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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루스의 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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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키루스의 무덤은 아케메네스 제국의 창시자인 키루스 2세의 묘소이다. 이 무덤은 파사르가데 왕궁 정원 유적지 남쪽에 위치하며, 황백색 석회암으로 지어졌다. 무덤은 사각형 플랫폼 위에 6개의 계단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박공 지붕이 있는 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무덤의 건축 양식 기원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존재하며, 메소포타미아 또는 엘람 지구라트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키루스의 무덤은 이슬람 정복 이후 이슬람 성지로 바뀌었으며, 19세기 초에 키루스의 무덤으로 확인되었다. 현재 이란에서는 키루스 대왕을 기념하는 날이 있으며, 이란인들은 키루스 대왕을 이란과 페르시아 제국의 창시자로 존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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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루스의 무덤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키루스 대왕의 무덤
키루스 대왕의 무덤
위치파사르가드, 이란
건축 시기기원전 6세기
건축 양식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왕조)
건축 목적키루스 대왕을 위해 건설됨

2. 생애와 업적

키루스 2세는 기원전 6세기에 활동한 아케메네스 제국의 창건자이다. 그는 메디아 왕국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켜 페르시아 제국을 세웠다.[20] 이 반란은 히르바 전투, 페르시아 국경 전투, 파사르가다에 전투 등을 포함한다.[20]

2. 1. 페르시아 반란과 제국 건설

키루스 2세는 메디아 왕국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은 페르시아 반란으로 알려져 있으며, 히르바 전투, 페르시아 국경 전투, 파사르가다에 전투 등 주요 전투를 포함한다. 이 반란의 결과, 키루스 2세는 아케메네스 제국을 건설하였다.[20]

2. 2. 주요 정복 전쟁

죄송합니다. 주어진 원본 소스에는 '키루스 2세의 주요 정복 전쟁'에 대한 내용이 없습니다. 원본 소스는 키루스 무덤에 대한 묘사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방문에 대한 내용만 담고 있습니다. 따라서 해당 섹션 제목에 맞는 내용을 작성할 수 없습니다.

3. 키루스 원통과 통치 이념

키루스 실린더 모양의 케이크와 파사르가데에 있는 키루스 무덤 모양의 케이크.


키루스 대왕의 날(페르시아어: روز کوروش بزرگ|ruz-e kuroš-e bozorgfa), 또는 간단히 키루스 데이(페르시아어: روز کوروش|ruz-e kurošfa)는 이란에서 매년 10월 29일(이란 달력의 아반 7일)에 키루스 대왕을 기념하기 위해 열리는 비공식 공휴일이다. 이는 키루스가 바빌론에 입성한 날을 기념하는 날이다. 키루스는 아케메네스 제국(최초의 페르시아 제국)의 창시자이다.[25]

4. 키루스의 무덤

키루스 대왕의 무덤은 페르시아의 이슬람 정복 이후 사산 제국이 멸망하면서, 침략해오는 아랍 군대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술레이만의 어머니의 무덤'' (술레이만 이븐 압드 알-말리크 또는 솔로몬의 어머니 밧세바를 지칭)으로 불렸다.[6] 이렇게 이름이 바뀌면서 이란 역사에서 이슬람 성지로 여겨지게 되었다.

이 무덤을 처음 방문한 유럽인은 베네치아의 여행가 조사팟 바르바로였고, 그 다음은 요한 알브레히트 데 만델슬로였다.[6] 19세기 초, 제임스 저스티니언 모리에(1812년)와 로버트 커 포터(1821년)는 이 무덤을 키루스 대왕의 무덤으로 처음 확인했다.[7]

1811년 제임스 저스티니언 모리에가 출판한 이 무덤의 최초 현대 묘사, 제목은 "마드레 술레이만의 무덤"이었다.


모리에는 무덤에 대해 "매우 특이한 형태의 건물로, 그 지역 사람들은 종종 그것을 디비스, 즉 악마의 궁전이라고 부른다. ... 방문객들의 경외심을 증명하는 비문이 새겨져 있지만, 고대 페르시아 또는 더 오래된 아랍 문자의 흔적은 전혀 없다. ...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그것을 솔로몬의 어머니의 기념물로 여기며, ... 알리의 후손인 14대 칼리프 샤 솔레이만이다. 그러나 이 추측은 밧세바의 기념물이라는 것보다 더 그럴듯하지만, ... 만족스럽지 않다."라고 묘사했다.[8]

모리에는 아리아누스의 묘사를 바탕으로 이 무덤이 키루스의 무덤일 수 있다고 제안하면서, 비문과 이 없는 점, 아리아누스가 묘사한 "아치형"과 대조되는 삼각형 지붕 등 유사점과 차이점을 언급했다.

