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우라 포로 수용소 탈출 사건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카우라 포로 수용소 탈출 사건은 제2차 세계 대전 중인 1944년 8월 5일, 호주 뉴사우스웨일스주 카우라에 위치한 일본군 포로 수용소에서 발생한 대규모 탈출 시도이다. 이 사건은 일본군 포로 1,000여 명이 수용소 이송 계획에 반발하여 일으킨 것으로, 231명이 사망하고 108명이 부상당하는 등 큰 인명 피해를 냈다. 탈출은 실패로 돌아갔고, 수용소 경비병 2명이 사망했으며, 이후 호주 정부의 공식 조사와 함께 희생자들을 기리는 묘지와 기념 시설이 조성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제2차 세계 대전 중 오스트레일리아의 군사사 - 크리스마스섬 전투
크리스마스섬 전투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일본군이 인도양의 전략적 요충지이자 인산염 광산인 영국령 크리스마스섬을 점령하기 위해 벌인 전투로, 소수의 영국군과 인도군이 섬을 지켰으나 인도군 반란과 일본군의 "X 작전"으로 일본이 점령했지만 인산염 생산에 차질을 빚었고 종전 후 반란군은 처벌받았다. - 뉴사우스웨일스주의 역사 - 멍고인
멍고인은 약 4만 년 전 오스트레일리아 멍고 호에서 발견된 현생 인류 유골로, 화장 매장과 붉은 황토를 사용한 장례 의식 흔적을 통해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의 인류 거주 시기가 기존보다 오래되었음을 보여준다. - 뉴사우스웨일스주의 역사 - 스트라스필드
스트라스필드는 오스트레일리아 뉴사우스웨일스주의 시드니에 위치한 교외 지역으로, 다양한 건축 양식의 주택과 교육 시설이 밀집되어 있으며, 특히 스트라스필드역 주변은 한국 문화가 강하게 나타나는 상업 중심지를 이루는 교통의 요지이다.
카우라 포로 수용소 탈출 사건 | |
---|---|
사건 개요 | |
사건명 | 카우라 포로 수용소 탈출 사건 |
발생 위치 | 오스트레일리아 뉴사우스웨일스주 카우라 인근 |
발생 날짜 | 1944년 8월 5일 |
관련 정보 | |
결과 | 약 359명의 일본 포로 탈출 |
인명 피해 | |
사망자 | 235명 |
2. 배경
카우라 제12 전쟁 포로 수용소(Cowra PW and I Group, Prisoners of War and Internees Group)는 뉴사우스웨일스주의 주도시드니에서 서쪽으로 250km 떨어진 카우라 중심부에서 북동쪽으로 3.2km 떨어진 교외 지역에 위치해 있었다.[15] 시드니에서 서쪽으로 314km 거리의 서부 내륙에 위치한 카우라 지역 제12호 수용소는 1947년의 이탈리아인·일본인 본국 송환까지 운영되었다.
수용소 부지는 12각형(지름 약 600m)으로, 90도 각도로 4개 블록으로 나뉘어 있었다.[15]
- A 블록 (북서): 이탈리아인
- B 블록 (북동): 일본인 하사관 병, 군속(북부 구역에 호주군 부지가 있었다)
- C 블록 (남동): 이탈리아인
- D 블록 (남서): 일본인 장교, 대만인, 조선인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추축국 군인 및 민간인 4,000명이 수용된 주요 포로 수용소였다.[1] 코우라의 포로에는 2,000명의 이탈리아인, 한국인, 대만인 (일본군 복무), 그리고 네덜란드령 동인도 정부의 요청으로 구금된 인도네시아 민간인들도 포함되어 있었다.[1] 1944년 8월 시점, 호주 국내의 포로 수는 2,223명의 일본인 포로 (544명의 해운업자 포함), 이탈리아인 포로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14,720명, 독일인 1,585명 (해군, 해운업자) 이 중, 1,104명의 일본인이 카우라 수용소에 있었다.[15]
일본군 포로는 1943년 1월부터 수용되었다. 처음 들어온 것은 헤이 수용소에서 이송된 호주 포로 제1호인 도요시마 하지메였다.[16] 이후 비스마르크 해 해전이나 부나 전투 등, 뉴기니 방면에서의 전투에서 포로가 된 육군이 대부분을 차지하게 된다.
포로들은 토마토나 포도의 재배, 장작을 위한 벌채 등, 농업을 하고 있었다.[16] 또한 경비는 느슨했고, 호주군은 부상자 · 영양실조자 등을 포함한 포로에게 후한 간호 · 간호를 제공했다. 일본인은 인기가 높은 야구, 스모, 마작 등의 레크리에이션 활동이 자유롭게 허용되었고, 야구 백 네트를 운동장에 세우는 사진이 남아 있다.[16]
인도네시아인 포로에 관해서는 당시, 네덜란드령 동인도 정부 하에 있던 인도네시아에서는 네덜란드로부터의 독립을 요구하는 민족주의자들은 이리안자야 (네덜란드령 뉴기니)의 수용소에 1927년 이래로 포로로 잡혀 있었다. 그러나 일본군의 점령 행동으로 인해, 네덜란드 정부는 그들이 일본군에 참군하는 것을 우려하여 호주 정부에 수용을 의뢰했다. 호주 정부는 호주 헌법에 위반되기 때문에 그들을 해방시켰다.
