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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라메이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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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케라메이코스는 고대 아테네의 도공 구역이자 묘지로, '도자기 점토'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kéramos'에서 유래되었다. 테미스토클레스 성벽 건설 이후 중요한 문과 도로가 생겼고, 파나테나이아 축제와 관련된 폼페이온이 위치했다. 이곳은 다양한 시대의 묘지와 공공 건물이 존재했으며, 아테네 역병 희생자 매장지, 쿠로스 조각상 등 고고학적 발견이 이루어졌다. 현재는 케라메이코스 고고학 박물관과 지하철역이 있으며, 고대 유적과 현대 도시가 공존하는 지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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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라메이코스 - [지명]에 관한 문서
개요
유형아테네의 지역
위치그리스, 아티카 주, 아테네
로마자 표기Kerameikos
지리
좌표북위 37° 58′ 42″ 동경 23° 43′ 8″
일반 정보
우편 번호105 53
지역 번호210
웹사이트아테네 시 공식 웹사이트

2. 역사

케라메이코스는 고대 아테네의 중요한 구역 중 하나로, 그 이름은 '도자기 점토'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κέραμος|케라모스grc에서 유래한 도공들의 구역(데모스)인 케라메이스(Κεραμεῖς)에서 따왔다.[1][7] 이곳은 에리다노스 강이 운반해 온 풍부한 점토 덕분에 초기부터 도공들의 활동 중심지였으며, 동시에 아테네의 주요 묘지 지역으로도 기능했다.

이 지역은 기원전 3천년기부터 에리다노스 강가의 습지대에 형성된 묘지로 사용되기 시작했으며, 기원전 1200년경부터는 체계적인 묘지로 발전했다. 그리스 고졸기에는 성스러운 길(히에라 호도스)을 따라 점차 크고 정교한 무덤과 기념물들이 세워졌다.[1][7]

기원전 478년 테미스토클레스의 도시 성벽 건설은 케라메이코스의 모습을 크게 바꾸었다. 성벽은 이 지역을 도시 내부와 외부 묘지로 나누었고, 성스러운 문과 디필론 문이라는 두 개의 주요 성문이 케라메이코스에 세워졌다. 디필론 문 밖에는 페리클레스와 같은 인물들을 위한 국립 묘지(δημόσιον σῆμα|데모시온 세마grc)가 마련되었다.[1][7]

고전 시대에는 성벽 밖 '무덤의 거리'를 따라 부유층의 묘지 기념물이 세워졌고, 성벽 안쪽에는 파나테나이아 축제와 관련된 폼페이온 건물이 있었다. 기원전 317년에는 호화로운 묘지 건설이 법으로 금지되기도 했다.[1][7]

로마 제국 시대에는 기원전 86년 술라의 침공과 서기 267년 헤룰리족의 침입 등으로 인해 폼페이온 등 많은 건물이 파괴되며 점차 쇠퇴했다. 이후 도자기 공방 등으로 명맥을 유지하다 6세기 말 아바르족과 슬라브족의 침략 이후 잊혔다가, 1863년 비석 발굴을 계기로 재발견되었다.[1][7]

2. 1. 어원 및 초기 역사

케라메이코스라는 이름은 도시 광장 또는 데모스 (δῆμος|데모스grc, 행정구역)인 케라메이스 (Κεραμεῖς|케라메이스grc, 도공)에서 유래했으며, 이는 다시 '도자기 점토'를 의미하는 κέραμος|케라모스grc에서 파생되었다. 영어 단어 '세라믹'의 어원이기도 하다.[1][7] 케라메이코스는 '내부 케라메이코스'와 '외부 케라메이코스'로 나뉜다. 내부 케라메이코스는 도시 내의 옛 '도공 구역'이었고, 외부 케라메이코스는 도시 성벽 바로 바깥의 묘지와 δημόσιον σῆμα|데모시온 세마grc (공공 묘지)를 포함했다. 이 공공 묘지는 페리클레스가 기원전 431년에 유명한 장례 연설을 한 장소이기도 하다. 또한, 이 묘지는 히에라 호도스 (성스러운 길), 즉 엘레우시스로 가는 길이 시작되는 곳이었으며, 이 길을 따라 엘레우시스 비의를 위한 행렬이 이동했다. 도공 구역이 이곳에 자리 잡은 이유는 에리다노스 강이 운반해 온 풍부한 점토 진흙 때문이었다.[1][7]

