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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몰레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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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티몰레온은 코린토스 출신으로, 형제 티모파네스를 암살하는 데 관여한 후 20년 동안 정치에서 물러났다. 기원전 344년 시라쿠사의 도움 요청을 받아 시칠리아로 파견되어, 카르타고의 지원을 받는 독재자들을 몰아내고 시라쿠사를 해방시켰다. 그는 그리스에서 새로운 정착민들을 데려와 민주 정부를 수립했으며, 크리미소스 전투에서 카르타고를 격파하여 시칠리아에 평화를 가져왔다. 시라쿠사 통치 이후 정계에서 은퇴했으며, 그의 업적은 시칠리아 전역에서 칭송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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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몰레온
기본 정보
티몰레온
티몰레온
출생코린토스
사망시라쿠사
생애
직업군인, 정치가
복무고대 그리스
계급장군
참여 전쟁크림소스 전투
밀라이 전투
아바쿠아스 전투
기타 정보
관련 인물코린토스

2. 어린 시절

티몰레온은 코린토스의 유력 가문 출신으로, 그의 형제 티모파네스는 전투에서 티몰레온에게 목숨을 구원받았다. 그러나 티모파네스는 코린토스의 아크로폴리스를 장악하고 도시의 지배자가 되었다. 티몰레온은 이에 저항했으나 소용이 없었고, 결국 친구들과 함께 티모파네스를 살해했다.

이러한 티몰레온의 행동은 공적으로는 애국적인 행위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어머니의 저주와 친척들의 분노로 인해 티몰레온은 20년간 은둔 생활을 하게 되었다.[4][5]

2. 1. 형제 살해

티몰레온은 코린토스 과두정의 일원이었다.[4] 기원전 360년대 중반, 티몰레온의 형제인 티모파네스는 코린토스의 아크로폴리스를 점령하고 사실상 도시의 참주가 되었다. 티몰레온은 이전 전투에서 형제의 목숨을 구했음에도 불구하고, 티모파네스에게 그만두라고 거듭 간청했다.[4] 그러나 티모파네스가 이를 듣지 않자, 티몰레온은 암살에 관여했다.[5]

기원전 360년경, 티모파네스는 아크로코린토스를 점령하고 코린토스의 참주가 되었다. 티몰레온은 형의 권력을 이용하여 지배권을 얻을 수 있었음에도, 코린토스에 자유를 가져다주는 것을 선택했다. 그는 티모파네스의 암살을 계획하고 실행에 옮겼으나, 친형을 살해하는 일이었기에 직접 손을 쓰지는 않았다.[11]

대부분의 코린토스인들은 티몰레온의 행동을 애국적인 것으로 간주했지만, 형제 살해라는 비극적인 사건, 어머니의 저주, 그리고 일부 동료 시민들의 분노로 인해 그는 20년 동안 정치와 시민 생활에서 스스로 물러났다. 티몰레온의 어머니는 티모파네스를 살해한 그를 "신도 두려워하지 않는 형 살해자"라고 경멸하며 저주했고, 일부 시민들 역시 그를 형 살해자로 비판했다. 그 때문에 티몰레온은 정신 질환을 앓게 되었고, 자살을 시도했지만 실패했으며, 20년에 걸친 긴 은둔 생활을 보내게 되었다.

3. 시칠리아 원정

기원전 344년, 시라쿠사는 정치적 문제와 스파르타의 위협으로 인해 코린토스에 도움을 요청했다.[14] 코린토스는 이 요청을 받아들여 티몰레온을 파견했고, 티몰레온은 소규모 그리스 용병부대와 함께 시칠리아로 향했다.

카르타고 함대를 피해 타우로메니움(현재의 타오르미나)에 상륙한 티몰레온은, 당시 레온티니의 독재관 히케타스가 시라쿠사의 디오니시우스 2세가 장악하고 있던 오르티기아 섬을 제외한 시라쿠사 대부분을 지배하고 있는 상황에 직면했다.

히케타스는 내륙 도시 아드라눔에서 패배한 후 시라쿠사로 밀려났다. 기원전 343년, 디오니시우스 2세는 코린토스로 안전하게 이동하는 조건으로 오르티기아를 항복시켰다. 이후 히케타스는 카르타고로부터 6만 명의 지원을 받았으나, 상호 불신으로 인해 카르타고는 히케타스를 포기했고, 히케타스는 레온티니에 포위되어 항복했다. 이로써 티몰레온은 시라쿠사의 지배자가 되었다.

