합국과 이탈리아 정부 사이의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포로로 잡힌 특별작전관리부(SOE)의 요원 딕 말라비(Dick Mallaby)가 베로나의 감옥에서 풀려나 퀴리날레궁으로 비밀스럽게 이동했다.[2]
2. 1. 무솔리니 실각과 바돌리오 정부 수립
2. 2. 연합군과의 비밀 협상
3. 협상 과정
3. 1. 이탈리아의 항복 조건 요구
바돌리오는 항복의 대가로 유리한 조건을 얻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했으며, 카스텔라노에게 이탈리아의 항복은 연합국이 이탈리아 본토에 상륙하는 것을 조건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라고 명령했다. 당시 연합국은 시칠리아와 일부 작은 섬들만 점령하고 있었다.8월 31일 카스텔라노 여단장은 비행기를 타고 시칠리아의 테르미니 이메레세에 도착하여 시라쿠사 근처 마을인 카시빌레로 이동했다. 협상에 참여한 양측이 어느 정도 먼 입장을 취했다는 것이 곧 명백해졌다. 카스텔라노는 서명 후 이탈리아에 대한 독일 국방군의 불가피한 대응으로부터 이탈리아 영토를 방어할 것을 요구했으며, 그는 로마 상공에 낙하산 부대를 파견하는 것을 포함하여 모호한 약속만을 받았다. 더욱이, 조치는 이탈리아인들이 원했던 대로 서명 이전이 아닌 서명과 동시에 수행되어야만 했다.
다음날 카스텔라노는 바돌리오와 그의 수행원과 만났다. 이탈리아 외무부 장관 라파엘레 구아릴리아는 연합군의 조건이 받아들여질 것이라고 선언했으나, 자코모 카르보니와 같은 다른 장군들은 연료와 탄약 부족으로 인해 로마 주변에 배치된 군단이 도시를 보호하기에 충분하지 않으며 휴전을 연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바돌리오는 회의에서 자신의 의견을 밝히지 않았으며, 오후에는 국왕 앞에 나타나 휴전 조건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3. 2. 연합군의 입장과 이탈리아의 반응
바돌리오는 항복을 통해 유리한 조건을 얻을 수 있다고 판단하여, 카스텔라노에게 이탈리아 본토 상륙을 조건으로 항복을 주장하라고 명령했다. 당시 연합국은 시칠리아와 일부 작은 섬들만 점령하고 있었다.8월 31일, 카스텔라노 여단장은 시칠리아의 테르미니 이메레세에 도착하여 카시빌레로 이동했다. 협상 과정에서 카스텔라노는 이탈리아 영토 방어를 위해 연합군에 지원을 요청했지만, 로마 상공에 낙하산 부대를 파견하겠다는 모호한 약속만을 받았다. 또한, 연합군의 조치는 이탈리아 측의 요구와는 달리 서명 이전에 아닌 서명과 동시에 수행되어야 했다.
다음날 카스텔라노는 바돌리오와 회의를 가졌다. 라파엘레 구아릴리아 외무장관은 연합군의 조건 수용을 주장한 반면, 자코모 카르보니와 같은 장군들은 연료 및 탄약 부족을 이유로 휴전 연기를 주장했다. 바돌리오는 회의에서 명확한 입장을 밝히지 않았으나, 국왕에게 휴전 조건 수용을 결정했음을 알렸다.
4. 협정 체결
확인 전보가 연합국에 전송되었지만, 이 메시지는 이탈리아가 별도의 휴전을 모색하고 있다고 의심하기 시작한 독일군인 국방군에 의해 차단되었다. 독일군은 독일 동맹국에 대한 이탈리아의 확고한 충성을 반복적으로 확인한 바돌리오와 지속적으로 접촉했다. 독일군은 그의 충성을 의심했고, 독일군은 이탈리아 정부가 연합군에 충성을 전환하자마자 이탈리아를 장악하기 위한 효과적인 계획인 악세 작전을 계획하기 시작했다.
