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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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란의 역사는 선사 시대부터 시작되어 아리아인의 정착, 메디아 왕국과 아케메네스 제국 등 고대 제국의 흥망성쇠를 거쳤다. 이슬람 정복 이후 이란은 이슬람 문명의 중심지로 부상했으며, 셀주크, 몽골, 티무르 제국 등의 지배를 받았다. 16세기 사파비 왕조는 시아파 이슬람을 국교로 정하며 이란의 정체성을 확립했고, 아프샤르, 잔드, 카자르 왕조를 거쳐 20세기 초 팔레비 왕조가 수립되었다. 1979년 이슬람 혁명으로 이슬람 공화국이 수립된 이후, 이란은 이란-이라크 전쟁, 핵 문제, 국제적 긴장 등 다양한 도전에 직면했으며, 현재까지 중동 지역의 중요한 국가로 존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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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파비 왕조는 1501년부터 1736년까지 이란을 통치하며 시아파 이슬람교 십이 이맘파를 국교로 삼아 이란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기여했으나, 퀴즐바시의 지지를 받아 성장하고 압바스 1세 시대에 전성기를 맞이한 후 쇠퇴하여 아프샤르 왕조의 나디르 샤에 의해 멸망했다.
이란의 역사 | |
---|---|
역사 개요 | |
국가 이름 | 이란 (Īrān) |
페르시아어 | ایران |
역사적 이름 | 페르시아 |
어원 | "아리아인의 땅"을 의미하는 "에란 샤흐르" (Ērān Shahr)에서 유래 |
선사 시대 | |
바라도스티안 문화 | 기원전 36,000–18,000년경 |
자르지안 문화 | 기원전 20,000–10,000년경 |
슐라베리-쇼무 문화 | 기원전 6000–5000년경 |
자얀데 강 문화 | 기원전 6천년기 |
달마 문화 | 기원전 5천년기 |
고대 시대 | |
쿠라-아락세스 문화 | 기원전 3400–2000년 |
헬만드 문화/지로프트 문화 | 기원전 3300–2200년경 |
원시 엘람 | 기원전 3200–2700년 |
룰루비 왕국/자무아 | 기원전 3100-675년경 |
엘람 | 기원전 2700–539년 |
마르하시 | 기원전 2550-2020년경 |
박트리아-마르기아나 고고학 복합체/옥수스 문명 | 기원전 2400–1700년경 |
아카드 제국 | 기원전 2400–2150년 |
카사이트 | 기원전 1500–1155년경 |
아베스타 시대 | 기원전 1500–500년경 |
신아시리아 제국 | 기원전 911–609년 |
우라르투 | 기원전 860–590년 |
만나이 | 기원전 850–616년 |
지키르티 | 기원전 750-521년 |
사파르다 | 기원전 720-670년 |
제국 시대 | |
메디아 제국 | 기원전 678–550년 |
스키타이 왕국 | 기원전 652–625년 |
테이스피드/안샨 왕국 | 기원전 635–550년 |
신바빌로니아 제국 | 기원전 626–539년 |
소그디아 | 기원전 6세기경–서기 11세기 |
아케메네스 제국 | 기원전 550–330년 |
아르메니아 왕국 | 기원전 331년–서기 428년 |
아트로파테네 | 기원전 323년경–서기 226년 |
카파도키아 왕국 | 기원전 320년대–서기 17년 |
셀레우코스 제국 | 기원전 312–63년 |
폰투스 왕국 | 기원전 281–62년 |
프라타라카스 | 기원전 3세기–132년 |
파르티아 제국 | 기원전 247년–서기 224년 |
엘리마이스 | 기원전 147년–서기 224년 |
카라케네 | 기원전 141년–서기 222년 |
페르시스 왕국 | 기원전 132년–서기 224년 |
인도-파르티아 왕국 | 서기 19–224/5년 |
파라타라자스 | 125–300년 |
사산 제국 | 224–651년 |
자르미흐리드 | 6세기–785년 |
카린반드 왕조 | 550년대–11세기 |
중세 시대 | |
라시둔 칼리파조 | 632-661년 |
우마이야 칼리파조 | 661–750년 |
아바스 칼리파조 | 750–1258년 |
다부이드 왕조 | 642–760년 |
바반드 왕조 | 651–1349년 |
다마반드 마스무간 | 651–760년 |
파두스파니드 왕조 | 665–1598년 |
주스타니드 | 791 – 11세기 |
북부 이란 알리드 왕조 | 864 – 14세기 |
타히르 왕조 | 821–873년 |
사만 왕조 | 819–999년 |
사파르 왕조 | 861–1003년 |
구르 왕조 | 879년 이전 – 1215년 |
사지드 왕조 | 889–929년 |
살라르 왕조 | 919–1062년 |
지야르 왕조 | 930–1090년 |
바누 일야스/일야스 왕조 | 932–968년 |
부이 왕조 | 934–1062년 |
라와드 왕조 | 955–1070년 |
하산와이 왕조 | 959–1095년 |
가즈나비 왕조 | 977–1186년 |
아나즈 왕조 | 990/1–1117년 |
카쿠이 왕조 | 1008–1141년 |
시스탄 나스르 왕조 | 1029–1236년 |
샤반카라 | 1030–1355년 |
셀주크 제국 | 1037–1194년 |
호라즘 왕조 | 1077–1231년 |
엘디구즈 왕조 | 1135–1225년 |
야즈드 아타베그 | 1141–1319년 |
살구르 왕조 | 1148–1282년 |
하자라스피드 | 1155–1424년 |
피슈키니드 | 1155–1231년 |
호르시드 왕조 | 1184-1597년 |
쿠틀루그-칸 왕조 | 1223-1306년 |
미흐라반 왕조 | 1236–1537년 |
쿠르트 왕조 | 1244–1396년 |
일 칸국 | 1256–1335년 |
초반 왕조 | 1335–1357년 |
무자파르 왕조 | 1335–1393년 |
잘라이르 왕조 | 1337–1376년 |
사르바다르 | 1337–1376년 |
인주 왕조 | 1335–1357년 |
아프라시야브 왕조 | 1349–1504년 |
마라시 | 1359–1596년 |
티무르 제국 | 1370–1507년 |
카르-키야 왕조 | 1370년대–1592년 |
카라 코윤루 | 1406–1468년 |
아크 코윤루 | 1468–1508년 |
근세 시대 | |
사파비 제국 | 1501–1736년 |
호타크 왕조 | 1722–1729년 |
아프샤르 왕조 | 1736–1796년 |
잔드 왕조 | 1751–1794년 |
현대 시대 | |
카자르 왕조 | 1789–1925년 |
팔라비 왕조 | 1925–1979년 |
현대사 | |
이란 혁명 | 1979년 |
이란 임시 정부 | 1979년 |
이란 이슬람 공화국 | 1979년–현재 |
관련 항목 | |
국가명 | 이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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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원수 목록 | 국가 원수 |
경제사 | 경제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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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사 | 여성사 |
전쟁 목록 | 전쟁 |
2. 선사 시대
이란 고원에서는 약 10만 년 전 구석기 시대 중기부터 인류가 활동한 흔적이 발견된다. 약 1만 8천 년 전부터 1만 4천 년 전 사이에 정착 생활이 시작되었으며, 초기 주민들은 동굴 등에 거주하며 원시적인 토기와 석기를 사용했다. 이 지역은 밀을 중심으로 한 농경이 세계에서 가장 먼저 시작된 곳 중 하나로, 기원전 6000년경에는 고도로 발달한 농경 사회와 초기 도시 형태의 집단 거주지가 형성되었다. 자그로스 산맥에서 발견된 기원전 5000년경의 와인 병은 당시 생활상을 보여주는 유물 중 하나이다.
이란 선사 시대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유적인 테페 시알크에서는 기술 발전과 문화적 연속성을 엿볼 수 있다. 초기에는 나뭇가지 오두막에서 살았지만, 점차 흙을 이용한 건물을 짓고 채색 토기를 사용하는 등 기술이 발전했다. 그러나 채색 토기 양식 등에서 지역별 차이가 나타나 통일된 정치 세력은 아직 형성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기원전 3천년기에는 수사를 중심으로 한 남서부 지역이 인근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영향을 받았고, 북동부에서는 기원전 2천년기 전반에 박트리아-마르기아나 복합이라는 독자적인 도시 문화가 발달하는 등 지역별로 다양한 문화가 전개되었다. 일부 지역에서는 오래된 생활 방식이 비교적 오랫동안 유지되기도 했다.
2. 1. 구석기 시대
이란 고원에서는 아주 오래전부터 인류가 활동했으며, 고고학적으로는 약 10만 년 전의 구석기 시대 중기 이후 유적이 확인되고 있다.이란 문화유산 기구 자료 이란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고고학 유물은 카샤프루드와 간지 파르 유적으로, 중기 구석기 시대에 해당하는 기원전 10,000년 전으로 추정된다.[23] 이 시기에는 네안데르탈인이 만든 무스테리안 석기도 발견되었다.[24]중기 구석기 시대의 네안데르탈인 유물은 주로 자그로스 산맥 지역에서 많이 발견되며, 이란 중부의 코베, 쿤지, 비시툰 동굴, 탐타마, 와르와시, 야프테 동굴 등에서도 일부 확인되었다.[25] 1949년에는 칼턴 S. 쿤이 비시툰 동굴에서 네안데르탈인의 요골(팔뼈)을 발견하기도 했다.[26]
상위 구석기 시대와 후기 구석기 시대의 증거는 주로 케르만샤와 호람아바드의 동굴이 있는 자그로스 산맥과 피란샤르, 알보르즈 산맥, 이란 중부의 일부 유적에서 확인된다. 이 시대 사람들은 암각화를 남기기 시작했다.[27][28]
이 지역에 사람들이 정착하기 시작한 것은 약 1만 8천 년 전에서 1만 4천 년 전 사이로 여겨진다. 당시 사람들은 주로 숲으로 덮인 산기슭의 동굴에 살면서 원시적인 토기나 박편 석기를 사용했다. 동물의 뼈로 만든 골각기는 석기에 비해 많이 발견되지 않았다.
2. 2. 신석기 시대와 금석병용 시대
이란 고원에는 매우 오래된 시대부터 인류가 활동했으며, 고고학적으로 약 10만 년 전의 구석기 시대 중기 이후 유적이 확인되고 있다. 이 지역에서의 정착 생활은 약 1만 8천 년 전에서 1만 4천 년 전 사이에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주민들은 산림으로 덮인 산기슭의 동굴 등에 주로 거주하며 원시적인 토기와 박편 석기를 사용했다. 동물 뼈를 이용한 골각기는 상대적으로 적게 발견되었다.기원전 10,000년경 초가 골란과 같은 초기 농업 공동체[29][30]와 기원전 8000년경 초가 보노트 (엘람에서 가장 오래된 마을 중 하나)와 같은 정착지[31][32]가 이란 서부의 자그로스 산맥 지역에서 번성하기 시작했다.[33] 비슷한 시기에 이란 서부 간지 다레에서는 최초의 점토 용기와 사람 및 동물을 형상화한 테라코타 조각상이 제작되었다.[33] 케르만샤주 테페 사랍에서도 1만 년 전의 사람과 동물 조각상을 포함한 여러 고대 유물이 발견되었다.[34]
이란 남서부는 인류 최초의 주요 작물이 재배된 비옥한 초승달 지대의 일부였다. 이곳에는 수사 (기원전 4395년경 첫 정착 추정)[35]와 초가 미쉬 (기원전 6800년경)[36][37]와 같은 정착지가 있었다. 자그로스 산맥에서 발굴된 기원전 5000년경의 7,000년 된 와인 항아리(현재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박물관 소장)[38]는 이 지역의 오랜 농경 역사를 보여준다. 이란의 주요 신석기 시대 정착지로는 간지 다레와 가설적인 자얀데 강 문화가 언급된다.[39]
기원전 6000년경에는 상당히 고도화된 농경 사회가 형성되었으며, 도시의 원형이 되는 집단 거주지도 확인된다. 테페 시알크 유적은 이란 선사 시대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정보를 제공한다. 가장 오래된 지층에서는 나뭇가지로 만든 조악한 오두막 형태의 주거 흔적이 발견되었으나, 곧 흙을 사용한 건물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제토 기술도 발달하여 채색 토기가 사용되었고, 방추의 발견은 방직 기술의 존재를 시사한다. 기원전 4천년기에는 일광 건조 벽돌을 사용하고 회반죽을 칠한 집이 건설되었으며, 집 내부는 붉은 도료 등으로 장식되었다. 문양과 동물 도안을 사용한 질 좋은 채색 토기도 나타났다. 테페 시알크 유적의 벽돌과 토기는 이란 고원 주민들의 점진적인 기술 발전을 보여주며, 이는 문화적 단절 없이 장기간 발전이 이루어졌음을 시사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채색 토기의 도안이나 조형은 지역별로 통일성이 부족하여, 당시 이란 고원이 단일한 정치체를 이루지는 못했음을 보여준다.
