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노 그란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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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디노 그란디는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정치인으로,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후 볼로냐 대학교에서 법학과 경제학을 전공했다. 베니토 무솔리니에게 감화되어 파시스트 운동에 참여했으며, 검은 셔츠단의 초기 멤버로 활동했다. 외무장관과 주영국 대사를 역임했으나, 제2차 세계 대전 중 무솔리니 해임 동의안을 제출하여 가결시켰다. 이후 스페인으로 망명하여 사형 선고를 피했고, 포르투갈, 브라질 등지에서 망명 생활을 하다 1988년 볼로냐에서 사망했다. 그는 무솔리니의 최측근이었지만, 전쟁에 반대하고 연합군과의 협상을 추구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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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노 그란디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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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존칭 | 백작 |
이름 | 디노 그란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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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일 | 1895년 6월 4일 |
출생지 | 모르다노, 이탈리아 |
사망일 | 1988년 5월 21일 |
사망지 | 볼로냐, 이탈리아 |
국적 | 이탈리아 |
모교 | 볼로냐 대학교 |
직업 | 변호사, 정치인 |
키 | 1.73 m |
정당 | FIC (1920–1921), PNF (1921–1943) |
정치 경력 | |
직책 | 파시스트 및 기업 회의소 의장 |
임기 시작 | 1939년 11월 30일 |
임기 종료 | 1943년 8월 2일 |
전임자 | 코스탄초 치아노 |
후임자 |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올란도 |
직책 2 | 은혜와 정의부 장관 |
총리 2 | 베니토 무솔리니 |
임기 시작 2 | 1939년 7월 12일 |
임기 종료 2 | 1943년 2월 5일 |
전임자 2 | 아리고 솔미 |
후임자 2 | 알프레도 데 마르시코 |
직책 3 | 주영 이탈리아 대사 |
총리 3 | 베니토 무솔리니 |
임기 시작 3 | 1932년 8월 3일 |
임기 종료 3 | 1939년 10월 13일 |
전임자 3 | 안토니오 키아라몬테 보르도나로 |
후임자 3 | 주세페 바스티아니니 |
직책 4 | 외무부 장관 |
총리 4 | 베니토 무솔리니 |
임기 시작 4 | 1929년 9월 12일 |
임기 종료 4 | 1932년 7월 20일 |
전임자 4 | 베니토 무솔리니 |
후임자 4 | 베니토 무솔리니 |
2. 생애
이탈리아 볼로냐 주 모르다노에서 태어난 그란디는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후 1919년 볼로냐 대학에서 법학과 경제학을 공부했다. 젊은 시절 베니토 무솔리니를 만나 그의 영향을 받았으며, 1920년 검은 셔츠단에 가입하여 초기 파시스트 운동에 참여했다.
파시스트 정권 하에서 활동했으나, 1943년 제2차 세계 대전 중 연합군의 허스키 작전(시칠리아 침공)이 시작되자 무솔리니에게 등을 돌렸다. 그는 파시스트 대평의회에서 무솔리니 해임 결의안을 주도하여 19 대 7로 가결시켰다.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역시 이 결정을 받아들여 무솔리니를 총리직에서 해임하고 체포했다.
이후 아돌프 히틀러의 도움으로 구출된 무솔리니가 이탈리아 북부에 이탈리아 사회공화국이라는 괴뢰 정권을 세우자, 그란디는 반역자로 몰려 1944년 2월 궐석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그란디는 이미 1943년 여름,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통치하던 스페인으로 망명한 상태였다. 그는 이후 포르투갈(1943~1949년)과 브라질(1960년대) 등지에서 망명 생활을 이어가다 1988년 고향 볼로냐에서 사망했다.
2. 1. 초기 생애
디노 그란디는 이탈리아 볼로냐 주 모르다노의 농가에서 태어났다. 1913년 볼로냐 대학교에 입학하여 법학을 공부하는 한편, 저널리스트로도 활동했다.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여 복무했으며, 이로 인해 1919년에야 대학을 졸업하고 법학과 경제학 학위를 취득했다. 제대 후에는 이몰라로 이주하여 변호사로 개업했다.처음에는 좌익 정치에 관심을 가졌으나, 1914년 베니토 무솔리니를 만난 후 그에게 깊은 인상을 받고 제1차 세계 대전에 이탈리아가 참전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는 입장으로 돌아섰다.