1943년 2월, 뉴질랜드 페더스턴 포로 수용소(일본인 포로 수용소)에서 일본인 포로들이 폭동을 일으킨 (페더스턴 사건) 때문에, 카우라 수용소도 경비 강화가 이루어졌다.[2] 이때, 제22수비대대(22nd Garrison Battalion)가 정비되었다. 주변 감시, 작업반 감독을 임무로 했다. 이 시민군 제22수비대에는 빅커스 기관총과 브렌 경기관총이 배치되었다.
2. 1. 카우라 포로 수용소
카우라 제12 전쟁 포로 수용소(Cowra PW and I Group, Prisoners of War and Internees Group)는 뉴사우스웨일스주의 주도시드니에서 서쪽으로 250km 떨어진 카우라 중심부에서 북동쪽으로 3.2km 떨어진 교외 지역에 위치해 있었다.[15] 시드니에서 서쪽으로 314km 거리의 서부 내륙에 위치한 카우라 지역 제12호 수용소는 1947년의 이탈리아인·일본인 본국 송환까지 운영되었다.수용소 부지는 12각형(지름 약 600m)으로, 90도 각도로 4개 블록으로 나뉘어 있었다.[15]
- A 블록 (북서): 이탈리아인
- B 블록 (북동): 일본인 하사관 병, 군속(북부 구역에 호주군 부지가 있었다)
- C 블록 (남동): 이탈리아인
- D 블록 (남서): 일본인 장교, 대만인, 조선인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추축국 군인 및 민간인 4,000명이 수용된 주요 포로 수용소였다.[1] 코우라의 포로에는 2,000명의 이탈리아인, 한국인, 대만인 (일본군 복무), 그리고 네덜란드령 동인도 정부의 요청으로 구금된 인도네시아 민간인들도 포함되어 있었다.[1] 1944년 8월 시점, 호주 국내의 포로 수는 2,223명의 일본인 포로 (544명의 해운업자 포함), 이탈리아인 포로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14,720명, 독일인 1,585명 (해군, 해운업자) 이 중, 1,104명의 일본인이 카우라 수용소에 있었다.[15]
일본군 포로는 1943년 1월부터 수용되었다. 처음 들어온 것은 헤이 수용소에서 이송된 호주 포로 제1호인 도요시마 하지메였다.[16] 이후 비스마르크 해 해전이나 부나 전투 등, 뉴기니 방면에서의 전투에서 포로가 된 육군이 대부분을 차지하게 된다.
포로들은 토마토나 포도의 재배, 장작을 위한 벌채 등, 농업을 하고 있었다.[16] 또한 경비는 느슨했고, 호주군은 부상자 · 영양실조자 등을 포함한 포로에게 후한 간호 · 간호를 제공했다. 일본인은 인기가 높은 야구, 스모, 마작 등의 레크리에이션 활동이 자유롭게 허용되었고, 야구 백 네트를 운동장에 세우는 사진이 남아 있다.[16]
인도네시아인 포로에 관해서는 당시, 네덜란드령 동인도 정부 하에 있던 인도네시아에서는 네덜란드로부터의 독립을 요구하는 민족주의자들은 이리안자야 (네덜란드령 뉴기니)의 수용소에 1927년 이래로 포로로 잡혀 있었다. 그러나 일본군의 점령 행동으로 인해, 네덜란드 정부는 그들이 일본군에 참군하는 것을 우려하여 호주 정부에 수용을 의뢰했다. 호주 정부는 호주 헌법에 위반되기 때문에 그들을 해방시켰다.
1943년 2월, 뉴질랜드 페더스턴 포로 수용소(일본인 포로 수용소)에서 일본인 포로들이 폭동을 일으킨 (페더스턴 사건) 때문에, 카우라 수용소도 경비 강화가 이루어졌다.[2] 이때, 제22수비대대(22nd Garrison Battalion)가 정비되었다. 주변 감시, 작업반 감독을 임무로 했다. 이 시민군 제22수비대에는 빅커스 기관총과 브렌 경기관총이 배치되었다.
2. 2. 일본군 포로의 상태
제2차 세계 대전 중, 일본군 포로들은 호주 카우라 포로 수용소에 수용되었다. 이들은 1943년 1월부터 수용되기 시작했으며, 초기에는 포트 모레스비 작전이나 라비 전투에서 포로가 된 해군 항공병이 중심이었으나, 점차 비스마르크 해 해전과 부나 전투 등 뉴기니 방면 전투에서 포로가 된 육군이 대다수를 차지하게 되었다.[15]포로들은 토마토, 포도 재배, 장작 벌채 등 농업에 종사했다.[16] 경비는 비교적 느슨했으며, 호주군은 부상자와 영양실조자에게 후한 간호를 제공했다. 일본인 포로들은 야구, 스모, 마작 등 레크리에이션 활동을 자유롭게 즐겼으며, 야구 백 네트를 운동장에 세운 사진이 남아있다.[16]
수용소 운영은 포로들의 자치에 맡겨졌으며, '단장'(캠프 리더)을 중심으로 '사무소'(오피스)에서 호주 측과 연락을 담당했다. 초기에는 도요시마 하지메를 중심으로 한 해군 항공병 출신들이 주도했으나, 육군 출신 포로들의 수가 증가하면서 갈등이 발생했다. 해군 출신들은 육군 출신들을 '헝그리 보이'라고 멸시하기도 했다. 선거 결과, 육군이 주도권을 잡았지만, 영어에 능통한 도요시마는 협상역으로 계속 활동했다.
포로들은 강경파와 온건파로 나뉘어 있었다. 강경파는 호주군에 대한 협력을 거부하고 노역을 거부하려 했으며, 온건파는 이에 반대했다. 주요 인물로는 B블록 초대 단장 도요시마 하지메(가명 미나미 타다오), 타하라 노리쿠니(가명 타카다 이치로), 2대 단장 카나자와 료(가명 카나자와 아키라), 2대 부단장 코지마 마사오 등이 있었다.