키루스 대왕의 무덤(파사르가데), 축제가 시작된 곳


키루스의 무덤은 1972년 페르시아 제국 2,500주년 기념 행사 준비와 2002년에서 2009년, 두 차례에 걸쳐 보수되었다.

메흐르 뉴스 에이전시(Mehr News Agency)에 따르면, 두 번째 보수 공사 당시 일부 문화 유산 전문가들은 무덤 지붕이 복원 과정에서 심각하게 손상되었다고 지적했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복원자는 실험적으로 복원을 배웠으며, 과학적 또는 대학교육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페르세폴리스에서 이탈리아 전문가 그룹이 떠난 후, 그가 키루스 무덤 복원 책임을 맡았으며, 복원 과정에서 실수를 저질렀고 그중 대부분이 무덤 지붕 훼손과 관련이 있다고 했다. 문화 유산 기구의 또 다른 전문가는 "만약 무덤 지붕 복원이 올바른 과학적 방법에 따라 이루어졌다면, 최소 2년 더 걸려야 완료되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키루스 무덤과 같은 건축물은 이란이나 해외에서 건설되기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며, 이후 유사한 구조물들이 건설되었다.[26] 구르에 도흐타르는 부셰르 주, 다슈테스탄 군 중앙 지구에 있는 아케메네스 제국 시대의 역사적 기념물 중 하나로, 키루스 무덤과 매우 유사하다. 알리레자 샤푸르 샤흐바지는 이 기념물이 키루스 (소)의 무덤일 수 있다고 제안한다.[27]

4. 1. 무덤의 위치와 구조

키루스 대왕의 무덤은 파사르가데 왕궁 정원 유적지 남쪽에 있으며, 시반드 채석장에서 가져온 황백색 석회암으로 지어졌다. 2500년 동안 자연적, 인위적 요인에 견뎌 왔으며, 파사르가데 평원에 여전히 서 있다. 무덤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6개의 석조 계단 플랫폼과 여섯 번째 계단 위에 박공 지붕이 있는 방이다.[9]

건물의 총 높이는 11m가 조금 넘는다. 첫 번째 플랫폼은 높이가 165cm이지만, 원래 약 60cm는 절단되지 않은 채 숨겨져 있었다. 두 번째 및 세 번째 계단은 높이가 105cm이고, 네 번째, 다섯 번째, 여섯 번째 계단은 각각 높이가 57.5cm이다. 플랫폼 너비는 0.5m이고, 무덤 방의 기초를 형성하는 여섯 번째 플랫폼 면적은 약 6.40m x 5.35m이다.[10]

무덤 방의 길이는 3.17m, 너비는 2.11m, 높이는 2.11m이다. 벽은 최대 1.5m 두께이며, 잘 다듬어진 돌 4줄로 만들어졌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줄은 세 번째와 네 번째 줄보다 높고, 북서쪽에는 미닫이식 이중 문이 있었으나 현재는 사라졌다. 현재 입구 너비는 78cm, 높이는 140cm이며, 문지방은 깊다. 작은 문지방의 두 모서리 각각에는 문 뒤꿈치를 위한 홈이 있고, 한쪽에는 16cm, 다른 쪽에는 10cm 깊이의 수평 홈이 있어, 문이 열릴 때 두 인방을 찾아 그 안에 놓을 수 있다.

무덤 방 정면 문 상단 삼각형 부분에는 매우 화려한 꽃 장식이 있었는데, 현재는 절반만 남아 있으며 매우 훼손된 상태이다. 데이비드 스트로나크가 1964년에 발견하여 설명하고 해석하기 전까지는 오랫동안 잊혀지거나 잘못 해석되었다.