1920년, 25세의 나이로 검은 셔츠단에 가입했으며, 1921년 5월에는 무솔리니와 함께 의회에 선출된 35명의 파시스트 대표 중 한 명이 되었다. 그란디의 고향은 좌익 세력이 강했으며, 현지 파시즘 지도자였던 그는 반대자들의 격렬한 공격 대상이 되었다. 1920년 10월 17일에는 좌익 무장 세력의 매복 공격을 받아 총탄 5발을 맞고 살아남았으며, 이틀 후에는 그의 사무실이 파괴되기도 했다. 같은 해 12월, 주간지 L'Assalto|라살토ita(공격)를 창간했다. 이 시기 그란디는 무솔리니를 파시즘 운동의 지도자로 인정하고, 이전에는 반대했던 파시스트당으로의 개편에 찬성했다.
2. 2. 파시스트 정치 입문
처음에는 좌익 정치에 관심을 가졌으나, 1914년 베니토 무솔리니를 만난 후 그에게 영향을 받아 제1차 세계 대전에 이탈리아가 참전하는 것을 강력히 지지하게 되었다.25세가 되던 해인 1920년 검은 셔츠단에 가입하며 본격적으로 파시스트 운동에 뛰어들었다. 그의 고향인 에밀리아-로마냐주는 좌익 세력이 강했으며, 현지의 파시스트 지도자였던 그란디는 반대 세력으로부터 격렬한 공격을 받았다. 1920년 10월 17일, 그는 총격을 받아 5발의 총탄을 맞았고, 이틀 후에는 그의 사무실이 좌파 민병대에 의해 파괴되는 사건을 겪었다. 같은 해 12월, 그는 주간지 L'Assalto|라살토ita(공격)를 창간했으며, 이 무렵 베니토 무솔리니를 파시즘 운동의 지도자로 인정하고 파시스트당으로의 개편에 찬성했다.
그란디는 에밀리아-로마냐주에 파시스트당을 설립하는 데 기여했으며, 1921년에는 당 사무국장에 취임했다. 1921년 5월 총선거에서는 무솔리니와 함께 이탈리아 하원 의원에 당선된 35명의 파시스트 대표 중 한 명이 되었다.
3. 파시스트 정권 활동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이후 볼로냐 대학에서 법학과 경제학을 공부한 그란디는 1920년 검은 셔츠단에 가입하며 베니토 무솔리니와 함께 초기 파시스트 운동에 참여했다. 1922년 로마 진군 이후 파시스트 정권이 수립되자, 내무부 차관, 이탈리아 외무부 장관, 주영국 대사, 법무장관 등 주요 직책을 역임하며 정권 내 핵심 인물로 활동했다. 그는 파시스트 내 급진 세력과 연계되어 있었으며, 때로는 무솔리니의 정책 방향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기도 했다.
외교관으로서는 영국과의 관계 유지를 시도했으나, 제2차 세계 대전 참전을 막으려는 그의 독자적인 외교 활동은 히틀러의 압력과 무솔리니의 불신을 사 1939년 주영국 대사직에서 해임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후 법무장관으로 임명되었으나, 그는 1938년의 반유대주의적 이탈리아 인종법과 이탈리아의 제2차 세계 대전 참전에 반대했다.
1943년 제2차 세계 대전 중 연합군의 허스키 작전(시칠리아 침공)으로 전세가 이탈리아에 불리하게 돌아가자, 그란디는 파시스트 대평의회에서 무솔리니의 실각을 주도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무솔리니 해임 결의안을 제출하여 19 대 7로 가결시켰고, 이는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가 무솔리니를 해임하고 체포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무솔리니가 아돌프 히틀러의 도움으로 구출되어 북부에 이탈리아 사회공화국을 세운 후, 그란디는 1944년 2월 열린 베로나 재판에서 궐석 상태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그는 이미 1943년 여름 프란시스코 프랑코 치하의 스페인으로 망명한 뒤였다. 이후 포르투갈(1943년~1949년), 브라질(1960년대) 등지에서 망명 생활을 하다가 1988년 고향 볼로냐에서 사망했다.
