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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리수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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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텔리수 전투는 1904년 6월, 러일 전쟁 중 일본군이 러시아군을 격파한 전투이다. 러시아 제국은 뤼순 요새 포위를 막기 위해 텔리수로 진격했으나, 일본군의 포위 작전에 실패하여 후퇴했다. 이 전투로 러시아군은 뤼순의 병력과 합류하지 못했고, 일본군은 뤼순 항 공세를 본격적으로 시작할 수 있었다. 러시아군의 사상자는 최소 3,500명, 일본군은 1,163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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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리수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전투 정보
명칭텔리수 전투 (得利寺の戦い, Бой у Вафангоу)
일부러일 전쟁
일본군이 랴오둥 반도에 상륙하여 슝웨청을 점령하는 모습 (일본 석판화)
시기1904년 6월 14일6월 15일
장소만주 뤼순 항 북부 (와팡뎬 더리시)
결과일본의 승리
교전 세력
교전국 1일본 제국
교전국 2러시아 제국
지휘관
일본 제국오쿠 야스카타
러시아 제국게오르기 폰 슈타켈베르크
파벨 미셴코
알렉산드르 게른그로스
병력 규모
일본 제국33,600–40,000명
러시아 제국30,000–41,400명
피해 규모
일본 제국전사 217명, 부상 946명
러시아 제국전사 및 부상 2,000–5,000명, 실종 665명
피해 규모 참고러시아군이 철수할 때 만주 비적의 습격을 받아 손실이 더 클 수 있음 (크로파트킨 보고 기준)
지리 정보

2. 배경

난산 전투에서 일본군에게 패배한 후, 러시아 제국총독 예브게니 알렉세예프는 뤼순의 완전한 포위를 막기 위해 군사적 진격을 해야 한다는 극심한 정치적 압박을 받았다. 만주 주둔 러시아 제국군의 총사령관 알렉세이 쿠로파트킨 장군은 이 계획에 격렬히 반대했는데, 이는 무모하고 위험하다고 느꼈으며, 무크덴에서 시베리아 횡단 철도가 공세를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증원을 가져오기를 기다리는 것을 선호했다. 이 문제는 1904년 5월 27일, 알렉세예프 총독이 쿠로파트킨 장군을 무크덴 회의에 소환했을 때 최고조에 달했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소리를 질렀고, 이 문제는 결정하기 위해 상트페테르부르크로 회부되었다. 차르는 총독의 편을 들었고, 쿠로파트킨 장군은 마지못해 랴오양에서 뤼순 방향으로 공세를 펼쳐야 했지만, 그는 그 항구에 도달할 것이라고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 제1 시베리아 군단의 27,000명의 보병, 2,500명의 기병 (시모노프 중장의 지휘 하에) 및 98문의 대포를 지휘하는 게오르기 슈테켈베르크 중장이 이 임무에 선택되었다. 그들은 나중에 최전선 부대가 철수할 때 도착한 3,000명의 소총병과 두 문의 대포로 보충되었다.

난산 전투 이후, 일본 제국 육군 장군 오쿠 야스카타는 일본 제2군 사령관으로서, 도주하는 러시아군이 거의 손대지 않은 채 버려둔 다롄의 부두를 점령하고 수리했다. 5월 5일, 노기 마레스케 남작 장군이 다롄에 도착하여 일본 제3군의 새로운 사령관을 맡았는데, 이 군은 제1 및 제11 사단으로 구성되었다. 오쿠 장군의 제2군은 제3, 제4 및 제5 사단과 병력 부족의 제6 사단으로 재편성되었으며, 총 병력은 36,000명의 보병, 2,000명의 기병 및 216문의 포병이었다. 3군은 뤼순을 포위하도록 하고, 기병 정찰병의 보고에 의해 러시아군의 남부 이동이 확인되자, 오쿠는 6월 13일 랴오양 남쪽의 철도 노선을 따라 북쪽으로 군대를 이동하기 시작했다.

교전 일주일 전, 쿠로파트킨은 슈테켈베르크를 남쪽으로 보내 난산을 재탈환하고 뤼순으로 진격하되, 우세한 병력에 맞서 결정적인 행동은 피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일본군은 5월 30일부터 천천히 북쪽으로 이동해 왔다. 양측은 계속 병력을 증강했고, 서로의 전력을 시험하기 위해 보병 소규모 교전과 포격전을 사용했다. 러시아군은 일본 제2군의 목표가 뤼순 점령이라고 믿고, 지휘 시설을 텔리수로 옮겼다. 슈테켈베르크는 자신의 부대를 철도 양쪽에 배치하여 참호를 구축했고, 시모노프 중장은 제19 기병 대대를 지휘하여 전선의 맨 오른쪽을 맡았다. 오쿠는 철도 양쪽에 각각 3, 5사단을 배치하여 정면 공격을 가하고, 제4사단은 푸저우 계곡을 따라 러시아군 우익으로 진격할 의도였다. 우세한 병력을 가지고 북쪽으로 진격하려는 분명한 목적을 가진 오쿠는 6월 14일 아침에 이동을 시작했다.