무덤 지붕은 안쪽은 매끄럽고 단순하지만, 바깥쪽은 박공형이며 양쪽 경사면은 숫자 8 모양이다. 지붕은 두 개의 귀중한 돌로 만들어졌으며, 그 위에 6.25m x 3m 밑면과 0.5m 두께를 가진 피라미드형 돌이 있고, 그 위에 현재는 없는 지붕 위 돌이 있었다. 아케메네스 시대 전통에 따라 귀중한 돌을 가볍게 하고 더 잘 움직이기 위해 지붕 안쪽을 파냈다고 여겨진다. 포르사트 알-다울라 시라지는 안쪽 지붕과 바깥쪽 경사진 지붕 사이 빈 공간을 알아차리고 이를 시신 매장 장소로 간주했다.[11] 시라지가 언급한 이 중간 부분은 길이 4.75m, 너비 약 1m, 깊이 85cm인 빈 공간이다. 이 구덩이 내구성을 흔들지 않기 위해 지붕은 두 조각으로 만들어졌다.[12]

무덤 방 바닥은 두 개의 큰 석판으로 만들어졌다. 조지 커존 (1892년)에 따르면, 슬레이트는 파낸 큰 구멍보다 더 컸다. 아마도 그 아래에 무엇이 있는지 알아보기 위한 것으로 추정된다.[14]

능묘는 모르타르 없이 지어졌지만, 돌을 연결하는 금속 묶음은 거의 모두 파내고 제거되어 건물 강도를 손상시키는 불쾌한 딤플을 남겼다. 알리레자 샤푸르 샤흐바지가 이끄는 팀은 시반드 채석장에서 가져온 조각으로 가능한 한 이러한 도랑을 수리했다.[15]

19세기에 무덤을 방문하여 관찰 결과를 기록한 사람들은 키루스 대왕 무덤의 멀리 떨어진 기둥에 대해 언급했다.[16] 현재 이 기둥과 무덤 주변 다른 구조물은 흔적이 없다. 19세기 후반 파사르가데를 방문하여 파사르가데 건물에 대한 설명을 쓴 독일 학자이자 오리엔탈리스트인 프란츠 하인리히 바이스바흐는 키루스 대왕 무덤 주변 기둥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17]

>무덤의 세 면은 22개 기둥으로 둘러싸여 있다. 기둥을 둘러싼 이중 벽 흔적이 보인다. 서로 마주보는 각 열의 기둥 길이는 30m이고, 이 두 열과 수직인 기둥 열의 길이는 32m이다. 안쪽 벽에서 두 개 반대 열의 길이는 35m이고, 안쪽 벽에서 다른 부분 길이는 42m이다. 바깥쪽 벽이 처음부터 존재했는지에 대한 의문이 있다. 바깥쪽 벽은 거대한 벽으로, 그 위에 문 잔해가 놓여 있다.

바이스바흐보다 수십 년 전인 1818년에 무덤을 방문한 커 포터는 기둥 상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18]

>24개 둥근 기둥 기단으로 정의된 넓은 지역이 정사각형처럼 건물을 둘러싸고 있다. 각 기둥 직경은 약 0.91m 약 7.62cm이다. 정사각형 각 면은 6개 기둥으로 완성되며, 각 기둥은 측면 기둥에서 약 4.27m 떨어져 있다. 17개 기둥이 여전히 서 있지만, 그것들은 쓰레기로 둘러싸여 있고, 진흙 벽으로 의도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건축 양식 기원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었다. 이러한 견해는 소아시아의 그리스 기원, 지중해, 이집트, 엘람, 그리고 원래의 이란인을 포함하여 광범위하다. B. 파라바시는 키루스 대왕 무덤인 크르프쉬타이 덮개에 대해 썼는데, 리야야니 무덤도 마찬가지로 덮여 있으며, 이는 전통에 따라 아케메네스 왕조 첫 번째 왕의 무덤으로 이어지며, 이란 북부 바란크히즈 지역에서 통상적으로 만들어졌다.[19] 키루스 무덤과 같은 건축물은 이란이나 해외에서 건설되기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며, 이후 유사한 구조물들이 건설되었다.[26]

구르에 도흐타르는 부셰르 주, 다슈테스탄 군 중앙 지구에 있으며, 키루스 무덤과 매우 유사한 아케메네스 제국 시대 역사적 기념물 중 하나이다. 알리레자 샤푸르 샤흐바지는 이 기념물이 키루스 (소)의 무덤일 수 있다고 제안한다.[27]

