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디아 공방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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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칸디아 공방전은 1648년부터 1669년까지 오스만 제국과 베네치아 공화국 간에 벌어진 전투이다. 17세기 지중해에서 베네치아의 세력이 약화되고 오스만 제국의 세력이 강화되는 가운데, 몰타 기사단의 오스만 수송선 습격 사건을 계기로 오스만 제국이 크레타 섬을 침공하면서 시작되었다. 16년 간의 공방전 동안 베네치아는 해상 보급을 차단하기 위해 해전을 벌였으나, 프랑스 등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1669년 항복했다. 이로 인해 베네치아는 크레타 섬을 상실하고, 오스만 제국은 지중해에서의 패권을 더욱 강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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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디아 공방전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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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디아 공방전 | |
전투 정보 | |
일부 | 크레타 전쟁 (제5차 오스만-베네치아 전쟁) |
![]() | |
날짜 | 1648년 5월 1일 – 1669년 9월 27일 (21년 4개월 3주 6일) |
장소 | 이라클리오, 베네치아 |
영토 | 크레타가 오스만에게 양도됨 |
결과 | 오스만 제국의 승리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오스만 제국 |
교전국 2 | 베네치아 공화국 몰타 기사단 프랑스 왕국 |
지휘관 및 지도자 | |
지휘관 1 | 쾨프륄뤼 파질 아흐메드 |
지휘관 2 | 프란체스코 모로시니 |
병력 규모 | |
병력 1 | 60,000명의 병사 20,000명의 노동자와 광부 |
병력 2 | 10,000명의 유럽 동맹군 12,000명의 크레타 및 베네치아 시민 |
사상자 및 손실 | |
사상자 1 | 118,754명의 병사 (베네치아 보고서) |
사상자 2 | 30,985명의 베네치아 병사 (베네치아 보고서) |
2. 배경
17세기, 지중해에서 베네치아 공화국의 세력은 오스만 제국의 성장과 함께 쇠퇴하고 있었다. 베네치아 공화국은 오스만 제국이 어떤 구실을 이용해서라도 추가적인 적대 행위를 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1644년, 몰타 기사단은 이스탄불에서 알렉산드리아로 향하던 오스만 제국의 선단을 공격하여 약탈품과 함께 칸디아에 상륙했다. 약탈품에는 하렘의 전직 흑인 내시 총감, 카이로의 카디, 메카로 향하던 순례자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에 쉴라흐다르 유수프 파샤가 이끄는 6만 명의 오스만 군대가 베네치아령 크레타 섬에 상륙했다. 이들은 1645년 6월 하니아(당시 라 카네아)와 레팀노(당시 레티모)를 포위, 점령했는데, 각 도시를 함락하는데 두 달이 걸렸다. 오스만 군대는 1645년부터 1648년 사이에 섬의 나머지 지역을 점령하고 수도 칸디아를 함락할 준비를 했다.
2. 1. 지중해 세력 구도 변화
1600년대에 지중해에서 베네치아 공화국의 세력은 약화되었고, 반대로 오스만 제국의 세력은 강화되었다. 베네치아 공화국은 오스만 제국이 적개심 때문에 어떠한 행동을 할 것이라고 예상했다.1644년, 몰타 기사단이 알렉산드리아에서 이스탄불로 가던 오스만 제국의 수송선을 공격했다. 이 배에는 메카를 순례하고 돌아오던 순례자들과 술탄의 하렘에 속하던 여인들도 타고 있었는데, 몰타 기사단은 이들을 붙잡아 칸디아에 내려놓았다.
이에 유수프 파샤가 이끄는 6만 명의 오스만 군대가 베네치아령 크레타에 상륙, 하니아(당시 라 카네아)와 레팀노(당시 레티모)를 점령했다. 이 도시들을 점령하는데 각각 두 달이 걸렸다. 1645년부터 1648년 사이에 오스만 제국은 크레타 섬 대부분을 장악하고, 수도 칸디아 공격을 준비했다.