9월 2일 카스텔라노는 연합국의 조건의 수락을 확인하라는 명령을 받고 다시 카시빌레로 출발했다. 그는 이탈리아 정부의 수장인 바돌리오로부터 서면 승인을 받지 않았는데, 그는 다가오는 조국의 패배로부터 가능한 한 자신과의 연관을 없애기를 원했다.
조인식은 9월 3일 14시에 시작되었다. 카스텔라노와 베델 스미스는 각각 바돌리오와 아이젠하워 장군을 대신하여 승인된 문서에 서명했으며, 500대의 비행기에 의한 로마 폭격 임무는 마지막 순간에 중단되었고 아이젠하워는 휴전 절차를 가속화하도록 유도했다. 영국 정부의 연합군 대표 장관인 해럴드 맥밀런은 윈스턴 처칠에게 휴전 협정이 "어떤 종류의 수정 없이" 서명되었다고 알렸다.
4. 1. 서명 과정과 독일의 감청
1943년 9월 3일 카시빌레에서 주세페 카스텔라노와 월터 베델 스미스가 각각 피에트로 바돌리오와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를 대신하여 휴전 협정에 서명했다. 조인식은 9월 3일 14시에 시작되었다. 카스텔라노는 이탈리아 정부 수반인 바돌리오로부터 서면 승인을 받지 않았는데, 바돌리오는 다가오는 조국의 패배와 연관되는 것을 최대한 피하고자 했다.아이젠하워는 휴전 절차를 가속화하기 위해 500대의 비행기를 동원한 로마 폭격 임무를 마지막 순간에 중단시켰다. 영국 정부의 연합군 대표 장관인 해럴드 맥밀런은 윈스턴 처칠에게 휴전 협정이 "어떤 종류의 수정 없이" 서명되었다고 알렸다.
연합국에 확인 전보가 전송되었지만, 이탈리아가 별도의 휴전을 모색하고 있다고 의심하기 시작한 독일 국방군에 의해 차단되었다. 독일군은 이탈리아의 확고한 충성을 반복적으로 확인한 바돌리오와 지속적으로 접촉했지만, 그의 충성을 의심했고, 이탈리아 정부가 연합군으로 충성을 전환하자마자 이탈리아를 장악하기 위한 계획인 악세 작전을 계획하기 시작했다.
4. 2. 추가 조항과 이탈리아의 혼란
확인 전보가 연합국에 전송되었지만, 이 메시지는 이탈리아가 별도의 휴전을 모색하고 있다고 의심하기 시작한 독일군인 국방군에 의해 차단되었다. 독일군은 독일 동맹국에 대한 이탈리아의 확고한 충성을 반복적으로 확인한 바돌리오와 지속적으로 접촉했다. 독일군은 그의 충성을 의심했고, 독일군은 이탈리아 정부가 연합군에 충성을 전환하자마자 이탈리아를 장악하기 위한 효과적인 계획인 악세 작전을 계획하기 시작했다.9월 2일 카스텔라노는 연합국의 조건의 수락을 확인하라는 명령을 받고 다시 카시빌레로 출발했다. 그는 이탈리아 정부의 수장인 바돌리오로부터 서면 승인을 받지 않았는데, 그는 다가오는 조국의 패배로부터 가능한 한 자신과의 연관을 없애기를 원했다.
조인식은 9월 3일 14시에 시작되었다. 카스텔라노와 베델 스미스는 각각 바돌리오와 아이젠하워 장군을 대신하여 승인된 문서에 서명했으며, 500대의 비행기에 의한 로마 폭격 임무는 마지막 순간에 중단되었고 아이젠하워는 휴전 절차를 가속화하도록 유도했다. 영국 정부의 연합군 대표 장관인 해럴드 맥밀런은 윈스턴 처칠에게 휴전 협정이 "어떤 종류의 수정 없이" 서명되었다고 알렸다.