당시 일본 사회는 '살아서 포로의 치욕을 받지 않는다'는 전진훈 사상이 지배적이었고, 이는 제네바 협약과 충돌했다. 일본군과 일본 사회는 포로를 불명예로 여겼기 때문에, 많은 일본군 포로들은 가명을 사용했고[16] 가족과의 연락도 단절했다. 이러한 상황은 포로들에게 심리적 압박감을 주었으며, 일부는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타하라 노리쿠니는 후한 대우를 받을수록 정신적인 가책을 느꼈다고 증언하며, 당시 포로들이 처한 딜레마를 설명했다.[23]
3. 탈출
1944년 8월 첫째 주, 카우라의 정보원(일부 자료에 따르면 마츠모토라는 이름의 한국인 정보원)의 제보로[3] 당국은 카우라의 모든 일본군 포로를 장교와 부사관을 제외하고, 서쪽으로 400km 떨어진 뉴사우스웨일스주, 헤이의 다른 수용소로 이송할 계획을 세웠다. 일본군은 8월 4일에 이송 통보를 받았다.[4]
일본군 포로들은 제네바 협약을 거론하며 최대한 자신들의 권리를 보장받도록 하였는데, 최소한 1주에 한 번은 생선회를 먹어야 한다고 주장한 탓에 수용소를 지키던 호주 군인들이 시드니까지 먼 거리를 오가며 생선을 구해왔다는 기록도 존재한다.[32] 당시 카우라 수용소 제22수비대원 보고서에 따르면 카우라 포로 수용소 탈출 사건의 음모는 제네바협정을 악용하면서 허술한 수용소 감시로 잉태되었다고 보고되었다.[33]
수용소관리본부는 한인 포로 타카오 마츠모토(포로번호 : JA147016)로부터 포로들의 탈출 음모를 보고받은 후 탈출시도를 막기 위해 포로 장교들에게 카우라 포로 수용소의 사병 700명을 카우라에서 290km 서쪽에 위치한 헤이 수용소로 이전을 통보했다. 이 사실을 들은 포로들은 1944년 8월 4일 오후 모든 일본군 포로에게 탈출계획을 알렸다.
1944년 6월 3일, 카우라에 온 지 얼마 안 된 조선인 일본군 포로인 마츠모토 타케오로부터, 포로가 탈주를 계획하고 있다는 밀고가 있었다. 이를 심각하게 여긴 시드니 지구 사령부는 6월 19일, 비커스 기관총 2정을 추가 배치하고, 더욱이 카우라의 수용 인원이 대폭 정원을 초과한 점도 있어, 장교・하사관을 제외한 병사 700명을, 400km 서쪽에 위치한 헤이 (Hay, 뉴사우스웨일스주)의 제8 포로 수용소로 이송할 계획을 세웠다. 통보는 제네바 조약 제26조의 규정에 따라 이송 전날에 하도록 지시되었지만, B캠프 사령관 램지 소령은 3일이나 빠른 8월 4일 오후 2시경, 포로의 중심 인물이었던 카나자와, 코지마, 토요시마 세 명에게 통보했다. 이송자의 명단을 그 자리에서 직접 보여주자, 토요시마가 우려를 표명했다는 설도 있고, 병사의 분리를 일부러 숨겼지만 경비병 중 한 명이 실수로 발설했고, 그것을 토요시마가 몇 시간 후에 확인하고 발각되었다는 설도 있다. 일본군에게 하사관과 병사의 신뢰 관계는 두텁게 맺어져 있다는 이론에 근거하여, 분리되어 이관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 일본군은, 그것을 계기로 포로 수용소 탈주를 계획하게 된다.[16]
사건 후, 카나자와는 13일 심문 회의에서, 탈주의 목적을 "일본인으로서 포로가 된 치욕을 참기 어려워, 항상 죽을 기회를 찾고 있을 때, 분리 문제는 우리에게 죽음의 시기가 도래하는 것으로, 1104명이 일제히 결착을 짓는 죽음의 행동이다."라고 말했다. 즉, 행동의 본질은 탈주가 아니라, 타력에 의한 죽음이었다.
일본인 포로는 같은 날 오후 5시, 사무소 간부 10명과 반장 40명을 모아 회의를 열고, 요구를 받아들일지, 반대하여 공격할지를 논의했다. 갑자기 닥친 일이라, 좋은 의견이 나올 리도 없고, 많은 사람들이 입을 다물고 속내를 떠보았다. 코하라에 따르면, 그 중에는 "죽을 고비를 넘겨 살아남았다. 이 목숨을 소중히 하고 싶다. 일본으로 돌아가고 싶고, 가족들을 만나고 싶다."와 같은 발언을 한 자도 있었지만, 아무도 찬동하는 자는 없었고,[24] 제26반장 모리타 켄지 일등병에 따르면, 이윽고 강경파 반장인 시모야마가 일어나, "너희들, 그래도 군인이냐. 비국민은 내가 처치해주겠다"라고 외치고, 이에 호시노 신로쿠 일등 비행병이 동조하여, 모두의 약점을 찔렀기 때문에 분위기가 일변했다고 한다. 이후 몇 시간 동안 거의 양자가 주도하여 출격을 역설했고, 다른 반장들은 거의 침묵했다고 한다. 다만, 두 명 모두 신참이어서 원래 발언권이 낮았고, 제14반장 오오니시 하루후사 군조는, 코지마와 토요시마가 선동한 것이 아닌가 하고 추측하고 있다. 한편, 코하라에 따르면 토요시마는 회의 직후, "시모야마 녀석, 잘난 척만 하고 있네. 탈주하려는 생각도 없으면서"라고 불평했다고 한다.