티몰레온은 즉시 재건 작업을 시작하여 모도시와 그리스에서 새로운 정착민들을 데려오고 디오클레스의 민주 법에 기초한 대중적인 정부를 세웠다.

히케타스는 다시 카르타고를 움직여 기원전 340년~기원전 339년에 7만 대군을 릴리바이움(현재의 마르살라)에 상륙시켰다. 티몰레온은 약 1만 2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섬을 가로질러 서쪽으로 진군하여 셀리누스 인근 크리미소스 전투에서 카르타고 군을 크게 무찔렀다. 이 승리로 시칠리아의 그리스인들은 카르타고로부터 오랫동안 평화와 안전을 얻게 되었다.[15]

이후 카르타고는 용병을 보내 티몰레온과 독재관들 사이의 불화를 조장하려 했으나, 히케타스가 패배하고 처형되면서 실패했다.

기원전 338년, 카르타고는 할리쿠스(플라타니) 강 서쪽으로 시칠리아 내 카르타고 영토를 제한하고, 독재관들에게 더 이상 원조를 제공하지 않겠다는 조약에 합의했다.[15]

3. 1. 시라쿠사 해방

시라쿠사의 정치적인 문제와 스파르타의 위협 때문에 시라쿠사인들은 기원전 344년에 그들의 모도시인 코린토스에 도움을 요청했다.[14] 코린토스는 도움을 제공하기로 동의했지만, 주요 시민들은 혼란스러운 시라쿠사에 안정적인 정부를 세우는 어려운 임무를 맡기를 거부했다.

기원전 431년경의 시칠리아


티몰레온은 코린토스 민회에서 무기명 투표로 임무를 수행하도록 선택되었다. 그는 7척의 배, 코린토스의 지도적인 시민 몇 명, 그리고 700명의 그리스 용병으로 구성된 소규모 부대를 이끌고 시칠리아로 출항했다.[5] 그는 카르타고 함대를 따돌리고 기원전 344년에 타우로메니움(현재의 타오르미나)에 상륙했고, 그곳에서 우호적인 환영을 받았다. 이 시기에 레온티니의 폭군인 레온티니의 히케타스는 시라쿠사의 디오니시우스 2세가 점령하고 있는 오르티기아 섬을 제외한 시라쿠사를 지배하고 있었다.

히케타스는 내륙 도시인 아드라눔에서 티몰레온에게 패배하여 시라쿠스로 후퇴했다. 예상치 못한 초기 성공 이후, 티몰레온은 코린토스와 일부 북서부 그리스 국가로부터 증원을 받았다.[5] 시라쿠사 포위전 이후, 디오니시우스 2세는 코린토스로 안전하게 갈 수 있도록 허락받는 조건으로 기원전 343년에 오르티기아를 항복했으며, 그는 사생활을 누리며 부유한 시민으로서 생을 마감했다.

히케타스는 이제 카르타고로부터 6만 명의 지원을 받았지만,[15] 불운은 상호 의심을 불러일으켰다. 카르타고인들은 히케타스를 버렸고, 히케타스는 레온티니에서 포위되었고, 결국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티몰레온은 시라쿠사의 지배자가 되었다.

그는 즉시 재건 사업을 시작했고, 시라쿠사 시민을 억압하기 위해 폭군들이 건설하고 사용했던 요새를 파괴하는 상징적인 행위로 시작하여, 이를 법정으로 대체했다. 그는 인구가 감소한 시칠리아에 그리스 전역에서 새로운 정착민들을 데려왔고, 시라쿠사의 디오클레스의 민주적인 법률을 바탕으로 민주 정부를 재건했다. 세 개의 씨족에서 추첨으로 매년 선택되는 올림피아 제우스(ἀμφίπολος Διὸς Ὀλυμπίουgrc)의 ''암피폴로스'' 또는 사제[7]가 최고 행정관으로 임명되었다. 티몰레온의 개혁의 영향은 아우구스투스 시대까지 지속된 것으로 보인다.

히케타스는 카르타고에게 7만 명의 대군을 파견하도록 설득했고, 이 군대는 릴리바이움(현재의 마르살라)에 상륙했다 (기원전 340-339년). 약 12,000명의 다양한 징집병들, 대부분 용병으로 구성된 티몰레온은 섬을 가로질러 서쪽으로 행군하여 셀리누스 인근으로 향했다. 모든 역경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군대보다 6배나 많은 적을 마주하는 것은 가망이 없다고 믿은 그의 군대의 일부가 탈주한 후, 티몰레온은 자신의 보병대를 이끌고 크리미소스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그의 승리는 카르타고 군대가 아직 강을 건너는 것을 완료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의 소규모 부대가 카르타고 군대의 엘리트 부분과만 싸워야 했다는 사실에 의해 가능해졌다. 그는 또한 그의 군대의 뒤쪽에서 불어 카르타고인들을 눈멀게 하는 폭풍의 도움을 받았다.

