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타임라인 바로가기

페리클레스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타임라인 바로가기

1. 개요

페리클레스는 기원전 495년경 아테네에서 태어난 정치가로, 아테네의 황금기를 이끈 인물이다. 그는 아테네의 민주주의를 발전시키고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아테네를 이끌었으나, 역병으로 사망했다. 페리클레스는 뛰어난 웅변술과 정치적 리더십을 발휘했으며, 그의 시대에 아테네는 문화와 예술의 번영을 누렸다. 그의 유산은 아크로폴리스와 같은 건축물, 그리고 민주주의와 자유에 대한 이상으로 남아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기원전 429년 사망 - 진 조공
    기원전 443년부터 429년까지 진나라를 통치한 진 조공은 혼란스러운 시기에 혜성 관측, 남정 반란, 기상 이변, 의거의 침입 등 여러 사건을 겪었으며, 아들이 없어 동생인 진 회공이 뒤를 이었다.
  • 알크마이온 가 - 알키비아데스
    알키비아데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활약한 고대 아테네의 정치가이자 장군으로, 뛰어난 능력과 파란만장한 생애로 인해 논쟁적인 인물로 평가받는다.
  • 알크마이온 가 - 클레이스테네스
    클레이스테네스는 기원전 6세기 아테네의 정치가로, 참주를 몰아내고 민주정 개혁을 주도하여 부족 체제를 개편하고 다양한 제도를 도입했으며 페르시아와 관계를 맺었다.
페리클레스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코린트식 헬멧을 쓴 페리클레스의 흉상. "크산티포스의 아들 페리클레스, 아테네인"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기원전 430년경 그리스 원본을 로마에서 복제한 대리석상, 바티칸 미술관, 피오-클레멘티노 미술관 소장.
기본 정보
이름페리클레스
그리스어Περικλῆς
로마자 표기Periklēs
출생기원전 495년경
출생지아테네, 그리스
사망기원전 429년 (약 65~66세)
사망지아테네, 그리스
군사 정보
소속아테네
계급스트라테고스
참전 전투펠로폰네소스 전쟁
시키온 및 아카르나니아 전투
제2차 신성 전쟁
사모스 전쟁
가족 관계
배우자아스파시아
자녀파랄로스와 크산티포스
소 페리클레스
친척크산티포스 (아버지)
아가리스트 (어머니)

2. 성장

페리클레스는 기원전 495년경 아테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기원전 479년 미칼레 해전의 지휘관 크산팁포스였고, 어머니는 알크마이오니다이 가문 출신으로 클레이스테네스의 조카였다.

페리클레스는 철학자 아낙사고라스와 절친했으며, 그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특히 어려울 때일수록 감정의 평정을 찾고 신적인 현상을 회의적으로 보라는 아낙사고라스의 가르침은 페리클레스의 사유 방식과 수사학에 큰 영향을 주었다.[202] 그의 침착성과 절제력 역시 아낙사고라스의 영향으로 여겨진다.[211]

2. 1. 가문 및 출생

페리클레스는 기원전 495년경 아테네 북쪽 콜라르고스 데모스에서 태어났다.[200] 그의 아버지 크산팁포스는 정치가로, 기원전 485~484년에 도편 추방되었다가[6] 5년 후 뮈칼레 전투에서 아테나이 군대를 이끌고 승리했다. 페리클레스의 어머니 아가리스테는 알크마이오니다이 가문 출신의 유력 귀족으로, 그녀의 인맥은 크산팁포스가 정계에 진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아가리스테는 시키온참주 클레이스테네스의 증손녀이자 아테나이의 개혁가 클레이스테네스의 조카딸이었다.[201][202]

헤로도토스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아가리스테는 페리클레스를 출산하기 전날 밤 사자를 낳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203][204] 이 꿈은 위대함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페리클레스의 큰 머리를 암시하는 것일 수도 있으며, 이는 희극 배우들의 단골 소재였다.[204][205] 플루타르코스는 페리클레스가 큰 머리 때문에 항상 투구를 쓴 모습으로 묘사되었다고 하지만, 투구는 스트라테고스(장군) 직책의 상징이었다.[206]

페리클레스는 아티카의 아카만티스(그리스어: Ἀκαμαντὶς φυλή) 부족 출신으로, 어릴 때 조용하고 내성적인 성격이었다. 그는 사람들 앞에 나서기보다 공부에 전념했다.[207]

귀족 가문 출신에 집안도 부유했던 페리클레스는 공부에 전념할 수 있었다. 그는 당대 최고의 선생들에게 음악을 배웠으며(다몬 또는 퓌토클레이데스가 그의 스승이었을 것이다),[208][209] 철학을 중시한 최초의 정치가로 여겨진다.[207] 그는 철학자 프로타고라스, 엘레아의 제논, 아낙사고라스와 교류했으며, 특히 아낙사고라스는 페리클레스의 절친한 친구이자 그에게 큰 영향을 준 인물이었다.[208][210]

2. 2. 교육 및 초기 활동

페리클레스는 기원전 495년경 아테네 바로 북쪽의 콜라르고스 데모스에서 태어났다.[200] 그의 아버지는 정치가 크산팁포스로, 기원전 479년 미칼레 해전에서 그리스군을 지휘했다.[6] 어머니 아가리스테는 알크마이오니다이 가문 출신으로, 그녀의 가문은 페리클레스의 정치 경력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아가리스테는 시키온의 참주 클레이스테네스의 증손녀이자 아테네 개혁가 클레이스테네스의 조카딸이었다.[201][202]

헤로도토스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아가리스테는 페리클레스를 출산하기 전날 밤에 사자를 낳는 태몽을 꾸었다고 한다.[203][204] 이 꿈은 위대함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페리클레스의 유난히 큰 머리를 암시하는 것으로도 해석되며, 이는 당시 희극 배우들의 단골 소재였다.[204][205] 플루타르코스는 페리클레스가 이 때문에 항상 투구를 쓰고 다녔다고 주장하지만, 사실 투구는 스트라테고스(장군) 직책의 상징이었다.[206]

페리클레스는 아카만티스 부족(Ἀκαμαντὶς φυλὴ)에 속했다. 그는 어릴 때 조용하고 내성적인 성격으로, 대중 앞에 나서기보다는 공부에 전념했다.[207]

페리클레스는 가문의 귀족적 배경과 부 덕분에 교육에 전념할 수 있었다. 그는 당대 최고의 선생들에게 음악을 배웠으며(다몬 또는 퓌토클레이데스가 그의 교사였을 것이다.),[208][209] 철학을 중시한 최초의 정치가로 여겨진다.[207] 그는 프로타고라스, 엘레아의 제논, 아낙사고라스 등 당대 최고의 철학자들과 교류했다. 특히 아낙사고라스는 페리클레스의 절친한 친구이자 스승으로, 그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208][210] 페리클레스의 사유 방식과 수사학적 능력, 침착함과 자제력은 아낙사고라스의 영향으로 여겨진다.[202][211]

3. 기원전 431년까지 정치 경력

기원전 472년 디오니소스 축제에서 아이스퀼로스의 《페르시아인들》 상연을 후원하며 정계에 입문한 페리클레스는, 기원전 463년 마케도니아 왕국에서 아테나이의 이익을 소홀히 했다는 혐의로 귀족파 키몬을 기소했다.[219] 비록 키몬은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이 사건은 페리클레스의 주요 정적이 취약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220]

도편추방에 사용된 도자기 파편. 페리클레스, 키몬, 아리스티데스의 이름이 보인다.


기원전 461년경, 페리클레스는 도편 추방으로 키몬을 제거하고,[224] 빈민층을 위한 여러 정책을 추진했다. 빈민층의 극장 공연 무료 관람,[217] 집정관 선출 재산 기준 완화, 아테나이 최고 법정 배심원 수당 지급[225], 기원전 451년에는 양친 모두 아테나이 출신인 사람에게만 시민권을 제한하는 법안[226] 등이 대표적이다. 콘스탄티노스 파파리요풀로스는 이러한 조치들이 하층 계급의 정치 참여를 보장하여 민주 제도를 확대하고 안정시키는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227][228]

기원전 444년, 보수파 지도자 투키디데스는 페리클레스의 낭비를 비난했으나, 페리클레스는 자신의 재산으로 건설 비용을 상환하겠다고 제안하며 투키디데스를 제압했다.[59] 기원전 442년, 아테네 시민들은 투키디데스를 10년 동안 도편 추방제로 추방했고, 페리클레스는 다시 한번 아테네 정치 무대에서 독보적인 지배자가 되었다.[59]

기원전 461년경, 에피알테스는 귀족 정치 기관인 아레이오스 파고스의 권한을 대폭 축소하는 법안을 제안했고, 민회는 이를 통과시켰다.[217] 이로써 아레이오스 파고스는 사법 처리만 담당하게 되었고,[222] "급진적 민주정"이 시작되었다.[221]

제1차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페리클레스는 시키온과 아카르나니아를 공격했으나,[234] 코린토스 만의 오이니아데아 점령에는 실패했다.[235] 기원전 451년, 망명에서 돌아온 키몬은 페리클레스의 제안으로 스파르타와 5년 휴전 협정을 맺었다.[236]

