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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누스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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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콘스탄티누스 2세는 316년 콘스탄티누스 1세와 파우스타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337년 아버지의 사망 이후 형제들과 함께 로마 제국을 분할 통치했다. 그는 브리타니아, 갈리아, 히스파니아를 다스렸으나, 동생 콘스탄스에게 영토 분할을 요구하다 거절당하자 전쟁을 일으켰다. 340년 이탈리아 침공 중 아퀼레이아 근처에서 매복 공격을 받아 사망했으며, 그의 죽음 이후 기억 말살이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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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누스 2세

2. 생애

콘스탄티누스 1세가 임명한 카이사르들의 제국 분할: 서쪽에서 동쪽으로, 콘스탄티누스 2세, 콘스탄스, 달마티우스, 콘스탄티우스 2세의 영토


아우구스투스로서의 콘스탄티누스 2세의 솔리두스


콘스탄티누스 2세는 콘스탄티누스 1세파우스타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나, 어머니는 부정한 간통죄로 처형되었다. 그는 환관이 관리하는 궁정 내에서 다른 두 형제와 함께 자랐으며, 335년 이전에 결혼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아내의 이름은 전해지지 않는다.

337년 5월 22일, 아버지 콘스탄티누스 1세가 사망하고 콘스탄티노플에서 장례식이 거행되었지만, 콘스탄티누스 2세는 체류지와의 거리 때문에 참석하지 못했다. 장례식 직후 콘스탄티노플에 있던 친족들은 숙청되었는데, 주모자는 차남 콘스탄티우스 2세로 추정된다. 그 후, 세 형제는 회담을 갖고 337년 9월 9일 함께 아우구스투스로 즉위했다.

콘스탄티누스 2세는 제국 전역에 대한 권위를 가졌지만, 실제로는 세 명이 독립 군주로서 정치를 했다. 콘스탄티누스 2세는 브리타니아, 갈리아, 히스파니아를 통치했지만, 셋째 동생 콘스탄스 1세에게 북아프리카 영토 분할을 요구했다. 거절당하자 340년 봄, 알프스를 넘어 동생의 영토를 침공했으나, 북이탈리아 아퀼레이아 근처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사로잡혀 살해되었다. 그의 치세는 불과 3년이 채 되지 않았다. 콘스탄티누스 2세는 아퀼레이아 근처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사로잡혀 살해되었으며 치세는 불과 3년이 채 되지 않았다. 콘스탄스 1세는 전투 자체에는 직접 참전하지 않았고, 4월 9일에 형 콘스탄티누스 2세의 죽음을 알게 되었다. 콘스탄티누스 2세는 340년 4월 9일 이전에 살해되었으며, 사망 당시 연령은 20대 초반에서 20대 중반으로 추정된다. 자손은 남기지 않았다.

2. 1. 초기 생애

솔리두스 콘스탄티누스 2세, 카이사르


콘스탄티누스 2세는 316년 아를에서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와 그의 아내 파우스타의 둘째 아들이자 장남으로 태어났다.[3] 그는 황제 막시미아누스의 손녀였다. 317년 3월 1일, 카이사르로 임명되었다.[3] 323년, 아버지와 함께 사르마티아인에 대항하는 원정에 동행했으며,[3] 이 승리를 기념하는 주화에 그의 모습이 새겨졌다. 328년, 콘스탄티누스 2세는 자신의 궁정을 트리어에 설치했다.[3]

328년에서 330년 사이 제작된 비문에는 Alamannicusla라는 칭호가 있는데, 이는 그의 장군들이 알레마니에 승리했음을 의미한다.[3] 332년 겨울, 콘스탄티누스 1세는 고트족에 대항하는 원정에서 그를 야전 사령관으로 임명했다.[3] 그의 지도력으로 군사 작전은 10만 명의 고트족 사망과 통치자 아리아릭의 항복을 이끌어냈다.[3] 성공적인 군사 작전을 기념하기 위해 로마에서 축제 경기가 열렸으며, 이는 그의 통치 능력을 대중에게 알리는 것이었다. 336년 이전에 결혼했지만, 아내의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다.[3]

콘스탄티누스 1세는 아들들이 사촌인 달마티우스와 한니발리아누스와 함께 통치하길 원했지만, 337년 5월 그가 사망한 직후 군대는 이들을 포함한 여러 남성 친척들을 살해했다. 이는 콘스탄티누스 2세의 동생 콘스탄티우스 2세의 명령이었다.[3] 콘스탄티누스 2세는 직접 관여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지만,[3] 버지스는 화폐 증거를 통해 그와 형제들이 "달마티우스의 정당성을 완전히 받아들이지 않고 그를 침입자로 여겼으며, 서로 소통하고 공동 대응에 동의한 것으로 보인다"고 언급했다.[3]