이후, 카르타고는 티몰레온과 그리스 폭군들 사이의 분쟁을 연장하기 위해 용병을 파견했다. 그러나 이것은 히케타스의 패배로 끝났고, 그는 포로로 잡혀 처형되었다. 기원전 338년에 조약이 체결되었는데, 이 조약에 따라 카르타고는 시칠리아에서 할리쿠스(플라타니) 강 서쪽으로 제한되었고 더 이상 시칠리아 폭군을 돕지 않기로 약속했다.[8] 이 조약은 시칠리아의 그리스인들에게 수년간의 평화를 가져다주었고, 번영과 법치, 그리고 카르타고로부터의 안전을 회복시켰다.

당시 시라쿠사는 디온이 살해당하고 디오니시우스 2세가 참주의 자리에 복귀했지만, 레온티노이의 참주 히케타스에 의해 포위 공격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히케타스는 자유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지배 욕구를 위해 싸우고 있었다.

시라쿠사 사람들은 코린토스로 사절을 파견하여, 이 참주들 간의 전쟁에서 해방시켜 줄 지도자를 구했다. 원래 시라쿠사는 코린토스의 식민 도시였기에, 코린토스는 시라쿠사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선택된 것이 티몰레온이었다. 지휘관으로 임명된 티몰레온은, 7척의 군선과 소수의 코린토스 중장보병, 700명의 용병을 이끌고 시칠리아 섬을 향했다. 그 사흘 전에 히케타스는 부분적으로 시라쿠사를 지배하는 데 성공했고, 이를 위협받고 싶지 않았던 그는, 카르타고의 삼단노선 20척과 사절을 티몰레온에게 파견했다.[12] 사절은 "히케타스의 승리로 곧 전쟁이 종결될 것이다. 그 군대를 코린토스로 귀환시켜 주시길 바란다. 다만, 괜찮으시다면, 티몰레온은 조언자로서 히케타스와 동맹을 맺어 주시길 바란다"라고 티몰레온에게 전했다. 티몰레온은 이에 동의하지 않고, 몰래 군선에 탑승하여 출발, 타우로메니온에 상륙하여 그곳에서 환대를 받았다. 또한, 타우로메니온의 지배자로부터 원조를 받아, 타우로메니온 시민군의 원군을 얻을 수 있었다.

티몰레온의 시라쿠사 전투에서의 공적은 플루타르코스와 시켈리아의 디오도로스의 저작에 의해 기록되어 있지만, 기록된 내용은 일치하지 않는다. 다음 기술은 디오도로스에 의한 것이다.

히케타스는 자신의 영지 아드라논에 5,000명의 군대를 파견했다. 이에 맞서는 티몰레온은 1,000명도 안 되는 군대로 아드라논으로 진군했다. 티몰레온은 아드라논에 도착하자마자 저녁 식사 중인 적군을 기습 공격하여 300명 이상의 병사를 살해하고 약 600명의 병사를 포로로 잡았다. 그 직후 시라쿠사로 급히 진군하여 이번에는 본거지를 기습했다. 그 결과 시라쿠사의 일부 지역을 탈취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히케타스는 여전히 시라쿠사의 일부를 영유하고 있었고 항복하지 않았다.

시라쿠사는 디오니시우스 2세의 지배 영역, 히케타스의 지배 영역(네아폴리스와 그 인접 지역 등), 그리고 티몰레온이 탈취한 영역(기타 지역)으로 삼분되었다. 히케타스와 동맹을 맺었던 카르타고는 시칠리아의 항구에 150척의 삼단 노선으로 밀려와 약 5만 명의 병사를 상륙시켰다. 티몰레온은 타우로메니온에서 온 원군과 코린토스에서 온 원군에 의해 군대를 증강했다. 카타니아의 참주도 티몰레온의 편이 되었다.