기원전 449년 페리클레스는 페르시아가 파괴한 신전 재건 회의를 제안했지만, 스파르타의 반대로 실패했다.[242] 제2차 신성 전쟁에서 페리클레스는 델포이로 아테나이 군대를 이끌어 포키스신탁 주권을 회복했고,[244] 기원전 447년에는 갈리폴리반도에 아테나이 식민지를 건설했다.[202][245]

기원전 447년 테바이 과두 지배자들의 음모와 코로네이아 전투 패배로 페리클레스는 보이오티아를 잃었다.[207] 기원전 446년 에우보이아메가라 반란, 스파르타 군대의 아티케 침입 위기에서 페리클레스는 뇌물과 협상으로 스파르타 군대를 돌려보냈다.[247]

사모스 전쟁에서 기원전 440년 사모스는 미레토스와 프리에네 지배권을 놓고 전쟁을 벌였다. 페리클레스는 사모스 원정대를 파견, 해전에서 승리하고 섬에 아테네 행정부를 수립했다.[70]

페리클레스는 델로스 동맹 금고를 프로퓔라이아, 파르테논 신전 등 건설 계획에 사용했다.[257] 페르시아 전쟁 승리 후, 델로스 동맹 자금을 아테네에서 관리하며 공공 공사에 유용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직전, 페리클레스, 페이디아스, 아스파시아는 정치 공세와 법정 다툼에 휘말렸다. 페이디아스는 황금 횡령 혐의 등으로,[265] 아스파시아는 아테네 여성 타락 혐의로 고발당했다.[266][267]

3. 1. 정계 입문

기원전 472년 봄, 행정관이었던 페리클레스는 디오니소스 축제의 레이토우르기아(λειτουργία)[212]로써 아이스퀼로스의 《페르시아인들》을 상연하여 자신이 당시 아테나이의 부자임을 과시하였다.[213] 사이먼 혼블로워(Simon Hornblower)는 페리클레스가 살라미스 해전에서 테미스토클레스가 거둔 유명한 승리를 묘사하는 이 희곡을 선택한 까닭에 대해 키몬의 정파가 정적인 테미스토클레스를 도편 추방한 직후 집권하게 되자 젊은 정치가인 페리클레스가 테미스토클레스를 옹호하려고 했던 것이라고 분석하였다.[214]

플루타르코스는 페리클레스가 40년 동안 아테나이의 일인자였다고 기록하였다.[215] 이것이 사실이라면, 페리클레스는 기원전 460년대 초에 최고 지위를 얻었을 것이다. 집권하는 동안 페리클레스는 자신의 사생활을 보호하고자 하였으며, 자신이 동료 시민들의 모범으로 보이려고 하였다. 가령 그는 검소하게 처신하고자 종종 연회를 삼가하였다.[216][217]

기원전 463년 페리클레스는 귀족파[218]의 영수인 키몬을 기소하는데 앞장서 마케도니아에서 아테나이의 중요한 이익을 소홀히 하였다고 고발하였다.[219] 키몬은 면소되었으나, 이 대결로 페리클레스의 주요 정적이 취약하다는 사실이 드러났다.[220]

기원전 462년, 페리클레스는 귀족파인 키몬이 출정으로 부재한 틈을 타 민주파의 에피알테스와 함께 아레오파고스 회의의 실권을 빼앗고, 모든 아테네 시민의 정치 참여를 촉진했다. 이듬해 키몬이 도편 추방으로 정식으로 국외 추방되자, 이후 아테네의 최고 권력자의 지위를 독점했다.

기원전 461년 에피알테스의 암살은 페리클레스가 권력을 공고히 하는 길을 열었다. 키몬의 추방 이후 반대 세력이 없어진 민주당의 확고부동한 지도자는 아테네의 확고부동한 통치자가 되었다. 그는 기원전 429년 사망할 때까지 권력을 유지했다.

3. 2. 키몬과의 대립 및 도편 추방

기원전 461년경, 민중파는 아테나이 귀족들이 통제하는 강력한 정치 기관이었던 아레이오스 파고스를 겨냥했다.[221] 민중파 지도자이자 페리클레스의 조언자였던 에피알테스는 아레이오 파고스의 권한을 크게 약화시킬 것을 제안했고, 민회는 이를 채택하였다.[217][222] 이 개혁으로 "급진적 민주정"의 새 시대가 열렸다.[221]

민중파가 아테나이 정계에서 우세해지자, 페리클레스는 대중의 지지를 얻기 위해 대중영합적인 정책을 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페리클레스의 주요 정적인 키몬이 부유하고 관대하여 대중의 신망을 얻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219] 그러나 역사가 로렌 J. 새먼스 2세는 페리클레스가 스스로 그런 선택을 했다고 주장한다.[223]

기원전 461년, 페리클레스는 도편 추방을 이용하여 키몬을 제거하였다.[224] 스파르타에서 농노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키몬은 스파르타를 지원하려 했고, 이는 아테나이를 배신한 것으로 여겨졌다.[222] 키몬이 추방되자, 페리클레스는 대중영합적인 사회 정책을 계속 추진했다.[217] 빈민들이 극장 공연을 무료로 관람하게 하고, 집정관직 선출을 위한 재산 기준을 낮추었으며, 최고 법정 배심원에게 수당을 지급하였다.[225] 기원전 451년에는 부모 양쪽 모두 아테나이 출신인 사람에게만 시민권을 제한하는 법안을 제안하였다.[226]

콘스탄티노스 파파리요풀로스는 페리클레스가 하층 계급의 정치 참여를 보장하는 법들을 입법하여 민주 제도를 확대하고 안정시켰다고 평가했다.[227][228] 새먼스에 따르면, 페리클레스는 평민들을 아테나이의 힘의 원천이자 군사적 패권의 중요한 요소로 여겼다.[229] 삼단노선의 노잡이 대부분은 하층 계급에서 충원되었다.[230]

그러나 키몬은 민주정이 더 발전할 여지가 없다고 생각했다. 파파리요풀로스는 페리클레스 사후 아테나이가 정치적 혼란과 침체기에 빠졌다는 점에서 키몬이 옳았다고 본다.[227] 반면, 도널드 케이건은 페리클레스의 민주정 정책이 튼튼한 정치의 주춧돌이 되었다고 주장한다.[232] 기원전 451년에 추방되었다 돌아온 키몬은 새로운 민주정을 받아들였다.[233]

기원전 461년 에피알테스의 암살은 페리클레스가 권력을 공고히 하는 길을 열었다. 키몬의 추방 이후 반대 세력이 없어진 민주당의 확고부동한 지도자는 아테네의 확고부동한 통치자가 되었다. 그는 기원전 429년 사망할 때까지 권력을 유지했다.

기원전 444년, 보수파와 민주파는 격렬한 투쟁을 벌였다. 보수파의 투키디데스는 페리클레스를 낭비벽이 심하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페리클레스는 논란이 되는 지출을 자신의 재산으로 상환하겠다고 제안하며 투키디데스를 압도했다.[59] 기원전 442년, 아테네 시민들은 투키디데스를 10년 동안 추방하는 도편 추방제 투표를 했고, 페리클레스는 다시 한번 아테네 정치 무대에서 독보적인 지배자가 되었다.[59]

3. 3. 민주정 개혁

기원전 461년경, 민중파는 귀족들의 정치 기관인 아레이오스 파고스의 권한을 축소하려 했다.[221] 민중파 지도자이자 페리클레스의 조언자였던 에피알테스는 아레이오스 파고스의 권한을 대폭 줄이는 법안을 제안했고, 민회는 이를 통과시켰다.[217] 이로써 아테나이의 모든 정치적 의사결정은 민회에서 이루어지게 되었고, 아레이오스 파고스는 사법 처리만 담당하게 되었다.[222] 이 개혁은 "급진적 민주정"의 시작을 알렸다.[221]

페리클레스는 대중의 지지를 얻기 위해 대중영합적인 정책을 펼쳤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페리클레스의 정적 키몬이 재산을 나눠주며 대중의 신망을 얻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지만,[219] 역사가 로렌 J. 새먼스 2세는 페리클레스가 스스로 그런 선택을 했다고 반박한다.[223] 기원전 461년, 페리클레스는 도편 추방으로 키몬을 제거했다.[224] 키몬은 스파르타를 지원하려 했고, 이는 민중파에게 아테나이를 배신한 것으로 여겨졌다.[222]

키몬이 추방된 후, 페리클레스는 빈민층을 위한 정책을 계속 추진했다. 그는 빈민들이 무료로 극장 공연을 관람하게 하고,[217] 집정관 선출 재산 기준을 낮추고, 아테나이 최고 법정 배심원에게 수당을 지급했다.[225] 기원전 451년에는 부모 모두 아테나이 출신인 사람에게만 시민권을 제한하는 법안을 제안했다.[226]