이 지역은 최근 몇 년간 여러 고고학 발굴이 진행되었지만, 발굴된 지역은 고대 데모스의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 원래 이곳은 에리다노스 강둑을 따라 있는 습지였으며, 기원전 3천년기부터 묘지로 사용되었다. 기원전 1200년경부터 조직적인 묘지가 조성되었고, 이 시기의 수많은 시스트 무덤과 매장품이 고고학자들에 의해 발견되었다. 주택은 더 높고 건조한 남쪽 땅에 지어졌다. 그리스 고졸기 동안에는 에리다노스 강 남쪽 둑을 따라 성스러운 길을 따라 점점 더 크고 복잡한 무덤 언덕과 기념물이 세워졌다.[1][7]

기원전 5세기에 건설된 테미스토클레스 성벽의 일부


기원전 480년, 아케메네스 제국의 아테네 파괴 이후, 기원전 478년에 테미스토클레스의 제안으로 새로운 도시 성벽이 건설되면서 이 지역의 모습은 근본적으로 변화했다. 모든 장례 조각품은 도시 성벽 안으로 옮겨졌고, 북서쪽으로 향하는 두 개의 큰 도시 문이 케라메이코스에 세워졌다. 성스러운 길은 남쪽에 있는 성스러운 문을 통해 엘레우시스로 이어졌다. 북쪽에는 넓은 도로인 드로모스가 이중 아치형의 디필론 문 (또는 트리시아 문)을 통과하여 몇 마일 떨어진 플라톤 아카데미로 이어졌다. 디필론 문 양쪽에는 국가 묘지가 조성되어, 페리클레스클레이스테네스를 포함한 저명한 전사와 정치가 등 아테네의 중요한 인물들이 매장되었다.[1][7]

플라톤 아카데미로 가는 길


도시 성벽 건설 이후에도 성스러운 길과 '무덤의 거리'로 알려진 분기된 거리에는 기원전 4세기 말까지 부유한 아테네 가문들의 인상적인 매장 기념물이 들어섰다. 그러나 기원전 317년 법령으로 이러한 호화로운 묘지 건설이 금지되었고, 이후에는 작은 기둥이나 글씨가 새겨진 사각형 대리석 블록만 무덤 표식으로 허용되었다. 로마 제국의 아테네 점령 이후 기념물 건설이 부활했지만, 오늘날 남아 있는 것은 거의 없다.[1][7]

폼페이온 유적


고대 그리스 시대에는 두 문 사이, 도시 성벽 안쪽에 중요한 공공 건물인 폼페이온이 있었다. 이 건물은 파나테나이아 축제 동안 아테나 여신을 기리는 행렬(πομπή|폼페grc)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폼페이온은 기둥으로 둘러싸인 넓은 안뜰과 연회실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아테네 귀족들은 이곳에서 축제를 위해 희생된 고기를 먹었다. 고대 그리스 자료에 따르면, 축제를 위해 헤카톰베(소 100마리를 희생하는 제사)가 거행되었고, 사람들은 케라메이코스, 아마도 디필론 문 안뜰에서 고기를 받았다고 한다. 발굴 과정에서 도시 성벽 앞에서는 다량의 동물 뼈 무더기가 발견되기도 했다.[1][7]

폼페이온과 성스러운 문 근처의 많은 다른 건물들은 술라가 이끄는 로마 군대가 아테네를 약탈했을 때인 기원전 86년에 파괴되었다. 플루타르코스는 이 사건을 피비린내 나는 참사로 묘사했다.[1][7] 서기 2세기에는 폼페이온 자리에 창고가 건설되었지만, 이마저도 서기 267년 헤룰리족의 침략으로 파괴되었다. 폐허는 서기 500년경까지 도공들의 작업장으로 사용되었고, 이후 두 개의 평행한 콜로네이드(열주랑)가 도시 문 뒤, 옛 도시 성벽 너머까지 건설되었다. 세 개의 입구를 가진 새로운 축제 문이 동쪽에 세워졌으나, 이 역시 6세기 말 침략한 판노니아 아바르족과 슬라브족의 습격으로 파괴되었다. 이후 케라메이코스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혔다가, 1863년 4월 한 그리스 노동자가 비석(석비)을 발굴하면서 다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1][7]