기원전 343/342년, 티몰레온은 오르티기아에 갇혀 있던 디오니시우스 2세를 설득하여 안전하게 코린토스까지 망명하는 조건을 내걸고 항복시켰다. 어떤 이유(히케타스에게 배신당할 것에 대한 공포[13]에서. 그리스인은 카르타고인을 바르바로이로서 혐오했기 때문에 배신당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로 인해 카르타고군은 철수했고, 고립된 히케타스는 티몰레온에게 대항할 수 없어 항복했다. 이렇게 티몰레온은 시라쿠사 전체를 제압할 수 있었다.

시라쿠사의 전권을 손에 넣은 티몰레온은 그 부흥에 나섰다. 코린토스에서 이주민을 모집하고, 디오클레스의 법을 바탕으로 민주정을 확립했다. 참주정의 상징이기도 했던 요새는 파괴되었고, 그 자리에는 정의에 입각한 민중 재판소가 세워졌다. 올림피아제우스의 신관을 초청하여 장관으로 임명했다. 또한, 카르타고에 지배당하는 영지를 공격하여 카르타고로부터 해방해 갔다.

3. 2. 카르타고와의 전쟁

기원전 344년, 시라쿠사는 정치적 문제와 스파르타의 위협으로 인해 코린토스에 도움을 요청했다.[14] 코린토스는 이 요청을 받아들여 티몰레온을 파견했고, 티몰레온은 소규모 그리스 용병부대와 함께 시칠리아로 향했다.

카르타고 함대를 피해 타우로메니움(현재의 타오르미나)에 상륙한 티몰레온은, 당시 레온티니의 독재관 히케타스가 시라쿠사의 디오니시우스 2세가 장악하고 있던 오르티기아 섬을 제외한 시라쿠사 대부분을 지배하고 있는 상황에 직면했다.

히케타스는 내륙 도시 아드라눔에서 패배한 후 시라쿠사로 밀려났다. 기원전 343년, 디오니시우스 2세는 코린토스로 안전하게 이동하는 조건으로 오르티기아를 항복시켰다. 이후 히케타스는 카르타고로부터 6만 명의 지원을 받았으나, 상호 불신으로 인해 카르타고는 히케타스를 포기했고, 히케타스는 레온티니에 포위되어 항복했다. 이로써 티몰레온은 시라쿠사의 지배자가 되었다.

티몰레온은 즉시 재건 작업을 시작하여 모도시와 그리스에서 새로운 정착민들을 데려오고 디오클레스의 민주 법에 기초한 대중적인 정부를 세웠다.

히케타스는 다시 카르타고를 움직여 기원전 340년~기원전 339년에 7만 대군을 릴리바이움(현재의 마르살라)에 상륙시켰다. 티몰레온은 약 1만 2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섬을 가로질러 서쪽으로 진군하여 셀리누스 인근에서 크리미소스 전투에서 카르타고 군을 크게 무찔렀다. 이 승리로 시칠리아의 그리스인들은 카르타고로부터 오랫동안 평화와 안전을 얻게 되었다.[15]

이후 카르타고는 용병을 보내 티몰레온과 독재관들 사이의 불화를 조장하려 했으나, 히케타스가 패배하고 처형되면서 실패했다.

기원전 338년, 카르타고는 할리쿠스(플라타니) 강 서쪽으로 시칠리아 내 카르타고 영토를 제한하고, 독재관들에게 더 이상 원조를 제공하지 않겠다는 조약에 합의했다.[15]

3. 2. 1. 크리미소스 전투

기원전 340년에서 기원전 339년경, 레온티니의 히케타스는 카르타고를 설득하여 7만 명의 대군을 시칠리아의 릴리바이움(현재의 마르살라)에 상륙시켰다. 티몰레온은 대부분 용병으로 구성된 약 1만 2천 명의 병력을 이끌고 섬을 가로질러 서쪽으로 진군하여 셀리누스 근처에 도달했다. 티몰레온의 군대는 수적으로 열세였고, 일부 병사들은 탈영하기도 했다. 그러나 티몰레온은 보병을 이끌고 크리미소스에서 카르타고 군대에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 승리는 티몰레온의 전략과 당시의 기상 조건 덕분이었다. 카르타고 군대가 강을 건너는 동안 티몰레온은 소규모 부대로 카르타고 군대의 정예 부대와 교전할 수 있었다. 또한, 티몰레온 군대 뒤에서 불어오는 폭풍은 카르타고 군대의 시야를 가렸다.[15]

크리미소스 강 전투의 경과는 다음과 같다.