몇몇 비판자들은 페리클레스의 정책이 아테네 민주주의를 퇴보시켰다고 평가했지만, 역사가 콘스탄티노스 파파리요풀로스는 페리클레스가 민주 제도를 확대하고 안정시켰다고 주장했다.[227] 페리클레스는 하층 계급의 정치 참여를 보장하는 법을 만들었다.[228] 새먼스는 페리클레스가 평민들을 아테나이의 힘의 원천이자 군사적 패권의 중요한 요소로 여겼다고 주장한다.[229] 삼단노선 노잡이 대부분은 하층 계급 출신이었다.[230]

키몬은 민주정이 더 발전할 여지가 없다고 생각했지만,[227] 도널드 케이건은 페리클레스의 민주정이 튼튼한 정치 기반이 되었다고 평가한다.[232] 기원전 451년에 추방되었다 돌아온 키몬도 새로운 민주정을 받아들였다.[233]

3. 3. 1. 제1차 펠로폰네소스 전쟁

페리클레스는 제1차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처음으로 군사 활동을 시작했다. 이 전쟁은 아테나가 메가라아르고스와 동맹을 맺자 스파르타가 반발하여 일어난 전쟁이다. 기원전 454년, 페리클레스는 시키온과 아카르나니아를 공격했다.[234] 코린토스 만의 오이니아데아를 점령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아테나이로 돌아왔다.[235]

기원전 451년, 망명에서 돌아온 키몬은 페리클레스의 제안으로 스파르타와 5년 동안 휴전 협정을 맺었다. 이는 페리클레스의 전략 변화를 보여주는 사건으로 해석되기도 한다.[236] 그러나 앤서니 J. 포들레키는 페리클레스의 입장 변화는 고대 저자들의 왜곡된 주장이라고 반박한다.[237] 플루타르코스는 키몬과 페리클레스가 권력을 분점하여, 페리클레스는 내정을, 키몬은 해외 원정을 맡기로 했다고 기록했다.[238]

기원전 450년 중반, 아테나인들은 이집트에서 일어난 페르시아 반란을 돕다가 실패하여 큰 피해를 입었다.[239] 기원전 451~450년, 아테나이는 퀴프로스에 군대를 파병했고, 키몬은 살라미스 해전에서 승리했지만 기원전 449년에 병사했다. 페리클레스는 이집트와 퀴프로스 두 곳에 원정대를 보냈다고 한다.[240]

칼리아스 화의는 그리스와 페르시아의 적대 관계를 종식시켰다고 알려져 있지만, 이 조약의 실제 체결 여부와 상세 내용은 논쟁거리이다.[241]

기원전 449년 봄, 페리클레스는 페르시아가 파괴한 신전 재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회의를 제안했지만, 스파르타의 반대로 실패했다.[242]

제2차 신성 전쟁 중에 페리클레스는 델포이로 아테나이 군대를 이끌어 포키스에 대한 신탁 주권을 회복했다.[244] 기원전 447년에는 갈리폴리반도에서 오랑캐를 몰아내고 아테나이 식민지를 건설했다.[202][245]

그러나 아테나이는 동맹국들의 반란에 직면했다. 기원전 447년 테바이의 과두 지배자들이 음모를 꾸몄고, 코로네이아 전투 이후 페리클레스는 보이오티아를 잃어야 했다.[207] 포키스와 로크리스도 과두 지배자들에게 넘어갔다.[246] 기원전 446년에는 에우보이아메가라가 반란을 일으켰고, 스파르타 군대가 아티케를 침입했다. 페리클레스는 뇌물과 협상을 통해 위기를 해결하고 스파르타 군대를 돌려보냈다.[247] 페리클레스는 공금 회계 감사에서 10 탈란톤의 지출 내역이 불분명했지만, "중대한 목적"(뇌물)이 명백하여 승인받았다.[248]

스파르타의 위협이 사라진 후, 페리클레스는 에우보이아의 반란을 진압하고 칼키스 지주들에게 엄벌을 내렸다. 이스티아이아 주민들은 학살에 대한 보복으로 추방되었고, 아테나이 정착민 2,000명이 보내졌다.[248] 이 위기는 30년간의 평화(기원전 446년 겨울~ 445년)로 종결되었고, 아테나이는 그리스 본토에 대한 소유권 일부를 포기하고 스파르타와 상호 불가침에 합의했다.[246]

기원전 461년 에피알테스의 암살은 페리클레스가 권력을 공고히 하는 길을 열었다.[38][43] 키몬의 추방 이후 반대 세력이 없어진 민주당의 확고부동한 지도자는 아테네의 확고부동한 통치자가 되었다. 그는 기원전 429년 사망할 때까지 권력을 유지했다.

사미아 전쟁은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전의 주요 군사적 사건 중 하나였다. 투키디데스의 도편추방 이후, 페리클레스는 매년 장군직에 재선출되었는데, 이는 그가 공식적으로 역임한 유일한 직위였지만, 그의 영향력은 너무 커서 그를 사실상 국가의 통치자로 만들었다. 기원전 440년 사모스는 미레토스와 프리에네의 지배권을 놓고 전쟁을 벌였다. 전쟁에서 패배한 미레토스인들은 아테네로 와서 사미아인들에 대한 자신들의 입장을 호소했다.[69]

아테네인들이 양측에 전투를 중단하고 아테네에서 중재에 따르도록 명령했을 때, 사미아인들은 거부했다.[70] 이에 페리클레스는 사모스로 원정대를 파견하는 법령을 통과시켰다. 해전에서 페리클레스와 아테네군은 사모스 군대를 격파하고 섬에 아테네 행정부를 수립했다.[70] 사미아인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페리클레스는 8개월에 걸친 포위 공격 끝에 반란군을 항복하게 했다.[71] 페리클레스는 이후 비잔티움의 반란을 진압했고, 아테네로 돌아와 원정에서 사망한 병사들을 기리기 위해 장례 연설을 했다.[72]

기원전 438년에서 436년 사이에 페리클레스는 아테네의 함대를 폰토스 (지역)로 이끌었고, 이 지역의 그리스 도시들과 우호 관계를 맺었다.[73] 페리클레스는 또한 아테네의 요새화(기원전 440년경 "중간 성벽" 건설)와 클레루키 건설에도 집중했다.[74]

3. 3. 2. 보수파와의 경쟁

기원전 444년, 보수파와 민주정파는 극심한 권력 투쟁을 벌였다. 보수파의 새로운 지도자인 야심가 투퀴디데스(이름이 같은 역사가 투퀴디데스와 다른 인물이다)는 페리클레스가 추진하던 건설 계획에 돈을 쓰는 데 비판하며 그의 낭비를 고발하였다. 처음에 투퀴디데스는 지지를 얻고자 민회를 선동하려 하였으나, 민주정파의 영수인 페리클레스가 일어나 보수파를 제압하였다. 페리클레스는 결연히 답하기를, 자신의 재산으로 모든 건설 비용을 상환하겠노라고 제안하였으며 그 조건으로 자신의 이름으로 봉헌 비문을 세울 것이라고 말하였다.[249] 그의 태도는 박수와 함께 환영받았으며, 투퀴디데스는 예상치 못한 패배를 당하였다. 기원전 442년, 아테나이의 인민들은 투퀴디데스를 10년간 도편 추방하고, 페리클레스는 다시 아테나이 정계의 1인자가 되었다.[249]

크레실라스의 것을 모방한 페리클레스 흉상. 베를린의 알테스 박물관.


기원전 461년 에피알테스의 암살은 페리클레스가 권력을 공고히 하는 길을 열었다. 키몬의 추방 이후 반대 세력이 없어진 민주당의 확고부동한 지도자는 아테네의 확고부동한 통치자가 되었다. 그는 기원전 429년 사망할 때까지 권력을 유지했다.

3. 3. 3. 아테네의 동맹 지배

페리클레스는 아테네가 동맹국들을 안정적으로 지배하고 그리스에서 아테네의 주도권을 강화하고자 했다. 델로스 동맹이 점차 아테네 제국으로 변질되는 과정은 페리클레스 시대 이전부터 시작된 것으로 여겨지지만,[250] 페리클레스의 정책으로 인해 동맹 체제의 변질이 더욱 가속화되어 정점에 이르렀다.[251]

아테네가 이집트에서 패배하면서 에게해에 대한 아테네의 패권이 도전받고, 밀레토스나 에뤼트라이 같은 여러 도시들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델로스 동맹이 아테네 제국으로 변하는 마지막 단계가 촉발되었다.[252] 기원전 454년~453년에 아테네는 동맹 금고를 델로스 섬에서 아테네로 옮겼다.[253] 이는 이집트와 뒤이은 반란에서 패전한 뒤 델로스 섬에 있던 동맹의 금고가 정말 위험했기 때문인지, 혹은 금고를 통제한다는 구실 때문이었다.