2. 2. 고졸기 및 고전 시대

이 지역은 원래 에리다노스 강가의 습지대로, 기원전 3천년 전부터 묘지로 사용되었다. 기원전 1200년경부터는 체계적으로 정비된 묘지가 되었으며, 이 시기의 많은 시스트 무덤과 부장품들이 발굴되었다. 주거 지역은 비교적 높고 건조한 남쪽 땅에 형성되었다. 그리스 고졸기에는 에리다노스 강 남쪽 둑을 따라 성스러운 길(히에라 호도스) 주변으로 점차 크고 복잡한 형태의 무덤 언덕과 기념물들이 세워졌다.[1][7]

기원전 480년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에 의해 아테네가 파괴된 후, 기원전 478년 테미스토클레스의 제안으로 새로운 도시 성벽(테미스토클레스 성벽)이 건설되면서 이 지역의 모습은 크게 변화했다. 이 과정에서 기존의 장례 조각품들은 성벽 건축 자재로 사용되었다. 성벽 북서쪽 케라메이코스 지역에는 두 개의 큰 성문이 세워졌다. 하나는 엘레우시스로 향하는 성스러운 길이 통과하는 성스러운 문( Ἱερὰ Πύλη|히에라 필레grc )이고, 다른 하나는 북쪽의 넓은 도로인 드로모스(Dromos)가 통과하는 이중 아치 형태의 디필론 문( Δίπυλον|디필론grc, '이중 문'이라는 뜻)이다. 디필론 문을 통해 나아가는 길은 몇 마일 떨어진 아카데미아로 이어졌다. 디필론 문 주변에는 페리클레스클레이스테네스와 같이 아테네에 공헌한 영웅이나 정치가들을 위한 국립 묘지( δημόσιον σῆμα|데모시온 세마grc )가 마련되었다.[1][7]

성벽 건설 이후에도 기원전 4세기 후반까지 성스러운 길과 여기서 갈라져 나가는 '무덤의 거리' 주변에는 부유한 아테네 가문들이 세운 인상적인 묘지 기념물들이 들어섰다. 그러나 기원전 317년, 이러한 호화로운 묘지 건설을 금지하는 법령이 발표되면서 이후에는 작은 기둥이나 명문이 새겨진 사각형 대리석판만이 묘비로 허용되었다. 로마 제국 시대에 아테네가 점령되면서 잠시 대형 기념물 건설이 부활하기도 했지만, 현재 남아있는 것은 거의 없다.[1][7]

고전 시대에는 성벽 안쪽, 두 문 사이에 폼페이온(Pompeion)이라는 중요한 공공 건물이 있었다. 이 건물은 파나테나이아 축제 때 아테나 여신을 기리는 행렬( πομπή|폼페grc )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폼페이온은 기둥으로 둘러싸인 넓은 안뜰과 연회실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아테네의 귀족들은 축제 기간 동안 제물로 바쳐진 고기를 이곳에서 나누어 먹었다. 고대 문헌에 따르면, 축제를 위해 헤카톰베(소 100마리를 제물로 바치는 의식)가 거행되었고 시민들은 케라메이코스(아마도 디필론 문 안뜰)에서 그 고기를 받았다고 한다. 실제로 발굴 과정에서 성벽 앞쪽에서 다량의 소뼈가 발견되기도 했다.[1][7]

폼페이온과 성스러운 문 근처의 많은 건물들은 기원전 86년 로마의 독재관 술라가 이끄는 군대에 의한 아테네 약탈(제1차 미트리다테스 전쟁) 과정에서 파괴되었다. 플루타르코스는 이 사건을 끔찍한 참사로 기록했다. 서기 2세기경 폼페이온 자리에는 창고 건물이 들어섰지만, 이마저도 서기 267년 헤룰리족의 침입으로 파괴되었다. 이후 폐허는 서기 500년경까지 도자기 공방으로 사용되다가, 그 후 옛 성벽을 넘어 확장된 두 줄의 평행한 콜로네이드와 동쪽에 세 개의 입구를 가진 새로운 축제 문이 건설되었다. 그러나 이 구조물들도 6세기 말 아바르족과 슬라브족의 침략으로 파괴되었고, 케라메이코스는 점차 잊혀 갔다. 1863년 4월, 한 그리스 노동자가 우연히 석비를 발굴하면서 비로소 다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1][7]

