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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상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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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태상시는 중국의 고대 관청으로, 제사, 예악, 의식, 천문, 의관 등을 관장했다. 북제 시기에 처음 등장했으며, 수, 당, 송, 명, 청 왕조를 거치며 그 역할과 조직이 변화했다. 명대에는 주원장이 부활시켰으며, 청대에는 예부에 병합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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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상시 - [정부기관]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태상시
한자 표기太常寺
로마자 표기Tae Chang Si
다른 이름봉상시
개설
설립 시기550년 (북제)
폐지 시기1912년 (청나라)
소속예부

2. 연혁

한나라(漢代)의 태상(太常)을 기원으로 하며, 북제(北斉) 때 태상시(太常寺)라는 기구 이름이 등장하였다.

· 시대 태상시는 경시(卿寺) 즉 최고 장관이 경(卿)으로 임명되는 관서였다. 왕조에서는 6부(六部)에 기존 9시의 직권이 분할되었는데, 태상시도 예외는 아니었다.

주원장이 태상시를 다시 설치하였다. 1391년 령(令)의 이름을 봉사(奉祀)로, 승(丞)은 사승(祀丞)으로 바꾸었다. 1397년 사(司)를 시(寺)로 하면서 태상시(太常寺)로 개칭하고 관제를 복구하였다.

초기 태상시는 예부(禮部)에 속하였다. 1723년(옹정 원년) 대신을 선발하여 태상시 업무를 감독하게 하였다. 1749년(건륭 14년) 예부만상서(禮部滿尚書)[8]에게 태상 직함을 겸임하도록 하고 영구적인 제도로 삼았다.[7]

1898년(광서 24년) 태상시는 예부에 병합되었다가 복구되었으나, 1906년(광서 32년) 다시 합병되었다.[7]

2. 1. 고대

한나라(漢代)의 태상(太常)을 기원으로 하며, 북제(北斉) 때에 태상시(太常寺)라는 기구의 이름이 등장한다.

태상시는 능묘(陵廟)의 여러 제사나 예악(礼楽), 의식(儀式) 관련 제도 및 천문 술수(天文術数) 그리고 의관(衣冠) 종류 등을 관장하였다.[4] (隋) 왕조 때에는 교사(郊社) ・ 태묘(太廟) ・ 제릉(諸陵) ・ 태축(太祝) ・ 의관 ・ 태악(太楽) ・ 청상(清商) ・ 고취(鼓吹) ・ 태의(太医) ・ 태복(太卜) ・ 늠희(廩犧) 등의 관서를 통괄하였으며, 제각기 관서마다 령(令)이나 승(丞)이 설치되었다.[5] (唐)은 수 왕조의 태상시를 그대로 계승하였으며, 왕조의 예악 ・ 교묘(郊廟) ・ 사직(社稷)에 관한 일을 관장하였다.

수, 당 이래로 태상시는 경시(卿寺) 즉 최고 장관이 경(卿)으로 임명되는 관서였다. 태상시(太常寺)의 장관은 태상시경(太常寺卿, 태상경)이라고도 불렸으며 그 관위는 정3품(正三品)이었다. 차관은 태상시소경(太常寺少卿, 태상소경)이라고 하여 그 관위는 정4품상(正四品上)이었다. 그 아래에 태상시승(太常寺丞, 종5품하) 2인, 태상시주부(太常寺主簿, 종7품상) 2인, 태상시녹사(太常寺録事, 종9품하) 1인이 설치되었다.[6]

(宋) 왕조에서는 6부(六部)에 기존 9시의 직권이 제각기 분할되었는데 태상시도 예외는 아니었다. 태상시의 직권은 별도의 태상예원(太常礼院)에 속하였으며, 이에 따라 태상시는 한직이 되었고 사직(社稷) 2단과 무성(武成) 오묘(五庙), 그리고 수도의 교방(教坊)만을 관할하게 되었다.

(明) 왕조의 주원장이 다시 태상시를 설치하였다. 이때 태상시에는 경과 소경, 승, 그리고 전부(典簿), 협률랑(協律郎), 박사(博士), 찬례랑(贊禮郎)이 관원으로 배치되었다. 1368년에는 사제서(祠祭署)를 두고 령(令), 승(丞)을 임명하였고, 1380년에 거듭 협률랑 등의 관품 등급을 제정하였다.