이란 고원 중앙부와 달리, 수사를 중심으로 한 남서부에서는 기원전 3천년기에 인근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문화가 나타났다. 이 지역에서는 이란 고원의 전통적인 채색 토기가 사용되지 않았다.
2. 3. 청동기 시대

이란 고원에는 매우 오래된 시대부터 인류가 활동했으며, 고고학적으로 약 10만 년 전 구석기 시대 중기 이후의 유적이 확인된다. 이 지역의 정착은 약 1만 8천 년 전에서 1만 4천 년 전 사이에 시작된 것으로 보이며, 초기 주민들은 산림 지대 산기슭의 동굴 등에 거주하며 원시적인 토기와 박편 석기를 사용했다. 동물의 뼈를 사용한 골각기는 석기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게 발견되었다.
기후 변화에 따라 거주지가 이동하며 대규모 집락이 형성되었고, 이란 고원은 밀을 중심으로 한 농경이 가장 먼저 시작된 지역 중 하나로 여겨진다. 기원전 6000년경에는 상당히 발달한 농경 사회가 형성되었고, 도시의 초기 형태인 집주지도 확인된다. 자그로스 산맥에서는 기원전 5000년경의 와인 병이 발굴되었으며(현재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박물관에서 전시), 가장 오래된 집주지 흔적으로는 테페 시알크가 알려져 있다. 이 유적은 이란의 선사 시대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정보를 제공한다.
테페 시알크 유적의 가장 초기 층에서는 나뭇가지로 만든 조악한 오두막 형태의 주거 흔적이 발견되었지만, 곧 흙을 사용한 건물이 건설되기 시작했다. 제토 기술도 발달하여 채색 토기가 사용되었고, 방추도 발견되어 당시 기술 혁신의 흔적을 보여준다. 기원전 4천년기에는 일광 건조 벽돌을 사용한 집이 건설되었고 회반죽이 칠해졌으며, 집 내부에는 붉은 도료 등으로 장식이 이루어졌다는 사실도 확인되었다. 문양과 동물의 도안을 사용한 질 좋은 채색 토기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테페 시알크 유적에서 발견되는 벽돌과 토기는 이란 고원 사람들의 기술 진보를 잘 보여주며, 장기간 문화적인 단절이 없었음을 시사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채색 토기는 기술적으로는 발전했지만, 도안이나 조형적인 면에서는 각 지역 유적마다 통일성이 부족하여, 하나의 정치 세계로서의 모습은 아직 뚜렷하지 않았다.
이러한 특징은 주로 이란 고원 중앙부 지역에 해당하며, 수사를 중심으로 한 남서부 지역에서는 기원전 3천년기에 중앙부와 달리 인근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강한 영향을 받은 문화가 생겨났다. 이 지역에서는 이란 고원의 전통적인 채색 토기가 사용되지 않았다. 수사는 이란과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정착지 중 하나로, C14 연대 측정 결과 그 기원은 기원전 4395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35] 이는 수메르의 고대 도시 우루크가 건설된(기원전 4500년경) 직후의 시기이다. 고고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수사가 우루크의 확장으로 시작되어 메소포타미아 문화의 많은 측면을 통합했다고 본다.[42][43] 이후 수사는 기원전 4000년에 건국된 국가인 엘람의 수도가 되었다.[35]
이란 북서부 지역의 일부는 코카서스와 아나톨리아의 인접 지역까지 뻗어 있던 쿠라-아락세스 문화(기원전 3400년경 ~ 기원전 2000년경)의 일부였다.[40][41] 이란 고원 전역에는 기원전 4천년기에 고대 문화와 도시 정착지의 존재를 시사하는 수십 개의 선사 시대 유적지가 있다.[36]
이란 고원에서 가장 초기의 문명 중 하나는 케르만 주의 이란 남동부에 위치한 지프트 문화였다. 이 지역은 중동에서 유물이 가장 풍부한 고고학 유적지 중 하나이다. 지프트에서 진행된 고고학 발굴을 통해 기원전 4천년기에 속하는 여러 유물이 발견되었다.[44] 동물, 신화적 인물, 건축적 모티프가 새겨진 매우 독특한 조각으로 장식된 많은 양의 유물이 있다. 이 유물과 그 도상학은 독특한 것으로 여겨진다. 많은 유물이 회록색 연질석인 녹니석으로 만들어졌으며, 다른 유물은 구리, 청동, 테라코타, 심지어 청금석으로 만들어졌다. 최근 이 유적지에서 발굴된 유물은 메소포타미아의 비문보다 앞선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비문을 포함하고 있다.[45][46]
초기 철기 시대에 이란 민족이 등장하기 전에 이란 고원에는 수많은 다른 고대 문명의 기록이 있다. 초기 청동기 시대에는 도시 국가로의 도시화가 증가하고 근동에서 문자의 발명(우루크 시대)이 일어났다. 청동기 시대의 엘람은 초기에 문자를 사용했지만, 원시 엘람 문자는 아직 해독되지 않았으며, 엘람과 관련된 수메르의 기록은 희소하다.
한편, 현재 투르크메니스탄 남부에서 이란 북동부, 아프가니스탄 북부에 걸쳐 있는 지역에서는 기원전 2천년기 전반에 독자적인 도시 문화가 발달했다. 현재 이것은 박트리아-마르기아나 복합 등으로 불리고 있다. 그 구체적인 모습은 아직 알려지지 않았지만, 동부 이란의 역사를 생각하는 데 큰 의미를 갖는다. 또한, 극히 오래된 시대와 별반 다르지 않은 생활 양식이 오랫동안 지속되었던 지역도 있었다고 한다.
러시아의 역사학자 이고르 M. 디아코노프는 오늘날 이란의 주민들이 주로 비-인도유럽어족 집단의 후손이며, 더 구체적으로는 이란 고원의 이란 이전 주민의 후손이라고 말했다. "이란 고원의 토착민, 즉 유럽의 원시 인도유럽어족 부족이 아니라, 바로 이들이 현재 이란인들의 신체적 의미에서의 조상이다."[47]
2. 4. 초기 철기 시대


이란 고원에서는 매우 오래전부터 인류의 활동이 있었으며, 고고학적으로 약 10만 년 전의 구석기 시대 중기 이후 유적이 확인된다.유적 확인 자료 이 지역에서의 정착 생활은 약 1만 8천 년 전에서 1만 4천 년 전 사이에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주민들은 주로 산림으로 덮인 산기슭의 동굴에 거주하며 원시적인 토기와 박편 석기를 사용했다. 동물의 뼈로 만든 골각기는 석기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게 발견되었다.
기후 변화에 따라 거주지가 이동하면서 점차 큰 규모의 마을이 형성되었다. 이란 고원은 밀을 중심으로 한 농경이 가장 먼저 시작된 지역 중 하나로 여겨진다. 기원전 6000년경에는 상당히 발전된 농경 사회가 형성되었고, 도시의 초기 형태를 갖춘 집단 거주지도 확인된다. 자그로스 산맥에서 발굴된 기원전 5000년경의 와인 병(현재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박물관 소장펜실베이니아 대학교 박물관 전시 정보)은 당시 생활 모습을 보여주는 중요한 유물이다. 가장 오래된 집단 거주지 유적으로는 테페 시알크가 알려져 있으며, 이곳에서 이란 선사 시대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유물이 다수 발견되었다.
테페 시알크 유적의 가장 오래된 지층에서는 나뭇가지로 만든 단순한 오두막 형태의 주거 흔적이 발견되었으나, 곧 흙을 이용한 건물이 지어지기 시작했다. 제토 기술도 발달하여 채색 토기가 사용되었고, 방추가 발견되는 등 기술 혁신의 흔적이 뚜렷하다. 기원전 4천년기에는 일광 건조 벽돌로 집을 짓고 회반죽을 칠했으며, 집 내부는 붉은 도료 등으로 장식했던 것으로 보인다. 문양과 동물 그림이 그려진 양질의 채색 토기가 등장하는 등, 테페 시알크 유적의 벽돌과 토기는 이란 고원 주민들의 기술 발전을 잘 보여준다. 이는 이란 고원에서 문화적 단절 없이 오랜 기간 발전이 지속되었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채색 토기의 도안이나 형태는 지역마다 달라, 당시 통일된 정치 세력은 아직 형성되지 않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러한 특징은 주로 이란 고원 중앙부에서 나타나며, 수사를 중심으로 한 남서부 지역은 기원전 3천년기에 인접한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강한 영향을 받아 중앙부와 다른 문화를 형성했다. 이 지역에서는 이란 고원의 전통적인 채색 토기가 사용되지 않았다. 한편, 현재의 투르크메니스탄 남부에서 이란 북동부, 아프가니스탄 북부에 걸친 지역에서는 기원전 2천년기 전반에 박트리아-마르기아나 복합으로 불리는 독자적인 도시 문화가 발달했다. 그 구체적인 모습은 아직 연구 중이지만, 동부 이란 역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일부 지역에서는 매우 오래된 생활 방식이 오랫동안 유지되기도 했다.
신아시리아 제국이 부상하면서 이란 고원에 대한 기록이 좀 더 구체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다. 기원전 20세기 초부터 폰토스-카스피 스텝 지역의 부족들이 이란 고원으로 이동해 오기 시작했다. 이란 민족들이 이란 고원에 도착하면서 기존의 엘람인들은 제국의 여러 지역을 포기하고 엘람 본토, 즉 후제스탄과 그 인접 지역으로 이동하게 되었다.[49] 일부 학자들은 남부 이란인들이 고원에 살던 엘람 민족과 섞였을 가능성을 제기한다.[50]
기원전 1천년 중반에는 메디아, 페르시아인, 파르티아인들이 이란 고원에 정착했다. 메디아가 강력한 세력으로 부상하기 전까지 이들은 다른 근동 지역과 마찬가지로 아시리아의 지배를 받았다. 기원전 1천년 전반에는 현재 이란 아제르바이잔 지역의 일부가 우라르투 왕국에 편입되기도 했다.