결국 어떤 반장 (나카노는 도라고 추측하고 있다)의 제안으로 일단 회의를 중단하고, 포로 전원의 다수결 투표를 하기로 했다. 이 때, 화장지에 이송 수용 여부를 ○×로 표시했다고 한다. "탈주에 비참여"라고 투표한 자도 소수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이송 계획에 협조하지 않겠다, 즉 탈주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집단 심리로서 따돌림당하는 것에 대한 공포 심리가 투표에 강하게 작용하여, 대부분이 탈주에 찬성했다는 것을 현존하는 생존자가 증언하고 있다.[16] 전후, 나카노 후지오는 생존자 100명에게, 투표 결과와 본심이 어떠했는지에 대한 설문 조사를 실시했다. 응답한 것은 36명이었지만, 그 중 투표와 본심 모두 ○였던 것은 6명에 불과했고, 투표와 본심 모두 ×가 10명, 본심은 ×지만 투표에서 ○로 한 자가 14명이 되었다. 무응답이나 사건 후의 반성 감정도 고려하여 약간의 할인은 있겠지만, 80퍼센트가 반대였던 셈이 된다.
반장 회의에서 작성된 작전 명령이 각 반에 배포되고, 포로들은 준비를 마친 후, 남은 음식으로 만든 막걸리를 마셨다. 작전 명령 작성자는 불명확하지만, 내용은 기관총좌 탈취, 그 엄호 하에 철조망을 돌파하여 수비대 숙소를 제압한 뒤 뒷산에 집결, 이후 행동은 그 시점에서 결정하기로 하고, 병약자, 보행 불능자는 사전에 몸을 처치하기로 했다.
3. 1. 탈출 계획
1944년 8월 첫째 주, 카우라의 정보원(일부 자료에 따르면 마츠모토라는 이름의 한국인 정보원)의 제보로[3] 당국은 카우라의 모든 일본군 포로를 장교와 부사관을 제외하고, 서쪽으로 400km 떨어진 뉴사우스웨일스주, 헤이의 다른 수용소로 이송할 계획을 세웠다. 일본군은 8월 4일에 이송 통보를 받았다.[4]일본군 포로들은 제네바협정을 거론하며 최대한 자신들의 권리를 보장받도록 하였는데, 최소한 1주에 한 번은 생선회를 먹어야 한다고 주장한 탓에 수용소를 지키던 호주 군인들이 시드니까지 먼 거리를 오가며 생선을 구해왔다는 기록도 존재한다.[32] 당시 카우라 수용소 제22수비대원 보고서에 따르면 카우라 포로 수용소 탈출 사건의 음모는 제네바협정을 악용하면서 허술한 수용소 감시로 잉태되었다고 보고되었다.[33]
수용소관리본부는 한인 포로 타카오 마츠모토(포로번호 : JA147016)로부터 포로들의 탈출 음모를 보고받은 후 탈출시도를 막기 위해 포로 장교들에게 카우라 포로 수용소의 사병 700명을 카우라에서 290km 서쪽에 위치한 헤이 수용소로 이전을 통보했다. 1944년 6월 3일, 카우라에 온 지 얼마 안 된 조선인 일본군 포로인 마츠모토 타케오로부터, 포로가 탈주를 계획하고 있다는 밀고가 있었다. 이를 심각하게 여긴 시드니 지구 사령부는 6월 19일, 비커스 기관총 2정을 추가 배치하고, 더욱이 카우라의 수용 인원이 대폭 정원을 초과한 점도 있어, 장교・하사관을 제외한 병사 700명을, 400km 서쪽에 위치한 헤이 (Hay, 뉴사우스웨일스주)의 제8 포로 수용소로 이송할 계획을 세웠다. 통보는 제네바 조약 제26조의 규정에 따라 이송 전날에 하도록 지시되었지만, B캠프 사령관 램지 소령은 3일이나 빠른 8월 4일 오후 2시경, 포로의 중심 인물이었던 카나자와, 코지마, 토요시마 세 명에게 통보했다. 이송자의 명단을 그 자리에서 직접 보여주자, 토요시마가 우려를 표명했다는 설도 있고, 병사의 분리를 일부러 숨겼지만 경비병 중 한 명이 실수로 발설했고, 그것을 토요시마가 몇 시간 후에 확인하고 발각되었다는 설도 있다. 일본군에게 하사관과 병사의 신뢰 관계는 두텁게 맺어져 있다는 이론에 근거하여, 분리되어 이관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 일본군은, 그것을 계기로 포로 수용소 탈주를 계획하게 된다[16].
사건 후, 카나자와는 13일 심문 회의에서, 탈주의 목적을 "일본인으로서 포로가 된 치욕을 참기 어려워, 항상 죽을 기회를 찾고 있을 때, 분리 문제는 우리에게 죽음의 시기가 도래하는 것으로, 1104명이 일제히 결착을 짓는 죽음의 행동이다."라고 말했다. 즉, 행동의 본질은 탈주가 아니라, 타력에 의한 죽음이었다.