1391년에 각 령의 이름을 봉사(奉祀), 승은 사승(祀丞)으로 바꾸었다. 1397년에 사(司)를 시(寺)로 하면서 이름을 태상시(太常寺)로 하고 관제를 예전대로 되돌렸다.

건문 연간(1399년─1402년)에 찬례랑 2인과 태축 1인을 더 늘렸다가 1403년에 천단(天壇)을 천지단(天地壇)으로 고치고 그 나머지는 모두 홍무 연간(1368년─1398년)의 옛 제도로 되돌리게 하였다.

1425년에는 희생소(犧牲所)를 두고 그 이목(吏目)에게 관련 공문을 관장하게 하였다. 명 세종(明世宗)이 제사 관련 제도를 정돈하면서 천지단을 천단과 지단(地壇)으로 나누었으며 산천단(山川壇)、적전제사서(藉田祀祭署)를 신기(神祇), 대사전(大祀殿)을 기곡전(祈穀殿)으로 하고 조일단(朝日壇), 석월단(夕月壇)을 증설하여 각기 사제서를 두었다. 또 협률랑과 찬례랑, 사악(司樂) 등의 관원을 증원하였다. 신기단은 1576년에 선농단(先農壇)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명대를 거쳐 (淸) 왕조에서도 초기에 태상시를 두어 예부에 속하게 하였다. 순치(順治) 16년(1659년)에 원래 예부에서 관장하던 제사의 일은 태상사에서 담당하게 되었다.[7] 강희(康熙) 2년(1663년) 태상시의 업무를 다시 예부로 돌렸다가 10년(1671년)에 다시 원래대로 되돌렸다.[7]

옹정(雍正) 원년(1723년) 특별히 대신을 가려 뽑아 태상시의 일을 관리 감독하게 하였다. 이후 건륭(乾隆) 14년에 이르러 예부만상서(禮部滿尚書)[8]에게 태상의 직함을 겸해서 맡도록 하고 이를 영구히 법식으로 삼도록 하였다.[7]

광서(光緒) 24년(1898년)에 태상시는 예부에 병합되었다가 얼마 안 가서 다시 복구되었다. 그러나 광서 32년(1906년)에 이르러 다시금 합병되었다.[7]

2. 2. 수·당 시대

북제 때 태상시(太常寺)라는 기구 이름이 등장하였다.

태상시는 능묘(陵廟)의 여러 제사, 예악(礼楽), 의식(儀式) 관련 제도, 천문 술수(天文術数), 의관(衣冠) 종류 등을 관장하였다.[4] 수(隋) 왕조는 교사(郊社)·태묘(太廟)·제릉(諸陵)·태축(太祝)·의관·태악(太楽)·청상(清商)·고취(鼓吹)·태의(太医)·태복(太卜)·늠희(廩犧) 등의 관서를 통괄하였으며, 각 관서마다 령(令)이나 승(丞)을 설치하였다.[5] 당(唐)은 수 왕조의 태상시를 그대로 계승하여 왕조의 예악·교묘(郊廟)·사직(社稷) 관련 일을 관장하였다.

수, 당 시대에 태상시는 경시(卿寺), 즉 최고 장관이 경(卿)으로 임명되는 관서였다. 태상시 장관은 태상시경(太常寺卿, 태상경)이라 불렸으며, 관위는 정3품(正三品)이었다. 차관은 태상시소경(太常寺少卿, 태상소경)이라 하여 관위는 정4품상(正四品上)이었다. 그 아래에 태상시승(太常寺丞, 종5품하) 2인, 태상시주부(太常寺主簿, 종7품상) 2인, 태상시녹사(太常寺録事, 종9품하) 1인이 설치되었다.[6]

2. 3. 송 시대

송 왕조에서는 6부(六部)에 기존 9시의 직권이 제각기 분할되었는데, 태상시도 예외는 아니었다. 태상시의 직권은 별도의 태상예원에 속하였으며, 이에 따라 태상시는 한직이 되었고 사직(社稷) 2단과 무성 오묘(五庙), 그리고 수도의 교방(敎坊)만을 관할하게 되었다.