과정
카르타고군은 시라쿠사로 향하기 위해 크리미소스 강을 건너야 했다.
티몰레온은 코린토스군과 시라쿠사군 (보병 5,000명과 기병 1,000명)을 이끌고 출격했다.
시라쿠사에서 크리미소스 강까지는 200km 이상 떨어져 있어, 도착하는 데 8일이 걸렸다.
티몰레온 휘하의 1,000명 정도의 용병 부대가 공포에 질려 도망쳤다.
크리미소스 강에 도착한 티몰레온 군은 도하 지점이 잘 보이는 언덕에 포진하여, 카르타고군의 도착을 기다렸다.
총 8만 명에 달하는 카르타고의 대군이 나타나 크리미소스 강의 얕은 여울에서 도하를 시작했다.
카르타고군 1만 명의 전차·기병 부대가 도하를 끝낼 즈음에, 티몰레온은 기병 부대에 돌격 명령을 내렸다.
그리스 기병 부대는 1만 명의 전차·기병 부대를 유인했고, 카르타고 전차·기병 부대는 추격하다 너무 멀리 이탈해 버렸다.
무방비 상태가 된 카르타고 보병 부대에 티몰레온은 중장 보병 부대를 투입했다.
크리미소스 강 얕은 여울의 폭이 좁아, 카르타고는 대군을 전개할 수 없었으므로, 소수의 군대라도 대항할 수 있었다.
백병전에서는 그리스인 쪽이 용기와 전투 기술에서 우세하여 카르타고군을 압도했다.
악천후로 인해 크리미소스 강이 거칠어지기 시작하여, 카르타고군의 사기는 급격히 떨어졌다.
그리스 기병 부대에 패배한 카르타고 전차·기병 부대가 철수하기 위해 쇄도하면서, 카르타고군은 대혼란에 빠졌다.
강의 수위도 높아져 격류가 되었고, 많은 도하 중이던 카르타고군은 익사했다.
카르타고군의 정예 부대였던 신성 부대 2,500명만이 선전했지만, 최종적으로 몰살당했다.
카르타고군은 패주할 수밖에 없었고, 1만 명이 사망하고, 1만 5,000명이 포로로 잡혔다.
카르타고군의 전리품이 너무 많아, 모두 수집하는 데 사흘이나 걸렸다고 한다.



이 승리로 시칠리아의 그리스인들은 카르타고로부터 오랫동안 평화와 안전을 얻게 되었다.[15]

4. 시라쿠사 통치와 은퇴

344년경 시라쿠사 시민들은 모도시인 코린토스에 도움을 요청했다. 내부 갈등, 시라쿠사의 디오니시우스 1세와 그 아들의 폭정, 카르타고와의 분쟁으로 인해 시라쿠사는 쇠퇴하고 있었다.[6] 코린토스는 도움을 주기로 했지만, 주요 시민들은 이 어려운 임무를 맡기를 거부했다.

티몰레온은 코린토스 민회에서 지명되어 만장일치로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그는 7척의 배와 700명의 그리스 용병을 이끌고 시칠리아로 가 타우로메니움(현재의 타오르미나)에 상륙했다.[5] 당시 레온티니의 히케타스가 시라쿠사를 지배하고 있었고, 시라쿠사의 디오니시우스 2세는 오르티기아 섬만 점령하고 있었다.

히케타스는 아드라눔에서 티몰레온에게 패배하고 시라쿠스로 후퇴했다. 티몰레온은 코린토스와 그리스 국가들로부터 증원을 받았다.[5] 시라쿠사 포위전 이후, 디오니시우스 2세는 오르티기아를 항복하고 코린토스에서 여생을 보냈다.

히케타스는 카르타고의 도움을 받았지만(60,000명), 결국 카르타고인들은 히케타스를 버렸고, 히케타스는 레온티니에서 포위되어 항복했다. 이로써 티몰레온은 시라쿠사의 지배자가 되었다.

그는 즉시 재건 사업을 시작했고, 폭군들이 사용했던 요새를 파괴하고 법정을 세웠다. 그는 그리스 전역에서 새로운 정착민들을 데려왔고, 시라쿠사의 디오클레스의 법률을 바탕으로 민주 정부를 재건했다. 매년 추첨으로 선택되는 제우스(ἀμφίπολος Διὸς Ὀλυμπίουgrc)의 ''암피폴로스'' 사제가 최고 행정관으로 임명되었다.[7]

히케타스는 카르타고에 대군 파견을 설득했고, 카르타고 군대는 릴리바이움(현재의 마르살라)에 상륙했다(기원전 340-339년). 티몰레온은 약 12,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크리미소스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 승리는 카르타고 군대가 강을 건너기 전에, 티몰레온의 소규모 부대가 카르타고 군대의 엘리트 부분과만 싸울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또한 폭풍이 불어 카르타고인들의 시야를 가린 것도 도움이 되었다.