2. 3. 헬레니즘 및 로마 시대

기원전 4세기 말까지 성스러운 길과 여기서 갈라져 나온 '무덤의 거리' 주변에는 부유한 아테네 가문들이 세운 인상적인 무덤 기념물들이 계속 들어섰다. 그러나 이러한 호화로운 묘지 건설은 기원전 317년 법령으로 금지되었고, 이후에는 작은 기둥이나 글씨가 새겨진 사각형 대리석 블록만이 무덤 표지로 허용되었다. 로마 제국이 아테네를 점령한 후에는 기념물 건설이 다시 활발해졌지만, 오늘날 남아있는 것은 거의 없다.[1][7]

고대 그리스 시대에는 디필론 문과 성스러운 문 사이, 도시 성벽 안쪽에 폼페이온(Pompeion)이라는 중요한 공공 건물이 있었다. 이 건물은 파나테나이아 축제 때 아테나 여신을 기리는 행렬(πομπή|폼페grc)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폼페이온은 기둥으로 둘러싸인 넓은 안뜰과 연회실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아테네 귀족들은 축제 때 제물로 바친 고기를 이곳에서 먹었다. 고대 문헌에 따르면, 축제를 위해 헤카톰베(소 100마리를 바치는 제사)가 거행되었고, 시민들은 케라메이코스, 아마도 디필론 문 안뜰에서 그 고기를 받았다고 한다. 실제로 발굴 과정에서 도시 성벽 앞쪽에서 많은 양의 소뼈가 발견되기도 했다.[1][7]

기원전 86년, 로마의 장군 술라가 이끄는 군대가 아테네를 침략하여 약탈했을 때, 폼페이온과 성스러운 문 근처의 많은 건물이 파괴되었다. 플루타르코스는 이 사건을 끔찍한 참사로 기록했다. 서기 2세기에는 폼페이온 자리에 창고가 세워졌으나, 이마저도 서기 267년 헤룰리 족의 침략으로 파괴되었다. 이후 폐허는 서기 500년경까지 도자기 공방으로 사용되다가, 그 자리에 옛 도시 성벽을 넘어 두 줄의 평행한 콜로네이드(열주랑)가 세워졌다. 동쪽에는 세 개의 입구가 있는 새로운 축제용 문도 건설되었다. 그러나 이 건축물들도 6세기 말 아바르족과 슬라브족의 침략으로 파괴되었고, 케라메이코스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졌다. 1863년 4월, 한 그리스 노동자가 우연히 비석을 발굴하면서 비로소 다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1][7]

3. 고고학

케라메이코스 지역에 대한 고고학적 발굴은 1870년 그리스 고고학 협회의 주도로 시작되었으며, 1913년부터는 아테네 독일 고고학 연구소가 발굴을 이어오고 있다.[1] 이 발굴을 통해 고대 아테네의 중요한 유적들이 세상에 드러났다.

주요 발견으로는 아테네 지하철 공사 중 발견된 기원전 4세기~기원전 5세기의 무덤 약 1,000기와 아테네 역병 희생자들의 집단 매장지가 있다.[3] 이 역병 매장지는 투키디데스가 기록한 펠로폰네소스 전쟁 당시 아테네의 비극적인 상황을 보여주는 중요한 고고학적 증거로 평가받는다. 또한, 디필론 거장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높이 2.1m의 쿠로스 상[2]과 같은 뛰어난 예술품도 출토되었다.

발굴된 유물들은 인근의 케라메이코스 고고학 박물관에 소장 및 전시되어 있으며, 이곳은 그리스에서 가장 광범위한 매장 관련 유물을 보유한 곳 중 하나이다. 박물관과 유적지를 통해 방문객들은 고대 아테네의 장례 문화와 역사를 생생하게 접할 수 있다.