2. 2. 오스만 제국의 크레타 침공
1600년대에, 지중해에서 베네치아 공화국의 세력은 약화되었고, 반대로 오스만 제국의 세력은 강화되었다. 베네치아 공화국은 오스만 제국이 자신들에 대한 적개심 때문에 어떠한 행동을 취할 것이라고 믿었다.1644년, 몰타 기사단이 알렉산드리아에서 이스탄불로 가던 오스만 제국의 수송선을 습격했다. 이 수송선에는 메카를 순례하고 돌아오던 순례자와 술탄의 하렘에 속하던 여인들도 포함되어 있었고, 몰타 기사단은 습격하여 손에 넣은 사람들과 물자들을 칸디아에 내려놓았다.
이에 오스만 제국은 유수프 파샤가 지휘하는 60,000명의 대군을 출격시켜 베네치아령 크레타에 상륙시키고, 오늘날의 하니아인 라 카네아와 레팀노인 레티모를 점거했다. 이 도시들을 점령하는 데 각각 두 달 정도가 걸렸다. 1645년부터 1648년 사이에 오스만 제국은 크레타 섬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크레타 섬의 수도인 칸디아 공략을 준비했다.
3. 칸디아 공방전 (1648년 ~ 1669년)
1648년 5월, 오스만 제국은 칸디아 공방전을 개시했다. 이들은 3개월 동안 도시의 물 공급을 차단하고 베네치아의 해상 보급로를 방해했다. 이후 16년 동안 칸디아에 포격을 지속했지만 큰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베네치아는 다르다넬스 해협을 봉쇄하여 크레타 섬의 오스만군 보급을 막으려 했고, 이로 인해 여러 차례 해전이 벌어졌다. 1655년과 1656년에는 베네치아가 승리했지만, 1657년에는 오스만 해군에 패배하여 베네치아 함장 라자로 모체니고가 전사했다.
1659년 피레네 조약으로 프랑스와 스페인 간 평화가 찾아오면서 베네치아는 서방의 지원을 더 받을 수 있게 되었으나, 1664년 바슈바르 조약으로 오스만 제국은 더 많은 병력을 동원할 수 있게 되었다.
1666년, 베네치아의 칸니아(Chania) 탈환 시도는 실패했다. 1669년 프랑스군과 연합하여 칸디아 포위망을 풀려던 작전도 실패했고, 7월 24일 프랑스 부기함 라 테레세가 폭발로 침몰하며 수비대 사기가 크게 저하되었다.
thumb, 1651년]]
결국 1669년 8월, 프랑스군이 철수하자 베네치아군 사령관 프란체스코 모로시니는 3,600명의 병력으로 1669년 9월 27일 오스만 제국의 대 와지르 아흐메트 쾨프륄뤼에게 항복했다.
모든 기독교인은 소지품을 가지고 도시를 떠날 수 있었고, 베네치아는 그람부사, 수다, 스피날롱가 요새를 유지했다. 달마티아 영토 확장이 이루어졌지만, 모로시니는 원로원 허가 없이 조약을 체결해 논란이 되었다.
교황 클레멘스 9세는 칸디아 함락 소식을 듣고 병을 얻어 1669년 11월에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3. 1. 초기 공방전과 해전
1648년 5월, 칸디아 공방전이 시작되었다. 오스만 제국군은 도시의 물 보급을 끊고, 베네치아의 해상 보급을 저지하는 등 사전 작업을 하는 데 3달을 사용하였다. 이후 16년 동안 오스만군은 지원을 받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한 칸디아에 포격을 계속했다.해양 강국이었던 베네치아는 크레타의 오스만군에 대한 보급선을 차단하기 위해 다르다넬스 해협을 봉쇄하려 시도했다. 이는 크레타 섬을 중심으로 하는 해전으로 이어졌다. 1655년 베네치아 해군은 오스만 제국 해군에 대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1656년 8월 26일, 에게해에서 크레타에 있는 오스만군에 대한 보급을 차단하기 위해 루이지 모체니고 제독 휘하의 베네치아 함대는 다르다넬스 해협을 봉쇄하는 전략을 계속하고 있었다.