5. 협정 발효와 독일의 군사적 대응
카스텔라노는 서명이 이루어진 후에야 캠벨 장군이 8월 31일부터 카시빌레에 있었던 다른 이탈리아 장군 자누시에게 제시한 추가 조항을 통보 받았다. 자누시는 현재 밝혀지지 않은 이유로 카스텔라노에게 이에 대해 알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델 스미스는 이탈리아가 연합군과 함께 전쟁에서 전투 역할을 맡지 않은 경우에만 다른 조건이 적용되었을 것이라고 카스텔라노에게 설명했다.[3]
같은 날 오후, 바돌리오는 레지아 마레나(왕립 해군)와 레지아 에어로노티카(왕립 공군)의 고위 사령관, 전쟁 장관 및 국왕 대표자들과 브리핑을 가졌다. 그러나 그는 휴전 협정 서명에 대한 언급은 생략하고 현재 진행 중인 협상에 대해서만 언급했다.[3]
휴전 협정이 발효된 날은 이탈리아 중부 상륙 계획과 연관되어 있었고 연합국의 재량에 맡겨졌다. 카스텔라노는 날짜가 9월 12일로 예정되어 있다는 것을 여전히 알고 있었고 바돌리오는 군대를 로마로 이동하기 시작했다.[3]
9월 7일, 소규모 연합국 대표단이 로마에 도착하여 바돌리오에게 다음 날이 휴전일일 것이라고 알렸다. 그는 또한 미국 제82공수사단이 도시 주변 공항에 도착할 예정이라는 소식도 받았다. 바돌리오는 대표단에게 이탈리아의 군대가 상륙을 지원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며 해당 지역의 대부분의 공항이 독일의 통제하에 있다고 말했으며, 그는 휴전 협정며칠 연기해 달라고 요청했다. 아이젠하워 장군이 이 사실을 알게 되자 미군의 로마 상륙은 취소됐지만, 다른 부대는 이미 이탈리아 남부 상륙을 위해 해상으로 이동 중이었기 때문에 휴전일은 유지되었다.[3]
9월 8일 오후 연합군 라디오를 통해 휴전 협정이 발표되자 독일군은 즉시 악세 작전을 실행하여 이탈리아군을 공격했다. 대부분의 레지오 에세르시토(왕립 육군)는 휴전 협정에 대해 통보받지 못했고 독일군에 맞서 취해야 할 행동 방침에 대한 명확한 명령도 받지 못했으며, 로마를 방어해야 했던 일부 이탈리아 사단은 아직 프랑스 남부에서 이동 중이었다. 국왕은 왕실, 바돌리오와 함께 9일 이른 아침 로마를 떠나 이탈리아 남부 브린디시로 피신했다. 그들의 초기 의도는 왕과 총리와 함께 군대 사령부를 남부 이탈리아로 옮기는 것이었지만 브린디시에 도달한 참모 장교는 거의 없었다. 그러는 동안 이탈리아군은 아무런 지시도 없이 무너졌고 곧 압도당으며, 일부 소규모 부대는 독일 동맹국에 충성하기로 결정했다. 9월 8일부터 12일까지 독일군은 조직적인 저항 없이 사르데냐와 풀리아 일부를 제외하고 아직 연합군이 통제하지 않는 이탈리아 영토 전체를 점령했다. 로마에서는 이탈리아 총독이 이탈리아 보병 사단의 지원을 받아 명목상 9월 23일까지 도시를 통치했지만 실제로는 9월 11일부터 독일의 지배를 받았다.[3]
9월 3일, 영국군과 캐나다군은 배이타운 작전 중 메시나 해협을 건너 칼라브리아 최남단에 상륙하기 시작했고, 휴전 협정이 발표된 다음 날인 9월 9일, 연합군은 살레르노와 타란토에 상륙했다.[3]
연합국은 이탈리아의 휴전 협정을 최대한 활용하지 못했고 독일군에 의해 재빨리 저지당했다. 방어에 유리한 지형에서 연합군은 이탈리아 북부 국경에 도달하는 데 거의 20개월이 걸렸다.[3]