3. 1. 초기 경력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후, 1919년 볼로냐 대학에서 경제학과 법학 학위를 받았다. 그는 이미 1914년에 베니토 무솔리니와 만나 그의 영향을 받았으며, 이탈리아의 제1차 세계 대전 참전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1920년, 25세의 나이로 검은 셔츠단에 가입하여 초기 멤버 중 한 명이 되었다. 이후 에밀리아-로마냐주에서 파시스트당을 창설하는 데 기여하고 1921년에는 사무국장에 취임했다. 같은 해 5월 총선거에서 이탈리아 하원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1922년 10월 로마 진군을 통해 파시스트들이 권력을 장악하자, 그란디는 새로운 정부의 일원이 되었다. 1923년에는 무솔리니 내각에서 내무부 차관으로 임명되었고, 같은 해 이탈리아 하원 부의장으로도 선출되었다. 그는 파시스트 내에서 가장 급진적이고 폭력적인 파벌과 연계되어 있었으며, 항상 흑셔츠단원들과 함께 활동했다. 이 시기 그는 자신의 권력 기반을 이용하여 좌익과의 휴전을 시도하는 무솔리니를 비판하기도 했다.
3. 2. 외무장관 및 주영국 대사

그란디는 1924년 내무차관, 이듬해 외무차관을 거쳐 1929년 이탈리아 외무부 장관에 취임했다. 외무장관으로서 그는 이탈리아의 중립적 입장을 유지하고, 특히 영국과의 우호 관계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1932년 국제연맹에 동조하는 발언을 한 것이 문제가 되어 베니토 무솔리니에 의해 경질되었다.
경질된 직후, 그는 1932년부터 1939년까지 이탈리아의 주영국 대사로 임명되었다. 대사 시절 그는 제2차 에티오피아 전쟁과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직전의 긴박한 국제 정세 속에서 영국과의 긴장 완화를 위해 힘썼다. 외교관으로서 그란디는 무솔리니의 사위인 갈레아초 치아노와 견줄 만한 광범위한 인맥을 구축했으며, 이를 자신의 이익을 위해 활용하기도 했다. 특히 당시 가장 영향력 있는 귀족 여성들과 관계를 맺었는데, 인도 총독 조지 커존의 딸인 알렉산드라 커존 여사도 포함된다.[2] 이러한 활동 덕분에 그는 1937년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로부터 작위를 받았다.[1]
그란디는 1938년의 반유대주의적 이탈리아 인종법[3]과 이탈리아의 제2차 세계 대전 참전에 반대했다. 1939년, 그는 이탈리아의 전쟁 참전을 막기 위해 영국과의 협정을 시도했으나, 이로 인해 이탈리아로 소환되어 히틀러의 압력으로 대사직에서 해임되고 사법장관에 임명되었다.
3. 3. 법무장관 및 기타 직책
1939년, 이탈리아가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는 것을 막기 위해 자국과 영국 간의 협정을 시도한 후 이탈리아로 소환되었다. 히틀러의 압력으로 무솔리니는 그를 주영국 대사직에서 해임하고 법무장관(사법장관)에 임명했다. 외교관으로서 그란디는 무솔리니의 사위인 갈레아초 치아노만이 라이벌이 될 수 있는 광범위한 인맥을 구축했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를 활용하려고 했다. 이 덕분에 1937년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에게 작위를 받았다.[1]그란디는 1938년의 반유대주의적 이탈리아 인종법[3]과 이탈리아의 제2차 세계 대전 참전에 반대했다. 그는 1941년 무솔리니에 의해 다른 ''제라르키''들과 함께 그리스 전선으로 파견될 때까지 법무장관으로서 안락한 지위를 유지했다. 전쟁 노력에 대한 비판이 커지면서 1943년 2월 내각에서 해임되었다.