기원전 450년~449년에 이르러 밀레토스와 에뤼트라이의 반란은 진압되고, 아테네는 다시 동맹국에 대한 지배를 회복하였다.[254] 기원전 447년경, 클레아르코스는 모든 동맹국에 대하여 아테네의 은화와 형량 단위를 적용하는 화폐 칙령을 제안하였다.[255] 이 칙령의 매우 엄격한 규정에는 화폐 주조 작업에서 남은 것은 특별 기금으로 들어가며, 이를 다른 데 쓰자고 제안하는 자는 사형에 처할 수 있게 한다는 내용이 있었다.[256]

페리클레스는 동맹 금고를 이용하여 프로퓔라이아, 파르테논 신전 등 자신의 야심찬 건설 계획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했다. 이 건설 계획은 "페리클레스의 아크로폴리스"에 집중되었으며, 페이디아스가 조각한 아테나 황금상 등이 있었다.[257] 기원전 449년 페리클레스는 아테네 신전을 대대적으로 재건하는 데 9,000 탈란톤을 쓸 수 있게 하는 칙령을 제안하였다.[255]

페르시아 전쟁에서 승리한 아테네는 전성 시대를 맞이했다. 페르시아의 위협이 줄어들자, 델로스 동맹의 맹주였던 아테네는 동맹 자금을 자기 번영을 위해 유용하게 사용하기 시작했다. 델로스 동맹은 대(對)페르시아 방위 기관이라는 본래의 취지를 잃고 '아테네 제국'을 지탱하는 기관으로 변질되었다. 페리클레스는 델로스 섬에서 관리하던 동맹 자금을 아테네에서 관리하도록 옮기고, 파르테논 신전 등의 공공 공사에 동맹 자금을 적극적으로 유용하여 아테네 시민들의 주머니를 채웠다.

아테네가 동맹 내의 폴리스에 대해 전제적으로 행동하면서 동맹에서 이탈하려는 폴리스와 대립이 생겼다. 또한, 페르시아 전쟁 승리에 큰 공헌을 한 스파르타도 아테네의 움직임을 냉담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3. 3. 4. 사모스 전쟁

사모스 전쟁은 펠로폰네소스 전쟁 직전에 일어난 중요한 전쟁이었다. 기원전 440년, 사모스는 뮈칼레 기슭에 있는 이오니아의 고대 도시인 프리에네의 지배권을 놓고 밀레토스와 전쟁을 벌였다. 전황이 악화되자 밀레토스 사람들은 아테네로 가서 사모스에 대한 자신들의 입장을 주장하였다.[258] 아테네는 양측에 전쟁 중단과 중재를 요구했지만, 사모스는 이를 거부했다.[259]

그러자 페리클레스는 "밀레토스인과 싸우지 않도록 명령하였으나, 이에 응하지 않은 사모스 사람 때문에" 사모스에 군대를 보내는 법령을 통과시켰다. 해전에서 페리클레스와 다른 아홉 장군들이 이끄는 아테나이 군대는 사모스 군대를 격파하고 섬을 통치하게 되었다.[259] 사모스가 아테나이에 반란을 일으키자, 페리클레스는 8개월 간의 공성전 끝에 반란군을 항복시켰는데, 이 과정에서 아테나이 선원들의 불만을 사기도 했다.[260] 이후 페리클레스는 뷔잔티온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고 아테나이로 돌아가는 길에 원정군 전몰자 추도 연설을 하였다.[261]

3. 3. 5. 정치 공세

아테네 민주정에서 최고 지도자는 절대 권력자가 아니었기에, 페리클레스와 그의 측근들도 정치 공세를 피할 수 없었다.[264] 펠로폰네소스 전쟁 직전, 페리클레스, 페이디아스, 아스파시아는 일련의 정치 공세와 법정 다툼에 휘말렸다.

페리클레스의 모든 건설 계획을 담당한 페이디아스아테나 상에 쓸 황금을 횡령했다는 혐의와 아마존 전사와의 전투를 새기는 작업 중 자신과 페리클레스를 새겨넣어 불경건하다는 혐의로 고발당했다.[265]

좌담가이자 조언가로 유명했던 아스파시아는 페리클레스의 성욕을 만족시키고자 아테네 여성을 타락시켰다는 혐의로 고발당했다.[266][267] 아스파시아는 헤타이라이며 유곽을 운영했던 것으로 추정되지만,[268][269] 학자들은 이 주장의 사실 여부를 놓고 논란을 벌인다.[270][271] 아스파시아는 페리클레스 덕에 면소되었으나, 페이디아스는 감옥에서 죽고, 아낙사고라스는 신앙 문제로 민회의 공격을 받았다.[265]

이후 민회는 페리클레스에게 공금 낭비와 서투른 지출에 대해 해명하도록 요구했다.[267]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페리클레스는 재판을 두려워하여 아테네가 라케다이몬에 양보하지 않도록 했다고 한다.[267]

4. 펠로폰네소스 전쟁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원인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지만, 여러 고대 역사가들은 전쟁의 책임을 페리클레스와 아테네에게 두었다. 플루타르코스는 페리클레스와 아테네 사람들이 "일종의 오만함과 투쟁에 대한 사랑"이라는 이들의 교전 전술을 이행하여 전쟁을 촉발하였다고 믿었다. 투퀴디데스도 같은 암시를 하는데, 전쟁의 원인은 아테네의 패권과 성장을 스파르타가 두려워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투퀴디데스는 흔히 페리클레스의 옹호자로 여겨지는데, 스파르타에 대한 편견으로 비판을 받았다.[76]

기원전 431년,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발발했다. 페리클레스는 강력한 스파르타 육군에 대항하여 농성 전략을 취하고, 해상 결전의 기회를 노렸지만, 이듬해 아테네의 역병이 발생하여 많은 시민들이 희생되면서 급격하게 시민들의 지지를 잃었다. 당시의 '방어적인 행동으로 적의 피로를 기다리고, 현상 유지를 노리는 전략'을 '''페리클레스 전략'''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페리클레스 자신도 아테네의 역병에 걸려 사망했다. 죽기 직전, 아테네의 법률을 변경하여 아스파시아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소(小) 페리클레스에게 아테네 시민권을 부여하고 정당한 상속인으로 삼았다.[188][189] 이는 페리클레스 자신이 시민권을 부모가 모두 아테네인인 사람으로 한정하는 법률을 제안했기 때문에 충격적인 결정이었다.[190]

4. 1. 전쟁의 서막

페리클레스는 스파르타가 아테네의 패권을 공공연히 질시했기에, 전쟁을 원치 않더라도 피할 수 없다고 확신했다.[272] 그는 코린토스와 싸우던 코르퀴라 함대를 지원하고자 코르퀴라에 군대를 보냈다.[273] 기원전 433년, 아테나이와 코르퀴라 함대는 쉬보타 해전에서 코린토스 함대와 격돌했고, 이듬해 아테나이는 폰티다이아 전투에서 코린토스의 식민시 시민들과 싸웠다. 이 두 전투는 코린토스가 아테나이를 향한 오랜 증오심을 키우는 계기가 되었다.

같은 시기, 페리클레스는 메가라 법령을 제안했는데, 이는 오늘날의 무역 봉쇄와 유사한 조치였다. 이 법령에 따라 메가라 상인들은 아테나이 시장과 아테나이 영향권 내에서 배제되었다. 이는 메가라 경제를 압박했고, 메가라의 동맹인 스파르타와 아테나이 사이의 불안한 평화에 긴장을 조성했다.

스파르타는 동맹들과 상의 후 아테나이에 대표단을 보내 메가라 법령 철회, 페리클레스를 비롯한 알크마이오니다이 가문 추방 등 몇 가지 양보를 요구하며, 그렇지 않으면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위협했다. 이는 아테나이 인민과 페리클레스의 대립을 유도하려는 의도였으며, 실제로 몇 년 뒤에 이런 상황이 벌어졌다.[274]

아테나이 사람들은 페리클레스의 지시를 따랐다. 투퀴디데스가 전한 첫 번째 연설에서 페리클레스는 아테나이가 군사적으로 강하므로 적의 요구에 양보하지 말라고 충고했다.[275] 그는 "아테나이가 이 일로 양보를 하면, 스파르타는 분명 더 많은 요구를 들이댈 것"이라고 생각하여 일방적인 양보는 고려하지 않았다.[276]

페리클레스는 스파르타에 역제안을 했다. 메가라 법령 철회 대신, 스파르타는 자국 영토에서 주기적으로 외국인을 추방하는 관습(크세넬라시아)을 버리고, 자국 동맹 도시의 자치권을 인정하라는 것이었다. 이는 아테나이의 요구가 스파르타의 패권 역시 무자비했음을 암시하는 것이었다.[277] 스파르타는 이를 거부했고, 양측 모두 물러서지 않고 전쟁을 준비했다.