이탈리아 외곽, 점령된 발칸반도와 그리스 섬에 주둔한 일부 이탈리아군은 휴전 후 몇 주 동안 버텼다. 그러나 연합군의 확고한 지원 없이 1943년 9월 말까지 모두 독일군에 압도되었으며, 케팔로니아섬에서 이탈리아 아퀴 사단은 독일군에 저항한 후 학살당했다. 독일군이 코스섬을 점령한 후 1943년 10월 초에 총살된 제50보병사단 레지나 소속 이탈리아 장교 103명에게도 비슷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영국군이 지원한 레로스섬과 사모스섬에서만 저항은 1943년 11월까지 지속되었고, 코르시카에서만 유일하게 이탈리아군이 독일군을 몰아냈다.[3]
다른 경우에는 대부분 소규모인 개별 이탈리아 부대가 추축국에 충성을 유지했으며, 많은 부대가 독일의 괴뢰국 이탈리아 사회공화국의 군대의 핵심을 형성했다.[3]
1943년 9월 휴전 이후 루마니아는 유럽에서 두 번째로 큰 추축국 회원국이 되어 있었다.[3]
5. 1. 이탈리아군의 혼란과 저항
휴전 협정 서명 이후, 카스텔라노는 8월 31일부터 카시빌레에 있던 다른 이탈리아 장군 자누시에게 제시된 추가 조항을 통보받았다. 그러나 자누시는 알 수 없는 이유로 카스텔라노에게 이를 알리지 않았다. 같은 날 오후, 바돌리오는 레지아 마레나(왕립 해군)와 레지아 에어로노티카(왕립 공군)의 고위 사령관 등과 브리핑을 가졌지만, 휴전 협정 서명은 언급하지 않고 현재 진행 중인 협상에 대해서만 언급했다.9월 7일, 소규모 연합국 대표단이 로마에 도착하여 바돌리오에게 다음 날이 휴전일일 것이라고 알렸다. 바돌리오는 이탈리아 군대가 상륙을 지원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며, 해당 지역 대부분의 공항이 독일 통제하에 있다고 말하며 휴전 협정 연기를 요청했다. 아이젠하워 장군은 이를 거부하고 휴전일은 유지되었으나, 미군의 로마 상륙은 취소되었다.
9월 8일 오후 연합군 라디오를 통해 휴전 협정이 발표되자, 독일군은 즉시 악세 작전을 실행하여 이탈리아군을 공격했다. 대부분의 레지오 에세르시토(왕립 육군)는 휴전 협정에 대해 통보받지 못했고 명확한 명령도 받지 못했다. 로마를 방어해야 했던 일부 이탈리아 사단은 아직 프랑스 남부에서 이동 중이었다. 국왕과 왕실, 바돌리오는 9일 이른 아침 로마를 떠나 남부 브린디시로 피신했다. 이탈리아군은 지시 없이 무너졌고, 일부 소규모 부대는 독일 동맹국에 충성하기로 결정했다. 9월 8일부터 12일까지 독일군은 사르데냐와 풀리아 일부를 제외하고 이탈리아 영토 전체를 점령했다. 로마는 명목상 9월 23일까지 이탈리아 총독이 통치했지만, 실제로는 9월 11일부터 독일의 지배를 받았다.
발칸반도와 그리스 섬에 주둔한 일부 이탈리아군은 휴전 후 몇 주 동안 버텼으나, 연합군의 지원 없이 독일군에 압도되었다. 케팔로니아섬에서 이탈리아 아퀴 사단은 독일군에 저항한 후 학살당했다. 코스섬을 점령한 독일군은 1943년 10월 초에 제50보병사단 레지나 소속 이탈리아 장교 103명을 비슷한 운명으로 처형했다. 영국군이 지원한 레로스섬과 사모스섬에서만 저항은 1943년 11월까지 지속되었고, 코르시카에서만 이탈리아군이 독일군을 몰아냈다.
다른 경우에는 대부분 소규모인 개별 이탈리아 부대가 추축국에 충성을 유지했으며, 많은 부대가 독일의 괴뢰국 이탈리아 사회공화국 군대의 핵심을 형성했다.