4. 무솔리니 실각과 제2차 세계 대전
그란디는 1938년의 반유대주의적 이탈리아 인종법[3]과 이탈리아의 제2차 세계 대전 참전에 반대했다. 전쟁 노력에 대한 비판이 커지면서 1943년 2월 내각에서 해임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연합국의 시칠리아 상륙 작전(허스키 작전) 이후 이탈리아의 전황이 급격히 악화되자, 그란디는 파시스트 대평의회의 다른 의원들과 함께 1943년 7월 24일 회의를 소집했다. 이 회의에서 그는 베니토 무솔리니를 강하게 비판하며 무솔리니 해임 결의안(Ordine del giorno Grandiit) 제출을 주도했고, 이는 다음 날 새벽 가결되었다. 이 결정은 무솔리니 실각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으며,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같은 날 무솔리니를 체포했다.
이후 아돌프 히틀러의 도움으로 구출된 무솔리니가 북부 이탈리아에 세운 괴뢰 정권인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은 1944년 베로나 재판에서 그란디에게 반역죄로 궐석재판을 통해 사형을 선고했다. 그러나 그란디는 이미 1943년 8월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통치하던 스페인으로 망명한 뒤였다. 그는 스페인과 포르투갈(1943~1948), 아르헨티나,[4] 브라질 등지에서 망명 생활을 이어가다 1960년대에 이탈리아로 돌아왔고, 1988년 고향 볼로냐에서 사망했다.[5]
4. 1. 무솔리니 해임 동의안 제출
1939년 주영대사에서 물러난 후 법무장관을 거쳐 파시즘 정권 하의 하원의장에 해당하는 산업 및 농업 파시스트 조합 총연합(Camera dei fasci e delle corporazioniit) 의장을 역임했다.제2차 세계 대전 중 연합국의 시칠리아 상륙 작전(허스키 작전) 이후 이탈리아의 전황이 급격히 악화되자, 그란디와 다른 파시스트 대평의회 의원들은 1943년 7월 24일 회의를 소집했다. 이 회의에서 베니토 무솔리니가 독일군이 이탈리아 남부에서 철수할 계획이라고 밝히자, 그란디는 과거의 동지였던 무솔리니를 맹렬하게 공격했다. 그는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국왕에게 헌법상의 모든 권한을 회복하도록 요청하는 결의안(Ordine del giorno Grandiit)을 제출했다.
이 결의안은 7월 25일 새벽 2시에 표결에 부쳐져 찬성 19표, 반대 8표, 기권 1표라는 압도적인 차이로 가결되었다. 이 결정으로 무솔리니는 실질적으로 권좌에서 축출되었다. 그란디 외에도 주세페 보타이, 에밀리오 데 보노 등 주요 파시스트 인사들이 찬성표를 던졌다.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같은 날 파시스트 대평의회의 결정을 받아들여 무솔리니를 총리직에서 해임하고 즉시 체포했다. 이는 이탈리아 파시스트 정권 몰락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무솔리니 실각 이후 그란디는 좌익 운동 세력, 특히 이탈리아 일반노동총연맹(CGIL)과 같은 노동조합과 접촉하여 휴전을 모색했으며, 이는 이후 나치 독일에 대항하는 이탈리아 레지스탕스 운동의 발판을 마련하는 데 기여했다.
해임 동의안 가결 직후, 그란디는 연합국과의 종전 협상을 명분 삼아 1943년 8월 프란시스코 프랑코 치하의 스페인으로 망명하여 신변의 안전을 도모했다. 이후 아돌프 히틀러에 의해 구출된 무솔리니가 이탈리아 북부에 수립한 괴뢰 정권인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은 1944년 1월 8일부터 10일까지 베로나 재판을 열어 그란디에게 반역죄로 궐석 사형을 선고했으나, 이미 그는 해외로 도피한 상태였다.