4. 2. 무덤의 발견과 보존

이 무덤은 페르시아의 이슬람 정복과 그 이후 사산 제국의 멸망 이후 침략하는 아랍 군대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술레이만의 어머니의 무덤'' (칼리프 술레이만 이븐 압드 알-말리크 또는 성경의 밧세바, 솔로몬의 어머니를 지칭)으로 이름이 바뀌었다.[6] 이란의 역사에서 이슬람 성지로 바뀌었다. 이 무덤을 처음 방문한 유럽인은 베네치아 여행가 조사팟 바르바로였으며, 그 다음은 요한 알브레히트 데 만델슬로였다.[6] 19세기 초, 1812년 제임스 저스티니언 모리에와 1821년 로버트 커 포터가 이 무덤을 키루스의 무덤으로 처음 확인하였다.[7]

모리에는 무덤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 [그것]은 매우 특이한 형태의 건물로, 그 지역 사람들은 종종 그것을 디비스, 즉 악마의 궁전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7개의 층으로 피라미드 형태로 솟아 있는 대리석의 커다란 블록으로 된 사각형 기단 위에 놓여 있다... 기념물 자체의 모든 부분에는 방문객들의 경외심을 증명하는 비문이 새겨져 있지만, 고대 페르시아 또는 심지어 더 오래된 아랍 문자의 흔적은 전혀 없다. 열쇠는 여성들이 가지고 있으며, 여성들만 들어갈 수 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그것을 솔로몬의 어머니의 기념물로 여기며, 여전히 그 이름과 관련된 효험이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광견병에 물린 사람이 찾는 어떤 물을 그곳 근처에 가리키며, 30일 이내에 마시면 상처의 악영향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동양 설화에서 놀라운 일은 거의 모두 성경의 솔로몬과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이 무덤이 세워졌다고 하는 왕의 어머니는 덜 믿을 만하며, (시라즈의 카르멜회 수도사들이 만델슬로에게 제안한 것처럼) 알리의 후손인 14대 칼리프 샤 솔레이만이다. 그러나 이 추측은 밧세바의 기념물이라는 것보다 더 그럴듯하지만, 내가 페르시아, 소아시아 또는 터키에서 본 적이 있는 모든 마호메트교 성인의 무덤과는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만족스럽지 않다.[8]

모리에는 아리아누스의 묘사를 바탕으로 이 무덤이 키루스의 무덤일 수 있다고 제안하며, 비문의 부재, 의 부재, 아리아누스의 "아치형" 묘사와 대조되는 삼각형 지붕 등 유사점과 차이점을 언급했다.

> 만약 이 장소의 위치가 파사르가다이의 위치와 일치하고 이 구조물의 형태가 그 도시 근처의 키루스의 무덤에 대한 묘사와 일치했다면, 나는 이 건물이 그렇게 유명한 기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 무덤은 숲 속에 세워졌고, 돌로 덮인 작은 건물이었으며, 입구는 매우 좁아서 가장 마른 사람도 통과하기 어려웠다. 그것은 단일 돌로 된 사각형 기단 위에 놓여 있었고, "필멸의 존재들이여, 나는 페르시아 왕국의 창시자이자 아시아의 지배자인 캄비세스의 아들 키루스이니, 이 기념물을 부러워하지 말라"라는 유명한 비문이 새겨져 있었다. 메스제드 마드레 술레이만 주변의 평원이 큰 도시의 부지였다는 것은 그 평원에 흩어져 있는 유적을 통해 증명되며, 이 도시가 페르세폴리스와 같은 일반적인 고대 시대였다는 것은 두 곳의 유적에 있는 비문에 유사한 문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통해 추론할 수 있지만, 이 특정 건물에는 동시대의 증거가 나타나지 않는다. 숲은 현대 페르시아에서는 자연스럽게 사라졌을 것이고, 구조물은 크기가 일치하며, 내가 방문한 구조물의 삼각형 지붕은 진정한 반원형 아치가 아마 알려지지 않았을 시대에는 아치형이라고 불렸을 것이다. 문은 매우 좁아서, 시도할 수 있었다면, 나는 거의 통과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열쇠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안에 있는 유일한 물건이 아리아누스가 묘사한 "단일 조각의 기단"일 수 있는 거대한 돌이라고 확언했다. 그러나 그는 다른 사람의 설명을 반복하고 있었기 때문에, 만약 차이가 있다면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페르세폴리스의 많은 건물들이 한때 거대한 블록처럼 보였을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현재의 구조물도 한때 비슷한 모습을 가졌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키루스가 거대한 돌 위에 고정함으로써 숙고했던 그의 기념물의 영원함은 이 건물의 건설을 통해서도 똑같이 달성될 것이며, 이 건물은 수천 년의 세월을 견뎌낼 운명인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2,400년이 지난 지금, 메스제드 마드레 술레이만에 비문이 없다는 것은 키루스의 무덤과의 동일성에 대한 결정적인 증거가 되지 않을 것이다.[8]

키루스의 무덤은 1972년 페르시아 제국 2,500주년 기념 행사 준비와 2002년에서 2009년, 두 차례에 걸쳐 보수되었다.