1657년 7월 17일~19일, 베네치아 해군은 오스만 해군에게 패하였으며, 베네치아 함장 라자로 모체니고는 떨어지는 돛대에 깔려 사망하였다.
1659년 11월 7일, 피레네 조약이 체결되어 프랑스와 스페인 사이에 평화가 찾아왔고, 베네치아는 서방 세계로부터 더 많은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1664년 8월 바슈바르 조약이 체결된 후, 오스만 제국은 더 많은 병력을 동원할 수 있게 되었다.
3. 2. 국제 정세 변화와 지원
1648년 칸디아 공방전이 시작된 후, 베네치아는 해상 강국의 이점을 활용하여 다르다넬스 해협을 봉쇄하고 크레타 섬의 오스만군 보급을 차단하려 시도했다. 이 과정에서 여러 차례 해전이 벌어졌는데, 1655년과 1656년에는 베네치아가 승리했지만, 1657년에는 오스만 해군에게 패배하며 베네치아 함장 라자로 모체니고가 전사하는 피해를 입었다.[2]1659년 피레네 조약으로 프랑스와 스페인 사이에 평화가 찾아오면서 베네치아는 서방 세계로부터 더 많은 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2] 그러나 1664년 바슈바르 조약 체결 이후 오스만 제국은 더 많은 병력을 동원할 수 있게 되어 상황이 다시 악화되었다.[2]
1666년 칸니아(Chania) 탈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고, 1669년에는 프랑스군과 함께 칸디아 포위망을 풀려던 작전 역시 실패했다. 특히 7월 24일에는 프랑스 함대의 부기함 라 테레세가 화약통 폭발로 침몰하면서 도시 수비대의 사기가 크게 저하되었다.[2]
결국 1669년 8월, 프랑스군이 철수를 결정하면서 베네치아군 사령관 프란체스코 모로시니는 3,600명의 병력만으로 요새를 지켜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그는 결국 1669년 9월 27일 오스만 제국의 대재상 아흐메드 쾨프륄뤼에게 항복했다.[2]
3. 3. 프랑스 개입과 철수
1659년 11월 7일, 피레네 조약으로 프랑스와 스페인 사이에 평화가 찾아오자 베네치아는 서방 세계로부터 더 많은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1664년 8월 바슈바르 조약 체결 후, 오스만 제국은 더 많은 병력을 동원할 수 있게 되었다.1666년 칸니아(Chania)를 탈환하려는 시도가 실패하였다. 1669년 프랑스군과 함께 칸디아의 포위를 풀려고 한 작전 역시 실패했다. 7월 24일 이 작전 중, 58문의 대포를 장착한 900톤급 프랑스 함대의 부기함 라 테레세(La Thérèse)는 화약통 폭발로 칸디아에서 침몰하였다. 이 사건은 도시 수비대의 사기를 크게 저하시켰다.
1669년 8월, 프랑스군이 퇴각을 결심하면서 전환점을 맞았다. 베네치아군 사령관 프란체스코 모로시니는 오직 3,600명의 병력으로 요새를 수비하고 있었다. 그는 1669년 9월 27일 오스만 제국의 대 와지르 아흐메드 쾨프륄뤼에게 항복한다.
thumb의 삽화, 1863년.]]
3. 4. 베네치아의 항복과 협상
1669년 8월, 프랑스군이 철수하면서 베네치아군 사령관 프란체스코 모로시니는 3,600명의 병력만으로 요새를 수비하게 되었다. 그는 1669년 9월 27일 오스만 제국의 대와지르 아흐메드 쾨프륄뤼에게 항복하였다.협상 조건에 따라 모든 기독교인들은 소유물을 가지고 도시를 떠날 수 있었다. 또한 베네치아는 그람부사, 수다, 스피날롱가의 세 요새를 계속 소유할 수 있었는데, 이 요새들은 베네치아 함대가 동쪽으로 운항할 때 머무를 수 있는 자연적인 항만을 보호하는 작은 섬에 위치해 있었다. 크레타 상실에 대한 보상으로 달마티아의 영토 확장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모로시니는 베네치아 원로원의 허락 없이 조약을 체결하여 수년간 논란에 휘말렸다.