3. 고대
이란 고원 남서부에서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문화적 영향을 강하게 받아 이란 지역 최초의 문명인 엘람이 성립되었다. 엘람은 고도로 발달한 국가 체제를 갖추었으며, 이란 지역 최초의 문자 기록을 남겼다. 기원전 2천년기 말기에는 아리아인(인도이란인으로도 불림)이 이란 고원에 정착하기 시작했으며, 이는 이후 이란 역사의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
3. 1. 메디아 왕국과 아케메네스 제국 (기원전 678년 ~ 기원전 330년)
이란고원에 인류가 정착한 것은 매우 오래된 일이며, 아리아인들은 여러 갈래로 나뉘어 이 지역에 영향을 미쳤다. 스키타이족, 메디아족, 이란족(페르시아인) 등이 모두 아리아인의 한 갈래이다. 초기 이란의 아리아인들은 당시 메소포타미아를 지배하던 수메르나 바빌로니아에 맞서 싸우는 용병으로 활동하기도 했으며, 점차 원주민을 밀어내고 고원을 장악하여 '이란'(아리아인의 땅)을 세웠다.
기원전 7세기 후반, 이란인의 일파인 메디아인들은 아시리아의 압박 속에서 점차 세력을 키워 독립을 쟁취했고 데오케스에 의해 통일되었다. 이는 이란인이 세운 최초의 왕조인 메디아 왕국 (기원전 708년경 ~ 기원전 550년)으로 이어졌으나, 강력한 중앙 집권 국가보다는 부족 연합체의 성격이 강했다. 기원전 612년, 데오케스의 손자인 키악사레스는 바빌로니아의 왕 나보폴라사르와 동맹을 맺고 아시리아의 수도 니네베를 함락시켜 신아시리아 제국을 멸망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53] 메디아는 이후 우라르투 왕국도 정복하며[54][55] 이란 지역을 기반으로 한 최초의 제국을 건설했다. 그러나 티그리스-유프라테스 유역의 '비옥한 초승달' 지역을 차지하기 위해 신 바빌로니아 왕국과 경쟁했으나 결국 패배했다.

메디아 왕국의 마지막 왕 아스티아게스의 외손자인 키루스 2세는 파르스 지방(고대 안샨)의 페르시아인 세력을 이끌고 기원전 550년경 반란을 일으켜 메디아를 정복하고 아케메네스 왕조 (기원전 550년 ~ 기원전 330년)를 창건했다. 키루스 2세는 이후 서쪽으로 리디아, 소아시아, 아르메니아를, 동쪽으로 힌두쿠시 산맥까지 세력을 확장했으며, 기원전 539년에는 신바빌로니아 제국마저 정복하여 메소포타미아를 포함한 광대한 제국을 건설했다. 그는 피정복민의 관습과 종교를 존중하는 관용 정책을 펼쳐 많은 이들에게 '해방자'로 여겨졌는데, 특히 바빌론 유수로 잡혀있던 유대인들을 해방시킨 일은 성경에도 '고레스 왕'으로 기록되어 있다. 키루스 2세는 이란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주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키루스 2세의 아들 캄비세스 2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고대 이집트를 정복(기원전 525년)하고 스스로 이집트 제27왕조의 파라오가 되었으나, 그가 이집트에 머무는 동안 본국에서 혼란이 발생했고 에티오피아 원정 실패 후 사망했다.
캄비세스 2세 사후의 혼란을 수습하고 왕위에 오른 다리우스 1세는 아케메네스 제국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그는 제국을 동쪽으로는 인더스강 유역, 서쪽으로는 트라키아와 마케도니아까지 확장하여 역사상 가장 거대한 제국을 건설했다. 다리우스 1세는 제국의 효율적인 통치를 위해 다양한 개혁을 단행했다. 수도 수사에서 서쪽 리디아의 사르디스까지 이어지는 왕의 길을 포함한 도로망을 정비하고 역참 제도를 운영하여 신속한 정보 전달 체계를 구축했다. 또한 제국을 20여 개의 행정 구역인 속주(사트라페이아)로 나누고, 각 속주에 총독(사트라프)과 함께 이들을 감시하는 '왕의 눈'과 '왕의 귀'라 불리는 감찰관을 파견하여 중앙 집권 체제를 강화했다. 다릭(금화)과 세켈(은화)을 통한 화폐 제도를 표준화했으며,[56] 지중해와 홍해를 잇는 운하(현대 수에즈 운하의 전신) 건설을 추진하기도 했다. 아케메네스 왕조는 다양한 민족과 문화를 포용하는 정책을 통해 최초의 초강대국으로 평가받으며,[58][59][60] 이 시기 조로아스터교 역시 중요한 종교로 자리 잡았다.
다리우스 1세는 유럽으로 세력을 확장하여 트라키아를 정복하고 마케도니아를 종속시켰다. 그러나 기원전 499년, 페르시아 지배 하의 이오니아 그리스 도시들이 아테네의 지원을 받아 반란을 일으키면서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이 시작되었다. 다리우스 1세는 두 차례에 걸쳐 그리스 본토 침공을 시도했으나, 1차 원정은 폭풍으로 실패했고 2차 원정에서는 마라톤 전투에서 패배했다.

다리우스 1세의 뒤를 이은 크세르크세스 1세는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여 재차 그리스 침공에 나섰다. 페르시아군은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승리하고 아테네를 두 차례나 점령하고 파괴하는 등[61][62] 초기에는 우세를 보였으나, 살라미스 해전과 플라타이아이 전투에서 그리스 연합군에게 결정적으로 패배했다. 이 패배로 페르시아는 그리스 본토에서 철수해야 했고, 유럽 내 영토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했다. 이후 수십 년간 델로스 동맹을 중심으로 한 그리스 도시들과의 산발적인 충돌이 이어졌고, 기원전 449년 칼리아스 평화 조약으로 전쟁은 공식적으로 종결되었다.
전쟁 패배 이후 아케메네스 제국은 점차 쇠퇴하기 시작했다. 다리우스 2세 사후인 기원전 404년에는 이집트가 독립했으며, 이후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 때(기원전 343년) 잠시 재정복하기는 했으나 제국의 힘은 약화되고 있었다. 말기에는 왕위 계승 분쟁이 끊이지 않았고, 속주의 반란이 빈번했으며, 군사력의 핵심이던 페르시아인 병사들이 몰락하고 용병에 의존하게 되는 등 내부적인 문제가 심화되었다.
결국 아케메네스 왕조는 외부의 침략으로 종말을 맞았다. 다리우스 3세의 통치 시기인 기원전 334년, 마케도니아 왕국의 알렉산드로스 3세(알렉산더 대왕)가 동방 원정을 시작했다. 다리우스 3세는 그라니쿠스 강 전투, 이소스 전투, 가우가멜라 전투에서 연이어 알렉산드로스에게 패배했고, 기원전 330년 부하에게 살해당하면서 아케메네스 제국은 멸망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아케메네스 왕조의 광대한 영토와 통치 기구를 그대로 계승했다.

'페르시아'와 '이란' 명칭'페르시아'라는 이름은 파르스 지방(고대 안샨)에 정착했던 페르시아인 부족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이 지역과 아케메네스 왕조를 '페르시스'라고 부른 데서 비롯되어, 이후 서양에서는 이란 고원에서 일어난 여러 제국과 그 주민을 통칭하는 이름으로 널리 사용되었다.
반면, '이란'이라는 이름은 이 지역에 정착한 아리아인들이 스스로를 "고귀한 사람들"이라는 의미의 "아일랴(아리아)"라고 칭한 데서 유래했다. 사산 왕조 시대 이후 "아리아인의 땅"을 의미하는 파르티아어 "아르얀"에서 파생된 파흘라비어의 "에이란" 혹은 "에이란샤흐르"라는 이름이 사용되었고, 이것이 현대 페르시아어 형태인 "이란"으로 이어졌다. 이란인들은 역사적으로 자신들의 땅을 '이란'으로 인식해왔다. 1935년 파흘라비 왕조의 레자 샤는 국제사회에 '이란'이라는 국호 사용을 공식 요청했으나, 이후 학술적, 역사적 논쟁을 거쳐 1959년부터는 '페르시아'와 '이란' 명칭을 상황에 따라 병용할 수 있게 되었다.
3. 2. 헬레니즘 시대 (기원전 312년 ~ 기원전 248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하카마니시 제국(아케메네스조 페르시아)을 정복했으나, 기원전 323년 바빌론에서 후계자 없이 사망했다. 그의 광대한 영토는 휘하 장군들에 의해 분할되었고(디아도코이 전쟁), 이 과정에서 이란 지역은 셀레우코스 1세의 통치하에 들어갔다. 셀레우코스 1세와 그의 후손들이 다스린 왕조를 셀레우코스 제국(기원전 312년 - 기원전 247년)이라고 부른다.알렉산드로스 시대부터 셀레우코스 제국 시대에 걸쳐, 이란 각지에는 그리스인과 마케도니아인에 의한 식민 도시가 다수 건설되었다. 셀레우코스 제국은 그리스식 폴리스(도시국가)나 군사 식민지인 카토이키아 건설을 추진했으며, 이를 거점으로 그리스 문화와 사회 제도가 확산되었다. 그리스어는 아람어와 함께 공용어의 지위를 가졌다. 이러한 문화적, 사회적 흐름을 '''헬레니즘'''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셀레우코스 제국의 식민 정책은 주로 시리아와 바빌로니아에 집중되었고, 이란 고원 동부에 대한 투자는 상대적으로 제한적이었다. 이러한 서방 중심 정책에 동방 지역의 사트라프(총독)들은 반발했다. 기원전 250년 전후로 박트리아의 사트라프 디오도토스 1세와 파르티아 및 소그디아나의 사트라프 안드라고라스가 연이어 독립을 선언했다.
디오도토스 1세는 그레코-박트리아 왕국을 세워 독립을 유지하는 데 성공했지만, 안드라고라스의 영토는 독립 직후 아르사케스 1세가 이끄는 파르니족에게 정복당했다. 파르니족은 중앙아시아의 유목민 부족 연합으로, 이란 계통 언어를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파르티아 지역에 정착하여 이후 파르티아인으로 불리게 되었으며, 이들이 세운 왕조가 아르사크 왕조(기원전 247년~)이다. 이는 셀레우코스 제국의 동방 지배력이 약화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3. 3. 파르티아 제국 (기원전 248년 ~ 기원후 224년)
파르티아 왕조(기원전 247년 ~ 기원후 224년)는 미트라다테스 2세(기원전 123년-기원전 87년) 치세 때 세력을 확장하여 인도와 아르메니아에 이르는 넓은 영토를 다스렸으며, 로마 공화정과 경쟁하였다. 실크로드를 통해 이란의 직물(페르시아 카펫)이 동서양으로 퍼져나갔다. 지배층은 조로아스터교를 믿었으나, 일반 백성들에게 널리 퍼지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파르티아 사회는 주변 국가들에 비해 신분 이동이 비교적 자유로운 개방적인 사회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파르티아인의 출신지인 파르타브(Parthav) 지방의 언어인 파흘라비어가 공용어로 사용되었다. 1979년 이란 혁명으로 무너진 팔라비 왕조는 이 파흘라비에서 이름을 따왔다.파르티아는 약 500년 가까이 지속되었으나, 뒤를 이은 사산 왕조가 의도적으로 이전 시대의 기록과 유산을 파괴하였기 때문에 역사 연구에 어려움이 있다. 파르티아(아르사케스 왕조) 통치 후기에는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심각한 내분이 반복되었으며, 로마 제국과의 전쟁으로 인해 메소포타미아와 같은 핵심 지역을 자주 빼앗기는 등 큰 타격을 입었다. 대표적인 예로 110년대 로마 황제 트라야누스의 파르티아 원정을 들 수 있다.