이 사실을 들은 포로들은 8월 4일 오후 모든 일본군 포로에게 탈출계획을 알렸다. 일본인 포로는 같은 날 오후 5시, 사무소 간부 10명과 반장 40명을 모아 회의를 열고, 요구를 받아들일지, 반대하여 공격할지를 논의했다. 갑자기 닥친 일이라, 좋은 의견이 나올 리도 없고, 많은 사람들이 입을 다물고 속내를 떠보았다. 코하라에 따르면, 그 중에는 "죽을 고비를 넘겨 살아남았다. 이 목숨을 소중히 하고 싶다. 일본으로 돌아가고 싶고, 가족들을 만나고 싶다."와 같은 발언을 한 자도 있었지만, 아무도 찬동하는 자는 없었고[24], 제26반장 모리타 켄지 일등병에 따르면, 이윽고 강경파 반장인 시모야마가 일어나, "너희들, 그래도 군인이냐. 비국민은 내가 처치해주겠다"라고 외치고, 이에 호시노 신로쿠 일등 비행병이 동조하여, 모두의 약점을 찔렀기 때문에 분위기가 일변했다고 한다. 이후 몇 시간 동안 거의 양자가 주도하여 출격을 역설했고, 다른 반장들은 거의 침묵했다고 한다. 다만, 두 명 모두 신참이어서 원래 발언권이 낮았고, 제14반장 오오니시 하루후사 군조는, 코지마와 토요시마가 선동한 것이 아닌가 하고 추측하고 있다. 한편, 코하라에 따르면 토요시마는 회의 직후, "시모야마 녀석, 잘난 척만 하고 있네. 탈주하려는 생각도 없으면서"라고 불평했다고 한다.
결국 어떤 반장 (나카노는 도라고 추측하고 있다)의 제안으로 일단 회의를 중단하고, 포로 전원의 다수결 투표를 하기로 했다. 이 때, 화장지에 이송 수용 여부를 ○×로 표시했다고 한다. "탈주에 비참여"라고 투표한 자도 소수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이송 계획에 협조하지 않겠다, 즉 탈주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집단 심리로서 따돌림당하는 것에 대한 공포 심리가 투표에 강하게 작용하여, 대부분이 탈주에 찬성했다는 것을 현존하는 생존자가 증언하고 있다[16]. 전후, 나카노 후지오는 생존자 100명에게, 투표 결과와 본심이 어떠했는지에 대한 설문 조사를 실시했다. 응답한 것은 36명이었지만, 그 중 투표와 본심 모두 ○였던 것은 6명에 불과했고, 투표와 본심 모두 ×가 10명, 본심은 ×지만 투표에서 ○로 한 자가 14명이 되었다. 무응답이나 사건 후의 반성 감정도 고려하여 약간의 할인은 있겠지만, 80퍼센트가 반대였던 셈이 된다.
반장 회의에서 작성된 작전 명령이 각 반에 배포되고, 포로들은 준비를 마친 후, 남은 음식으로 만든 막걸리를 마셨다. 작전 명령 작성자는 불명확하지만, 내용은 기관총좌 탈취, 그 엄호 하에 철조망을 돌파하여 수비대 숙소를 제압한 뒤 뒷산에 집결, 이후 행동은 그 시점에서 결정하기로 하고, 병약자, 보행 불능자는 사전에 몸을 처치하기로 했다.
3. 2. 탈출의 실행
1944년 8월 5일 오전 2시경, 일본군 전투기 조종사 도요시마 하지메가 나팔을 불었다.[5] 이는 일본군 포로들의 집단 탈출 신호였다. 1,000여 명의 일본군 포로들은 직접 만든 날카로운 무기를 들고 포로복과 담요로 철조망을 덮으며 탈출을 시도했다.[4] 이들은 "''반자이 돌격''"을 외치며 철조망을 뚫으려 했고, 칼, 야구 배트, 못과 갈고리가 박힌 몽둥이, 철사 비수, 올가미 끈 등으로 무장하고 있었다.[4]탈출 신호와 동시에 호주 제22수비대에서 경적이 울렸고, 벤 하디(Benjamin Gower Hardy)와 랄프 존스 이병은 경고 사격을 가했다.[4] 그럼에도 일본군 포로들이 계속 철조망으로 접근하자, 두 이병은 비커스 기관총으로 사격을 시작했다.[4] 수용소의 불이 꺼지고 혼란스러운 상황이 되자, 수비대는 조명등을 켜고 탈출하는 포로들을 사살했다. 일부 포로들은 철조망에 걸린 시체들을 밟고 넘어갔다.
하디 이병과 존스 이병은 몰려드는 포로들에게 붙잡히기 직전, 기관총의 노리쇠를 뽑아 던져버려 기관총을 무력화시켰다. 이를 통해 포로들이 기관총을 탈취하여 다른 호주군에게 사용하는 것을 막았으나, 결국 두 이병은 살해당했다.[6]
호주 국방성의 기록에 따르면, 이 탈출 사건으로 231명의 일본군 포로가 사살되거나 자살했고, 107명이 부상을 입었다.[34] 탈출에 참여하지 않은 포로들은 수용소 내에서 자살하기도 했다. 334명의 포로가 탈출에 성공했지만, 9일 만에 전원 체포되거나 사살되었다.[34] 이들 중 상당수는 자살한 것으로 밝혀졌다.[34]
탈출한 포로들 중 약 70명은 언덕 위에 집결했지만, 탈출 경로를 알지 못해 해가 뜬 후 귀순했다.[25] 나머지 포로들은 호주 농촌 지역으로 흩어져 도주했다. 일부 주민들은 포로들에게 음식(홍차와 스콘)을 제공하며 교류하기도 했지만,[16][24]대부분의 주민들은 포로를 경계하고 무장했으며, 심지어 사살하는 경우도 있었다.[24] 호주군은 육군 훈련소 생도들을 투입하여 추격했지만, 경험 부족과 무장 제한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대부분의 탈출 포로들은 다시 체포되거나 자살했다.