4. 공방전의 결과와 영향
1648년 5월부터 시작된 칸디아 공방전은 20년 넘게 지속된 긴 전쟁이었다. 베네치아는 다르다넬스 해협 봉쇄를 통해 오스만 제국의 보급을 차단하려 했고, 이로 인해 여러 차례 해전이 벌어졌다.[1] 1655년 베네치아 해군은 오스만 해군에 승리하기도 했지만,[1] 1657년에는 패배하며 라자로 모체니고 함장이 전사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1]
1659년 피에니스 조약으로 프랑스와 스페인 사이에 평화가 찾아오면서 베네치아는 서방의 지원을 더 받을 수 있게 되었지만,[1] 1664년 바즈바르 조약 이후 오스만 제국은 더 많은 병력을 동원할 수 있게 되었다.[1]
4. 1. 베네치아의 피해와 보상
베네치아는 칸디아 공방전에서 큰 피해를 보았지만, 몇 가지 보상을 얻었다. 협상 결과, 모든 기독교인은 소유물을 가지고 도시를 떠날 수 있었다. 또한 베네치아는 그람부사, 수다, 스피나롱가 등 세 요새를 계속 소유하여 동쪽 항해 때 중요한 거점으로 활용했다.[1] 달마티아 확대로 크레타 섬 상실을 일부 보상받기도 했다.[1]그러나 프란체스코 모르시니 사령관은 베네치아 원로원의 허락 없이 항복 조약을 체결해 논란이 되었다.[1]
4. 2. 오스만 제국의 승리와 지중해 패권 강화
1666년 칸니아(Chania) 탈환 시도가 실패하고, 1669년 프랑스군과 함께 칸디아 포위를 풀려던 작전 역시 실패하였다. 이 과정에서 7월 24일 프랑스 함대의 부기함 라 테레세(La Thérèse)가 화약통 폭발로 침몰하는 사건이 발생하여 도시 수비대의 사기가 크게 저하되었다.[1]1669년 8월 프랑스군이 퇴각하면서, 베네치아군 사령관 프란체스코 모르시니는 3,600명의 병력만으로 요새를 지켜야 했다. 결국 그는 1669년 9월 27일 오스만 제국의 대와지르 아흐메드 코프루루에게 항복하였다.[1]
항복 협정에 따라 모든 기독교인들은 소유물을 가지고 도시를 떠날 수 있었다. 베네치아는 그람부사, 수다, 스피나롱가 요새를 계속 보유하고, 달마티아를 얻는 대가로 크레타 섬을 상실했다. 그러나 모르시니는 원로원의 허락 없이 조약을 체결하여 논란의 중심에 섰다.[1]
교황 클레멘스 9세는 칸디아 함락 소식을 듣고 병을 얻어 1669년 11월에 사망하였다.[1]
4. 3. 생물학전 시도 논란 (한국의 관점)
베네치아 공화국 국가문서보관소에서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베네치아 정보부는 오스만 군인들에게 페스트를 퍼뜨려 포위 공격을 해제하려는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이 계획은 페스트 환자의 비장과 림프절 종창을 이용해 만든 액체를 사용하는 것이었다.[3] 미국의 국방대학교 학자에 따르면, 이 계획은 완벽하게 조직되었고 치명적인 혼합물도 사용할 준비가 되었지만, 결국 공격은 실행되지 않았으며, 2015년 12월에 공개될 때까지 생물학전 역사가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다고 한다.[4]5. 주요 참전자
참조
[1]
서적
A Military History of Italy
2008
[2]
PhD
The War of Candia, 1645–1669
https://digitalcommo[...]
LSU Historical Dissertations and Theses
[3]
학술지
Biological Warfare Plan in the 17th Century—the Siege of Candia, 1648–1669
2015-12-21
[4]
학술지
Letter to the Editor-Biological Warfare in the 17th Century
2016-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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