결국 파르티아는 이란 고원 서남부 파르스 지방에서 일어난 반란으로 멸망하였다. 208년경 파르스의 지배자 파파크가 반란을 일으켰으며, 비슷한 시기 파르티아 내부에서는 보로가세스 6세와 아르타바누스 4세 간의 내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파파크의 뒤를 이은 아르다시르 1세는 224년경 두 파르티아 왕을 차례로 격파하고 226년 새로운 사산 왕조를 건국하였다. 비록 왕조는 교체되었지만, 파르티아 시대의 많은 대귀족들은 사산 왕조 아래에서도 여전히 큰 힘을 유지했으며, 정치 기구, 문화, 사회 등 여러 면에서 아르사케스 왕조 시대의 연속성을 보였다.
3. 4. 사산 제국 (224년 ~ 651년)
파르티아 왕조를 무너뜨린 아르다시르 1세는 이란의 전설적인 영웅 사산의 후계자를 자처하며 사산 제국 (224년 ~ 651년)을 열었다. 아르다시르 1세는 집권 후 파르티아 말기의 혼란을 수습하고 지방 귀족 세력을 통제했으며, 전국을 12개 주로 나누어 중앙 집권 체제를 확립했다. 조로아스터교 신관의 아들이었던 그는 조로아스터교를 국교로 삼고 정교일치의 강력한 통치 체제를 추구했다. 그러나 그의 아들 샤푸르 1세는 종교에 지나치게 몰두하여 승려들에게 정치를 맡기는 실책을 범하기도 했다.폭군 나르세의 시대를 지나 제10대 왕으로 즉위한 샤푸르 2세는 '샤푸르 대왕'으로 불린다. 그는 어머니 뱃속에서 왕위에 올라 오랜 기간 섭정을 거쳤으며, 70년의 재위 기간 동안 주변국들을 복속시키고 승려들의 특권을 제한하며 왕권을 강화했다. 샤푸르 2세부터 바흐람 5세, 카바드 1세에 이르는 시기는 사산 제국의 전성기로 평가받는다. 이 시기 페르시아는 정치, 사회, 경제적으로 크게 부흥하여 훗날 아랍인들에게 정복되기 전까지 문화적 르네상스를 맞이했다.
사산 제국의 역사는 로마 제국과의 끊임없는 경쟁과 갈등으로 점철되었다. 양 제국 간 갈등의 주요 원인 중 하나는 아르메니아의 지배권을 둘러싼 문제였다. 이는 단순히 지역적 분쟁을 넘어 당대 양대 제국 간의 패권 다툼의 성격을 띠었다. 파르티아 시대에 비해 신분 이동이 제한적인 사회였으나, 기독교 신자들이 특별히 박해받지는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산 제국의 수도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크테시폰으로, 현재의 바그다드 근처에 위치했다. 당시 크테시폰은 인구 200만 명을 자랑하는 거대 도시였으나, 훗날 압바스 왕조의 2대 칼리프인 아부 자파르 알만수르가 바그다드를 건설하면서 파괴되었고, 그 건축 자재들은 바그다드 건설에 사용되었다.
한편, 사산 왕조는 이전 왕조인 파르티아의 유산을 조직적으로 파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로 인해 500년 가까이 존속했던 파르티아 왕조의 역사를 복원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
4. 중세
이란의 중세는 633년 이슬람 세력의 침공으로 사산 제국이 멸망하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이란은 정통 칼리프 시대, 우마이야 왕조, 압바스 왕조 등 아랍계 칼리프의 지배를 받게 되었으나, 고도로 발달했던 페르시아 문화와 행정 체계는 이슬람 문명에 깊숙이 스며들어 큰 영향을 미쳤다. 페르시아어는 공용어로서의 지위를 잃지 않았고, 많은 이란인들이 관료와 학자로서 이슬람 세계 발전에 기여했다.
9세기 이후 압바스 왕조의 힘이 약해지자, 호라산의 타히르 왕조, 시스탄의 사파르 왕조, 트란스옥시아나의 사만 왕조, 이란 중서부의 부와이흐 왕조 등 이란계 왕조들이 등장하여 반독립적인 세력을 형성했다. 특히 사만 왕조 시대에는 페르시아 문예 부흥이 일어나 페르도우시의 《샤나메》와 같은 걸작이 탄생하는 등 페르시아 문화가 다시 꽃피웠다.
11세기에는 중앙아시아에서 발흥한 튀르크족의 셀주크 왕조가 이란을 포함한 서아시아 대부분을 장악하며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셀주크 제국은 수니파 이슬람의 수호자를 자처하며 정치적 안정을 가져왔고, 페르시아인 관료들을 중용하여 페르시아 문화와 행정 시스템을 계승 발전시켰다. 이 시기 니잠 알 물크와 같은 재상들의 노력으로 학문과 예술이 크게 융성했다.
13세기 초, 칭기즈 칸이 이끄는 몽골 제국의 침입은 이란 역사에 큰 전환점을 가져왔다. 호라즘 제국이 멸망하고 이란 전역이 몽골의 지배하에 놓이면서 많은 도시가 파괴되고 문화적 손실을 겪었다. 칭기즈 칸의 손자 훌라구 칸이 세운 일 한국은 약 1세기 동안 이란을 통치했으나, 1335년 이후 내부 분열로 붕괴하며 다시 혼란기에 접어들었다.
일 한국 붕괴 후에는 칭기즈 칸의 후예를 자처한 티무르가 등장하여 광대한 티무르 제국을 건설했으나, 그의 사후 제국은 급격히 약화되었다. 이후 이란 서부에서는 투르크멘계 유목민들이 세운 흑양 왕조와 백양 왕조가 패권을 다투는 등 정치적 분열과 혼란이 계속되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1501년 사파비 왕조가 등장하여 이란을 재통일하고 근세 시대를 열게 된다.
4. 1. 이슬람 정복과 초기 이슬람 시대 (633년 ~ 10세기)
아랍족은 이란인에 비해 문화적으로 덜 발달한 사막의 유목 민족이었으나, 예언자 무함마드의 등장 이후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무함마드가 아라비아 반도를 통합한 뒤, 이슬람 군대는 가장 먼저 사산조 페르시아를 공격 목표로 삼았다. 무함마드 사후 초대 칼리프가 된 아부 바크르는 서쪽의 비잔티움 제국과 동쪽의 사산 제국을 향해 정복 전쟁을 개시했다.633년, 야즈데게르드 3세가 통치하던 시기, 제2대 칼리프 우마르 휘하의 무슬림 군대는 내전으로 약화된 이란을 침공했다. 당시 카렌 가문의 디나르 왕, 호라산의 카나랑 등 여러 이란 귀족과 가문들이 사산 왕조에 반기를 든 상태였다. 미흐란 가문은 바흐람 초빈과 샤흐르바라즈 같은 장군들을 배출하며 왕위를 노리기도 했으나, 아랍과의 전쟁 중에는 사산 왕조에 충성을 유지했다. 그러나 결국 미흐란 가문은 야즈데게르드 3세에게 반란을 일으킨 이스파흐부드한 가문의 파루크자드에게 배신당하고 패배했다. 650년 아랍 군대는 사산 제국의 수도 크테시폰을 점령했고, 이듬해 사산 군대를 크게 격파하며 이란 대부분을 장악했다. 야즈데게르드 3세는 651년 메르브에서 한 제분업자에게 피살될 때까지 도피 생활을 이어갔다.[72] 674년경 무슬림 세력은 대호라산(오늘날의 이란 호라산 지방, 아프가니스탄, 트란스옥시아나 일부 포함) 지역까지 정복을 완료했다.
페르시아의 이슬람 정복은 사산 제국의 멸망과 이란에서의 조로아스터교 쇠퇴를 가져왔다. 시간이 흐르면서 대다수 이란인들은 이슬람으로 개종했다. 특히 도시 거주민을 중심으로 개종이 빠르게 진행되었는데, 이는 조로아스터교가 지역적, 역사적으로 이슬람교와 유사한 속성을 지녔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그러나 이전 페르시아 문명의 많은 요소는 사라지지 않고 새로운 이슬람 정치 체제에 흡수되었다. 버나드 루이스는 이 사건에 대해 "어떤 이들은 참된 신앙의 도래, 무지와 이교 시대의 종말이라는 축복으로 보았고, 다른 이들은 굴욕적인 국가적 패배, 외국 침략자에 의한 국가의 정복과 예속으로 보았다. 물론, 둘 다 한 사람의 시각에 따라 유효하다"라고 평가했다.[73]
정통 칼리프 시대(650-661) 이후 이란은 우마이야 왕조(661-750)와 압바스 왕조(750-821)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우마이야 왕조는 사산 제국의 행정 및 궁정 관습 등 많은 페르시아 제도를 받아들였다. 아랍인 지방 총독들은 페르시아화된 아람인이나 페르시아 민족 출신인 경우가 많았으며, 7세기 말 아랍어가 공식 언어로 채택되기 전까지 페르시아어는 칼리프조의 공식 업무 언어 중 하나로 사용되었다.[74] 692년 수도 다마스쿠스에서 발행된 새로운 이슬람 동전 역시 초기에는 사산조 및 비잔틴 동전을 모방했으며, 동전에 새겨진 팔레비 문자는 점차 아랍 문자로 대체되었다.
하지만 우마이야 왕조 시대에 아랍 정복자들은 제국 전역의 피정복민에게 아랍어를 강요하기도 했다. 알-하지아지 이븐 유수프는 디완(관청)에서 페르시아어가 널리 쓰이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정복지의 공식 언어를 강압적으로 아랍어로 바꾸도록 명령했다.[75] 예를 들어, 알-비루니는 그의 저서 ''과거 세기의 흔적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쿠타이바 빈 무슬림이 알-하지아지 빈 유세프의 지휘 아래 군사 원정을 이끌고 호라즘으로 파견되어 두 번째로 정복했을 때, 그는 호라즘의 토착 언어를 쓰고 호라즘의 유산, 역사, 문화를 알고 있던 모든 사람들을 신속하게 살해했다. 그런 다음 그는 모든 조로아스터교 사제를 죽이고 그들의 책을 불태우고 낭비하여, 점차 문맹자만 남게 되었고, 그들은 글쓰기를 전혀 몰랐고, 따라서 그들의 역사는 대부분 잊혀졌다."[76]
또한 많은 역사가들은 우마이야 왕조가 짐미(비무슬림 피정복민)에게 높은 세금을 부과하고 이슬람 개종을 억제하는 정책을 폈다고 본다. 이는 아랍 무슬림 공동체의 재정적 이익을 우선시했기 때문으로 해석된다.[77] 7세기에 이슬람으로 개종한 페르시아인 등 비아랍인들은 마왈리(피보호 부족민)로 불리며, 우마이야 왕조 말기까지 지배층 아랍인들에게 차별받는 2등 시민 취급을 받았다. 당시 이슬람은 아랍 민족 정체성과 강하게 연결되어 있어, 비아랍인이 무슬림이 되려면 아랍 부족과 공식적인 연계(마왈리 관계)를 맺어야 했다.[77] 이러한 차별 정책은 비아랍 무슬림과 시아파 등 소수 집단의 불만을 키웠다.