2. 1. 조선에 미친 영향

3. 전투 경과

일본 육군 제2군은 〈남산 전투〉에서 승리하여 러시아군 주력을 뤼순 요새의 2개 사단 및 러시아 태평양 함대와 분리시켰다. 이들과 다시 합류하기 위해 스탁겔베르크 중장이 이끄는 시베리아 제1군단이 남하하여 득리사(得利寺) 부근에 진지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제2군은 당초 진지를 구축하고 러시아군의 공세를 요격한 후 공세에 나설 예정이었지만, 대본영에서 적의 진지 구축이 완료되기 전에 공격하라는 명령이 내려와 득리사 러시아군 진지를 공격하기로 했다.

6월 14일에 득리사 부근에 도착한 제2군은 다음날 15일에 화포로 진지 공격을 시작했다. 러시아 군대도 응전했지만, 일본 육군은 화포를 200문 이상 보유한 반면, 러시아군은 100문이 채 되지 않았기 때문에 유리한 지형을 살릴 수 없었다. 러시아군이 득리사 역에 불을 지르고, 웅악성(熊岳城)으로 철수하면서, 제2군의 승리로 끝났다.

같은날 오쿠는 텔리수 마을 근처에 참호로 방어선을 구축한 러시아군 진지를 향해 병력을 북쪽으로 진격시켰다. 그날 스토켈베르크는 승리할 가능성이 있었다. 러시아군은 고지를 점령하고 있었고 야전 포병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오쿠는 러시아 방어선을 향해 계곡을 곧바로 돌격하는 대신에 3, 5사단을 중앙으로 전진시켜 위협을 가하는 척을 하면서, 4사단을 신속하게 서쪽으로 이동시켜 러시아군의 우익을 포위하려 했다. 러시아 전초 기지들은 이 움직임을 감지했지만, 안개가 자욱한 날씨로 인해 헬리오그래프를 사용하여 스토켈베르크에게 제때 경고할 수 없었다.

전투는 포병 교전으로 시작되었는데, 이는 일본군 포가 수적으로 우세할 뿐만 아니라 정확도에서도 우월함을 보여주었다. 이 전투에서 신형 러시아 푸틸로프 M-1903 야전포가 처음 등장했지만, 승무원들의 훈련 부족과 고위 포병 장교들의 구식 개념으로 인해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 우수한 일본군 포병은 전투 전체에 걸쳐 상당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중앙에 있던 일본군 사단이 소규모 교전을 시작하자, 스토켈베르크는 적의 위협이 자신의 우익이 아닌 좌익에서 올 것이라고 판단하고, 그 방향으로 주 예비대를 투입했다. 이는 매우 치명적인 실수였다.

소규모 교전은 밤늦게까지 계속되었고, 오쿠는 새벽에 주 공격을 시작하기로 결정했다. 마찬가지로 스토켈베르크도 6월 15일 아침이 자신의 결정적인 반격을 가할 시간이라고 결정했다. 놀랍게도 스토켈베르크는 현장 지휘관들에게 구두 명령만 내렸고, 실제 공격 시간은 모호하게 남겨두었다. 공격을 언제 시작해야 할지 알 수 없었고, 어떠한 문서 명령도 받지 못한 개별 지휘관들은 오전 7시경까지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알렉산드르 게르그로스 중장이 지휘하는 제1 동시베리아 소총 사단의 약 3분의 1만이 공격에 참여했기 때문에 일본 제3사단은 예상치 못한 공격을 받았지만, 우위를 점하지 못하고 곧 실패로 끝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스토켈베르크는 노출된 우익에 대한 일본군의 강력한 공격에 대한 당황한 보고를 받았다. 포위를 피하기 위해 러시아군은 후퇴하기 시작했고, 오쿠의 제4, 5사단이 유리한 고지를 굳히자 귀중한 포병을 버렸다. 스토켈베르크는 11시 30분에 후퇴 명령을 내렸지만, 격렬한 전투는 14시까지 계속되었다. 일본군 포병이 기차역을 목표로 삼았을 때, 러시아군 증원군이 기차로 도착했다. 15시경, 스토켈베르크는 심각한 패배에 직면했지만, 갑작스러운 폭우로 일본군의 진격이 늦춰졌고, 그는 포위된 병력을 무순으로 철수시킬 수 있었다.[2]

결과적으로, 여순항을 구원하기 위한 유일한 러시아군의 공세는 러시아에게 재앙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3. 1. 전술 분석