메흐르 뉴스 에이전시(Mehr News Agency)에 따르면, 두 번째 보수 공사 당시 일부 문화 유산 전문가들은 무덤의 지붕이 복원 과정에서 심각하게 손상되었다고 지적했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복원자는 실험적으로 복원을 배웠으며, 이 분야에 대한 과학적 또는 대학교육을 받지 못했다. 페르세폴리스에서 이탈리아 전문가 그룹이 떠난 후, 그가 키루스 무덤의 복원 책임을 맡았으며, 복원 과정에서 실수를 저질렀고 그중 대부분이 무덤 지붕의 훼손과 관련이 있다고 했다. 문화 유산 기구의 또 다른 전문가는 메흐르 기자에게 "만약 무덤 지붕의 복원이 올바른 과학적 방법에 따라 이루어졌다면, 최소 2년 더 걸려야 완료되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4. 3. 무덤의 역사적, 문화적 의미

이 무덤은 페르시아의 이슬람 정복과 그 이후 사산 제국의 멸망 이후, 침략하는 아랍 군대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술레이만의 어머니의 무덤'' (칼리프 술레이만 이븐 압드 알-말리크 또는 성경의 밧세바, 솔로몬의 어머니를 지칭)으로 이름이 바뀌었다.[6] 이는 이란의 역사에서 이슬람 성지로의 변화를 의미한다. 이 무덤을 처음 방문한 유럽인은 베네치아 여행가 조사팟 바르바로였으며, 그 다음은 요한 알브레히트 데 만델슬로였다.[6]

이 무덤은 19세기 초, 1812년 제임스 저스티니언 모리에와 1821년 로버트 커 포터에 의해 키루스의 무덤으로 처음 확인되었다.[7] 모리에는 무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그것]은 매우 특이한 형태의 건물로, 그 지역 사람들은 종종 그것을 디비스, 즉 악마의 궁전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7개의 층으로 피라미드 형태로 솟아 있는 대리석의 커다란 블록으로 된 사각형 기단 위에 놓여 있다... 기념물 자체의 모든 부분에는 방문객들의 경외심을 증명하는 비문이 새겨져 있지만, 고대 페르시아 또는 심지어 더 오래된 아랍 문자의 흔적은 전혀 없다. 열쇠는 여성들이 가지고 있으며, 여성들만 들어갈 수 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그것을 솔로몬의 어머니의 기념물로 여기며, 여전히 그 이름과 관련된 효험이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광견병에 물린 사람이 찾는 어떤 물을 그곳 근처에 가리키며, 30일 이내에 마시면 상처의 악영향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동양 설화에서 놀라운 일은 거의 모두 성경의 솔로몬과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이 무덤이 세워졌다고 하는 왕의 어머니는 덜 믿을 만하며, (시라즈의 카르멜회 수도사들이 만델슬로에게 제안한 것처럼) 알리의 후손인 14대 칼리프 샤 솔레이만이다. 그러나 이 추측은 밧세바의 기념물이라는 것보다 더 그럴듯하지만, 내가 페르시아, 소아시아 또는 터키에서 본 적이 있는 모든 마호메트교 성인의 무덤과는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만족스럽지 않다."영어[8]

모리에는 아리아누스의 묘사를 바탕으로 이 무덤이 키루스의 무덤일 수 있다고 제안하며, 비문의 부재, 의 부재, 아리아누스의 "아치형" 묘사와 대조되는 삼각형 지붕 등 유사점과 차이점을 언급했다.