2. 4. 명 시대

1368년 주원장이 명나라를 건국하며 태상시를 다시 설치하였다. 태상시에는 경(卿), 소경(少卿), 승(丞), 전부(典簿), 협률랑(協律郎), 박사(博士), 찬례랑(贊禮郎) 등의 관원을 두었다.[4] 같은 해 사제서(祠祭署)를 설치하고 령(令)과 승(丞)을 임명하였으며, 1380년에는 협률랑 등 관원의 품계 등급을 제정하였다.

1391년 각 령의 이름을 봉사(奉祀)로, 승은 사승(祀丞)으로 바꾸었다. 1397년 사(司)를 시(寺)로 고치면서 태상시(太常寺)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관제를 예전대로 되돌렸다.

건문 연간(1399년~1402년)에는 찬례랑 2인과 태축 1인을 추가하였다. 1403년 천단(天壇)을 천지단(天地壇)으로 고치고 나머지는 모두 홍무 연간(1368년~1398년)의 제도로 되돌렸다.

1425년 희생소(犧牲所)를 설치하고 이목(吏目)에게 관련 공문을 관리하게 하였다. 명 세종은 제사 관련 제도를 정비하며 천지단을 천단과 지단(地壇)으로 나누고, 산천단(山川壇), 적전제사서(藉田祀祭署)를 신기(神祇), 대사전(大祀殿)을 기곡전(祈穀殿)으로 고쳤다. 또한 조일단(朝日壇), 석월단(夕月壇)을 증설하고 각기 사제서를 설치하였으며, 협률랑, 찬례랑, 사악(司樂) 등의 관원을 늘렸다. 신기단은 1576년 선농단(先農壇)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2. 5. 청 시대

왕조에서도 초기에 태상시를 두어 예부(禮部)에 속하게 하였다. 1659년(순치 16년) 원래 예부에서 관장하던 제사 업무는 태상시에서 담당하게 되었다.[7] 1663년(강희 2년) 태상시 업무를 다시 예부로 이관했다가 1671년(강희 10년)에 다시 환원했다.[7]

1723년(옹정 원년) 특별히 대신을 선발하여 태상시 업무를 관리 감독하게 하였다. 이후 1749년(건륭 14년) 예부만상서(禮部滿尚書)[8]에게 태상 직함을 겸임하도록 하고, 이를 영구적인 제도로 삼았다.[7]

1898년(광서 24년) 태상시는 예부에 병합되었다가 얼마 후 복구되었다. 그러나 1906년(광서 32년) 다시 예부에 합병되었다.[7]

3. 조직 및 구성

당나라 시대 태상시는 사인들이 임명되는 청요직이었다. 당나라와 명나라 시대 태상시의 주요 관직 변화는 다음과 같다.

당나라 시대명나라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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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 시대 태상시 소속 부서로는 장안(서도)과 낙양(동도)의 교사(郊社)에 령(令)이 임명되었고, 령의 관위는 종7품이었다. 명나라 시대에는 1368년 사제서(祠祭署)를 설치하고 령(令), 승(丞)을 임명하였으며, 1391년 각 령의 이름을 봉사(奉祀), 승은 사승(祀丞)으로 바꾸었다. 1397년 사(司)를 시(寺)로 하면서 이름을 태상시(太常寺)로 하고 관제를 예전대로 되돌렸다.

천단(天壇), 지단(地壇), 조일단(朝日壇), 석월단(夕月壇), 선농단(1576년 신기단(神祇壇)에서 개칭), 제왕묘(帝王廟), 기곡전(祈穀殿), 장릉(長陵) 등 각 능묘에는 사제서(祠祭署)에 봉사(奉祀) 각 1인(종7품)과 사승(祀丞) 2인(종8품)을 두었다. 1425년 희생소(犧牲所)를 설치하고 이목(吏目) 1인(종9품)에게 관련 공문을 관장하게 하였다.

수나라, 당나라, 송나라, 금나라, 원나라 시대에는 황실 제사원 산하에 국가 제단 사무소(國家祭壇事務所|국가 제단 사무소|교사서중국어)라는 정부 기관을 두었다.