5. 2. 연합군의 상륙 작전
9월 3일, 영국군과 캐나다군은 배이타운 작전 중 메시나 해협을 건너 칼라브리아 최남단에 상륙하기 시작했고, 휴전 협정이 발표된 다음 날인 9월 9일, 연합군은 살레르노와 타란토에 상륙했다.[3] 연합군은 이탈리아의 휴전 협정을 최대한 활용하지 못했고 독일군에 의해 재빨리 저지당했다. 방어에 유리한 지형에서 연합군은 이탈리아 북부 국경에 도달하는 데 거의 20개월이 걸렸다.6. 이탈리아 왕국 해군의 운명
레지오 에세르시토(왕립 육군)와 레지아 에어로노티카(왕립 공군)는 1943년 9월 8일 휴전이 선언되면서 사실상 해체되었다.[4] 연합군은 이탈리아급 전함(1943년 7월까지 리토리오로 알려짐), 로마급 전함, 비토리아 베네토급 전함 등을 포함해 총 206척의 군함을 보유한 레지아 마레나(왕립 해군)를 탐냈다.[4] 해군 중 일부가 전투를 벌이거나 침몰당하거나 연합국에게 가장 우려스러웠던 것인 독일의 손에 넘어갈 위험이 있었다. 따라서 휴전은 주로 라스페치아와 제노바를 뜻하는 이탈리아 서해안에 있는 이탈리아 전함이 북아프리카로 이동하고 코르시카와 사르데냐 통과하며 이탈리아 동쪽의 풀리아주 타란토에 있는 전함이 몰타로 항해할 것을 요구했다.[4]
9월 9일 02시 30분, 로마급, 비토리아 베네토급, 리토리오급 전함 3척은 경순양함 3척과 구축함 8척의 호위를 받으며 라스페치아에서 출발했다. 전함을 붙잡기 마을로 돌진했던 독일군이 전함들을 놓치고 격분한 이후, 그들은 항해할 수 없는 선박들을 자침시킨 이탈리아 선장 몇 명을 즉석에서 총살했다. 그날 오후, 독일 폭격기는 사르데냐에서 캐노피 없이 항해하는 선박을 공격하고 유도 폭탄을 발사했다. 여러 척의 선박이 피해를 입었고 로마급 전함은 거의 1,400명의 병력을 잃고 침몰했으며, 나머지 배의 대부분은 생존자를 구하기 위해 정박 한 구축함 3척과 순양함 1척이 메노르카섬에 정박하는 동안 북아프리카에 안전하게 도착했다.
해군의 이동은 이탈리아의 다른 지역에서 보다 원활하게 진행되었다. 연합국 해군이 타란토의 대규모 해군 기지로 향했을 때, 그들은 몰타에서 항복하기 위해 타란토 항구를 떠나 항해하는 이탈리아 함대를 지켜보았다.[4]
9월 말 연합군과 이탈리아 사이의 합의에 따라 일부 해군이 계속 임무를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전함은 관리 및 유지 관리로 축소되고 효과적으로 무장 해제되었으며, 이탈리아 상선은 연합군과 동일한 일반 조건에서 운용되어야 했다. 또한 이탈리아 선박은 이탈리아 승무원을 유지하고 이탈리아 국기를 게양해야만 했다.[5]
6. 1. 함대 이동과 독일군의 공격
레지오 에세르시토(왕립 육군)와 레지아 에어로노티카(왕립 공군)는 1943년 9월 8일 휴전이 선언되면서 사실상 해체되었다.[4] 연합군은 이탈리아급 전함(1943년 7월까지 리토리오로 알려짐), 로마급 전함, 비토리아 베네토급 전함 등을 포함해 총 206척의 군함을 보유한 레지아 마레나(왕립 해군)를 탐냈다.[4] 해군 중 일부가 전투를 벌이거나 침몰당하거나 독일의 손에 넘어갈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휴전은 주로 라스페치아와 제노바를 뜻하는 이탈리아 서해안에 있는 이탈리아 전함이 북아프리카로, 풀리아주 타란토에 있는 전함이 몰타로 항해할 것을 요구했다.[4]9월 9일 02시 30분, 로마급, 비토리아 베네토급, 리토리오급 전함 3척은 경순양함 3척과 구축함 8척의 호위를 받으며 라스페치아에서 출발했다.[4] 전함을 붙잡기 위해 마을로 돌진했던 독일군은 전함들을 놓치고 격분하여 항해할 수 없는 선박들을 자침시킨 이탈리아 선장 몇 명을 즉석에서 총살했다.[4] 그날 오후, 독일 폭격기는 사르데냐에서 캐노피 없이 항해하는 선박을 공격하고 유도 폭탄을 발사했다.[4] 여러 척의 선박이 피해를 입었고 로마급 전함은 거의 1,400명의 병력을 잃고 침몰했으며, 나머지 배의 대부분은 생존자를 구하기 위해 정박 한 구축함 3척과 순양함 1척이 메노르카섬에 정박하는 동안 북아프리카에 안전하게 도착했다.[4]