4. 2. 개전 첫 해 (기원전 431년)

기원전 431년, 평화가 이미 위태로운 상황에서 스파르타의 왕 아르키다모스 2세는 아테네에 사절을 보내 스파르타의 요구를 받아들이도록 요청하였다. 그러나 페리클레스는 스파르타인들이 이미 적대적인 군사 행동을 했다면 스파르타 대표단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결의안을 통과시킨 상태였기 때문에, 이들은 아테네에 들어갈 수 없었다.[278] 당시 스파르타 군대는 코린토스에 집결해 있었고, 아테네는 이를 적대적인 행동으로 간주하여 스파르타 사절을 거부했다.[97]

마지막 협상이 실패하자 아르키다모스 왕은 아티케를 침공했지만, 아테네인들을 찾을 수 없었다. 페리클레스는 스파르타의 전략이 아테네 영토를 침략하여 약탈하는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군대가 오기 전에 이미 모든 주민을 아테네 성벽 안으로 대피시켰기 때문이었다.[279]

페리클레스가 아티케 주민들을 설득하여 도시로 이주하도록 한 정확한 기록은 없다. 대부분의 주민에게 이는 토지와 조상 대대로 이어진 성소를 버리고 생활 방식을 완전히 바꾸는 것을 의미했다.[280] 이들은 이주에 동의했지만, 많은 시골 주민들은 페리클레스의 결정에 불만을 가졌다.[281] 페리클레스는 동포들에게 조언하고, 적이 자신의 농장을 약탈하지 않으면 재산을 도시에 바치겠다고 약속하며 안심시켰다. 이는 친구인 아르키다모스가 우정의 표시나 자신을 지지자들로부터 떼어놓으려는 정치적 계산으로 자신의 농장을 약탈하지 않고 지나갈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282]

필리프 폴츠의 ''페리클레스의 장례 연설''(1852)


농장이 약탈당하는 것을 본 아테네인들은 분노했고, 곧 페리클레스를 전쟁으로 끌어들였다고 생각하며 불만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압력에도 불구하고 페리클레스는 즉각적인 행동 요구에 굴복하거나 초기 전략을 바꾸지 않았다. 그는 민회가 농장 약탈에 분노하여 스파르타 군대와 싸우기로 결정할 것을 우려하여 민회 소집을 피했다.[283] 민회는 교대로 돌아가는 의장('프뤼타니에스')의 재량에 따라 소집되었으므로, 페리클레스는 민회 일정을 공식적으로 통제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프뤼타니에스에게 존경받았기 때문에 그들을 설득할 수 있었다.[284]

스파르타 군대가 아티케에 머무는 동안 페리클레스는 군함 100척의 함대를 펠로폰네소스반도 해안으로 보내 약탈하게 하고, 기병대를 배치하여 도시 성벽 근처의 약탈당한 농장을 지키도록 했다.[285] 적이 물러나고 약탈이 끝나자, 페리클레스는 아테네가 해군 공격을 받을 경우를 대비하여 1,000 탈란톤과 배 100척을 마련해 두도록 하는 법령을 제안했다. 이 법령의 가장 엄격한 조항은 이 돈이나 배를 다른 용도로 쓰자고 제안하기만 해도 사형에 처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기원전 431년 가을, 페리클레스는 아테네 군대를 이끌고 메가라를 침략했으며, 몇 달 뒤(기원전 431년과 430년 겨울)에는 전몰자 추도 연설을 했다.[286]

4. 3. 마지막 군사 작전과 죽음

기원전 430년, 스파르타 군대는 두 번째로 아티케를 약탈하였으나, 페리클레스는 이에 굴하지 않고 당초 전략을 계속 추진하였다.[287] 스파르타 군대와 교전하지 않으려 했던 그는 다시 펠로폰네소스 해안을 약탈할 함대를 파견하였는데, 이번에는 그와 함께 100척의 배가 떠났다.[288]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출항 직전에 일식이 일어나 승무원들이 겁을 먹었는데, 페리클레스는 아낙사고라스에게서 배운 천문학 지식을 이용하여 이들을 안심시켰다고 한다.[289] 그 해 여름에 아테네의 역병이 아테나이에 창궐하였다.[290] 이 역병이 정확히 무엇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며, 많은 논란이 되고 있다. 전염병으로 도시가 곤경에 처하면서 다시 대중이 동요하였으며, 페리클레스는 인상적인 마지막 연설로 자신을 변호해야 했는데, 이 내용을 투키디데스가 전하고 있다.[291] 이 연설은 기념비적인 것으로 평가되는데, 페리클레스의 덕성과 더불어 동포들의 배은망덕에 대한 쓰라린 마음을 드러내고 있다.[207] 임시방편으로나마 그는 대중의 분노를 억누르고 혼란을 바로잡고자 하였으나, 내부의 정적들이 마지막으로 그를 기소하여 음해하였으며, 이들은 그에게서 장군직을 빼앗고 15~20 탈란톤의 벌금을 물렸다.[289] 고대 기록에는 전쟁 당시 아테나이 정계의 한 주역이었던 클레온이 페리클레스 재판의 검사였다고 한다.[289]

미히엘 스베르츠의 ''아테네의 역병'' (c. 1652–1654)


그러나 기원전 429년에 1년 만에 아테나이인들은 페리클레스를 용서하고 다시 그를 스트라테고스로 임명하였다. 그는 아테나이 군대 총사령관으로 복귀하고, 기원전 429년 동안 모든 군사 작전을 이끌었다.[207] 그러나 그 해에 첫 번째 아내가 낳은 적법한 아들인 파랄로스와 크산팁포스가 역병으로 죽는 불운을 당한다. 상심한 그는 눈물을 터뜨려, 아스파시아도 그를 위로할 수 없었다. 페리클레스 자신도 429년 가을에 역병으로 죽고 말았다.

5. 평가

페리클레스는 한 시대를 풍미했으며, 그의 중대한 결정들은 상반된 평가를 불러일으켰다. 그가 유능한 정치가, 장군, 그리고 웅변가였다는 사실은 그의 행동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를 더욱 어렵게 만든다.[191] 그는 또한 격조 높은 연설로 현대까지 서구 정치인들의 모범이 되고 있다.[191] 1954년에는 그리스 구 50 드라크마 지폐의 초상에 사용되기도 했다.

기원전 432년, 페리클레스는 신역을 훼손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메가라에 대해 교역을 금지하는 메가라 법령(영어판)을 발령했는데,[192] 이는 역사상 최초의 외교 정책으로서의 경제 제재로 여겨진다.

5. 1. 정치적 리더십

일부 현대 학자들은 페리클레스를 포퓰리스트, 선동가, 매파라고 부르는 반면,[124] 다른 학자들은 그의 카리스마 넘치는 리더십을 존경한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아테네의 지도자가 된 후, "그는 이전과 같은 사람이 아니었고, 민중에게 복종하고 다수의 욕망에 굴복"했다.[125]

페리클레스를 숭배한 역사가 투키디데스는 아테네가 "이름은 민주주의였지만, 실제로는 첫 번째 시민에 의해 통치되었다"고 주장한다.[1] 투키디데스는 페리클레스의 리더십, 설득력, 그리고 때로는 조종하는 카리스마를 묘사하고 있다. 투키디데스는 페리클레스의 벌금 부과는 언급하지만, 페리클레스에 대한 비난은 언급하지 않고 그의 청렴함에 초점을 맞춘다.[1] 반면에, 플라톤은 그의 대화 중 하나에서 페리클레스의 미화를 거부하며 "내가 아는 한, 페리클레스는 공공 요금 제도를 시작함으로써 아테네인들을 게으르고, 수다스럽고, 탐욕스럽게 만들었다."라고 말했다.[127]

투키디데스는 페리클레스가 "사람들에게 휩쓸린 것이 아니라, 그가 사람들을 이끌었던 사람"이라고 주장한다.[1] 20세기 비평가들은 그가 고문이나 사람들 자신의 제안에 따라 행동하는 카리스마 넘치는 공인이었을 수 있다고 제안했다.[128][129] 펠로폰네소스 전쟁 동안, 페리클레스가 통치를 위해 대중의 지지에 의존하는 것은 분명했다.[35]

기원전 462년, 페리클레스는 귀족파 키몬이 출정으로 부재한 틈을 타 민주파와 함께 아레오파고스 회의의 실권을 빼앗고, 모든 아테네 시민의 정치 참여를 촉진했다. 이듬해 키몬이 도편 추방으로 국외 추방되자, 이후 아테네의 최고 권력자의 지위를 독점했다.

기원전 444년부터 430년까지 15년 동안 페리클레스는 매년 연속 스트라테고스, 즉 '장군'으로 선출되어 아테네에 전성 시대를 가져왔다. 페리클레스는 스스로 적극적으로 아고라에서 상행위를 하여 아테네가 상업적인 아고라를 추진하는 계기가 되었다.[187]

페르시아 전쟁에서 승리한 아테네는 전성 시대를 맞이했다. 델로스 동맹의 맹주였던 아테네는 동맹 자금을 파르테논 신전 등의 공공 공사에 유용하여 아테네 시민들의 주머니를 채웠다. 아테네가 동맹 내의 폴리스에 대해 전제적으로 행동하게 되자, 동맹에서 이탈하려는 폴리스와의 사이에 대립이 생기게 되었다. 스파르타도 아테네의 움직임을 냉담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스파르타가 델로스 동맹에서 이반한 폴리스를 지원하게 되자, 기원전 431년, 양자 사이에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발발했다. 페리클레스는 강력한 스파르타 육군에 대항하여 농성 전략을 취하고, 해상 결전의 기회를 노렸지만, 이듬해에 아테네의 역병이 발생하여 많은 시민들이 희생되면서 급격하게 시민들의 지지를 잃었다. 이 당시에 취한 전쟁 방침에서 '방어적인 행동으로 적의 피로를 기다리고, 현상 유지를 노리는 전략'을 '''페리클레스 전략'''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페리클레스는 변설에 뛰어난 정치가였다. 격조 높은 페리클레스의 연설은 현대까지 전해져 내려오며,[191] 서구 정치인들의 모범이 되고 있다.