4. 이후 경과
탈출 사건과 이후 포로 재수집 과정에서 호주 군인 4명과 일본군 231명이 사망했고, 포로 108명이 부상당했다. 탈출 주동자들은 탈출자들에게 호주 민간인을 공격하지 말라고 명령했고, 사망자나 부상자는 없었다.
호주 정부는 이 사건에 대한 공식 조사를 실시했다. 1944년 9월 8일, 총리 존 커틴은 조사 결과를 오스트레일리아 하원에서 발표했다. 조사 결과에는 다음 내용이 포함되었다.
- 수용소의 상황은 제네바 협약에 부합했다.
- 사건 발생 전까지 일본 측은 대우와 관련하여 어떠한 불만도 제기하지 않았으며, 사건은 사전에 계획되고 공모된 계획의 결과로 보였다.
- 호주 수비대의 공격 저지 행위는 더 큰 인명 피해를 막았으며, 통제력을 되찾자마자 사격은 중단되었다.
- 사망자 중 다수는 자살하거나 다른 포로에 의해 살해되었으며, 부상당한 일본군 다수는 스스로 자해했다.
하디와 존스 이병은 그들의 행동으로 인해 사후에 조지 십자 훈장을 받았다.
호주 군인 5번째 희생자이자 제26대대 V.D.C. C 중대 소속의 토마스 로이 핸콕은 탈출자들로부터 철도와 다리를 보호하기 위해 투입되는 과정에서 차량에서 내리던 중 다른 지원병의 실수로 총에 맞아 사망했다. 핸콕은 나중에 패혈증으로 사망했다.
호주는 1947년 마지막 일본 및 이탈리아 포로가 본국으로 송환될 때까지 제12수용소를 계속 운영했다.
카우라에는 호주 유일의 일본군 묘지인 중요한 일본군 묘지가 있다. 또한, 기념 일본 정원인 인근 카우라 일본 정원 및 문화 센터는 이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나중에 벨뷰 언덕에 건설되었다.
1960년 일본 정부는 탈출 사건으로 매장된 일본인 포로들의 시체를 화장하여 카우라에 묻기로 결정했고, 1963년 카우라 시의회와 재향군인회는 전몰자를 위한 대단지 공동묘지 구역 운영권을 일본정부에 이양하는데 최종 승인했다. 이 지역은 호주 유일의 공식적인 일본군 묘지로 승인되었고, 1964년 첫 공식행사 이후 향소, 부조, 기념품을 전시하고, 거대한 화강암 기념비로 건립해 증정했다. 현재 카우라 일본군 전몰자 묘지에는 523개의 묘지가 안장되어 있다. 일본 정부는 일본군 전몰자 묘지 바로 우측에 위치한 대단위 호주 카우라 공립 공동묘지 시설 및 운영비를 지원하고 있다. 또한 카우라 일본군 전몰자 묘지 이양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1971년 일본정부는 카우라 지역 관광발전을 위해 일본식 정원과 일본문화센터를 현지에 설립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현재까지 매년 9월 카우라 벚꽃축제에는 다양한 전통문화 전시회와 일본인 인사를 초청하여 정기적인 호-일 양국 세미나를 개최하는 등 중요한 지역문화로 자리잡고 있다. 또한 호주국민들의 친일감정과 관계회복을 위해 일본군 전몰자 묘지 주변의 모든 거주자 주택 정면 도로 주변에 벚꽃나무를 심고 도로도 사쿠라로 명명하고 호주 카우라 지역과 일본 시민들 간 자매결연을 기념하는 동패를 나무아래에 전시하였다.
탈출 시도의 마지막 생존자 테루오 무라카미는 2023년 9월 14일 일본에서 사망했다.
오스트레일리아 정부는, 처음에는 카우라 사건을 극비 정보로 하여 공표하지 않았다. 사건 당시에는 전시 중이었고, 일본 정부에 일본군 포로의 다수 사망을 알렸을 경우, 일본에 의한 오스트레일리아군 포로에 대한 위험의 가능성을 고려한 결과이다. 사건 당일 오전 7시의 ABC 라디오와 신문에서의 발표를 허가했지만, 포로의 국적과 사망자 수를 공표하지 않고, 8월 6일에 사태의 수습을 선언했다. 9월 9일, 수상 존 커틴은 포로가 일본인이며, 사망자가 200명 이상임을 발표했다.
4. 1. 전후 처리
호주 정부는 이 사건에 대해 공식 조사를 실시했으며, 1944년 9월 8일 총리 존 커틴이 오스트레일리아 하원에 결과를 발표했다. 조사 결과는 다음과 같다.[24]- 수용소는 제네바 협약을 준수했다.
- 사건 이전 일본인 측은 치료에 불만을 제기한 적이 없었으며, 이는 사전에 합의된 계획의 결과로 보인다.
- 호주 수비대대의 행동은 더 큰 인명 손실을 막았고, 통제권을 되찾자마자 포격을 중단했다.
- 대부분의 사망자는 자살하거나 다른 포로에 의해 살해당했으며, 많은 일본인 부상자가 자해로 부상을 입었다.