한편, 이란 전역이 아랍의 완전한 통제 하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데일람 지역은 데일람인이, 타바리스탄은 다부이드 왕조와 파두스파니드 왕조가, 다마반드 산 지역은 다마반드의 마스무간이 통치하고 있었다. 아랍인들은 이 지역들을 여러 차례 침공했지만 험준한 지형 때문에 결정적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특히 다부이드 왕조의 파루칸 대왕(재위 712–728)은 아랍 장군 야지드 이븐 알-무할라브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내기도 했다.[78]
743년 우마이야 칼리프 히샴 이븐 압드 알-말리크가 사망하자 이슬람 세계는 내전에 휩싸였다. 마왈리들의 불만이 고조되는 가운데, 아부 무슬림은 압바스 가문에 의해 호라산으로 파견되어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메르브를 점령하고 우마이야 총독 나스르 이븐 사이야르를 몰아내며 호라산의 실질적인 통치자가 되었다. 750년, 아부 무슬림이 이끄는 압바스 군대는 자브 전투에서 우마이야 군대를 격파하고 수도 다마스쿠스를 점령하여 우마이야 왕조를 멸망시켰다. 이 아바스 혁명에는 우마이야 왕조의 차별 정책에 불만을 품은 이란계 마왈리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압바스 왕조는 수도를 다마스쿠스에서 바그다드로 옮기면서 이슬람 세계의 중심을 동쪽으로 이동시켰다. 이 시기 정치, 경제, 문화 등 여러 면에서 이란계 마왈리의 참여가 활발해졌다. 압바스 왕조 하에서는 무슬림이라면 출신 민족에 관계없이 지즈야(인두세)가 면제되었고, 이슬람 내 평등을 주장하는 슈아비야 운동이 힘을 얻었다. 페르시아인 관료들은 압바스 왕조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으며, 하룬 알라시드 시대의 재상 가문인 바르마크 가문이 대표적이다. 압바스 왕조는 호라산 등지의 반란과 아제르바이잔 방면의 바바크의 난 등을 진압하며 9세기 초 안정적인 전성기를 누렸다.
이란을 정복한 아랍인들은 페르시아의 발달된 통치 체제와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특히 제국 운영 방식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서방 이슬람 학자 버나드 루이스는 "이란은 처음부터 제국이었다"고 언급하며, 고대 페르시아 시절부터 이어진 제국 통치 경험과 전제군주제에 대한 익숙함을 지적했다. 이란의 군주인 샤(Shah)는 이집트의 파라오, 중국의 황제와 비견될 만한 절대 군주로 여겨졌다. 페르도우시(Ferdowsi, 935-?)의 유명한 서사시 《샤나메》(왕들의 책) 영역본에서도 샤(Shah)와 일반적인 왕(King)을 구분하여 사용하는데, 이는 '왕중의 왕'으로서 샤의 위상과 당시 페르시아인들의 자부심을 보여준다.
아랍 지배 하에서도 이란인들은 관료로 많이 등용되었으며, 철학, 문학, 법학, 의학 등 학문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아랍어가 공식 언어가 되었지만, 이란 민중들은 페르시아어(파르시)를 지켜나갔다. 특히 《샤나메》를 비롯한 페르시아 서사시는 페르시아어 보존과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파르시에서 파생된 언어들은 오늘날 인도, 아프가니스탄을 비롯해 중앙아시아의 '-스탄'으로 끝나는 여러 나라에서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
압바스 왕조가 9세기부터 쇠퇴하기 시작하자, 호라산 등지에서는 타히르 왕조, 알리 왕조(자이드 왕조)와 같은 이란계 반독립 왕조들이 등장하며 페르시아 문예 부흥 시대를 열었다. 아프가니스탄과 시스탄 지방에서는 사파르 왕조, 가즈나 왕조 같은 독립 왕조가 세워졌다. 이란 고원에서는 10세기에 부와이 왕조가 성립하는 등, 여러 자잘한 왕조들이 나타나고 사라졌던 시기(821-1055)를 '이란의 막간기'(Iranian Intermezzo)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시기를 거치며 이란 지역의 이슬람화가 더욱 진행되었고, 이란은 이슬람 세계의 중요한 일부로 통합되어 갔다. 사산조의 후예인 다부예흐(Dabooyeh)가 세운 작은 나라는 페르시아의 직접적인 후계자로 보기는 어려우나, 이슬람 개종 후에도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하며 오랫동안 지속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4. 2. 이란계 왕조들의 부흥 (10세기 ~ 13세기)
아바스 왕조의 힘이 약해지면서 9세기 후반부터 이란 지역에서는 새로운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호라산 총독이었던 타히르 이븐 알 후세인이 세운 타히르 왕조(821년 - 873년)를 시작으로, 이란 동부 시스탄에서는 사파르 왕조(867년 - 903년)가, 마와라안나흐르에서는 부하라를 수도로 한 사만 왕조(875년 - 999년)가 등장했다. 이들은 모두 이란계 왕조였으며, 아바스 왕조로부터 아미르로 인정받아 형식적인 권위를 유지하는 반독립적인 성격을 가졌다. 타히르 왕조는 사파르 왕조에 의해 873년 멸망했고, 사파르 왕조 역시 900년 북쪽의 사만 왕조에게 호라산 지역을 빼앗겼다. 일부 이란 민족주의적 시각에서는 이 시기를 "아랍의 굴레"에서 벗어난 때로 보기도 하지만, 이들 왕조는 여전히 아바스 왕조 체제하의 지방 정권으로 평가하는 것이 일반적이다.이 시기는 이란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근세 페르시아어가 거의 완성되었고, 페르시아의 고유한 전통과 언어에 대한 자부심이 되살아나는 페르시아 문예 부흥기가 열렸다. 특히 사만 왕조는 페르시아 문학 보호에 적극적이어서 루다키, 다키키, 그리고 불후의 서사시 《샤나메》를 쓴 페르도우시와 같은 위대한 시인들을 배출했다.
사회적으로도 큰 변화가 있었다. 아바스 왕조 내부의 혼란은 군대의 이동, 지식인의 피난, 교역 활성화 등 사람과 물자의 이동을 촉진했다. 변방의 이란계 왕조, 특히 사만 왕조는 중앙아시아의 튀르크계 유목민들과 끊임없이 충돌하며 포로들을 맘루크(노예 군인)로 삼아 아바스 왕조에 공급했다. 이로 인해 튀르크족이 이슬람 세계 중심부로 지속적으로 유입되었고, 그 대가로 많은 양의 은이 동방으로 흘러 들어갔다. 경제가 활성화되고 교류가 늘어나면서 이란 지역에서는 사회 상층부를 중심으로 이슬람 개종이 빠르게 진행되었다. 이 시기에 이란인과 튀르크인이 이슬람 문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이슬람적 가치와 페르시아적 전통이 융합된 독특한 이슬람-페르시아 문화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는 이란이 이슬람 세계의 중요한 일부로 통합되는 과정이었다.
한편, 이슬람화가 더디게 진행되던 이란 북부 카스피해 연안 지역에서는 독자적인 세력들이 성장했다. 9세기 후반 시아파의 일파인 자이드파의 알리 왕조가 등장했고, 10세기에는 지야르 왕조(927년-)가 세력을 키워 알보르즈 산맥 너머까지 진출했다. 이 과정에서 뛰어난 보병으로 알려진 다일람인들이 주목받았고, 그 지도자 가문인 부와이흐 가문이 932년 부와이흐 왕조를 세웠다. 부와이흐 왕조는 빠르게 세력을 확장하여 이란 고원과 이라크를 장악했고, 마침내 945년에는 아바스 왕조의 수도 바그다드에 입성하여 칼리프로부터 군 통수권자인 아미르 알 우마라 칭호를 받았다. 이들은 휘하 군인들에게 이크타(봉토 또는 징세권)를 나누어 주어 군사력을 유지하면서 실질적인 통치권을 행사했다. 부와이흐 가문은 시아파를 신봉했음에도 불구하고 수니파 칼리프의 권위를 인정하는 독특한 정치 체제를 유지했다. 이 시기 이집트에서는 시아파 이스마일파의 파티마 왕조가 스스로 칼리프를 칭하면서 아바스 칼리프의 권위는 크게 약화되어, 현실 지배자에게 정통성을 부여하는 상징적인 존재로 전락했다.
10세기 말부터는 튀르크족이 정치 무대의 전면에 나서기 시작했다. 중앙아시아 초원 지대에서 발흥한 카라한 왕조는 10세기 중반 큰 세력으로 성장하여 마와라안나흐르 지역에서 사만 왕조와 경쟁했다. 전승에 따르면 960년경에는 20만 가구에 달하는 튀르크 유목민이 이슬람으로 개종했다고 한다. 한편, 962년 사만 왕조의 튀르크계 노예 군인 출신인 알프테긴이 가즈나에서 반독립적인 세력을 구축했고, 이는 972년 가즈나 왕조의 성립으로 이어졌다. 결국 사만 왕조는 북쪽의 카라한 왕조와 남쪽의 가즈나 왕조의 압박 속에 999년 멸망했다.
11세기 초 이란 세계는 북동쪽 마와라안나흐르의 카라한 왕조, 호라산의 가즈나 왕조, 이란 고원의 부와이흐 왕조로 나뉘어 있었다. 카라한 왕조와 부와이흐 왕조가 내부 분열로 약화되는 동안, 998년 즉위한 마흐무드의 치세에 가즈나 왕조는 전성기를 맞았다. 마흐무드는 북인도에서 서부 이란까지 광대한 지역을 원정했으며, 특히 그의 인도 원정은 인도 아대륙의 이슬람화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가즈나 왕조는 사만 왕조의 뒤를 이어 페르시아 문화를 적극적으로 보호하고 장려했다. 그러나 1030년 마흐무드가 사망하자 가즈나 왕조의 세력은 급격히 약화되었고, 이란 세계는 다시 혼란에 빠졌다.
이러한 혼란을 수습하고 이란 세계를 다시 통합한 것은 오구즈계 튀르크족을 이끌던 투그릴 베그의 셀주크 왕조였다. 셀주크족은 유목 부족의 형태를 유지한 채 집단으로 이슬람교로 개종하여 이슬람 세계에 등장했으며, 이는 이후 서아시아 튀르크계 왕조들의 선례가 되었다. 1038년 니샤푸르에 입성하여 호라산에서 가즈나 왕조를 물리친 셀주크 왕조는 계속 서쪽으로 나아가 1055년 바그다드에 입성했다. 투그릴 베그는 아바스 왕조 칼리프로부터 수니파 무슬림 세계의 최고 통치자를 의미하는 술탄 칭호를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 그의 뒤를 이은 알프 아르슬란과 말리크 샤 시대에 셀주크 제국은 동부 아나톨리아와 시리아까지 영토를 확장하며 황금기를 맞았다.
셀주크 제국의 광대한 영토를 효율적으로 통치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 것은 페르시아인 관료들이었다. 셀주크 왕조의 행정 용어는 페르시아어였고, 지방 행정과 사법을 담당하는 카디 등도 대부분 페르시아인이었다. 이처럼 정치와 군사는 튀르크계를 비롯한 유목민이, 행정은 페르시아계 문인 관료(타지크)가 담당하고 페르시아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는 체제는 셀주크 시대에 완성되었으며, 이란사 연구자 하타 마사시는 이러한 체제를 "동방 이슬람 세계"라고 명명했다. 이 체제는 이후 20세기까지 이란 세계 역사의 기본 골격이 되었다.
이 시기 타지크 관료의 정점에 있었던 인물은 재상 니잠 알 물크였다. 그는 페르시아 산문의 걸작으로 꼽히는 『통치서』(시야사트-나메)를 직접 저술했을 뿐만 아니라, 학문과 예술을 적극적으로 후원했다. 그의 지원 아래 레이, 이스파한, 니샤푸르, 발흐, 마르브 등 주요 도시들은 페르시아 문화의 중심지로 번영했다. 니잠 알 물크는 제국 전역의 주요 도시에 니자미야라고 불리는 마드라사(고등 교육기관)를 설립했으며, 오마르 하이얌과 같은 학자를 후원하여 천문대 건설과 정확한 잘랄리 달력 제작을 가능하게 했다. 또한 바그다드에는 아부 하미드 알 가잘리와 같이 이슬람 역사상 저명한 학자들을 초빙하여 학문 발전을 이끌었다.