5. 2. 군사적 업적

페리클레스는 20년 이상 여러 원정, 주로 해군 원정을 이끌었다. 그는 항상 신중했기에, 불확실성과 위험이 큰 전투는 피했고, 시민들의 충동에 따르지 않았다.[131] 그는 아테네의 힘이 해군력에 달려 있다는 테미스토클레스의 원칙에 따라 군사 정책을 펼쳤고, 펠로폰네소스인들이 육지에서는 강하다고 믿었다.[132] 페리클레스는 또한 아테네 성벽을 재건하여 스파르타의 이점을 최소화하려 했다.[133]

펠로폰네소스 전쟁 동안, 페리클레스는 적을 소모시키고 현상을 유지하는 방어적인 "대 전략"을 시작했다.[134] 그는 스파르타의 승리 계획을 좌절시키는 것을 목표로 했다.[134] "페리클레스의 대 전략"은 유화 정책 거부와 과도한 확장을 피하는 것이었다.[135] 도널드 카간에 따르면, 페리클레스가 분산된 원정을 피하라고 주장한 것은 이집트 원정의 실패 때문이었다.[135] 그의 전략은 처음에는 인기가 없었지만,[136] 페리클레스는 아테네 대중을 설득하여 따르게 했다.[136] 한스 델브뤼크는 그를 위대한 정치가이자 군사 지도자 중 한 명이라고 평가했다.[137]

하지만 페리클레스 전략에 대한 비판도 많았다. 도널드 카간은 페리클레스 전략을 "실패한 희망적인 사고"라고 비판했고,[141] 배리 S. 스트라우스와 조시아 오버는 그가 전략가로서 실패했다고 평가했다.[141] 빅터 데이비스 핸슨은 페리클레스가 효과적인 공격 전략을 세우지 못했다고 비판했다.[143] 카간은 페리클레스 전략이 작은 양보를 거부하여 전쟁을 일으켰고, 적이 예상하지 못해 신뢰성이 부족했으며, 기회를 활용하기에 너무 약했고, 페리클레스에게 의존하여 그가 죽은 후 버려졌다고 비판했다.[144] 카간은 페리클레스가 펠로폰네소스 전쟁에 연간 약 를 사용했으며, 3년 동안만 전쟁을 지속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145][146]

반대로, 플라티아스와 콜리오풀로스는 이러한 비판을 거부하고, 아테네인들이 페리클레스의 전략을 뒤집었을 때만 전쟁에서 졌다고 주장했다.[148] 핸슨은 페리클레스의 전략이 혁신적이지 않았지만 아테네에게 유리한 정체를 초래할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145]

기원전 431년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발발하자, 페리클레스는 강력한 스파르타 육군에 대항하여 농성 전략을 취하고, 해상 결전의 기회를 노렸다. 그러나 이듬해 아테네의 역병이 발생하여 많은 시민들이 희생되면서 지지를 잃었다. 이 때의 전쟁 방침인 '방어적인 행동으로 적의 피로를 기다리고, 현상 유지를 노리는 전략'을 '''페리클레스 전략'''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5. 3. 웅변술

투키디데스의 현대 주석가들과 다른 현대 역사가 및 작가들은 투키디데스가 전하는 페리클레스의 연설이 실제 페리클레스 자신의 언어를 얼마나 나타내는지, 그중 얼마나 많은 부분이 투키디데스의 자유로운 문학적 창작물이나 의역인지에 대해 다양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150] 페리클레스는 자신의 연설을 기록하거나 배포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150][166][151] 역사가들은 이에 대해 확실하게 답할 수 없다. 투키디데스는 기억에 의존하여 세 편의 연설을 재구성했으며, 따라서 그가 자신의 생각이나 사상을 추가하지 않았다고 단정할 수 없다.[154] 그럼에도 불구하고, 10세기 백과사전 수다에 따르면, 페리클레스는 자신의 연설을 체계적으로 기록한 최초의 웅변가였다.[155] 키케로는 페리클레스의 저작에 대해 언급하지만, 그의 발언은 신뢰할 수 있는 것으로 간주되지 않는다.[156][157]

몇몇 역사가들은 투키디데스가 페리클레스에게 귀속시키는 연설의 열정적이고 이상주의적인 문학적 스타일이 투키디데스 자신의 냉정하고 분석적인 문체와 완전히 상반된다는 점을 지적했다.[8][158] 요안니스 카크리디스와 아놀드 곰은 페리클레스의 웅변술과 마지막 연설의 독창성을 놓고 논쟁을 벌인 두 학자였다. 카크리디스는 투키디데스가 페리클레스의 말을 변경했다고 믿으며, 그의 가장 강력한 주장은 연설의 서론에 포함되어 있다고 주장했다(Thuc.11.35).[159] 반면 곰은 카크리디스의 입장을 거부했다.[159]

페리클레스의 코린트 투구 대리석 흉상, 그리스 원본의 로마 복제품, 키아라몬티 박물관, 바티칸 박물관


케이건은 페리클레스가 "속되고 비열한 선동가들의 속임수에서 벗어난 고상한 연설 방식을 채택했다"고 말하며, 디오도로스 시켈로스에 따르면 그는 "웅변술 실력에서 동료 시민 모두를 능가했다"고 한다.[160][161]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그는 열정적인 데모스테네스와 달리 연설에서 속임수를 사용하는 것을 피했으며, 항상 침착하고 평온한 태도로 말했다.[162] 그러나 플루타르코스는 시인 이온이 페리클레스의 연설 스타일이 "오만하고 다소 거만한 말투였으며, 그의 거만함에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경멸과 멸시가 상당 부분 포함되어 있었다"고 보고했다고 지적한다.[162]

플라톤의 동명 대화편에서 고르기아스는 페리클레스를 강력한 웅변의 예로 사용한다.[163] 그러나 메넥세노스에서 소크라테스는 (플라톤을 통해) 페리클레스의 수사적 명성에 흠집을 내며, 아이러니하게도 페리클레스가 많은 웅변가를 훈련시킨 아스파시아에게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안티폰에게 교육을 받은 사람보다 수사학에서 더 뛰어날 것이라고 주장한다.[164] 그는 또한 장례 연설의 저작권을 아스파시아에게 귀속시키고 동시대인들이 페리클레스를 숭배하는 것을 공격한다.[165]

리처드 C. 제브 경은 "아테네 정치가로서 독특했던 페리클레스는 아테네 웅변가로서도 두 가지 면에서 독특했을 것이다. 첫째, 그가 그 이전이나 이후에 어느 누구도 도달하지 못한 개인적 우위를 차지했기 때문이고, 둘째, 그의 생각과 도덕적 힘이 아테네인으로부터 다른 누구도 얻지 못한 웅변술에 대한 명성을 얻었기 때문이다."라고 결론짓는다.[166]

고대 그리스 작가들은 페리클레스를 "올림피안"이라고 부르며 그의 재능을 찬양하며, 그를 "천둥과 번개로 그리스를 흥분시키고" 웅변을 할 때 제우스의 무기를 들고 다닌다고 언급했다.[167] 퀸틸리아누스에 따르면, 페리클레스는 항상 그의 연설을 세심하게 준비했고, 연단에 오르기 전에 부적절한 말을 하지 않도록 신들에게 항상 기도했다.[168]

페리클레스는 변설에 뛰어난 정치가였다. 격조 높은 그의 연설은 현대까지 전해져 내려오며[191], 서구 정치인들의 모범이 되고 있다. 그는 연설에서 다음과 같은 다소 미화된 표현으로 아테나이와 그 국정을 찬양했다.

  • "우리가 따르는 정체는 타국의 제도에 추종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모방하기보다는 오히려 우리 자신이 사람의 모범이다. 그것은 소수자가 아닌 다수자의 이익을 위해 통치하기 때문에 민주 정치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 "아테나이의 주민은 부를 추구한다. 그러나 그것은 가능성을 유지하기 위함이지, 어리석게도 허영심에 취하기 위함이 아니다."
  • "가난한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 가난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지 않고, 안주하는 것, 그것이 바로 부끄러운 일이라고 아테나이 사람들은 생각한다."
  • "아테나이의 주민은 사적인 이익을 존중하지만, 그것은 공적 이익에 대한 관심을 높이기 위함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사익 추구를 목적으로 길러진 능력이라도 공적인 활동에 응용 가능하기 때문이다."
  • "때의 말을 잘 들어라. 때는 가장 현명한 법률 고문이다."
  • "아테나이에서는 정치에 관심이 없는 자는 시민으로서 의미가 없는 것으로 여겨진다."