하디 이병과 존스 이병은 공로를 인정받아 조지 십자장을 추서받았다.[24]
사건 직후인 8월 7일, 군사 심문회가 열렸고, 탈주에 가담한 포로 7명을 포함한 60명 이상의 증인이 법정에서 증언했다. 또한, 10월 31일과 12월 11일부터 15일까지 민사 검시 심문회가 비공개로 실시되었다. 두 심문회에서는 모두 사건을 계획적인 것으로 결론지었다.[24]
1945년 1월 1일, 가나자와 료 조장과 후임 단장인 요시다 히로시 조장은 군법 회의에서 벤자민 하디 일등병에 대한 살인, 그리고 "올바른 규율과 질서를 어지럽힌" 죄로 기소되었다. 같은 달 25일의 판결에서 요시다는 무죄, 가나자와는 후자의 죄로 유죄 판결을 받고 중노동 15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가나자와는 1946년 3월에 형기를 단축하여 다른 포로들과 함께 귀환했다.[24]
사건 전날 회의에서 기염을 토했던 시모야마 요시오 조장은 사건 후 다른 포로들에게 비난받아 8월 9일에 자결했다.[24]
1962년, 수용소 부지에 카우라 일본군 전몰자 묘지가 건설되어, 카우라에서 사망한 사람 외에 호주 다른 지역에서 전사한 522위가 매장되었다. 1963년 호주 정부는 묘지를 일본에 양도했다. 관련 시설로는 카우라 일본 정원이 있다.
1973년, 상황 아키히토, 상황후 미치코는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를 방문하여 카우라 시에도 들러 일본인 묘지에서 헌화했다. 1992년에는 구로다 사야코(당시에는 노리노미야), 1995년에는 아키시노노미야 후미히토 친왕 부부가 같은 카우라 일본인 묘지를 방문하여 헌화했다.
1970년, 카우라 고등학교와 세이케이 고등학교 사이에 교환 유학 제도가 발족했다.
4. 2. 진상 논란
마쓰모토 타케오가 주장하는 탈출 계획에 대해 많은 전 포로들이 부정하고 있다. 모리타 켄지에 따르면, 처음에는 그런 이야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안온한 포로 생활로 인해 거의 형해화되었다고 한다. 또한, 무기로 사용된 것도 평소 도구로 사용하던 것이며, 가공한 즉흥적인 것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7월 중에 3명의 포로가 의도적으로 규칙 위반 행위를 하는 등, 진행 중이던 계획에서 이탈하려는 듯한 수상한 움직임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5. 한국과의 관계
6. 영화 및 문학에서의 묘사
카우라 사건은 여러 미디어를 통해 다양하게 묘사되었다.
- The Night of a Thousand Suicides영어 (1970년, 앵거스 & 로버트슨): 아사다 테루히코의 소설을 레이 코완이 번역했다.
- Dead Men Rising영어 (1975년, 앵거스 & 로버트슨): 사건 당시 카우라에 주둔했던 시포스 매켄지가 쓴 소설이다.[35]
- Die like the Carp: The Story of the Greatest Prison Escape Ever영어 (1978년, 코르기 북스): 해리 고든이 쓴 논픽션이다.[36]
- 카우라 탈출 (The Cowra Breakout, 1984년): 마가렛 켈리와 크리스 누난이 각본을 쓰고, 누난과 필립 노이스가 연출한 4시간 30분 분량의 텔레비전 미니시리즈이다.[37][38]
- あの日、僕らの命はトイレットペーパーよりも軽かった -カウラ捕虜収容所からの大脱走일본어 (2008년): 닛폰 방송에서 55주년 특집으로 방영한 2시간 분량의 영상이다. 니혼 TV에서 제작하였으며, 나카조노 미호가 각본을 맡고, 고이즈미 코타로, 오이즈미 요, 아베 사다오 등이 출연했다.
- Shame and the Captives영어 (2013년): 토마스 키닐리가 카우라 포로 수용소 사건을 허구화한 소설이다.
- Barbed Wire and Cherry Blossoms영어 (2016년):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인근 원주민 선교지에 숨어있던 포로에 대한 허구의 이야기를 다룬 애니타 하이스 박사의 역사 소설이다.
- Broken Sun영어 (2008년): 브래드 헤인즈가 감독한 호주 영화로, 다크레 팀스가 각본을, 앤서니 제닝스가 촬영을, 마테오 징가레스가 음악을, 헤일리 레이크가 편집을 맡았으며, 제이 코트라에, 우사미 신고 등이 출연했다.
- Lost Officer영어 (2005년): D 수용소에 수감된 일본군 포로들과 탈옥에 관여한 사람들에 초점을 맞춘 야마다 마미 박사의 논픽션이다.
- Reconsidering the Cowra Breakout of 1944: From the Viewpoints of Survived Japanese Prisoners of War and Their 'Everyday Lives' in the Camp영어 (2014년): 야마다 마미 박사의 박사 학위 논문(일본어)이다.
- The Cowra Breakout영어 (2022년): 맷 맥라클란의 논픽션이다.
다큐멘터리 영화로는 『카우라, 잊지 않아』(2021년, 일본, 미츠다 야스히로 감독)가 있다. 텔레비전 프로그램으로는 『처음 전쟁을 알았다 - 젊은이들의 여행 (2) 살아서 포로의 치욕을 받지 않다 - 오스트레일리아 카우라 사건』(1993년, NHK 엔터프라이즈)이 있다.
참조
[1]
웹사이트
The Story of Italians at the POW Camp
http://www.cowraregi[...]
2016-08-06
[2]
웹사이트
They had to remember they were soldiers, albeit female {{!}} Australian War Memorial
https://www.awm.gov.[...]
2021-04-21
[3]
논문
Shooting and Friendship over Japanese Prisoners of War
https://mro.massey.a[...]