그러나 수니파의 보호자를 자처했던 셀주크 왕조에게도 위협은 존재했다. 이란 내 시아파의 급진 분파인 이스마일파(니자리파)가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들은 10세기 후반부터 이슬람 세계 전역에 선교사를 파견했으며, 특히 이란 동부 산악 지대와 이스파한, 알보르즈 산맥 일대에 지지 기반을 넓혔다. 1090년에는 현재의 테헤란 북쪽에 위치한 알라무트 성을 점령하고, 이후 약 150년간 이란 고원 곳곳에 흩어진 거점들을 중심으로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했다. 이들은 암살과 같은 비밀스러운 수단을 동원하여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려 했기 때문에, 셀주크 왕조의 통치자들과 수니파 주민들에게 큰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4. 3. 몽골 지배와 일 칸국 (1219년 ~ 1370년)
1219년, 칭기즈 칸이 이끄는 몽골 제국 군대가 중앙아시아의 호라즘 제국을 침공했다(칭기즈 칸의 서정). 당시 호라즘 제국은 알라 앗딘 무함마드 치하에서 최성기를 누리고 있었으나, 몽골군의 압도적인 군사력 앞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몽골 군대는 침략 과정에서 페르시아 전역을 휩쓸며 수많은 도시를 파괴하고 대규모 학살을 자행했으며, 이는 페르시아 문화에 큰 상처를 남겼다. 특히 수많은 문화유산이 파괴된 것은 후세에게 큰 안타까움으로 남았다.호라즘 제국이 멸망한 후, 몽골 제국은 이란 고원을 직접 지배하기 시작했다. 1258년, 칭기즈 칸의 손자인 훌라구 칸은 바그다드를 함락시키고 아바스 왕조를 멸망시킨 뒤, 이란 지역을 중심으로 일 한국을 세웠다. 일 한국은 몽골 제국의 일부였지만 점차 독자적인 세력으로 발전했다.
일 한국은 가잔 칸(재위 1295년-1304년) 시대에 잠시 부흥기를 맞이했다. 가잔 칸은 이슬람교로 개종하고 페르시아 문화를 장려하는 등 안정적인 통치를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1335년 아부 사이드 칸이 후계자 없이 사망하면서 일 한국은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했고, 결국 여러 세력으로 분열되어 혼란에 빠졌다. 이로써 몽골족의 직접적인 지배는 막을 내렸지만, 이란 지역은 다시 정치적 분열기를 맞게 되었다.
몽골 지배기 동안 유목민의 기동력에 기반한 군사적 우위는 절대적이었다. 권력의 중심지는 군사 활동에 필요한 넓은 목초지를 따라 이란 동부의 호라산과 마와라안나흐르, 서부의 아제르바이잔 등을 오갔다. 일 칸국의 붕괴는 이후 이란 북동부에서 새로운 강자로 떠오른 티무르가 티무르 제국을 건설하는 배경이 되었다.
4. 4. 티무르 제국과 투르크멘계 왕조들 (1370년 ~ 1501년)
1335년 일 한국의 아부 사이드 칸이 후계자 없이 사망하면서 중앙 정권은 와해되었고, 각지의 여러 세력이 독자적으로 칭기즈 칸 혈통을 내세우며 분립하는 혼란스러운 상황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이란 북동부의 마와라안나흐르 지역을 기반으로 칭기즈 칸의 후예를 자처한 티무르가 등장하여 새로운 제국 건설에 나섰다.티무르는 1381년 이란을 침공하여 정복하고, 이를 발판으로 북인도, 중앙아시아(서역), 소아시아에 이르는 광대한 티무르 제국을 건설하였다. 이 과정에서 페르시아의 오랜 도시들인 시라즈와 이스파한 등이 다시 한번 크게 파괴되는 등 이란 지역은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1405년 티무르가 사망한 후 제국은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했다. 티무르의 후계자들은 내부 분열과 반란에 시달렸으며, 제국의 영토는 점차 축소되었다. 동쪽의 티무르 왕조는 세력이 약화된 채 1501년까지 명맥을 유지하는 데 그쳤다.
티무르 제국의 세력이 약해지자, 이란 서부에서는 투르크멘계 유목민들이 세력을 확장했다. 이들은 흑양 왕조(카라 코윤루)와 백양 왕조(아크 코윤루)를 세우고 이란 서부와 아제르바이잔,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장악하며 동쪽의 티무르 왕조와 대립하는 구도를 형성했다.
한편, 티무르 시대부터 이란 북서부 아제르바이잔 지역에서는 사피 알딘을 시조로 하는 시아파 수피즘 교단(사파비 교단)이 조용히 세력을 키우고 있었다. 당시 이단으로 배척받던 이들은 수니파의 탄압을 피해 은둔 생활을 해왔다. 1499년 이 교단의 지도자가 된 이스마일은 추종자들을 이끌고 정복 전쟁을 시작하여 혼란에 빠진 이란 지역을 빠르게 통일해 나갔다. 마침내 1501년, 이스마일은 타브리즈를 수도로 사파비 왕조를 공식 선포하며 이란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고, 이로써 티무르 제국과 투르크멘 왕조들의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된다.
5. 근세
977년, 사만 왕조의 투르크계 총독이었던 사부크티긴은 오늘날 아프가니스탄의 가즈나 지역을 정복하고 가즈나 왕조(~1186년)를 세웠다.[79] 가즈나 왕조는 10세기 말 아무다리야강 남쪽의 사만 왕조 영토를 차지하며 세력을 넓혔고, 동부 이란,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북서부 인도 일부까지 지배했다.[81] 가즈나 왕조는 이슬람을 힌두교 중심의 인도 아대륙에 본격적으로 전파한 세력으로 평가받는다. 마흐무드 왕은 1000년부터 여러 차례 인도를 침략했지만, 그의 사후(1030년) 왕조는 점차 약화되었고, 1040년경에는 셀주크에게 이란 지역 영토를 빼앗겼다.[81]
가즈나 왕조처럼 투르크계이면서 페르시아 문화를 받아들인 셀주크는 11세기 동안 점진적으로 이란을 정복했다.[79] 중앙아시아의 투르크멘족 부족 연합에서 시작된 셀주크 왕조는 중동 지역에서 투르크 민족의 영향력이 커지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들은 11세기부터 14세기까지 중앙아시아와 중동 일부 지역에 수니파 이슬람 국가를 세웠다. 서쪽으로는 아나톨리아, 동쪽으로는 서부 아프가니스탄, 북동쪽으로는 현재 중국 서부 국경까지 이르는 광대한 제국(대 셀주크 제국)을 건설했으며, 제1차 십자군 원정의 주요 대상이 되기도 했다. 셀주크는 오늘날 터키, 아제르바이잔, 투르크메니스탄 등 서부 투르크 민족의 문화적 조상으로 여겨지며, 페르시아 문화, 예술, 문학, 페르시아어를 적극적으로 후원한 것으로 기억된다.[96][97][98]
왕조의 창시자 투그릴 베그는 호라산에서 군사를 일으켜 남쪽과 서쪽으로 진격하며 도시들을 점령했다. 1055년, 바그다드의 칼리프는 투그릴 베그에게 '동방의 왕'이라는 칭호를 내렸다. 그의 후계자 말리크샤 1세(재위 1072년 ~ 1092년) 시대에는 유능한 이란 출신 재상 니잠 알 물크의 도움으로 이란의 문화와 과학이 크게 발전했다. 이 시기 오마르 하이얌이 역법 연구를 진행한 천문대가 설립되었고, 주요 도시마다 니자미야라는 종교 학교가 세워졌다. 또한, 저명한 신학자 알 가잘리를 비롯한 여러 학자들이 수도 바그다드로 초빙되어 연구 활동을 지원받았다.[79]
그러나 1092년 말리크 샤 1세가 사망하자 제국은 그의 형제와 아들들 사이의 계승 분쟁으로 분열되기 시작했다. 아나톨리아에서는 룸 술탄국이, 시리아에서는 다른 셀주크계 국가가 세워졌으며, 페르시아 본토 역시 여러 후계자들(마흐무드 1세, 베르키야루크, 무함마드 1세, 아흐마드 산자르)이 각 지역에서 할거하며 다투었다. 셀주크의 세력이 약해진 틈을 타 아바스 왕조 칼리프의 권위가 일부 회복되고, 중앙아시아에서는 호라즘 왕조가 부상했다. 본래 셀주크의 봉신이었던 호라즘 왕조는 셀주크의 쇠퇴를 기회 삼아 이란으로 세력을 확장했다.[99] 결국 1194년, 호라즘 왕조의 알라 앗딘 테키시가 셀주크 술탄 토그룰 3세를 격파하면서 이란의 셀주크 제국은 멸망했다. 이전 셀주크 제국 중에서는 아나톨리아의 룸 술탄국만이 남았다.
셀주크 시대에는 라슈트와 테헤란 사이의 알라무트를 거점으로 활동한 니자리파가 심각한 내부 위협이 되었다. 이들은 비밀 종파로서 150년 이상 주변 지역을 통제하며, 요인 암살을 통해 세력을 유지하려 했다. '암살(assassination)'이라는 단어의 어원 중 하나가 이들로부터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79]
13세기 초에는 타마르 여왕이 이끄는 조지아 왕국이 이란 북서부 지역을 잠시 정복하기도 했다.[100]
셀주크 시대 이후, 동방 이슬람 세계에서는 투르크계 유목민이 정치와 군사를, 페르시아계 정주민이 행정과 문화를 담당하는 특징적인 구조가 나타났다. 13세기에는 몽골 제국이 이란 고원을 정복하여 일 칸국을 세웠다. 이 시기 유목민의 기동력에 기반한 군사적 우위는 압도적이었으며, 이란 고원의 역사는 동쪽의 호라산 및 마와라안나흐르 지역과 서쪽의 아제르바이잔 및 동아나톨리아 지역에 기반을 둔 세력들 간의 경쟁 구도로 전개되었다. 일 칸국 붕괴 후에는 티무르가 대제국을 건설했으나, 그 세력이 약해진 뒤에는 서쪽의 흑양 왕조, 백양 왕조와 동쪽의 티무르 왕조가 대립하는 상황이 이어졌다. 이러한 유목 왕조들의 시대를 거쳐, 16세기 초 사파비 왕조가 등장하며 이란은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5. 1. 사파비 왕조 (1501년 ~ 1736년)
티무르 치하 이란 북서부에는 사피 알딘이라는 이슬람 셰이크(이슬람의 성직자 개념과는 다소 차이가 있음)가 이끄는 추종 집단이 있었다. 당시 비주류로 여겨지던 시아파였던 이들은 순니파의 탄압을 피해 은둔하고 있었다. 1499년, 이 집단의 지도자가 된 이스마일은 정복 전쟁을 시작하여 이란 전역을 통일했고, 1501년 타브리즈를 수도로 삼아 사파비 왕조(1501년 ~ 1736년)를 건국했다.이로써 이란은 652년 아랍족의 침입 이후 약 1,000년 만에 페르시아인에 의한 통일 왕조 시대를 맞이했다. 오랜 외세 지배를 겪으며 이란인들은 외세에 대한 저항 심리와 이방인에 대한 환대라는 상반된 의식을 갖게 되었다는 분석이 있다. 또한, 오랜 전제 군주정과 외세 통치 경험이 절대 권력에 대한 복종 심리를 내재화시켰다는 시각도 존재한다. 그럼에도 중요한 것은, 이란이 외세의 지배 속에서도 이란고원이라는 지리적 기반 위에서 고유한 문화권을 유지하며 '땅과 나라 이름'을 지켜왔다는 점이다.
이스마일 1세는 시아파 이슬람교를 국교로 선포하고 순니파에 대한 강제 개종 정책을 시행했다. 시아파의 국교화는 이민족 지배 종식 이상으로 현대 이란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사파비 왕조 초기에는 이스마일 1세가 모든 권력을 장악하고 성직자, 관료, 군대가 샤를 보좌하는 신정(神政) 체제를 구축했다.