1904년 6월 14일, 오쿠 야스카타 대장이 이끄는 일본군은 텔리수 마을 근처에서 참호로 방어선을 구축한 러시아군을 향해 북쪽으로 진격했다.[2] 러시아군은 고지를 점령하고 야전 포병도 갖추고 있었으나, 오쿠는 정면 공격 대신 3, 5사단을 중앙에 배치하여 위협을 가하는 척하면서 4사단을 서쪽으로 이동시켜 러시아군의 우익을 포위하려 했다.[2] 안개가 짙어 러시아 전초 기지들은 이 움직임을 감지하고도 헬리오그래프를 통해 스토켈베르크에게 즉시 경고할 수 없었다.[2]

전투는 포병 교전으로 시작되었으며, 일본군 포는 수적 우세와 더불어 정확도에서도 우월함을 보였다.[2] 러시아군의 신형 푸틸로프 M-1903 야전포가 처음 등장했지만, 승무원 훈련 부족과 고위 포병 장교들의 구식 개념으로 인해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2]

일본군이 중앙에서 소규모 교전을 시작하자, 스토켈베르크는 적의 위협이 우익이 아닌 좌익에서 올 것이라고 판단하여 주 예비대를 좌익으로 투입하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2]

밤늦게까지 소규모 교전이 이어졌고, 오쿠는 새벽에 주 공격을 개시하기로 결정했다.[2] 스토켈베르크 또한 6월 15일 아침에 반격을 가하기로 결정했으나, 구두 명령만 내리고 공격 시간은 명확히 하지 않았다.[2] 오전 7시경, 알렉산드르 게르그로스 중장이 지휘하는 제1 동시베리아 소총 사단의 약 3분의 1만이 공격에 참여했으나, 일본 제3사단은 우위를 점하지 못하고 곧 실패했다.[2] 얼마 지나지 않아 스토켈베르크는 일본군이 우익을 강력하게 공격한다는 보고를 받았고, 포위를 피하기 위해 러시아군은 후퇴하며 포병을 버렸다.[2] 11시 30분에 스토켈베르크는 후퇴 명령을 내렸지만, 격렬한 전투는 14시까지 계속되었다.[2] 일본군 포병이 기차역을 목표로 삼자 러시아군 증원군이 도착했고, 15시경 스토켈베르크는 패배를 직면했지만, 폭우로 일본군의 진격이 늦춰져 포위된 병력을 무순으로 철수시킬 수 있었다.[2]

결과적으로, 여순항을 구원하기 위한 러시아군의 유일한 공세는 실패로 끝났다.[2]

4. 결과

텔리수 전투 이후 러시아군은 뤼순의 부대와 합류하지 못했다. 일본군은 추격하지 않았지만, 이 전투로 쿠로파트킨 장군의 군대에 의한 습격 위협이 사라져 뤼순항 진격을 본격적으로 시작할 수 있었다.

러시아군의 사상자는 공식 기록상 최소 3,500명(전사 477명, 부상 2,240명, 실종 754명)이었으나, 일부에서는 1만 명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일본군 사상자 수는 1,163명(전사 217명, 부상 946명)이었다.

텔리수 전투가 벌어지던 날,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던 러시아 순양함은 일본 근해에서 일본 수송선 2척을 격침시켜 2,000명 이상의 인명 손실과 여순항 포위에 필수적인 공성포 여러 문을 잃게 했다.

4. 1. 블라디보스토크 함대의 활동

5. 영향

텔리수 전투 이후 일본 제2군이 러시아군을 추격하지 않은 것에 대한 비판이 있었지만, 러시아군은 이후에도 뤼순의 부대와 합류하지 못했다. 러시아군의 사상자는 공식 기록상 최소 3,500명(사망 477명, 부상 2,240명, 실종 754명)이었으며, 일부에서는 1만 명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일본군 사상자 수는 1,163명(사망 217명, 부상 946명)이었다.

이 전투로 쿠로파트킨 장군 부대의 습격 위협이 사라져, 일본군은 뤼순항 공세를 본격적으로 시작할 수 있었다.

텔리수 전투가 벌어지던 날,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던 러시아 순양함이 일본 근해에서 일본 수송선 2척을 격침시켜 2,000명 이상의 인명 피해를 냈고, 여순항 포위에 필수적인 공성포를 잃게 했다.

5. 1. 일본

5. 2. 러시아

5. 3. 조선

참조

[1] 간행물 Russian Main Military Medical Directorate (Glavnoe Voenno-Sanitarnoe Upravlenie) statistical report 1914
[2] 서적 The Collins Encyclopedia of Military History 1993
[3] 서적 日露戦争陸戦の研究
[4] 간행물 Russian Main Military Medical Directorate (Glavnoe Voenno-Sanitarnoe Upravlenie) 통계 보고서 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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