이후 카르타고는 용병을 파견했지만, 히케타스는 패배하고 처형되었다. 기원전 338년에 조약이 체결되어 카르타고는 할리쿠스(플라타니) 강 서쪽으로 제한되었고, 시칠리아 폭군을 돕지 않기로 약속했다.[8] 이 조약으로 시칠리아의 그리스인들은 수년간 평화와 번영을 누렸다.

4. 1. 민주정 확립

티몰레온은 새로운 시라쿠사 헌법을 수립했다. 당시 이 헌법은 민주적이라고 묘사되었다. 하지만 그는 짧은 기간 동안 최고 사령관에 해당하는 광범위한 권한을 행사하기도 했다. 그는 시라쿠사와 다른 시칠리아 도시의 재건을 돕기 위해 그리스 본토에서 이주민들을 초청했다. 이 기간 동안 그리스 시칠리아는 경제와 문화에서 회복을 누렸다.

4. 2. 은퇴와 죽음

티몰레온은 자신이 목표로 했던 바를 달성한 직후 은퇴했다. 그는 반세기 동안의 폭정, 고통, 경제 붕괴 직전의 상황, 혼란, 인구 감소 이후에 거둔 빛나는 승리, 신중함, 민주주의 회복으로 거의 모든 사람에게 존경받았다. 은퇴 후에도 그의 동포들의 존경심은 매우 커서, 중요한 문제가 논의될 때면 눈이 먼 티몰레온이 회의에 불려가 자신의 의견을 말했고, 그의 의견은 대개 받아들여졌다.[8]

티몰레온은 장대한 카르타고 전쟁을 제압하고, 참주를 도왔던 이탈리아의 실력자 마메르쿠스를 사로잡는 등, 민주정 확립에 매달렸다. 부흥에도 더욱 힘을 쏟아, 참주 시대를 떠올리지 않도록 요새 등도 모두 분쇄했다. 참주 정치를 타파하고 카르타고를 몰아내 평화를 가져온 그의 위대한 공적은 시칠리아 전역에서 칭송받았으며, 티몰레온이야말로 시칠리아 도시들의 진정한 건국자라고 칭송받게 되었다. 그 영광으로 티몰레온은 참주보다 더 큰 절대적인 권력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티몰레온은 스스로 참주가 되는 것을 좋게 여기지 않아, 시라쿠사에서의 전권을 일찍이 포기하고 정계에서 은퇴했다. 그 후, 한 시민으로서 여생을 시라쿠사에서 보냈다. 은퇴 후에도 그의 권위는 사라지지 않고, 그의 조언과 의견은 가장 존중받았다. 사후, 티몰레온은 티몰레온테움이라고 불리는 체육관에 공비로 매장되었고, 시칠리아 전역의 사람들이 장례식에 참석했다. 그는 시라쿠사 시민들의 비용으로 매장되었으며, 그들은 시장에 그의 기념비를 세웠고, 나중에 그것은 주랑과 티몰레온테움이라고 불리는 체육관으로 둘러싸였다.

5. 평가

티마이오스는 티몰레온을 높이 평가했지만, 과두정적 성향의 역사가 폴리비우스는 티마이오스가 티몰레온에게 편향되었다고 비판했다. 많은 현대 역사가들은 폴리비우스의 견해에 동의하는 편이다.[9] 피터 그린은 이러한 회의론에 동의하면서도, 티몰레온이 민주주의의 외형을 유지하려 노력했고, 시라쿠사를 민주주의적으로 개혁했으며, 과거 폭군들에게 유용했던 섬의 요새를 파괴했다는 점을 들어 그 회의론이 지나치다고 평가한다.[10]

티몰레온은 평생 동안 자유와 법치주의를 옹호했다. 근거 없는 이유로 법정에 소환되었을 때도 면제를 거부하며, 모든 시라쿠사 시민들이 법에 호소하고 자신의 법적 권리를 자유롭게 행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자신이 오랫동안 노력하고 싸운 목적이라고 말했다.[4]

역사가 조지 그로트는 크리미소스 전투 승리 3년 후 티몰레온의 장례식에서 시라쿠사 시민들이 다음과 같이 평가한 것에 동의한다:[4]

> 시라쿠사 시민들은 200 미나의 비용으로 이 사람의 장례를 엄숙하게 치른다… 그들은 그를 영원히 기리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그는 폭군을 몰아내고, 외적을 제압하고, 파괴된 도시들 중 가장 큰 도시를 재건했기 때문에, 시칠리아 그리스인들에게 그들의 헌법과 법률을 되돌려주었다.