그러나 당시 이슬람 세계의 주류는 순니파였기에, 오스만 투르크(오스만 제국)는 시아파를 이단으로 간주하고 1524년 이란을 침공하여 수도 타브리즈를 함락시켰다. 이란군이 반격에 나섰으나 사파비 왕조의 권위는 크게 실추되었다. 오스만 제국은 1533년 이라크를 점령했으며, 이후에도 아제르바이잔과 코카서스 지역의 지배권을 놓고 사파비 왕조와 지속적으로 대립했다.
사파비 왕조의 최전성기는 아바스 1세(재위 1587년 ~ 1629년) 시대였다. 이란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주 중 하나로 꼽히는 아바스 1세는 이스마일 1세의 증손자로, 복잡한 정치적 혼란을 딛고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그는 불안정한 왕조를 안정시키고자 강력한 개혁을 단행했다. 먼저 오스만 투르크와 일시적으로 강화를 맺어 서부 국경을 안정시킨 후, 동쪽의 우즈베크 세력을 격퇴했다. 이후 다시 오스만 제국과 전쟁을 벌여 이라크, 조지아, 캅카스 등 과거 페르시아 영토 일부를 회복했다.
정치적으로는 귀족들의 사병(私兵)을 폐지하고 관료제를 강화하여 중앙집권 체제를 공고히 했다. 이는 정교 분리의 기초를 다지고 종교와 독립적인 국가 통치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기여했다. 경제적으로는 전국적인 도로망과 숙박 시설(카라반사라이)을 정비하여 교역로의 안전을 확보하고, 주요 산업인 비단 무역을 국가가 관리하여 재정을 튼튼히 했다. 또한 바레인과 호르무즈 해협의 섬들을 점령하고 인도양에서 활동하던 포르투갈 세력을 몰아내는 등 해상 영향력 확대에도 힘썼다.
문화적으로도 아바스 1세는 예술을 적극 후원하여 건축, 회화 등 페르시아 예술과 문화의 부흥을 이끌었다. 그는 수도를 이스파한으로 옮기고 웅장한 모스크, 궁전, 학교, 다리 등을 건설하여 도시를 화려하게 발전시켰다. 당시 이스파한은 '세상의 절반'(نصف جهان|Nesf-e Jahānfa)이라 불릴 정도로 번영했으며, 오늘날에도 이란인들에게 '이란의 심장'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압바스 2세(재위 1642년 ~ 1666년) 이후 사파비 왕조는 점차 쇠퇴하기 시작했다. 압바스 2세는 아들이 역모를 꾸민다고 의심하여 처형했고, 그의 뒤를 이은 손자 사피 1세는 잔혹한 통치로 민심을 잃고 국력을 약화시켰다.
왕조가 쇠약해진 틈을 타 아프가니스탄의 부족장 마흐무드가 1722년 수도 이스파한을 함락시키고 스스로 샤를 칭했다. 폐위되었던 술탄 후세인 왕의 아들이 신흥 군벌 나디르의 도움으로 잠시 왕위를 되찾기도 했으나, 1736년 나디르가 직접 반란을 일으켜 왕위에 오르면서 사파비 왕조는 완전히 막을 내렸다. 나디르 샤가 세운 아프샤르 왕조 역시 오래가지 못했고, 이후 이란은 잔드 왕조, 카자르 왕조 등이 등장하고 사라지는 혼란기를 맞이하게 된다.
5. 2. 아프샤르 왕조와 잔드 왕조 (1736년 ~ 1796년)
(내용 없음 - 원본 소스에 해당 섹션에 대한 정보가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5. 3. 카자르 왕조 (1796년 ~ 1925년)
근대 이란은 카자르 왕조(1796년 ~ 1925년) 시기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아가 모하마드 칸은 케르만 지방에서 잔드 왕조를 무너뜨리고 카자르 왕조를 세웠으며, 수도를 테헤란으로 옮겼다. 그러나 그는 잔혹한 성격 탓에 시종에게 살해당했다. 그의 후계자들은 사치스러운 생활로 국고를 낭비했고, 러시아 제국과의 전쟁에서 패배하여 아제르바이잔 지역을 빼앗기는 등 국가 운영에 어려움을 겪었다.19세기 중반부터 러시아 제국과 영국의 이란 침략이 본격화되었다. 이란은 러시아와의 두 차례 전쟁에서 패배하여 코카서스 지역을 넘겨주었으며, 1857년 파리 조약을 통해 헤라트와 아프가니스탄 일부 지역을 영국에 할양해야 했다.
나시르 앗딘 샤(재위 1848년 ~ 1896년) 시대에는 타키 칸 아미르(미르자 타키 칸)가 재상으로 임명되었다. '아미르 카비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그는 기울어가는 나라를 살리기 위해 과감한 개혁 정책을 추진했다. 하지만 보수적인 관료들의 강한 반발과 국왕의 견제에 부딪혀 결국 해임되고 살해당했다. 아미르 카비르는 오늘날 이란에서 매우 존경받는 인물이며, 많은 이란인들은 그의 개혁이 중단된 것을 안타까워한다.
결과적으로 이란의 자발적인 근대화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왜곡되었다. 특히 영국의 경제적 침탈이 심화되면서 외세에 반대하는 민중 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대표적인 예로 1890년 영국이 담배 독점권을 획득하자 이슬람 지도자들이 금연령을 선포하며 저항했고, 결국 영국은 독점권을 포기해야 했다.
6. 근대
칭기즈 칸 사후 이란 지역은 여러 몽골 지휘관들의 통치 아래 놓였다. 칭기즈 칸의 손자인 훌레구는 몽골 지배 영역을 서쪽으로 확장하는 임무를 맡았으나, 그가 권력을 잡을 무렵 몽골 제국은 이미 여러 파벌로 나뉘어 분열된 상태였다. 훌레구는 군대를 이끌고 이 지역에 정착하여 몽골 제국의 후계 국가 중 하나인 일 칸국을 세웠고, 일 칸국은 이후 80년간 이란을 통치하며 점차 페르시아화되었다.
훌레구는 1258년 바그다드를 점령하고 마지막 아바스 칼리프를 처형하며 이슬람 세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그러나 그의 군대는 1260년 팔레스타인에서 벌어진 아인잘루트 전투에서 맘루크 술탄국에게 패배하며 서쪽으로의 진격이 저지되었다. 또한 훌레구의 이슬람교도에 대한 군사 작전은 킵차크 칸국의 칸이자 이슬람으로 개종한 베르케의 분노를 샀다. 훌레구와 베르케 칸 사이의 전쟁은 당시 몽골 제국 내부의 분열과 약화된 통합력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훌레구의 증손자인 가잔 칸 (재위 1295년 ~ 1304년)의 통치 아래 이슬람이 일 칸국의 국교로 정해졌다. 가잔 칸과 그의 유능한 이란인 재상 라시드 알딘은 이란 경제의 부분적이고 일시적인 부흥을 이끌었다. 몽골 통치자들은 장인에 대한 세금을 낮추고 농업을 장려했으며, 파괴된 관개 시설을 재건하고 확장하는 한편, 무역로의 안전을 확보하여 상업 활동을 크게 증진시켰다. 이를 통해 인도, 중국, 이란의 물품이 아시아 대륙을 가로질러 활발하게 교역되었고, 이러한 교류는 이란의 문화를 풍요롭게 만들었다. 특히 이란인들은 기존의 메소포타미아 회화 양식과 중국 회화의 섬세한 붓 터치 및 기법을 융합하여 독특하고 새로운 화풍을 발전시켰다.
그러나 1335년 가잔 칸의 조카인 아부 사이드 바하두르 칸이 후사 없이 사망하자 일 칸국은 극심한 내분에 휩싸이며 여러 소규모 왕조들, 대표적으로 잘라이르 왕조, 무자파르 왕조, 사르바다르, 카르트 왕조 등으로 분열되었다.
설상가상으로 14세기 중반에는 흑사병이 크게 유행하여 이란 인구의 약 30%가 사망하는 비극을 겪었다.[110]
17세기에 이르러 포르투갈, 영국, 러시아, 프랑스 등 유럽 열강들이 이란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하며 기반을 다지기 시작했다. 이후 카자르 왕조 시기, 이란은 이들 열강과의 경쟁과 압력 속에서 굴리스탄 조약, 투르크만차이 조약 등 불리한 조약을 체결하며 광대한 영토를 상실하게 되었고, 국가의 위상은 점차 약화되어 갔다.
6. 1. 팔레비 왕조 (1925년 ~ 1979년)
카자르 왕조 말기, 왕실의 부패와 서구 열강에 대한 국가 권리 양도로 인해 왕권 제한 움직임이 일어났다. 1906년 근대적 헌법이 제정되었으나, 모하마드 알리 샤가 이를 파기하고 의회를 폭파하면서 '제헌 혁명'이라 불리는 봉기가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제헌파는 1909년 테헤란을 장악하고 샤를 몰아냈지만, 이미 1907년부터 러시아와 영국은 이란을 분할하여 수탈하고 있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 이란은 영국, 러시아, 터키군의 전쟁터가 되었고,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영국은 1919년 조약을 통해 이란을 사실상 보호령으로 만들려 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고조된 반(反)영국 감정을 바탕으로 코사크 부대 사령관이었던 레자 칸이 부상했다.1921년 쿠데타를 일으킨 레자 칸은 1925년 카자르 왕조를 무너뜨리고 스스로 황제에 올라 '레자 샤 팔레비'로서 팔레비 왕조(1925년~1979년)를 열었다. 레자 샤는 이란의 근대화를 목표로 과감하고 체계적인 서구화 정책을 추진했다. 부족 중심의 군대를 혁신하여 왕권을 강화하고 관료제를 개편했으며, 전국적인 교육 제도를 도입하고 근대적 대학을 설립하여 세속 국가 건설을 지향했다. 그는 이슬람 학자들에게서 교육권을 빼앗아 세속적, 서구적, 합리적 국민 의식을 고양시키려 했으며, 사법권 또한 근대적 사법 기구로 이관하여 이슬람 율법학자들의 영향력을 줄이고자 했다. 1936년에는 여성의 차도르 착용을 금지하기도 했다.
그러나 레자 샤의 개혁은 강력한 반대 세력과 언론 탄압을 동반했다. 특히 봉건적 특권을 잃은 이슬람 세력은 왕조의 주요 반대 세력이 되었고, 이는 1979년 이슬람 혁명의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또한 그의 근대화 정책은 봉건적 토지 소유 제도를 근본적으로 개혁하지 못했고, 개혁 비용을 농민 세금에 의존하여 민중의 지지를 얻지 못하는 한계를 보였다. 외교적으로는 소련과 영국을 견제하기 위해 나치 독일과의 관계를 강화했으나, 이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연합국의 이란 침공(1941년 8월)을 초래했다. 영국과 소련의 압박 속에서 레자 샤는 결국 아들 모하마드 레자 팔레비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퇴위했다. 그는 영국군에 의해 체포되어 모리셔스 등지를 전전하다 1944년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요하네스버그에서 사망했다. 오늘날 역사가들은 레자 샤를 카자르 왕조 말기의 혼란을 수습하고 이란인에 의한 근대화를 추진하며 제국주의에 맞서려 했던 인물로 평가하기도 한다.