"만약 이 장소의 위치가 파사르가다이의 위치와 일치하고 이 구조물의 형태가 그 도시 근처의 키루스의 무덤에 대한 묘사와 일치했다면, 나는 이 건물이 그렇게 유명한 기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 무덤은 숲 속에 세워졌고, 돌로 덮인 작은 건물이었으며, 입구는 매우 좁아서 가장 마른 사람도 통과하기 어려웠다. 그것은 단일 돌로 된 사각형 기단 위에 놓여 있었고, "필멸의 존재들이여, 나는 페르시아 왕국의 창시자이자 아시아의 지배자인 캄비세스의 아들 키루스이니, 이 기념물을 부러워하지 말라"라는 유명한 비문이 새겨져 있었다. 메스제드 마드레 술레이만 주변의 평원이 큰 도시의 부지였다는 것은 그 평원에 흩어져 있는 유적을 통해 증명되며, 이 도시가 페르세폴리스와 같은 일반적인 고대 시대였다는 것은 두 곳의 유적에 있는 비문에 유사한 문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통해 추론할 수 있지만, 이 특정 건물에는 동시대의 증거가 나타나지 않는다. 숲은 현대 페르시아에서는 자연스럽게 사라졌을 것이고, 구조물은 크기가 일치하며, 내가 방문한 구조물의 삼각형 지붕은 진정한 반원형 아치가 아마 알려지지 않았을 시대에는 아치형이라고 불렸을 것이다. 문은 매우 좁아서, 시도할 수 있었다면, 나는 거의 통과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열쇠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안에 있는 유일한 물건이 아리아누스가 묘사한 "단일 조각의 기단"일 수 있는 거대한 돌이라고 확언했다. 그러나 그는 다른 사람의 설명을 반복하고 있었기 때문에, 만약 차이가 있다면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페르세폴리스의 많은 건물들이 한때 거대한 블록처럼 보였을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현재의 구조물도 한때 비슷한 모습을 가졌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키루스가 거대한 돌 위에 고정함으로써 숙고했던 그의 기념물의 영원함은 이 건물의 건설을 통해서도 똑같이 달성될 것이며, 이 건물은 수천 년의 세월을 견뎌낼 운명인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2,400년이 지난 지금, 메스제드 마드레 술레이만에 비문이 없다는 것은 키루스의 무덤과의 동일성에 대한 결정적인 증거가 되지 않을 것이다."영어[8]

키루스의 무덤과 같은 건축물은 이란이나 해외에서 건설되기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며, 이후 유사한 구조물들이 건설되었다.[26] 구르에 도흐타르는 부셰르 주, 다슈테스탄 군의 중앙 지구에 위치한 아케메네스 제국 시대의 역사적 기념물 중 하나로, 키루스의 무덤과 매우 유사하다. 알리레자 샤푸르 샤흐바지는 이 기념물이 키루스 (소)의 무덤일 수 있다고 제안한다.[27]

또한, 키루스의 무덤과 매우 유사한 건물이 사르디스의 타슈 쿨레에 있는데, 이는 리디아가 아케메네스 제국의 사트라프였을 때 지어졌으며, 아마도 위대한 페르시아인 또는 리디아인을 위한 것이었을 것이다.

5. 키루스 2세에 대한 평가와 유산

키루스 2세는 고대 페르시아 제국의 창시자로,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보여준 관용과 인권 존중 정책으로 인해 역사적으로 높이 평가받는다. 그는 정복한 민족들의 문화와 종교를 존중하고, 바빌론 유수와 같은 사건에서 억압받던 사람들을 해방시키는 등 인도적인 통치 방식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그의 정책은 키루스 실린더에 기록되어 있으며, 이는 인류 최초의 인권 선언문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키루스 2세의 유산은 현대에도 이어져, 그의 관용 정신과 통합 정책은 다양한 문화와 민족이 공존하는 현대 사회에 중요한 교훈을 준다.

5. 1. 현대 이란에서의 키루스 2세



키루스 대왕의 날(페르시아어: روز کوروش بزرگ|ruz-e kuroš-e bozorgfa), 또는 간단히 키루스 데이(페르시아어: روز کوروش|ruz-e kurošfa)는 이란에서 매년 10월 29일(이란 달력의 아반 7일)에 키루스 대왕을 기념하기 위해 열리는 비공식 공휴일이다.[25] 이는 키루스가 바빌론에 입성한 날을 기념하는 날이다. 키루스는 아케메네스 제국으로도 알려진 최초의 페르시아 제국의 창시자이다.[25]

노루즈(페르시아 새해) 기간 동안, 이란 전역에서 모인 이란인들은 매년 키루스의 무덤 주변에서 기념 행사를 개최한다. 이란인들은 키루스 대왕을 이란과 페르시아 제국의 창시자로 존경한다.

6. 갤러리



복원 중인 키루스 무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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