3. 1. 당 시대

당나라 시대 태상시는 사인(士人)들이 임명되는 청요관(清要官)이었다. 태상시의 관직은 다음과 같았다.

직책품계인원설명
경(卿)정3품1인태상시의 장관. 예악(禮樂)과 교묘(郊廟), 사직(社稷)의 일을 맡고 태상시에 속한 각 관서들에 대한 업무를 총괄.
소경(少卿)정4품상2인태상시의 부장관. 태상시경(태상경)을 보좌.
승(丞)2인
박사(博士)4인
태축(太祝)6인
봉례랑(奉禮郎)2인
협률랑(協律郎)2인



태상시의 소속 부서로는 장안(서도)과 낙양(동도)의 교사(郊社)에 령(令)이 임명되었고, 령의 관위는 종7품이었다.


  • 태악서령(太樂署令) 종7품하
  • 고취서령(鼓吹署令) 종7품하
  • 태의서령(太醫署令) 종7품하
  • 태복서령(太卜署令) 종7품하
  • 늠희서령(廩犧署令) 정8품상

3. 2. 명 시대

주원장이 명나라를 세우고 태상시를 다시 설치했을 때, 태상시에는 경, 소경, 승, 전부(典簿), 협률랑(協律郎), 박사(博士), 찬례랑(贊禮郎) 등의 관직이 있었다.[1]

1368년에는 사제서(祠祭署)를 설치하고 령(令)과 승(丞)을 임명했으며, 1380년에는 협률랑 등의 관품 등급을 제정하였다.[1] 1391년에는 각 령의 이름을 봉사(奉祀)로, 승은 사승(祀丞)으로 바꾸었다.[1] 1397년에는 사(司)를 시(寺)로 바꾸면서 이름을 태상시(太常寺)로 하고 관제를 예전대로 되돌렸다.[1]

건문 연간(1399년~1402년)에는 찬례랑 2인과 태축 1인을 늘렸다가, 1403년에 천단(天壇)을 천지단(天地壇)으로 고치고 나머지는 모두 홍무 연간(1368년~1398년)의 제도로 되돌렸다.[1]

1425년에는 희생소(犧牲所)를 설치하고 이목(吏目)에게 관련 공문을 관리하게 했다.[1] 명 세종(明世宗)은 제사 관련 제도를 정비하면서 천지단을 천단과 지단(地壇)으로 나누고, 산천단(山川壇), 적전제사서(藉田祀祭署)를 신기(神祇), 대사전(大祀殿)을 기곡전(祈穀殿)으로 고쳤다.[1] 또한 조일단(朝日壇), 석월단(夕月壇)을 추가로 설치하고 각기 사제서를 두었으며, 협률랑, 찬례랑, 사악(司樂) 등의 관원을 늘렸다.[1] 신기단은 1576년에 선농단(先農壇)으로 이름을 바꾸었다.[1]

명나라 시대 태상시의 직제 구성은 다음과 같다.[1]

직책품계정원비고
경(卿)정3품1인
소경(少卿)정4품2인
시승(寺丞)정6품2인
전부청 전부(典簿廳 典簿)정7품2인
박사(博士)정7품2인
협률랑(協律郎)정8품2인가정 연간에 5인까지 증원
찬례랑(贊禮郎)정9품9인가정 연간에 23인까지 증원, 후에 2인 감축
사악(司樂)종9품20인가정 연간에 39인까지 증원, 후에 2인 감축
천단(天壇), 지단(地壇), 조일단(朝日壇), 석월단(夕月壇), 선농단(先農壇), 제왕묘(帝王廟), 기곡전(祈穀殿), 장릉(長陵), 헌릉(獻陵), 경릉(景陵), 유릉(裕陵), 무릉(茂陵), 태릉(泰陵), 현릉(顯陵), 강릉(康陵), 영릉(永陵), 소릉(昭陵)의 각 사제서(祠祭署) 봉사(奉祀)종7품각 1인
사승(祀丞)종8품2인
희생소(犧牲所) 이목(吏目)종9품1인


참조

[1] 서적 隋書
[2] 서적 隋書
[3] 서적 新唐書
[4] 서적 隋書
[5] 서적 隋書
[6] 서적 新唐書
[7] 서적 中國歷代政制考 國立編譯館 1987
[8]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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