상당 부분의 유적은 여전히 현대 아테네의 도시 아래에 묻혀 있으며, 향후 발굴 조사를 통해 더 많은 고대사의 비밀이 밝혀질 것으로 기대된다.[7]

3. 1. 발굴 역사

케라메이코스에서의 고고학적 발굴은 1870년 그리스 고고학 협회의 후원으로 시작되었으며, 1913년부터 현재까지는 아테네 독일 고고학 연구소가 발굴을 주도하고 있다.[1]

케라메이코스 고고학 박물관 1호실의 신성한 문 쿠로스(중앙)


최근 아테네 독일 고고학 연구소는 울프-디트리히 니마이어(Wolf-Dietrich Niemeier) 교수의 지휘 아래 케라메이코스에서 높이 2.1m의 쿠로스 상을 발굴했다. 이 쿠로스는 디필론 거장이라고 불리는 익명의 조각가가 만든 것으로 추정되며, 현재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보관되어 있는 쿠로스의 쌍둥이 형제로 여겨진다.[2]

아테네 지하철 노선 확장 공사 중 케라메이코스 지하철역 부지에서는 기원전 4~5세기에 조성된 약 1,000기의 무덤과 역병 희생자 집단 매장지(plague pit) 1곳이 발견되었다. 이 유적은 1992년 그리스 고고학자 에피 바자토포울루-발라바니(Efi Baziotopoulou-Valavani)에 의해 발굴되었다.[3] 역병 매장지는 묘지 북서쪽 구석에 위치하며, 길이는 6.5m, 깊이는 1.6m이다. 내부에서는 성인 남녀와 어린이 8명을 포함한 총 89구의 유해가 발견되었다. 많은 학자들은 이들이 기원전 430년에서 428년 사이에 아테네를 휩쓸고 기원전 427년에서 426년에 재발했던 아테네 역병의 희생자들이라고 추정한다.[3]

데메트리아와 팜필레의 장례식 나이코스.


무덤에서 함께 발견된 도자기 양식을 분석한 결과, 매장 시기는 기원전 430년에서 426년 사이로 추정된다. 이는 역병 유행 시기와 일치한다. 또한 매장 방식의 혼란스러운 특징은 역사가 투키디데스펠로폰네소스 전쟁 당시 아테네 역병 상황을 묘사하며 기록한 혼란상과 부합한다. 투키디데스는 기원전 430년 포위 공격 중이던 아테네에서 역병(아마도 장티푸스로 추정)이 유행하여 공황 상태에 빠졌으며, 2년간 지속된 유행으로 인구의 3분의 1이 사망했다고 기록했다. 그는 당시 시신들이 신전이나 거리에 방치되다가 나중에 한꺼번에 매장되었다고 묘사했다. 이러한 정황으로 보아, 이 집단 매장지는 제대로 된 장례를 치를 여유가 없었던 희생자들을 위해 국가 차원에서 마련한 무덤일 가능성이 제기된다.[3]

매장 구덩이 내부는 5개의 층으로 나뉘어 있으며, 아래층으로 갈수록 시신을 비교적 정성스럽게 안치한 흔적이 보이지만 위층으로 올라갈수록 무질서하게 던져진 양상을 보인다. 시신 사이의 흙은 아래층에서만 발견되었고, 부장품 대부분도 아래층에 집중되어 있었다. 부장품으로는 코에스(choes), 펠리케(pelike), 레키토스(lekythos) 등 약 30점의 작은 꽃병들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매장된 시신의 수에 비해 매우 적은 양이다. 발굴자인 바자토포울루는 상층부가 후대에 유실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하며, 이 경우 실제 매장된 인원은 약 150명에 달했을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3]

흥미로운 점은 최상층에서 발견된 8명의 어린이 유해이다. 다른 유해들과 달리 이 어린이들은 비교적 주의 깊게 안치되었고, 큰 도자기 조각으로 덮여 있었다. 이는 아이들에게 "특별한 보살핌"이 있었음을 시사한다.[3] 이 어린이 중 한 명의 얼굴은 마놀리스 파파그리고라키스(Manolis Papagrigorakis) 교수에 의해 복원되었으며, 현재 미르티스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4]

매장지에서 수습된 골격 유해는 그리스 치과 교정학 교수인 마놀리스 파파그리고라키스에게 전달되어 분석되었다. 그는 유해에서 채취한 치수 조직 DNA 분석을 통해 3구의 유해에서 장티푸스의 원인균인 ''살모넬라 엔테리카'' 혈청형 타이피(Salmonella enterica|살모넬라 엔테리카la serovar Typhi)를 검출했다. 이 발견은 오랫동안 논란이 되어 온 아테네 역병의 원인이 장티푸스일 가능성을 강력하게 시사하는 증거로 받아들여지고 있다.[5][6] 이는 아테네 역병과 관련하여 유전자 분석이 이루어진 유일한 사례이다.