타란토에서는 연합국 해군이 대규모 해군 기지로 향했을 때, 몰타에서 항복하기 위해 타란토 항구를 떠나 항해하는 이탈리아 함대를 지켜보았다.[4] 9월 말 연합군과 이탈리아 사이의 합의에 따라 일부 해군은 계속 임무를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5] 그러나 전함은 관리 및 유지 관리로 축소되고 효과적으로 무장 해제되었으며, 이탈리아 상선은 연합군과 동일한 일반 조건에서 운용되어야 했다.[5] 또한 이탈리아 선박은 이탈리아 승무원을 유지하고 이탈리아 국기를 게양해야만 했다.[5]
6. 2. 연합군과의 합의와 해군의 역할 축소
레지오 에세르시토(왕립 육군)와 레지아 에어로노티카(왕립 공군)는 1943년 9월 8일 휴전 선언으로 사실상 해체되었다.[4] 연합군은 이탈리아급 전함(1943년 7월까지 리토리오), 로마급 전함, 비토리아 베네토급 전함 등 총 206척의 군함을 보유한 레지아 마레나(왕립 해군)를 주목했다.[4] 해군 함정 일부가 전투를 벌이거나 침몰, 또는 독일군 손에 넘어갈 위험이 있어, 휴전 협정에서는 이탈리아 전함들이 라스페치아와 제노바에서 북아프리카로, 타란토의 전함은 몰타로 항해할 것을 요구했다.[4]9월 9일, 로마급, 비토리아 베네토급, 리토리오급 전함 3척이 경순양함 3척과 구축함 8척의 호위를 받으며 라스페치아를 출발했다.[4] 독일군은 전함을 놓치자 항해 불가능한 선박을 자침시킨 이탈리아 선장들을 즉결 처형했다.[4] 같은 날 오후, 독일 폭격기가 유도 폭탄으로 사르데냐 인근의 이탈리아 함대를 공격하여, 로마급 전함이 침몰하고 1,400여 명이 사망했다.[4] 메노르카섬에 일부 함정이 정박한 것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함정은 북아프리카에 도착했다.[4] 타란토에서는 연합군 해군이 이탈리아 함대가 몰타로 항복하러 가는 것을 지켜보았다.[4]
9월 말 연합군과 이탈리아 간 합의에 따라, 이탈리아 해군은 일부 임무를 계속 수행할 수 있었다.[5] 그러나 전함은 관리 및 유지 보수 수준으로 축소되었고, 이탈리아 상선은 연합군과 동일한 조건에서 운용되었다.[5] 이탈리아 선박은 이탈리아 승무원과 국기를 유지했다.[5]
7. 역사적 의의와 평가
7. 1. 이탈리아의 추축국 이탈과 연합군 합류
7. 2. 파시즘 몰락과 민주주의 회복의 기회
참조
[1]
논문
The Armistice of Cassibile
[2]
서적
Between Silk and Cyanide
https://archive.org/[...]
HarperCollins
[3]
서적
Joining Hitler's Crusade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4]
서적
The Italian Campaign
Time-Life Books Inc
[5]
문서
Armistice with Italy: Employment and Disposition of Italian Fleet and Merchant Marine (Cunningham-de Courten Agreement)
1943-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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