학살과 거리를 두려는 듯, 세 형제는 살해된 친척들의 혈통인 테오도라의 주화를 발행했다. 대부분의 주화는 콘스탄티누스 2세의 수도 트리어에서 제작되었으며, 이는 그가 주화 제작을 주도하고 형제들을 설득했음을 시사한다. 우즈는 그가 형제들보다 테오도라를 더 동정했으며, 아내가 테오도라의 손녀였을 가능성도 있다고 보았다.[3]

337년 6월, 황제 임명 전 콘스탄티누스는 선임성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는 추방된 주교 아타나시우스가 알렉산드리아로 돌아가는 것을 허용했는데, 이는 콘스탄티우스 2세의 통제 하에 있었으며, 아버지의 미완성 의도를 수행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3] 콘스탄티누스의 동기는 불분명하지만, 주교의 무죄를 믿었거나, 종교적 문제를 제거하거나, 콘스탄티우스에게 문제를 일으키고 싶었을 수 있다.[3] 콘스탄티우스는 2년 후 아타나시우스를 알렉산드리아에서 추방했다.

2. 2. 카이사르 시기

317년 3월 1일, 콘스탄티누스 2세는 카이사르로 임명되었다.[3] 323년, 아버지와 함께 사르마티아인에 대항하는 원정에 참여했고, 그가 거둔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주조된 주화에 그의 모습이 새겨졌다.[3] 그는 328년까지 아버지와 함께 머물렀으며, 그해에 자신의 궁정을 트리어에 설치했다.[3]

328년에서 330년 사이에 제작된 비문에는 Alamannicusla라는 칭호가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그의 장군들이 알레마니에 승리했음을 나타낸다.[3] 332년 겨울, 콘스탄티누스 1세는 고트족에 대항하는 원정에서 콘스탄티누스 2세를 야전 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3] 그의 지도력으로 군사 작전은 10만 명의 고트족 사망과 통치자 아리아릭의 항복으로 마무리되었다.[3] 로마에서는 카이사르의 성공적인 군사 작전을 기념하기 위해 축제 경기가 시작되었으며, 이는 그가 통치할 능력이 있음을 대중에게 알리는 것이었다.[3] 그는 336년 이전에 결혼했지만, 그의 아내가 누구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3]

337년 6월, 황제로 임명되기 전에 콘스탄티누스는 이미 자신의 선임성을 주장하려 시도했다.[3] 그는 콘스탄티우스 2세의 통제 하에 있던 알렉산드리아로 추방된 주교 아타나시우스가 돌아가는 것을 허용하는 명령을 내렸는데, 이는 아버지의 미완의 의도를 수행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3] 콘스탄티누스의 동기는 불분명하지만, 그가 주교의 무죄를 진정으로 믿었거나, 종교적인 골칫거리를 제거하고 싶었거나, 콘스탄티우스에게 문제를 일으키고 싶었기 때문일 수 있다.[3] 콘스탄티우스는 불과 2년 후 아타나시우스를 알렉산드리아에서 추방했다.[3]

2. 3. 아우구스투스 시기

337년 9월 9일, 콘스탄티누스 2세는 판노니아에서 동생들과 함께 로마 제국을 분할하여 갈리아, 브리타니아, 히스파니아를 통치하게 되었다.[4] 그러나 이 분할로 그는 동생 달마티우스가 제거되면서 얻은 것이 거의 없었다.

콘스탄티누스 2세는 회의 결과에 만족하지 못하고, 자신의 나이가 황실에서 선임 지위를 부여하여 337년에 십 대였던 막내 동생 콘스탄스의 지배권을 행사할 수 있다고 믿었다. 338년 알레마니족과의 전투에서 성공한 후에도 콘스탄티누스는 자신의 입장을 유지했다. 테오도시우스 법전은 339년 아프리카 총독에게 칙령을 내림으로써 콘스탄스의 영토에 대한 그의 입법 개입을 기록했다.

340년 4월, 콘스탄티누스 2세는 콘스탄스에게서 영토를 빼앗기 위해 이탈리아를 침공했다.[3] 당시 나이수스에 있던 콘스탄스는 그를 막기 위해 다수의 군대를 보냈고, 콘스탄티누스 2세는 아퀼레이아 근처에서 매복 공격을 받아 사망했다. 콘스탄스는 형의 영토를 장악했는데, 그곳 주민들은 통치자의 변화에 거의 영향을 받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가 죽은 후, 콘스탄티누스 2세는 ''기억 말살''을 당했다. 콘스탄스는 사망 직후 콘스탄티누스 2세의 행위를 폐지하는 법을 발표했으며, 사망한 황제를 "공공의 적이자 우리 자신의 적"으로 낙인찍었다. 수년 후, 리바니우스가 콘스탄스와 콘스탄티우스에 대한 찬사를 바쳤을 때, 콘스탄티누스 2세는 마치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이야기에서 완전히 제외되었다.