4. 2.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과 망명
1943년 7월 24일, 제2차 세계 대전 중 시칠리아 상륙 작전 이후 이탈리아가 큰 타격을 입자, 그란디는 다른 파시스트 대평의회 의원들과 회의를 소집했다. 이 회의에서 무솔리니가 독일군의 남부 이탈리아 철수 계획을 언급하자, 그란디는 무솔리니를 강하게 비판하며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국왕에게 헌법상의 모든 권한을 회복시킬 것을 요구하는 결의안(Ordine del giorno Grandi|오르디네 델 조르노 그란디it)을 제출했다. 7월 25일 새벽 2시에 진행된 표결에서 이 결의안은 찬성 19표, 반대 8표, 기권 1표로 가결되었고, 이는 무솔리니의 실각으로 이어졌다. 주세페 보타이, 에밀리오 데 보노 등과 함께 그란디도 이 결의안에 찬성표를 던졌다. 국왕은 같은 날 무솔리니를 체포했다. 그란디는 이후 좌익 운동, 특히 노동조합(이탈리아 일반노동총연맹)과 접촉하며 연합군과의 휴전 협상을 시도하기도 했다. 이는 이후 나치 독일에 대한 이탈리아 레지스탕스 운동으로 이어지는 배경이 되었다.무솔리니 해임 후, 그란디는 연합군과의 종전 협상을 명분으로 1943년 8월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통치하던 스페인으로 출국했다. 이는 아돌프 히틀러에 의해 구출된 무솔리니가 북부 이탈리아에 세운 괴뢰 정권인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의 체포를 피하기 위한 망명이었다.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은 1944년 1월 8일부터 1월 10일까지 베로나 재판을 열어 그란디를 포함한 무솔리니 해임 동의안 찬성자들에게 반역죄를 적용했고, 그란디에게는 궐석재판을 통해 사형을 선고했다.
그란디는 스페인 망명 이후 포르투갈(1943년~1948년), 아르헨티나[4], 브라질(상파울루) 등지에서 망명 생활을 이어갔다. 1960년대에 이탈리아로 돌아왔으며, 1988년 5월 21일 고향 볼로냐에서 사망했다. 공교롭게도 같은 주말에 전후 이탈리아 파시스트 지도자였던 피노 로무알디(5월 21일)와 조르조 알미란테(5월 22일)도 사망했다.[5]
5. 전후 활동과 사망
1943년 7월 파시스트 대평의회에서 베니토 무솔리니 실각 결의안(Ordine del giorno Grandi)을 주도하여 통과시킨 이후, 그란디의 정치적 운명은 급변했다. 무솔리니가 실각하고 체포된 후, 나치 독일의 지원을 받아 북부 이탈리아에 수립된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은 1944년 1월 베로나 재판에서 그란디에게 반역죄로 궐석 사형을 선고했다.
그러나 그란디는 이미 1943년 8월,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통치하던 스페인으로 망명한 상태였다.[4] 이후 스페인을 시작으로 포르투갈, 아르헨티나, 브라질 등 여러 나라에서 망명 생활을 이어가다가 1960년대에 이탈리아로 돌아왔다.[4] 1988년 고향 볼로냐에서 사망했다.[5]
5. 1. 망명 생활과 귀국
베니토 무솔리니 실각 이후, 나치 독일이 세운 괴뢰 정권인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은 1944년 1월 8일부터 10일까지 열린 베로나 재판에서 그란디에게 반역죄로 궐석재판을 통해 사형을 선고했다.[4] 하지만 그란디는 이미 1943년 8월,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통치하던 스페인으로 망명한 상태였다.[4]그는 스페인에 이어 포르투갈(1943년~1948년), 아르헨티나,[4] 그리고 브라질의 상파울루 등 여러 나라를 거치며 망명 생활을 이어갔다.[4] 이 시기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에서는 농장을 경영하기도 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이탈리아가 공화정을 수립하면서, 1948년에 파시즘 정권 시절의 죄목으로 궐석으로 징역형을 선고받았으나 곧 사면되었다.