5. 1. 민주주의 옹호

티마이오스(Timaeus)는 그의 저서에서 티몰레온을 높이 평가했다. 하지만, 분명한 과두정적 성향을 가진 역사가 폴리비우스는 티몰레온에 대한 편향성을 이유로 티마이오스를 비판했고, 많은 현대 역사가들이 폴리비우스의 편을 들었다.[9] 피터 그린은 이러한 회의론에 동의하지만, 그 회의론이 너무 심하다고 생각한다. 그는 티몰레온이 폭군의 수법(비록 자비롭게)을 사용하면서 민주주의자를 자처하는 경향이 있었음을 인정하면서도, 티몰레온이 민주주의의 외형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시라쿠사를 민주주의적 방향으로 개혁했고, 과거 폭군들에게 매우 유용했던 섬의 요새를 파괴했다고 지적한다.[10]

티몰레온의 평생에 걸친 개인적인 행동은 자유와 법치주의에 대한 헌신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근거 없는 이유로 법정에 소환되었을 때, 그는 면제를 거부하며, 이것이 "그가 오랫동안 노력하고 싸운 정확한 목적, 즉 모든 시라쿠사 시민들이 법에 호소하고 자신의 법적 권리를 자유롭게 행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4]

역사가 조지 그로트는 크리미소스 전투 승리 3년 후 티몰레온의 장례식에서 시라쿠사 시민이 다음과 같이 평가한 것에 전적으로 동의한다:[4]

> 시라쿠사 시민들은 200 미나의 비용으로 이 사람의 장례를 엄숙하게 치른다… 그들은 그를 영원히 기리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그는 폭군을 몰아내고, 외적을 제압하고, 파괴된 도시들 중 가장 큰 도시를 재건했기 때문에, 시칠리아 그리스인들에게 그들의 헌법과 법률을 되돌려주었다.

5. 2. 외세 극복

시라쿠사의 폭군 시라쿠사의 디오니시우스 1세와 그의 아들의 폭정, 내부 갈등, 그리고 카르타고와의 분쟁으로 인해 시라쿠사는 쇠퇴했다. 이에 시라쿠사 시민들은 기원전 344년경 모도시인 코린토스에 도움을 요청했다.[6] 코린토스는 돕기로 결정했지만, 코린토스의 주요 시민들은 혼란스러운 시라쿠사에 안정적인 정부를 세우는 어려운 임무를 맡기를 꺼렸다.

이때, 티몰레온이 코린토스 민회에서 지명되어 만장일치로 임무를 맡게 되었다. 그는 7척의 배와 소규모 부대를 이끌고 시칠리아로 가서, 기원전 344년 타우로메니움(현재의 타오르미나)에 상륙하여 우호적인 환영을 받았다.[5] 당시 레온티니의 폭군 레온티니의 히케타스는 시라쿠사의 디오니시우스 2세가 점령한 오르티기아 섬을 제외한 시라쿠사를 지배하고 있었다.

히케타스는 아드라눔에서 티몰레온에게 패배하고 시라쿠스로 후퇴했다. 티몰레온은 코린토스와 그리스 북서부 국가들로부터 증원을 받았다.[5] 시라쿠사 포위전 이후, 디오니시우스 2세는 기원전 343년에 오르티기아를 항복하고 코린토스에서 여생을 보냈다.

히케타스는 카르타고로부터 6만 명의 지원군을 받았지만, 결국 항복하고 티몰레온은 시라쿠사의 지배자가 되었다. 그는 재건 사업을 시작하여 폭군들의 요새를 파괴하고 법정을 세웠다. 또한 그리스 전역에서 새로운 정착민들을 데려와 민주 정부를 재건했다. 시라쿠사의 디오클레스의 민주적인 법률을 바탕으로, 올림피아 제우스(ἀμφίπολος Διὸς Ὀλυμπίουgrc)의 ''암피폴로스'' 또는 사제[7]가 최고 행정관으로 임명되었다. 티몰레온의 개혁은 아우구스투스 시대까지 영향을 미쳤다.

