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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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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계사는 '물줄기를 잡는다'는 의미를 가진 사찰로, 대구광역시 동구 팔공산에 위치해 있다. 창건 설화에 따르면, 아홉 갈래의 물줄기를 모아 저수지를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조선 시대에는 숙종과 현응 대사의 인연으로 영조의 탄생과 관련된 이야기가 전해지며, 숙종은 파계사에 기영각을 세워 선대 왕들의 위패를 모시게 하고 사찰의 권위를 높였다. 주요 전각으로는 관세음보살을 모신 원통전, 진동루, 기영각, 응진전, 산령각, 적묵당, 설선당 등이 있으며, 영조임금 나무와 현응대사 나무와 같은 유서 깊은 시설도 존재한다. 문화재로는 보물 제992호 대구파계사건칠관음보살좌상및복장유물, 보물 제1214호 파계사영산회상도, 중요민속자료 제220호 영조대왕의 도포 등이 있다. 대구 도시철도 1호선 아양교역에서 버스를 이용하여 접근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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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계사 - [지명]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파계사 원통전
파계사 원통전
사찰 이름파계사
건립 연대남북국시대 804년(통일신라 애장왕 5년)
창건자심지왕사
종파대한불교 조계종
본존관세음보살
별칭영조대왕의 원찰
소재지대구광역시 동구 파계로 741
문화재
지정 문화재대구파계사건칠관음보살좌상및복장유물(보물 제992호)
파계사영산회상도(보물 제1214호)
영조대왕의 도포(중요민속자료 제220호)
추가 정보
설명팔공산 파계사

2. 역사

2. 1. 창건 설화 및 초기 역사

파계(把溪)는 '물줄기를 잡는다'란 의미이다. 파계사 주위에는 물줄기가 9군데에 흐르고 있었다. 땅의 기운이 흩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저수지를 파서 물줄기를 한 곳으로 모았다.[8] 현재도 저수지가 있는데, 면적은 크지 않지만 워낙 깊어 저수지가 검게 보일 정도이다.[8] 파계사라는 이름의 유래가 된 절 좌우편의 아홉 계곡 물줄기를 한 곳으로 모은 유서 깊은 곳이다. 골짜기에 좁은 댐처럼 쌓은 못(저수지)이라서, 얕아보여도 갑자기 수심이 최대 12미터로 깊어지니 절대 들어가면 안된다.[8]

2. 2. 조선시대

조선시대에는 숭유억불 정책으로 인해 사찰 운영에 어려움을 겪었다. 파계사의 승려들은 양반들에게 불려가 고된 노역을 해야 했고, 제대로 수행을 할 수 없었다. 이에 파계사의 현응대사가 숙종에게 탄원하기 위해 서울로 갔다.

현응대사는 3년 동안 남대문 근처에서 잡일을 하며 국왕을 만날 기회를 엿보았지만, 쉽지 않았다. 그러던 중 숙종이 남대문에서 용이 승천하는 꿈을 꾸었고, 현응대사를 만나게 되었다. 현응대사는 숙종에게 불교를 탄압하면 나라에 큰 인물이 나지 않는다고 호소하며, 세자를 얻기 위한 기도를 제안했다.

현응대사는 삼각산의 농상스님과 함께 100일 기도를 올렸는데, 숙종에게는 아들이 없음을 알고 농상스님에게 숙종의 아들로 환생할 것을 권했다. 농상스님은 환생하여 영조가 되었다.

숙종은 이에 대한 고마움으로 파계사 주위 40리 토지의 세금을 모두 주겠다고 하였으나, 현응대사는 이를 사양하고 선대왕들의 위패를 모시게 해달라고 청했다. 숙종은 파계사에 기영각을 세워 선대왕들의 위패를 모시게 하고, 하마비를 세워 사찰의 권위를 높였다. 이후 양반들은 파계사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17세기 (조선 숙종 시기)에 크게 중건되었으며, 현존하는 전각 대부분이 이때 중수되었다.

2. 3. 근현대

1979년 6월, 파계사 원통전(금당)에 있는 관음보살상의 개금불사를 진행하던 중, 영조가 실제 착용했던 도포가 발견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왕의 위패가 서울로 옮겨지기도 했다. 여러 차례 보수 공사를 거쳐 현재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3. 주요 전각 및 시설

3. 1. 원통전 (관음전)



원통전은 관세음보살을 모시는 전각으로, 파계사의 금당이다. 관음전이라고도 한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1605년(선조 38년)에 계관 법사에 의해 중건되었고, 1695년(숙종 21년)에 다시 수리되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양식으로 가구식 기단 위에 자연석을 그대로 주춧돌로 활용하여 둥근기둥을 올렸다. 내부 불단은 은해사 백흥암의 수미단과 같은 형태로, 불단 상부에 보개가 설치되어 있다. 전각 앞에는 당간지주와 석등이 좌우로 배치되어 있다.

3. 2. 진동루

파계사는 9갈래로 흩어진 물줄기를 모은다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다. 진동루는 파계사라는 이름만으로도 9줄기 물의 기를 진압하기에 부족하다고 하여 지어진 건물이다.[4]

조선 숙종 41년(1715년)에 처음 지어졌고, 1970년과 1976년에 두 차례 보수되었다.[4]

3. 3. 기영각



기영각은 조선시대 왕의 위패를 모시기 위해 특별히 세워진 당우이다. 중앙에 주불을 중심으로 왼쪽에 숙종, 영조, 정조의 위패가 모셔져 있고, 오른쪽에는 파계사의 창건주 심지왕사, 대공덕 중창주 계관법사, 중흥조 현응당 영원대사의 위패가 있다.