현재까지 발굴된 지역 외에도 넓은 범위의 유적이 현대 아테네의 도시 구조물 아래에 묻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지역에 대한 발굴 조사는 필요한 자금이 확보될 때까지 보류된 상태이다.[7]

3. 2. 주요 발견

케라메이코스에서의 고고학적 발굴은 1870년 그리스 고고학 협회의 후원으로 시작되었으며, 1913년부터 현재까지 아테네 독일 고고학 연구소가 주도하여 진행하고 있다.

아테네 지하철 확장 공사 중 케라메이코스 지하철역 부근에서 기원전 4세기에서 기원전 5세기에 조성된 약 1,000기의 무덤과 역병 희생자들을 집단 매장한 구덩이(plague pit)가 발견되었다. 그리스 고고학자 에피 바자토포울루-발라바니(Efi Baziotopoulou-Valavani)는 1992년부터 이 유적을 발굴했다. 역병 매장지는 묘지 북서쪽 모퉁이에 위치하며, 길이는 6.5m, 깊이는 1.6m 규모로, 총 89구의 유해(성인 남녀와 어린이 8명)가 안치되어 있었다. 출토된 도자기 양식을 통해 매장 시기는 기원전 430년에서 426년 사이로 추정된다. 많은 학자들은 이들이 기원전 430년에서 428년 사이에 아테네를 휩쓸고 기원전 427년에서 426년에 재발했던 아테네 역병의 희생자들이라고 본다. 투키디데스가 기록한 당시 아테네의 혼란스러운 상황은 구덩이 내부의 무질서한 매장 상태와 일치하며, 제대로 된 장례를 치르기 어려웠던 희생자들을 위한 국가적 집단 매장이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매장 구덩이 내부는 5개의 층으로 나뉘며, 아래층으로 갈수록 비교적 정돈된 모습을 보이지만 위층으로 올라갈수록 급하게 매장한 흔적이 뚜렷하다. 시신들은 구덩이의 형태에 맞춰 무질서하게 던져진 상태였으며, 시신 사이의 흙은 아래층에서만 발견되었다. 부장품으로는 약 30점의 작은 꽃병(코에스, 펠리케, 레키토스 등)이 대부분 아래층에서 발견되었는데, 매장된 시신의 수에 비해 그 수가 매우 적다. 발굴자는 상부층이 유실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하며, 이 경우 실제 매장된 인원은 약 150명에 달했을 수 있다고 추정한다. 반면, 가장 위층에서 발견된 8명의 어린이 유해는 무질서하게 매장된 다른 시신들과 달리 비교적 정성스럽게 안치되고 큰 도자기 조각으로 덮여 있어 특별한 대우를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 어린이 중 한 명의 얼굴은 마놀리스 파파그리고라키스(Manolis Papagrigorakis) 교수에 의해 복원되어 현재 미르티스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구덩이에서 수습된 골격 유해를 그리스 치과 교정학 교수인 마놀리스 파파그리고라키스가 분석한 결과, 3구의 유해 치수에서 장티푸스의 원인균인 ''살모넬라 엔테리카'' 혈청형 타이피(Salmonella enterica|살모넬라 엔테리카la serovar Typhi)가 검출되었다. 이 DNA 증거는 오랫동안 논란이 되어 온 아테네 역병의 원인이 장티푸스일 가능성을 강력하게 시사한다. 이는 아테네 역병과 관련하여 유전자 분석이 이루어진 유일한 사례이다.

최근 케라메이코스에서는 아테네 독일 고고학 연구소(울프-디트리히 니마이어 교수 지휘)가 높이 2.1m의 쿠로스 상을 발굴했다. 이 쿠로스는 디필론 거장이라 불리는 익명의 조각가가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며, 현재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소장된 쿠로스와 쌍둥이 작품으로 여겨진다.