2. 4. 죽음

340년 4월,[3] 콘스탄티누스는 콘스탄스에게서 영토를 빼앗기 위해 이탈리아를 침공했다.[3] 당시 나이수스에 있던 콘스탄스는 그를 막기 위해 다수의 군대를 보냈고, 콘스탄티누스는 아퀼레이아 근처에서 매복 공격을 받아 사망했다. 콘스탄스는 형의 영토를 장악했는데, 그곳 주민들은 통치자의 변화에 거의 영향을 받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가 죽은 후, 콘스탄티누스는 ''기억 말살''을 당했다. 콘스탄스는 사망 직후 콘스탄티누스의 행위를 폐지하는 법을 발표했으며, 사망한 황제를 "공공의 적이자 우리 자신의 적"으로 낙인찍었다. 수년 후, 리바니우스가 콘스탄스와 콘스탄티우스에 대한 찬사를 바쳤을 때, 콘스탄티누스는 마치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이야기에서 완전히 제외되었다.

콘스탄티누스 2세는 아퀼레이아 근처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사로잡혀 살해되었으며 치세는 불과 3년이 채 되지 않았다. 콘스탄스 1세는 전투 자체에는 직접 참전하지 않았고, 4월 9일에 형 콘스탄티누스 2세의 죽음을 알게 되었다. 이로 보아 콘스탄티누스 2세는 340년 4월 9일 이전에 살해되었으며, 사망 당시 연령은 20대 초반에서 20대 중반으로 추정된다. 자손은 남기지 않았다.

3. 계보 조작 의혹

로마 황제 열전에 따르면, 콘스탄티누스 2세의 조부 콘스탄티우스 1세는 다르다니아 출신 귀족 에우트로피우스와 황제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 및 황제 퀸틸루스의 조카 클라우디아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 그러나 많은 역사가들은 이 계보가 콘스탄티누스 2세에 의해 조작된 것으로, 지위가 높은 두 사람의 후손으로 보이고 싶어 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4. 친모 및 출생년도에 대한 이설

후기 로마 제국의 인명 사전은 콘스탄티누스 2세가 317년 2월에 태어났다고 추정하며, 콘스탄티우스 2세가 9개월도 채 안 되어 태어났기 때문에 콘스탄티누스 2세가 파우스타의 아들이 아니라고 보았다.[3] 그러나 콘스탄티누스는 317년 3월 1일 공식 선포 전에 이미 아버지의 주화에 카이사르로 표기되었으므로 317년 2월에 태어났을 리가 없다.[4] 콘스탄티누스 2세가 파우스타의 아들이라는 증거로는 그를 명확히 그렇게 묘사하는 비문과 율리아누스가 파우스타를 "많은 황제"의 어머니라고 부른 점 등이 있다.

콘스탄티누스 2세의 친모가 파우스타가 아니라 친부의 첩이었던 여성이라는 설도 있다. 이 경우 콘스탄티누스 2세는 사생아가 된다. 아버지의 전처 미넬비나를 친모로, 크리스푸스의 동복 동생으로 보는 문헌도 있으나, 역사가들 사이에서는 부정적이다. 어느 쪽이든 이 두 설을 채택할 경우, 콘스탄티우스 2세와 콘스탄스 1세는 이복 동생이 된다.

콘스탄티누스 2세의 출생년도에 대해서는 317년 2월 설 외에도 316년 2월(24세 사망), 316년 여름(8월) (23세 사망), 314년 3월(25세 또는 26세 사망) 등 여러 설이 있다. 특히 317년 2월 설은 콘스탄티누스 2세의 동생 콘스탄티우스 2세가 317년 8월 7일에 태어났기 때문에 파우스타가 친모라는 점에 의문을 제기한다.

참조

[1] 웹사이트 LSA-559 (Fittschen, K. and P. Zanker) http://laststatues.c[...]
[2] 서적 The Imperial Families of Ancient Rome Fonthill Media 2019
[3] 간행물 Constantine II (337–340 A.D.) http://www.roman-emp[...] 1998-05-02
[4] 간행물 Constantine II – Roman Emperor https://www.britanni[...]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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