1960년대에 그란디는 이탈리아로 돌아왔다. 귀국 후에는 전 외무장관으로서 연금을 받으며 모데나에서 양돈업을 경영하며 생활했다. 1988년 5월 21일, 고향인 볼로냐에서 사망했다.[5]
5. 2. 사망
1943년 여름,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통치하던 스페인으로 망명했다.[4] 이후 스페인, 포르투갈(1943년~1948년), 아르헨티나, 브라질의 상파울루 등지에서 거주했으며,[4]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에서는 농장을 경영하기도 했다. 전후 이탈리아가 공화정을 수립한 뒤인 1948년에 파시즘 시대의 죄목으로 궐석 재판에서 징역형을 선고받았으나, 곧 사면되었다. 1960년대에 이탈리아로 돌아와 모데나에서 양돈업을 경영하며 전 외무장관으로서의 연금을 받았다. 1988년 고향 볼로냐에서 사망했다.[5] 공교롭게도 그란디는 전후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지도자였던 피노 로무알디(1988년 5월 21일 사망)와 조르조 알미란테(1988년 5월 22일 사망)와 같은 주말에 사망했다.[5]6. 평가
디노 그란디는 베니토 무솔리니의 초기 핵심 지지자이자 이탈리아 파시즘 운동의 주요 인물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후 검은 셔츠단에 가입하여 활동했으며, 로마 진군 이후 파시스트 정부에서 내무부 차관, 외무부 장관 등 요직을 거쳤다. 특히 1932년부터 1939년까지 주영국 대사로 활동하며 국제 외교 무대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초기에는 급진적이고 폭력적인 파시스트 세력과 연계되어 있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다른 입장을 보이기도 했다. 그는 1938년의 반유대주의적 이탈리아 인종법[3]과 이탈리아의 제2차 세계 대전 참전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주영 대사 시절에는 이탈리아의 참전을 막기 위해 영국과의 협정을 시도하기도 했으나, 결국 아돌프 히틀러의 압력과 무솔리니의 결정으로 실패하고 이탈리아로 소환되어 사법장관에 임명되었다.[1]
전쟁이 이탈리아에 불리하게 전개되자, 그란디는 파시스트 체제 내에서 무솔리니에 대한 비판적인 목소리를 높였다. 1943년 7월, 연합군의 시칠리아 침공 이후 열린 파시스트 대평의회에서 그는 무솔리니의 전쟁 수행 능력을 강하게 비판하며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에게 군 통수권을 포함한 헌법상의 모든 권한을 회복시킬 것을 요구하는 결의안(''Ordine del giorno Grandi'')을 제출했다. 이 결의안은 19 대 8(기권 1)로 가결되었고, 이는 무솔리니의 실각과 체포로 이어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처럼 그란디는 무솔리니 정권의 핵심 인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전쟁 말기에는 정권 붕괴를 촉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복합적인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의 행동은 이탈리아 파시즘의 종말을 앞당기는 데 기여했으며, 이후 이탈리아 사회공화국의 베로나 재판에서 반역죄로 궐석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이미 스페인으로 망명한 뒤였다. 그는 여러 나라를 거쳐 망명 생활을 하다가 1960년대에 이탈리아로 돌아와 1988년 볼로냐에서 사망했다.[5]
6. 1. 한국과의 관계
디노 그란디가 이탈리아 왕국의 외무부 장관(1929년~1932년), 주영국 대사(1932년~1939년) 등 고위직을 역임하며 활동했던 시기는 일제강점기 하에서 한국의 독립운동이 전개되던 때와 일치한다. 그가 속했던 베니토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정권은 나치 독일, 일본 제국과 함께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추축국의 주요 구성원이었다.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비롯한 한국의 독립운동 세력은 일본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동시에, 추축국의 일원인 이탈리아의 파시즘 체제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그란디가 직접적으로 한반도 문제에 관여했다는 기록은 없으나, 그가 추축국의 핵심 외교관이자 정치인으로서 활동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당시 독립운동을 벌이던 한국의 역사적 상황과 간접적인 관련성을 맺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란디는 1939년 이탈리아의 제2차 세계 대전 참전을 막기 위해 영국과의 협정을 시도하기도 했으나[1], 결국 이탈리아는 추축국의 일원으로 전쟁에 참여하게 되었다.
참조
[1]
서적
Current Biography: Who's News and Why, 1943
https://books.google[...]
H. W. Wilson
2012-06-03
[2]
뉴스
Poor Little Rich Girls
https://www.nytimes.[...]
2002-06-02
[3]
서적
Inside Europe
https://archive.org/[...]
Harper & Brothers
[4]
뉴스
Former Mussolini Aide Lands in Argentina
The Modesto Bee
1949-03-16
[5]
뉴스
Obituaries Dino Grandi, 92; rival of Mussolini's
Syracuse Post-Standard
1988-0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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