6. 유산

레오 폰 클렌체의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1846)


페리클레스의 가장 두드러진 유산은 황금 시대의 문학 및 예술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이 작품들 중 상당수는 오늘날까지 남아있다. 아크로폴리스는 폐허가 되었지만 여전히 서 있으며, 현대 아테네의 상징이 되었다. 파파리고풀로스는 이러한 걸작들이 "그리스의 이름을 우리 세상에 영원히 남기기에 충분하다"고 적었다.[140]

정치적으로, 빅터 L. 에렌버그는 페리클레스의 유산의 기본 요소는 아테네 제국주의이며, 이는 통치 국가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에게 진정한 민주주의와 자유를 부정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172] 이러한 오만한 제국주의의 장려는 아테네를 파멸시켰다고 전해진다.[173] 페리클레스와 그의 "팽창주의" 정책은 억압받는 국가의 민주주의를 장려하는 논쟁의 중심에 서왔다.[174][175]

다른 분석가들은 황금 시대에 나타난 아테네의 휴머니즘을 강조한다.[176][177] 표현의 자유는 이 시대에서 비롯된 지속적인 유산으로 여겨진다.[178] 페리클레스는 "고대 그리스의 완벽한 정치가의 이상형"으로 칭송받으며, 그의 장례 연설은 오늘날 참여 민주주의와 시민 자긍심을 위한 투쟁과 동의어가 되었다.[140][179]

1932년, 식물학자 앨버트 찰스 스미스는 페리클레스를 기리기 위해 에콰도르에서 발견된 진달래과에 속하는 단형 속의 속씨식물인 ''페리클레시아''를 발표했다.[180]

취리히 연방 공과대학교 기록 보관소 외부에는 페리클레스의 얼굴과 호메로스, 아리스토텔레스가 함께 그려진 벽화가 있다. 페리클레스는 변설에 뛰어난 정치가였다. 격조 높은 페리클레스의 연설은 현대까지 전해져 내려오며[191], 서구 정치인들의 모범이 되고 있다.

1954년에 발행된 그리스 구 50 드라크마 지폐의 초상에 사용되었다. 기원전 432년에는 신역을 훼손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메가라에 대해 교역을 금지하는 메가라 법령(영어판)을 발령했는데,[192] 이는 역사상 최초의 외교 정책으로서의 경제 제재로 여겨진다.