아들 모하마드 레자 팔레비가 즉위한 후에도 이란은 연합국의 점령 하에 병참 기지 역할을 했으며, 영국과 소련의 경제적 침탈은 계속되었다. 특히 소련군은 종전 후에도 북서부 지역에 주둔하며 이란령 아제르바이잔과 쿠르디스탄 지역에 친소련 정권(아제르바이잔 인민 정부, 마하바드 공화국) 수립을 지원하기도 했다. 이러한 외세의 간섭 속에서 반외세 민족주의를 내세운 모하마드 모사데크가 이끄는 국민전선이 부상했다. 1951년, 팔레비 국왕은 여론에 밀려 모사데크를 총리로 임명했고, 모사데크는 즉시 영국이 장악하고 있던 유전의 국유화를 단행했다. 이에 영국은 경제 봉쇄로 대응했으며, 모사데크가 소련과 연계된 투데당과 협력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미국의 아이젠하워 행정부까지 개입하여 1953년 군부 쿠데타를 사주했다. 모사데크는 실각 후 투옥되었다가 가택연금 상태에서 1967년 사망했다.
모사데크 축출 이후 팔레비 샤는 노골적인 친미, 친영 노선을 걸으며 비밀경찰인 국가정보안보기구(SAVAK)를 동원해 반대파를 탄압했다. BP, 로열 더치 셸 등 서방 석유 회사들이 다시 이란 유전을 장악했으며, 이란은 1955년 소련의 중동 진출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 주도로 결성된 바그다드 조약기구(METO, 이후 중앙조약기구 CENTO로 개편)에 가입하고 1959년에는 미국과 방위조약을 체결하여 미군 주둔을 허용했다.
1963년, 팔레비 샤는 '백색 혁명'이라 불리는 일련의 개혁 조치를 국민투표에 부쳐 시행했다. 주요 내용으로는 토지 개혁, 노동자에 대한 회사 이윤 분배, 삼림 및 목초지 국유화, 국영 사업장 민영화, 노동자·농민에게 유리한 선거법 개정, 문맹 퇴치 운동 지원 등이었으며, 여성에게도 투표권이 부여되었다. 특히 토지 개혁은 샤 본인이 왕실 토지를 농민에게 분배하며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그러나 토지 개혁은 주요 토지 소유자이기도 했던 이슬람 성직자들의 격렬한 반발을 샀다.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를 중심으로 한 성직자들은 반(反)백색혁명 운동을 벌였고, 호메이니는 체포되었다가 이듬해 터키(이후 이라크)로 망명했다. 성직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토지 개혁은 일부 성과를 거두었고 경제 상황도 개선되었다.
국정 운영에 자신감을 얻은 팔레비 샤는 1967년 대관식을 거행하고, 1971년에는 페르시아 제국 창건 2,500주년 기념식을 페르세폴리스에서 성대하게 개최하며 권위를 과시했다. 또한 중동의 경찰 역할을 자임하며 미국의 무기를 대량으로 수입하여 군비를 강화했다. 그러나 이러한 노골적인 친미 노선과 이슬람 전통을 무시한 서구화 정책은 국민들에게 굴욕감과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모사데크 국민전선의 분파, 호메이니를 따르는 이슬람 세력, 그리고 여러 무장 단체들이 반(反)팔레비 전선에 나서면서 왕정에 반대하는 운동은 점차 조직화되었고, 이는 결국 1979년 이란 이슬람 혁명으로 이어지는 배경이 되었다.
6. 2. 이슬람 혁명과 이슬람 공화국 (1979년 ~ 현재)
1977년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 당선 이후, 미국은 팔레비 왕조의 인권 탄압에 우려를 표하며 개선을 요구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978년, 왕정은 루홀라 호메이니를 비방하는 기사를 정부 어용 신문에 게재하여 국민 감정을 자극했고, 쿰 시에서 열린 신학생 시위를 유혈 진압했다. 이에 항의하여 이스파한의 바자르 상인들이 철시하고 시위에 나섰으나 이 역시 무자비하게 진압되면서, 1978년 초부터 시위와 유혈 진압의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8월에는 아바단의 렉스 시네마에서 시위대가 경찰을 피해 들어갔다가 화재로 400여 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당시에는 비밀 경찰의 소행으로 여겨졌으나 훗날 광신도의 방화로 밝혀졌다. 9월에는 테헤란의 잘레흐 광장에 모인 시위대를 향해 경찰이 무차별 발포하여 큰 유혈 사태가 벌어졌다.이라크 정부는 이란의 압력으로 호메이니를 추방했고, 호메이니는 프랑스 파리로 망명했다. 그의 프랑스 망명은 오히려 이란 반정부 운동이 국제적인 주목을 받는 계기가 되었다. 1978년 12월, 팔레비 국왕은 온건파 국민전선 지도자 샤푸르 바크티아르와 협상하여 그에게 총리직을 맡기고 이란을 떠나기로 결정했다. 이듬해 1979년 1월 16일, 팔레비 국왕은 이란을 떠나 망명길에 올랐다.
1979년 출범한 바크티아르 정부에 대해 호메이니는 '불법'으로 규정하고 타도 명령을 내렸다. 2월 1일, 호메이니가 15년간의 망명 생활(주로 이라크, 터키, 프랑스)을 마치고 귀국하자 군부마저 호메이니 지지로 돌아섰고, 결국 바크티아르 총리도 망명하면서 2월 11일(혹은 12일) 왕정은 완전히 종식되었다. 이것이 이란 이슬람 혁명이다. 1979년 2월 5일, 호메이니는 메흐디 바르자간을 임시 정부 수반으로 지명했지만, 실질적인 권력은 이슬람 최고 혁명 위원회가 장악했다. 정규군과는 별도로 이슬람 혁명 수비대가 창설되어 혁명 정부의 무력 기반이 되었다. 12월에는 이슬람 공화국을 표방하는 새로운 헌법이 채택되었고, 호메이니는 이란의 최고 지도자에 취임했다. 새 정부는 산업 국유화, 법률 및 문화의 이슬람화를 추진하며 서구 문화를 금지했고, 친서방 엘리트들은 샤와 마찬가지로 망명했다.
1979년 11월 4일, 호전적인 이란 학생들이 테헤란의 미국 대사관을 점거하고 인질을 억류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바자르간 총리는 사임했다. 지미 카터 행정부는 이란과 국교를 단절하고 1980년 4월 7일 경제 제재를 단행했으며, 같은 달 말 인질 구출 작전(독수리 발톱 작전)을 시도했으나 헬리콥터 고장 및 충돌로 미군 8명이 사망하면서 실패했다. 인질 사건은 1981년 1월 20일,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취임일에 이란 측 요구를 미국이 거의 수용하면서 해결되었다.
1980년 1월, 아볼하산 바니사드르가 초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으나 혁명 세력과의 갈등 끝에 1년 만인 1981년 7월 실각하고 인민무자헤딘기구(MKO) 지도자 마수드 라자비와 함께 파리로 망명했다. 이후 이란에서는 정정 불안과 암살이 이어졌다. 바니 사드르 실각 후 취임한 모하마드 알리 라자이 대통령과 모하마드 자바드 바호나르 총리가 1981년 이슬람 공화당 본부 폭탄 테러로 동시에 암살되었고, 이 사건으로 당수 아야톨라 모하마드 베헤슈티를 포함한 70여 명의 고위 관료가 사망했다. 혁명 위원회는 저항 조직을 해체하고 약 3,000명을 처형하며 권력을 공고히 했다. 1981년 말, 혁명은 초기 불안 단계를 극복하고 제도적으로 안정화되었다. 1979년부터 1990년대까지 쿠르드족 민족주의 및 공산주의 세력과 정부 간의 격렬한 전투가 벌어지기도 했다.
한편, 이라크에서는 사담 후세인이 집권했다. 이라크 인구의 다수(65%)가 시아파 무슬림이었기에, 사담 후세인은 시아파 종주국인 이란의 혁명 물결이 이라크로 확산될 것을 우려했다. 주변 아랍 국가들의 지지 하에 1980년 9월 22일, 이라크는 샤트알아랍 수로 영유권을 명분으로 이란을 침공하며 이란-이라크 전쟁을 일으켰다. 미국과 그 동맹국들은 이란 고립을 위해 이라크에 무기와 기술을 지원했으며, 역설적으로 레이건 행정부 고위 관리들은 이란-콘트라 사건을 통해 비밀리에 이란에도 무기를 판매하기도 했다. 개전 초기에는 이라크가 우세했으나, 1982년 말부터 이란이 반격에 나서면서 전쟁은 지리한 소모전 양상으로 변했다. 이란은 미국의 이라크 지원으로 고립되었음에도 국민들의 '혁명 수호 의지'로 버텼으나, 인명 피해는 이란 측이 훨씬 컸고 전쟁 피해액은 3500억달러에 달했다. 그러나 외부의 침략은 역설적으로 이란 내부의 혁명 분위기를 더욱 공고히 하는 결과를 낳았다. 전쟁은 1988년 8월 20일, 국제 연합 안전 보장 이사회 결의 598호를 양국이 수용하면서 휴전으로 끝났다.
1989년 6월 3일, 호메이니가 사망하자 전문가 회의는 알리 하메네이 당시 대통령을 후임 최고 지도자로 선출하여 권력 이양을 순조롭게 마무리했다. 호메이니 사후, 이란 사회에서는 이슬람 혁명의 긴장감에서 벗어나 개혁과 개방을 추구하는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1989년 아크바르 하셰미 라프산자니가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자유화 조치가 시작되었고, 이는 1997년 청년층과 여성 유권자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개혁파 모하마드 하타미가 대통령에 당선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하타미 대통령은 '문명의 대화'를 주창하며 국제 사회의 호응을 얻었고, 미국의 빌 클린턴 행정부도 이란 개혁파를 지원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그러나 하타미는 연임 기간 동안 이슬람 혁명 수호 세력을 자처하는 보수파의 반대에 부딪혀 개혁 추진에 어려움을 겪었다. 이란의 정치 체제는 서구식 민주주의 절차와 이슬람 신정이 결합되어 있어 대통령의 권한 행사에 제약이 따랐고, 개혁파가 장악한 의회와 보수적인 사법부 간의 갈등이 지속되었다.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에는 일부 지방에서 이슬람 민병대와 개혁파 학생들 간의 물리적 충돌이 발생하기도 했다.
2005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보수파의 반격 속에 테헤란 시장 출신의 강경 보수파 마무드 아마디네자드가 재출마한 라프산자니 전 대통령을 누르고 당선되었다. 이는 이슬람 근본주의로의 회귀라기보다는, 하타미 정권 하에서 '개혁파 기득권층'이 형성되어 석유 이권을 서방에 넘기며 이익을 챙겼다는 국민적 반감과 '개혁 피로감'이 작용한 결과라는 분석이 많다. 아마디네자드는 '석유 이익은 국민에게', '서민을 위한 정치' 등의 구호로 지지를 얻었다. 그는 핵 문제 등으로 미국과 대립하며 '강한 지도자' 이미지를 구축하려 했으나, 홀로코스트 부인 발언 등으로 서방과의 마찰을 빚었다. 2005년 8월, 최고 지도자 하메네이는 핵무기 제조·배치·사용을 금지하는 파트와(종교령)를 발표했으나, 2006년 핵 사용을 용인하는 듯한 새로운 파트와가 선언되기도 했다.
2009년 6월 12일 대통령 선거에서 아마디네자드가 큰 표 차이로 재선되었으나, 패배한 개혁파 후보 미르 호세인 무사비가 부정 선거 의혹을 제기하면서 6월 13일부터 대규모 항의 시위와 소요 사태(2009년 이란 대통령 선거 시위)가 발생했다. 최고 지도자 하메네이는 부정 선거 가능성을 일축하고 시위 중단을 촉구했지만, 시위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정권은 무력 진압을 시도했으나 일부 치안 요원이 시위에 동참하는 등 내부 동요 양상도 나타나면서 체제 위기를 맞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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