히케타스는 카르타고에 7만 명의 대군 파견을 요청했고, 이들은 릴리바이움(현재의 마르살라)에 상륙했다 (기원전 340-339년). 티몰레온은 약 12,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서쪽으로 행군하여 셀리누스 인근에서 크리미소스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 승리는 카르타고 군대가 강을 다 건너지 못한 상황에서 티몰레온의 소규모 부대가 카르타고 군대의 정예 부대와 싸울 수 있었고, 폭풍이 카르타고 군대의 시야를 가린 덕분이었다.

이후 카르타고는 용병을 파견하여 티몰레온과 그리스 폭군들 사이의 분쟁을 연장하려 했으나, 히케타스가 패배하고 처형당하면서 실패했다. 기원전 338년, 카르타고는 할리쿠스(플라타니) 강 서쪽으로 세력을 제한하고 시칠리아 폭군을 돕지 않겠다는 조약을 체결했다.[8] 이 조약으로 시칠리아의 그리스인들은 수년간 평화, 번영, 법치, 카르타고로부터의 안전을 회복했다.

티몰레온은 평생 동안 자유와 법치주의를 옹호했다. 그는 근거 없는 법정 소환에도 면제를 거부하며, 모든 시라쿠사 시민들이 법에 호소하고 자신의 법적 권리를 자유롭게 행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자신이 오랫동안 노력하고 싸운 목적이라고 말했다.[4]

크리미소스 전투 승리 3년 후 티몰레온의 장례식에서 시라쿠사 시민은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4]

> 시라쿠사 시민들은 200 미나의 비용으로 이 사람의 장례를 엄숙하게 치른다… 그들은 그를 영원히 기리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그는 폭군을 몰아내고, 외적을 제압하고, 파괴된 도시들 중 가장 큰 도시를 재건했기 때문에, 시칠리아 그리스인들에게 그들의 헌법과 법률을 되돌려주었다.

5. 3. 역사적 의의

티마이오스는 그의 저서에서 티몰레온을 높이 평가했다. 하지만, 과두정적 성향을 가진 역사가 폴리비우스는 티몰레온에 대한 편향성을 이유로 티마이오스를 비판했고, 많은 현대 역사가들은 폴리비우스의 편을 들었다.[9] 피터 그린은 이러한 회의론에 동의하지만, 그 회의론이 너무 심하다고 생각한다. 그는 티몰레온이 폭군의 수법(비록 자비롭게)을 사용하면서 민주주의자를 자처하는 경향이 있었음을 인정하면서도, 티몰레온이 민주주의의 외형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시라쿠사를 민주주의적 방향으로 개혁했고, 과거 폭군들에게 매우 유용했던 섬의 요새를 파괴했다고 지적한다.[10]

티몰레온의 평생에 걸친 개인적인 행동은 자유와 법치주의에 대한 헌신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근거 없는 이유로 법정에 소환되었을 때, 그는 면제를 거부하며, 이것이 "그가 오랫동안 노력하고 싸운 정확한 목적, 즉 모든 시라쿠사 시민들이 법에 호소하고 자신의 법적 권리를 자유롭게 행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4]

역사가 조지 그로트는 크리미소스 전투 승리 3년 후 티몰레온의 장례식에서 시라쿠사 시민이 다음과 같이 평가한 것에 전적으로 동의한다:[4]

> 시라쿠사 시민들은 200 미나의 비용으로 이 사람의 장례를 엄숙하게 치른다… 그들은 그를 영원히 기리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그는 폭군을 몰아내고, 외적을 제압하고, 파괴된 도시들 중 가장 큰 도시를 재건했기 때문에, 시칠리아 그리스인들에게 그들의 헌법과 법률을 되돌려주었다.

참조

[1] 간행물 Timoleon and the Reconstruction of Syracuse https://www.jstor.or[...] 1942
[2] 간행물 The Purpose of Timoleon's Mission https://www.jstor.or[...] 1949
[3] 간행물 Timoleon's Mission to Sicily and its Political Background https://www.jstor.or[...] 1960
[4] 서적 History of Greece, Vol. 11
[5] 서적 Who's Who in the Classical World Oxford Paperback Reference
[6] 문서 History of Greece
[7] 문서 a)mfi/polos
[8] 문서 Historians' History of the World
[9] 문서 Alexander to Actium
[10] 문서 Alexander to Actium
[11] 문서 コウネリウス・ネポス『英雄伝』
[12] 문서 1954
[13] 문서 1911
[14] 문서 HISTORY OF GREECE
[15] 문서 Historians History of the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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