이미 발굴된 구역 외에도 현대 아테네 시가지 아래에는 아직 탐사되지 않은 넓은 지역이 남아 있으며, 향후 자금이 확보되는 대로 발굴이 진행될 예정이다.

3. 3. 케라메이코스 고고학 박물관

케라메이코스 고고학 박물관의 회랑


박물관은 에르무 거리 마지막 블록과 페이라이오스 거리 교차로 근처 입구를 통해 들어갈 수 있다. 케라메이코스 고고학 박물관은 작은 신고전주의 양식 건물로, 그리스에서 가장 광범위한 매장 관련 유물을 소장하고 있다. 주요 소장품으로는 대규모 대리석 조각상, 장례용 항아리, 스텔라, 보석, 장난감 등이 있다. 원래의 묘비 조각상은 박물관 내부에 보존되어 있으며, 유적지 현장에는 석고 복제품이 ''제자리''에 놓여 있다.

박물관은 내부 안뜰과 외부 안뜰로 구성되며, 안뜰에는 비교적 큰 조각상들이 전시되어 있다. 박물관 관람 후에는 인근의 외부 케라메이코스 유적지를 둘러볼 수 있다. 이곳에는 데모시온 세마(고대 아테네 국립묘지), 에리다노스강 강둑, 폼페이온과 디필론 문 유적이 남아 있으며, 엘레우시스로 향하던 성스러운 길과 아크로폴리스로 이어지던 파나테나이아 길의 일부를 직접 걸어볼 수 있다. 이 유적지 대부분은 현재 지면보다 약 7m에서 10m 가량 낮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데, 이는 과거 에리다노스강의 범람으로 인해 오랜 세월 동안 토사가 쌓였기 때문이다.

4. 현대

(내용 없음)

4. 1. 케라메이코스 지하철역

케라메이코스는 아테네 지하철 3호선에 속하는 지하철역의 이름이기도 하다. 2007년 봄 기준으로 운영 중이며, 가지의 테크노폴리스와 인접해 있다.

아테네 지하철의 케라메이코스역 건설 당시 중요한 고고학적 발견이 이루어졌다. 공사 과정에서 기원전 4세기부터 기원전 5세기 사이에 만들어진 무덤 약 1,000기와 전염병으로 사망한 사람들을 집단으로 매장한 구덩이(plague pit)가 발견되었다.

이 집단 매장 구덩이는 펠로폰네소스 전쟁 중이던 기원전 430년, 포위된 아테네에서 발생했던 대규모 전염병과 관련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 투키디데스는 당시 아테네를 덮친 전염병(아마도 장티푸스로 추정)에 대해 기록했다. 이 전염병은 2년간 지속되었으며, 아테네 전체 인구의 약 3분의 1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정된다. 투키디데스는 당시 공황 상태에 빠진 도시에서 시신들이 신전이나 거리에 버려졌다가 나중에 한꺼번에 매장되었다고 기록했다. 이 전염병은 기원전 427년 겨울에도 다시 유행했다. 발굴에 참여한 그리스 고고학자 Efi Baziotopoulou-Valavani는 발견된 집단 매장 구덩이가 기원전 430년에서 426년 사이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밝혔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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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웹사이트 ekathimerini.com {{!}} Masterpiece revealed http://www.ekathimer[...] 2022-05-14
[3] 웹사이트 Marble statue of a kouros (youth) | Greek, Attic | Archaic https://www.metmuseu[...] 2024-12-14
[4] 서적 Excavating classical culture : recent archaeological discoveries in Greece http://worldcat.org/[...] Archaeopress 2002
[5] 학술지 Q&A: Facing the past: Manolis Papagrigorakis 2011-03
[6] 학술지 DNA examination of ancient dental pulp incriminates typhoid fever as a probable cause of the Plague of Athens https://www.ijidonli[...] 2006-05-01
[7] 서적 Athens, Attica and the Megarid: An Archaeological Guide
[8] 웹사이트 Masterpiece revealed http://www.ekathimer[...]
[9] 웹사이트 A kouros, still beautiful, even after 2,500 years underground http://www.ekathim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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