참조

[1] 서적 History of the Peloponnesian War
[2] 서적 An Introduction to the Ancient World
[3] 웹사이트 Periclean Athens http://www.nipissing[...]
[4] 서적 Lysistrata
[5] 서적 Athenian propertied families, 600–300 BC
[6] 백과사전 Pericles
[7] 백과사전 Pericles
[8] 백과사전 Pericles
[9] 서적 Histories https://www.perseus.[...]
[10] 서적 Lives of the Noble Greeks and Romans s:Lives/Pericles#3
[11] 서적 From Solon to Socrates
[12] 서적 Culture and Values
[13] 서적 History of the Peloponnesian War http://perseus.mpiwg[...]
[14] 서적 Lives of the Noble Greeks and Romans s:Lives/Pericles#4
[15] 서적 Alcibiades I https://www.perseus.[...]
[16] 서적 Many Sides
[17] 서적 Phaedrus https://www.perseus.[...]
[18] 백과사전 Pericles
[19] 서적 The Greek World, 479–323 BC
[20] 서적 Lives of the Noble Greeks and Romans s:Lives/Pericles#16
[21] 서적 Lives of the Noble Greeks and Romans s:Lives/Pericles#7
[22] 서적 Lives of the Noble Greeks and Romans s:Lives/Pericles#9
[23] 서적 Constitution of Athens
[24] 서적 Lives of the Noble Greeks and Romans https://www.perseus.[...]
[25] 서적 Athens from Cleisthenes to Pericles http://content.cdlib[...]
[26] 서적 What's Wrong with Democracy?
[27] 서적 Lives of the Noble Greeks and Romans https://www.perseus.[...]
[28] 서적 Athens from Cleisthenes to Pericles http://content.cdlib[...]
[29] 웹사이트 An Overview of Classical Greek History https://www.perseus.[...]
[30] 웹사이트 http://perseus.mpiwg[...]
[31] 서적 History of the Greek Nation
[32] 서적 Politics https://www.perseus.[...]
[33] 서적 What's Wrong with Democracy?
[34] 서적 The Ancient Greeks
[35] 웹사이트 Athenian Democracy and Empire http://www.vu.union.[...]
[36] 서적 The Outbreak of the Peloponnesian War
[37] 서적 The Outbreak of the Peloponnesian War
[38] 서적 Constitution of Athens
[39] 문서 History of the Peloponnesian War s:History of the Pel[...]
[40] 서적 A History of the Classical Greek World
[41] 웹사이트 Cimon https://www.perseus.[...]
[42] 서적 Perikles and his Circle
[43] 문서 Lives/Pericles s:Lives/Pericles#10
[44] 서적 The Athenian Disaster in Egypt
[45] 서적 Pericles: The Rise and Fall of Athenian Democracy
[46] 서적 Griechische Geschichte
[47] 서적 The Ancient Greeks
[48] 서적 The Peace of Callias
[49] 서적 The Outbreak of the Peloponnesian War
[50] 문서 Lives/Pericles s:Lives/Pericles#17
[51] 서적 The Question of Tribute in 449/8 B.C.
[52] 서적 Aspects of Greek History 750–323 BC
[53] 웹사이트 http://perseus.mpiwg[...]
[54] 문서 History of the Peloponnesian War and Lives/Pericles s:History of the Pel[...]
[55] 문서 Lives/Pericles s:Lives/Pericles#19
[56] 서적 The Ancient Greeks
[57] 문서 History of the Peloponnesian War and The Acharnians s:History of the Pel[...]
[58] 문서 Lives/Pericles s:Lives/Pericles#23
[59] 문서 Lives/Pericles s:Lives/Pericles#14
[60] 서적 Aspects of Greek History 750–323 BC
[61] 서적 The Story of Athens
[62] 서적 The Outbreak of the Peloponnesian War
[63] 서적 Aspects of Greek History 750–323 BC
[64] 서적 A History of the Greek City States, 700–338 BC
[65] 서적 From Solon to Socrates: Greek History and Civilization During the 6th and 5th Centuries BC https://books.google[...] Routledge 2014
[66] 서적 The Greek World 479–323 BC
[67] 서적 The Acropolis in the Age of Pericles
[68] 서적 Thucydides' Bias
[69] 문서 History of the Peloponnesian War s:History of the Pel[...]
[70] 문서 Lives/Pericles s:Lives/Pericles#25
[71] 서적 Pericles
[72] 서적 A History of the Greek City States
[73] 서적 Pontus and the Outside World
[74] 서적 Pericles, Gorgias https://www.perseus.[...]
[75] 서적 Athens from Cleisthenes to Pericles http://content.cdlib[...]
[76] 서적 Pericles
[77] 웹사이트 Aspasia http://www.stoa.org/[...] 2015-09-24
[78] 서적 Pericles
[79] 서적 Aspasie, l'étrangère, l'intellectuelle
[80] 서적 Prisoner of History
[81] 서적 Die Attische Politik seit Perikles
[82] 서적 History of the Peloponnesian War
[83] 서적 An Historical Commentary on Thucydides
[84] 서적 Comments on Thucydides
[85] 서적 Thucydides' bias
[86] 서적 The Character of the Athenian Empire
[87] 서적 Athens from Cleisthenes to Pericles http://content.cdlib[...]
[88] 서적 Perikles and his Circle
[89] 서적 History of the Peloponnesian War
[90] 서적 Thucydides and the Peloponnesian War
[91] 서적 Aspects of Greek History 750–323 BC
[92] 서적 History of the Peloponnesian War
[93] 서적 History of the Peloponnesian War
[94] 서적 Thucydides on Strategy
[95] 서적 Thucydides' Bias
[96] 서적 From Solon to Socrates
[97] 서적 History of the Peloponnesian War
[98] 서적 History of the Peloponnesian War
[99] 서적 The Athenian Revolution
[100] 서적 History of the Peloponnesian War
[101] 서적 History of the Peloponnesian War
[102] 서적 History of the Peloponnesian War
[103] 서적 The Peloponnesian War
[104] 서적 History of the Peloponnesian War, Constitution of Athens https://www.perseus.[...]
[105] 서적 History of the Peloponnesian War
[106] 서적 History of the Peloponnesian War
[107] 서적 History of the Peloponnesian War
[108] 서적 History of the Peloponnesian War
[109] 서적 Pericles
[110] 서적 History of the Peloponnesian War
[111] 서적 An Historical Commentary on Thucydides
[112] 서적 Remarks on Thucydides
[113] 서적 History of the Peloponnesian War
[114] 서적 Pericles
[115] 서적 History of the Peloponnesian War
[116] 서적 Aa
[117] 서적 Pericles
[118] 서적 Pericles: A Sourcebook and Reader https://archive.org/[...]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19] 서적 Pericles
[120] 서적 Pericles
[121] 서적 Pericles
[122] 서적 Immigrant Women in Athens: Gender, Ethnicity, and Citizenship in the Classical City
[123] 서적 A History of Greece
[124] 서적 Lysistrata
[125] 서적 Pericles
[126] 서적 Thucydides' bias
[127] 웹사이트 Gorgias http://www.perseus.t[...]
[128] 서적 Government in Athens
[129] 서적 Pericles Monarchos
[130] 서적 History of the Peloponnesian War
[131] 서적 Pericles
[132] 서적 Thucydides on Strategy
[133] 서적 National Ideology and Strategic Defence of the Population
[134] 서적 Thucydides on Strategy
[135] 서적 The Outbreak of the Peloponnesian War
[136] 서적 Thucydides on Strategy
[137] 서적 History of the Art of War
[138] 서적 From Solon to Socrates
[139] 서적 This So-Called Defensive Policy of Pericles
[140] 서적 Aa
[141] 서적 Peloponnesian War
[142] 서적 Athenian Strategy in the Peloponnesian War
[143] 서적 The Anatomy of Error
[144] 서적 The Archidamian War
[145] 서적 Peloponnesian War
[146] 서적 The Peloponnesian War
[147] 서적 Thucydides and the War Strategy of Pericles
[148] 서적 Thucydides on Strategy
[149] 서적 What's Wrong with Democracy?
[150] 서적 Remarks on Thucydides
[151] 웹사이트 The Greek Orators https://www.perseus.[...]
[152] 서적 Distant Companions
[153] 서적 Interpretative comments on the Funeral Oration
[154] 서적 Pericles s:Lives/Pericles#6
[155] 웹사이트 Pericles http://www.stoa.org/[...] 2017-10-13
[156] 웹사이트 De Oratote https://www.perseus.[...]
[157] 웹사이트 Institutiones http://www.thelatinl[...]
[158] 서적 Taming Democracy
[159] 논문 The General Purport of Pericles' Funeral Oration and Funeral Speech
[160] 서적 The Peloponnesian War Viking
[161] 웹사이트 https://www.perseus.[...]
[162] 서적 Pericles s:Lives/Pericles#5
[163] 웹사이트 Gorgias https://www.perseus.[...]
[164] 웹사이트 Menexenus https://www.perseus.[...]
[165] 서적 Plato's Democratic Entanglements
[166] 웹사이트 The Attic Orators https://www.perseus.[...]
[167] 웹사이트 Acharnians and https://www.perseus.[...]
[168] 웹사이트 Institutiones http://www.thelatinl[...]
[169] 서적 What is polis religion? Clarendon Press
[170] 서적 Pericles of Athens Princeton and Oxford
[171] 서적 Pericles of Athens Princeton and Oxford
[172] 서적 From Solon to Socrates
[173] 서적 A History of the Ancient World
[174] 서적 Peloponnesian War
[175] 뉴스 My Favorite War https://query.nytime[...]
[176] 서적 A Legacy of Learning
[177] 서적 The Open Society and Its Enemies
[178] 서적 A Synoptic History of Classical Rhetoric
[179] 서적 Creating a Democratic Public
[180] 웹사이트 Periclesia A.C.Sm. Plants of the World Online Kew Science https://powo.science[...] 2021-03-16
[181] Youtube Official Sid Meier's YouTube channel video introducing Pericles https://www.youtube.[...]
[182] 문서 History of the Peloponnesian War/Book 1
[183] 서적 History of the Hellenic Nation (Volume Ab) Eleftheroudakis
[184] 문서 Lives/Pericles
[185] 서적 Pericles: A Sourcebook and Reader https://archive.org/[...]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86] 문서 Lives/Pericles
[187] 서적 人間の経済2 交易・貨幣および市場の出現 岩波書店
[188] 서적 Immigrant Women in Athens: Gender, Ethnicity and Citizenship in the Classical City
[189] 문서 Lives/Pericles
[190] 서적 A History of Greece
[191] 서적 戦史
[192] 서적 歴史
[193] 문서 History of the Peloponnesian War/Book 2
[194] 서적 서양의 역사에는 초야권이 없다 푸른역사
[195] 서적 An Introductㄹ히알;ㅣ히;ㅇ롸ㅏㅂ연신
[196] 웹사이트 Periclean Athens http://www.nipissing[...]
[197] 서적 Lysistrata
[198] 문서 History of the Peloponnesian War/Book 2 http://perseus.mpiwg[...]
[199] 문서 History of the Peloponnesian War/Book 1
[200] 웹사이트 Athens from Cleisthenes to Pericles http://content.cdlib[...]
[201] 문서 플루타르코스의 기록
[202] 백과사전 Pericles 2002
[203] 문서 Herodotus, VI http://www.perseus.t[...]
[204] 문서 Lives/Pericles
[205] 서적 From Solon to Socrates
[206] 서적 Culture and Values
[207] 백과사전 Pericles 1952
[208] 문서 Lives/Pericles
[209] 문서 Alcibiades I http://www.perseus.t[...]
[210] 서적 Many Sides
[211] 서적 Pericles, Phaedrus http://www.perseus.t[...]
[212] 서적 Économies et sociétés en Grèce ancienne Armand Colin 2007
[213] 백과사전 Pericles 1996
[214] 서적 The Greek World, 479–323 BC
[215] 서적 Pericles
[216] 서적 Pericles
[217] 서적 Pericles
[218] 서적 앎과 잘남 책세상 2006
[219] 서적 Constitution of Athens
[220] 서적 Cimon http://www.perseus.t[...]
[221] 서적 Athens from Cleisthenes to Pericles http://content.cdlib[...]
[222] 서적 Athenian Democracy Routledge 2005
[223] 서적 What's Wrong with Democracy?
[224] 서적 Cimon http://www.perseus.t[...]
[225] 서적 Athens from Cleisthenes to Pericles http://content.cdlib[...]
[226] 웹사이트 An Overview of Classical Greek History http://www.perseus.t[...]
[227] 서적 History of the Greek Nation
[228] 서적 Constitution of Athens, Politics http://www.perseus.t[...]
[229] 서적 What's Wrong with Democracy?
[230] 서적 The Ancient Greeks
[231] 웹사이트 Athenian Democracy and Empire http://www.vu.union.[...] 2006-09-21
[232] 서적 The Outbreak of the Peloponnesian War
[233] 서적 The Outbreak of the Peloponnesian War
[234] 서적 History of the Peloponnesian War
[235] 서적 A History of the Classical Greek World
[236] 서적 키몬 http://www.perseus.t[...]
[237] 서적 Perikles and his Circle
[238] 서적 페리클레스
[239] 서적 The Athenian Disaster in Egypt
[240] 서적 페리클레스: The Rise and Fall of Athenian Democracy
[241] 서적 The Ancient Greeks
[242] 서적 페리클레스
[243] 서적 The Question of Tribute in 449/8 B. C.
[244] 서적 History of the Peloponnesian War, Pericles
[245] 서적 페리클레스
[246] 서적 The Ancient Greeks
[247] 서적 History of the Peloponnesian War http://www.perseus.t[...]
[248] 서적 페리클레스
[249] 서적 Pericles
[250] 서적 Aspects of Greek History 750–323 BC
[251] 서적 The Story of Athens
[252] 서적 The Outbreak of the Peloponnesian War
[253] 서적 Aspects of Greek History 750–323 BC
[254] 서적 A History of the Greek City States, 700–338 BC
[255] 서적 Aspects of Greek History 750–323 BC
[256] 서적 The Greek World 479–323 BC
[257] 서적 The Acropolis in the Age of Pericles
[258] 서적 History of the Peloponnesian War
[259] 서적 Pericles
[260] 서적 Pericles
[261] 서적 A History of the Greek City States
[262] 서적 Pontus and the Outside World
[263] 서적 Pericles http://www.perseus.t[...]
[264] 서적 Athens from Cleisthenes to Pericles http://content.cdlib[...]
[265] 서적 Pericles
[266] 웹사이트 Aspasia http://www.stoa.org/[...] 2015-09-24
[267] 서적 Pericles
[268] 서적 Acharnians http://www.perseus.t[...]
[269] 서적 Women in Athenian Law and Life
[270] 서적 Aspasie, l'étrangère, l'intellectuelle
[271] 서적 Prisoner of History
[272] 서적 Perikles and his Circle
[273] 서적 History of the Peloponnesian War
[274] 서적 History of the Peloponnesian War
[275] 서적 History of the Peloponnesian War
[276] 서적 Thucydides on Strategy
[277] 서적 Thucydides' Bias
[278] 서적 History of the Peloponnesian War
[279] 서적 History of the Peloponnesian War
[280] 서적 The Athenian Revolution
[281] 서적 History of the Peloponnesian War
[282] 서적 History of the Peloponnesian War
[283] 서적 History of the Peloponnesian War
[284] 서적 The Peloponnesian War
[285] 서적 History of the Peloponnesian War and Constitution of Athens http://www.perseus.t[...]
[286] 서적 History of the Peloponnesian War
[287] 서적 History of the Peloponnesian War
[288] 서적 History of the Peloponnesian War
[289] 서적 Lives
[290] 서적 History of the Peloponnesian War
[291] 서적 History of the Peloponnesian War

관련 사건 타임라인

( 최근 20개의 뉴스만 표기 됩니다. )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