건물 외벽에는 숙종과 현응대사의 설화를 그린 벽화 4점이 있다.

1910년 국권강탈로 왕의 위패는 서울로 옮겨졌다. 건물은 숙종 35년(1696년)에 성전암과 함께 건립되었다고 전하며, 1974년과 1983년에 두 차례 보수 공사가 이루어졌다.

건물은 화강석으로 바른층 쌓기를 해 쌓은 기단 위에 정면 3칸, 후면 2칸 규모로 겯처마를 한 팔작지붕을 얹었다. 주심포계 양식을 보이면서 주두와 장식이 번잡하게 발달한 조선 후기의 공포 양식을 보여주는 좋은 예로 꼽힌다. 상부의 가구는 5량가인데도 우물천장으로 가렸다.

3. 4. 응진전



응진전은 석가모니불과 그 제자인 나한을 모시고 있는 파계사의 전각이다. 정면으로 보았을 때, 주불로 중간에 석가모니불이 있고, 왼쪽에 보현보살과 오른쪽에 문수보살이 있다. 나머지 공간에는 표정과 자세가 다양한 16명의 나한을 모시고 있다.

3. 5. 산령각



파계사 산령각은 전통 민간신앙이 불교에 알맞게 조화되어 나타난 전각 중 하나이다. 창건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1976년 중건하고 1979년에 보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5]

3. 6. 적묵당



파계사의 전승에서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 애장왕 당시 파계사를 지을 때 함께 지어졌다고 한다. 조선 광해군 12년(1620년)에 지어졌다는 기록도 있다.

여느 전각들과 마찬가지로 숙종 때인 1695년에 중건되었다. 1920년에 중창되었으며, 1976년에 기와를 다시 잇는 공사가 있었다.

원통전 왼쪽에서 설선당과 마주보고 있는 'ㄱ'자 형태의 건물로, 조선 후기의 건축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건물은 정면과 측면이 모두 6칸으로 앞면만 겹처마를 한 팔작지붕이다.

3. 7. 설선당

인조 1년(1623년)에 계관에 의해 지어졌다. 1646년과 1725년, 두 차례에 걸쳐 재건되고 1762년 지붕을 다시 잇는 공사가 있었다.

1976년에는 대대적인 보수공사가 이루어졌다. 현재 식당과 강습소로 쓰이고 있다.

3. 8. 기타 시설



파계사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250년 된 느티나무는 영조의 이름을 따서 영조임금 나무라고 이름 붙였다.[6]

파계사를 크게 중흥한 현응대사가 나무 지팡이를 꽂아서 자랐다는 전설이 있는 나무가 매표소로 올라가는 길가에 있었다. 1982년 10월 30일에 수령 300년 된 보호수로 지정했으나, 호우와 강풍으로 밑동만 남게되어 2020년 8월 18일에 보호수에서 해제되었다.[7]

파계사라는 이름의 유래가 된 절 좌우편의 아홉 계곡 물줄기를 한 곳으로 모은 유서 깊은 곳에는 골짜기에 좁은 댐처럼 쌓은 못(저수지)이 있다. 얕아보여도 갑자기 수심이 최대 12미터로 깊어지니 절대 들어가면 안된다.[8]

4. 문화재

wikitable

종목명칭시대지정일비고
보물 제992호대구파계사건칠관음보살좌상및복장유물조선1989.04.10
보물 제1214호파계사영산회상도조선1995.01.10
중요민속자료 제220호영조대왕의 도포조선1987.11.23



```

대한민국의 보물 제992호인 대구파계사건칠관음보살좌상및복장유물과 대한민국의 보물 제1214호인 파계사영산회상도는 조선시대에 만들어졌다.

영조대왕의 도포가 중요민속자료 제220호로 지정되어 있다.

4. 1. 보물

대한민국의 보물 제992호인 대구파계사건칠관음보살좌상및복장유물과 대한민국의 보물 제1214호인 파계사영산회상도는 조선시대에 만들어졌다.

4. 2. 중요민속자료

영조대왕의 도포가 중요민속자료 제220호로 지정되어 있다.

5. 교통

대구 도시철도 1호선 아양교역에서 101번, 101-1번 버스를 이용할 수 있다. 칠곡3번 버스는 1일 2회 파계사 입구까지 운행된다. 종점은 팔공산 순환도로변 파계삼거리 파계사입구 주차장에 있다.

참조

[1] 웹사이트 Pagyesa Temple, South Korea http://www.thesouthk[...]
[2] 간행물 파계사 (把溪寺) https://encykorea.ak[...] Academy of Korean Studies 2024-06-27
[3] 웹인용 4일부터 조계종 산하 사찰 문화재 관람료 면제 https://www.korea.kr[...] 문화체육관광부 2023-05-02
[4] 서적 파계사 진동루 안내판 2023-06-16
[5] 서적 산령각 앞 안내판 2023-09-13
[6] 서적 파계사 진동루 앞 마당에 있는 표지판 2023-06-16
[7] 서적 현응대사 나무 표지판 2023-06-16
[8] 서적 파계사 못 안내판 2023-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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