[4]
서적
The Final Campaigns
https://www.awm.gov.[...]
Australian War Memorial
[5]
웹사이트
Exhibit - Objects through Time: COWRA bugle, c1930s
http://www.migration[...]
Migration Heritage Centre, New South Wales
2006
[6]
서적
Events That Shaped Australia
New Holland
[7]
뉴스
Australian town commemorates 1944 POW camp breakout
http://www.japantime[...]
The Japan Times
2014-08-19
[8]
웹사이트
Vale Teruo Murakami, the last survivor of the Cowra Breakout
https://www.cowracou[...]
2023-10-15
[9]
서적
Dead men rising / [by] Kenneth Seaforth Mackenzie
http://catalogue.nla[...]
National Library of Australia
[10]
서적
Die like the carp : the story of the greatest prison escape ever / Harry Gordon
http://catalogue.nla[...]
National Library of Australia
[11]
웹사이트
The Cowra Breakout - Curator's notes + clips & credits
http://aso.gov.au/ti[...]
National Film and Sound Archive
2011-11-24
[12]
웹사이트
The Cowra Breakout (TV mini-series 1984)
https://www.imdb.com[...]
IMDb
2011-11-24
[13]
서적
Voyage from shame / [by] Harry Gordon
https://catalogue.nl[...]
National Library of Australia
[14]
웹사이트
"Fact Sheet 198: Cowra outbreak, 1944"
http://www.naa.gov.a[...]
オーストラリア国立公文書館
2008-06-18
[15]
웹사이트
Cowra Breakout
http://www.awm.gov.a[...]
オーストラリア戦争記念館
2008-06-18
[16]
간행물
初めて戦争を知った - 若者たちの旅(2)生きて虜囚の辱めを受けず - オーストラリア・カウラ事件
NHKエンタープライズ
[17]
문서
中野(1984)、p.129に基づく。ただし秦(1998)、P.252では高原以外の偽名は山川清、伊野治義、天川昇、平田一夫となっている。事件では沖本が死亡
[18]
웹사이트
A6M2 Model 21 Zero Manufacture Number 1575 Tail V-110
https://www.pacificw[...]
Pacific Wrecks
2018-01-06
[19]
웹사이트
昭和17年4月~昭和17年5月 台南空 飛行機隊戦闘行動調書(4)
https://www.jacar.ar[...]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C08051602800、昭和17年4月~昭和17年5月 台南空 飛行機隊戦闘行動調書 (防衛省防衛研究所)
2018-01-08
[20]
웹사이트
昭和17年8月~昭和17年10月 2空 飛行機隊戦闘行動調書(1)
https://www.jacar.ar[...]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C08051623600、昭和17年8月~昭和17年10月 2空 飛行機隊戦闘行動調書 (防衛省防衛研究所)
2018-01-08
[21]
웹사이트
D3A1 Model 11 Val Manufacture Number ?
https://www.pacificw[...]
Pacific Wrecks
2018-01-06
[22]
웹사이트
The prison breakout at Cowra, August 1944
http://www.awm.gov.a[...]
オーストラリア戦争記念館(1963年発行、Gavin Long著“Australia in the War of 1939-1945”から引用)
2008-06-18
[23]
문서
神立(2004)、p.135
[24]
웹사이트
鉄条網に掛かる毛布 カウラ捕虜収容所脱走事件とその後
http://ajrp.awm.gov.[...]
オーストラリア戦争記念館
2018-01-07
[25]
웹사이트
Gavin Long
http://www.adb.onlin[...]
2008-06-18
[26]
문서
原文はAt about 2 a.m. a Japanese ran to the camp gates and shouted what seemed to be a warning to the sentries. Then a Japanese bugle sounded. A sentry fired a warning shot. More sentries fired as three mobs of prisoners, shouting "Banzai", began breaking through the wire, one mob on the northern side, one on the western and one on the southern. They flung themselves across the wire with the help of blankets. They were armed with knives, baseball bats, clubs studded with nails and hooks, wire stilettos and garotting cords.
[27]
문서
『戦後・映像メディア開発史』(高橋克雄著・文芸広場連載)
[28]
뉴스
集団脱走60年で記念行事 豪カウラ、元捕虜も参加
http://www.47news.jp[...]
47NEWS
2014-02-10
[29]
웹사이트
国際理解教育
https://www.seikei.a[...]
成蹊中学・高等学校
2019-03-17
[30]
웹사이트
Japanese and Australian War Cemeteries(日本人・オーストラリア人戦争慰霊墓地)
http://www.cowratour[...]
2008-06-18
[31]
서적
age Office & Department of Urban Affairs & Planning, Regional Histories of NSW(1996)
Heritage Collections Council
[32]
서적
The Blood Bath at Cowra in As You Were(Sysdey: Angus & Robertson)
[33]
서적
History - Directorate of Prisoners of War and Internees: 1939-1951(NAA No.A7711)
[34]
서적
Events That Shaped Australia
New Holland
[35]
서적
Dead men rising / [by] Kenneth Seaforth Mackenzie
http://catalogue.nla[...]
National Library of Australia
[36]
서적
Die like the carp : the story of the greatest prison escape ever / Harry Gordon
http://catalogue.nla[...]
National Library of Australia
[37]
웹인용
The Cowra Breakout - Curator's notes + clips & credits
http://aso.gov.au/ti[...]
National Film and Sound Archive
2021-12-14
[38]
웹인용
The Cowra Breakout (TV mini-series 1984)
https://www.imdb.com[...]
IMDb
2021-12-14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